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2-03 10:37:41

사토미 요시야스


里見義康
(1573 ~ 1603)
1. 개요2. 생애

1. 개요

전국시대 에도 시대 초기의 다이묘이자 아와 국 타테야마 번의 초대 번주.

2. 생애

사토미 요시요리의 장남으로 1587년에 상속받아 1588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아와 국, 카즈사 국, 시모우사 국의 일부를 받았으며, 히데요시의 요청으로 오다와라 정벌에 참여하게 되었다.

오다와라로 향하기 전에 제1차 코우노다이 전투 이후부터 비호하고 있던 오유미 구보인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아들인 아시카가 요리아츠를 등에 업고 후호죠 가문에게 빼앗긴 옛 영토를 되찾는 호기라 판단하여 4월 7일에 호죠 군의 성주인 타카기 가문이 지배하는 후나바 향으로 출진하였는데, 이는 아사노 가문이나 도쿠가와 가문의 군세가 오기 전에 한 단독 행동이었다.

13일까지 미우라 반도에 출진하여 가마쿠라 구보의 재흥을 표방하면서 나가사와 마을과 노비 마을 등에 방화를 하거나 20일에 사카이 가문이 지배하는 토미타 향에도 군사를 보냈으며, 시모우사, 카즈사 등의 호죠군을 공격하게 하면서 자신은 미우라를 공격하는데 지휘했다. 4월 하순과 5월 초순 사이에 오다와라에 도착하여 히데요시 휘하에서 진을 쳤으며, 시마즈, 오토모, 모리 등의 가문과 함께 히데요시의 하타모토로써 이시가키의 본진을 들어갔는데 오다와라에 늦게 온 것 때문에 히데요시에게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4월 중순에 전투를 벌인 것으로 히데요시의 총무사령을 위반했기 때문에 영지인 카즈사 국, 시모우사 국 등이 몰수되어 아와 국 4만 석으로 감봉되어 옮겨졌다. 또한 히데요시가 인질을 보내는 것과 상경을 요구받아 아내를 인질로 먼저 보내면서 9월 초순과 중순에 사원을 중심으로 영지를 정리하는 작업을 맡았지만 영지의 배분을 두고 갈등하는 가신들이 많자 히데요시의 측근인 마시타 나가모리에게 영지 몰수에 따른 뒷처리를 맡겼다.

나가모리에게 영지에 대한 처리를 맡기면서 상경을 하던 도중에 1591년 3월 1일에 히데요시의 추천으로 조정으로부터 노카미(안보수), 지쥬(시종)에 임명되어 히데요시 아와 지쥬라고 칭해졌다. 6월과 11월 사이에 거점을 오카모토 성에서 타테야마 성으로 옮기면서 아와 국에서 가신들에게 영지를 분배하였으며, 1592년에 히데요시가 조선으로 출병한 임진왜란(분로쿠의 역) 때 히데요시가 요구한 1만 석당 200명의 군사를 보내면서 상경하였다.

2월 3일에 다른 관동, 동해의 다이묘들처럼 교토에 머물다가 3월 17일에 히젠 나고야 성으로 향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수행하여 히젠 나고야 성에서 진을 쳤으며, 1593년 3월에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5월에 명나라 사신에 대해 욕설을 금지하는 서약서 제출에 참가하였다. 8월 말에 히데요시와 이에야스가 오사카로 돌아갈 때까지 나고야에 머무르다가 10월 말에 아와로 돌아가서 1594년 4월에 히데요시의 측근인 마에다 토시이에의 저택에 공양을 했으며, 히데요시가 후시미 성을 쌓고 8월에 옮길 때 다른 다이묘들처럼 성 아래에 저택에 만들었다.

1595년에 히데요시의 조카인 도요토미 히데츠구가 모반 혐의로 자결하자 7월 20일에 전국의 다이묘들과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혈판의 서명을 제출했으며, 1597년 2월에 또다시 임진왜란(분로쿠의 역)이 일어날 때 교토에 머물렀다. 6월에 아와 국에서 시작될 타이코겐치에 대해 후시미 성으로부터 지시가 내려오자 히데요시의 측근인 나가모리에게 측량을 실시하도록 요구했으며, 타이코겐치 덕분에 가신들의 수확량이 파악되면서 아와 국의 지배가 강화하게 되었다.

1600년에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코가네에 도착하여 이에야스와 함께 아이즈 정벌로 향했으며, 9월에 이에야스가 이시다 미츠나리를 공격하려고 하자 미노에 있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사자를 보내어 히데타다 군을 따르려고 했지만 대 우에스기 전선의 중요성 때문에 우츠노미야에 진을 치도록 명령받았다. 유키 히데야스와 함께 우츠노미야 성의 수비를 담당하였으며, 1601년 8월에 세키가하라 전투의 논공행상으로 우에스기 카게카츠를 견제했다는 공적을 인정받아 히타치 국의 카시마군 3만 석이 증가되어 12만 석으로 에도 시대에 도쿠가와를 섬기는 관동 최대의 다이묘가 되었다.

1601년에는 성의 도시의 육성하기 위한 정책을 펼치기 위해 아와 국 내 상인들에게 아라이 정 이외의 장소에서 거래하는 것, 다른 곳에서 상인들에게 숙소를 빌려주는 것을 금지하고, 타국에서 오는 상선도 아라이 정에서만 입항을 허가하여 상인들은 모두 성 아래로 모이게 하였다. 또한 건어물에 대해서는 정당한 거래를 할 수 있도록 무리한 값으로 구매하지 못하였다.

죽기 직전인 1603년에 불도로 귀의했다고 하며, 그의 무덤은 타테야마 시의 아와마구라에 있는 절인 지온지에 있다고 한다.

사후 가문은 정치 사건과 연루되어 몰락해버렸는데, 아들인 사토미 다다요시(里見忠義)는 정처의 조부인 오쿠보 다다치카에 연좌되어 아와 국을 몰수당했다. 그나마 남아있던 카시마 3만석은 쿠라요시 번 3만석과 맞바꾸는 방식으로 전봉되었으나, 현지에서 실제로 받은 석고는 4000석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나중에 돗토리 번이 세워지면서 흡수되며 본인은 돗토리 번주인 이케다 가문의 관리하에 놓인 유배자 같은 처지가 되었다. 게다가 다다요시는 1622년에 29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 적자도 없어 사토미 가문은 가이에키되었다.

태합입지전에도 등장하나 비중은 그야말로 공기. 대를 이을수록 구려지는 사토미가에 종지부를 찍은 허접하기 그지없는 능력치에 그나마도 마지막 시나리오에서만 등장하는데 이 시나리오에선 시작하자마자 일어나는 이벤트인 세키가하라-오사카 여름의 전투후에 이에야스의 천하가 되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