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06 12:57:06

러시아계 아르헨티나인

러시아인 디아스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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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러시아계 아르헨티나인.jpg

1. 개요2. 이민사3.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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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계 아르헨티나인들은 아르헨티나인 러시아 제국에서 이민했던 사람들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어휘이다. 이들 중 상당수가 독일계 아르헨티나인, 폴란드계 아르헨티나인으로 이중 집계된다.

러시아에서 아르헨티나로의 이민은 상술한 1881년 키시너우 포그롬부터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 내전 사이의 기간인 1921년 사이에 집중되었다. 1990년대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에서 아르헨티나로 이민한 경우는 비교적 소수인데, 20세기 말 무렵 아르헨티나의 상황도 보리스 옐친 시대의 러시아 수준으로 시원찮았기 때문이다.

2. 이민사

러시아 제국에서 아르헨티나로의 이민 인구
1857년~1859년 80명
1860년~1869년 407명
1870년~1879년 464명
1880년~1889년 4,155명
1890년~1899년 15,665명
1900년~1909년 73,845명
1910년~1919년 48,002명

아르헨티나로의 러시아인의 이동은 시기와 이민 배경을 바탕으로 4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후술하는 2가지 이민 케이스가 동슬라브 계통의 러시아인 이민이며 이민 비중도 크지 않다. 러시아에서 아르헨티나로 이민한 사람들은 주로 볼가 독일인 계통과 아슈케나지 유대인들이다. 아르헨티나로 이민 온 유대인들은 대개 우크라이나나 벨라루스, 혹은 폴란드 동부 출신이 많았지만 입국 당시 러시아 제국 여권을 들고 왔기 때문에 스페인어로 러시아인을 의미하는 Ruso, Rusa로 불리곤 했다. 유사 사례로 레바논이나 시리아 일대에서 아르헨티나나 브라질로 이민 온 아랍계 기독교인들 역시 오스만 제국 여권을 들고 왔다는 이유로, Turco(튀르키예인)라고 불리곤 했다. 비교하자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 오스만 제국 여권을 들고 아르헨티나에 입국한 사람들 중 튀르키예인은 극소수이고 절반 가까이가 레바논 시리아 일대의 아랍계 기독교인 혹은 아르메니아인이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정교회를 믿고 러시아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일반적인 러시아인이 아르헨티나로 이주하는 경우는 흔하지는 않았다. 1901년 러시아 제국의 지원으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정교회 성당이 건설되었으나, 예배보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리스인이나 아랍계 기독교인[1]들이었다고 한다.
  • 첫 번째 대량 이민( 독일인 이민) : 18~19세기 당시 러시아 제국에는 황무지를 개간해주는 대가로 병역을 면제받던 독일계 농민 집단인 볼가 독일인들이 있었다. 그동안 병역이 면제되었던 이들에게 러시아 제국 정부는 1874년부로 병역을 부과하였다.[2] 수십년에 걸쳐 기껏 볼가 강을 옥토로 바꾸어놓으니까 말을 바꾸고 병역을 이행하라고 요구하는데, 문제는 이 병역 요구가 우리나라의 여증처럼 1~2년 감옥 가서 끝나는 그런 것이 아니라 보병 기준 25년짜리 그러니까 가족하고 생이별을 시키는 형태의 요구였다. 굳이 재침례파가 아니더라도 가톨릭을 믿는 독일인 농부들도 여기에 반감을 품었고, 초청 당시 약속과는 다른 병역 부과를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독일계 러시아인 상당수는 미국과 캐나다, 브라질 그리고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결정하였다. 미국이나 캐나다로 이민한 볼가 독일인들은 개신교 신자가 많았다면 아르헨티나나 브라질로 이주한 이들은 가톨릭 신도가 많았다.
  • 두 번째 대량 이민( 유대인 이민) :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 러시아 제국 영내 그중에서도 특히 오늘날 우크라이나와 몰도바, 폴란드와 벨라루스 일대는 근대 기준 유대인 인구가 가장 밀집해있던 지역으로서, 이런저런 이유로 포그롬이라 불리는 형태의 반유대주의 폭동이 빈발하였다. 특히 1881년 키시너우에서 일어난 포그롬을 계기로 러시아 제국 각지의 유대인들이 아메리카 대륙 각지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이 이민을 희망하던 국가는 미국이었으나, 이민 비용이 만만치가 않았다. 이를 노리고 부에노스 아이레스 바르샤바[3]를 중심으로 한 유대인 조직폭력배들이 유대인들 중 이민을 희망하는 취약 계층 가정의 어린 소녀들을 골라서 사기 인신매매를 벌였다. # #스페인어 1905년 이후 1차대전 시대까지 아르헨티나로 오는 이민자 국적 비중 중 세 번째로 높은 것이 러시아 제국이었고, 1906년부터 1913년 사이에는 매년 13,000여 명 상당의 유대인들이 아르헨티나로 이민했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이런 인신매매 피해자들이었다. #[4] 1919년에는 아르헨티나에서 백색테러 폭동이 발발하는 와중에 "러시아인 사냥(La caza del ruso)"이라 불리는 반유대주의 테러도 동시에 벌어졌는데, 이는 당시 아르헨티나 유대인 상당수가 러시아 제국 내 포그롬을 피해 망명한 유대인이었음을 나타낸다고도 볼 수 있다.
  • 세 번째 이민(반공 이민) : 1917년 러시아 혁명 전후하여 러시아 백군 난민들이 유럽과 아시아 각지를 떠돌게 되는데 이들 중 일부는 1920년대~1930년대에는 아르헨티나로 망명하기도 했다. 물론 아르헨티나에 영구 정착한 사람보다는 아르헨티나에서 체류하다가 미국으로 재이민한 경우가 더 많았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사례에서 보듯 러시아인 귀족들은 어렸을 때부터 영어/프랑스어를 배우는 경우가 많았고, 러시아인 반공 난민들 입장에서는 러시아에서 생소했던 스페인어를 사용하던 아르헨티나보다는 미국이나 캐나다가 훨씬 더 매력적인 이민 목적지였다.
  • 네 번째 이민 : 소련 해체 이후로 러시아인들의 해외 이주 및 교류가 자유로워지면서 러시아인이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케이스이다. 아르헨티나는 자국에서 출생한 사람들에게 무조건 아르헨티나 시민권을 주기 때문에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 부유층 사이에서 아르헨티나 원정 출산 붐이 일고 있다. #

3. 관련 문서



[1] 아랍계 기독교인들 중 정교회 신도들,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정교회), 예루살렘 총대주교(정교회) 문서 참조 [2] 이들 중 상당수는 원래 프로이센 동부 영토에 거주하던 재침례파들로, 프로이센에서 병역을 이행하지 않은 남성이 토지를 구입하는 것을 막는 법을 제정하는 바람에 빈곤 문제에 시달리다가 18세기 말 예카테리나 대제가 "군대 안 가도 되니까 우리나라의 비옥한 풀밭들 좀 개간해주렴"이라고 초청한 케이스였다. [3] 폴란드 분할에서 1차대전 사이의 기간동안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4] 참고로 이런 조직폭력배들은 포그롬이 확대될 것을 우려하여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을 대상으로는 인신매매를 시도하지는 못한 듯 하다. [참고] 러시아 제국에서 이주해온 경우보다 폴란드 제2공화국에서 이주해온 경우가 훨씬 많았음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