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1-25 22:01:16

이병일

파일:이병일(영화감독).jpg
성명 이병일()
본명 이병일() 또는 이병록()[1]
졸정(箤丁)
출생 1910년 6월 2일 함경남도 함흥
사망 1987년 11월 27일 (향년 77세)
학력 함흥고등보통학교
도쿄 미사키영어전문학교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영화과
데뷔 반도의 봄》(1941)

1. 개요2. 상세3.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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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영화 감독.

2. 상세

1910년 6월 2일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이성구 감독의 형이다.

어려서부터 연극, 영화에 관심이 많아 함흥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함흥의 '예림회' 문예부장 안종화를 자주 찾아다녔다. 1930년 미국에서 영화 공부를 하고 돌아온 황운의 권유로 영화계에 입문, 황운 감독의 1932년작 《딱한 사람들》에 출연했다.

이후 도쿄 미사키(三崎)영어전문학교로 유학을 떠나 졸업 후 니카츠(日活)촬영소에 입사하여 아베 유카타(阿部豊)의 조감독으로 일했다. 1940년 귀국하여 함흥의 명보극장을 운영하던 이기웅과 함께 명보영화사를 세워 1941년 《 반도의 봄》으로 입봉했다. 1942년 통제영화회사인 조선영화제작소에 전속 감독으로 입사하여 일제 침략전쟁과 영화통제정책을 옹호하는 영화를 제작하였고, 이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영화부문에 등재되었다.

광복 후 조선영화건설본부에서 《해방뉴스》 제작에 참여했고 조선프롤레타리아영화동맹에도 이름을 올렸으며 1945년 12월 조선영화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1948년 외무처장 한원신의 추천으로 20세기폭스사의 초청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가 1949년 안창호의 아들이자 한국계 배우였던 안필립의 추천으로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1954년 귀국하여 동아영화사를 세우고 오영진의 희곡 '맹진사댁 경사'를 영화화한 《 시집가는 날》이 1957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태평양 영화제에서 특별희극상을 수상했는데, 이는 한국 영화 역사상 최초의 국제영화제 수상이었다. 1958년에는 문교부 우수국산영화상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후 《 자유결혼》, 《청춘일기》, 《귀국선》 등을 연출했으며 수도영화사 부사장, 한국영화감독협회 회장, 한국영화제작가협회 회장, 아세아영화제작자연맹 부회장 등을 역임하고 1978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추대되었다.

1935년 윤정명과 결혼하여 2남2녀를 두었으며 1987년 11월 27일 사망했다.

3. 수상



[1] 본명에 대해 기록마다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