奥平信昌
1555-1615
1. 개요
오쿠다이라 노부마사는 오쿠다이라 사다요시의 장남이자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이다. 개명 전의 이름인 사다마사(貞昌)라고도 잘 알려져 있다.2. 생애
1555년 태어났다. 1573년 경 오쿠다이라 가문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설득으로 다케다 가문을 배반할 때[1] 설득 과정에서 이에야스가 제안해 오쿠다이라 가문의 영지 증가와 더불어 이에야스의 장녀 가메히메와 혼인까지 했다.[2] 이 과정에서 본래 정실이자 다케다 가문에 인질로 가있던 오후와 이혼했고, 오후는 다케다 카츠요리에게 처형당했다.오쿠다이라 가문의 배신에 분노한 카츠요리는 1만 5천의 대군을 이끌고 사다마사의 나가시노 성을 공격했고, 사다마사는 5-6백명의 병사를 이끌고 농성하며 버텼다. 당시 담대하고 기민한 지휘로 다케다의 공격을 막아내었으며 산골 탄광이 많은 가히의 특성을 살려 다케다 군이 편성한 땅굴파기 부대가 지하도를 파서 성을 향하자 그것을 읽고 성안에서도 땅굴을 파서 두 군대가 땅속에서 마주쳤다는 일화도 있다. 당연히 적을 만나리라 예상 못한 다케다 측이 조총 세례를 받고 퇴각. 하지만 중과부적으로 외곽성이 결국 함락되자 가신 토리이 스네에몬에게 '꼴사납게 원군을 요청할거 없이 그저 앞으로 10일 뒤 함락된다고 전하라'라는 명령을 내렸다. 토리이 스네에몬은 강에 방울까지 쳐져 있는 다케다 군의 포위망을 무거운 돌을 옷 속에 넣어 숨을 쉴때만 수면으로 고개를 내밀고 다시 밑으로 내려가 강바닥을 걸어서 통과했고, 이에야스와 노부나가에게 상황을 전한다. 토리이 스네에몬은 노부마사가 명한대로 '원군을 보내시건 말건 10일 뒤엔 성이 떨어지니 결정은 주군께 맡깁니다.'라는 기백으로 '괴물 같은 주군에게 도깨비 같은 가신이 있었구나'라며 노부나가마저 크게 감탄하게 만들었으며 이후 출정한 오다군과 도쿠가와군의 구원으로 다케다군을 격파하게 되며, 이것이 나가시노 전투이다. 이때 노부나가의 이름에서 노부(信)라는 글자를 받아 노부마사로 개명했다.[3]
그 후 이에야스가 다케다의 영지들을 공격, 흡수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고,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에서는 이에야스의 본진을 공격하려는 이케다 츠네오키의 별동대를 추격하여 선봉으로 모리 나가요시와 격돌, 압승을 거두었다.[4] 오다와라 정벌 이후 이에야스를 따라 간토로 전봉되어 우에노 오바타 3만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때도 도쿠가와군에 속해 싸웠고 교토에서 패전 후 도주중이던 서군 장수 안코쿠지 에케이를 잡기도 했다. 이 공으로 미노 카노번 10만석을 받았고, 1602년 은거하고 1615년 사망했다. 뒤는 삼남 오쿠다이라 타다마사가 이었다.
그야말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첫째 사위로서 가문에서는 자신의 지위를 내세우지 않고 묵묵히 처신하면서도 도쿠가와의 운명을 가르는 전투마다 출전하여 큰 공을 세운 걸물이었다.
[1]
오쿠다이라 가문은 본래 이마가와 가문을 섬기다
오케하자마 전투 이후
도쿠가와 가문을 섬겼다. 그러나 1570년에 이르러 다케다를 따르고 있었다.
[2]
말그대로 산골짜기 군소영주였기 때문에 당시 일대세력을 이룬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장녀의 눈에 차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가 많다. 소설 대망에서도 혼인 초기 가메히메가 기싸움을 하는 묘사가 나온다. 하지만 과정이 어떠했는지 몰라도 둘의 금슬은 좋았고 전국시대에는 드물게 부부가 백년해로 하였다.
[3]
이미 이전에
다케다 하루노부에게 노부(信)를 받아 개명하였고 이 일화는 후에 창작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4]
당시 모리 나가요시가 이케다 쇼뉴의 사위였기 때문에 도쿠가와가 일부러 자신의 사위인 오쿠다이라 노부마사를 보냈다고도 한다. 격의 차이를 보여주겠다는 심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