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20:29:21

김진규(1985)

김진규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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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규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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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한민국 U-23 대회 주장
이천수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김진규
2008 베이징 올림픽
구자철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파일:FC서울 엠블럼(검빨배경).svg
FC 서울 역대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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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초대 2대 3대 4대 5대
한문배
(1984)
김광훈
(1985)
박항서
(1986)
정해성
(1987~1988)
최진한
(1989~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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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진
(1991~1992)
구상범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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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
윤상철
(1995)
이영익
(1995~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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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영
(1997)
김봉수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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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최용수
(1999~2000)
김귀화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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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헌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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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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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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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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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2018~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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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일류첸코
(2023)
오스마르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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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용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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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하나 시티즌 역대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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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택
(1997)
김태완
(1998~2001)
김정수
(2002)
최은성
(2003~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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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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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1987)
감독 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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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고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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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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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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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2020)
감독 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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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감독 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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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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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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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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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익수호)
(2021~2023)
감독 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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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김기동
( 김기동호)
(2024~)
: K리그1 우승 / : K리그2 우승 / : FA컵 우승 / :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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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 서울 전력강화실장
Football Club Seoul
파일:2021김진규.png
<colbgcolor=#b5191a><colcolor=#ffffff> 이름 김진규
金珍圭 | Kim Jin-Kyu
출생 1984년 12월 16일 ([age(1984-12-16)]세)[1]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읍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85cm[2]
직업 축구 선수 ( 센터백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b5191a><colcolor=#ffffff> 선수 전남 드래곤즈 (2003~2004)
주빌로 이와타 (2005~2006)
전남 드래곤즈 (2007)
FC 서울 (2007~2010)
다롄 스더 (2011)
방포레 고후 (2011)
FC 서울 (2012~2015)
무앙통 유나이티드 FC (2016)
파타야 유나이티드 FC (2016 / 임대)
파지아노 오카야마 (2016)
대전 시티즌 (2017)
감독 오산고등학교 축구부 (2018~2020 / 코치)
FC 서울 (2020~2022 / 코치)
FC 서울 (2023 / 수석 코치)
FC 서울 (2023 / 감독 대행)[3]
기타 FC 서울 (2024~ / 전력강화실장)
국가대표 42경기 3골 ( 대한민국 / 2004~2012)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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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5191a><colcolor=#ffffff> 가족 아내 김효희, 아들,
학력 영덕초등학교 (졸업)
강구중학교 (졸업)
안동고등학교 (졸업)
별명 푸짐바오, 먹거리강화실장[4]
병역 전시근로역[5]
등번호 전남 드래곤즈 - 36번(2003~2004), 6번(2007)
주빌로 이와타 - 36번(2005), 20번(2006)
FC 서울 - 66번(2007), 20(2008), 6번
다롄 스더 - 20번
방포레 고후 - 19번
파타야 유나이티드 FC - 6번
파지아노 오카야마 - 33번
대전 시티즌 - 20번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6번[6][7]
서명
파일:김진규1985서명.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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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클럽 경력
2.1. 전남 드래곤즈, 주빌로 이와타2.2. FC 서울, 다롄 스더, 방포레 고후2.3. 태국 진출, 파지아노 오카야마2.4. 대전 시티즌
3. 국가대표 경력4. 지도자 경력
4.1. 광주 FC 수석 코치 부임설4.2. FC 서울 U-18 코치4.3. FC 서울 코치4.4. FC 서울 감독 대행4.5. FC 서울 전력강화실장
5. 플레이 스타일6. 구설수
6.1. 심판 조롱 논란6.2. 염기훈 살인 태클 후 무징계 논란6.3. 광주전 관중 상대 욕설 논란
7. 여담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축구 선수 출신 감독. 現 FC서울 전력강화실장

2. 클럽 경력

2.1. 전남 드래곤즈, 주빌로 이와타

파일:attachment/Kim_Jin-Kyu_Júbilo_Iwata.jpg
주빌로 이와타 시절

2003년, 안동고등학교 동기인 백지훈과 함께 전남 드래곤즈에서 데뷔해 2004년 AFC U-20 축구 선수권 대표팀 주장으로 선발되는 등 주목받으며 구단 역대 최연소 득점을 기록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였다.

2005년에는 J리그 주빌로 이와타로 이적해 최용수와 함께 뛰며 활약했다...

2006 FIFA 월드컵 독일 직후 박주영과 함께 이탈리아 세리에 A 토리노 FC와 링크가 뜨기도 했지만 불발로 그쳤고 2007 시즌, J리그 생활을 청산하고 친정 구단 전남 드래곤즈로 복귀했다.

2.2. FC 서울, 다롄 스더, 방포레 고후

파일:fcseoul-20180825-233424-000-resize.jpg
철인 6호

전남에서 반 시즌 정도 소화한 다음 곽태휘와 트레이드되어 FC 서울로 옮겼고 매 시즌 20경기 이상 꾸준히 출전하며 주전으로 뛰었다.

2011년 FA로 풀리자 이적료 없이 중국의 다롄 스더로 이적해 안정환과 한동안 한솥밥을 먹었다. 때마침 스트라이커 정조국도 프랑스 오세르로 이적했기에 순식간에 주축 선수들을 잃은 서울 팬들은 격하게 분노했다. 그나마 정조국은 더 큰 무대로 간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김진규는 K리그보다 한 수준 아래로 평가 받는 중국 리그로 이적해 팬들의 분노가 더 심했다. K리그 디펜딩 챔피언 팀의 주전 센터백이 중국 리그로 이적한 것이니 리그 격 운운하며 눈에서 불을 뿝는 팬들 많았고 이 때문에 그가 승부조작 블랙리스트에 올라서 K리그 이적이 불가능하게 되어 중국으로 추방된 것이라는 인신공격성 낭설까지 떠돌았다.

이후 2011년 7월, 반 시즌만에 중국 생활을 청산하고 J리그 방포레 고후로 이적했으나 역시 오래 머물지 못했고 2012년 계약이 만료되자 FC 서울로 돌아왔다. 팬들은 오랫동안 호흡을 맞췄던 아디나 김주영, 김동우 같은 구단 내 젊은 수비수들과의 조화를 기대했다.

여담이지만 한동안 라이벌인 수원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줬다. 정확히 말하면 서울이 수원에게 맥 못 추던 윤성효 재임기에 약했다. 지금까지 수원을 맞아 자책골 두 번과 함께 잦은 실책성 플레이를 보여 줬으며 2012년 첫 라이벌전에서는 결정적인 찬스에서의 헤딩슛이 골문을 크게 빗겨나가며 팀의 0:2 패배를 지켜봐야만 했다. 그래서 일부 수원 빠들은 김진규를 상대로 "수원의 13번째 선수"로 비아냥대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김진규는 일본 주빌로 이와타에서 뛰던 당시 수원과의 AFC 챔피언스 리그 조별 리그 경기에서 반칙으로 PK를 헌납한 적이 있고 요행이 골키퍼의 선방으로 체면은 살렸으나 얼마 후 높은 공에 헛발질을 하며 나드손에게 결승골을 허용하는 결정적인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8월 18일 벌어진 2012 시즌 3번째 수원전에서도 페널티 박스안에서 파울을 범하며 페널티킥을 내줬고, 후반엔 공중 볼 클리어링에 실패하는 결정적인 실책으로 실점의 빌미를 제공하며 0대2 완패의 주역이 되었다. 그러나 2013 시즌 8월 3일에 열린 슈퍼매치에서는 몰리나의 프리킥을 헤딩 결승골로 연결시켜 팀에게 3년 만의 슈퍼매치 승리를 안겼다. 자신의 자책골로 시작되었던 슈퍼매치 무승의 기록을 자신의 결승골로 끊어낸 것이다.

그리고 슈퍼매치에서 몇 번 안 좋은 모습을 보였을 뿐[8] 팀은 시즌 내내 꾸준한 모습을 보이며 우승했고 김진규와 아디가 버틴 수비진은 최소 파울로 최소 실점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우승에 큰 공을 세웠다. 시즌 종료 후 마음 편하게 상무에 입대해 2013 시즌은 2부 리그에서 시작할 줄 알았으나 훈련소 입소 후 받은 재검에서 예전에 입은 오른쪽 무릎 부상이 재발해 훈련소에서 나와[9] 수술을 마치고 재활에 들어갔고 FC 서울 전지훈련에 참가했다.

시즌 초반에는 수술 여파로 폼이 떨어졌고 파트너 김주영도 동반 부진하는 바람에 서울 수비진은 완전히 붕괴, 7경기 연속 무승의 원흉이 되었으나 시즌 중반 폼이 어느 정도 회복되면서 다시 준수한 폼을 되찾았다. 십자인대 부상 이후 주력이 예전만 못한 김주영보다는 노련한 아디와 호흡을 맞출 때 더 준수한 모습을 보여줬다. 팀의 주포 데얀이 부상 여파와 최용수 감독의 혹사로 2012 시즌만 못한 가운데 갑자기 공격본능을 폭발, 17라운드 성남전부터 21라운드 수원전까지 5경기 연속 공격 포인트(5경기 4골 1도움)라는 진기록을 세웠다. 2012 시즌까지 통산 172경기 9골을 기록하던 선수가 2013 시즌 20경기에서 6골을 기록했다. 최종성적은 35경기 6골 1도움. 14 시즌에는 기존의 김주영, 새로 영입된 이웅희와 함께 쓰리백을 이뤄 출전했다. 시즌 초반에는 적응에 애를 먹으며 고생했으나 시즌 중반이 되자 쓰리백에 훌륭하게 적응해 공격수들이 부진한 와중에도 좋은 폼을 보여줬다. 시즌 기록은 33경기 출장 2골 2도움.

2015 시즌에는 무난한 활약을 이어가다 4월 26일 광주전에서 왼쪽 종아리 근육 파열 부상을 진단, 전치 10주를 끊었다. 회복하는 동안 빈 자리는 신예 박용우와 경찰청에서 복귀한 김동우가 성공적으로 채웠고 이 때문에 2015 시즌 후반에는 주전에서 완전히 밀렸다. 쓰리백의 중앙 수비수는 박용우와 오스마르가 상황에 따라 번갈아가며 담당하고 스토퍼 자리 둘은 김진규보다 젊고 빠른 김동우와 김남춘, 이웅희가 맡고 있어 들어갈 틈이 없어졌다.

2.3. 태국 진출, 파지아노 오카야마

파일:external/www.fagiano-okayama.com/pic_t2016_33.jpg
파지아노 오카야마 시절.

15 시즌 종료 후 팀을 떠날게 확실시됐다. 일단 동계 훈련에도 참여하지 않은 듯하며 해시태그 중 하나가 백수로 써져 있는 데다가 2016년 이적해 온 주세종이 김진규의 등번호였던 6번을 물려받는 등 여러 상황으로 보아 이적이 확실시되는 분위기인 듯했다. 게다가 정인환의 영입과 김원식의 임대 복귀로 센터백으로서의 입지도 애매했던 상황이었고 결국 태국 프리미어 리그로 떠나게 되면서 FC 서울과 이별했다. 이후 무앙통 유나이티드 FC와 계약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얼마 되지 않아 파타야 유나이티드로 임대되었다. 그리고 그 해 여름 과거 황진성이 뛰었던 J2리그 파지아노 오카야마로 다시 이적했다. 김진규 본인이 인스타그램에 유니폼을 입고 올린 사진 파지아노 오카야마 공식 홈페이지 뉴스 그러나 팀이 1부 리그 승격에 실패함에 따라 시즌 종료 후 다시 방출됐다.

2.4. 대전 시티즌

파일:IRrdaq5TSnNrO_w4Kjqsz3_2afPU.jpg

이후 은퇴를 고려하기도 하였지만, 대전 시티즌에 입단하여 K리그 무대로 복귀하였다. # 이번 김진규의 영입은 대전시티즌 입장에서는 2007년 고종수 영입 이후 영입한 선수 중 가장 네임벨류있는 선수 영입였고, 그렇기에 많은 대전팬들로부터 큰 기대를 모았으며, 팀의 주장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시즌 전 미디어데이에서 개막전에서 자신이 프리킥을 차면 안산팬들이 긴장할 것이라 언급함과 동시에 출정식에서도 자신의 장기이기도한 프리킥에 대해 농담을 하며 2017시즌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안산 그리너스 FC와의 리그 첫경기에 선발 출전해서 노련함을 바탕으로 윤신영과 함께 나름 중앙 수비 라인에서 준수한 활약을 보였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발이 느린 김진규와 윤신영 조합의 중앙 수비진들에게 있어 이영익 감독이 보다 더 공격적으로 나아고자 시도한 수비 라인을 올렸던 것은 역부족이었고 후반 막판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며 실점의 빌미를 제공하며 대전은 안산에게 2:1로 패했다. 이후 시즌 전반기동안 대전 시티즌의 주전 센터백으로 많은 경기를 소화하고 있지만 노쇠한 기운이 역력해 상대 공격수를 놓치는 장면이 자주 빚음과 동시에 앞서 말한 대로 발이 느리다는 단점을 그대로 보이며 아쉬움을 남겼다. 또한 6월 26일 서울 이랜드 FC전 이후 심한 부상을 당해 사실상 시즌 아웃되었으며, 10월 29일 안산 그리너스 FC와의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모처럼 교체 출장하였다.

3. 국가대표 경력

각급 청소년 대표를 경험하고 성인 대표팀 데뷔는 조 본프레레 감독 부임 초기인 2004년 7월 14일 트리니다드 토바고 전에서 했다. 당시 같은 소속 구단 동료였던 베테랑 김태영의 뒤를 이을 재목으로 주목받아 만 19세의 나이로 2004 AFC 아시안컵 중국 명단에 발탁됐지만 8강 이란전에서 왼쪽의 이영표와 함께 시종일관 털리는 모습으로 수비 불안에 일조하면서 3-4 패배로 탈락(6등)한다. 당시 이란 벤치를 향해 법규를 난사하기도 했다.



그 이후 2005년부터 박재홍, 박동혁과 함께 3백의 한 축으로 대표팀에 차출되면서 기회를 부여받았고, 2005년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동아시안컵 중국전에서 그림같은 프리킥 골을 성공시키기도 하였다. 2006년 딕 아드보카트 감독 선임 이후에도 대표팀에 눈도장을 받으면서 2006년 독일 월드컵에 주전 센터백으로 출장했다.[10]

1 이운재
C
· 2 김영철 · 3 김동진 · 4 최진철 · 5 김남일 · 6 김진규 · 7 박지성 · 8 김두현
9 안정환 · 10 박주영 · 11 설기현 · 12 이영표 · 13 이을용 · 14 이천수 · 15 백지훈 · 16 정경호
17 이호 · 18 김상식 · 19 조재진 · 20 김용대 · 21 김영광 · 22 송종국 · 23 조원희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딕 아드보카트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핌 베어벡
스태프
파일:미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압신 고트비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홍명보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정기동



핌 베어백 감독 재임 시절에도 부동의 국대 주전 센터백이었으나, 2007 AFC 아시안컵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태국·베트남을 포함한 성인 대표팀 무대, 올림픽 대표, K리그 등 많은 경기에 출전하며 혹사하다가 한동안 부상으로 폼이떨어져 고생했다.

1 이운재
C
· 2 송종국 · 3 김진규 · 4 김동진 · 6 이호 · 7 최성국 · 8 김두현 · 9 조재진
10 이천수 · 11 이근호 · 12 이동국 · 13 김치곤 · 14 김상식 · 15 김치우 · 16 오범석 · 17 김정우
18 우성용 · 19 염기훈 · 20 손대호 · 21 김용대 · 22 강민수 · 23 정성룡 · 27 오장은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핌 베어벡
코치
파일:미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압신 고트비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홍명보 · 파일:브라질 국기.svg 코사


허정무 감독 부임 이후 곽태휘, 조용형이 부상하면서 2008년 올림픽 대표팀 이후로 한동안 태극마크와는 인연이 없다가 최강희 감독이 부임한 12년 8월, 5년 만에 마지막 태극마크를 달았다.

4. 지도자 경력

4.1. 광주 FC 수석 코치 부임설

2017 시즌 종료 후 은퇴를 하고 광주 FC의 코치로 부임한다고 보도됐지만 이후 김진규는 인터뷰를 통해 광주 코치직 부임 이야기는 처음 듣는 이야기라며 코치 부임설을 부인했다. 애초에 K리그 구단 코치를 하려면 A급 자격증이 있어야하는데 김진규는 A급 자격증이 없기에 코치로 부임하는게 불가능했다. 또한 아래 언급될 2015년의 구설수를 생각해 봐도 김진규가 광주에 오면 팬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이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광주에서 플레잉 코치 제안이 왔지만 단독 기사에서는 이를 수석 코치로 잘못 보도했다고 한다. 게다가 현역 생활 연장을 위해 태국 진출을 계획 중이었으나 태국 구단에서 이 단독 보도 기사를 접하고 '코치 영입 제의가 올 정도의 선수가 무슨 현역으로 오겠다는 것이냐'라고 화를 내 계약이 무산됐다고 한다.

결국 광주의 수석 코치로는 김진규 대신 유경렬이 선임됐다.

4.2. FC 서울 U-18 코치

파일:sptPostArticleImage-80329.jpg

어찌됐든 예정대로 2017 시즌을 끝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고 친정 FC 서울의 U-18인 오산고등학교 축구부의 코치로 부임하면서 명진영 감독을 보좌하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


서울 구단은 그의 공로를 인정해 2018년 5월 20일 전북 현대와의 홈경기 하프타임에 은퇴식을 치뤄줬다.

2020년을 앞두고 과거 구단 동료였던 차두리 신임 감독이 오산고에 부임했고 약 반 년 동안 차두리 감독을 보좌했다.

4.3. FC 서울 코치

2020년 6월 3일 FC서울이 김성재 수석 코치, 윤희준 코치와 결별하고 FC 서울의 U-18인 오산고등학교 축구부를 지휘하던 김진규 코치를 합류시켰다. 과거 대표팀과 서울에서 사제의 연을 맺었던 김호영 수석 코치와 함께 합류했다.

합류 후 약 두 달 만에 최용수 감독이 사임하고 나서 김호영- 박혁순- 이원준으로 이어지는 3연속 감독 대행 체제를 겪으며 프로 지도자 데뷔 시즌을 어지럽게 치뤄냈다.

2021 시즌을 앞두고 박진섭 감독이 부임했지만 9월 6일 박 감독이 자진 사임하고 안익수 선문대 감독이 부임했다. 이로써 1군 합류 후 15개월 동안 무려 여섯 번째 감독이 바뀌는, 팀의 암흑기를 몸소 체험 중이다.

다행히 안익수 감독 체제에서 구단이 안정권에 접어들어 순항하며 파이널 B 1위를 차지하는데 기여했다.

2022년 3월 19일 FC 서울의 2022시즌 K리그 1 홈개막전에서 코로나 19에 확진된 안익수 감독을 대신해 1일 감독 대행으로 경기를 이끌었다. 집단 감염으로 주전이 대거 이탈한 스쿼드를 가지고 1:2 패배라는 나쁘지 않은 결과를 얻어냈다.

2022년 11월 7일 대한축구협회 P급 지도자 강습회 수강생으로 선발됐다. #

2023 시즌을 앞두고 기존 박혁순 수석 코치가 전력 강화실로 보직이 변경됐고 자연스럽게 김진규가 수석 코치로 승격됐다.

13라운드 울산 현대 원정에서 안익수 감독이 퇴장 당하자 14라운드 제주와의 홈경기에서 감독 대행으로 지휘하며 1:1 무승부를 거뒀다.

26라운드 친정 구단 대전 하나 시티즌 원정을 앞두고 안익수 감독이 경고 누적으로 결장하게 되자 감독 대행으로 또 지휘하게 됐고 끝까지 골을 퍼부우며 추격했지만 팀은 3:4로 패배했다.

27라운드 대구 FC와의 홈경기에서 2:2 무승부를 거두고 경기후 기자 회견에서 안익수 감독이 사임을 발표하면서 정식 감독이 선임되기 전까지는 감독 대행으로 팀을 이끌어갈 가능성이 높다.

우선 P급 라이센스를 수강 중인 상황이라[11] 당장은 구단을 이끌어가는 데 문제는 없는 상황이다.

4.4. FC 서울 감독 대행

2023년 8월 22일, FC 서울 안익수 감독의 사임에 따른 김진규 수석 코치의 감독 대행 선임을 공식 발표했다. #

대행이라고 해도 은퇴한 지 6년밖에 안 된 상황에서 정식 대행[12]으로 선임된 것은 상당히 빠른 편이다. 그만큼 리더십과 지도력이 있다는 것이지만 관건은 다혈질적인 성격과 너무 젊은 나이라는 것이 문제점이다. 이로 인해 최원권의 길을 걷지 않을까라는 우려도 있긴 있다.[13]

부임 후 첫 맞대결 상대가 K리그1 선두를 달리고 있는 울산 현대이며[14], 그 다음 경기가 원정 슈퍼매치라는 것도 부담스러운 상황이다.[15]

28라운드 울산 현대와의 홈경기에서 사실상의 6백 전술을 들고 나와 일류첸코의 선제골과 윌리안의 극적인 동점골로 2:2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나쁘지 않은 스타트를 끊었다.

29라운드 수원 삼성 블루윙즈와의 슈퍼매치 원정경기에서 최철원의 선방쇼에 힘입어 일류첸코의 선제골을 잘 지키면서 1:0으로 승리하며, 감독 대행 부임 후 첫 승을 기록했다. 다만 후반으로 갈수록 팀의 텐션이 떨어지는 고질적인 문제점은 여전했고, 유독 빅찬스 미스가 많아 막판까지 쫄리는 경기를 했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16]

33라운드 천적 전북 현대와의 마지막 리그 홈경기에서 전반전 전북의 골문을 공격했지만 골이 안 나왔고 후반전 내리 두골을 내주면서 2:0 패배와 하위 스플릿 직행 전북전 징크스를 또 이어갔다.

35라운드 수원 FC와의 원정 경기에서 난타전 끝에 4:3 역전승을 하며 또 1년 만에 역전승을 만들어냈다.

12월 2일, 38라운드 대전 하나 시티즌와의 마지막 경기를 2:2 무승부로 마친 후 시즌이 끝나면서 이후 거취가 관심에 올랐다. 정규 감독 계약 가능성도 일부 언급되긴 했지만 결국 12월 14일, 김기동 감독이 공식 선임되면서 지휘봉을 내려놓았다.[17]

4.5. FC 서울 전력강화실장

2024년 1월 26일, FC 서울 전력강화실장으로 보직을 변경했다. 이원준의 후임이다.

5. 플레이 스타일


" 베컴이 차면 골키퍼가 쫄고, 김진규가 차면 관중이 쫀다."
김치우
"진규가 제가 상대해본 선수 중에 슛 파워 탑3 안에 들어요. 근데 골대로 안 와."
김영광

거친 플레이와 구설수 때문에 가진 실력에 비해 저평가를 당한 선수인데 본프레레부터 베어벡까지 대표팀 감독들의 변함없는 신임을 받으며 2006~08년도까지 대표팀 수비진을 책임졌던 선수로, 실력없이 거칠기만 한 선수는 절대 아니었다.[18]

전성기적에는 김태영의 뒤를 잇는 파이터형 수비수로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름을 날렸다. 타고난 피지컬을 바탕으로 한 터프한 몸싸움과 대인마크가 트레이드 마크였으며 겉으로도 드러나는[19] 강력한 다리 힘에서 나온 롱패스를 활용한 공격전개가 K리그 기준으론 매우 우수해 귀네슈 재임기부터 최용수 재임기까지 늘 서울공격의 시발점 역할을 했다. 김진규가 노쇠화하여 떠난 서울은 2021년까지도 비슷비슷한 파이터형 수비수만 넘쳐나고 빌드업 가능한 센터백이 없어 공격전개로 곤란을 겪었다.[20]

프리킥도 곧잘 찼는데 파워 자체는 엄청나게 묵직하지만 프로 데뷔 후 지금까지 딱 3번 들어간 실로 부정확한 물건으로[21], 삼동현의 골과 함께 지구멸망의 징조로 불렸다. 프리킥을 찰 때는 항상 유니폼 바지 자락을 올리고 차는 루틴이 있었다. 본인 말로는 처음에 허벅지가 끼는 느낌이 불편해서 그랬다가 나중에는 버릇이 되어버렸다고.

또한 앞선 김치우의 발언과 같이 골키퍼나 수비진이 아닌 골대 뒤 관중들을 두렵게 하는 프리킥으로 유명하다. 그 3번 중 1번 보러가기 그래서 프리킥은 김치우 몰리나가 주로 찼다. 경험이 쌓이고 수비진 고참이 되고 나서는 라인을 조율하는 커맨더 역할도 수행했다. 또한 세트피스 상황에서의 공격 가담도 좋아서 13시즌에는 수비수면서도 6골을 기록했다.

단점은 발이 느리고 순발력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얼마나 느렸냐 하면 대표팀 시절 100m 측정 기록이 13초 중후반대였다. 12초 후반대인 수비형 미드필더 김상식이 주력은 일반인 수준이란 평가를 들었는데 그거보다 더 느렸다. K리그 주전급 공격수들 주력이 못해도 100m는 12초대에 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를 직접적으로 수비해야 하는 센터백으로서는 매우 느린 것이다. 이로 인해 일대일 돌파는 피지컬로 찍어 누르면서 잘막고도 체력이 떨어지는 후반전 막판에 공간침투를 잘 허용하여 실점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때때로 있었다. 즉 발이 빠르고 무게 중심을 잘 활용하는 선수들에게 매우 취약한 면모를 보였다는 말이다. 헌데 FC 서울 세뇰 귀네슈 시절부터 다이렉트 패스를 통한 공격축구를 모토로 삼고 주전 센터백인 김진규의 힘있고 빠른 롱패스를 활용하는 방안으로 수비진을 끌어올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서울 감독들은 아디, 김주영, 이웅희 같이 발 빠르고 활동량 많은 센터백들을 파트너로 붙였다. 이 외에도 다혈질인 성격 탓에 불필요한 카드를 수집하거나 지나치게 거친 플레이로 눈총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도 있어 타 구단 팬들은 싫어했다. 성격 문제는 나이 들어 후배 수비수들을 리드해야 할 위치가 되고 나선 다소 나아졌다.

J리그에서 복귀한 2007년부터 2014년까진 명실공히 K리그 A급 수비수였다. 서울이 2007, 2009, 2012 시즌 리그 최소 실점, 2010 시즌 최소 실점 2위를 기록하는 데는 김병지, 김용대, 아디 등 뛰어난 동료들의 공도 컸지만 동료들이 바뀌는 동안에도 쭉 팀의 중앙 수비 라인을 책임진 김진규의 공이 컸다. 여기에 최악의 스타트를 보였던 13 시즌에는 탁월한 공격 가담으로 주포 데얀의 부상과 쓰리백으로의 전환 실패 여파를 딛고 일어서는데 크게 기여했다.

6. 구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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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플레이와 다혈질적인 성격, 거기에다 소속 구단까지 K리그 팬덤 내에서도 공공의 적 취급인 FC 서울 출신이라는 3박자가 겹쳐지면서 K리그에서 구설수도 많고 안티팬이 많기로는 거의 1, 2위를 다투는 선수였다. 그래서 FC 서울 시절에는 사실상 FC 서울 팬들을 제외하면 모든 구단 서포터가 거의 다 싫어하는 선수로 봐도 무방했다.

사실, 김진규 이전에 악명이 높았던 게 같은 구단의 김한윤 이청용이지만 이청용은 풀시즌 겨우 2년 뛰고 해외 진출했고, 김한윤은 본래 거친 플레이를 하는 선수이긴 했지만 그것이 타 구단에 소속돼 있을 때에는 부각되지 않다가 당시 공공의 적 위치에 있던 FC 서울로 이적한 후 비방의 목적으로 타 구단 팬들에게 거친 플레이 스타일이 부각된 것이다.

여기서 김한윤이 김진규와 달랐던 것은, 김한윤의 플레이가 거칠긴 했지만 실점 위기 상황에서 카드를 받을 것을 각오하고 실점을 막아내기 위한 반칙성 플레이를 했다는 것과 상대 선수에게 도를 넘는 큰 부상을 입힐 정도로 거칠지는 않았다는 것이 있다. 그래서 김한윤은 유니폼을 잡아서 끌거나 몸싸움을 했지, 가급적이면 백태클이나 발목을 노리면서 부상을 입히는 비상식적인 태클을 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통계상 400경기를 넘게 뛴 상태에서 세 경기당 한 번 꼴로 경고를 받았으며 경고 누적 퇴장 횟수도 그만큼 많지만 의외로 다이렉트 퇴장 횟수는 단 세 번밖에 없다. 김한윤이 얼마나 영악하게 파울을 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비매너 플레이를 했을 때도 상대 선수의 기분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하는 데다 가라앉히려고 하면서 옐로카드만 받아내고 레드카드를 많이 받는 선수도 아니었다. 게다가 심판에게는 손을 모아서 사과도 잘 했고 최소한 반칙 상황을 잘 넘겨보려는 시도는 했다.

반면에 김진규는 자신의 거친 플레이에도 잘못이 없다고 하면서 지나치게 어그로를 끌고 타 구단 선수 및 팬들의 공분을 샀으며 상대 선수에게 큰 부상을 입히는 파울도 여러번 하는 물의를 일으켰다. 보통의 선수들이 레드카드 및 옐로카드를 피하기 위해서 상대 선수에게 하는 사과의 제스처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래도 선수로서의 마지막을 보낸 대전 시티즌 시절에는 과거 젊은 시절 의욕이 앞선 나머지 과격했던 자신의 이러한 행동들에 대한 문제 의식을 느끼고 반성했는지 다혈적인 성격과 과격한 행동 등을 자제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타 구단 팬들의 사인이나 사진 요청도 잘 응해 줬으며 오히려 동료나 젊은 선수들이 거친 플레이나 비신사적인 행동을 하거나 심판에게 과격한 항의를 하면 주장이자 고참으로서 옆에서 말리면서 진정시키는 등, 현재는 갱생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6.1. 심판 조롱 논란

2010년 경남 원정 경기서 0-1로 뒤지던 후반 막판, 김진규가 거친 파울로 경고를 받았다. 김진규는 이에 항의하다 돌아서면서 손가락을 머리에 갖다대고 빙빙 돌리는 제스쳐를 했는데 이걸 주심이 보고 바로 경고 한 장을 더 꺼내서 김진규는 퇴장당하고 만다. 사실 주심이 뻔히 보고 있는 앞에서 그런 제스쳐를 한다는 것은 대놓고 주심을 모욕하겠다는 의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저게 쓸데없는 짓해서 퇴장당하냐?"라고 좋게 보는 관중들은 아무도 없었다.

6.2. 염기훈 살인 태클 후 무징계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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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시즌, 득점도 기록하는 등, 무난한 활약을 보여주다가 4월 18일 슈퍼매치와 4월 26일 광주전 두 경기 연속 논란을 일으켰다. 슈퍼매치에서는 큰 점수 차로 뒤지고 있던 상황에서 염기훈 선수의 왼쪽 무릎으로 향하는 살인적인 태클을 시도했고 이에 서정원 수원 감독이 흥분해 레드카드를 안 준 심판에게 강하게 항의했다. 영상 보면 알겠지만 당연히 퇴장이 나와야 했고 추가적인 징계까지 감수해야 할 심각한 태클이다. 그런데도 주심은 단순 경고로 넘어갔고 사후 분석을 통한 사후 징계도 내려지지 않았다. 김진규의 살인 태클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퇴장감이고 감독 최용수도 명백한 퇴장감이라고 인정했다. 사후 징계 잘 주기로 소문난 연맹은 이미 김종혁 주심이 경기 중에 카드를 주는 판단을 했기 때문에 추가 징계는 없다는 황당한 논리의 병맛스러운 결과를 내놓는다.

참고로 경기 중 주심의 징계 판정이 있었으면 추가 징계는 주지 못한다는 룰은 연맹 룰에 전혀 없다. 그런 병맛 룰이 있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도 영국 FA뿐이다.

타이밍을 봤을때 고의는 아니고 공을 무리하게 차려 했지만 공이 아예 지난 상황에서 스터드로 무릎을 찍었기에 당연히 퇴장감이 맞다.

6.3. 광주전 관중 상대 욕설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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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광주전에서는 후반 교체 투입 후 후반 5분여 만에 근육 이상을 호소하며 쓰러졌는데 이를 광주 서포터스 측에서 돌을 던진 것으로 오해, 관중석으로 쌍욕을 시전하였고 한참 후배인 이웅희가 다가와 입을 급하게 막았다. 보러가기 하필 이때 광주의 원래 홈구장 광주월드컵경기장의 시설 보수 관계로 목포축구센터에서 경기가 치러졌는데 종합 경기장인 광주월드컵경기장과 달리 목포축구센터는 피치와 관중석이 밀착된 전용 구장이기 때문에 김진규의 욕설은 관중들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며칠 뒤 밝혀졌지만 그가 당한 종아리 근육 파열의 경우 실제로 종아리 근육이 뚝 끊어지면서 빡하는 소리를 본인이 느낄 정도기[22] 때문에 똑같은 경험이 있는 선수들의 증언에 의하면 마치 돌 같은 걸로 맞은 듯한 충격이 있다는 걸로 보아서 오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확실하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관중석에 쌍욕을 날린 건 도저히 옹호가 불가능한 상황[23]. 더구나 자기의 부상을 관중 탓으로 돌린 희대의 병맛짓이었지만 김진규는 내내 떳떳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리고 그 이후의 대처가 논란을 더욱 가중시켰는데 28일까지 그 어떤 사과도 하지 않다가 29일이 되어서야 사과문을 게재하였는데 안 그래도 늦은 대처에 시선이 곱지 않은데 내용이 문제였다.

대충 "난 크게 잘못한 거 없고 너네가 유발한 감이 있지만 그래도 사과하라니까 사과한다."라는 식의, 사과문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수준의 글이다. 선수가 팬들에게 욕설을 퍼부은 사상 초유의 사태에도 연맹 측에서는 증거로 삼을 만한 녹취록이 없다는 어처구니 없는 핑계를 대며 선수에게 징계를 내리지 않았다.

이 사건 이후 한교원, 이범영이 논란이 일어날 짓을 하게 되자 구단에서 자체 징계를 내려 자필 사과문도 쓰게 했는데 그들의 사과문은 김진규에 비해 훨씬 진심어린 사과라는 점에서 논란이 재점화되기도 했다. 그 와중에 하필 이 경기에서 왼쪽 종아리 근육 파열 부상을 진단, 전치 10주를 끊었다.

회복하는 동안 빈자리는 신예 박용우 안산 경찰청 축구단에서 복귀한 김동우가 채웠다. 이에 따라 2015 시즌 후반에는 주전에서 완전히 밀린 모양새. 쓰리백의 중앙 수비수는 박용우와 오스마르가 상황에 따라 번갈아가며 담당하고 2개의 스토퍼 자리는 김진규보다 젊고 빠른 김동우와 김남춘, 이웅희가 맡고 있어 들어갈 틈이 없어졌다.

2016년 4월 27일, 아이러브사커 국내 토크방에는 광주의 이종민이 문제의 영상을 공유한 포스팅에, 김진규가 "아주 동생 이미지 한번에 보낼려고 대단한 광주주장이구먼 ㅋㅋ"이라는 댓글을 단 페이스북 캡쳐가 올라와 한동안 빈축을 샀다. 페이스북 게시물 원본은 이후 삭제했다. 이종민이 어떤 의도로 영상을 공유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2018년 9월, 상주 상무에서 전역하고 구단에 복귀한 김진환과 여름의 소식을 알리는 광주 FC의 페이스북 게시물이 올라오자 이들과 동기인 울산 현대의 김태환이 '한마디 해도 되나요?'라고 댓글을 달았고 이 김태환의 댓글에 갑자기 김진규 본인이 출몰해 '넌 빠져있어 울산 페이스북가서 너의대해서 좀말해도되나?ㅎㅎㅎ'라는 장난성 댓글을 남겼다. 당연히 열받은 광주 FC 팬들의 집중포화가 쏟아졌고 얼마 안 가 김진규 본인이 댓글을 삭제했다. 2022년 2월, 노는 브로 2에 게스트 출연해 이에 관련된 썰을 풀었고 괜한 오해를 했다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죄송하다는 입장을 전했다.[24]

나중에 이천수의 개인 유투브 채널에서 출연해서 말하길, 전혀 경기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급작스럽게 투입됐고 처음 당해보는 상황에 당황해서 상황까지 착각했으며 그 종아리 근육 파열 부상 이후 제대로 몸이 회복되지 않아 뛰는 게 어려워져서 길게 선수 생활을 못하고 은퇴했다고 한다. ###

훗날 이스타TV에서 추가로 이야기 한 내용으로는, 광주 서포터 두 명 정도가 젼반전부터 도를 지나치는 욕설을 해서 예민해진 상황에 이런 사건이 벌어졌다고 한다.

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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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년부터 가수 홍진영과 약 1년 간 연인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2007년 5월 결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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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년부터 2013년까지 배우 손성윤과 연애했다가 결별했다.

  • 2012년 수원 삼성과의 FA컵 16강전에서 오장은에게 파울을 범하면서 둘이 크게 충돌한 적이 있는데 놀랍게도 이 둘은 2017년과 2018년, 나란히 대전 시티즌의 주장이 됐다.
  • 위에서 언급한 노는 브로 2에 출연해 축구 경기를 했는데 이때 전 농구 선수 전태풍의 농구식 마크 수비에 진절머리가 났는지, "이 수비 방법을 축구에다 접목시켜 봐야겠다" 고 한 적이 있다.[25]
  • 은퇴하고 살이 엄청나게 불었다. 그 때문에 붙은 별명이 푸짐바오이다. 이천수 유튜브 영상에서 2002년, 2006년 월드컵 이야기를 하며 입담을 과시했는데 이 영상에서 그의 후덕해진 모습을 볼 수 있다. 홍명보 감독이 달라진 그의 모습을 보자 "이 새끼가 이운재가 돼 갖고"라며 디스했다고 한다.
  • 기성용에게 "100kg 넘는 사람은 P급 따면 안된다"는 놀림을 받기도 했다. 이 사건 때문에 팬들이 그의 몸무게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 자신의 첫 제자인 김주성을 매우 아끼는 것으로 보인다. 김주성 외에도 오산고 시절 제자들에게 아주 잘 대해줬다고 전해진다.
  • 시원시원한 언변과 때로는 위트까지 겸비한 발언 등 입담이 상당하고 유머러스한 편이다. 조성룡 기자는 김진규의 기자 회견을 두고 모두가 시간 가는 줄 몰랐을 만큼 재밌었다고 했을 정도다. #


[1] 주민등록증상 생일은 1985년 2월 16일이지만 이스타TV 히풋 초대석에서 실제로는 1984년 12월 16일생이며, 아버지가 호적 신고를 늦게 했다고 밝혔다. [2] 이스타TV에 출연했을 때 100kg 미만이라고 밝혔다. [3] 전임 안익수 감독의 시즌 도중 사임에 따른 권한 대행 [4] 현역 은퇴 후 늘어난 몸무게로 인해 축구 팬들 사이에서 김진규의 현 직책인 FC서울 전력강화실장을 본떠서 “먹거리 강화실장” 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5] 과거 입은 오른쪽 무릎 부상 재발 [6] 2005.10~ 독일 월드컵~2006.11, 2008, 2012 [7] 28번 2004 AFC 아시안컵 중국, 5번 2004.12~2005.1, 36번 2005.3~2005.6, 4번 2005 동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2005.8, 3번 2007~ 2007 AFC 아시안컵 [8] 사실 안 좋았다고 하기도 뭐한 게 실수가 좀 있어서 그렇지 경기 전체를 보면 꾸준했다. 특히 라돈치치-스테보라는 장신 트윈 타워를 저지하는데는 김진규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9] 이 뜻밖의 병역면제로 혜택을 입은 선수가 경남 FC의 이용기. 밀렸다가 김진규가 빠지면서 남은 자리에 들어갔다. [10] 첫경기 토고전에선 김진규- 김영철- 최진철의 쓰리백이었고, 윙백인 이영표와 송종국도 수비적인 플레이로 일관해 전반전 내내 공격이 안 풀렸다. 두번째 프랑스전에는 김영철이 최진철과 중앙 수비진을 꾸렸고, 마지막 스위스전에는 다시 김진규와 최진철이 중앙수비 조합을 이뤘다. [11] 참고로 수강생만 되어도 감독을 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12] 안익수 감독의 카드 문제 혹은 코로나 확진 시에는 잠시 지휘봉을 잡은 적은 있었으나 임시 대행이었다. [13] 최원권도 다혈질에 김진규와 P급 면허 동기이며 나이도 고작 3살 차이에다가 1년 차이로 은퇴했다. 그 만큼 둘 다 지도자 경력이 적다는 것이다. [14] 서울은 울산을 상대로 2016년 10월 28일 홈에서 승리한 이후 지금까지 승리를 못하고 있는 등 울산을 상대로 극악의 열세를 보이고 있다. [15] 아무리 수원이 이번시즌 부진하다지만 서울에게 언제나 수원은, 그것도 빅버드 원정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경기이며, 순위가 반대여도 경기장이 바뀌어도 마찬가지다. [16] 여담으로 이 경기는 유독 양측 모두 빅찬스 미스가 많았다. 수원은 애매한 상황에서 두 골을 인정받지 못했고 결정적인 슈팅이 슈퍼 세이브에 연달아 걸리거나 서울 역시 김진야, 윌리안의 결정적인 슈팅이 골대를 맞고 나오는 등 소위 억까가 많았던 경기였다. [17] 당초 감독 대행 선임 당시 목표로 했던 파이널 A 진출에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던 데다가 형제 기업 LG 소속의 프로 스포츠 구단인 LG 트윈스가 29년 만에 통합 우승한 데 자극을 받은 허태수 GS그룹 회장이 포항에서 명장으로 인정받은 김기동 감독의 선임을 강력하게 밀어붙였다고 한다. [18]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나이를 고려해볼 때 그가 얼마나 대형 유망주로 주목 받았었는지 알 수 있다. [19] 다리 힘이 중요한 축구선수들 중에서도 키에 비해 허벅지가 두꺼운 걸로 유명하다. 맞는 바지가 없어서 36인치를 억지로 입는다고. 그래서 붙은 별명이 힘진규, 허벅진규. [20] 이 문제는 오스마르를 센터백으로 내리고, 빌드업 능력 좋은 이한범이 데뷔하면서 비로소 해결되었다. 최용수가 15시즌 김진규 대체자로 전격 발탁해 첫해부터 20경기 넘게 소화시켰던 박용우가 정상적으로 서울에서 포텐이 터졌다면 훨씬 빨리 해결되었을 텐데 최용수가 16시즌 중간에 떠나고, 후임으로 온 황선홍 시절에 2년차 징크스 겪는다 싶자 울산에 냅다 팔아버렸다. [21] 그나마 한번도 2013 아챔에서 베갈타 센다이의 골키퍼가 알을 까서 들어간 골이다. [22] 십자인대 아킬레스건도 똑같다고 한다. [23] 프리미어 리그 리오 퍼디난드의 경우 관중이 던진 동전을 맞고 피부가 찢어지는 상처가 났지만 관중석에 욕은 하지 않았다. [24] 근데 아직 표정 자체가 진정성이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25] 실제로 농구와 축구는 경기장 규격만 다를 뿐이지 영역 스포츠라서 공간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은 똑같다. 대표적인 예로 NBA의 전설인 스티브 커 스테픈 커리 FC 바르셀로나의 경기를 보고 많이 참고했다고 하며 반대로 가레스 사우스게이트 감독도 경기가 없을 때 축구 경기 말고 NBA, NFL 등을 참고해 전술을 짠 적도 있을 정도다. 어쩌면 지금 현재 자신의 위치가 코치이니 이게 좋은 방법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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