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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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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 왕실
관향 <colbgcolor=#fff,#191919> 경기도 개풍군 서면 개성리
창업조 태조
중시조 현종
주요인물 태조, 혜종, 광종, 현종, 문종, 숙종, 예종, 원종, 충렬왕, 충선왕, 공민왕, 우왕, 공양왕

1. 태조 이전2. 고려 전기
2.1. 태조
2.1.1. 왕후 및 왕태후와 그 자녀2.1.2. 추존 후궁과 그 자녀2.1.3. 원주와 그 자녀2.1.4. 기타 기록
2.2. 혜종2.3. 정종2.4. 광종2.5. 경종2.6. 성종2.7. 목종2.8. 현종2.9. 덕종2.10. 정종2.11. 문종
3. 고려 중기4. 고려 말기

1. 태조 이전

태조 왕건 세조 왕륭 의조 작제건
원창왕후
위숙왕후 한씨

1.1. 국조

1.2. 의조

1.3. 세조

2. 고려 전기

표기법
* 는 자신, 부인
* 는 아들, 며느리, 딸
* 는 손자, 손녀, 손부
배우자는 이름 앞에 배우자:를 붙인다.

2.1. 태조

태조 왕건은 부인이 많기로 유명하다.[1]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태조가 많은 부인을 가졌다는 사실 정도는 알 정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즉위 초 불안한 왕권을 보완하기 위해 유력 귀족들과 혼인을 통해 혈맹을 맺는 혼인정책을 펼쳤다. 사서 등 알려진 바에 따르면, 29명[2]의 부인을 두고 있고 부인들 모두는 유력 지방 호족이거나 공신들의 딸이다.[3] 이 혼인 정책은 태조가 살아있을 때는 그들의 딸을 인질로 삼아 반역을 억제하는 기능을 하였지만, 사후에는 유력 귀족을 외가로 둔 쟁쟁한 왕자들 덕분에 왕위 쟁탈전의 계기를 제공하였다.

분량 문제로 인해 왕후[4] · 태후로 승격된 원주[5], 특정 시호를 받은 원주[6], 그 외 기타 원주, 이외 기록에서 발견되는 자식들로 나눠 서술한다.

2.1.1. 왕후 및 왕태후와 그 자녀

2.1.2. 추존 후궁과 그 자녀

  • 제7비: 헌목대부인(獻穆大夫人) 평씨[11] - 평준(平俊)의 딸. 손자가 홍덕원군이라는 봉호를 달고 있는 것을 보면 본래 홍덕원부인(弘德院夫人)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제8비: 정목부인 왕씨[12] - 왕경(王景)의 딸. 같은 명주 왕씨인 제14비 대명주원부인 왕씨가 대(大)를 달고 있는 걸 보아 원호는 소(小)명주원부인으로 추정된다.
    • 순안왕대비 왕씨 - 왕대비로 추존된 경위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대비란 칭호를 봤을 때 현종 이후의 국왕이 추증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에서 대비는 국왕의 계모[13]에게 주던 호칭이었다. 순안(順安)은 고려 시대에 현대의 영주시를 뜻하는 단어다.
  • 제10비: 숙목부인(肅穆夫人) 임씨[14]- 임명필(林名必)[15]의 딸. 의화왕후 임씨와 같은 가문 출신이다. 아들인 원녕태자가 진주낭군으로도 불리는 점을 보면 원래는 진주원부인(鎭州院夫人)으로 불린 듯하다.
  • 제18비: 예화부인(禮和夫人) 왕씨[16] - 왕유(王柔)의 딸. 광해주는 현재의 해주가 아닌 춘천을 뜻한다. 예나 지금이나 춘천 일대가 경기도에서 강원도로 가는 요충지이기에 영서지방을 중심으로 한 강원도 동진을 위해서 혼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 제25비: 성무부인(聖茂夫人) 박씨[17] - 박지윤의 딸. 박지윤은 박수문 박수경 형제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월경원부인(月鏡院夫人)[18]과 몽량원부인(夢良院夫人)[19]의 고모가 된다.
    • 효제태자(孝悌太子)
    • 효명태자(孝明太子)
    • 법등군(法燈君)
    • 자리군(資利君): 《고려사》에 따르면 자리(資利)는 막내의 사투리이기 때문에 태조의 자식들 중 막내아들로 추정된다.
    • 공주: 경순왕의 부인

2.1.3. 원주와 그 자녀

  • 제9비: 동양원부인(東陽院夫人) 유씨 - 평주(평산) 유씨(平州 庾氏) 유금필의 딸.
    • 효목태자(孝穆太子) 의(義) - 천안낭군(天安郞君),[20] 진주낭군(鎭州郞君)[21]과 다르게 동생인 효은태자만 동양군으로 불리는 것으로 보아, 족내혼을 하여 동양원에 대한 상속을 포기했을 가능성이 있다.
      • 출가한 아들
    • 효은태자 동양군[22] 원(垣)
      • 동양군 림(琳)
      • 온결공(溫潔公) 정(禎) - 현존하는 개성 왕씨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동양군파는 동양군의 아들 온결공의 후손이다.
  • 제11비: 천안부원부인(天安府院夫人) 임씨[23] - 임언의 딸. 경주 출신임에도 천안부(天安府)를 명칭으로 사용한 것에 대해 토착 세력이 없던 천안을 왕실의 주요 지역 기반으로 삼고자 천안을 본거지로 삼게 했기에 임씨의 아들들이 천안낭군(天安郞君)이라 불렸다는 설과 임언이 태수를 지낸 지역이 천안이라는 설이 있다. 고려사에 진주낭군(鎭州郞君)[24]과 정치적 견해를 같이 했고 성씨가 임씨로 같은 것으로 보아 천안과 진주(진천)가 인접한 것을 고려했을 때 본래 같은 가문이었으나 임언이 신라 조정에서 일하면서 본적을 옮겼을 가능성도 없진 않다.
  • 제12비: 흥복원부인(興福院夫人) 홍씨[27] - 홍규(洪奎)의 딸
  • 제13비: 후대량원부인(後大良院夫人) 이씨[28] - 이원(李元)의 딸
  • 제14비: 대명주원부인(大溟州院夫人) 왕씨[29] - 왕예(王乂)의 딸. 제8비 정목부인과 6촌관계이다.
  • 제15비: 광주원부인(廣州院夫人) 왕씨[30] - 왕규의 딸
  • 제16비: 소광주원부인(小廣州院夫人) 왕씨 - 제15비 광주원부인 왕씨의 자매. 광주원부인과 소광주원부인은 혜종의 후궁 후광주원부인 왕씨(後廣州院夫人 王氏)와도 자매지간이다.
    • 광주원군(廣州院君) - 정종, 광종 형제가 왕규를 없앨 때, 왕규가 광주원군을 즉위시키려 한다고 누명을 씌웠기 때문에 광주원부인, 소광주원부인, 후광주원부인과 함께 처형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제17비: 동산원부인(東山院夫人) 박씨[31] - 박영규의 딸. 견훤의 외손녀로 정종의 제1비 문공왕후 박씨, 제2비 문성왕후 박씨와 자매지간이다.
  • 제19비: 대서원부인(大西院夫人) 김씨[32] - 김행파(金行波)의 딸
  • 제20비: 소서원부인(小西院夫人) 김씨 - 대서원부인의 자매. 김행파가 신혜왕후 류씨를 따라 두 딸을 시집보내고자 평양에 들른 왕건에게 두 딸을 출가하게 만들었지만, 왕건은 신혜왕후 때와 달리 김씨 두 자매에게 대서원과 소서원이라는 평양의 두 절과 노복을 주고 궁으로 데려오지는 않았다. 지못미. 그래도 최소한의 예우는 받았기에 후궁으로 본다.[33]
  • 제21비: 서전원부인(西殿院夫人) 박씨 - 사서에 나오는 왕건의 부인 중 성씨, 가계, 출신지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다. 한국사의 후궁 제도를 참고할 경우, 전(殿)과 원(院)은 양립하지 않고 규모에 따라 확연히 구분됐음에도 불구하고 둘 모두를 당호에 포함한 것은 굉장히 특이한 일이다. 다만 “서전원”이라는 곳이 당대에 서경이라 불린 평양에 있었을 가능성은 높다. 이 경우 922년 김행파와 함께 서경으로 이주하는 시중-대승 박질영이라는 인물이 그녀의 아버지일 수 있으며 금석문 기록 상 패강-서경을 기반으로 하는 박씨가 확인된다.
  • 제22비: 신주원부인(信州院夫人) 강씨[34]- 강기주(康起珠)의 딸. 궁예의 부인 강비와 같은 가문 출신이다.
    • 아들이 있었으나 요절해 제3비 신명순성왕후의 아들인 광종을 자신이 보살폈다. 신주는 상대적으로 황주와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대목왕후와의 결혼을 주도한 것으로 추정되며, 나아가 광종의 즉위 기반이 되었으리라는 추측이 있다.
  • 제23비: 월화원부인(月華院夫人) - 영장(英章)의 딸. 성씨는 알 수 없으며, 927년 왕건 휘하의 해군 장군으로서 대야성을 점령한 영창(英昌)이 있고, 신라시대부터 章과 昌이 혼동되어 쓰였으므로 동일인물이 아닌가 추정된다. 밑에 나올 〈징효대사탑비〉에 나온 인물은 탑비로부터 가까운 순서대로 기록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영월 또는 영월과 가장 인접한 대도시 원주의 호족으로 추정된다. 영월에 은거하던 궁예가 의탁한 양길 역시 원주의 도적이었으며 이 당시 원주의 호족으로는 원극유의 원주 원씨가 있었다.
  • 제24비: 소황주원부인(小黃州院夫人) 황보씨 - "순행(順行)의 딸로 사서(史書)에서 성씨(姓氏)를 잃어버렸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현대 학자들은 황주 출신이라는 점에서 황주 황보씨(黃州 皇甫氏)이며 소(小)라고 표기하기 때문에 " 신정왕후 황보씨가 대황주원부인(大黃州院夫人)이 아니냐?" 추정하고 있다. 신정왕후의 부인 시절 봉호는 명복궁대부인(明福宮大夫人)이었는데, 명복궁의 본래 이름이 황주원이었다는 점도 이러한 가설을 뒷받침한다.
  • 제26비: 의성부원부인(義城府院夫人) 홍씨 - 홍유의 딸. 경상도 북부에 대한 안정과 홍유의 공 때문에 혼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 제27비: 월경원부인(月鏡院夫人) 박씨[35] - 박수문의 딸. 박수문이 박지윤의 아들이자 박수경의 형이기 때문에 성무부인(聖茂夫人) 박씨는 고모,[36] 몽량원부인(夢良院夫人)박씨[37]와는 사촌자매가 된다.
  • 제28비: 몽량원부인(夢良院夫人) 박씨[38] - 박수경의 딸. 박수경이 박지윤의 아들이자 박수문의 동생이기 때문에 성무부인(聖茂夫人) 박씨[39]는 고모, 월경원부인(月鏡院夫人) 박씨[40]와는 사촌자매가 된다.
  • 제29비: 해량원부인(海良院夫人) 최씨 - 최선필(崔宣必)의 딸. 최선필은 신라 출신으로 재암성(載巖城) 장군으로 있다가 태조를 돕고 930년 고려로 귀순한 최선필(崔善弼)이라는 설이 있다. 왕건이 말년의 선필을 상보(尙父)로 대우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2.1.4. 기타 기록

王堯君
王昭君
▨▨大王 弼榮大王 英章正匡 王景大承
淸端宮主   金鎰蘇判 兢達蘇判 王規佐承
權悅佐承 王詢佐承 王廉佐承 誠俊元甫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의 음기(陰記) 부분 판독문 일부

〈징효대사탑비〉는 924년(태조 7년)에 지은 비문을 944년(혜종 2년)에 세긴 것으로, 한동안 잊혀지다가 1997년에 발견되었다.

비석의 뒷부분에 적힌 음기에는 징효대사의 제자 목록이 발견되는데, 징효대사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승려들과 당시 흥녕사(興寧寺)의 실질적인 후원자 역할을 했던 여러 유력자의 명단이다.
  • 왕요군(王堯君)은 정종, 왕소군(王昭君)은 광종의 성명에 '군(君)'을 덧붙인 것이다.
  • 정광(正匡) 영장(英章)은 태조의 후궁 월화원부인의 아버지이다.
  • 대승(大承) 왕경(王景)은 태조의 후궁 정목부인의 아버지이다.
  • 소판(蘇判) 김일(金鎰)은 일부 족보류에서 태조의 사위 경순왕의 장남으로 전해진 인물이다. 다만 김일이 마의태자와 동일 인물인지는 알 수 없다.
  • 소판 긍달(兢達)은 태조의 왕비 신명왕후의 아버지인 유긍달이다.
  • 좌승(佐承) 왕규(王規)는 태조의 후궁 광주원부인 및 소광주원부인의 아버지 왕규이다.
  • 좌승 권열(權悅)의 성씨는 충주 유씨로, 금석문에서도 충주의 호족으로 나와 있다. 따라서 정종과 광종의 외가 쪽 친족임이 유력해 보인다.
  • 좌승 왕순(王詢)의 이름 자체는 현종과 같으나 시기상 동일인일 가능성은 없다. 일단 명주의 왕경 또는 광주의 왕규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좌승 왕렴(王廉)은 왕순식의 아들이다.
  • 이상의 인물은 명주(溟州), 원주(原州), 죽산(竹州), 공주(公州), 제천(堤州), 충주?(冷井), 진천(新知縣), 동해(又谷郡), 영월(奈生郡), 영월?(冷水縣), 영월(酒淵縣), 단양?(別斤縣), 괴산(丹越驛) 출신이 주된 것으로 보이며, 기록도 이 순서와 일치할 것으로 추측된다.[41]
  • 참고로 정종은 923년생이고 광종은 925년생이므로, 비문이 지어진 시점에 정종은 1살이었으며 광종은 태어나지도 않았던 시점이다. 즉, 〈징효대사탑비〉의 음기 부분은 비문과는 별개로 작성되었다는 뜻이다.

▨▨대왕, 필영대왕(弼榮大王), 청단궁주(淸端宮主), 성준(誠俊) 원보(元甫) 등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등장하지 않는다.

태조의 왕자가 문원대왕으로 봉작된 사례가 있어서, ▨▨대왕과 필영대왕도 왕작을 받은 태조의 아들로 추정되고 있다. ▨▨대왕은 비문이 마모되어 정확한 봉호를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나, 남아있는 자획을 통해 보면 '文元'과는 다른 형태의 글자임을 확인할 수 있기에, ▨▨대왕은 문원대왕과 별개의 인물로 파악된다. 이에 따르면 비문에 기록된 순서상 ▨▨대왕과 필영대왕은 정종과 광종보다 항렬이 낮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광종보다도 항렬이 낮은 필영대왕이 '대왕'으로 명기되어 있는 점은 〈징효대사탑비〉가 만들어진 시점에는 이미 죽어서 왕작이 추봉된 상태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청단궁주는 청단궁(淸端宮)을 거처로 삼은 후궁이거나 태조의 딸로 보이며, 여기서 청단은 《고려사》 병지에 나오는 평주와 안서(해주) 사이에 걸쳐있는 청단에서 따온 말로 추정되는데, 한자는 다르지만 현재 북한 체제 하에 청단군이 있는 곳과 동일하다. 고려의 기록에는 없으나 요나라 기록에 따르면 발해 유민 고모한이 왕건의 사위가 되었으나 훗날 고려를 배반하고 요나라에 귀부했다고 하는데, 태조의 딸들 중 배우자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은 순안왕대비이지만, 순안왕대비가 928년 무렵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반면 고모한은 926년 이전에 거란에 투항했으므로 가능성은 낮다. 만약 청단궁주가 태조의 딸이 맞다면 고모한의 아내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 외 원보 성준은 지방 호족으로 추정된다.

최근에는 ▨▨대왕과 필영대왕 부분의 '大王'이 원래는 '대광(大匡)'이었으며 '匚'획이 마모된 것이라는 의견이 등장했다. 왕족 인물로 확인되는 정종(왕요군), 광종(왕소군), 청단궁주 등이 다른 인물들과 달리 대두(擡頭) 표기되어 있지만 ▨▨대왕과 필영대왕은 그렇지 않기에 왕족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주요한 논지이다. 이 의견에 따를 경우 대광 ▨▨과 대광 필영은 같은 행에서 언급되는 영장·왕경과 함께 태조의 장인으로 추측해 볼 수 있는데, 필영은 태조의 후궁 중에 아버지가 확인되지 않는 서전원부인(西殿院夫人)의 부친이자 박질영과 형제 관계일 가능성이 있다.

2.2. 혜종

  • 2대 혜종 의공대왕
  • 제1비: 의화왕후 임씨 - 임희의 딸
    • 흥화궁군(興化宮君) - 흥화낭군(興化郞君) 또는 그냥 흥화군(興化君)이라고도 한다.
    • 경화궁부인 임씨 - 광종의 후궁. 여담으로 ‘경화궁’ 부분의 표기는 慶和宮, 慶化宮, 慶華宮 모두가 가능하다.
    • 정헌공주(貞憲公主)
  • 제2비: 후광주원부인(後廣州院夫人) 왕씨 - 왕규의 딸
  • 제3비: 청주원부인(淸州院夫人) 김씨 - 김긍률(金兢律)의 딸. 정종의 후궁 청주남원부인(淸州南院夫人)과 자매
  • 제4비: 궁인 애이주(哀伊主) 연씨 - 연예(連乂)의 딸
    • 태자 제(濟)
    • 명혜부인(明惠夫人)

2.3. 정종

  • 3대 정종 문명대왕
  • 제1비: 문공왕후 박씨 - 박영규의 차녀
  • 제2비: 문성왕후 박씨 - 박영규의 삼녀
    • 경춘원군(慶春院君)
    • 공주 - 효성태자(孝成太子)[42]의 부인
  • 제3비: 청주남원부인(淸州南院夫人) 김씨 - 김긍률(金兢律)의 딸. 혜종의 후궁 청주원부인(淸州院夫人)과 자매

2.4. 광종

2.5. 경종

2.6. 성종

2.7. 목종

2.8. 현종

2.9. 덕종

2.10. 정종

  • 10대 정종 용혜대왕
  • 제1비: 용신왕후 한씨 - 한조의 장녀
    • 형(詗)
  • 제2비: 용의왕후 한씨 - 한조의 차녀
  • 제3비: 용목왕후 이씨 - 이품언(李禀焉)의 딸, 덕종의 후궁 이씨와 자매지간
  • 제4비: 연흥궁주(延興宮主) 김씨 → 용절덕비(容節德妃) 김씨 - 문하시중(門下侍中) 김원충의 장녀. 문종의 후궁 인목덕비(仁穆德妃) 김씨와 자매
  • 제5비: 연창궁주(延昌宮主) 노씨
  • 제6비: 궁인 한씨(宮人 韓氏)
  • 제7비: 궁인 한씨(宮人 韓氏)[53]
  • 제8비: 궁인 위씨(宮人 韋氏) - 문하시중(門下侍中) 위수여(韋壽餘)의 딸로 추정

2.11. 문종

2.11.1. 정간왕

  • 제후왕: 정간왕 기(基) - 개성 왕씨 평양공파 시조
  • 배우자: 장녕궁주(長寧宮主) 이씨와 수안택주(遂安宅主) 이씨 - 둘 다 추정
    • 진(璡)
    • 거(琚)
    • 낙랑공 영
    • 며느리 : 보령궁주(保寧宮主) 왕씨 - 문종의 차녀[57]
      • 승화백(承化伯) 정(禎)
      • 손부 : 흥수공주(興壽宮主) 왕씨 - 숙종의 차녀
      • 지(禔)[58]

3. 고려 중기

4. 고려 말기



[1] 고려를 떠나 한국사 전체의 왕으로서도 가장 확실히 기록된 사례다. 자식의 경우 총 34명(25남 9녀)로 기록. [2] 동국통감에만 나오는 대량원부인은 일반적으로 신성왕태후가 왕태후가 되기 전 호칭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왕건에게는 25비주(妃主)가 있다고 하여 고려사의 기록과 차이가 있다. 다만 고려에서는 조선과 달리 후궁을 비(妃)로 칭했으므로 후궁 23명에 훗날 왕태후로 승격된 명복궁대부인, 대량원부인을 추가하면 정확히 25명이 된다. [3] 태조는 이들에게 고려의 궁원을 봉해주었다. [4] 신혜, 장화, 정덕 [5] 신명, 신정, 신성 [6] 헌목, 정목, 숙목, 예화, 성무 [7] 태조의 제6비 정덕왕후의 아들 [추존] [추존] [10] 경장태자의 딸인 원용왕후 정덕왕후와 같은 정주 류씨이고, 류씨 성을 따를 수 있는 모계 후계가 있는 사람은 오직 원장태자 뿐이기 때문이다. [11] 경주 평씨(慶州 平氏) [12] 명주 왕씨(溟州 王氏). 현재의 강릉 김씨이며 강릉 김씨 중 몇몇 왕씨로 사성받은 인물들은 강릉 왕씨로 부르기도 한다. [13] 정확히 계모는 아니더라도 국왕을 키워준 사람에게 주던 호칭이다. [14] 진주(진천) 임씨(鎭州 林氏) [15] 사서에서는 성이 누락되어 있으나 태조 즉위 직후 있었던 인사 이동에서 임명필(林明弼)이 순군부령에 임명되는데, 고려 초기에는 같은 이름의 한자 표기가 여러 가지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점으로 인해 임씨로 보기도 한다. [16] 광해주 왕씨(光海州 王氏). 사성정책 전에는 해주 박씨(海州 朴氏) [17] 평주 박씨(平州 朴氏). 이전에는 평산 박씨(平山 朴氏) [18] 태조의 제27비 [19] 태조의 제28비 [20] 태조의 제11비 천안부원부인의 장남 [21] 태조의 제10비 숙목부인(肅穆夫人)의 장남 [22] 여담으로 한국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호부견자다.《 고려사》에 따르면 인성이 개막장인데다가 질이 나쁜 인간들과 어울려 다녔고, 결국 광종 즉위 이후 반역을 꾀하다 사사당했다.《 제국의 아침》에서는 작가가 거열형으로 끔살당하게 만드는 역사 왜곡을 저지른 덕분에 이 드라마 이후 광종을 다룬 다른 작품들에서도 대접이 영 좋지 않다. [23] 경주 임씨(慶州 林氏) [24] 태조의 제10비 숙목부인(肅穆夫人)의 장남 [25] 고려사 종실열전 태조소생왕자편 서론에서는 주림(珠琳)이라 기록되어 있으나 본편에서는 림주(琳珠)라고 기록되어 있다. [26] 태조의 제10비 숙목부인(肅穆夫人)의 장남 [27] 홍주 홍씨(洪州 洪氏) [28] 협주 이씨(俠州 李氏). 이전에는 합주 이씨(陜州 李氏) [29] 명주 왕씨(溟州 王氏). 사성정책 전에는 강릉 김씨(江陵 金氏) [30] 양근 함씨(楊根 咸氏) [31] 승주 박씨(昇州 朴氏). 현재는 순천 박씨(順天 朴氏) [32] 동주 김씨(洞州 金氏) [33] 이후 같은 가문의 김치양 천추태후와 사통하고 그 자식이 왕위를 노리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34] 신주 강씨(信州 康氏). 지금은 신천 강씨(信川 康氏) [35] 평주 박씨(平州 朴氏). 이전에는 평산 박씨(平山 朴氏) [36] 태조의 25비 [37] 태조의 제28비 [38] 평주 박씨(平州 朴氏). 이전에는 평산 박씨(平山 朴氏) [39] 태조의 25비 [40] 태조의 제27비 [41] 위치 미상인 곳은 기록된 순서로 봤을 때 제천과 진천 사이에 있는 “냉정”이 충주, 영월과 영월 사이에 있는 “냉수현”이 영월로 추정된다. “별근”의 경우 “붉은”의 가차로 보이므로 영월과 인접한 단양으로 추정이 가능하며, 한자는 다르지만 단월(丹月)역의 경우 괴산군에 소재한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나와있다. [42] 태조의 제11비 천안부원부인(天安府院夫人)의 아들 [43] 태조의 제4비 [44] 문원대왕의 아들 [45] 할머니 신명왕후의 성씨를 따랐다. [46] 태조의 제6비 [47] 이름은 아지(阿志) [48] 태조의 제6비 정덕왕후 류씨의 삼남 [추존] [50] 태조의 제7비 헌목대부인의 차남 [추존] [52] 대종의 3남 [53] 위의 궁인 한씨와는 다른 인물로, 《고려사》 세가에는 "작은 한씨(小韓氏)"로 언급된다. [54] 인경현비의 차남 [55] 문종의 동복동생 정간왕 왕기의 아들 [56] 문종의 손자인 예종의 제3비 [57] 《고려사》 열전 왕영 편에는 정종(靖宗)의 딸로 잘못 기재되어 있다. [58] 禔는 제, 지, 시 세가지로 훈음된다. 《고려사》 한글 변역본에서도 혼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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