최근 수정 시각 : 2024-12-04 16:09:10

훈요 10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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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원문 · 언해
2.1. 머리말2.2. 제1조[其一曰]2.3. 제2조[其二曰]2.4. 제3조[其三曰]2.5. 제4조[其四曰]2.6. 제5조[其五曰]2.7. 제6조[其六曰]2.8. 제7조[其七曰]2.9. 제8조[其八曰]2.10. 제9조[其九曰]2.11. 제10조[其十曰]2.12. 맺음말
3. 성격 및 여담
3.1. 불교에 관한 무분별한 사치 금지(제1·2·6조)3.2. 서경(평양) 중시(제5조)
4. 의견 및 논쟁
4.1. 제3조: 계승자 원칙에 관한 배경 추측4.2. 제4조: 거란을 적대한 이유 논쟁4.3. 제8조: '車峴以南, 公州江外'의 해석4.4. 날조설
4.4.1. 반론

1. 개요

훈요10조()는 고려 태조 왕건 왕자들을 위해 남긴 10가지 유훈(遺訓)이다. 고려사 세가: 태조 26년(943) 계묘년에 기록되어 있다.

2. 원문 · 언해

2.1. 머리말

○ 二十六年 夏四月 御內殿, 召大匡朴述希, 親授訓要, 曰 “朕聞, 大舜耕歷山, 終受堯禪, 高帝起沛澤, 遂興漢業. 朕亦起自單平, 謬膺推戴. 夏不畏熱, 冬不避寒, 焦身勞思, 十有九載, 統一三韓, 叨居大寶二十五年, 身已老矣. 第恐後嗣, 縱情肆欲, 敗亂綱紀, 大可憂也. 爰述訓要, 以傳諸後, 庶幾朝披夕覽, 永爲龜鑑.
▷ [왕건 재위] 26년(943) 여름 4월. 왕이 내전(內殿)으로 나가 대광(大匡) 박술희를 부른 다음 친히 「훈요(訓要)」를 내렸다. 말하기를, "짐이 듣건대, 위대한 순(舜)은 역산에서 밭을 갈다가 결국 에게 자리를 물려 받았고, 고조(高祖)는 패택에서 시작해서 마침내 한나라의 업을 일으켰다. 짐도 역시 단지 평범한 데서 시작하여 착오가 있었는 지 추대를 받아, 여름에는 더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겨울에는 추위를 피하지 않으면서 근심으로 몸을 애태운 지 19년 만에 삼한(三韓)을 통일했다. 외람되게도 큰 보물을 차지한 지 25년이 되니 몸은 이미 늙었도다. 다만 후손들이 마음내키는 대로 욕심을 부려 기강을 어지럽히고 무너뜨릴까 두렵구나. 이에 「훈요」를 지어 후대에 전하노니 아침에 펼쳐서 저녁까지 두루 보아 길이 귀감으로 삼기를 바라노라."

2.2. 제1조[其一曰]

첫째, 삼국통일의 위업이 모든 부처의 보호에 힘입었으니 불교를 잘 위할 것.
○ 其一曰,我國家大業,必資諸佛護衛之力,故創禪敎寺院,差遣住持焚修,使各治其業,後世,姦臣執政,徇僧請謁,各業寺社,爭相換奪,切宜禁之,
▷ 그 첫 번째로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대업(大業)[1]은 틀림없이 여러 부처께서 지켜주시는 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선종과 교종의 사원을 만들고는 사람을 보내 살면서 지키게 하고, 향불을 피우고 불도를 닦게 하여 각기 그 대업을 다스리게끔 하였으니, 훗날 간신이 정권을 잡아 돌아가며 중들이 청탁을 하여, 제각기 사원을 계승하면서 서로 주고받고 빼앗는 싸움을 벌이는 것을, 단연코 금지해야 한다.

2.3. 제2조[其二曰]

둘째, 제멋대로 을 더 창건하지 말 것.
○ 其二曰, 諸寺院, 皆道詵推占山水順逆而開創, 道詵云, '吾所占定外, 妄加創造, 則損薄地德, 祚業不永.' 朕念後世國王公侯后妃朝臣, 各稱願堂, 或增創造, 則大可憂也, 新羅之末, 競造浮屠, 衰損地德, 以底於亡, 可不戒哉?
▷ 그 두 번째로 말하기를, 모든 사원은 모두 도선(道詵)이 산과 물의 순역[2]을 헤아려 살펴 보고서는 시작한 것이다. 도선이 말하기를, '내가 자세히 살펴서 정한 이외에 함부로 더 창건한다면 척박한 지덕(地德)을 손상시켜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일(祚業)이 오래가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짐이 생각건대, 후세의 국왕·공후·후비·조정의 신하들이 각기 원당[3]이라 말하면서 행여나 더 창건한다면 크게 근심스러울 것이다. 신라의 말기에 부도(浮屠)[4]를 앞다투어 짓다가 지덕을 손상시켜 내부에서 망하였으니, 경계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2.4. 제3조[其三曰]

셋째, 왕위 계승은 적자적손(嫡者嫡孫)을 원칙으로 하되 장자가 자격이 없을 때에는 인망 있는 자가 대통을 이을 것.
○ 其三曰,嫡子嫡孫,傳國傳家,雖曰常禮,然丹朱不肖,堯禪於舜,實爲公心,凡元子不肖者,與其次子,次子皆不肖者,與其兄弟之中,群下推戴者,俾承大統,
▷ 그 세 번째로 말하기를, 적자(嫡子)·적손(嫡孫)에게 나라를 전하고 집안을 전하는 것이 비록 평상시의 예법이라고들 말하지만, (요의 아들) 단주가 못나고 어리석었으므로 요는 순에게 물려주었으니, 실로 공정한 마음이라 생각한다. 무릇 맏아들이 못나거든 그 다음 아들에게 주고, 다음 아들들이 모두 못나거든 그 형제 중에서 뭇 신하들이 추대하는 자에게 주어, 대통(大統)을 계승하게 하라.

2.5. 제4조[其四曰]

넷째, 당나라 풍속을 억지로 따르지 말고 거란의 풍속을 배격할 것.
○ 其四曰,惟我東方,舊慕唐風,文物禮樂,悉遵其制,殊方異土,人性各異,不必苟同,契丹,是禽獸之國,風俗不同,言語亦異,衣冠制度,愼勿效焉,
▷ 우리 동방(東方)은 옛날부터 당나라의 풍속[唐風]을 흠모 하여 문물(文物)과 예악(禮樂)이 다 그 제도를 따랐으나, 지역이 다르고 인성(人性)도 각기 다르므로 꼭 같게 할 필요는 없다. 거란(契丹)은 짐승과 같은 나라로 풍속이 같지 않고 말도 다르니 의관제도(衣冠制度)를 삼가 본받지 말라."

2.6. 제5조[其五曰]

다섯째, 서경(西京, 평양시)을 중시할 것.
○ 其五曰,朕賴三韓山川陰佑,以成大業,西京水德調順,爲我國地脉之根本,宜當四仲巡駐,留過百日,以致安寧,
▷ 그 다섯 번째로 말하기를, 짐은 삼한(三韓) 산천의 드러나지 않는 도움을 받아 대업을 성취하였다. 서경( 평양)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地脈)의 근본이 되니, 사중[5]마다 행차하여 100일이 지나도록 머물러 나라의 안녕을 이루도록 하라.

2.7. 제6조[其六曰]

여섯째, 연등회(燃燈會)· 팔관회(八關會) 등의 중요한 행사를 소홀히 다루지 말 것.
○ 其六曰,燃燈,所以事佛,八關,所以事天靈及五嶽名山大川龍神也,後世姦臣,建白加減者,切宜禁止,吾亦當初,誓心會日,不犯國忌,君臣同樂,宜當敬依行之,
▷ 그 여섯 번째로 말하기를, 연등(燃燈)은 부처님을 섬기는 것이고, 팔관(八關)은 '하늘의 신령'과 '오악 명산과 큰 강의 용신(龍神)'을 섬기는 것이다. 훗날 간신이 더하거나 줄이자고 건의하는 자가 있으면 단연코 금지해야 한다. 나 역시 애당초 마음에 맹세하기를, 모이는 날은 나라의 제삿날[6]을 범하지 않으며 임금과 신하가 함께 즐기기로 하였으니, 공경스러이 이를 따라 행해야 한다.

2.8. 제7조[其七曰]

일곱째, 왕이 된 자는 쓴 충고에 귀 기울이고 아첨은 멀리하며, 백성들의 민심을 얻을 것.
○ 其七曰,人君,得臣民之心,爲甚難,欲得其心,要在從諫遠讒而已,從諫則聖,讒言如蜜,不信則讒自止,又使民以時,輕徭薄賦,知稼穡之艱難,則自得民心,國富民安,古人云,芳餌之下,必有懸魚,重賞之下,必有良將,張弓之外,必有避鳥,垂仁之下,必有良民,賞罰中,則陰陽順矣,
▷ 그 일곱 번째로 말하기를, 임금이 신하와 백성의 마음을 얻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다. 그 마음을 얻고자 한다면 요컨대 간(諫)[7]하는 말을 따르고 참소[8]를 멀리하는 것에 있을 따름이니, 간하는 말을 따르면 성스럽게 되고, 참소는 꿀과 같으나 믿지 않으면 저절로 그치게 된다. 또한 백성을 시기에 맞추어 부리고 부역을 가볍게 하며, 납세를 적게 해 주고 농사의 어려움을 알아 준다면, 저절로 민심을 얻어 나라가 부유하고 백성이 편안해질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향기로운 미끼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물고기가 매달려 있고, 상을 중하게 주는 곳에는 반드시 훌륭한 장수가 있으며, 활을 당기는 앞에는 반드시 새들이 피해감이 있고, 사랑을 베푸는 곳에는 반드시 선량한 백성이 있다'고 하였으니, 상벌이 들어맞으면 음양이 순조로울 것이다.

2.9. 제8조[其八曰]

여덟째, 차현(車峴) 이남 공주강(公州江) 밖은 산형지세(山形地勢)가 배역(背逆)하니 그 지방의 사람을 등용하지 말 것.
○ 其八曰, 車峴以南, 公州江外, 山形地勢, 並趨背逆, 人心亦然. 彼下州郡人, 參與朝廷, 與王侯國戚婚姻, 得秉國政, 則或變亂國家, 或𠾑[9]統合之怨, 犯蹕生亂. 且其曾屬官寺奴婢, 津驛雜尺, 或投勢移免, 或附王侯宮院, 姦巧言語, 弄權亂政, 以致災變者, 必有之矣. 雖其良民, 不宜使在位用事.
▷ 그 여덟 번째로 말하기를, 차현 이남 공주[10] 강 바깥은 산의 형태와 땅의 기세가 등지고 거슬러서 나란히 달려나가니 인심 역시 그러하다.[11] 그 밑에 있는 주군(州郡) 사람들이 조정에 들어와 종친이나 외척과 혼인하여 국정을 잡게 되면 혹여 국가의 변란을 일으킬 수도, 혹여 통합당한 원한으로 임금을 시해하려는 난(亂)[12]을 일으키기도 할 것이다. 또 과거 관청에 예속된 노비와 진(津)과 역(驛)의 잡척[13]들이 권세가들에 아부해 신분을 바꾸거나 요역을 면제받기도 할 것이며, 종실이나 궁원(宮院)에 빌붙어 간교한 말로 권세를 농락하고 정사를 문란케 하여 재앙을 일으키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비록 그가 양민(良民)이라 하더라도 관직에 올려 일을 맡겨서는 안 될 것이다.

2.10. 제9조[其九曰]

아홉째, 모든 관료의 녹봉을 제도에 따라 공적으로 정해줄 것.
○ 其九曰,百辟群僚之祿,視國大小,已爲定制,不可增減,且古典云,以庸制祿,官不以私,若以無功人,及親戚私昵,虛受天祿,則不止下民怨謗,其人,亦不得長享福祿,切宜戒之,又以強惡之國爲隣,安不可忘危,兵卒,宜加護恤,量除徭役,每年秋,閱勇銳出衆者,隨宜加授,
▷ 그 아홉 번째로 말하기를, 여러 제후들과 뭇 관료들의 녹봉[14]은 나라의 크기에 따라 이미 제도가 정해져 있으니 늘이거나 줄여서는 안 된다. 또 고전에 '공로에 따라 녹봉을 규정하고, 관직과 작위는 사사로운 정으로 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만약 공이 없는 사람인데도 친척이나 사적으로 친분 있는 사람들이 헛되이 하늘의 녹봉[15]을 받게 된다면, 아래로는 백성들의 원망과 비방이 그치지 않고 또한 복된 녹봉을 길게 누리지 못할 것이니, 단연코 경계해야 한다. 또 강하고 악한 나라가 이웃하고 있으니 편안한 때에도 위태로움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병졸은 더 보살피고 도와줘서 이를 헤아려서 부역을 덜어주어야 하며, 매년 가을에는 용맹하면서 민첩함이 뛰어난 자들을 가려내어 즉시 벼슬을 올려주어야 한다.

2.11. 제10조[其十曰]

열째, 널리 경전과 역사서( 사기, 史記)를 보아 지금을 경계할 것.
○ 其十曰,有國有家,儆戒無虞,博觀經史,鑑古戒今,周公大聖,無逸一篇,進戒成王,宜當圖揭,出入觀省.
▷ 그 열 번째로 말하기를, 나라가 있고 집안이 있으면 '근심이 없는 것'을 경계하여야 하니, 널리 경전과 역사서(史記)를 보게 하여 옛 것을 거울삼아 오늘날을 경계하라. 대(大) 성인이신 주공(周公)께서도 '무일(無逸: 게으르지 않음)' 한 편을 성왕(成王)에게 올려 경계하도록 하였으니, 마땅히 그림을 벽에 걸어서 출입시에 보고 반성케 해야 한다.

2.12. 맺음말

○十訓之終,皆結以中心藏之四字,自是嗣王,相傳爲寶。
▷열가지 훈요의 끝마다 모두 '마음속에 이를 간직하라(中心藏之)'는 네 글자로 끝을 맺었다. 이로부터 왕위를 이은 왕들이 서로 전하여 보배로 삼았다.

3. 성격 및 여담

  • 훈요 10조를 간단히 말하자면 고려국왕의 행동 지침서쯤 되겠다. 그러나 몇몇 당연한 말들을 제외하면 훈요 10조의 대부분 항목은 끝까지 지켜지지 못했다. 정확한 이름은 훈요(訓要)이며 후대에 첨삭되어 십조인지 원래부터 십조인지는 알 수가 없다.
  • 제10조에서 왕건은 각 훈계의 말미에 중심장지(中心藏之, 마음 속에 간직할 것)라는 말을 붙이게 해서 반드시 이것을 지킬 것을 상기시키게 했다고 한다. 사망 직전에 최측근이었던 재상 박술희를 불러 이를 전수하고 천수를 마쳤다.

3.1. 불교에 관한 무분별한 사치 금지(제1·2·6조)

훈요 10조 제1조 때문인지는 몰라도 을 새로 만드는 것이 고려 신라 때보다는 비교적 줄어들긴 했는지,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8년 5월 11일 기사를 보면 연산군이 새로운 사찰 창건은 고려 때가 많았는지 신라 때가 많았는지 물어보는데 이극균은 신라 때가 더 많이 생겼다고 답한 적이 있다. 저게 정확한 정보에 근거한 대답인지는 알 수 없으나, 왕(그것도 무려 연산군)의 질문에 일부러 잘못 답한다는 건 생각하기 어려우므로, 적어도 조선의 사대부들이 알고 있는 정보에 한해서는 불씨를 너무 믿어서 망했다는 고려도 신라보다는 사찰 창건이 적었다고 볼 수 있다.

제2조의 배경은 신라는 너무 절을 많이 지어 망했다면서 현재까지 세워진 절들은 모두 도선이 정한 것이므로 함부로 절을 더 짓지 말라는 것. 풍수지리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불교의 지나친 세력 확장을 경계하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고려사 최유선 열전엔 최유선이 제2조를 언급하며 문종에게 흥왕사 건설을 중단케 하기도 했다.

제6조는 제1조의 불교의 숭상과 맥을 함께 하는 유훈이다. 연등회 팔관회는 모두 불교와 관련된 행사들로, 왕건이 후대의 왕들에게 이러한 대규모 행사를 통해 백성들의 결속력을 높일 것을 권한 것이다.

왕건이 비록 고려를 다스리며 국가의 통치체계로 유교를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당시 대부분의 호족들은 독실한 불교 국가였던 신라에서 살던 사람들답게 자연스레 불자였다. 또한 당연히 대부분 일반 백성들도 불교를 매우 중요하게 받들었다. 불교는 이후 조선이나 현대 대한민국에 비교할 수 없이 일반인들의 생활 전반에 깊이 유착된 종교이자 문화였다. 따라서 국론과 백성들의 결집을 높이기 위해서는 불교를 중히 여겨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다만 후손인 성종 시절에는 일시적으로 널리 유학을 권장하고 불교 행사인 팔관회나 연등회 등을 폐지시켜 노골적으로 숭유억불 정책을 폈다. 물론 이는 중앙집권화와 관료 체제로 국가의 통치 체계를 다듬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불교를 믿는다고 탄압하는 일은 없었고, 성종 사후에 팔관회와 연등회는 곧 원상복구되었다.

그만큼 불교가 당시 고려에서 중요시되었다는 것이다. 오항녕은 '조선의 힘'에서 훈요 10조의 첫번째 조항이 불교에 대한 언급이며 마지막 조항이 유교에 대한 것임을 들어 유교보다 불교가 우선시되었던 고려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문구라고 보기도 했다.

그러나 불교가 중시되자 그만큼 불교계의 폐단은 눈 뜨고 못 볼 정도로 상당히 심각해졌고, 훗날 고려를 승계한 조선이 숭유억불을 국시로 삼는 제1근거가 되었다.

제6조에서 언급한 행사에 대해 성종이러한 행사는 그냥 돈놀음이다라며 깔끔하게 폐지시켜 버리고 일시적으로 숭유억불 정책을 펼치기도 했는데, 이는 다다음 현종 때에 가서 다시 부활되었다. 이때 현종에게 팔관회 부활을 건의하여 성사시킨 인물이 바로 최항이다. 당시 현종의 어린 나이를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팔관회를 부활시킨 인물이기 때문에, 훈요 10조 현종 측근 최항 조작설과 맞물려 최항이 훈요에 어느 정도 손을 대지 않았겠느냐며 의심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팔관회는 이후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다 조선 건국 직후에 폐지됐고, 연등회도 규모가 축소되는 등 난항을 겪었지만, 그래도 연등회는 지금까지 명맥을 잇고 있다.

사실 고려왕조나 조선왕조, 그리고 지금의 훈요 10조에서 실질적으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이 이 부분인데, 현재 유교계를 비롯한 다른 종교계는 현재에도 불교의 부패와 권력투쟁이 극심해지니 대체로 이것에 대해서 많은 돈×랄이라고 비판하고 있는 실정이고, 반면 불교계의 경우는 옹호론을 펼치고 있다. 예를 들어 유교계를 비롯한 다른 종교계는 성종의 불교 개혁과 조선왕조의 불교 개혁을 근거로 비판을 가하고 있으나, 불교계의 경우는 오히려 현종· 문종의 치세는 불교에 있다는 것이고, 또한 유교와 관련된 행사는 과거의 합격한 뒤 그 합격자들이 시험관을 스승으로 삼고 예의를 표하는 행사도 과거제의 지공거 행사와 다르지 않는 문화라고 한다.[16] 반면 2항의 근거를 들며 이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고 비판을 하고 있다. 대체로 고려의 경우는 불교 - 유교 - 도교 3교가 공존했기에 2항과 6항의 내용이 각각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에 대해서는 2항과 6항을 조합해 중간점을 찾으면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불교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이 조항을 싫어해서 2항을 따른다는 것이고, 좋아하는 사람은 이 조항을 따른다. 이는 대체로 이차돈의 논란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실은 불교계도 유불습합, 즉 유교+불교 사상이 섞인 불자들이나 초기 불교의 시각에선 많이 비판한다.

한편으로는 두 행사가 신라 진흥왕 때 시작된 행사고, 특히 팔관회는 동사강목 918년 팔관회 개최 기록에서 그 진행 방식과 행사 내용이 신라의 고사(故事)였다고 되어 있어서 이름만 같은 것이 아니라 신라의 팔관회를 세세한 부분들까지 거의 그대로 이어받아 개최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행사를 소홀히 하지 말 것을 유훈으로 당부하는 6번 조항은 앞서 고구려 계승성을 나타낸 5번 조항과 더불어 신라 계승 의지도 함께 나타낸 조항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3.2. 서경(평양) 중시(제5조)

제5조를 보면, 고려의 초기 왕들은 서경을 개경에 이은 제2수도처럼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는 고구려의 뒤를 이은 나라이니 고구려의 도읍이었던 서경(오늘날의 평양) 역시 고려의 수도인 개경에 못지 않게 여겨야 한다는 뜻이다. 왕건은 고려 왕조가 성립된 뒤 서경을 애지중지하며 화려하게 재건하는데 큰 공을 들였다. 왕건은 서경을 통하여 고구려의 뒤를 이었다는 정통성을 내세우는 동시에 서경을 북벌의 전진 기지로 삼으려고 했다는 것이 통설이다.[17] 이를 보면 거란 배격 정책과 마찬가지로 서경 중시 정책은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는 북진정책의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온갖 국가 중요 시설들이 서경에 건설되었고, 분사제도를 통해 서경에 개경의 정치체제와 유사한 독자적 정치체제가 구축되기도 하였다. 정종은 서경 천도를 하고자 시도했지만 무리한 계획이였고, 당시 백성들 및 신하들의 반발로 인해 실패했다. 이렇게 서경의 위세가 수도인 개경 만큼이나 높아지다보니 개경파와 서경파로 국론이 분열되는 부작용도 생겼다. 결국 묘청의 난과 조위총의 난을 거치면서 서경의 분사제도는 폐지되었다. 서경의 길함을 설명하면서 수덕을 언급한 것은 오덕종시설에 기반한 것이다.

4. 의견 및 논쟁

  • 제4조의 殊方異土 人性各異 不必苟同(수방이토 인성각이 불필구동). 즉, "나라가 다르고 사는 곳이 달라서 사람의 성품이 서로 다르니 구차하게 같게 할 필요가 없다"는 구절은, 훈민정음의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와 함께, 한국과 중국의 차이를 나타내는 매우 중요한 말이다.

4.1. 제3조: 계승자 원칙에 관한 배경 추측

우선 적자 적손에게 나라를 전하라는 구절은 장자였던 견신검을 무시하고 견금강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가 패가망신한 견훤의 전례를 직접적으로 보고 깨달았기에 내린 유훈인 듯 하다. 왕건 본인도 견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외가 가문의 세력이 별로 시원찮았던 장남 왕무를 정치 공작을 통해 후계자로 삼는데 성공하였다. 거기다 굳이 견훤의 예가 아니더라도 장자상속이 확립되지 못한 왕조의 운명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본다면 충분히 강조할 수 있는 부분이다.

문제는 적자적손 원칙을 밝힌 그 뒷부분에 요 임금이 사위 순 임금에게 왕위를 계승한 사례를 들며 '장남이 무능하면 그 이하 형제가 계승해도 좋다'고 해석될 만한 말을 덧붙였다는 점이다. 당연히 비판의 소지가 있는 부분으로, 이 조항 때문인지 고려는 삼국이나 발해· 조선 등 다른 왕조들과 비교해 유독 아들, 그 중에서도 장남을 내버려두고 동생들 중 한 명에게 왕위를 넘긴 사례가 많다.[18] 당장 위에서 언급한 대로 왕건 자신이 온갖 노력을 다해 겨우 왕위에 올린 혜종이 동생들인 정종 광종의 무자비한 왕권 도전에 시달린 끝에 왕위를 뺏기다시피 내줄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반란과 유혈사태들이 벌어진 것을 감안하면 안 붙이느니만 못하다란 악평이 있다.

하지만 이는 달리 생각해볼 만한 문제로, 이 "장자가 불초할 때~"의 문구는 아마 왕건이 붙이고 싶어 붙인 문구는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초기 고려는 왕건 개인의 카리스마와 친화력을 접착제 삼아 각지의 유력 호족들을 엉성하게 붙여놓은 형태의 국가였다. 고려 개국 1등공신 4명, 2등공신 7명인데, 3등공신은 수천 명이나 되는 것도 이 때문으로 고려 개국에 따른 각 지역 호족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였다.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이 온전히 그 지역을 다스리는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로 봐서 초기 고려는 후대의 조선은 커녕, 오히려 통일신라의 전성기 때보다도 퇴보했던 상태였다. 고려 초기의 호족은 조선시대 권력층처럼 관직이나 왕의 총애를 기반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식이 아닌 자신이 기반한 지역을 직접 통치하면서 형성한 세력[19]을 기반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즉, 사실상 군벌이라고 봐야 할 이런 호족들이 연대한다면 왕위찬탈은 물론이요 아예 국가 전복까지도 가능한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왕건이 괜히 부인을 29명을 둔게 아니다.

반론이 존재하긴 하지만 고려 초기 중앙 관제가 군사 - 행정 양 면에서 왕의 뜻을 받는 기관(내봉성 - 내의성과 병부)과 호족들의 의견을 전달하는 기관(광평성 - 순군부)으로 양분돼 있었다는 설이 유력하게 받아들여질 정도로 당시의 고려는 호족들의 발언권이 강력했다. 고려사(高麗史)가 조선 왕조의 입장에서 서술되다 보니 고려 왕에 대한 기록이 많고, 고려 신하들에 대한 기록은 대거 축소되었는데, 이는 중앙집권제가 완성된 조선 왕조의 시각이 반영된 것으로, 실제 고려에서 호족들은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왕건이 복잡한 혼인관계와 개인적인 친화력과 카리스마로 이를 연결시켜 놓았다해도 생전에야 별 문제가 없겠지만 자신의 사후에 그 연결이 유지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다 고려 왕조의 기반을 튼튼히하기 위해 장남인 혜종을 차기 후계자로 내정한 것도 왕건이 살아있을 당시엔 불만을 잠재울 수 있었겠지만, 왕건이 승하한 후엔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왕건은 혜종에게 후견인으로 문·무 양면에서 당시 최고위 신하였던 왕규 박술희를 붙여줄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유언으로까지 '장남만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라고 못박아버린다면 호족들이 어떤 심정일지는 굳이 길게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즉, 굳이 쓸데 없이 덧붙인 듯한 '장자가 불초할 때에는~'이란 문장은 후사 문제에 관해 왕건이 실시한 왕권 강화책에 불만을 가진 호족들을 달래기 위한 일종의 립서비스였다고도 볼 수 있다.

그 뒤의 역사 진행 과정을 모두 알고 있는 후세 사람들의 시선에서는 말도 안되는 짓이었다고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왕건의 입장에선 자신이 직접 혜종을 다음 왕으로 공인했고 거기에 보완책으로 왕규와 박술희라는 당시로선 최선의 후견인을 내세웠으며 혜종 본인도 전쟁터에서 활약한 능력있는 인물이었기에 이 정도면 왕요 왕소를 앞세운 호족들을 통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20]

따라서 이 정도로 호족들을 견제해놓은 상황에서 굳이 유훈인 훈요 십조에서까지 장자 계승을 못박는다면 호족들을 지나치게 압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왕건 본인의 예상으론 혜종이 왕위를 굳건히 지킬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므로 당시 호족을 달래기 위해 사족같은 둘째 이하가 계승 가능한 경우를 언급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상당 부분 실패로 돌아갔다.

피도 눈물도 없이 몰아치는 동생들을 냉정하게 처단하지 못한 혜종[21], 왕요 - 왕소 세력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외려 역적으로 몰려버린 왕규, 군권은 장악했지만 정치적 기반이 없었고 끝내 반란을 일으켰다가 자멸해버린 왕규와 연합하지도 못한 채 귀양지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박술희.[22]

후일 인종의 등극만 봐도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가 원 간섭기에서는 더욱 이 부분대로 지켜진 예가 드물었고, 공민왕이 조카 충정왕의 자리를 사실상 강탈하면서 다시금 발생했다.[23] 하지만 공민왕 또한 자신의 나이 어린 아들을 후계자로 사실상 못을 박았다.

4.2. 제4조: 거란을 적대한 이유 논쟁

거란을 짐승의 나라라고 한 이유는 당시 고려가 거란에 대해 맹렬한 적대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는 고구려의 뒤를 잇는다는 명분으로 세워진 국가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는 고구려 유민들이 주축이 되어 세운 나라인 발해를 침공하여 멸망시킨 거란을 원수처럼 여길 수밖에 없었다. 정작 고려가 발해의 멸망을 걍 방관했던 것을 감안하면 이런 고려의 적대 의식이 기이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고려가 발해의 멸망을 방관했던 것은 불가피한 이유가 있었다. 발해가 멸망할 당시 고려는 후백제와 최후의 맞다이를 앞둔 상태여서 원군을 보내 줄 여유도 없었던 데다, 발해가 망한 것도 겨우 보름만으로써 순식간이었는지라 시간적으로도 도움을 주는 것도 무리였기 때문이다.[24]

그러나 이런 적대 의식보다도 중요했던 것은 발해 유민들에 대한 포섭이었다. 발해 멸망 이후 수많은 유민들이 고려에 귀순했는데, 이들은 숫자도 엄청났던 데다 그 중에 왕족·귀족·고위군인 같은 엘리트 계층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고려의 국력을 급격하게 팽창시킬 수 있을 정도로 양질적으로 어마무시했던 인적자원이었던 까닭에 고려 조정은 이들을 어떻게든 포섭하고자 했다. 그래서 고려 조정이 이들을 후하게 대우해주는 것과 별개로 선택한 것이 이들의 반거란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이었다. 이들은 조국을 멸망시킨 거란을 맹렬히 증오하고 있었으므로 국가 차원에서 거란에 대한 적대의식을 보여주고 복수를 약속한다면 이들을 확실히 고려의 세력으로 편입시킬 수 있다는 것이 고려 조정의 계산이었다. 만부교 사건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는 정치적 퍼포먼스였다.

그러나 발해 유민들의 문제와 별개로, 고려 스스로도 거란과 적대할 이유들은 매우 많았다. 고려는 북진정책으로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 발해 멸망 이후 고구려의 고토를 점유하고 있었던 쪽은 거란족인 요나라였다. 즉, 장래에 고려가 거란과 서로 적국이 되어 영토분쟁을 벌일 것이 확실시되는 상황이었으므로 고려도 이미 거란에 대한 적대의식을 불태우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거란도 마찬가지여서 중원 진출 이전에 후방을 안정시키고 압록강 이남의 땅을 확보하기 위해 고려를 침공하려는 속셈을 숨기지 않았다. 결국 갈등이 점점 고조되던 양국은 후에 여요전쟁을 통해 마침내 충돌한다.

4.3. 제8조: '車峴以南, 公州江外'의 해석

"車峴 以南, 公州 江 外(차현이남 공주 강 외)"를 예전에 전라도를 폄하하려는 목적으로 고의적으로 왜곡한 글들이 많이 퍼졌었으나 한문 해석상 명백히 틀린 것이다. 차현은 차령고개가 있는 금북정맥 또는 최소한 차령고개를 뜻하고 이남은 해석상 정남향이 아니라 어느 정도 광역 개념이며, 공주의 '강'이라면 '천'이 아닌 금강 본류 전체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공주 기준에서 강 밖이면 북쪽이므로 아무리 못해도 차령고개가 위치한 북위 36.65도와 공주시가 위치한 북위 36.46도 사이에 해당하는 영역이며, 거기서 굳이 위협이 될만한 세력은 청주시 뿐이다. 즉, 청주 지역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왕건의 29명 부인들 중에 청주 출신이 단 한 명도 없어 8항에 나오는 혼사를 맺지 말라는 부분, 그리고 현재 충청북도 진천군(鎭川郡)의 당시 지명이 진주(鎭州)인데, 왕건이 핵심 측근들인 홍유, 유금필, 왕식렴 등을 이 지역으로 보내며 청주를 진압한다는 의미에서 진주(鎭州)라는 지명이 유래했다는 점에서 친궁예 반왕건 세력의 근거지인 청주(淸州)를 가리킨다는 것. 애초에 왕건은 전라도 나주 호족 가문 여식인 장화왕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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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현(車峴)'은 지금의 금북정맥(錦北正脈)의 한 지점에 해당하는 차령고개[25]로 보고, '공주 강 외(公州 江 外)'에 대해서 일각에서는 '공주 강 외(公州 江 外)'를 공주강 남쪽으로 해석하고, 충청남도 일부와 전라도로 해석하지만, '공주 강 외(公州 江 外)'를 공주강 위쪽 또는 북쪽으로 해석하는 걸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한다. 즉, '차령고개 이남과 공주강 사이의 지역'을 말한다는 것. 글자 그대로 해석할 경우 바로 위의 지도가 그것이다.

다만 이럴 경우 고려 초기에 저 지역에 큰 고을들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차현(車峴)을 차령고개가 위치한 금북정맥(錦北正脈)으로 보고, 또한 '공주강(公州江)'을 공주 위쪽 금강(錦江)으로도 해석하지만 역사적으로 '공주강(公州江)'이라는 강 이름은 쓰인 적이 없으므로 '공주강외(公州江外)'는 말 그대로 공주(公州) 지역 바깥을 흐르는 강을 말한다는 것. 즉, 금강(錦江)일 수도 있지만 금강의 제1지류이자 금강 최대 지류 하천인 미호천(美湖川)으로 보기도 한다. 즉 금북정맥 이남과 금강 또는 금강 지천 사이의 지역을 말한다는 것. 금강으로 보거나 미호천으로 보거나 두 경우 모두 충북 청주가 포함된다. 마침(?) 이 지역은 궁예 지지세가 강해 왕건의 혁명이 일어나자 반란이 빈발했다. 국정 역사교과서 고려사 부분 집필에 참여한 경기대학교 사학과 이재범 前 교수는 '공주강외(公州江外)'는 청주 미호천(美湖川)으로 봐야 한다고 하였다. 충북대학교 역사교육과 신호철 명예교수는 "궁예는 어려서 지방에서 숨어살게 되는데, 그곳이 청주로 추정되며, 청주는 궁예 세력의 온상 같은 곳"이라고 했다.

산과 땅의 형세가 배역하다는 것에 대해, 청주 - 조치원 - 증평 일대의 미호천 평야는 주변이 백두대간과 금북정맥 금남정맥 등의 산줄기로 완전히 둘러싸여 있어서,[26] 일단 반란이 일어나면, 수도인 개경이나 인근 지역에서도 감지나 진압이 어려웠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실제로 청주계 호족들이 왕건에 대한 불만을 품고 계속해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여러 사료들을 볼 때, 이 항목은 청주를 중심으로 한 '친 궁예 반 왕건 세력'을 조심하라는 권고로 보아야 한다. 8항에 나오는 왕을 시해하려는 난(亂)을 일으킨다는 부분은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의 태조로 즉위를 한 직후부터 약 1년 동안 환선길,[27] 이흔암,[28] 임춘길, 배총규, 청주수(靑州帥) 진선(陳瑄), 선장(宣長) 형제 등 왕건을 시해하려는 모반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고, 이들 주모 세력들의 출신지가 청주이거나 청주 인접 지역들로 왕건이 즉위 1년이 되어 맨 처음 방문한 곳이 청주였으니 왕건은 자신을 시해하려는 배후 세력의 근거지를 청주로 보고 회유하려 하였다. 『 고려사』에는 청주를 지목하여 首鼠順易, 즉 '쥐떼 우두머리로 반역의 기회만 노린다'며 왕건의 청주 순행 배경을 설명하였다. 그래도 귀부하지 않고 저항이 계속되자 928년에 청주를 다시 순행하고, 930년에도 또 다시 순행하였다. 이 때문인지 청주 지역과는 혼사를 맺지 않으면서도 인근 진천(鎭川) 즉, 당시 진주(鎭州)에서 왕건이 10번째 부인[29] 며느리를 얻고, 충주시(忠州市)에서 3번째 왕비 신명순성왕후를 얻음은 청주에 대한 견제정책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30] 다만, 실제로 점차 나라가 안정되고 친 궁예 - 반 왕건 풍조가 사라지자 후대 왕들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특히 차현의 해석을 두고 이제까지 차령산맥인지 아닌지 논의가 분분하였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훈요 10조상의 차현은 지리교과서 상의 차령산맥일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의 산맥은 지리학적 개념이 아니라 일제강점기부터 도입된 현대 지질학적 개념으로 겉으로 보이는 산줄기가 아니라 산줄기가 형성되는 지하의 일직선상의 지맥을 일컫는 말인데, 당연하게도 고려시대에 산 밑 지하의 지질학적 지맥을 파악했을 리도 없고, 왕건이 무슨 수로 20세기부터 도입된 차령산맥 개념을 알 수 있겠는가? 옛날 사람들은 당연히 겉으로 보이는 산줄기만으로 지형을 파악할 수밖에 없으니 차현의 범위를 넓게 잡는다 해도 산경표 상의 금북정맥으로 봐야 한다.

게다가 차령산맥은 20세기에나 들어서야 파악된 지하의 지질학적 직선형 지맥을 일컫는 말이지 겉으로 노출된 분수계를 일컫는 말이 아니다. 따라서 차현이 금북정맥일 수는 있어도 차령산맥일 수는 없다. 금북정맥 이남을 범위로 잡을 경우 충청도 북부 일대 역시 이에 포함된다. 특히 사료들을 검토해 보면 왕건은 과거 후백제의 잔당 혹은 옛 태봉 세력인 궁예의 친위세력으로, 새롭게 권력을 잡은 왕건 일파에 저항을 거듭한 청주 지방을 상당히 경계했음을 알 수 있다. '청주 사람들은 변심을 잘하므로…청주가 반칙(反側)을 할까 두려워…고려사 열전 견금전, 청주인이 변란을 일으킬까 두려워…고려사 태조 원년 무인년, 청주는 반역을 저지를지 말지 궁리하며 그릇된 언사를 많이하므로…고려사 태조 2년 기묘년'. 궁예가 철원군으로 도읍을 정할 때, 청주 민호 1천호(戶)가 철원으로 이주했을 만큼 친 궁예 지역이 바로 청주이기도 했다. '靑州人戶一千 入鐵圓城爲京… 삼국사기 궁예 열전'

요즘도 차령산맥을 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산맥을 넘는 줄도 모른다고 할 정도로 산맥 자체가 존재감이 없다. 결정적으로 2004년에서 2005년까지 국토연구원에서 인공위성 과학적인 기법을 이용하여 측정한 결과 산맥은 무슨, 지하에 있을 걸로 알았던 지맥이 애초에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1903년, 일본 출신의 '고토 분지로'[31]라는 학자가 인부 4명과 당나귀 6마리로 14개월 동안 한반도 산맥을 측정해서 산맥 체계를 만들었고, 이후 100여 년 동안 배웠던 차령산맥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단지 낮은 구릉 지대의 하나일 뿐이라고 한다. 심지어 그런 차령산맥을 훈요 10조 중 8항에 나온 차현으로 잘못 알고 억지로 꿰맞춰서 얼토당토하게 해석했으니 공주강 이북을 공주강 이남으로 억지 해석을 하거나 아예 생략했던 것이다. 지질학적으로 차령산맥과 금북정맥이 교차하는 지점이 차현일 수는 있어도, 당시의 차현은 금북정맥을 나타내는 것이지 20세기에서나 정립된 차령산맥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다.

또한 공주 강 북쪽이라는 뜻의 공주 강 외라는 부분을 아예 무시하거나 공주강 이남으로 왜곡하고 있다. 애초에 공주강 즉, 금강 자체가 차령산맥 남쪽에 있기 때문에, 차령산맥 남쪽으로 범위를 잡아놓고 굳이 공주강 남쪽이라고 동어반복을 할 필요가 없고, 게다가 '강외'란 말의 당시의 사용 방법을 따르면 행정구역, 성벽, 강처럼 인공물, 자연물의 경계를 따지는 경우일 뿐인데, 강의 경우엔 해당 지역을 다스리는 성을 기준으로 삼는다. 공주성은 공주강의 남쪽에 있었기에 강 밖이란 말은 강의 북쪽을 말하는 것이다. 당장 위에서 언급된 청주시의 경우도 강내면과 강외면(현 오송읍)의 경계가 서강, 즉 미호천을 따라 형성되어 있다. 이들은 원래 각각 청주목 서강내이면과 서강외일면으로 행정기구가 있던 청주성(청주 도심) 기준으로 강의 서쪽을 바깥으로, 강의 동쪽을 안으로 보았다. 또 다른 예시로 효종실록 효종 10년 4월 28일의 2번째 기사를 들 수 있다.
효종실록 효종 10년(1659) 4월 28일 2번째 기사
…發掘大同江外裁松亭畔百年前纍纍衆塚…
…발굴대동강외재송정반백년전누누중총…
대동강 이남 재송정(현 평양특별시 낙랑구역 정오이동 소재) 강가의 백 년된 여러 개의 무덤을 파헤쳐 드러내어…
만일 일각에서 주장하는 대로 강의 내외 기준이 수도 개경이라면, 효종실록에서 명백히 대동강에서 수도 한성 방향 쪽인 재송정을 대동강 밖이라고 볼 리가 없다. 대동강 북쪽에 면한 관할지역 행정기구 소재지인 평양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대동강 이남의 재송정을 대동강 밖이라고 표기한 것이다. 대동강이 평양 남쪽을 흘렀으므로 대동강 이남이 대동강 밖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주강은 공주시의 북쪽을 돌아 흐르기 때문에 사료 상의 공주강외는 공주강(금강) 이북의 지역이 된다.

셋째, 서남해 지방의 후백제의 잔당을 경계하라는 뜻이리라는 주장 또한 근거가 박약하다. 왕건은 끝까지 대놓고 본인의 정통성을 부정하지 않는 한 되도록 각지의 호족들을 유화적으로 대했다. 호족 개인으로서는 제일 심하게 왕건에 반대했던 명주(현 강릉시)의 순식도 항복 한 방에 왕씨 성을 하사해줬던 사람이 바로 왕건이다. 게다가 멸망 당시의 후백제는 내정이 상당히 혼란하고 내부 분열이 극심했으며, 태조이자 태상왕인 견훤이 고려에 망명해버리는 바람에 국조(國祖)의 정통성마저 고려에 넘어가버린 상태에서 항복으로 멸망했기 때문에 호족들이 반항하고 자시고 할 건덕지가 별로 없었다. 여기에 같은 호족 출신이던 왕건이 딱히 궁예나 견훤처럼 호족들을 쥐어짜는 타입도 아니었고, 굳이 고려에 반항해봤던들, 고려 국왕이 상보로 모시는 태조의 왕위를 찬탈하고 절간에 감금한 패륜아에게 찬동하는 꼴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후백제 부흥운동 같은 걸 할 분위기도 아니었다. 후백제의 주요 세력들 중 하나인 승평군(현재의 순천시)의 대호족이자 견훤의 사위였던 박영규가 후백제 멸망 후에 고려에서 큰 대접을 받았던 사례도 있다. 박영규는 승평군(순천)의 호족들 중에서 제일 영향력이 강했던 사람이었고, 후백제가 멸망하던 과정에 있어서 태조 왕건에 내응해 협조하던 인물이었으며, 그의 부인인 국대부인 견씨는 견훤의 적녀로서 후백제 왕통의 직계이자 신흥 전주계의 핵심 인물이다. 왕건은 이러한 박영규의 집안과 겹사돈[32]을 맺은 것인데, 만약에 왕건이 후백제인들을 경계하려고 했으면, 자신과 아들이 순천 - 전주계 후백제 집안의 사위로 가진 않았을 것이다.

또한 전라도 지방이 고려 왕조로부터 실제로 차별을 받았다면, 이들은 고려 왕조에 대해 적개심을 드러냈을 것이다. 그러나 전라도 지역에서 고려 왕조에 대해 적개심을 나타낸 적은 드물었으며, 특히, 지금의 나주시를 중심으로 한 서남해 지역은 태조의 제2왕비이자 혜종의 모후가 되는 장화왕후 오씨 집안의 지역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아무튼 나주를 중심으로 한 전라도 지역의 고려 왕조에 대한 내용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1. 2차 여요전쟁이 벌어질 때, 통주 전투에서 강조를 비롯한 고려군의 주력이 궤멸당하자 현종 몽진 장소로 나주를 골랐다. 이 과정에서 현종은 호위 병력 대부분이 도주하고, 지채문과 일부 병력만 남아 각지의 호족에게 핍박당하고 때로는 습격도 당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전주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조용겸이 왕(현종)의 일행을 억류하려 하였으나, 지채문이 저지하다.
임오. 삼례역(參禮驛)에 이르자 전주절도사(全州節度使) 조용겸(趙容謙)이 야복(野服)을 입고 어가(御駕)를 맞이하였는데, 박섬(朴暹)이 아뢰기를, “전주는 옛 백제(百濟) 땅이므로 성조 역시 이곳을 싫어하셨습니다. 행차하지 마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이를 옳다고 여겨 곧장 장곡역(長谷驛)으로 가서 묵었다. 이날 저녁에 조용겸이 왕을 머물게 하여 옆에 끼고 위세를 부리고자 전운사(轉運使) 이재(李載), 순검사(巡檢使) 최즙(崔檝), 전중소감(殿中少監) 유승건(柳僧虔)과 더불어 흰 깃을 관모에 꼽고 북을 치며 떠들썩하게 나아왔는데, 지채문이 사람을 시켜 문을 닫아걸고 굳게 지키게 하자 적들은 감히 들어오지 못하였다. 왕은 왕후와 함께 말을 타고 역의 청사(廳事)에 머무르고 있었다. 지채문은 지붕에 올라가 묻기를, “너희들은 어째서 이와 같이 하는가. 유승건이 왔는가 안 왔는가.”라고 하였다. 적들이 말하기를, “왔다.”라고 하자 다시 묻기를, “너는 누구인가.”라고 하니, 적들이 말하기를, “너 역시 누구냐.”라고 하였다. 지채문이 다른 말을 하니 적당이 말하기를, “지(智) 장군이다.”라고 하였다. 지채문이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말하기를, “네가 친종(親從) 마한조(馬韓兆)로구나.”라고 하고는 이윽고 왕명으로 유승건을 불러들였다. 유승건은 말하기를, “당신이 나오지 않으므로 나도 감히 들어갈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지채문이 문 밖으로 나가서 유승건을 불러 어가 앞으로 데려가자, 유승건이 울면서 아뢰기를, “오늘의 일은 조용겸이 한 짓입니다. 신은 알지 못합니다. 청하건대 왕명을 받들어 조용겸을 불러올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이를 허락하자 유승건은 밖으로 나와 도망쳤다. 왕이 양협(良叶)에게 명하여 조용겸과 이재를 불러오도록 하였는데, 도착하자 여러 장수들이 그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지채문은 꾸짖어서 그만두게 하고 이들 두 사람으로 하여금 대명궁주(大明宮主)의 말을 끌고 움직이게 하였다가 이후에 전주로 되돌려 보냈다.(고려사절요)
이 때 자기들이 차별하겠다고 공언한 장소로 피난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행동이다. 그리고 실제로 나주는 몽진해온 현종에게 우호적으로 대했다.
현종은 몽진과정에서 흩어진 현종 친위세력보단 현종이 머물던 전라도 나주 일대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고려사(高麗史) 태묘악장(太廟樂章)에서 전라도 나주가 세력기반이던 2대 혜종을 지극히 칭송한 것만 봐도 고려 왕실에서 전라도의 위상을 알 수 있다. 고려사(高麗史) 태묘악장(太廟樂章)에서는 3대 정종부터 7대 목종까지의 업적은 다루지 않는다. 3대 정종의 세력기반은 충청도 충주(忠州), 4대 광종의 세력기반은 충청도 충주(忠州)와 황해도 황주(黃州)이며, 7대 목종의 세력기반 역시 충주(忠州)와 황주(黃州)로 왕후의 관향인 충주(忠州)로 유배가는 길에 적성현(현 경기도 연천군)에서 시해당한다. 고려에서 왕의 향리(鄕里)는 왕의 세력기반으로써 중요한 의미가 있다.
현종은 이렇게 위기를 벗어난 이후인 1018년(현종 9년), 전주(全州)와 나주(羅州)의 첫글자로부터 전라도(全羅道)를 만드니 이게 바로 광역도의 시작이다. 5도 양계의 시작을 기점으로 이로부터 300여 년이 지난 후 다른 광역도들도 생겨났다. 현종이 혜종의 고향이자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준 나주(羅州)와 그리고 전주(全州)로부터 광역도를 시작한걸 보면 조용겸의 소행은 형부(刑部)의 건의대로 왕의 행차를 놀라게 한 죄를 물어 조용겸과 전중소감 유승건을 유배시킨 선에서 마무리 지어졌다고 보면 되겠다. 현종은 전주 출신 류방헌(柳邦憲)이 죽자 슬퍼하며 3일 동안 조회를 파하기도 하였다
2. 고려-몽골 전쟁이 한창이던 1237년에 지금의 담양군을 중심으로 이연년 형제가 소위 '백제 부흥'을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켰을 때, 당시 대장군 겸 전라도지휘사로 강화에서 파견 나온 김경손은 나주를 '어향(御鄕)'이라 하면서, 다른 고을처럼 적에게 항복해서는 안 된다면서 휘하의 병사 30명만으로 이연년 형제의 난을 진압하였다. 자세한 건 이연년 형제의 난, 김경손 문서 참조.

한편, 조선왕조실록에서 조선 초기 개성 왕씨 숙청하는 시점에서 한 대신이 훈요 10조를 들어 왕건이 '백제 사람을 쓰지 말라'고 유훈을 남겼고 이걸 이유로 왕씨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부분이 있다.
전조(前朝)의 태조(太祖)가 후손(後孫)에게 훈계를 전하면서 백제(百濟) 사람을 쓰지 말라고 했는데, 지난번에 후손들이 그 훈계를 준수했더라면 (전주 사람인) 전하께서 또한 어찌 오늘날이 있었겠습니까? -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태조 3년(1394) 2월 26일 2번째 기사 #

이 대목은 대간(臺諫)이 조선 태조 이성계한테 직접 아뢰는 부분인데, 전조의 태조 즉, "왕건이 후손에게 훈계를 하면서 백제사람을 쓰지 말라고 했다."면서 백제를 언급했는데, 전라도,충청도,경상도라는 광역도 개념을 세월이 갈수록 고구려,백제,신라에 그대로 투사하려는 경향을 보이지만 고려 현종 이후 전라도,충청도,경상도라는 광역도가 시작됐으니 고려초와 조선초의 지역 개념은 차이가 있었다. 아무튼 이 또한 훈요 10조에 대해 고려 초기보다 훨씬 후대인 조선시대 신하의 오해일 가능성이 높으며, 백제(百濟)라는 국호를 직접 언급한 걸로 보아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고려(高麗)와 서로 패권을 다투던 백제(百濟)에 대한 단순한 견제의 의미 정도로 여기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애초에 왕건의 훈요 10조에 언급되면서 동시에 태조 왕건의 정신적 스승이라 할 수 있는 도선대사와 태조 왕건부터 6대 성종까지 여섯 임금을 보필한 신하이자 살아서는 상주국(上柱國)이요 죽어서는 태사(太師)로 모셔진 최지몽 전라남도 영암군 출신이고, 장화왕후(莊和王后)도 전라남도 나주시 출신이며, 고려 왕실의 큰어른인 공예태후(恭睿太后)도 전라남도 장흥군 출신이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찬찬히 읽어보면, '백제 사람을 쓰지 말라'는 고려 태조의 훈계를 '후손들이 준수하지 않았다'고 하고 있다. 즉 고려 말을 경험한 조선 건국시기 사람이 보기에 고려왕조가 옛 백제 사람들을 실제로 차별하진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후백제 세력을 경계하라고 할 것 같으면 당연히 막연하게 금강 이남을 차별하지 말라고 하지 않고 후백제 잔존 세력이 웅거하는 지역을 더 구체적으로 제시했을 것이다. 당장 훈요십조를 제일 먼저 받은 차기 국왕인 혜종부터 고향이 금강 이남인데, 그럼 국왕 자신을 차별하라는 말인가? 이것만 봐도 금강 이남 차별 드립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헛소리다.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은 고려사 열전에는 광해주(光海州), 즉 강원도 춘천시 출신 인물로 실렸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춘천도호부 인물조가 아닌 춘천도호부 우거(寓居)조에 신숭겸이 실렸는데, 우거조는 글자 그대로 그 지역 출신이 아닌 그 지역에서 머물며 활동하던 인물에 관한 기록이고, 역시 같은 책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산도호부 편에도 신숭겸은 곡성현 출신인데 태조가 평산을 본관으로 내렸다고 하였고, 신증동국여지승람 사원조에도 신숭겸은 전라도 곡성현 출신으로 기록되었고, 신증동국여지승람 곡성현 인물조에 "세간에 전하기를, 신숭겸은 죽어서 현의 성황지신(城隍之神)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고려에서 성황신은 그 고을 토호의 시조, 조상 중에서 특출한 인물을 성황신으로 모셨으니 신숭겸은 곡성현 출신으로 춘천으로 옮겨와 활동한 인물이다.

동국통감에서는 훈요 10조 8항에 대해서 별다른 논평은 없는데, 이 편찬에 참여한 인물들 중 최부는 본시 나주 출신이다.

그런데 박영규를 일반적인 후백제 출신의 인물들과 같게 볼 수는 없다. 박영규는 후백제의 왕인 신검을 배신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왕건과 내통하여 후백제를 멸망시키는데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그 공로로 왕건으로부터 밭 1,000경을 하사받고 개국공신까지 되었으니, 일리천 전투에서 패배하여 나라와 왕을 잃은 후백제계의 사람들과는 입장이 다른 것이다. 후백제의 실세였던 능환, 후백제의 왕자들이였던 양검과 용검은 비참하게 처형당했고, 후백제의 왕인 신검은 왕건에게 관직을 하사받긴 하였으나, 이후의 행적은 나오지 않는다. 단지 삼국사기에 지역 호족들의 지지를 업고 견훤을 유폐까지 시켰던 3명의 후백제 왕자들은 결국 모두 벌을 받아 죽은 것으로 기록된다. 이는 당시 역사적 상황에 대한 이해 부족이다. 후백제 왕 신검 즉 견신검은 견훤의 아들이다. 이미 일리천 전투 당시 견훤은 왕건에게 투항하여 고려군 좌군 선봉에 서 있었다. 명길, 효봉 등 후백제 장수들도 견훤에게 충성했으므로 견훤을 따라 모조리 투항한다. 특히 박영규는 상술하다시피 견훤의 사위로서 국조(國祖)이자 장인인 견훤을 따른 박영규가 일반적인 후백제 출신 인물들과 다르다고 볼 수는 없다.

또한 나주 지역의 경우, 후백제에 속해 있었던 기간은 고작 3년(900년 ~ 903년)에 불과하지만, 반대로 왕건에게 점령당한 903년부터 후백제가 멸망하는 936년까지의 기간은 무려 33년이다. 나주지역에 대한 우대를 내세워 후백제 세력에 대한 견제가 없었다고 볼 만한 근거는 희박한 것이다. 거란의 침공으로 현종이 나주로 몽진을 가게 되었을 때, 전주에 대하여 "태조 왕건이 싫어했다."는 언급이 나온 위의 고려사 기록에서 그 발언을 했던 박섬이란 인물은 놀랍게도 나주 옆에 자리한 무안군 지역 출신이다. 이를 통해 33년간 후백제에 대항하여 싸워온 나주 - 무안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후백제계와는 다르게 형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나주 일대는 고려 왕건의 세력 기반이고, 전주는 후백제 견훤의 세력 기반이자 후백제의 수도였으므로 정서상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이런 차이는 다른 지역에서도 있었던 흔한 일이었다. 또한 이를 감안하면 8항에 나오는 '통합을 당한 원망을 품은 지역'이라면 정황상 궁예의 본거지 아니면 견훤의 본거지를 가리킬 수 있고[33], 이럴 경우 두 경우 모두 정확한 공주강 외라는 곳은 공주강 북쪽으로 해석된다.

4.4. 날조설

고려 태조가 정말로 훈요 10조를 직접 지었는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무엇보다 여덟째 항목은 당시 고려의 상황과 관련되어 여러 모순점이 보인다.

지역을 차별하는 훈요 10조를 두고 왕건이 당대에 지은 것이 아니라 후대에 조작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즉, 현종 시대(1009 ~ 1031) 권력을 차지한 경주 최씨 집안에서 필요에 의해 제작됐다는 것. 기존에 권력 중심에 있던 후백제 세력을 견제하고 경주 지역 출신들이 권력을 잡기 위한 한 가지 근거로 삼고자 조작했다는 주장. 이런 추측에서 훈요 10조를 날조한 범인으로 지목하는 용의자는 바로 최제안 최항 그리고 현종.

훈요 10조가 왕건의 유훈이었다면 왜 후대 왕들이 이를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았는지 의문스럽다는 것. 일례로 사찰 건립을 제한한 것을 지킨 왕들이 별로 없다는 점이 증거로 제시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태조 왕건부터가 충청도 충주 출신 호족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전라도 나주 출신 왕무에게 기어코 왕위를 물려준 점이 그러하다. 만약 태조가 훈요를 직접 남겼다면 공주강 외(外)는 공주강 북쪽으로 해석이 되어야 마땅하다.

또한 고려사에 훈요 10조가 기재된 경위가 수상쩍다. 고려 현종 때 거란이 침입함에 따라 사초가 불타서 사라져 버려 고려사-태조편의 사초를 다시 기록할 때에야 최제안이 최항의 집에 있던 문서라면서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변조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서기 10세기 말 이후로 현재까지 훈요 10조로 전해지는 글은 최승로의 자손 최제안이 그의 사망 연도인 1046년 이전 최항의 집에서 발견한 것이다(고려사93 열전6 최승로). 어떤 왕에게 바쳐졌는지 알 수는 없으나 최제안은 현종· 덕종· 정종·문종 치세에 조정에 봉직하였던 인물이기 때문에, 시기상 현종의 정변에 의한 즉위를 구실로 침공을 받아, 개경이 약탈당한 거란의 두 번째 침공 이후 전후 복구 과정에서 문서가 다시 쓰였을 가능성이 크다. 최항이 난리(거란의 침입)를 겪은 3년 뒤 새로 짓는 국사 고려사의 감수국사를 맡아 적어넣었다는 점에서 의심이 가는 부분이다. 성종 대에 폐지시킨 팔관회를 독실한 불자인 최항이 현종 대에 다시 부활시킨 인물이라는 점에서 훈요 10조 팔관회 관련하여 더욱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더욱이 「훈요 10조」는 나주 출신의 왕무를 잘 보필하도록 당진의 면천 출신 박술희를 불러 이른 것으로 되어 있는데, 왕가도 아닌 최항의 집에 있었다는 기록은 믿기 어려운 대목이다. 5조 다섯 왕조를 비평한 최항로의 옹사에서도 여기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이 없다. 현종 즉위 직전까지 훈요 10조는 고려왕조 내에서 존재하지 않은 듯하다.

문종 대에 최유선이 흥왕사 건립을 반대할 때 언급했다지만 문종 역시 현종 이후 왕이다. 이 외에도 태조의 유훈이라며 등장하는 기록들을 보면 전부 현종 이후에 등장한다. 성종 대에 최승로가 불교에 대해 비판하며 심지어 광종의 친불교정책까지 비판하지만 여기서 최승로가 훈요 내지는 태조의 유훈을 언급한 적은 없다. 즉 현종 이후에 등장한 것으로 보이며, 설령 이전에 훈요가 존재했다 하더라도 원래 훈요가 5조만 있었는지 훈요7조인지 훈요10조인지 알 수 없고, 만약 있었다면 최항이 새로운 내용을 덧붙이거나 원래 내용을 바꾸었는지 여부도 확인할 길이 없다.

현종은 집권과정이 파란만장했던 왕이다. 태조 왕건의 적통인 목종이 피살되고, 사생아 출신인 현종이 즉위하였는데, 이는 거란 2차 침입의 명분이 되었다. 목종을 폐위시킨 강조는 거란군에 의하여 사형을 당하였으며, 고려사(高麗史)에서도 반역열전에 실린 인물이다. 당연히 현종은 정통성이 취약하였으며 민심도 잃었으니 거란 침입시 피난길도 험난하였다. 집권과정도 험난했지만 특히 현종은 왕의 향리(鄕里) 즉 왕의 지역적 세력기반이 없었으므로 권력기반이 취약했다. 강조는 나이 어린 현종을 대신하여 1년여를 섭정하였으니 당대 최고의 실력자가 되었고, 신라계 최항은 현종 즉위 후 현종의 사부(師傅)로 임명되었으니 지금으로 치면 국정 자문역이다. 삼국사기에 김부식이 이르기를 '현종(顯宗)은 신라의 외손에서 나와 보위에 올랐으며 그 후의 왕통을 계승한 이는 모두 그의 자손이니 어찌 음덕(陰德)의 응보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신라계의 희망사항이 섞이기는 했지만 그만큼 현종은 신라계의 기대와 지지를 받는 왕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전라도 나주 출신 2대 혜종의 적통을 이어받은 왕이기도 하다. 중요한 점은 8대 현종을 기점으로 고려 왕실의 권력 기반이 3대 정종에서 7대 목종의 중요한 세력기반이던 충청도 충주 일대에서 바뀌게 된다.

즉 현종 때 최항이 훈요에 조작을 가했다 하더라도 3대 정종에서 7대 목종의 세력기반이던 충청도 극히 일부 지역을 견제할 목적 그 이상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는 격변을 거치며 왕위에 오른 현종의 정통성 즉 고려 왕실의 정통성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고려 왕실은 현종 이후 현종의 자손들로 후사가 이어지는데 현종은 그 정통성을 태조 왕건에 이어 2대 혜종으로부터 잇는다. 혜종의 모후 장화왕후(莊和王后)는 전라도 나주 출신이며 태조 왕건에 이어 왕위에 오르는 왕무(王武) 또한 전라도 나주 출신이다. 현종이 거란침입시 급박한 상황에서 전라도 나주로 몽진을 간 것은 그러한 연유이다. 현종이 팔관회를 부활시키면서 개최 장소에 개경, 서경에 이어 나주를 포함시킨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2대 혜종이 되는 왕무(王武)의 휘 무(武)는 고려조에서 피휘되었고[34], 태조 왕건과 함께 혜종은 고려 왕실 종묘의 불천지주(不遷之主)에 오르게 되니 태조 왕건과 함께 전장을 누비며 적통을 이어받아 왕위에 오르고, 또한 현종은 그 정통성을 잇게 되니 그 위상은 감히 넘볼 수 없는 것이다. 고려 왕조 불천지주(不遷之主)는 태조, 혜종, 현종 오직 세 분 뿐이다.

태조 왕건이 훈요를 남겼든지 또는 현종 대에 최항이 조작을 했든지 간에 두 경우 모두 공주강 외(外)는 공주강 북쪽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현종 측근 최항 조작설을 제기한 사람이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 교수였던 일본인 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 龍)이지만, 또한 공주강 외(外)를 공주강 남쪽으로 억지스럽게 해석한 사람도 이마니시 류이다. 왜냐하면 이마니시 류는 차령산맥이 1903년에 새로 생긴 이름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차령산맥과 차현을 동일시하여 해석하려니까 공주강 외(外)를 억지스럽게 남쪽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만 이마니시 류는 그렇게 해석을 하면서도 '뭔가 이상한데…'라고 사족을 덧붙이기는 하였다.

4.4.1. 반론

우선 날조설에서는 최항이 훈요 10조와는 관련이 낮다고 보는데, 오히려 최항은 훈요 10조 문서를 소지했을 가능성이 큰 인물이다. 최항은 현종이 즉위하기 전부터 그를 보필한 측근이자 스승이며, 선왕인 목종이 직접 최항에게 후계자인 현종을 잘 보필해 줄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훈요 10조 원본을 목종에게 받았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게다가 위에 언급한, 사찰건립 금지 조항을 어긴 것을 지적하는 최승로의 상소를 보면 직접 훈요 10조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훈요 10조 2번 조항과 비슷한 내용을 인용해서 사찰 건립을 비판했다.

아무리 일국의 태조가 남긴 유훈이 신성하고 큰 가치를 지녔다고 해서 후대의 왕들이 이를 무조건 따랐으리란 법은 없다. 최유선은 훈유10조 2번 조항을 인용해 문종에게 흥왕사를 짓지 말라고 했지만 문종은 결국 지었다. 조선시대에도 태조가 자신을 고향인 함흥 땅에 묻으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왕실의 체면과 제사를 고려해 태종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그 외에도 후대에 전왕의 뜻과 다른 방향으로 일이 진행된 사례들이 있다.

고려사절요가 완성된 조선시대 이후에도 훈요 10조의 내용을 비판한 사람은 있지만 그 자체의 진위 논란은 없었으며, 훈요 10조가 다르게 기록된 사료나, 훈요 10조가 다르게 기록되었다고 주장한 사료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한 국가의 태조가 남긴 유훈이 실제로는 조작되었다는 사소한 증거라도 있었다면, 정통성을 극히 중요하게 여기는 유학자들이 가만히 있었을 리 없다. 하다 못해 그런 의혹이라도 가졌어야 정상인데 그 조차 없다는 것은 조선의 학자들도 훈요 10조 조작설이 의미없음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35] 그리고 훈요 10조의 내용이 사실이어도, 그것이 현대의 지역감정을 정당화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36]

근대에 들어와서 최항-최제안 조작설을 처음 주장한 사람이 일본인 학자인 이마니시 류(今西 龍)이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이마니시 류의 조작설 자체가 오히려 고려 왕조의 정통성을 훼손시키려는 식민사관적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역설적이게도 이마니시 류의 최항-최제안 조작설을 반박한 사람에는 친일파로 알려진 이병도도 있었다.


[1] 삼국 통일하여 고려를 세운 것을 말한다. [2] 順逆: 풍수의 기세가 순하거나 또는 반대로 거스르는 것을 말함. [3] 사찰 내에 왕실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세운 집 [4] 부처의 사리를 안치한 탑. [5] 四仲: 1년 12달 가운데 중춘(仲春)·중하(仲夏)·중추(仲秋)·중동(仲冬). 한 계절에서 다른 계절로 넘어갈 때를 말한다. [6] 國忌: 왕 또는 왕후의 돌아가신 날. [7] 충고 [8] 남을 헐뜯어서 죄가 있는 것처럼 꾸며 윗사람에게 거짓말로 고자질하는 것을 말함. [9] ⿰口衘 [10] 公州: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 [11] 지역감정을 유발하려는 세력이 해당 부분을 전라도로 왜곡하여 퍼뜨린 적이 있는데, '차현이남 공주강외'는 현대의 충청북도 청주시를 지칭한다는 게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는 사실이다. 애초에 고려의 제2대 대왕 혜종의 어머니 장화왕후 전라남도 나주 호족 가문의 딸이었다. 한편, 청주는 궁예의 지지세력이 많았던 지역이었다. [12] 왕이 거둥하여 나갈 때는 경(警)이라 외치고, 들어올 때는 필(蹕)이라 외쳐서 길을 맑힌다. 즉 犯蹕生亂은 왕이 거둥할 때 난입하여 일으키는 난(亂)으로 왕을 시해한다는 직접적인 표현은 불경스러우니 비유적인 표현이다. 실제로도 왕을 시해하려는 시도 대부분은 궁 안이든 궁 밖이든 왕이 거둥할 때 일어난다. [13] 잡척: 고려시대 신량역천(身良役賤)의 계층인 진척(津尺)·역자(驛子)·화척(禾尺)·양수척(揚水尺) 등을 말한다. 부모의 역을 대대로 세습하였으며, 관직의 진출과 승려로의 출가가 제한되어 있었다. [14] 지금으로 치면 공무원 월급을 말한다. [15] 하늘이 정해준 녹봉. 이미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던 녹봉 체계를 말한다. [16] 그리고 사실 조선왕조의 불교 개혁을 근거로 들자면 그 이유가 된 불교계의 부패를 끄집어내야 하는데 조선 후기의 서원의 행패가 고려 시기의 사찰의 부패를 똑 닮고 만다. 그나마 사병이 원천차단된 조선이었기에 사병은 없었지만. 괜히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밀어버린 게 아니다. 서로 물고뜯지만 역사적 행보는 그놈이 그놈인 셈. [17] 지리적으로도 서경은 고려가 요동을 차지했을 시 한반도 내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요동을 근거리에서 컨트롤할 수 있는 좋은 입지를 갖추고 있었다. 또한 개경은 입지가 좋지 않아 쭉 천도론이 제기되었기에 요동 점령, 즉 국방문제만 해결되면 바로 서경으로 천도할 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연이은 강대국들의 요동 점거라는 냉혹한 현실 때문에 결국 북진정책은 실패했고 결국 조선조에 들어서면서는 오히려 남경으로 후퇴하게 된다. [18] 삼국은 초반에는 계승제도가 완전히 확립되지 않아 불안정했지만 제도가 확립된 뒤로는 장자계승제가 안착하였다. [19] 당연히 군사력과 그를 지탱하는 경제력을 포함하며 상당수는 왕건으로부터 지역 통치권까지 하사받아 정당한 지역 통치자로서의 권위도 같이 지녔다. [20] 이에 더불어 왕건은 본인의 자식들에게도 근친결혼을 장려하여 자식들의 외가인 대호족들이 결혼을 통해 다른 호족들과 세력 연대를 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려 했다. 단, 예외적으로 혜종은 다른 가문의 여성과 족외혼을 했다. [21] 동생들의 외가 세력에 눌려서 어쩔 수 없었다는 의견도 있다. [22] 다만 왕규 본인이 자신의 외손자인 광주원군을 옹립하기 위해 일으킨 쿠데타가 아니라 동생들인 왕요와 왕소 그리고 왕식렴을 비롯한 반대파들이 일으킨 친위 쿠데타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럴 경우 왕규에게 먼저 선빵을 날린 쪽은 오히려 이들이 될 수 있으며, 그 사전 작업격으로 박술희를 귀양지에서 암살해버렸다는 것. 상당히 개연성 있는 이야기로, 이 설을 따를 경우 기록에서 발생하는 모순을 자연스레 해소시킬 수도 있다. [23] 고려사에는 환관들과 외척들의 전횡, 왜구의 준동, 그리고 충정왕의 오만 난행들에 질릴대로 질린 대신들이 원나라에 정식으로 요청해 그를 폐위시켰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사실상 공민왕의 주도로 보고 있다. 게다가 충청왕이 폭군이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있기는 하지만, 그 기록 외에는 교차검증 되는 증거도 찾을 수가 없어서 믿기도 힘들다. [24] 그러나 발해 멸망으로 공중분해될 발해의 인적자원과 남부 영토를 노리고 고려가 발해의 멸망을 오히려 바랐다는 가설도 있다. [25] 조선시대에 차현(車峴)으로 추정했던 곳이 지금의 금북정맥(錦北正脈)의 한 지점에 해당하는 차령고개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천안(天安) 편에서는 "차현(車峴)은 고을 남쪽 45리에 있다." 하였고, 『신증동국여지승람』 공주(公州) 편에서는 "차현(車峴)은 주 서북쪽 57리에 있다." 한 곳이다. [26] 실제로 이 근방은 의외로 지형이 험난하다. 한남금북정맥과 금북정맥은 경부선이 당시 충청도에서 가장 큰 도시들이였던 청주도 공주도 아닌 조치원역 쪽을 통과하게 만들었고, 경부고속도로 천안과 청주 사이를 계곡을 따라 커브를 그리면서 지나가 현재까지도 교통사고 발생을 높이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청주 남측 역시 금남정맥과 백두대간( 보은군 일대)으로 인해 교통로가 상당히 제한되어 있다. 경부고속도로의 남청주 - 신탄진 구간이나 서산영덕고속도로 피반령 구간이 이에 해당한다. [27] 고려사 반역열전에 첫 번째로 등장하는 인물로 환선길의 반란이 왕건 즉위 4일, 반역열전 두 번째 등장인물인 이흔암의 반란이 왕건 즉위 10일만에 일어났고, 이흔암의 부인이 환씨(桓氏)이기도 해서 환선길과 이흔암이 어떤 관계 즉 처남 매부 관계로 보기도 하는데 개연성은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왕건은 이 일대에서 번성하던 환씨(桓氏)와 이씨(伊氏)를 멸족시켜, 2000년 기준 전국에서 환씨(桓氏)는 125명, 이씨(伊氏)는 850명에 불과하다. [28] 왕건이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고 평했을 정도로 왕건에게는 애증이 교차했던 인물이다. 이전에도 죽일 수 있었지만, 이흔암과의 정(情) 때문에 차마 못 죽이겠다고 할 정도였다. 이흔암도 죽을 때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비록 이씨(伊氏) 씨족은 멸족시켰지만, 훗날 왕건이 '웅주(熊州)'의 지명을 '공주(公州)'로 바꾼데는 물론 '곰'을 음차하여 '공(公)'이라는 한자를 썼다는 게 정설이지만, 또 '공'에 해당하는 한자들이 많은데 굳이 '공(公)'을 고른데는 왕건이 이흔암 공(公)을 기려서 라는 설이 있다. [29] 숙목부인 임씨로, 진천 출신인 임명필의 딸로서 그녀와 왕건 사이에는 원녕태자를 낳았다. [30] 왕건의 21번째 부인, 23번째 부인, 24번째 부인은 출신 지역 미상으로 24번째 부인 소황주원 부인은 황해도 출신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21번째 부인 서전원 부인과 23번째 월화원 부인의 출신 지역은 전혀 알 수 없고, 만약 이들이 청주 출신이라고 가정한다 해도 세번째 왕비 신명순성왕후(충주)나 열번째 부인 숙목부인(진천)에 비하면 위상이 많이 떨어진다. [31] 한반도의 지형이 호랑이가 아닌 토끼를 닮았다고 주장했던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 [32] 태조 왕건의 17비가 되는 동산원부인 박씨가 박영규와 국대부인의 장녀이다. 즉, 견훤의 외손녀가 되고, 태조와 혜종의 뒤를 이은 정종(왕요)의 왕후 두 명 역시 동산원부인의 여동생들이자 박영규의 또다른 딸들이었다. 즉, 이들 모두가 후백제의 후손인 셈이다. [33] 아니면 둘 다일 수도 있고… [34] 왕무의 휘에 사용된 신성한 글자이니 왕무 이외에는 쓸 수 없다. [35] 물론 반박이 없었다고 그 내용이 꼭 진실이라 주장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역사가 후대에 뒤집힌 사례는 얼마든지 있기에. [36] 현대의 지역주의는 1960년대 산업화 이후 지역간 (소득) 불균형 발전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조선시대와 일제시대에는 지금 같은 영호남의 지역주의는 없었다. 조선왕조는 한양 이외의 모든 지역으로 반역자를 유배보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