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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선우휘 鮮于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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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선우휘(鮮于煇) |
출생 | 1922년 1월 3일 |
평안북도
정주군 정주읍 남산동[1] (현 평안북도 정주시 성남동) |
|
사망 | 1986년 6월 12일 (향년 64세) |
부산직할시 동구 초량동 세호장 여관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본관 | 태원 선우씨 |
학력 |
경성사범학교 (졸업) 국방대학교 (행정학 / 학사) |
주요 경력 |
인천중학교 교사 한국일보 논설위원 조선일보 주필 |
자녀 | 아들 선우정 |
첫 작품 | 귀신 (1955) |
마지막 작품 | 올림픽 (1984)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전후 소설가 겸 언론인. 손창섭, 오상원과 함께 전후 세대를 대표하는 소설가로 특유의 실향민 정서와 반공, 휴머니즘성향으로 잘 알려져 있다.2. 일생
1922년 1월 3일 평안북도 정주군 정주읍 남산동(현 정주시 성남동)에서 선우억(鮮于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향인 지명관의 회고에 따르면 인근에서 유명한 수재였다고 한다. 부모들이 애들을 나무랄 때 '휘를 보라'고 했을 정도라니.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사범학교 본과에 진학한다. 1943년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귀향하여 구성국민학교 교사로 근무했다.해방 이후 1946년 월남하여 동향 정주 출신 방응모가 경영하고 있던 조선일보에 입사해 사회부 기자 생활을 시작했지만 기자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미국 유학을 꿈꾸며 퇴직한다. 하지만 미국행은 여의치 않았고, 호구지책으로 인천중학교 교사가 되었다가 1949년 정훈 장교 시험에 합격해 임관한다. 6.25전쟁 기간에 잠시 최전선 유격부대에 몸담기도 했으나 군생활 대부분은 정훈 병과에서 보냈다. 최종 계급은 대령. 한국문학사에선 보기 드문 군인 출신 문인으로, 그 뒤로는 통역장교 복무중에 <광장>등을 집필한 최인훈을 들 수 있다.
1955년 <귀신>을 신세계에 발표해 문단에 진출했고, 1956년 <ONE WAY>, <테러리스트>를 발표했다. 1957년 <불꽃>, <똥개>, <거울>을 발표하고 <불꽃>으로 제2회 동인문학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동인문학상 시상식에 육군 정복을 갖춰입고 참석한 일화가 유명하며 당시 육군참모차장이었던 장도영 중장이 방문해 격려하기도 했다. 동인문학상 수상 후 예편, 인천중학교 교사와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거쳐 조선일보에 재입사한다.
조선일보 사장 방우영은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선우휘는 편집국장, 주필, 논설 고문 등을 지내며 그 파트너로 활동한다. 방우영의 양할아버지이자 조선일보 창업주인 방응모는 선우휘와 같은 정주 출신으로 실향민으로 고향에 대한 애착이 절절했던 선우휘는 조선일보에 진즉부터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2] 1.4 후퇴 때 조선일보 시설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은 것은 당시 군 정훈장교였던 선우휘가 손을 쓴 덕 이었다. 그는 상부의 방화 지시에 불복하고 조선일보 시설을 그대로 뒀다. 인민군에게 넘어 가서 악용 되는 일을 막기 위해 윤전기를 불 태우라고 지시 받았으나 일제 강압으로 폐간될 때 사원들이 이 윤전기를 붙들고 눈물을 흘렸다는 계초 방응모 선생 얘기가 생각나면서 (역대 사장인) 이상재, 안재홍, 조만식 선생들의 얼굴이 떠올랐다"는 그는 윤전기 대신 활자판만 뒤엎었다.
철저한 반공 성향이었으나 우익에게도 마냥 우호적이진 않았다. 대표작 '불꽃'을 비롯해 '희극배우', '노다지' 등 그의 작품 전반에선 해방이후의 우익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가 여지없이 드러난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둘 다 맘에 안들지만, 좌익이 더 나쁘기 때문에 덜 나쁜 우익을 택할수 밖에 없다"는 식으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편집국장으로 재임하던 1964년 11월, 30대 중반 젊은 기자 리영희는 중립국들이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안을 제출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는데, 중앙정보부에선 해당 기사가 남한 단독가입을 추진하던 정부 정책에 배치된다며 선우휘와 리영희를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시켰다. 선우휘는 법원의 구속적부심으로 5일 후 석방됐고 리영희는 구속만기로 27일 만에 석방됐다. 리영희를 석방하는 대가로 선우휘는 자신의 편집국장직을 내놓았다. 선우휘가 자신의 편집국장직을 내놓으면서까지 리영희의 석방을 위해 뛰었던 이유는 리영희도 평북 삭주 태생의 실향민이었기 때문이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지만 그 이상으로 그의 행동을 규정한 뿌리는 지역주의 였다.
1965년 서울대 법대 교수였던 양호민(사상계 주간 겸임)이 한일협정에 반대하다 정치교수로 낙인찍혀 해직됐을 때, 조선일보로 데려오도록 애썼고, 김대중 납치 사건 당시 수장될 뻔하다가 서울에 버려진 김대중을 두고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한 조속한 진상조사 및 규명을 해야 한다"는 사설을 1면에 실었다.[3] 이로 인해 중정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으나 친동생 선우연이 박정희의 심복( 대통령비서실 소속 비서관)이라서 목숨은 건졌다. 선우휘 관련 사진을 보면 이때 중정에 끌려가서 초췌해진 모습이 꼭 나온다.[4]
저런 일화만 보면 강직한 언론인인 듯 싶지만, 독재정권을 방관, 혹은 은근히 협조적이었던 모습도 보였다.
편집국장시절 선우휘는 국제부장이었던 진보적 성향의 리영희를 조사부장으로 "강등"시켰고, 리영희에게 베트남 전쟁에 취재를 가서 국군찬양기사를 쓰라고 했으나, 리영희는 "양심상 정부찬양기사는 쓰지 못하겠다"고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선우휘는 리영희에게 노골적으로 사직을 강요했다. 리영희는 결국 조선일보를 그만두었다.
조선일보 해직기자들에 대한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는데, 아주 어이없는 답변을 늘어놓았다. 이때 그는 "왜 후배기자들에게 가만히 있느냐고 말했냐"는 해직기자 쪽 변호사의 질문에 자유언론수호선언이 “옳은 일이니까 해야 한다기보다는, '조선일보의 체면을 위해 남이 하는 만큼은 해야 한다'고 말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이어 그는 "조선일보 기자들이 언론자유실천을 위해 기자협회 분회의 회보를 발간하였는데 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신문제작을 하는 일도 벅찬데 그런 것까지 한다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다”라고 말했다. 변호인이 다시 “들어가야 할 기사가 빠지든 깎이든 기자는 기사만 써내라 이 말인가”라고 질문하자 선우휘는 “그렇다”라고 명쾌하게 답변했다. 변호인이 선우휘의 글을 인용하여 “언론이 병들어 빈사상태”에 놓여도 “모든 것을 사장에게 맡기고 가만 있어야 하는가”라고 되묻자 선우휘는 “물론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변호인도 할 말을 잃은 듯 증언녹취록은 여기서 끝나고 있다. 아마 지명관이나 방동규와는 달리 이들 해직기자들과는 친분이 없었던 모양이다.
다만 선우휘는 태생이 태생인지라 "휴전선 이북의 김일성 도당이 있는 한 반공이 최우선"이라는 사상을 가졌고 이를 위해 남한의 군부독재를 합리화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1970-1980년대에는 심한 비난을 받았다. 10월 유신과 대한민국 제5공화국도 옹호했으니. 조선일보에 게재되던 선우휘 칼럼은 나중에 후배 김대중 칼럼보다 훨씬 더 친여적으로 수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래도 나름 운동권 후배들과 재야인사들을 감싸주려는 노력도 했다. 예를 들어 지명관 교수가 1970~1980년대 일본 《세카이》지에 가명으로 체제비판적 칼럼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연재할 때 "너 나쁜 짓 하는 거 알고 있다"며 에둘러 활동을 그만둘 것을 권유했지만, 그의 신변을 걱정해서 안기부 직원에게는 저자의 정체에 대해 철저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재야 인사인 함석헌과 백기완의 뒤를 봐주기도 했으며, 방배추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방동규 씨와 끝까지 친분을 유지한 사람이 그다. 여기서 함석헌과 백기완은 선우휘와 정반대의 정치지향을 가진 재야인사였지만 선우휘가 이들을 보호하려고 한 것은 결국은 지역주의로 귀착된다. 함석헌(평북 용천군), 백기완(황해도 은율군), 방동규(개성), 지명관(평북 정주군)은 모두 실향민이었고, 선우휘는 이들의 정치적 입장이 본인과는 정반대지만, 지역주의적 입장에서 감싼 것이다. 하지만 5공시절 선우휘의 컬럼을 보면, 이들보다 더 온건했던 양김씨(김대중, 김영삼)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었음을 알 수 있으니, 선우휘의 행동에 지역주의가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다.
성향이 성향이라 그런지 4컷만화 밑과 기사 한가운데에 광고를 넣자는 광고부장의 주장에 반대하여 격렬히 논쟁하다가 사장이 하라고 시키는 바람에 깨갱한 적이 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1985년부터 1986년 3월까지 방송심의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했으며, 그 해 6월 12일에 KBS 6.25 전쟁 특집 다큐멘터리 <살아있는 전쟁>의 리포터 兼 나레이션으로 현장 방문 도중 부산직할시 동구 초량동 세호장 여관에서 뇌일혈로 타계하였다.
3. 작품 목록
- 불꽃 - 아버지가 일제 연간에 살해된 동굴에 인민군의 쫒긴 아들이 숨어들며 시작되는 이야기. 부친에게 물려받은 기질과 조부에게 받은 교육의 혼재로 저항과 순응 사이에서 헤매던 주인공이 역사의 흐름에 휩쓸려 가다 죽음을 목전에 둔 순간 극적인 성장을 이뤄낸다. 백윤식이 주인공으로 나온 TV 문학관 버전은 원작에 없는 내용이 첨가되어 호불호가 갈리지만[5] 유현목의 영화판은 진정한 수작[6]으로 평가 받는다.
- 싸릿골의 신화 - 어느 날, 강 노인은 국군 낙오병을 숨겨주고 북한군이 쳐들어왔는데도 한 사람도 죽지 않는 경이로운 동화이다. 영화 싸리꼴의 신화로도 만들어졌는데, 대략 몇 명 죽는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이만희의 걸작, 강민호의 데뷔작이며 박준규 아버지 박노식이 악질 인민군 군관으로 나온다.
- 추적의 피날레 - 군 정보부의 공작으로 위장 월북했다가 간첩으로 돌아온 주인공은 자신에게 월북을 명한 장군은 죽었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난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의 명예를 찾으려는 주인공의 노력과 주인공을 이용해서 권력을 다지려는 악한 장군의 대결이 포인트. 악역 장군의 모델은 이승만 시기 숙군을 주도한 김창룡. 선우휘는 김창룡을 "그래도 불쌍한 인물"이라 평했다.
- 망향 - 실향민이었던 선우휘의 향수병이 드러난 작품이다.
- 희극배우 - 희극배우 만소와 친구이자 극작가 일소의 이야기로 글로 먹고 사는 문인의 심정이 잘 묻어나온다.
- 묵시 - 춘원 이광수의 친구인 시인이자 웅변가가 친일에 동조하기 싫어 벙어리인 척 한다는 내용의 단편. 민욱과 전무송 주연으로 TV 문학관에서 방영했다.
- 오리와 계급장 - 서북청년단 출신 제자와 악질 공산주의자였던 은사가 각각 남북에서 버림받은뒤 화해하여 남한 시골에서 가족들을 데리고 오리를 키우면서 살아가는 이야기. 오리사육을 훼방놓는 땅주인[8]에게 뒷배를 보여주려 초빙해온 육군 대령[9]은 실향민이자 1959년 대령으로 예편한 선우휘 자신을 투영한 인물이다. 전후 토사구팽당한 어제의 용사들의 찌질함과 애잔함이 극단적으로 베어나오는 작품. 역시 서북청년단원들의 좌절을 그린 테러리스트에 비하면 희망찬 결말이다.
- 거울 - 일제강점기에 고문당한 이발사는 자신을 고문했던 형사를 만나 죽이려고 하지만, 아들을 보고 그냥 풀어준다는 이야기. 특이하게 독백으로만 구성된 소설이다.
- 한국인 -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아들의 씨를 남기려고 면회를 요청하는 가족들을 군인이 대하는 것. 당시엔 동서양 가리지 않고 흔한 일이었다.
- ONE WAY - 특수전을 맡았던 자신의 체험이 반영된 작
- 외면 - 연합군 포로 수용소를 무대로 일본 장교와 미국 법무관의 시각으로 본 조선인 포로 감시원의 비극을 그린 작품, 김진태 주연의 문화방송 번안판이 있다.
- 제목미상2 - 언론계 파티장에서 어설픈 영어로 미 고문단 장교에게 아는 척을 하던 주인공이 화장실에서 자책하는 내용이다.
- 좌절의 복사 - 언론사 국장이 모종의 사건으로 중정에 끌려간 부하 직원 석방을 위해 중정 부장에게 공갈협박을 치고 석방된 부하를 바라보다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배신자 아닌 배신자로 살게될 부하에 대한 회한을 느낀다는 작품. 국장은 과거에 어설프게 독립운동가 잔당으로 체포되었다가 친척의 도움으로 풀려난 적이 있고 한국전 당시 빨치산 귀순자가 실수로 자신의 이전 동지들을 죽게 하자 자살하는 걸 목격한 경험이 있다.
- 노다지 - 구한말부터 6.25 전쟁까지 어느 집안의 일대기를 다룬 대하 소설 선우휘판 "나의 청년시절"에 필적하며 반일&반공 첩보물로, KBS에서 번안 방영한 바 있음. 원작에 나오는 수인은 작가의 오너캐.
4. 여담
- 비슷한 성향의 작가로는 이문열이 있다.
- 그의 아들 선우정은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1991년 조선일보 공채 30기 입사로 기자 생활을 시작해 2005~2010년은 일본 특파원으로 재직했고, 이후 2014년 국제부장, 2015~2017년 논설위원, 2017~2020년 사회부장을 맡고 있다가 뉴스총괄에디터(부국장)으로 승진했다.[10] 2022년 3월 인사에서 편집국장으로 승진 했다. 조선일보 창간 103년에 최초로 나온 부자 출신 편집국장이다. 또한 약 50년만에 나온 비 서울대 출신 편집국장이다.[11] 선우정은 사내에서 일본통 기자로 활동해서인지 덕력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2007년에는 아키하바라의 모에에 관해서 투고한 기사도 있을 정도니... 참고로 아버지의 성향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12] 선우정 칼럼을 보면 기본적으로 민주당계 정당 정부에 대해 꽤나 비판적인 서술이나 주제가 많다.
[1]
#
[2]
선우휘의 장편 노다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일제 때부터 정주 사람들은 조선일보를 '우리네 신문'이라고 일컬어왔다. 금광왕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 정주 출신 계초 방응모가 인계 맡아 비로소 사세를 확립시키고, 정주 태생 춘원이 함께 일한 신문으로 정주 사람들 자랑거리였던 것이다."
[3]
사설을 실은 후 선우휘는 부인에게 대신해 사표를 방우영 사장에게 제출하고 제자처럼 아끼던 조선일보 안양지국장의 집으로 피신했다. 방우영 조선일보 사장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끝에 이후락 정보부장에게 편지를 보내 선우주필의 해임을 걸고 자신에게 사태를 맡겨달라는 제안을 걸었다. 다행히 정보부장이 갈리는 바람에 없던 일로 넘어갔다.
[4]
그래도
박정희는 선우휘의 기개는 높게 샀던 모양인지, 선우휘에게
청와대 감사원장 자리를 권했다. 선우휘는 그 권유에
일본의
하이쿠 한 토막을 인용해서 대답했다. "들에 핀 꽃이 아름답다 해서 집안에 옮겨 심으면 아름다울 리 있겠습니까?"
[5]
이를테면 나중에 북한 장교가 되는 연호가
중일전쟁에 끌려갔다 탈영할 때
강간을 저지른다는 이야기. 원작에선 탈영하여 중국인 마을로 향하던 주인공이 지나가던 중국인 처녀를 보고 순간적인 욕정에 휩싸였다 대검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찔러 진정하는 내용이 있을 뿐 이다.
[6]
전우 시즌2에서 용감한 국군 장교로 나온 강민호가 연호 역할로 등장한다.
[7]
단 선우휘는
서북청년단 자체는 대단히 싫어해서 거리를 항상 두었다.
[8]
오리 똥이 자신이 기르는 배나무에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이유로 곡식도 못 심는 돌밭을 사육장으로 빌려주는 것을 거부했지만, 배나무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사실상 텃세에 가깝다.
[9]
땅주인은 대령이 온 것에 처음엔 놀랐지만 재차 강경하게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대령과 땅주인 모두
6.25 전쟁
참전용사인 것과, 땅주인이 모셨던 군대 상관이 대령의 지인인 게 밝혀지면서 좋게 해결된다.
[10]
2019년 기준으로 사회부장직과 편집국 부국장직을 겸하며 2020년 3월 인사에서 뉴스총괄에디터(부국장)으로 전보.
[11]
선우정 국장은 연세대 사학과 출신
[12]
편집국장 취임 후 가진 기자협회보 인터뷰에서 시간이 갈수록 이전에 읽은 아버지 칼럼이나 소설이 제가 글 쓰는 데 엄청나게 영향을 많이 미쳤다고 느낀다. 초년병 기자 때는 그렇게 영향을 많이 안 받았는데, 나이를 먹으며 보수적으로 돼 가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때 아버지가 썼던 글, 논조 등이 점점 더 이해, 공감이 되고 영향도 많이 받는 것 같다.”며 밝힌 바 있다.
[13]
2012년 4월 25일자 MBC 예능 황금어장 - 라디오스타에서
선우재덕이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