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9 04:35:02

카를로스 빌라르도

카를로스 빌라르도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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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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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대, 6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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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아르헨티나의 방송국 텔레페가 아르헨티나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아르헨티나인 100명'을 선정했다.
TOP 10
<rowcolor=#ffffff> 1위 2위 3위 4위 5위
호세 데 산 마르틴 레네 파발로로 후안 마누엘 판지오 알베르토 올메도 체 게바라
<rowcolor=#ffffff> 6위 7위 8위 9위 10위
디에고 마라도나 에바 페론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마누엘 벨그라노 로베르토 폰타나로사
11위~100위
<rowcolor=#ffffff>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 아돌포 페레스 에스키벨 알폰시나 스토르니 알프레도 알콘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rowcolor=#ffffff>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알프레도 팔라시오스 알리시아 모로 드 후스토 앙헬 비센테 페냘로사 안토니오 베르니 아르투로 프론디시
<rowcolor=#ffffff>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아르투로 움베르토 일리아 아스토르 피아졸라 아타우알파 유판키 바르톨로메 미트레 베니토 킨켈라 마르틴
<rowcolor=#ffffff>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베르나르디노 리바다비아 베르나르도 우사이 칼푸쿠라 카를로스 빌라르도 카를로스 가르델
<rowcolor=#ffffff>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카를로스 메넴 카를로스 몬존 카를로스 무기카 카를로스 레우테만 찰리 가르시아
<rowcolor=#ffffff>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세사르 루이스 메노티 세사르 밀스테인 다니엘 파사레야 도밍고 파우스티노 사르미엔토 엔리케 앙젤렐리
<rowcolor=#ffffff>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엔리케 산토스 디세폴로 에르네스토 사바토 에스테반 에체베리아 에스텔라 데 카를로토 파쿤도 키로가
<rowcolor=#ffffff>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플로렌티노 아메히노 프란시스코 모레노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가브리엘라 사바티니 기예르모 빌라스
<rowcolor=#ffffff>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구스타보 산타올랄라 헤베 데 보나피니 이폴리토 이리고옌 우고 포르타 호르헤 뉴베리
<rowcolor=#ffffff>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호세 에르난데스 호세 마리아 가티카 후안 바우티스타 알베르디 후안 호세 카스텔리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
<rowcolor=#ffffff>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후안 페론 후아나 아수르두이 훌리오 아르헨티노 로카 훌리오 보카 훌리오 코르타사르
<rowcolor=#ffffff>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후스토 호세 데 우르키사 레안드로 알렘 레온 히에코 리산드로 데 라 토레 롤라 모라
<rowcolor=#ffffff>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루시아나 아이마르 루이스 페데리코 를루아르 루이스 산드리니 마누 지노빌리 마누엘 도레고
<rowcolor=#ffffff>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마리아노 모레노 마리아노 모레스 마리오 켐페스 마리기타 산체스 마르틴 미겔 데 구에메스
<rowcolor=#ffffff>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마리아 엘레나 월시 메르세데스 소사 니콜리노 로체 니니 마르샬 노르마 알레안드로
<rowcolor=#ffffff>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네스토르 카를로스 키르치네르 오스카 보나베나 끼노 라몬 카리요 라울 알폰신
<rowcolor=#ffffff>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리카르도 발빈 로베르토 알트 로베르토 비센조 로돌포 월시 로케 사엔스 페냐
<rowcolor=#ffffff>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살바도르 마사 산드로 데 아메리카 타토 보레스 티타 메레요 술 솔라르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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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의 축구감독
파일:external/resumensports.com/Carlos-Bilardo.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카를로스 빌라르도
Carlos Bilardo
본명 카를로스 살바도르 빌라르도
Carlos Salvador Bilardo
출생 1939년 3월 16일 ([age(1939-03-16)]세)[1]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자치시
국적
[[아르헨티나|]][[틀:국기|]][[틀:국기|]]
신체 174cm
직업 축구선수 ( 미드필더 / 은퇴)
축구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CA 산 로렌소 (1958~1960)
데포르티보 에스파뇰 (1961~1965)
에스투디안테스 (1965~1970)
감독 에스투디안테스 (1971)
에스투디안테스 (1973~1975)
데포르티보 칼리 (1976~1978)
CA 산 로렌소 (1978~1979)
콜롬비아 대표팀 (1979~1981)
에스투디안테스 (1982~1983)
아르헨티나 대표팀 (1983~1990)
세비야 FC (1992~1993)
CA 보카 주니어스 (1996)
세비야 FC (1997)
과테말라 대표팀 (1998)
리비아 대표팀 (1999~2000)
에스투디안테스 (2003~2004)
국가대표 없음

1. 개요2. 축구인 생활
2.1. 선수2.2. 감독
2.2.1. 아르헨티나 대표팀 이전2.2.2. 아르헨티나 대표팀
2.3. 그 이후2.4. 스타일: 빌라르도주의
3. 수상
3.1. 선수3.2. 감독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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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헨티나 축구선수 출신 감독. 2003년부터 2004년까지 에스투디안테스 데 라플라타 감독을 맡았다.

선수 시절 아르헨티나의 명문 클럽 에스투디안테스 데 라플라타에서 훌륭한 활약을 선보였고, 감독으로서는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세자르 루이스 메노티에 이어 조국 아르헨티나 2번째 월드컵 우승을 안겼다. 빌라르도는 종전에 좁은 공간 속에서 패스를 활용한 창조적이고 서정적인 ' 메노티주의'에서 탈피하고, 자신의 이름이 붙은 '빌라르도주의'라는 실용과 결과 위주의 축구를 아르헨티나 대표팀에 정착시켰다.

2. 축구인 생활

2.1. 선수

파일:external/diezmas.s3.amazonaws.com/bilardo-x50-socio.jpg
에스투디안테스 시절 빌라르도
1939년 3월 16일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시칠리아 출신 이민자들이었다. 빌라르도는 1958년 19살의 나이로 CA 산 로렌소에 입단했고 자신의 재능을 유감없이 드러낸 덕분에 1959년 아르헨티나 U-20 대표팀에 뽑혀 1960 로마 올림픽에 차출되어 한 경기에 출전했다. 이후 빌라르도는 산 로렌소에서 174경기에 출전해 12골을 기록한 후 1961년 2부리그 팀인 데포르티보 에스파뇰로 이적했다. 그는 이 팀에서 핵심 공격수로 자리잡아 팀내 최다 득점 선수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얼마 후 포지션을 변경해 수비형 미드필더가 되었다. 한편, 그는 축구 선수로 활동하면서도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1965년, 빌라르도는 아르헨티나의 명문 클럽 에스투디안테스 데 라플라타로 이적했다. , 당시 에스투디안테스는 킬러 주베나일(Killer Juveniles)이라 불릴만큼 성공적인 팀이었다. 그는 이 클럽에서 앵커맨(공격과 수비를 이어주는 수비형 미드필더)의 역할을 부여받았고 곧 리그 제일의 수비형 미드필더로 부상했다. 그는 에스투디안테스에서 다섯 시즌 동안 활동하면서 1967년 메트로폴리타노(아르헨티나 축구 리그 중 전반기 리그) 우승,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3연속 우승(1968~1970), 1968년 인터컨티넨탈컵 우승을 일궈냈다. 이렇듯 선수로서 많은 업적을 쌓았던 빌라르도는 동료 축구선수 라울 마데로와 같이 대학을 졸업한 후 축구 선수를 그만두고 코치 경력을 시작했다.

2.2. 감독

2.2.1. 아르헨티나 대표팀 이전

빌라르도는 1971년 에스투디안테스의 감독을 맡으면서 축구 감독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1971년에 팀을 이끌고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에 진출했지만 아쉽게도 우루과이의 축구 클럽 나치오날에게 패했다. 하지만 당시 그는 감독으로서 집중하기에는 어려운 환경에 직면해 있었다. 그는 1968년에 결혼한 뒤 딸을 낳았고 아버지의 가구 사업을 도와야 했으며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한 후 의사로서 경력도 이어가야 했다. 이 많은 직종을 종사하느라 시간을 쪼개써야 했던 그는 결국 피로를 느끼고 1975년 에스투디안테스를 떠난 후 이듬해 의학계를 떠나 축구 감독에 전념하기로 결정했다.

1976년, 콜롬비아의 축구 구단 데포르티도 칼리의 감독으로 부임한 그는 2년 후 팀을 이끌고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에 진출했지만 아쉽게도 우승컵을 획득하는 데 실패했다. 빌라르도는 결승전 직후 칼리를 떠나 콜롬비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그는 콜롬비아를 1982 월드컵에 진출시키는 데 실패했고 결국 경질되고 말았다. 1982년 에스투디안테스로 복귀한 빌라르도는 알레한드로 사베야, 마르셀로 트로비아니, 우고 고타르디, 호세 폰세 등의 공격진을 앞세워 리그에서 강력한 면모를 보여줬고 그해 메트로폴리타노 우승을 달성했다. 그후 1983년, 그는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전격 발탁되었다.

2.2.2. 아르헨티나 대표팀

2.2.2.1. 1986 멕시코 월드컵(우승)
파일:external/www.fm-base.co.uk/328721d1365517958-albicelestes-argentina-1986-1990-whos-your-maradona-maradona.jpg

빌라르도는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한 후 철저히 실용적인 축구로 일관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중국과의 친선경기에서 1:0 패배를 할 정도로 영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다. 그는 이렇듯 침체된 대표팀 분위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3-5-2 역습 전술을 기획한 후 신예 선수들을 대거 뽑아 자신의 전술에 철저히 접목시켰다. 이에 대해 많은 이들이 "이건 아르헨티나의 축구가 아니다!"라며 비판을 가했지만 그는 이를 묵살하고 철저히 자신의 뜻을 밀어붙였다. 그 결과 아르헨티나는 탄탄한 수비를 기반으로 하여 성과를 거둬들이는 데 성공했다. 특히 1986 월드컵에서 디에고 마라도나가 엄청난 활약을 선보이며 아르헨티나의 승승장구를 이끌었다. 결국 아르헨티나는 이 대회에서 2번째 월드컵 우승을 달성했다. 당시 사람들은 마라도나에게 열광했지만, 사실 아르헨티나가 우승할 수 있었던 데엔 빌라르도의 '실용주의'가 절묘하게 맞아들어갔기 때문이기도 하다.
2.2.2.2. 1990 이탈리아 월드컵(준우승)
1986 월드컵 우승으로 대표팀 감독 입지를 확고히 한 빌라르도는 1990 월드컵에서도 대표팀 감독 지휘봉을 잡을 수 있었다. 그는 이 대회에서도 자신의 3-5-2 역습 축구를 구사하며 전 대회에 비해 기존 주전들이 노쇠하여 전력이 떨어진 대표팀의 호성적을 이끌었다. 특히 마라도나는 전 대회보다 기량이 하락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건재했고 골키퍼 고이코체아는 이 대회에서 환상적인 활약을 선보이며 아르헨티나를 결승으로 인도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는 서독과의 결승전에서 2명이 퇴장당하고 페널티킥을 허용하는 등 자멸하고 말아 결국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2.3. 그 이후

빌라르도는 1990 월드컵을 마감한 후 대표팀을 떠나 2년간 신문사에 축구 칼럼을 연재했다. 그러다가 1992년 세비야 FC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마침 이 팀엔 다름아닌 마라도나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 마라도나는 몸관리에 실패해 살이 쩠고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해 빌라르도를 돕지 못했다. 결국 빌라르도는 세비야에서 한 시즌만 치른 후 팀을 떠나 몇년 간 야인으로서의 삶을 보내다가 CA 보카 주니어스(1996년). 과테말라 축구 국가대표팀(1998년), 리비아 축구 국가대표팀(1999~2000년)을 차례로 맡았지만 눈에 띄는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러던 2003년, 빌라르도는 에스투디안테스의 감독으로 전격 부임했다. 그는 호세 소사 등 유스 선수들을 대거 기용해 리빌딩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2시즌을 맡았고 2004년에 팀을 떠나 감독으로서의 인생을 마감했다.
파일:external/pbs.twimg.com/CAzsHFgWEAAuOZZ.jpg

한편, 그는 에스투디안테스 감독을 맡으면서 구설수에 휘말리기도 했다. 리버 플레이트와의 경기 도중 샴페인을 마시는 듯한 장면이 포착된 것이다. 경기 도중에 술을 마시냐는 논란에 휩싸인 빌라르도는 "그건 샴페인이 아니라 게토레이다!"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급기야 과학 수사까지 동원되어 그의 말대로 게토레이었음이 판명되었다.

감독 인생을 마감한 후, 빌라르도는 2007 주지사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고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스포츠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마라도나가 아르헨티나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자 대표팀 총감독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2010년 마라도나가 월드컵을 치른 후 사임하자, 그 또한 총감독 직을 떠나 야인의 삶으로 돌아갔다.

2020년 6월에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에 걸렸다. #

2.4. 스타일: 빌라르도주의

파일:external/www.fm-base.co.uk/328704d1365515427-albicelestes-argentina-1986-1990-whos-your-maradona-formation.jpg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아르헨티나 전술

빌라르도는 철저한 실리축구의 신봉자였다. 1980년대 중반에 유럽에서 유행하던 3-5-2 시스템을 받아들이기로 한 그는 철저한 실용 축구를 펼치겠다고 선언했다. 빌라르도 휘하에서 아르헨티나의 수비는 그 어느 때보다 막강해 보였다. 특히 두 명의 스토퍼가 상대 투톱을 전담 마크하고, 최후방의 리베로가 페널티 박스의 위험지역을 완전 봉쇄하는 쓰리백 시스템은 상대 공격수들을 좌절감에 빠뜨리게 만들었다. 한편 공격 분야에서는 마라도나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다. 빌라르도는 선수들에게 공을 잡으면 일단 마라도나에게 패스하라고 지시할 정도로 마라도나에게 모든 것을 맡겼고 마라도나는 이러한 감독의 전폭적인 신임에 완벽하게 부응해 조국에 월드컵 우승을 안겼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실용축구는 아르헨티나식 축구와 거리가 멀다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특히 1978년 아르헨티나를 월드컵 우승으로 인도한 세자르 루이스 메노티는 빌라르도식 축구는 결코 아름답지 못하다고 비판했다. 메노티는 축구를 하는 이유는 관중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지 단순히 트로피를 들어올리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후 아르헨티나 축구계는 아름다운 축구를 추구하며 패싱 위주의 공격적인 플레이를 강조하는 '메노티주의'와 승리를 위해서라면 경기력 따위 제껴두고 철저히 실익을 챙기려드는 '빌라르도주의'로 갈라져 첨예한 대립을 벌였다. 이는 오늘날까지 진행되고 있는 사안이지만, 일단 축구계에서는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했던 메노티보다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우승과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준우승을 이끈 빌라르도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게다가 메노티의 후계자 격으로 공격축구를 숭상하는 마르셀로 비엘사는 아르헨티나 국가대표를 이끌고 2002 월드컵에서 조별리그 광탈을 한 반면, 빌라르도의 후계자인 알레한드로 사베야 2014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를 준우승으로 이끌었으니 더욱 대조적이다. 또 메노티, 비엘사와 마찬가지로 닥공축구의 대명사인 호르헤 삼파올리 2018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 대표팀을 이끌고 16강의 저조한 성적을 거둔 반면, 현 아르헨티나 대표팀 감독인 리오넬 스칼로니는 빌라르도, 사베야와 마찬가지로 수비축구로 코파 아메리카 우승과 2022 월드컵 우승을 이루면서 아르헨티나 내에서는 당분간 '빌라르도주의'가 우세할 전망이다.

3. 수상

3.1. 선수

3.2.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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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1990 1994 1998 2002 2006
2010 2014 2018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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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로필상 나이가 1939년생으로 나와있으나, 몇몇 다른 사이트들에서는 1938년생으로 나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