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22:59:53

이은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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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필명 남천(南川)·강산유인(江山遊人)·두우성(斗牛星)
아호 노산(鷺山, 蘆山), 이공(耳公)
본관 전주 이씨[1]
출생 1903년 10월 12일
경상남도 창원군 외서면 상남리
(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상남동)
사망 1982년 9월 18일 (향년 78세)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자택
학력 창신학교 (고등과 / 졸업)
연희전문학교 (문과 / 중퇴)
와세다대학 ( 사학 / 수료)
동양문고 연구부 ( 한국문학 / 수료)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제1유공자 묘역-6호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가고파」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이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어릴 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 간들 잊으리오 그 뛰놀던 고향 동무
오늘은 다 무얼 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


가서 한데 얼려 옛날같이 살고지고
내마음 색동옷 입혀 웃고 웃고 지내고저
그 날 그 눈물 없던 때를 찾아가자 찾아가.


물 나면 모래판에서 가재 거이랑 달음질하고
물 들면 뱃장에 누워 별 헤다 잠들었지
세상 일 모르던 날이 그리워라 그리워.


여기 물어 보고 저기 가 알아 보나
내 몫엔 즐거움은 아무데도 없는 것을
두고 온 내 보금자리에 가 안기자 가 안겨.


처자들 어미 되고 동자들 아비 된 사이
인생의 가는 길이 나뉘어 이렇구나
잃어진 내 기쁨의 길이 아까와라 아까와.


일하여 시름 없고 단잠들어 죄 없는 몸이
그 바다 물소리를 밤낮에 듣는구나
벗들아 너희는 복된 자다 부러워라 부러워.


옛 동무 노젖는 배에 얻어 올라 치를 잡고
한바다 물을 따라 나명들명 살까이나
맛잡고 그물 던지며 노래하자 노래해


거기 아침은 오고 거기 석양은 져도
찬 얼음 센 바람은 들지 못하는 그 나라로
돌아가 알몸으로 살꺼니아 깨끗이도 깨끗이.

1. 개요2. 일생3. 기타4. 논란
4.1. 친일 및 친일파 옹호 행적4.2. 친독재 행적4.3. 사후 평가에 대한 논란
4.3.1. 노산문학관 명칭 논란4.3.2. 마산역 가고파 시비 논란4.3.3. 안상수 창원시장 친독재 옹호 관련 논란4.3.4. 은상이샘 철거 문제 논란4.3.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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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시인, 사학자, 교육자이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초기에는 동양적 인생무상과 관조의 정신을 담은 자유시를 창작했으나 곧 시조시인으로 전향했고[2] 1920년대 시조부흥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했다. 유명한 가곡인 '가고파'의 시인으로 많은 사랑을 받는 한편 친독재 전력으로 논란의 대상에 놓여 있다.

2. 일생

1903년 10월 12일 경상남도 창원군 외서면 상남리(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상남동)에서 이승규(李承奎)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18년 마산 성호리교회(현 문창교회) 장로였던 아버지가 설립한 마산 창신학교 고등과를 졸업하였고, 1923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다가 중퇴하고 1925년 도일하여 와세다대학 사학과에서 수학하였다.

1922년 조선문단을 통해 시조 '아버님을 여의고', '꿈 깬 뒤' 등을 발표하여 등단한 후 자유시를 창작하다가 1926년 이후 카프의 계급주의 문학의 반동으로 일어난 시조부흥운동의 영향으로 조국의 전통 문학과 국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시조시인으로 전향하였다.

1931년부터 1932년까지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1932년 노산시조집을 간행하였고 여기에 수록된 ' 가고파', ' 성불사의 밤' 등은 지금도 가곡으로 애창되고 있다. 1930년대 이후 가람 이병기와 함께 한국의 대표적 시조시인으로 자리를 굳히면서 민요적 리듬을 살린 작품들을 많이 썼다. 1932년 10월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1935년 4월까지 신동아 기자, 신가정 편집인 등으로 근무했다. # 1935년 6월에는 조선일보사로 이직하여 1938년까지 편집국 고문 및 출판국 주간 등을 역임했다.

그러다가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에 의해 홍원경찰서와 함흥형무소에 구금되었다가 이듬해인 1943년 기소유예 불기소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1945년에는 사상범 예비 검속으로 구속된 후 전라남도 광양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8.15 광복을 맞게 된다.

1949년 동국대학교 교수에 부임하였고 이후 청구대학, 서울대학교 교수를 재직하기도 했다. 그밖에 충무공 이순신장군기념사업회장,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 통일촉진회 최고위원, 한국청년운동협의회(현 대한민국통일건국회) 회장, 전두환 정부 국정자문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언론, 사학, 문학 쪽에서 다양한 저술을 남겼으며 난중일기를 초역하는 등 충무공 이순신 연구자로서도 명성이 높다.

1982년 9월 18일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자택에서 지병으로 별세하였다. # 사후 문화훈장 1등급 금관문화훈장에 추서되었고 국가 지원 사회장으로 그의 유해가 1982년 9월 22일 국립서울현충원 제1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1990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3. 기타

4. 논란

4.1. 친일 및 친일파 옹호 행적

친일 논란도 있다.

1941년 친일언론사인 만선학해사에서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 특집으로 <반도사화(半島史話)와 낙토만주(樂土滿洲)>라는 책을 냈는데, '전직 조선일보사 조광 주간' 이름으로 논문 '이언(俚諺)의 전와(轉訛)에 대한 이고'에서 만주국 건국을 축하한다는 글을 쓴 바 있다.

뭐 이후로는 위에 서술했듯이 조선어학회 사건 연루되어 구금당하고 뭐 다른 활동을 하여 애국훈장까지 받았고, 친일인명사전에서도 저런 활동은 친일파라고 하기에는 그렇다고 보았는지 수록되어 있지 않다. 그래도, 살아 생전 저런 글을 쓴 것에 대하여 그 어떤 사죄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1945년 전쟁 막바지에 갑자기 일본에 대하여 비난하던 글을 써서 반일사상으로 구속된 것조차도 일본은 이제 강자가 아니기에 막말을 하고 이후 권력층에 대하여 강한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아부하던 사상을 따른 셈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후에는 친일파들을 옹호하는 말이나 행적을 많이 보였다. 1968년에는 악질 친일반민족행위자 문명기가 사망하자 친히 그의 비문을 써주면서 '어질고 보람찬 삶을 산 이'라는 평을 하기도 했다. 살아 생전인 1970년에 KBS에서 나와 홍난파가 친일행위를 했다지만 비난이 과하다느니 예술가에 대한 친일파 낙인은 옳지 않다라고 대놓고 옹호한 바 있다.

사실 1933년 발표된 현제명 작곡의 가곡 그 집 앞[4]의 가사는 이은상이 작사했는데, 현제명은 홍난파와 더불어 음악계의 친일 양두거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친일 행적이 명확한 인물이고, 그 집 앞 자체도 현제명과 홍난파의 공동 곡 발표회에서 발표된 곡이다. 여러모로 이은상의 친일 정황은 확실해 보이나 본인의 적극적인 친일 행위가 밝혀진 것은 상기의 만주국 건국 축하글 정도라 다소 애매한 상황.

4.2. 친독재 행적

이은상은 친독재 전력이 뚜렷하다.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 당시 이승만 당선을 돕는 문인 유세단에서 활동하였고, 이어 박정희 유신정권· 전두환 독재정권을 옹호하는 등 반민주 정권에 협력적이었다는 꼬리표가 따라다니고 있다.

이은상은 1960년 이승만 지원 유세에서 당시 시국을 임진왜란에 비유하면서 "이순신 같은 분이라야 민족을 구하리라, 그리고 그 같은 분은 오직 이 대통령이시다."라 밝힌 바가 있다. 또한 1960년 이승만 자유당 정권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일어난 ' 3·15의거'를 '무모한 흥분' '지성을 잃어버린 데모', '불합리/불합법이 빚어낸 불상사'로 비하하며 마산시민들에게 자중할 것을 당부하기도 하였다. 링크

이후 이은상은 박정희 정권의 민주공화당 '창당선언문'을 작성했고 1972년 10월 청우회 중앙본부 회장으로 있으면서 "무질서와 비능률을 배제하여 국기를 공고히 하려는 박 대통령의 영단에 적극 찬동한다"는 뜻의 ' 10월 유신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1975년 5월 13일 박정희 정권이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한 후 이를 옹호하는 관변단체 총력안보 국민협의회 의장을 맡기도 하였다. 심지어 말년에는 박정희를 " 세종대왕 이순신을 합해놓은 인물"이라고 찬양하기도 했다.

또한 전두환이 1979년 12.12 군사반란으로 집권하여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1980년 월간지 '정경문화'에 '한국의 특수한 상황으로 보아 무엇보다도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는 것이 거의 일반적 여론'이라는 글을 기고하였고 다음 해 4월 전두환 정권의 국정자문위원이 되기도 하였다. 82년 작고했으니 그야말로 모든 독재정권을 찬양한 3관왕의 그랜드 슬래머라고 할만하다.(...)

4.3. 사후 평가에 대한 논란

이은상의 문학적 성취와 친독재 반민주 성향에 관해 그를 기념하고 추도하는 세력과 규탄하는 세력으로 나뉘어 현재까지도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4.3.1. 노산문학관 명칭 논란

상남동 노비산 정상에 건립할 예정이었던 문학관의 명칭은 당초 이은상의 아호를 딴 '노산문학관'이 될 예정이었지만 시민사회진영의 반발로 오랜 진통을 겪은 후에 시의회 의결로 '마산문학관'으로 변경되기도 하였다. 링크

4.3.2. 마산역 가고파 시비 논란

또한 마산역 정문 광장에 세워졌던 '가고파' 시비가 페인트 세례를 당하고, 시비 위에 그를 조소하는 내용을 담은 '검은 천'으로 덮는 퍼포먼스가 거행되고, 이은상의 독재 행적을 규탄하는 대응비가 세워지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4.3.3. 안상수 창원시장 친독재 옹호 관련 논란

이은상과 가고파를 창원시의 문화적 자산으로 삼아 관광자원화시키려는 안상수 창원시장의 계획에 대해서도 시민사회와 진보진영에서많은 비판이 있었다. 특히 창원시의회 시의원 질의에 대한 "이은상 선생이 글을 쓸 때 독재를 찬양해서 대역무도한 짓을 한 것처럼 아는데 삼엄한 유신 시기에 문인에게 글 좀 쓰라고 군부가 총칼을 들이댈 때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 "그 결과가 찬양이라고 얼마나 죄가 될지 모르나 모든 인간이 완벽할 수 없다" , "친일인명사전은 일부 진보세력이 만든 것으로 국가가 만든 게 아니니 인정할 수 없다", "이은상이 진보에서 말하는 친독재 발언을 했다고 하더라도 무수한 작품과 고향 사랑 곡까지 묻을 필요가 없다" 등의 발언은 친독재, 역사의식 결여 등의 문제로 논란이 되었다.

이에 대해 안상수 시장은 친일, 친독재 미화 의도는 없으며 '다만 작품은 예술 그 자체로 사랑받아야 한다'는 식의 논지로 항변하였다. 링크

4.3.4. 은상이샘 철거 문제 논란

마산합포구 노산동 북마산파출소 앞 3·15의거기념비와 그 옆에 나란히 놓인 은상이샘 문제에 대해서도 창원시와 시민 사회간의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은상이샘은 북마산파출소 근처 이은상 생가가 도로 확장 공사로 편입되어 철거되자 문인들의 요구로 현 위치로 옮겨서 복원한 것인데, 3·15의거 기념비와 3·15를 모욕한 인물의 기념물이 한곳에 나란히 들어서게 된 것이다.

안상수 시장은 이에 대해 "복원당시 지역민들의 정서를 반영한 것인 만큼 역사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타당하다"며 존치 의사를 밝혔지만, 시민단체는 반발하며 기념비와 은상이샘 사이에 벽돌 담장을 쌓아 이를 분리시키는 퍼포먼스를 하며 저항 의지를 드러내었다.

4.3.5. 기타

저래놓고 이은상은 수필 소동파에서 소동파는 고려를 모독한 인물이라며 한국인은 왜 그를 존경하느냐는 주장을 했다. 소동파 문서에서 나오듯이, 소동파가 고려를 싫어한 것은 단순히 감정적인 '혐고려'가 아니라 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게다가, 이 수필 초반부에 이완용이 붓글씨를 잘 씀에도 그것들이 인정받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이대며 친일한 것을 비난하고 있으니 더더욱 어이없는 일이다.

[1] # [2] 실제로 대표작인 '가고파'나 '성불사의 밤'은 현대시조로 분류되며 노래가 아닌 시 자체로 보면 정형적인 시조형식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3] 마산동중과 광덕고 및 서석고 교가에는 모두 '정든 내 고장'이라는 단어가 들어간다. [4]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으로 시작하는 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