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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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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01.24. 정규앨범
1집 Got To Be There
1972.08.04. 정규앨범
2집 Ben
1973.04.15. 정규앨범
3집 Music & Me
1975.01.16. 정규앨범
4집 Forever, Michael
1979.08.10. 정규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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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11.30. 정규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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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집 Bad
1991.11.26. 정규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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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06.20. 정규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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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od on the Dance Floor: HIStory in the Mix
2001.10.30. 정규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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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16. 컴필레이션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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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집 Thriller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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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집 Thriller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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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58년~1976년: 잭슨 파이브2. 1977년~1979년: Off the Wall3. 1980년~1984년: Thriller4. 1985년~1988년: Bad 5. 1989년~1993년: Dangerous6. 1993년~1994년: 1차 아동 성추행 혐의와 첫 번째 결혼7. 1994년~1997년: HIStory 8. 1998년~2002년: Invincible9. 2003년~2005년: 2차 아동 성추행 혐의와 무죄10. 2006년~2009년: 황제의 말년11. 팝의 황제, 세상을 떠나다12.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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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58년~1976년: 잭슨 파이브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잭슨 파이브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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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www.mtv.com/32_jacksonfive.jpg

2. 1977년~1979년: Off the Wall

마이클 잭슨은 거대한 꿈을 가진 아티스트였다. 그리고 성인이 된다면 자신이 인생을 책임질 줄 알고 살아야 한다는 신념과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1979년 8월, Off the Wall을 완성시킬 때 즈음에 그는 한 장의 메모를 작성했다. "MJ는 내 새로운 이름이 될 것이고 더 이상 나는 마이클 잭슨이 아니다. 나는 완전히 새로운 인격체, 완전히 새로운 모습,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하며 나를 잭슨 파이브 시절 노래 부르던 꼬맹이로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전 세계를 놀라게 할 가수, 배우, 댄서가 될 것이다."
파일:마이클 잭슨79년도메모.jpg
당시에 작성한 메모

1972년부터 1975년까지 잭슨은 잭슨 파이브의 멤버로서 모타운 레코드를 통해 총 4개의 앨범을 발매했고, 이후 뮤지컬 영화인 The Wiz에 출연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 퀸시 존스와의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1] 잭슨은 자신의 성인 이후 첫 번째 솔로 앨범을 창조적이고 자유로운 성향의 음반으로 만들고자 했고, 이것이 Off the Wall 프로젝트의 전체적인 계획이 되었다.

그렇게 발매된 앨범은 빌보드 200에서 3위, 빌보드 R&B 차트에서 1위를 무려 16주간 유지하였다. 결국 1980년 빌보드 연말 앨범 순위에서 3위를 기록하였으며 총 9개국 앨범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 5개의 싱글이 발매되었으며 3개의 곡을 직접 작곡했다. 첫 번째 솔로 싱글인 " Don't Stop 'Til You Get Enough"가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으며 빌보드 핫 100의 정상에 올랐고, 이는 잭슨이 자신의 솔로 커리어 초반 직접 작곡한 곡 중 하나이다. 앨범의 두 번째 싱글인 " Rock With You"도 빌보드 hot 100 1위를 달성했고 4주간 유지하였다. 이후 앨범의 타이틀 곡인 "Off the Wall"과 "She's Out of My Life"가 싱글 차트 top 10을 기록하며 총 4개의 싱글이 top 10을 기록했다. 이는 솔로 아티스트로서 최고 기록이었다.

Off the Wall은 종종 마이클 잭슨 최고의 앨범 중 하나로 여겨지며, 잭슨 이후 수많은 아티스트들에게 음악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 Off the Wall은 잭슨 본인의 성공적인 솔로 아티스트 생활의 돌파구이자 초석이 되었고, 평론가들은 " 디스코 신화의 랜드 마크이자 가장 위대한 앨범"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전 세계적으로 2,000만 장 이상이 팔려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 중 하나이며, 그래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Off the Wall은 음악과 엔터테인먼트를 완전히 초월했다. 이 앨범의 성공은 1970년대 말까지도 여전히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불러일으키는 국가적, 국제적 성취 수준을 반영한다. 잭슨의 앨범은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다. 앨범의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영향으로 인해 비욘세, 퍼렐 윌리엄스, 켄드릭 라마, 더 위켄드와 같은 21세기 예술가들은 모두 그들 자신만의 스타덤을 창조하기 위해 의지한 청사진을 가지고 있다.

마이클 잭슨이 20세가 되던 해에 기록된 이 앨범은 잭슨 파이브에서 분리된, 그의 독창적인 음악의 힘과 창의적 비전으로 예고한다. 현대 음악에서는 볼 수 없었던 R&B와 팝의 크로스오버와 차트, 마케팅 및 판매 트렌드의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면서 흑인 예술가의 레코드 판매의 한계를 벗어났다. 롤링 스톤은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 팝을 발견했다."고 기록했고, 당시 흑인 예술가들에게 잭슨은 훌륭한 영감을 주었다고 평가된다. 저물어가던 디스코 음악에 새로운 사운드를 제시한 혁신성은 엄청난 호평을 받았으며 여러 음악 매체와 평론가가 선정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리스트에 포함된다.

National Association of Recording Merchandisers 선정 가장 위대한 앨범 리스트에서 80위를 기록했고, 빌보드가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목록에서 149위에 올랐으며, 가장 위대한 R&B/힙합 앨범 목록에서 3위를 기록했다. 롤링 스톤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리스트에서 68위를 기록했고, 블랜더가 선정한 미국 역대 최고의 앨범에서 13위를 차지했다. 죽기 전에 들어야 할 1001가지 앨범에 포함되었고, 또한 Q 매거진 선정 1970년대 최고의 앨범 50에 집합적으로 포함되었으며, Gear 선정 20세기 미국 최고의 앨범에서 58위를 기록했다. 이외의 여러 최고의 앨범 리스트에서 최상위권을 차지하는 명반이다.

퀸시 존스는 여러 거장들과 협업해 일했지만 재즈 전문 프로듀서로 다른 음악에는 딱히 실적이 없었다. 에픽 레코드에서는 퀸시 존스가 너무 늙어 안된다며 둘의 협업을 반대했지만, 마이클 잭슨은 끝까지 그를 고집했고 결국 퀸시와 마이클의 협업이 성사되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명반 Off the Wall인 것이다. 이 앨범은 1970년대 말 디스코 열풍[2]에 영향을 받은 펑크, 소울 음악, R&B가 조화된 거대한 블록버스터 앨범으로 70년대 중반의 Dancing Machin의 근원을 두고 있었다. 수록곡 She's Out Of My Life는 마이클의 발라드 곡 중 그 어느 것보다 정서적인 힘이 강하며 가장 카랑카랑한 시절의 매력적인 목소리가 녹아내린 곡으로 이 곡을 녹음할 때 정서적으로 압도당한 잭슨이 끝부분에 계속 울었다고 한다. "Working Day and Night"와 "Get on the Floor"는 댄스 플로어를 기반으로 한 곳으로 강렬한 멜로디와 리듬 훅은 지울 수 없는 독창적인 조화를 선보인다. 제일 강렬한 곡은 싱글 차트 1위에 올랐으며 현재까지도 흑인들의 파티에는 꾸준히 흘러나온다는 댄스 송이자 마이클이 작곡한 Don't Stop 'Til You Get Enough와 로드 템퍼튼이 작곡했으며 처음 듣는 사람도 도저히 거부할 수 없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는 마스터피스 Rock With You였다. 평론가들은 이 앨범에 엄청난 찬사를 내렸으며 Phil McNeill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가수라고 평가했다.
파일:external/68.media.tumblr.com/tumblr_no9z54EkRv1rldhmro2_250.gif
1980년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당시 2000만 장 넘게 팔려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둔 Off the Wall 앨범으로 마이클 잭슨은 대중음악계에서 가장 권위 높은 시상식인 그래미 어워드에서 2개의 후보로 올랐으며 'Best R&B Vocal Performance, Male'을 수상했다. 그러나 잭슨은 "앨범도 많이 팔렸고 평론가들에게도 인정을 받았는데 고작 상을 1개밖에 타지 못한 것은 자신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음악계에서 차별을 당하기 때문이 아닌가?"하며 크게 낙담했다. 본상이 아니기 때문에 실망감이 더욱 컸을 것이다.[3] 잭슨은 이에 대해 분함을 느끼고 조금이나마 자신을 알리고 싶어 홍보팀에게 미국의 음악 잡지 롤링 스톤에 자신의 사진을 커버 사진으로 쓸 수 있는지 물어봐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잭슨씨 그럴 계획은 없습니다.'라는 답변을 받았고, 잭슨은 흑인이 잡지의 커버가 되면 잡지가 안 팔린다는 말을 너무나 많이 들었다. 다음에는 결코 이들이 나를 무시할 수 없는, 나한테 한 번만 인터뷰 하자고 매달리게 만드는 그런 앨범을 만들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1980년 9월 26일에는 마이클 잭슨에게도 중요하며 걸작인 "Triumph" 앨범이 The Jacksons의 정규앨범으로 발매된다. 9곡 중 5곡은 마이클이 공동 작곡, "This Place Hotel"[4] 1곡은 단독으로 작곡했는데 롤링 스톤에서는 이 곡을 마이클 잭슨의 가장 중요한 노래 50곡 중 하나로 선정했었다. 이 앨범은 100만 장 이상이 팔렸고 마이클 잭슨 특유의 딸꾹질 창법과 잘 어우러진 매력적인 앨범으로 평론가들은 극찬했으며 The Jacksons가 발매한 정규앨범 중에서는 최고로 평가받는다. 변호사 존 브랑카는 마이클 잭슨이 1980년 업계에서 가장 높은 로열티를 받았다고 말했다.

3. 1980년~1984년: Thriller

Off the Wall이 음악적으로 평론가들에게 찬사를 받으며 상업적으로도 가장 성공한 앨범 중 하나가 되었지만, 일부를 제외한 보수적인 평단의 반응, 그리고 흑인음악에 대한 차별은 완화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후 잭슨은 차기작에 전력을 쏟아부었고 그렇게 나온 작품은 세상을 바꾼다.

Thriller 1982년 11월 30일, 에픽 레코드와 CBS 레코드를 통해 전 세계에 발매되었다. 1983년 2월 26일 빌보드 200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매주 100만 장씩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총 9개 국가에서 1위를 석권했고, Thriller는 빌보드 200에서 잭슨의 첫 번째 1위 앨범이 되었다. 이 앨범은 " The Girl Is Mine," " Billie Jean," " Beat It," " Wanna Be Startin' Somethin'" " Human Nature," "P.Y.T. (Pretty Young Thing)" 그리고 " Thriller"까지 7개의 싱글을 제작했다. 모든 싱글이 빌보드 hot 100 차트에서 top 10에 진입하였고, 그중 "Beat It"과 "Billie Jean"이 차트 1위에 오르며 가장 많은 top 10 곡을 배출한 앨범이라는 신기록을 세웠다. Thriller MTV의 주요 시간대에 방영된 최초의 흑인 음악가의 뮤직 비디오였으며,[5] 1983년 말까지 3,200만 장이 팔리면서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 되었다. 1983년과 1984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었으며, 1983년과 1984년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기도 했다. 또한 1983년 2월 26일부터 1984년 4월 14일까지 빌보드 200에서 37주간 1위를 유지하며 신기록을 세웠고, 80주간 top 10에 머무르며 top 10에 1년 이상 머무른 최초의 앨범이 되었다. 이는 영국에서 6번째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다.

첫 번째 싱글은 폴 매카트니와 협업하여 제작한 " The Girl Is Mine"이었다. 일부 비평가들로부터 리드 싱글로는 잘못된 선택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지만, 빌보드 hot 100 2위, hot 블랙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하며 묵살하였다. 그 다음으로 발매된 " Billie Jean"은 빌보드 hot 100 1위를 7주간 유지했고, 1983년 발매된 싱글 중 두 번째로 좋은 성적을 가진 곡이었다. Billie Jean은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싱글 중 하나로, Thriller가 가장 많이 팔리는 앨범이 되는 것에 큰 역할을 했다. 또한 음악적으로 포스트 소울 팝 음악의 선구자적 측면에 대해 찬사를 받았으며, 잭슨의 가장 사랑받는 싱글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 Beat It" 또한 싱글차트 1위를 기록, 3주간 유지하였다. 이는 잭슨을 " 록 음악의 개척자"로 불리게 했고 평단의 큰 호평을 받았다. 이후 " Wanna Be Startin' Somethin'"이 싱글 차트 5위, " Human Nature"가 7위, "P.Y.T."가 10위에 올랐다. 마지막으로 앨범의 타이틀 곡인 "Thriller"가 발매되었고 이는 대중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중 하나로 여겨지며 싱글 차트에서는 4위를 차지했다.

Thriller의 유산과 영향력은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번져나간다. 블랜더는 잭슨을 "20세기 후반 뛰어난 팝 아이콘"으로 묘사했고, 뉴욕 타임스는 "음악적 현상이자 음악에는 마이클 잭슨이 있고, 다른 이들이 있다."라고 평했다. 타임지의 리처트 콜리스는 "역대 최고의 팝 앨범"으로 묘사했다. 마이클 잭슨은 1980년대 Thriller를 시작점으로 대중음악을 이끌어가기 시작하는데 예술적 인격체로서, 그리고 막대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음악 산업이 기능하는 방식을 재창조했다. 특히 Thriller는 당시 잡지, 장난감, 히트 영화 티켓과 다른 방향으로 하나의 주식처럼 팔리기 시작한다. '당시 음악 산업에 종사하고 있던 모든 이들은 Thriller 발매에 빚을 지고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취향과 스타일, 장르, 그리고 인종의 한계를 넘어선 최초의 슈퍼스타가 등장한 것이다.

Thriller 발매의 순간부터, 그것은 음악 산업의 표준을 정의했다. 이 앨범은 잭슨의 MTV 출연과 백악관에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면서 대중음악의 인종적 장벽을 없애버렸다. 또한 뮤직 비디오를 성공적인 홍보 도구로 사용한 최초의 작품이 되었다. 예술가, 음반 회사, 프로듀서, 홍보 기획자, 심지어 안무가들까지, 이것은 마이클 잭슨 개인의 경력뿐만 아니라 대중음악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순간으로 여겨진다. 워싱턴 포스트에 따르면, 1980년대, 흑인 예술가로서, 잭슨의 성공은 전례 없는 사건이었다. Thriller는 프린스 휘트니 휴스턴 등, 흑인 음악가들이 주요 아티스트들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을 만들었다.

Thriller는 흑백을 초월해 미국인들의 하나의 생필품처럼 인식돼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Thriller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1984년에 기네스 세계 기록에 등재되었으며 이는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기록이다. Thriller는 1984년 3월 5일 시점에서 CBS 레코드의 집계에 의하면 전 세계적으로 3,090만 장이 팔렸으며 현재까지 6,600만 장이 팔린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미국에서 두 번째로 많이 팔린 앨범이다. 2017년 2월 현재 미국에서 3,300만 장의 판매량을 인증받았다.

제26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앨범을 수상했고 Beat It은 올해의 레코드를 수상하는 등 총 12개 부문 후보에 오르고 8개의 상을 석권하며 최다 후보/최다 수상이라는 신기록을 달성했다. 평론가들과 여러 음악 매체에서 선정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중 하나로 간주되며 그래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미국 의회도서관에 "문화적, 역사적, 미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등재되었다. Off the Wall이 잭슨을 그 시대의 위대한 아티스트로 올려놓았다면, Thriller는 전 세계인들에게 새로운 대중음악 선구자의 등장을 알리는 분수령이 되었다.

Thriller는 음악적 예술성을 넘어 사회를 변화시킨 앨범으로 평가받는다. National Association of Recording Merchandisers 선정 가장 위대한 앨범 리스트에서 3위를 기록했고, 빌보드 선정 역사상 가장 위대한 R&B/힙합 앨범에서 1위를 차지했다. VH1 선정 가장 위대한 앨범 1위, Popblerd 선정 1980년대 가장 위대한 앨범에서 1위, Slant 매거진 선정 1980년대 가장 위대한 앨범에서 1위, Baranes & Noble 20세기 최고의 음반에 선정되었으며, Chris Smith가 뽑은 대중음악을 바꾼 101개의 앨범에 포함되었다. 타임지 선정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100의 리스트에 포함되었고, 롤링 스톤 선정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앨범 40에 집합적으로 선정되었다. 또한 Tom Moon 선정 죽기 전에 들어야 할 1000개의 레코드에 선정되었으며, NME 선정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60가지 앨범에 포함되었고, Q 매거진 선정 가장 위대한 1980년대 앨범에서 2위를 기록했다. 이외에도 수많은 리스트가 존재한다.

다른 어떤 음반도 그런 흥분을 불러일으키지 못했고, 대중들의 관심을 사로잡지도 못했다. 21세기 현재까지도 마이클 잭슨의 Thriller는 가장 많이 스트리밍 되는 음반 중 하나이며 우리의 사회에 녹아 있다. 한 역사학자는 " Thriller는 단편 영화의 시민 케인"이라고 설명했다. 14분간의 방대한 스케일의 Thriller 뮤직 비디오 촬영은 대중문화의 한 부분으로써 새로운 예술 형태를 구현했으며, 예술적 선구자로서 대중문화에서 마이클 잭슨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앨범 발매 1년 후, 대중음악이 기능하는 모든 모습들이 바뀌어 있었다.
Thriller의 유산과 영향력은 표현이 불가능하다. 20세기 제작된 이 위대한 작품은 21세기가 된 지금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극소수의 음악 예술만이 Thriller와 그 위상을 나란히 할 수 있다. 진정으로 가장 위대한 앨범이다.
― Dailyemerald

뉴욕 타임스의 존 로크웰은 오늘날 대중음악 역사의 가장 거대한 가수 중 한 명이 만든 멋진 팝 레코드로 흑인음악과 백인음악을 완벽하게 크로스오버 했다고 평가했으며 게리 멀홀랜드 음악 평론가는 이전 30년 동안 미국 대중음악의 근간을 이루었던 "흑인=소울/백인=록"의 등식을 영원히 바꿔 놓음으로써 대중음악의 역사를 새로 썼다고 평가했다.
파일:external/images4.fanpop.com/MJ-1983-the-thriller-era-23041780-450-500.jpg
Thriller 활동할 당시의 모습.

Thriller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뮤직 비디오를 하나의 성공 요소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전까지는 대중음악에 있어서 뮤직 비디오의 비중은 크지 않았고, 단지 홍보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따라서 뮤직 비디오가 부각되지도 않았으며 굉장히 단순하고 촌스러웠다.
Thriller 뮤직 비디오
그러나 잭슨은 역으로 뮤직 비디오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Billie Jean Beat It, Thriller 뮤직 비디오를 영화계의 스텝들과 연계하여 많은 비용을 들여 대규모로 제작하였고, 스토리 텔링에 맞춰서 춤을 추는 그의 모습은 음악산업을 뒤엎었다. 자연스럽게 서로 이어지는 스토리와 퍼포먼스, 극장의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화려한 특수 효과와 실감 나는 분장, 역동적인 카메라 워크, 집단 군무 등 혁신적인 뮤직 비디오 요소들이 모두 이 앨범을 통해 정립되었다. 즉, 보는 음악의 시대를 열어 버렸다. 1983년 3월, 모타운 25주년 공연에서 잭슨은 Billie Jean을 부르며 나타나서 문워크를 최초로 선보였고 해당 공연은 녹화되어 5월, TV로 전국으로 송출됐는데, 이는 1980년대 최초의 문화충격이었으며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중요한 순간 중 하나이다. 실험적인 음악, 혁신적인 뮤직 비디오, 거기다 앞으로 움직이지만 뒤로 가는 듯한 그의 신비한 춤으로 인해 그는 단번에 미국의 영웅으로 등극했고 잭슨의 큰 대중적 성공을 본 아티스트들과 레코드사들은 이후 음악산업에서 마이클 잭슨의 영향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Thriller의 영향력은 음반 업계에도 이어졌다. 당시 전 세계의 음반 시장은 퀸시 존스를 비롯하여 Thriller 제작에 협력한 사람들이 마이클에게 '요즘 음반 시장 상황을 보면 Thriller는 200만 장만 팔려도 잘 팔린 것'이라고 할 정도로 침체된 상태였는데[6] 사람들은 잭슨의 음반을 사기 위해 다시 레코드 가게로 모이기 시작했고 이들이 덩달아 다른 가수들의 음반도 사면서 쇠퇴하던 음반 시장을 살리는데 큰 기여를 한 것이다. Thriller는 일주일 동안 꾸준히 50만 장 이상이 팔려나가며 레코드 사장 길 프리슨도 당시 음반 업계는 마이클의 성공으로 크게 도움을 봤다고 말했다.

5월, 백악관에 가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게 마약 퇴치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상을 받는다. 레이건 대통령은 "백악관 앞에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모인 적이 없다."라고 하며 놀랄 정도로 수많은 인파들이 잭슨이 상을 받는 모습을 보기 위해 백악관으로 몰렸다. 타임지는 마이클을 비틀즈 이후로 가장 대단하며 엘비스 프레슬리 이후로 가장 인기 있는 단일 현상이라고 평가했다. 아이러니하게도 1982년 뉴스위크는 더 이상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즈와 같은 거대한 인기를 끌며 라디오, 방송국을 통합하는 로큰롤 스타는 더 이상 등장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고작 몇 개월 만에 마이클 잭슨은 뉴스위크의 예측이 틀렸음을 보여주었다. 사실 뉴스위크가 이런 예상을 할 만했던 것이, 비틀즈 이후로 마이클 잭슨까지 약 12년간 거대한 스타가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년 후인 1984년 뉴스위크는 마이클 잭슨이 The Jacksons의 멤버로서 여는 "Victory Tour"에 대한 기사를 보도하면서 "비틀즈 이후로 가장 폭발적인 현상"이라고 평가했다. 미디어들은 잭슨이 흑인을 음악의 주류로 올려놓았으며 (1982년에는 흑인음악이 빌보드 핫 100에서 소외되고 있었음은 물론 백인과 흑인들 간의 음악이 명백히 분리되고 있었다.) 심지어 아프리카에도 그의 유명세가 알려져서 인종차별을 완화시켰다는 보도가 등장하기도 했다.
파일:michaeljackson450x300.jpg
1984년 그래미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상을 수상한 마이클 잭슨.
비틀즈 이래 가장 폭발적인 현상이라 그는 쉽게 분류할 수 없다. 그는 그의 시대의 제임스 브라운 같이 탁월한 흑인 뮤지션이자, 영혼을 담은 노래와 열정적인 연출기법의 명수이며, 그는 혁신적이면서도 깊은 전통에 흠뻑 젖어 있는 맹렬한 리듬으로 춤을 출 수 있다. 초기 비틀즈처럼, 그는 긍정적인 음악 애호가이며, 때로는 가장 인기 있는 팝 스타인 폴 매카트니와 협력하기도 한다. 그는 마치 록 가수들의 우상인 팻 부니처럼 귀엽고, 건강하고, 경건하며 현대 녹음 스튜디오의 거장이면서도 프레드 아스테어 프랭크 시나트라와 같은 고풍스러운 엔터테이너가 되고 싶어 한다.
Newsweek

한편 당시 마이클 잭슨의 이미지는 동화책에 나오는 피터팬과 같다고 언론에게 묘사받았다. 여자같이 곱상한 얼굴과 변성기를 제대로 거친 것 같지 않은 중성의 목소리 그리고 어디서나 얌전하고 수줍어하며 공손한 모습, 또 인터뷰를 하지 않으며 은둔하는 잭슨은 마약을 하며 여자들을 후리고 다니고 거침없는 말을 쏟아내는 선배 록스타들이나 팝스타들이 보여준 모습들과는 굉장히 달랐던 것이다. 일부 사회학자들은 마이클 잭슨의 이런 보수적인 이미지가 그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랑을 받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1984년 6월 2일에는 The Jacksons가 "Victory"라는 정규앨범을 발매한다. 마이클은 8곡의 수록곡 중 2곡은 형제들과 같이 2곡은 혼자서 불렀다. 단독으로 부른 곡 중 하나는 "Be Not Always"로 5분의 긴 곡인데 졸릴 때 자장가로 안성맞춤일 만큼 마이클이 차분하게 노래를 이끌어 가는데 중간 중간에는 아예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한 상황에 어울리는 곡이다. 이 앨범에서 하이라이트는 "State of Shock"으로 빌보드 싱글 차트 3위에 올랐으며 '죽기 전에 꼭 들어야 할 팝송 1001'에도 선정됐다. 마이클과 랜디 잭슨이 공동으로 작곡했으며 롤링 스톤스의 보컬이자 작곡가인 믹 재거가 듀엣으로 참여했다. 믹이 왜 듀엣으로 참여했을까? 마이클의 Thriller가 경이로운 성공을 거두자 믹은 감탄하며 마이클 잭슨에게 사로잡혀 그의 인생에 대해 알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원래 믹이 시대의 흐름을 재빨리 흡수하는 뮤지션이기도 하기에 당시 음악계의 선구자였던 잭슨에게 관심을 가지는 건 당연했다. State of Shock을 부르기 전 마이클이 목을 따뜻하게 해야 한다고 하자 당연히 응하면서 그를 존중했다고 한다.

참고로 Victory 앨범은 미국 내에서만 200만 장이 팔렸는데 곡의 퀄리티가 State of Shock을 제외하고는 너무 평범하고 그 이전 Destiny, Triumph 앨범과 비교하면 상당히 별로이다. 그런데도 그 앨범들보다 미국 내 판매량이 높음은 물론 CBS 역사상 선주문량 최고 기록을 경신한 걸 생각하면 잭슨의 Thriller 성공 덕을 단단히 본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 해 7월에는 동명의 투어인 "Victory Tour"가 개최됐다. 그러나 투어 소식이 처음 세상에 알려지고 나서 티켓 판매 방식이 너무 상술적이라고 마이클 혼자서 쏟아지는 비난을 모두 받았다. 실은 마이클이 티켓 판매 방식에 관여한 게 아니었고 형제들이 한 짓이었는데 말이다. 결국 마이클은 기자회견을 열고 판매 방식을 수정할 것임과 동시에 자신이 얻은 모든 수익을 기부하겠다고 선언했고 실제로도 기부함으로서 논란은 사그라 들었다. 이 투어는 언론에서도 로큰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콘서트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고 마이클은 북미 전역을 누비며 성공적인 콘서트를 마쳤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심한 갈등이 있었다. 사실 이 시기 마이클은 형제들에게 독립하고 싶어 해서 같이 투어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콘서트 마지막 날 형제들과 한마디 말도 없이 마이클은 잭슨즈의 투어는 이것이 끝이라고 깜짝 선언하였다. 이러한 형제들과의 불화는 연일 언론을 통해 보도되어 마이클의 이미지에 안 좋은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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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에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영부인 낸시 레이건 여사와 함께[7]
1985년, 자선과 기부에 관심이 많았던 잭슨은 We Are the World라는 초대형 자선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잭슨은 라이오넬 리치와 함께 곡을 만들었고, 이 싱글은 당시 1,400만 장, 현재까지 2,000만 장 이상이 팔리며 80년대 가장 많은 판매량을 기록한 싱글이 되었다. We Are The World의 작사/작곡은 마이클 잭슨과 라이오넬 리치가 공동으로 했는데 증언에 따르면 노래의 두 소절을 제외하고는 전부 잭슨이 만들었다고 한다. 또 예상외로 상당히 빨리 곡이 완성됐다고 한다.[8]

4. 1985년~1988년: Bad

마이클 잭슨을 이상하게 여기는 시각은 1986년 시작되어 그를 음악적 이미지에서 밀어내고 가십의 연예인 이미지를 부여했다. 당장 어느 매체를 보더라도 Thriller 시기까지는 음악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Bad 앨범의 시작인 80년대 후반부터는 가십과 음악의 내용이 뒤섞여 존재한다. 1987년 타임지는 마이클 잭슨의 가십 이미지가 음악을 가려버렸다고 썼다. 또 1986년부터 백반증의 악화로 피부색이 하얘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1987년 발매된 Bad 앨범 커버에서 잭슨은 마치 백인처럼 달라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 국제적인 논쟁거리가 되었다.
마이클 잭슨은 연예인 역사상 가장 강력한 반발에 직면해 있으며, 많은 공격의 대부분은 갑작스러운 그의 탁월한 성공을 불쾌하게 여긴 백인 록 음악 비평가들에게서 나왔는데 마이클은 백인 록 음악 평론가들의 우상 모델에 적합하지 않았다. 기타연주와 문학적인 비평 대상이 될 수 있는 노래를 작곡하고 춤출 수 있는 백인 브루스 스프링스틴을 선호한다. 그러나 마이클은 흑인의 전통적인 문화를 대표한다. 이런 전통은 백인 록 음악 비평가들이 알 수 있을 리 없고 이미 세상을 뜬 구세대 사람들에게나 흥미를 불러 일으킨다.
― SPIN

그렇다면 그는 왜 이런 가십적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는가? 잭슨에 대한 루머의 확산은 1984년 시작된다. 잭슨이 1984년 펩시 광고를 찍는 도중 무대 사고로 화상을 입고[9] 화상 치료 센터에서 치료를 받을 무렵, 그는 산소로 가득 차 있는 챔버를 보게 된다. 잭슨과 동행한 의사는 아직은 이론적인 이야기지만 훗날 기술이 발전되어서 챔버 안에서 자면 노화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를 하게 된다. 그 말에 호기심을 가진 잭슨은 챔버 안에 들어가 보고 싶다고 요청했고 기념사진 한 장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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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소방에 누워있는 마이클 잭슨[10]
하지만 이 사진이 황색언론으로 유출되면서 마이클은 늙고 싶지 않아서 매일 산소방에서 잔다는 루머가 떠돌기 시작한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마이클이 죽은 사람의 시체를 샀다는[11] 근거없는 소문까지 돌게 된다. 심지어는 평소 동물에 관심이 많던 마이클이 애완동물로 키우기 위해 침팬지[12]를 구매한 것도 논란이 되고 말았다. 결국 1986년 마이클에게는 Wacko Jacko(와코 재코,괴짜 잭슨)라는 별명이 탄생했고, 이 시기 타블로이드지 '피플'은 팝계 간단퀴즈라며 '마이클 잭슨은 이상한 건가? 아닌 건가?'라는 특집기사를 보도하기도 했다. 어머니 캐서린 잭슨은 "내 아들 마이클 잭슨"을 집필했었는데 당시 아들 이름이 가십에만 올라와 있어 속상했다고 한다.

70년대 중반 잭슨 파이브 시절, 마이클이 성전환을 받고 결혼할 거라는 황당한 보도가 있고 나서 마이클의 소녀팬이 그 기사를 보고 마이클에게 울음을 터뜨렸다는 일화도 있었는데 Thriller 앨범의 대성공과 Victory Tour의 표 판매[13] 이후 타블로이드의 거짓 보도[14]가 심해지자 1984년 9월 공개적으로 마이클 잭슨 측은 루머에 반박 성명을 낸 적도 있었다. 항상 심했던 가십이 1986년을 기점으로 그 성격과 양상에서 강해졌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마이클 잭슨은 1982년 발매한 Thriller 이후 몇 년간 솔로 정규앨범의 발매는 물론 We Are the World 프로젝트 이외에는 별다른 음악 활동도 없었기에, 에픽 레코드는 물론 팬들도 잭슨의 새 앨범의 발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Thriller가 나온 지 약 5년만에 발매된 Bad는 마이클 잭슨과 퀸시 존스의 마지막 협업 작품이었으며 사회적 주제의 확장을 이루어냈다. 미디어 편향, 편집증, 인종적 측면, 로맨스, 자기 계발, 그리고 세계 평화가 이에 해당한다. 마이클 잭슨은 Thriller의 음악적, 상업적 성공을 바탕으로 하여 Bad 앨범의 목표 판매량을 1억 장으로 측정했고 We Are the World 프로젝트 이후 본격적인 앨범 제작을 시작하였다. 잭슨은 혁신적인 사운드를 찾고자 했으며, 새로운 음악 기술에 큰 관심을 보였다. 총 60곡의 노래를 썼고, 30곡을 녹음하여 그중 11곡을 앨범의 수록곡으로 정했다. " Man in the Mirror", "Just Good Friends"를 제외한 모든 곡은 잭슨이 작곡했다.

"역사상 가장 기대되는 앨범"으로 묘사된 Bad 빌보드 200에서 1위를 기록했으며, 빌보드 차트를 포함하여 25개 국가의 앨범차트에서 1위를 석권하며 새로운 신기록을 달성했다. 발매 첫 주에 미국에서 200만 장 이상이 팔렸고[15], 영국에서 처음 5일간 50만 장을 팔았다. 빌보드 200 1위를 6주간 유지했고, 총 38주간 빌보드 200 top 5를 유지하여 남성 솔로 아티스트 사상 최장기록을 세웠다. 총 9곡이 싱글컷 되었으며 그중 5개의 곡이 빌보드 hot 100 1위를 차지하며 가장 많은 1위 곡을 배출한 앨범이 되었다. 또한 총 6개의 곡이 빌보드 싱글차트 top 10을 기록하여 두 번째로 많은 곡을 top 10에 진입시킨 앨범이기도 하다. 첫 번째로 많은 top 10 진입 기록은 마이클 잭슨 자신이 스릴러 앨범으로 수립한 7곡 top 10 진입이다. 자신의 기록을 깬 것이다.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싱글 프로모션은 시다 가렛과의 듀엣 곡인 "I Just Can't Stop Loving You"가 빌보드 hot 100 1위를 기록하며 시작되었다. 이후 앨범의 타이틀 곡 "Bad"가 2주 동안 싱글차트의 정상에 올랐고, 유럽의 여러 국가의 차트 1위를 차지했다. 세 번째 싱글 " The Way You Make Me Feel" 또한 싱글차트 1위를 차지했고, " Man in the Mirror"도 평단의 찬사를 받으며 1위를 기록했다. 다섯 번째 싱글 "Dirty Diana"까지 1위를 석권하였으며, 이는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이기도 했다. 이후 "Another Part of Me"가 11위를 기록, 이 앨범의 하이라이트로 여겨지는 " Smooth Criminal"이 7위를 기록한다.

"Leave Me Alone"은 미국에서 발매되지 않았지만, 다른 5개국 싱글차트에서 top 10에 도달했고, 앨범의 마지막 싱글 " Liberian Girl"은 아일랜드에서 1위를 기록했으며, 다른 여러 나라에서 차트의 상위권에 머물렀다. 영국의 싱글차트에서 신기록을 세웠는데 7곡이 top 10을 기록한 것이다.

1991년까지 2,500만 장이 팔리며 Thriller의 뒤를 이어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이 팔린 앨범이었고, 1988년과 1989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었다. 그리고 현재까지 3,500만 장 이상이 팔려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 중 하나이다. 그러나 잭슨은 자신의 목표치인 1억 장의 판매량을 달성하지 못한 것에 대해 실망했다고 한다.

Bad는 많은 평론가, 매체로부터 우수한 평을 받았다. 뉴욕 타임스는 "잘 만들어진, 수수께끼 팝스타에 의한 매력적인 댄스 레코드"라고 평했고, All Music의 스티븐 토마스 얼와인은 잭슨이 확장된 범위의 음악을 하고 있으며 전작과 비슷한 방식으로 음반에 접근했다고 평했다. 또한 시대를 초월한 음악 중 하나로 묘사했다. 데이비드 베넘은 " 대중음악을 영원히 바꿔놓은 작품"이라는 찬사를 내렸다.

Bad는 잭슨이 발매한 앨범 중 가장 매끄러운 작품이며 새로운 사운드, 스토리, 공간으로 청취자를 안내한다. 전작의 기대에 힘입어 발매된 잭슨의 새로운 블록버스터 출시는 가장 폭발적인 상업적 성공을 가져왔다.

이는 가장 위험하고 실험적인 업적으로 칭송받는 부분 중 하나이다. Bad는 응집력 있는 앨범일 뿐만 아니라 잭슨의 가장 위대하고 실험적인 시도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앨범의 수록곡은 록 음악 사운드를 통해 그의 성숙함을 증명하고, 각 음악 사이에 통일성이 존재한다. 매혹적인 펑크(Funk)는 욕구를 상징하고, 무거운 기타와 드럼 소리는 세계에 대한 분노와 좌절을 표현한다. 음악의 확장된 범위는 후속작에서 더욱 거대해진다.

이 앨범은 대중음악의 사운드를 재정의한 것으로 유명하며 여러 음악 매체에서 선정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리스트에 포함된다. Bad는 Thriller보다 음악적으로 깊고 공격적인 형태를 하고 있다. 몇몇 평론가들은 Bad를 Thriller보다 높게 평가했고, 세월의 한계를 느끼지 못할 정도의 최신 사운드에 대한 찬사를 받았으며 이는 80년대 후반 등장한 대중문화의 위대한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빌보드 200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목록에서 138위를 기록했고, Popblerds 1980년대 가장 위대한 앨범 13위에 선정되었다. 또한 당신이 죽기 전에 들어야 할 앨범 1001가지에 포함되었고, VH1은 MTV 세대 가장 위대한 앨범 43위에 선정했으며, Slant 매거진 선정 1980년대 최고의 앨범 목록에서 48위를 차지했다. 롤링 스톤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에서 202위를 차지했고, NME 선정 가장 위대한 앨범에서 204위에 랭크되었다.

이때 그래미 어워드의 차별 논란이 불거졌는데, Bad가 올해의 앨범, Man in the Mirror는 올해의 레코드를 포함하여 6개 부문 후보에 지명되었음에도 상을 단 한 개도 수상하지 못하는 대이변이 발생한 것이다. 이때의 그래미 시청률은 1984년 잭슨이 Thriller로 시상식을 휩쓸었을 때 이후로, 두 번째로 높은 기록이었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언론과 음악계의 차별은 1990년대에 들어서며 더욱 강한 기류를 타기 시작한다.

한편, 마이클 잭슨은 드디어 월드 투어의 개막을 알리는데 이것이 잭슨의 첫 번째 월드 투어 " Bad World Tour"이다. 16개월간 진행된 이 투어는 총 15개국 44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으며 123번의 콘서트를 개최했다. 이는 1980년대 진행된 투어 중 두 번째로 높은 수익을 거두었으며 단독 아티스트로서는 최고기록이었다.

1987년 6월 29일, 잭슨의 매니저 프랭크 디리오가 그의 첫 번째 단독 월드 콘서트 투어를 시작하려는 계획을 발표했다. 펩시의 후원하에 일본에서 시작되었으며 600명이 넘는 기자, 카메라맨, 팬들은 잭슨의 일본 도착을 도쿄 나리타 국제공항에서 기다렸다. 잭슨의 투어 수행원 132명과 함께 22대의 트럭을 실어 나르는 전세 점보 제트기가 사용되었다. 무대 세트는 700개의 조명, 100개의 스피커, 40개의 레이저, 3개의 거울, 2개의 24x18피트 스크린을 사용했다. 공연자들은 70벌의 의상을 입었는데, 그 중 4벌은 광섬유 조명이 붙어 있었다. 일본에서의 첫 14일간의 관객수는 45만 명으로 최고기록을 갱신했다.

잭슨은 1988년 5월 23일 플라미니오 경기장에서 그의 유럽 투어를 시작했다. 경찰과 보안 요원들은 35,000명의 군중 속에 깔려 있는 수백 명의 팬들을 구조했다. 경찰은 6월 2일 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130명의 여성이 실신했다고 보고했다. 6월 17일 잭슨은 코믹 배우 찰리 채플린의 미망인 오오나 오닐을 만나기 위해 베베이로 여행을 떠났다. 잭슨은 "나는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었다"고 방문 후 말했다.

유럽에서 가장 성공적인 콘서트 중 하나는 1988년 영국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진행되었다. 이때 티켓 수요가 150만 회를 넘어섰는데, 이는 72,000명의 만석을 20번 채울 수 있는 규모였다. 결국 7번의 콘서트로 504,000명의 관객을 수용하였으며 이는 기네스 세계 기록에 등재되었다. 이후 관계자들로부터 특별상을 수상했다. 잭슨은 총 3번의 월드 투어를 진행했는데[16] 그중 15번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공연했으며 110만 장 이상의 티켓을 판매했다. 이는 그 어떤 아티스트보다도 압도적인 수치로 웸블리 스타디움 역사상 가장 많은 티켓을 판매한 아티스트이다. 이 기록은 현재까지 깨지지 않았다.

당시 유럽을 포함한 투어 일정에 포함된 여러 나라의 관객과 팬들은 단지 마이클 잭슨을 만난다는 사실에 흥분하였으며 수많은 인파와 기자, 파파라치들로 인해 마이클 잭슨은 정상적인 이동이 불가능했다. 9월 11일 리버풀에서 열린 마지막 유럽 콘서트는 아인트리 레이스 코스에서 열렸다. 약 1,550명의 팬들이 125,000명 이상의 관중들 사이에서 부상을 입었다고 보도되었다. 이는 역사상 가장 규모있는 콘서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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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AMA에서 마이클 잭슨의 모습
잭슨은 너무 독특해지려다 다소 기괴하게 됐지만 잭슨에 대한 기업들의 사랑은 계속된다. 잭슨은 늙지도 젊지도 흑인도 백인도 여자도 남자도 아니다. 잭슨은 완벽한 마케팅 로고가 되기 위해 완벽함을 추구한다.
― Los Angeles Times

당시 마이클 잭슨은 분명히 그 누구도 도달한 적 없는 위대한 업적을 세웠고, 가장 인기있는 음악가였음에도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루머로 인해 그 위대함을 인정받지 못했다. 1988년 LA 타임스는 괴짜 이미지가 잭슨의 재능을 가려버릴 위험에 처해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논란이 많았지만 인기도 많아 영국 갤럽에서 조사한 여론조사에서 영국 왕실을 제치고 영국 젊은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으로 뽑히기도 했다.

이 시기 잭슨은 괴짜라는 이미지를 가지기도 했고 극성 안티팬들도 꽤 있었지만, 그 어떤 음악가도 넘볼 수 없는 폭발적인 음악성과 대중성을 보유하고 있었다. 캐서린 잭슨은 당시의 마이클을 회고한 부분에서 그가 어느 마을을 갔다고 하면 그 마을 언론사는 하루 종일 잭슨을 취재하기 위해 극성이었다고 한다. 물론 일반인들도 그의 얼굴이라도 좀 보려고 엄청나게 몰렸다고 한다. 1980년대를 마무리 하며 1990년 마이클은 41%의 로열티를 받았는데 이는 당시 음악가들의 평균 로열티인 12%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수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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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H. W. 부시와 악수를 나누는 마이클 잭슨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마이클 잭슨을 백악관으로 초청하여 "세기의 아티스트 상"을 수여하였다. 마이클 잭슨은 음악인이 누릴 수 있는 온갖 영예란 영예는 다 누렸으며 세계 각국의 대통령들과 정상들은 마이클 잭슨과 만나길 바랐다. 그는 피부색을 초월한 최초의 슈퍼스타였기 때문이다.

Bad를 이름으로 한 모든 캠페인이 마무리 되고 마이클은 더이상 퀸시 존스와 함께 일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마이클이 퀸시와 더이상 일하기를 원하지 않은 이유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는 편견 때문이었는데, 앞에서 인용문으로 쓴 1987년 SPIN 매거진의 보도에는 사람들은 마이클이 몇 곡을 작곡했지만 뛰어난 작곡가는 아니라며 무시해 버리고 모든 성공을 퀸시의 공으로 돌려버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것을 의식해서 인지 Bad 앨범 작업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퀸시 존스의 사단인 A팀과는 작업하지 않고 자신의 B팀과 1985년 하반기에서 1986년까지 " Bad", " The Way You Make Me Feel", "Dirty Diana", " Smooth Criminal" 등을 독자적으로 만들었으며, 사운드에서도 퀸시와 의견 차이가 있었고 Larry Williams도 확실한 마찰이 있었다고 동의했으며 Michael Boddicker도 마이클 잭슨은 자신이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었다고 말했다.

퀸시는 한편 마이클을 힙합- 열풍에 맞춰 음악을 그렇게 움직이기 위해 힙합 그룹 Run-D.M.C.와 미팅을 열고 Bad 앨범에다 힙합 트랙 Crack Kills[17]를 넣으려고 했는데 모종의 이유로 결렬됐다. 퀸시는 2010년 가디언과 인터뷰하길 마이클은 퀸시는 사업을 몰라, 랩은 죽었어라고 말했다고, 또 Smooth Criminal 곡을 앨범에 포함시키길 퀸시가 싫어하여 불만을 가졌었다고 한다. 그러나 마이클이 퀸시를 싫어했던 건 아니다. 그는 많은 시상식들에서 퀸시에 대한 경의를 표했으며 퀸시의 딸과 화보 촬영도 했었다. 하지만 잭슨이 원했던 것은 완전한 제작의 자유 그리고 성공이 퀸시 한 사람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퀸시와 마이클의 결별에 대해 루머가 퍼졌는데, 마이클이 돈이 없으니 퀸시를 짜르자고 한 걸 우연히 퀸시가 듣고 불같이 화를 내며 마이클은 퀸시에게 다시 작업해달라고 용서를 빌었다는 스토리로 출처는 1990년 동아일보의 유명 팝 칼럼니스트가 쓴 이야기인데 당시까지만 해도 컴퓨터가 없어 팝 음악 정보는 오로지 잡지나 팝 칼럼니스트들에 의지해서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폐쇄적인 국내의 배경 때문인지 진실로 받아들여져 우리나라의 팝 역사에 대해 설명하는 책들에는 저 설명이 대부분 들어가 있다. 어느 해외 기사에서 나온 소스인 지 알아보기 위해 추적했지만 도저히 찾을 수 없었고 퀸시와 마이클의 결별을 설명하는 해외 매체 그 어디에도 저런 설명은 찾아볼 수 없다.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야 하는 대표적인 마이클의 루머이다.

5. 1989년~1993년: Danger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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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 Or White 뮤직 비디오에서의 마이클 잭슨의 모습
1991년 3월 소니 뮤직은 마이클 잭슨과 15년 동안 6개의 앨범을 발매하기로 하는 계약을 체결했고, 마이클 잭슨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로열티를 받았다. 예트니코프는 거래가 다소 무모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소니의 경영진인 Michael Schulhof는 긍정적인 계약이라고 생각했다.

잭슨은 일부 트랙에 다소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새로운 프로듀서인 테디가 몇 달 전에 팀에 합류하면서 앨범의 방향이 바뀌었기에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Bad 발매 이후 무려 4년이 지난 상태였고, 소니는 어떻게든 추수감사절 이전에 앨범 완성을 목표로 잭슨에게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앨범의 완성이 늦어진 것은 Bad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는 완벽주의자로 자신의 귀에 맞지 않으면 계속해서 다시 작업했다. 그의 목표는 남녀노소 피부색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걸작이었다. 즉, 자신이 완전히 만족하지 않으면 레코드 사에 앨범을 제출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Off the Wall Thriller 제작 시기에는 매우 빠르게 음반 작업이 진행되었지만, Bad 때부터 음악 제작에 대한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작업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던 것이었다. 톰 러소는 잭슨의 완벽주의를 경험하며 보컬도 매우 느리게 녹음하여 음반사를 좌절시켰지만 어쨌거나 완벽함이 아니면 아무것도 그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고, 웨이는 마이클은 준비가 될 때까지 보컬을 하지 않았다며 마이클의 편집증과 같은 모습에 동의했다.

9월, 잭슨은 가장 화려하고 거대한 뮤직 비디오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11분의 " Black or White" 뮤직 비디오는 400만 달러가 투자됐으며 다시 존 랜디스와 합작했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두 번째로 많은 제작비가 투자된 뮤직 비디오였다. 후술하겠지만, Black or White 뮤직 비디오는 전 세계 27개국에서 동시 방영됐는데 당시 시애틀 타임즈의 보도에 의하면 당시 약 5억 명 이상이 동시 시청한 것으로 집계됐고 후에 2015년에는 뮤직 비디오 역사상 가장 많은 TV 시청자 수를 기록한 것으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 등재됐다.

Bad의 성공 이후, 잭슨은 창의적인 작품에 대한 자신의 독립성을 원했고 퀸시 존스와의 작업을 그만두었다. 앨범의 초기 목표 발매일은 1989년 후반이었지만, 여러 차례 지연되었다. 60~70곡을 녹음했으며 그중 일부는 나중에 발표되었다. Dangerous는 뉴 잭 스윙, R&B, 팝, 록 음악 펑크(Funk) 클래식 등, 여러 장르를 포함하는 음반이다. 잭슨이 가장 존경하는 작곡가는 차이코프스키였고, 그의 음악처럼 자신의 음악도 영원히 연주되기를 원했다. 사회적 비판과 그에 따른 변화의 추구, 평화주의 및 여러 메시지를 가사에 실었다. 잭슨은 이 앨범에 큰 기대를 걸었고 많은 투자를 했다.
대중문화 속에 마이클 잭슨이 포함된 게 아니다. 마이클 잭슨이 대중문화다. 그는 모든 연령에 호소하며 한 시대의 아이콘이다. 잭슨 이전에, 그 누구도 흑백의 조화를 이루고 이렇게나 큰 성공을 거둔 적이 없었다.
The New York Times

1991년 11월 26일, Dangerous는 발매 직후 빌보드 200에서 1위를 기록했고 4주간 유지했으며, 영국을 포함한 다른 10개 국가의 앨범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 Dangerous의 발매 직후, 잭슨의 인기는 미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하나의 주식과도 같은 위치에 서 있었다. 약 1년간 이 앨범은 1,500만 장이 팔렸으며, 현재까지 3,200만 장 이상 팔려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 중 하나이다. 총 9곡을 싱글컷 했고, 그중 4곡은 빌보드 싱글차트 top 10에 진입했다. 이는 Off the Wall과 동일한 기록이다. 전작 Bad와 동률 기록으로, 영국 싱글차트의 top 10에 7곡이 진입하는 신기록을 세웠다.

앨범의 첫 번째 싱글인 " Black or White"는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으며 출시 직후 3주만에 빌보드 hot 100 1위에 올라 7주간 유지하였다. 1992년 가장 많이 팔린 싱글이었으며 20개 국가에서 1위를 기록했다. 뮤직 비디오는 2시간 동안 5억 명이 시청하여 기네스 세계 기록에 등재되었다. 두 번째 싱글 "Remember the Time"은 빌보드 싱글차트에서 3위를 기록했고 R&B 싱글차트에서는 1위를 차지했다. 평론가들에게 앨범의 가장 좋은 곡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흔히 Dangerous의 하이라이트로 여겨진다. 이후 "In the Closet"이 빌보드 싱글차트 6위, 마이클 조던의 등장으로 기대를 모았던 "Jam"이 26위, "Heal the World"는 27위, "Who Is It"은 14위, 마지막 "Will You Be There"가 7위를 차지하며 성공적인 싱글 프로모션을 마쳤다.

Dangerous는 잭슨에게 예술적인 변화로 여겨지고 있는데, 수록곡은 사회적으로 의식적인 소재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그의 전작들과 비교했을 때 그 범위를 확장시켰다. 또한 더욱 폭넓은 사운드와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일부 평론가들은 이 앨범을 마이클 잭슨의 예술적 정점으로 여기며 21세기에 재발매된다면 여전히 신선한 충격을 줄 것이라고 평한다.

Dangerous는 현대 대중음악의 수많은 아티스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쳐 평론가 및 음악 매체가 선정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중 하나로 간주된다. 위대한 클래식 앨범이자 뉴 잭 스윙 시대 최고의 음반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사회적 변화를 추구하는 잭슨의 의식이 반영되어 문화적,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그 중요성이 높이 평가된다. 일부 평론가는 현대 음악계는 확실히 마이클 잭슨의 Dangerous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평했다. 벤 보몬트 토마스는 "최고의 정서적 범위를 포함하는 프로덕션 설정은 새로운 뉴 잭 스윙의 단순한 댄스 동작과 화려함보다 더 돋보인다."라고 평가했고, 온라인 매체는 "마이클 잭슨의 90년대 위대한 걸작"으로 묘사했다.

학자 수잔 페스트는 잭슨의 Dangerous를 가장 성숙한 앨범으로 평가했으며 "이 앨범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방향으로 포스트 모더니즘의 분노, 사랑, 욕구, 배신과 저주, 그리고 인종에 대한 설득력있는 이야기를 제공한다."라고 말했다. Vice 매거진은 "내성적으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으로 묘사했다.

National Association of Recording Merchandisers 선정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리스트에서 115위를 차지했고, SPIN 매거진 선정 1985년~2014년 사이 300가지 베스트 앨범 목록에서 132위를 기록했다. 또한 빌보드 선정 가장 위대한 R&B/힙합 앨범에서 43위에 올랐다.

한편, 잭슨은 "Keep the Faith"를 녹음하던 중 처음 두 구절을 부른 후 녹음 부스에서 나와 사무실 구석에 서서 눈물을 흘리며 상심했다. 그의 목소리는 손상됐고 더이상 지나치게 높은 음을 낼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스튜디오 직원들은 모든 구성을 변경하여 낮은 음정으로 보컬을 부를 수 있게 했다. "Heal the World"는 1989년 가을에 떠오른 아이디어로 "Earth Song"의 창작 의도의 연장선상에 있었는데 잭슨은 지구 온난화 등에 크게 염려를 했으며 지구에 대한 세계인들의 의식을 바꾸고자 하는 곡들을 쓰려고 노력했다. 유명한 영장류 학자인 제인 구달 박사는 마이클이 특히, 침팬지[18]의 위험에 영감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지나치게 많이 팔린 음악을 듣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이 앨범은 훅 기법이 너무 이류적이고 그의 보컬 매너리즘은 종종 거슬리지만, Off the Wall 이후 가장 일관성 있는 앨범이고 Bad에서 한 단계 발전한 것이다. 테디 라일리는 혼자서 이렇게 불쾌하게 예측불허인 비트를 만들어 낸 적이 없고, 더군다나 그러한 비트를 능가할 가수는 배출한 적이 없다. 만약 10살짜리 아이가 원하는 만큼, 쉽게 다가오는 곡이 아니었다면 언제나처럼 그건 마이클이 리듬적인 순간을 타는 것이다. 지금 자신이 비틀즈보다 인기있다고 확신하는, 보이지 않는 남자의 연애사를 분석하는 것은 의미없는 일이지만 그는 자신의 커리어에서 가장 그럴듯한 섹스와 로맨스를 외치며 팔고 있다. "In the Closet"에서 그는 신비의 여인에게 그들의 욕정을 숨길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고 있다. 곧 그는 흥분하거나 예전 모습에 대한 간절한 향수를 재연한다. 그리고 그는 꽉 다문 입술 사이로 'Can't Let Her Get Away'라고 반복하여 내뱉는다.
로버트 크리스트가우

Dangerous는 다시 마이클 잭슨 붐을 일으켰고 잭슨은 이에 보답하기 위해 1992년부터 " Dangerous World Tour"를 진행한다. 1992년 2월 3일 뉴욕시 라디오 시티 뮤직 홀에서 월드 투어를 발표하기 위한 기자 회견이 열렸다. 200명이 참석한 이 행사는 잭슨의 스폰서 펩시가 기획했다. 잭슨은 또 한 번 투어를 하는 유일한 이유는 어린이들과 환경을 돕기 위해 새롭게 설립된 <Heal the World Foundation>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마이클 잭슨은 1993년 크리스마스까지 1억 달러 모금을 목표로 삼았다. 69번의 콘서트에서 4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였으며 잭슨의 첫 번째 아동성추행 사건과 진통제 중독으로 인해 투어를 중단하게 된다. Dangerous World Tour부터 잭슨은 이전에 서구 문화의 영향권에 포함되지 않았던 국가나 지역들도 투어에 포함시키는데, 앞서 기술한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 마이클 잭슨은 그들에게 있어 최초의 서방국가 연예인이었다. 그에 따른 충격과 인기는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투어는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들의 붕괴로 동유럽에서도 진행할 수 있었는데[19] 러시아 사람들은 "마이클 잭슨을 미국의 제왕으로 생각해 왔던 공산주의 국가 사람들은, 마이클이 러시아에서 공연을 한다는 것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말하기도 하였다.[20] 루마니아 부카레스트에서 진행된 공연은 미국의 케이블 채널인 HBO에서 구매하여 방영되었고 해당 중계는 무려 21.4%라는 시청률을 거두며 케이블 TV 역사상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부카레스트 공연은 2005년 DVD로 발매되었다. 루마니아 공연 당시 공연티켓 가격이 루마니아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 4분의 1에 달할 정도로 매우 비쌌으나 이마저도 금방 매진됐고 마이클 잭슨은 삼엄한 경호를 받으며 국빈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한 고아원에 들릴 때는 루마니아 대통령이 직접 나왔다고. 또, 총리와 여러 정치가들이 공연을 보러 왔으며 공연의 광란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실신되고 고막이 파열돼 수술받아야 할 사람이 넘칠 정도였다고 한다. 잭슨의 공연이 끝나고 얼마 안 있어 새 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 의외로 투표율이 저조한 이유 중 하나가 유권자들이 '잭슨 후유증'에 빠져서 그런 거라는 추측도 있었으니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마이클 잭슨이 얼마나 유명하고 인기가 많았는 지 알 수 있다. 이때 남미국가들을 투어에 추가시켰는데 멕시코의 아즈텍 스타디움에서 5일간 50만 명을 끌어모으는 위엄을 보여줬다.

1992년 6월 당시 세계 최대 운영기였던 러시아 안토노프 AN-124 화물기가 개막 유럽식 다리를 위해 로스앤젤레스에서 런던으로 설정된 장비와 무대를 운송하기 위해 예약되었다. 그러나 민간 항공기 인증과 관련된 문제로 인해 잭슨은 대신 페더럴 익스프레스의 보잉 747을 사용하게 되었다. 도착 즉시, 그 장비는 65대의 화물차로 유럽을 가로질러 운반되었다. 화물은 조명 1,000개, 전기 케이블 10마일, 비디오 화면 9개, 스피커 168개를 포함하고 있었다. 약 2톤의 의류가 운반되었다. 이 의상은 마이클 부시와 안젤레노스 데니스 톰킨스에 의해 디자인되었는데, 그는 잭슨과 함께 그가 원하는 것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고, "그의 아이디어를 살리는 것"을 목표로 했다고 한다. 두 벌의 의상은 높이가 9피트, 너비가 7피트, 무게가 각각 40파운드였고, 전산화레이저가 제어하는 광섬유등이 달려 있었다. 한 재킷에는 36개의 스트로보 조명을 켜기 위해 3,000볼트를 발생시키는 배터리 벨트가 장착되어 있었다. 다른 하나는 폭발적인 효과를 감추기 위해 플랩을 숨겼다. 유럽에서 온 천 야드의 천 야드의 천 야드의 옷감은 18캐럿 금을 포함한 잭슨을 위한 검은색과 금색 옷을 포함하여 의상을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의상에만 200만 달러가 들었다. 이 투어는 57,000명의 평균 관객을 동원하여 역사상 세 번째로 많은 평균 관객을 동원한 투어[21]이고 이는 솔로 아티스트로서는 최고기록이며 90년대 가장 많은 평균 관객을 동원한 투어이다.

1992년에는 <Heal the World Foundation>이라는 자선단체를 설립해 46톤의 물자를 사라예보에 공수하고 약물 및 알코올 남용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헝가리 아이의 간 이식 비용을 전액 지불하기도 했으며 수백만 달러를 세계의 불우한 아동에게 지급했다. 사실 잭슨은 재단 설립 이전부터 수천만 달러에 달하는 금액을 기부해오고 있었다. We Are the World, Man in the Mirror, Heal the World 등은 음악을 통해 그의 의식을 전달한 것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월드 투어의 수익을 수많은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Dangerous World Tour는 애초에 1억 달러 모금을 위해 시작된 투어였으며 모든 수익은 재단에 기증했다. 이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또 다시 조지 H. W. 부시 대통령에게 "Point of Right"라는 상을 받는다. 부시 대통령은 마이클을 흑인의 본보기라며 치켜세웠다.

1993년 1월 16일에는 빌 클린턴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클린턴갈라쇼의 메인 게스트로 나와 Gone Too Soon과 Heal the World를 공연했다.[22]
슈퍼볼 하프타임 쇼에서의 마이클 잭슨
1993년 1월 30일에는 미국 미식축구의 결승전 슈퍼볼 하프타임 쇼에 나와 대중음악사의 기념비적인 공연을 선보였는데, 전년도 하프타임에 비해 시청률이 8.6% 상승했다. 잭슨이 나온 이후에는 많은 가수들이 홍보를 위해 슈퍼볼 하프타임 쇼에 나오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이후에는 오프라 윈프리 텔레비전에서 1시간 이상 인터뷰를 했다.[23] 9천만 명의 이상의 미국인들이 시청하며 시청률은 47.9%로 미국 TV 역사상 가장 시청률이 높은 프로그램 9위 (현재까지도)라는 기록을 세운다. 이후 마이클은 그래미 어워드에서 살아있는 전설 상을 받으며 커리어의 최절정을 이루었고, 음악 활동 외에 자신을 모델로 하는 초콜릿 바를 만들어서 수억 원을 버는 등 앞으로도 걱정이 없을 듯싶은 탄탄대로를 걷는 듯하였다.

1991년 Dangerous를 발매하고 1차 투어를 끝낸 1993년 초반에 마이클 잭슨은 단순히 슈퍼스타가 아닌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는 기업같은 존재였다.[24]

그는 그 누구보다도 독보적인 절정의 커리어를 이룬 상태였다. 마이클 잭슨은 신격화 된 연예인이었고, 미국 대통령들은 마이클 잭슨과 함께 사진을 찍기 위해 백악관으로 초청하기 까지 했으며, 로스앤젤레스 시장 톰 브레들리는 "마이클 잭슨의 날"을 선포했다. 마이클 잭슨의 신화는 절대 무너질 것 같지 않았다.

6. 1993년~1994년: 1차 아동 성추행 혐의와 첫 번째 결혼

약간은 묘하지만, 근면하고 도덕적인 그는 1980년대 가장 완벽한 ' 미국적' 성공사례를 창조했다.
로큰롤 스토리의 저자 폴 두 노이어

성추행 혐의 이전 마이클 잭슨의 이미지는 어떠했는가? 비록 Wacko Jacko 논란으로 독특하다는 시선을 받았지만 천재들이란 원래 좀 유별나고, 연예인의 가십은 하루이틀 일이 아니며, 잭슨이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기에 큰 문젯거리로 여겨지지 않았다. 즉, 마이클 잭슨의 음악 활동에 루머는 큰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래미 시상식 6개월 이후, 13세 소년 성추행 혐의로 민사소송과 동시에 형사 수사를 받게 되면서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며 마이클 잭슨을 상표로 한 모든 물건들은 백화점에서 파기되는 등 막대한 재정적 손실과 함께 커리어에도 지대한 부정적 영향을 얻게 됐다.

이 사건을 설명하기 전에 기본적인 가족들에 대한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 에반 챈들러는 Beverly Hills에서 치과 진료를 하는 의사로 준 챈들러와 사이에서 1980년 다재다능하며 사람을 재밌게 해주는 능력을 가진 조단 챈들러를 낳았는데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고 1985년 이혼했다. 챈들러 가족의 친구는 준이 에반을 떠난 이유중 하나는 에반의 성격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2005년 준 챈들러는 법정에서 에반은 각본쓰기에만 열중하며 가족들을 잘 돌보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에반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사례가 있다. 준과 재혼한 남자인 데이브 슈워츠는 1993년 마이클 사건이 터진 후 에반과 관계가 악화되고 있었는데 챈들러가 화가 나 데이브를 폭행했다는 것이다. 더 자세하게 "데이브는 화가 나 이건 어차피 모두 갈취를 위한 것이 아니냐고 에반에게 말했고, 그 순간 에반은 일어나 데이브에게 걸어 가 그를 때리기 시작했다."라고, 이것은 에반의 친척 레이 챈들러도 확인해준 것으로 실제 에반이 데이브에게 폭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Geraldine Hughes는 7~8월 사이 에반이 데이브를 몇 차례 폭행했었다고 주장했다. 데이브 슈워츠는 에반과의 전화를 비밀리에 녹음 했었는 데 훗날 에반의 다음 아내인 모나크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그녀가 칸 영화제에 갈 것인데 빌어먹을 그것은 망할 섹스 파티라며 그녀의 불륜을 의심했다. 그러면서 모나크를 죽일 지도 모른다, 이것이 내가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말을 끝맺었다.

1992년 5월 마이클은 로스엔젤레스에서 운전 중 차 고장이 났고 근처 카센터 직원에게 발견됐다. 그 카센터 사장은 데이브 슈워츠였으며 의붓 아들인 조단이 마이클의 열렬한 광팬임을 알고 있었다.(조단은 펩시 화상 사고로 고생하는 마이클이 있는 병원으로 쾌유의 편지를 보냈고 마이클은 감사 답장을 보냈었다. 또 마이클과의 광고에 출연할 어린이들을 뽑는 오디션에 조단도 참여했지만 뽑히지 않았다.) 당시 준과 사이가 좋지 않아 조단을 이용하면 관계를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조단과 통화해주는 대가로 마이클에게 무료로 차를 빌려주겠다고 제시했고 마이클은 승락했으며 조단과 그의 가족 전체가 마이클과 친구 관계를 가지게 된다. 그 이후 마이클과 챈들러 가족은 라스베가스 여행,월드 뮤직 어워드를 위한 모나코 여행,디즈니 랜드에도 가며,파리 여행까지 많은 것을 같이 하게 됐다.
마치 그녀가 잭슨에게 그녀의 아들을 억지로 떠안기는 것 같았다,내 생각에 마이클은 자기가 그 아이에게 뭔가 빚을 졌다고 생각한 것 같다. 거기서 전부 시작되었다.
카센터 직원 그린

1993년 2월 조단과 준 그리고 조단의 여동생 릴리 챈들러가 마이클 잭슨의 저택 네버랜드를 처음 방문했으며 3월에도 재방문 했다. 6월에는 여러 차례에 걸쳐 조단이 마이클 잭슨의 침실에서 잠을 자도 되냐고 준에게 물었으나 준은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조단은 자기 방으로 돌아오기 전인 새벽 2시까지 마이클의 방에서 놀았다

5월 20일에는 조단의 친아버지 에반 챈들러가 마이클 잭슨과 처음으로 만났는 데 에반은 조단과 마이클 간의 관계를 5월 12일 모나코 여행부터 질투하기 시작했었다. 마이클과 조단이 친밀한 관계로 친아버지인 자신이 소외당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러면서도 마이클과 아들의 관계를 주위 사람들에게 자랑하며 슈퍼스타와의 관계를 과시하며 에반의 집에 마이클이 방문했을 때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길 권장했었다. 마이클은 센추리 시티 콘도에 에반을 초대했고 에반 또한 마이클과 사이가 가까워 진다. 5월 25일 경 '내셔널 인콰이어러'라는 미국 타블로이드 잡지에는 챈들러 가족의 내용을 담은 마이클 잭슨의 비밀 가족이라는 특종이 보도됐는데 이 내용은 챈들러 가의 가장 가까운 친구의 여동생이 돈을 받고 판 내용이였다고 한다. 현충일 주말인 5월 28~30일에 마이클은 에반 챈들러의 집에서 그의 모든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는 데 에반은 이때 마이클이 조단을 성추행했다는 의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의심을 가진 이유는 마이클과 조단이 침대 위에 있는 걸 봤을 때마다 옷을 입었지만 30세가 넘는 성인 남성이 13세 소년과 같이 있고 앞에서 말한 친아버지로서의 질투가 겹쳐졌기 때문인 데, 익명의 출처에 의하면 마이클과 조단은 에반이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하루 종일 자신들의 작은 세계에서 놀았다고 묘사한다. 조단은 마이클 특유의 복장을 코스프레 하기도 했다고, 그러나 에반은 스스로도 마이클이 성희롱하는 장면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6월 9일 에반은 조단이 동성애자라서 마이클과 그렇게 가깝게 지낸 것이냐는 의문을 품으며 조단에게 직접적으로 스타 사이의 관계가 성적인 것인지를 물었다. 그러나 조단은 그것은 역겨운 짓이라며 그렇지 않다고 반발했다. 아무튼 에반과 마이클의 관계는 유지됐으며 펩시 화상 사고로 후유증을 앓고 있던 마이클은 그 통증이 재발해 고생하자 에반은 그가 아는 마취과 의사 Mark Torbiner를 데려와 마이클에게 통증을 완화할 약을 투여하고 마이클의 상태는 다소 헤롱해졌는 데 이것을 기회 삼아 에반은 마이클에게 Sexual에 대해 질문했는 데 마이클은 에반이 자신을 의심하자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일부 연구자들은 그 상태에서 에반이 마이클의 하반신 피부 상태를 엿본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한다. 이 이야기를 뒤에서 나올 생식기 일치 문제와 연결지어 생각해 보자.) 어쨌건 에반은 마이클이 자녀들과 같이 있을 수 있게 냅뒀다. 에반은 어느 날 마이클과 조단을 3번 비밀리에 확인했는 데 세 번째 봤을 때 둘은 다 옷을 입고 있었지만 마이클이 팔로 조단을 감싸고 한 손은 옷 위의 허벅지에서 가만히 얹어져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레이 챈들러는 이것이 의심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됐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기간 에반은 변덕스러워지기 시작했고 데이브와 준의 사이도 소원하게 만드는 협박을 하곤 했다. 그래서 데이브는 자연스레 에반과의 전화통화를 녹음했던 것이고 한 전화에서 에반은 데이브에게 "난 마이클과 좋은 이야기를 나눴고 난 그를 좋아했고 존중했다. 그가 나에게 전화하지 않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마이클은 에반에게 전화하는 것을 멈췄고 에반과 관계를 유지하기를 더이상 원하지 않아 에반은 화가 났다.) 저번에 방에서 마이클에게 이 관계에서 내가 원하는 것(앞에서도 말했지만, 에반은 각본쓰기를 좋아했는 데 그는 영화 산업에 관심이 많았다. 에반은 마이클과 소니의 거래에서 파트너가 돼 자신의 영화 프로젝트에 필요한 230억원의 돈을 자금으로 대주기를 요청했다. 1993년 8월 28일자 LA Times에서도 영화 산업에 있는 몇몇은 그 아이의 아버지가 마이클과 230억원짜리 영화제작과 자금조달 거래를 추구했다고 증언했었다.)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해줬었다." 데이브는 도대체 마이클의 무엇이 에반을 화나게 했냐고 묻자 에반은 "마이클은 내 가족을 깨뜨렸다. 내 아이는 이 남자의 힘과 돈에 유혹당했다"며 주장했다. 그리고 다 준비됐어, 내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이미 있다, 그들에게 돈을 줬고 계획대로 다 가고 있다. 내가 전화를 하기만 하면 이 사람 (에반의 변호사 베리 로스만)은 그의 시야에 있는 모든 것을 더럽히고 비열하고 잔혹하게 망가뜨릴 것이다. 그리고 난 그에게 모든 지휘권을 주었다, 그리고 내 계획대로만 된다면 난 정말 크게 이길 것이다. 내가 질 리가 없어, 그러도록 확실히 확인하고 내가 원하는 건 다 가질 것이고 그들은 영원히 파괴될 것이다. 준은 아이의 양육권을 잃을 것이고 마이클의 커리어는 끝날 것이다. 데이브는 그것이 아이를 도와주는 일이냐고 물었다. 에반은 이렇게 답변했다. 그런 건 상관 없어, 이건 우리 모두를 넘어섰다. 시야에 있는 모두를 파괴할 것이고 내가 원하는 걸 갖지 못한다면 학살밖에 없다.

베리 로스만은 누구인가? 에반은 로스만을 설명할 때 이렇게 말했었다. 내가 찾은 변호사, 난 정말 제일 비열한 놈을 찾았다, 그가 하고 싶어하는 것은 그가 할 수 있는 만큼 빠르게 이 모든 걸 대중에게 퍼뜨리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굴욕감을 주는 것이다. 그는 위험하고 똑똑하고 유명해지고 싶어한다. 로스만은 Century City에서 일반법을 전공했고 한 동안 리틀 리처드,롤링 스톤즈,더 후,오지 오스본 등을 위한 음악 협상을 하기도 했다. 그의 전 직원은 로스만을 "끔찍한 성질을 가진 악마"라고 묘사했는 데 에반과 로스만이 오피스에서 나눈 대화를 다이어리에 적어뒀던 로스만의 동료는 로스만이 "이 모든 것을 꾸며냈어,틀림없이, 마이클 잭슨을 향해 혐의를 씌운 것은 그의 성격에 딱 들어맞는다."라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로스만은 수년 간 너무나도 많은 적을 만들었는 데 수사관 Ed Marcus는 로스만을 향한 소송을 검토하고 그는 사람들의 돈을 떼먹는 것으로 평판이 나 있다며, 전문적으로 돈을 떼 먹는 사람같이 보인다고 증언했다. 덕분에 캘리포니아 변호사 협회로부터 3개의 사건에 관여해 징계 처분이 내려졌고 1992년에는 변호사 라이센스가 일 년 동안 유예되고 보호 관찰을 받았었고 몇 명의 채권자들로부터 빚을 갚으라는 독촉을 받았으며 11월에는 파산 신청을 한 전적이 있다.

이제 에반은 자신의 계획대로 가야 했다. 1993년 7월 7일 양육권을 얻기 위한 서류를 제출했다. 그 다음 따라올 모든 것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준에게 있는 양육권부터 에반이 가져가야 한다. 그리고 마이클의 성추행 혐의를 공식화 하여 그에게 돈을 받아내거나 민사소송을 시작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무조건 당사자인 조단에게 진술을 받아내야 한다. 에반은 7월 11일부터 자신의 집에 머물던 조단을 준에게 되돌려 보내길 거부하며 조단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7월 16일 에반은 조단에게 먼저 "너가 내게 거짓말을 하면 마이클을 무너뜨리겠다고 한 말 기억하지?" 조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제 당신에게 질문할 것이니 잘 명심해, 마이클을 걱정하니?" 조단은 네라고 말했다. "너는 마이클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니?" 네, "그리고 그 사람을 다치게 하고 싶니?" 조단은 No라고 말했다. 그리고 "좋아, 내가 너의 침실을 도청했다고 한 말 기억나?, 네가 한 모든 것을 알고 있어 너도 인정할 거야" 그러나 조단은 침묵적인 인상을 유지했고 여전히 마이클에게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에반의 위협은 보다 직접적이고 공격적으로 됐다."나는 마이클을 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줄 거야, 네가 거짓말을 하면 세상 앞에 마이클을 데리고 가겠어, 그리고 마이클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너이기 때문에 너 잘못인 거야" 그러면서 "나는 키스와 자위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네가 모르는 것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이건 명백하게 에반의 거짓말이다. 도청도 거짓이며 에반은 마이클과 조단의 성적 관계를 입증할 증거는 하나도 없었고 스스로도 목격한 적이 없다고 앞에 썼다. 에반은 덧붙이며 "거짓말 하면 어떻게 될 것인지 알 거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위해 쉬운 질문을 할 것입니다. 나는 너에게 하나의 질문을 할 거야, 예 또는 아니오라고 말하면 돼 그게 전부야. 거짓말 하면 마이클은 무너져, 진실을 말해 줘 마이클을 구해줘"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렇게 물었다. "마이클이 당신의 성기를 만졌습니까?" 조단은 주저하면 거의 속삭이는 듯한 말로 "예"라고 했다. 에반은 이제 듣고 싶은 것을 들었다 더이상 물을 필요는 없으며 팔을 뻗어 에반을 꽉 껴안아 줬다. 그리고 에반은 조단과 다시 한번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고 마이클의 형사 수사 당시 LA 지방검사에게 말했다. 에반에게 세부 사항은 어차피 중요하지 않았다. 레이 챈들러는 "이미 에반의 마음에서 에반은 진실을 확정했다. 그는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조단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이클에게 민사소송을 걸기 위해서는 조단의 진술이 필요했다.[25]

여기까지 읽었다면 일부는 왜 이렇게 이야기가 디테일하며 심지어 감정까지 자세하게 묘사된 지에 대해서 궁금증을 가질 것이다. 이 중 일부는 고소인 측인 에반 챈들러의 소스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건 재판에 가지 않았다. 교차검증도 거치지 않았다. 남아있는 자료는 오로지 주위 증언들 뿐으로 이 사건을 파악하기 위한 타임라인을 쓴다면 원인이 필요하고 즉, 고소인들의 소스가 믿을 수 있는 지를 떠나 이야기를 구성하는 소스라는 것이다. 그런데, 뒤에서도 이야기 하겠지만 챈들러와 마이클 측은 합의를 할 때 이 사건에 대해 외부에 언급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근데 이렇게 자세한 고소인의 내용이 나올 수 있었을까? 앞에서 계속 언급된 레이 챈들러를 주목하자. 책 출판사 일을 했던 Judith Regan은 SiriusXM 라디오에 나와 레이 챈들러가 합의 직후 출판 계약을 위해 움직였다는 사실을 공개했었다. 레이 챈들러는 에반의 전화를 받았는 데 에반은 마이클의 성추행 혐의를 자세히 설명할 책을 원했었다. 언제부터? 1993년 8월 말부터 즉, 조단의 진술이 당국에 보고되고 얼마 안 간 때부터 에반은 레이에게 자신의 정보를 전달했다. 캘리포니아의 Shield Law에 의하면 언론인들은 익명의 정보원을 통해 취득한 정보의 기밀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법적 보호를 제공하였고 즉, 마이클 측과의 합의를 회피할 수 있던 것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뒤에서도 언급하겠지만 합의 이후 조단이 증언을 안 한 이유로 에반은 조단이 삶의 터전으로 나가야 한다며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 안 됐으며 마이클 잭슨의 팬들로부터 몇 차례 죽음의 위협을 받았다는 것이다. 근데 왜 에반은 이것을 으로 만들기를 곧바로 원했었고 레이를 이용하려 했을까? 더이상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싫으며 자신의 아들이 정상적인 삶의 터전으로 나가고 마이클 잭슨의 팬들에게 죽음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말이다. 이 책은 최종적으로 마이클이 2005년 아동 성추행 혐의 재판을 앞 둔 2004년 9월 발간됐으며 레이는 자신의 생각을 내세우는 웹사이트도 만들었었다. 그런데 그 웹사이트에 올라온 에반 측의 문서 자료들은 배리 로스만의 법률 비서였던 Geraldine Hughes에 의하면 서명이 틀리는 등 위조품으로 보인다고 추측했었다. 그리고 2005년 마이클의 재판 당시 검찰 측에서는 레이가 증언해주기를 바랐으나 거절했고 심지어 마이클의 변호인도 레이를 증인으로 소환해 달라고 법원에 요청했으나 레이는 변호사를 고용하여 Shield Law에 의하여 소환을 막았다.(레이가 기자인 지는 논란이 있다.) 왜 그는 조카의 성추행을 법원에 증언하길 거부했을까? 결국 2005년 재판에서 유일하게 소환돼 증언한 사람은 뒤에서도 말하겠지만 '준 챈들러' 뿐이었다.

한편 마이클의 사설 탐정이었던 Anthony Pellicano는 7월 16일 이전인 7월 9일 데이브와 에반의 비밀 전화녹음을 듣고 이것은 갈취 사건이라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며 독자적으로 조단을 찾아가 마이클에게 부적절한 행동을 당했느냐고 몇 번을 물었었다. 그러나 조단은 그런 적이 없으며 우리 아버지는 돈을 원해요라고 말했었다고 한다.

7월 27일자 로스만은 에반에게 부모에게 법적 책임이 없도록 아동학대를 고발하는 법을 조언하는 편지를 썼다고 한다.

8월 4일에는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에반 그리고 조단은 Westwood Marquis Hotel의 스위트룸에서 마이클과 Pellicano를 만났다. 마이클을 만나자 마자 에반은 마이클에게 가 그를 다정한 것처럼 마치 오랜 친구처럼 그를 껴안았으며 이때 에반은 7월 14일경 로스만과 함께 만난 정신과 박사 애브람스에게 이것저것 이야기를 했고 (물론 조단과 마이클은 이 자리에 없었다.) 애브람스는 '성적 학대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합리적인 의심'이라는 문구가 포함된 2통의 편지를 보냈는 데 에반이 그 편지의 내용을 그 자리에서 읽은 것인데 아동 성추행 부분에 다다르자, 조단은 '마치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는 듯' 깜짝 놀란 표정으로 마이클을 쳐다 보았다고 한다. (마치~부분은 Pellicano가 바라본 시점에서 조단의 표정을 해석한 것이다.) 만남이 끝난 후 에반은 마이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널 망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이 장면을 목격한 Pellicano는 6개월 후 Vanity Fair에서 인터뷰에서 나같으면 자신의 아들을 성추행 한 인간은 패죽였을 것인데 에반이 마이클을 죽이지 않았고 또 저런 식으로 대했기에 실제 성추행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굳혔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소송을 하지 않는 대가로 마이클에게 2000만 달러를 합의금으로 요구했다. 2000만 달러가 어디서 왔는 지 알 수 있다. 앞에 230억을 생각해 보라. 하지만 마이클은 그 후에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며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말했다고 Pellicano는 처음에 100만 달러를 제안했는 데 에반은 당연히 거절했다. 그 뒤 Pellicano는 35만 달러를 제시했는 데 로스만과 에반은 충격을 먹었다. 협상의 법칙에서 2천만 달러와 백만 달러에서 시작되면 다음은 그 중간 지점에서 이뤄져야 하는 데 팍 낮춘 것이다. 결국 당연히 합의는 없었다. 레이 챈들러도 말하길 사건이 공개되기 전 마이클은 에반에게 돈을 지불할 기회가 있었는데 하지 않았고 이는 에반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레이 챈들러는 이렇게 말했다. 마이클이 1994년 1월이 아닌 1993년 8월에 에반에게 2천만 달러를 지불했다면 다음 10년을 세계에서 가장 악명높은 아동 성추행범이 아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연예인으로 보냈을 것이다. 또한 법원은 에반이 조단을 준에게 돌려보내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제 에반에게 남은 선택지는 한 가지였다.

8월 17일 이것은 법원이 조단을 반환해야 한다고 한 설정 기한이다. 합의는 없었기에 에반은 조단을 애브람스 정신과 박사에게 데려갔다. 조단은 처음으로 마이클과 있던 관계에 대한 자세한 보고를 한다. 미국 법에 의하면 아동의 성적 문제에 관해서는 곧바로 당국에게 보고해야 하기에 형사 수사를 촉발시키게 됐다. 또 이 주장의 결과로 에반은 법원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조단을 전처에게 보낼 필요가 없어졌다. 2003년 12월 12일 애브람스 박사는 CBS와의 인터뷰에서 조단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 지 알아보기 위해 판단해야 하기 위해서는 같이 충분한 시간을 지내봐야 하는 데 그렇지 못했다고 말했다.

마이클은 당시 Dangerous 투어 때문에 해외에 있었으며 미국 경찰은 수색영장을 얻고 마이클 잭슨의 저택인 네버랜드와 마이클이 썼던 여러 거주지들을 대대적으로 수색했으나 성추행을 입증할 의학적 증거도 녹화된 증거도 범죄 혐의를 입증할 그 어떤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8월 27일 LA타임즈는 보도했다. 또 경찰은 거주지 급습 도중 전화번호부를 압수하여 30명에 가까운 아이들과 가족들을 심문하였으나 마이클에게 성학대를 당했다는 아이들은 없었다. 근데 이때 경찰들의 수사 방법은 문제가 있었다. 버트 필즈에게 항의했던 부모들의 말을 들어보면 아이들이 부모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을 해도 경찰관들은 오히려 부모에게 아이들이 성추행을 당했다는 명백한 말을 했다는 거짓 심문을 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경찰은 어린 아이들에게 "너의 알몸 사진을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 겁먹게 했다. 또 한 경찰관인 페데리코 시카드는 자신 또한 어린 시절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다는 거짓말을 하며 아이들을 심문했었다.

1993년 타임즈는 이렇게 보도했다. "LA경찰은 거주지를 급습하여 마이클이 찍은 아이들의 비디오와 사진들을 몰수하였다. LA경찰은 그것들이 전부 무고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보고한다. 스타인 맥컬리 컬킨을 포함하여 잭슨이랑 친한 아이들은 경찰들에게 심문 대상이었고 그들은 관계는 완벽히 순수하다고 증언하였다. 수백, 어쩌면 수천명의 아이들은 그의 집을 방문하였다. 이 혐의들은 딱 한 명의 남자아이의 증언에 초점을 맞춘다."

준 챈들러는 마이클을 향한 고발에 대해 갈등을 빚다 8월말 방금 말한 시카드와 로시벨 페루피노를 만났는데 그 경찰들은 오직 피해자라 주장하는 어린이가 조단 밖에 없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러나 그들은 마이클이 전형적인 소아성애자의 윤곽에 해당하기에 그가 추행했다고 믿는다고 말했고 준도 에반과 연합하게 된다. 소아성애자들과 근친상간의 피해자들을 치료해온 미네아폴리스 정신과의사 랄프 언더웨이저는 전형적인 윤곽같은 건 없다,그들은 터무니 없는 실수를 했다고 지적했다, 한편 다른 출처에서는 준이 아이를 마이클과 같이 있게 했다는 점에 아동 방치로 고발당할 까 걱정한 것도 에반과 연합한 원인 중 하나였다고 한다. 준의 변호사 마이클 프리먼은 이 모든 것에 지쳐 사직하며 "이 모든 건 엉망진창으로 난 에반이 불편했다. 난 그는 진실된 사람이 아니고 공정하지 않았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8월말 마이클 측에서도 갈취로 에반과 로스만을 고소하면서 로스만은 변호사에 사임하고 9월 레리 팰드먼이라는 변호사가 새로 고용된다. 그리고 펠드만은 9월 14일경 마이클에게 3천만 달러의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한편, 그 이전에 데이브와 에반의 녹취록이 언론에게 유출돼 에반이 갈취범이라는 여론이 형성됐었는 데 덕분에 에반과 데이브는 서로를 이 유출 문제로 고소했었다.

마이클은 11월 11일 건강 문제로 Dangerous 투어를 중단하며 11월 16일 에반의 변호사 래리 펠드만은 120일 내에 민사 재판이 시작될 수 있도록 움직임을 부여하는 파일을 제기한다. 대개 이 요청은 14세 미만의 아동들에게 주어지는 데 즉, 에반 측은 형사 수사에 앞서 먼저 민사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고소인들에게 법을 유리하게 적용하고 13세 미만의 아동에게는 기억력 문제로 이러한 것을 허용해준다. 11월 23일 마이클 측 변호사는 형사 수사에 앞서 민사 소송이 개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민사 소송을 연기 해달라는 요청을 했으나 판사는 기각했으며 민사 재판이 시작되는 날은 1994년 3월 21일이었다.

12월 10일 마이클은 미국으로 귀국했으며 20일 스트립 검색을 받는다. 이것은 조단의 마이클 잭슨의 생식기에 대한 설명이 일치하는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한 것으로 수사 기관에서 사진 촬영했으며 비디오 테이프를 녹화했다. 그래서 일치했는가? 1994년 1월 공신력 있는 로이터 통신과 USA투데이는 당시 관계자의 말이라며 익명을 통해 일치하지 않았다고 보도했었다. 후에 톰 스네던 지방검사는 2005년 재판에서 마이클의 생식기 사진을 언급하며 조단 챈들러가 설명한 것이 일치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시 톰 스네던 지방검사는 기소 과정에서 드러났던 문제가 있듯 마이클에게 편견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 말을 곧이 곧대로 수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정황을 보여줄 것들을 더 자세히 검토해 보자. 에반의 변호사 래리 펠드만은 민사 법원에 사진이 증거로 채택될 수 없도록 요청했었다고 1994년 1월 5일 LA타임즈가 보도했다. 생각해 보자, 생식기 사진이 조단의 진술과 일치한다면 변호사는 당연히 사진을 증거로 채택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래리 펠드만은 검찰이 자신에게 사진을 주지 않았다는 이유를 댔었다. 하지만 고소인의 주장에 확신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불일치라는 또 다른 징후는 1994년 마이클 잭슨의 어머니 캐서린 잭슨이 로스 엔젤레스 대배심원 앞에서 증언을 하기 위해 출석했는 데 수사관들은 그녀의 아들이 생식기의 모습을 바꿨는 지를 물었다. 1994년 3월 16일 LA타임즈는 13살의 소년이 말한 설명이 생식기와 일치하지 않도록 마이클이 자신의 신체 외모를 변경하는 짓을 했냐고 물은 것이다. 일치했다면 이런 물음 조차 필요없을 것이다. 또한 일반 사람들도 가장 확실히 알 수 있는 부분은 마이클은 사망을 해서 부검을 했는 데 당시 그는 할례 즉, 포경수술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조단은 마이클이 포경을 했다고 한 것이다. 이게 단순히 포경과 비포경의 차이를 몰라서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면 조단은 진술에서 마이클과 벌거벗은 몸으로 있었고 다양한 각도에서 마이클의 성기를 정확하게 봤으며 또한 발기한 것을 봤기 때문이라고 했으니까, 또한 만 13세면 한국으로 생각하면 중학교 1~2학년으로 성에 관심이 많을 시기로 굳이 포경수술을 받았다고 말한 것은 그에 대한 지식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해 보인다. 왜 그는 포경수술을 추론했을까? 마이클은 1958년에 태어났고 이 시대에는 많은 미국인 남성들이 종교에 상황없이 포경수술을 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조단의 아버지 에반이 유태인이기에 에반은 포경을 했을 확률이 매우 높은데 조단의 저 진술이 에반의 통제 하에 있던 시기라는 것을 염두에 두자.

1993년 12월 22일 마이클은 네버랜드에서 공개적인 성명을 발표하는 데 무죄추정의 원칙과 결백을 그리고 생식기 일치를 위한 검사를 매우 굴욕적이라고 심정을 표현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마이클의 변호팀은 다양한 변호사들의 의견 충돌로 불화가 생겨나갔고 필즈는 마이클이 지적 수준에서 간신히 생활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실제로 마이클은 이 기간 동안 엄청난 스트레스로 거의 먹지 못 하여 4kg이 빠졌으며 진통제 중독 치료를 했었고, 이때 리사 마리 프레슬리가 그의 첫번 째 아내가 되는 계기가 된다. 또 리사는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함께 이미지도 중요하지만 사건의 여파로 불면증을 심하게 앓고 있는 그에게 잠을 잘 자는 것이 중요하다며 합의를 권유했었다.
파일:michaeljackson_01Neverland1993.jpg
아동 성추행 혐의에 관하여 완전한 억측이라고 해명하는 마이클 잭슨.
1994년 1월 10일 래리 펠드만은 마이클 잭슨의 재무 기록을 알 수 있게 해달라고 법원에 요청했다. 또한 마이클 잭슨의 피부과 주치의 였던 아놀드 클레인의 저택도 수색 당하는 등 마이클과 관련된 모든 사생활 파일이 공개될 수 있게 됐다. 마이클의 변호팀은 몇 가지 상황을 걱정했다. 첫번 째 재판에 가기에는 마이클이 정서적으로 너무 허약한 처지에 있다는 것이다. 두번 째 1993년은 인종 문제의 불씨가 남아있을 때로 중상류층 백인이 많은 보수적인 산타바버라에서 증거의 소명 정도가 약한 민사 재판을 한다는 것은 도박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번 째 형사 수사가 완료되기 이전에 이미 민사소송은 시작됐고 앞에서 썼듯 민사재판이 형사재판보다 먼저 시작하게 생겼는 데 즉 마이클의 변호팀은 민사와 형사 2개를 동시에 방어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민사 재판이 먼저 시작하면 언론을 통해 온갖 것들이 보도될 것이고 그것은 형사재판의 배심원들에게 편견을 심어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것 때문에 피고가 공정한 재판을 받기 위해 권리가 침해당하지 않도록 형사 재판에 앞서 민사 재판이 허용되는 것을 막는 사례가 많이 있었다. 즉 형사 사건이 완전히 해결될 때까지 피고는 민사 소송을 보류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 쓴 이유로 결국 민사 재판은 미뤄지지 않았다. 또 이 마이클 잭슨 사건은 캘리포니아 법에도 영향을 끼쳐 성범죄 사건의 고소인은 민사 소송을 당장 취할 수 없게 됐다. 이런 이유로 2003년 마이클의 고소인 아르비조는 챈들러가 했던 1993년 전략을 쓸 수 없었다.

또한 당시 타블로이드 언론들은 온갖 루머를 퍼뜨렸었다. 존 브랑카는 12월 10일 마이클이 귀국하기 전까지만 해도 미디어 보도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얼마나 적대적이었는 지 몰랐다는 것이다. 하지만 막상 미국으로 귀국하니 상황이 달랐던 것.

결국 마이클은 1994년 1월 25일 15,331,250 달러를 조단에게,변호인과 에반에게도 5백만 달러를 지급하기로 에반과 합의한다. 이 합의문은 유출됐고 마이클은 그러나 합의문에서 소년에 대한 불법적 행위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조단은 형사수사에서 언제나 마이클에 대해 증언할 수 있었다. 로스엔젤레스 지방검사 Gil Garcetti은 합의 이후 "마이클 잭슨의 형사 수사는 진행 중이며 민사 소송 합의에 영향을 받지않습니다." 라고 말하며 래리 펠드만도 피해자의 증언이 언제든 허용된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형사 사건에서 증언하지 않았다. 또 에반은 애초에 원하던 돈을 받았기에 수사 당국과 협력하기 꺼렸을 것이다. 민사소송 합의 이후에도 형사 수사는 계속됐고 4월 2일 로스엔젤레스 대배심은 잭슨을 기소하지 않고 해산하며 수사관들은 조단의 증언을 받기 위해 설득하고 있다고 했다. 9월 21일 산타바버라 검찰청은 공식 성명을 발표하는 데 조단이 증언을 거부하여 따라서 마이클에게 혐의를 제기할 수 없다고 하고 지난 18개월 간의 조사에서 마이클의 범죄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없음을 인정했다.

합의 이후 마이클과 친분 관계가 있던 taraborrelli는 합의에 대해 실망적이라며 대중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 뻔하다고 물었는 데 마이클은 화를 내며 이것은 나의 선택 그리고 내 인생이라고 그 지옥같은 상황에서 벗어나길 바랐다고 한다. (합의 직후 실시된 여론조사에 의하면 미국인의 59%는 합의가 혐의를 짙게 할 수 있으며 77%는 고소인이 아들의 복지가 아닌 돈에 관심이 있다고 응답했다.)

시간이 흐른 후 2005년 아르비조와의 재판에서 준 챈들러는 출석해서 증언했는데 지난 11년 동안 조단과 대화를 하지 않았고 1993년 당시 자신은 성추행을 목격하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또 검찰은 조단이 재판에 출석해 마이클에 대해 증언하길 요구했으나 조단은 거부하고 잠시 해외로 출국했다고 한다. 마이클의 변호사 Thomas Mesereau는 하버드 대학교에서의 강의에서 이 재판을 언급하며 조단이 개인적으로 아는 지인들에게 자신이 성추행을 당하지 않았다고 말했다고 했고 그들을 안다고 말했다.

2005년 7월 6일에는 에반이 조단을 폭행하고 질식을 시도했다. 조단은 법원에 문제를 제기했고 판사는 인정, 2005년 8월 5일 아버지를 상대로 한 임시 접근 금지 명령을 받았다. 2009년 6월 25일 마이클 잭슨은 사망하고 4개월 만인 11월 5일 에반 챈들러는 권총으로 자신을 쏴 자살했다. 유서를 남기지 않았으며 에반은 질병에 시달리며 양극성 장애를 앓았다고 한다.

1994년에는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결혼을 하게 된다. 사람들은 놀랐는 데 미국의 전설적인 가수인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이 마이클과 결혼하는 것이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세간에서는 아동 성추행 혐의로 타격을 입은 자신의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해 리사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부정적 눈초리가 많았다. 이에 대해 리사는 나는 정말로 마이클을 사랑했었으며 우리는 섹스도 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믿지 못했다고 회고했으며 리사와 마이클은 사건이 터지기 전인 1993년 5월에 같이 영화를 봤다고 ...

7. 1994년~1997년: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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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의 앨범 커버[26]

1980년대 후반부터 잭슨과 타블로이드 언론은 심각하게 부정적이고 어려운 관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는 결국 거짓으로 밝혀졌으나 전 세계적인 파장을 몰고 온 1차 아동 성추행 혐의로 그 관계가 완전히 부정적 기류를 타게 된다. 이 사건 이전에는 타블로이드를 제외한 일부 주요 언론은 무분별하게 루머를 생산하여 잭슨을 공격하는 행위를 보이지 않았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그 선은 없어진다. 주요 언론과 타블로이드의 경계가 무너진 것이다. 이 앨범의 수록곡 중 일부는 타블로이드와 관련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새 앨범 작업은 1994년 1월 중순부터 시작되었으며, 대부분 그가 혼자 작곡하거나 공동 작곡했다. R&B, 팝, 록 음악, 힙합, 일부 클래식 등이 앨범의 주요 장르이고 외로움, 탐욕, 환경문제, 인권문제, 불의에 대한 가사를 직접적이고 강력하게 표현한다. 소니 뮤직은 앨범 홍보에 3,000만 달러를 투자했으며 언론의 큰 기대를 모았다. 타블로이드는 전과 마찬가지로 잭슨에 대한 근거없는 부정적 보도를 내보냈으나 대중들은 그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수많은 루머는 그의 명성을 깎아내렸지만 마이클 잭슨의 인기는 가히 압도적이었다.

마이클의 팀원들이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시작하고 그는 3월에 합류했다. 그는 Dangerous 앨범 제작 도중 만든 "They Don't Care About Us"를 완성하기를 원했으며 "Stranger in Moscow"의 작업을 시작했다. 늦은 봄 그리고 여름 동안 마이클은 더 많은 곡을 작업했다. "Money",‘1993년 10월 데뷔 힙합 앨범을 발표한 샤킬 오닐의 랩이 삽입된 "2 Bad", "D.S" 그리고 "Morphine" 모르핀은 제목과 달리 약물이 아니라 폭력과 고통에 대한 것이며 록 밴드 Nine Inch Nails의 앨범 Downward Spiral에서 영향을 받은 곡이라고 한다. 또한 10년 전 작업한 살해 사건 기사를 보고 마이클이 작곡한 사회 고발적인 곡 "Little Susie"를 꺼내기로 결정한다. 잭슨과 포스터의 대화 중에서 잭슨은 좋아하는 곡으로 찰리 채플린의 "Smile"을 언급했고 제임스 브라운,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 재키 윌슨처럼 채플린은 마이클에게 항상 영향을 끼쳤다. 영화 Modern Times에서 나온 채플린이 만든 Smile은 이때만 해도 기악곡이었고 18년후 존 터너와 제프레이 퍼슨스가 가사와 제목을 추가하여 익히 알려진 곡이 되었다.

마이클은 포스터와 오케스트라 트랙인 "Childhood"를 작업하기를 바랐고 이것은 5살 때부터 사생활 없이 무대에서 돈을 벌고 연예계 활동을 하며 유년기를 잃었던 자신의 경험을 반영한 것으로 네버랜드의 Giving Tree에서 작곡했다고 한다. 마이클은 이 노래의 가치가 중요하다며 "당신이 정말로 나에 대해 알고 싶다면 내가 쓴 노래 중 가장 정직한 "Childhood"가 있다며, 사람들은 그것을 경청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Smile과 Childhood 는 모두 오케스트라와 함께 녹음했다. "Earth Song"은 1988년 6월 에서의 Bad 월드 투어 중 호텔 방에서 갑작스레 떠오른 아이디어로 1990년 8월 빌 보트렐과 작업을 완료했지만 마이클은 만족하지 못했고 2번째 파트에 기타 리프를 넣는 등 다시 작업했다. 마이클은 "나는 지구상의 많은 고통을 느끼고 있다며 이 노래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지구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다."라며 창작 동기를 설명했다. 앨범의 원래 출시 목표일은 1994년 6월이었으나 앨범의 완성도를 보완하면서 늦춰졌다.

마이클이 같이 일하기를 바랐던 프로듀서 지미 잼 & 테리 루이스[27]는 이번에는 자넷에게 동의를 받고 마이클과 같이 작업하며 약 5개의 곡을 만들었는 데 트랙이 자넷 바이브를 가져야 한다고 느꼈다. 그중 한곡은 자넷의 마음에 쏙 들었는데 마이클은 그 트랙이 아닌 강렬하고 하드한 다른 트랙을 선택했다. 참고로 자넷이 원했던 트랙은 1년후 녹음됐고 베스트 앨범인《Design of a Decade 1986-1996》에 수록된 " Runaway"[28]이다. "Tabloid Junkie"는 잼과 루이스가 가져온 트랙 중 하나의 개념에서 따온 것으로 마이클이 좋아하는 자넷 잭슨의 The Knowledge’에서 강한 영향을 받은 곡이다. 마이클은 잼에게 "HIStory"라는 제목의 곡을 써야 한다며 anthemic song을 원한다고 했다. 노래는 거대한 프로덕션이 됐다. Boyz II Men이 백킹 보컬로 오케스트라, 합창단이 동원됐고 역사적인 뉴스 사건과 연설을 녹음한 수많은 테이프도 사용했는데 160개의 트랙이 하나의 레코드로 믹싱되어 한 것이다. 그리고 마이클은 정말로 앨범 제작에 드는 시간을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완벽주의자였고 잼은 마이클이 빠르고 정확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하는 주변의 제작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이클은 Bad 때부터 그 누구도 듣지 못한 사운드를 원했으며 그것을 만들기 위해 부르스 스웨디언에게 오리지날 신디사이저 사운드를 만들 수있는 사람을 물었고 척 와일드를 제안했다. 마이클은 척에게 인간의 귀가 들어 본 적이없는 소리를 만들고 싶다며 격렬하고 독특하기를 바란다고 요청했고 제작한 것을 팀 멤버에게 배포하여 일부 트랙에 사용했다고 한다.

이후 R. 켈리도 합류했다. 마이클 팀은 "Life"와 " You Are Not Alone"의 데모 테이프를 받았는데 "Life"는 마이클이 마음에 들어했지만 최종적으로 선택된 것은 "You Are Not Alone"으로 "Life"는 R&B 밴드 K-Ci & Jojo가 녹음했다. "You Are Not Alone"은 좋았지만 더 많은 작업이 필요했고 마이클은 트랙을 다시 제작, 마지막 부분에 합창단을 추가, 마이클은 이것을 통해 '클라이막스와 구조적 감각'을 얻었다고 말했다. 이 앨범에 마지막으로 들어간 곡은 비틀즈의 히트곡 " Come Together"였다. 마이클 잭슨이 가장 좋아하는 비틀즈의 노래 중 하나로 1986년 Bad 앨범 제작 때 빌 보트렐과 대략적으로 완성한 것으로 9년 후 새 앨범에 수록하기로 결정했다.

언론은 HIStory의 발매 소식이 들리자마자 여러 방향으로 엄청난 기삿거리를 쏟아냈는데, 1993년 발생한 1차 아동 성추행 혐의와 그의 전작들이 모두 국제적인 성공을 거둔 것을 언급하며 "과연 이번 앨범은 전작들과 비교하여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을까?"라는 호기심을 내비쳤다.

HIStory 빌보드 200에서 1위를 기록했고, 발매 직후 19개 국가의 앨범차트에서 1위로 데뷔했다. 총 6개의 싱글이 발매되었으며, 여동생 자넷 잭슨과 듀엣을 진행한 "Scream"이 빌보드 싱글차트에서 5위로 데뷔했다. 이는 빌보드 핫 100 37년 역사상 최초의 핫샷 5위 기록이다. 또한 뮤직 비디오는 역사상 가장 많은 돈이 투자된 뮤직 비디오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 등재되었다. 두 번째 싱글 " You Are Not Alone"은 9월 2일 1위를 기록했고, 이는 최초의 핫샷 1위 기록이다. 이 노래는 영국, 프랑스, 스페인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정상을 차지했으며 예술적, 상업적 측면에서 찬사를 받았다. 이후 "Earth Song"은 미국에서 싱글로 발매되지 않았고, 6주간 영국차트에서 1위를 유지했다. 이는 1995년 크리스마스 기간 동안 여러 유럽차트를 강타했으며 특히 영국의 경우, 싱글만 100만 장 이상이 팔리며 영국에서 Billie Jean의 성공을 능가하는 잭슨의 대표 싱글로 자리 잡았다. "This Time Around"는 네 번째 싱글이자 앨범의 첫 번째 프로모션 싱글이었다. "They Don't Care About Us"는 빌보드 싱글차트 30위를 기록했고 총 14개국에서 top 10을 기록했다. "Stranger in Moscow"는 여섯 번째 싱글이자 앨범의 마지막 싱글이었다. 빌보드에서 91위를 기록했고, 미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에서 차트의 최상위권에 머물렀다. 평론가들에게 엄청난 찬사를 받았는데, 최고의 재료로 만들어진 완벽한 팝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미묘하고 감동적인 묘사 또한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앨범은 현재까지 2,200만 장 이상이 팔렸다. 이는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 중 60위 권에 들어가는 수치이고 또한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더블 앨범 중 하나이다.[29]

HIStory는 일반적으로 평론가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일부 평론가들은 새로운 스튜디오 앨범의 특이한 형식에 대해 최고의 히트곡 컬렉션이 수반된다고 평했고, 롤링 스톤의 제임스 헌터는 지난해에 잭슨이 경험한 사건에 대한 분노가 느껴진다고 표현했다. Earth Song을 실험적인 음악으로 묘사했으며 All Music의 스티븐 토마스는 마이클 잭슨의 자아에 대한 기념비적인 업적이라며 호평했다. 에를와인은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이 포함되어 있다는 찬사를 내놓았다. 다만 지금까지 마이클 잭슨이 녹음한 "가장 개인적인 앨범"에 대해 과거의 문제를 계속해서 언급하는 것으로 일부 부정적 평가를 받았는데, 이는 잭슨의 성인 이후 앨범의 어느 한 부분이 전면적으로 부정적 평가를 받은 첫 번째 작품이다. 일부 논란이 있었지만 음악적,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며 HIStory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앨범, You Are Not Alone은 올해의 노래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에는 실패했다.

잭슨은 앨범 제작 과정에 적극적으로 대다수에 참여했으며 앨범의 주제는 그의 인생에 대한 것으로 최근 사건에 대한 자신의 심리를 투영하고 있다. 잼은 예술가의 개인적 감정이 음악에 반영되면 다른 에너지를 제공한다고 말하며 그 앨범은 자신의 생각을 노래하는 매우 적극적이고 개인적인 그 부분 때문에 나에게 있어서는 가장 훌륭한 잭슨의 앨범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앨범의 사회적인 비판 때문인지 미국에서는 혹평을 받았고 유럽에서는 차트에 여러 곡이 진입하는 등 확실히 미국보다 반응이 좋았으며 특히 동유럽에서는 해방자로 불릴 정도로 호평을 받았다. 실제로 출시 전 앨범이 완성된 후 잭슨은 미국 내 음반사 임원 등을 초대했고 약 30명의 사람들 앞에서 앨범이 첫 공개됐으나 초대받은 사람들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고 한다. 또 수록곡 They Don't Care About Us의 가사 중 "Jew"라는 단어가 유대인을 지칭하는 것이라며 논란이 있었으나 마이클은 Jew라는 용어는 사회 문제를 고발하기 위해 선택한 용어이지 결코 인종차별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며 해명했고 가사를 수정하여 재발매했다. 하지만 곡의 내용이 제도권의 탐욕과 권력을 비판하는 내용이라 모호하긴 하다. 실제로 미국 대기업 CEO의 60%가 유대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비평가들은 HIStory 앨범에 대해 적대적인 평을 냈으며 홍보를 위한 티저 동영상이 팝스타를 지나치게 우상화하는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HIStory 앨범의 전체적인 내용은 차별과 탐욕, 편견에 대한 비판이니 평론가들의 행보를 앨범 내용이 비판하고 있는 셈이다. 잭슨은 이에 대해 이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다며 별 언급을 하지 않았다. 잭슨은 Dangerous 월드 투어 때부터 미국에서 공연하지 않았다.

이후 잭슨은 " HIStory World Tour"의 개막을 알린다. 이 투어는 1996년 5월 29일에 발표되었고 잭슨의 Dangerous 월드 투어 이후 진행된, 마이클 잭슨의 마지막 월드 투어이다. 총 5개 대륙, 82번의 공연에서 45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첫 콘서트는 프라하의 레트나 파크에서 공연되었으며, 125,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한 역사상 가장 규모있는 콘서트 중 하나였다. 1996년 10월 7일, 그는 아랍에서 처음으로 공연을 했다. 그는 튀니지에서 90,000명의 팬들 앞에서 콘서트를 진행했으며 호주 시드니에서 투어를 하는 동안 데비 로우와 비공개적으로 결혼했다. 1997년 1월 3일부터 4일까지, 잭슨은 하와이 호놀룰루의 알로하 경기장에서 35,000명의 관중을 동원하여 유일한 두 번의 미국 콘서트를 진행하였으며 경기장을 매진시킨 역사상 최초의 예술가가 되었다. 약 55,000명의 평균 관객을 동원하였으며 이는 역사상 네 번째로 많은 평균 관객을 동원한 투어이자 Dangerous 월드 투어에 이어 90년대 두 번째로 많은 평균 관객을 동원한 투어이다. 립싱크 논란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90년대 후반, 마이클 잭슨의 목상태는 최악 중 최악이었다. 그러나 그 상태로 투어를 진행해야 했던 잭슨은 퍼포먼스의 비중을 과감히 늘리고 세트리스트의 거의 모든 곡들을 립싱크 처리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무리 퍼포먼스를 증가시킨다 하더라도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2차전은 1997년 5월 31일 독일 브레멘의 베서스타디온에서 시작되었다. 세트 리스트 변경사항에는 Blood On The Dance Floor가 추가되었고, 이후 Off the Wall 메들리와 The Way You Make Me Feel의 제거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었다. Blood On The Dance Floor는 1997년 8월 19일 오슬로 콘서트가 끝난 후 세트 리스트에서 제외되었다.

잭슨은 39번째 생일을 맞아 덴마크 코펜하겐의 파켄 스타디움에서 60,000명의 팬들과 함께 공연을 했다. 그는 You Are Not Alone 공연 후 무대에서 깜짝 생일 케이크, 행진 밴드, 불꽃놀이를 선보였다. 벨기에 오스텐드의 히포드롬 웰링턴에서의 콘서트는 원래 1997년 8월 31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웨일스 공주의 죽음으로 인해 9월 3일로 연기되었다. 마이클은 1997년 8월 24일과 26일 핀란드 헬싱키의 올림픽 경기장에서 공연을 했다.

타블로이드와 일부 미디어에선 끊임없이 마이클을 비하하고 루머를 퍼트렸지만 대중들은 여전히 최고의 슈퍼스타의 공연에는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투어 도중 호주에서 잭슨이 진료받던 피부과의 간호사였던 "데비 로우"와 결혼을 하여 "프린스"와 " 패리스" 두 자녀[30]를 출산하게 된다. 이후 데비 로우와 이혼했지만 데비는 마이클의 여러 구설수에 대해 그를 지지하며 우정을 계속 이어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HIStory World Tour의 전반기가 끝나고 Blood on the Dance Floor: HIStory in the Mix를 발매한 다음 후반기 투어를 시작했다. 이 앨범에서는 5개의 신곡과 HIStory 앨범의 수록곡을 리믹스한 8곡을 포함시켰다. 싱글로 발매된 곡은 "Blood on the dance floor", "Ghosts", "Is It scary"(잼과 루이스가 만든 곡으로 HIStory에 수록되지 않았다.)인데 Blood On The Dance Floor는 영국, 에스파냐, 뉴질랜드, 덴마크에서 1위를 했다.

이 시기에도 타블로이드 언론에서는 연일 마이클 잭슨의 사생활에 지나치게 집착하며 허위보도와 루머들로 마이클의 유명세를 이용한 장사를 계속하고 있었고, 마이클은 이러한 황색언론들에 대한 스트레스로 당시 미디어를 거의 보지 않았으며 심한 불면증을 앓았다고 한다. Dangerous 월드 투어 때부터 격렬한 안무로 진통제를 투여했으나 이는 합법적인 처방이었고 실제로 마이클이 사망했을 때 마이클이 나이에 비해 심한 퇴행성 관절염을 앓았던 것이 부검결과 밝혀졌다. 마이클 사후에 한때 사망 원인을 약물중독으로 몰아가는 시각도 있었으나 이 또한 타블로이드가 주축이 된 미디어에서 만든 루머이며 부검 결과 치사량의 진정제를 투여당해 심장마비를 일으킨 살해인 것이 밝혀졌고 주치의의 과실치사에 대한 재판과정에서 마이클이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투여한 것 까지 밝혀져 주치의 콘래드 머레이는 4년형을 선고받았다.

참고로 한국을 방문했던 시기 역시 바로 이 때였다. 1996년 History 투어의 일환으로 처음으로 내한해 잠실주경기장에서 콘서트를 가졌다. 이듬 해인 1997년에는 무주리조트 투자 건으로 방한했고, 1998년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다. 1999년 6월, MJ&Friends 서울 공연을 위해 내한해 잠실주경기장에서 가수들과 합동 공연을 가졌고[31] 이는 잭슨 생전 마지막 내한이 되었다.

8. 1998년~2002년: Invinc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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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 10일 데뷔 30주년 콘서트에서 문워크를 선보이는 마이클 잭슨

2001년 세상에 공개된 이 작품은 마이클 잭슨의 마지막 정규앨범으로, 앨범 제작에만 3,000만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었으며, Bad 이후부터 이어진 마이클 잭슨의 사회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 주 장르는 R&B, 팝, 소울 음악이고 사랑, 외로움, 미디어 비판, 사회적 문제 등을 다룬다.

1995년 발매된 HIStory를 마지막으로, 6년간 마이클 잭슨은 새로운 정규앨범을 발매하지 않았기 때문에 앨범 발매 소식이 알려짐과 동시에 모든 언론은 이 앨범을 " 마이클 잭슨의 복귀작"으로 보도했다. 앨범 제작 과정에서 잭슨은 총 16곡의 수록곡 중 15곡의 작곡에 참여했다.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앨범이 발라드 성향으로 제작되었다는 것이다.

소니 뮤직은 밀레니엄 첫 번째 크리스마스 시즌에 앨범을 발표시키기 위해 마이클 잭슨을 재촉했으나, 완벽을 기하는 그는 여전히 녹음실에 머물렀다. 제작비 3,000만 달러를 투자한 제작사의 조바심은 결국 마이클 잭슨과 소니의 사장 토미 모톨라 간의 불화로 이어졌다. 소니는 손익분기점인 700만 장 이상의 판매량에 도달하지 못하면 마이클 잭슨이 제작비 전액을 지불해야 한다는 조건을 강압적으로 내세웠고, 이에 잭슨은 이 앨범이 소니 뮤직에서의 마지막 작업이 될 것이라고 대응하면서 맞부딪혔다.

발매 직후, Invincible 빌보드 200에서 1위를 기록했으며 이외의 10개 국가에서 1위를 차지했다. 단 세 곡만 싱글컷 되었는데 이 또한 소니 뮤직과의 갈등으로 초래된 결과이다. 첫 번째 싱글 "You Rock My World"는 빌보드 hot 100에서 10위를 기록했으며, 이는 마이클 잭슨의 생전 마지막 빌보드 top 10곡이었다. 이 곡은 평론가들에게 큰 호평을 받았으나 "앨범의 리드 싱글로는 적합하지 않다."라는 평가가 주를 이루었다. 즉, 마이클 잭슨 수준의 아티스트라면 더 좋은 음악을 들려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상업적으로는 큰 홍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싱글차트 2위를 시작으로 대부분의 유럽차트 최상위권을 석권했다. 두 번째 싱글 "Cry"는 영국 싱글차트 25위를 기록했고, 마지막 싱글 "Butterflies"는 평론가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으며 빌보드 싱글차트 14위를 기록했다.

앨범은 총 800만 장 정도가 팔려 성인 이후 마이클 잭슨이 발매한 정규앨범 중 최저의 판매량을 기록했다.[32]

<Invincibie> 의 발매 직전 2001년 9월 7일부터 9월 10일까지 뉴욕 매디슨 광장에서 30주년 솔로 기념 콘서트를 개최했는데, 마이클 잭슨의 커리어 30년을 그대로 녹여냈다는 평을 얻으며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휘트니 휴스턴, 머라이어 캐리 등의 팝스타들이 게스트로 참석한 것은 물론 마이클 잭슨의 퀄리티 높은 무대와 이에 호응하는 팬들의 호흡, 여러가지가 최상급으로 겹쳐져 현재까지도 마이클 잭슨의 최고의 라이브 무대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그러나 앨범 제작 과정에서 마이클 잭슨과 소니뮤직 간의 갈등은 극에 달하며 위기가 찾아왔다. 199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 된 잭슨과 소니 뮤직의 갈등은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를 바탕으로 Invincible의 월드 투어는 진행되지 않았으며 소니 뮤직의 토미 모톨라는 일방적으로 앨범 홍보를 중단시킨다. 마이클 잭슨은 앨범의 흥행 실패를 소니 뮤직의 의도적인 홍보와 마케팅 축소에 원인이 있었다고 지적하며, 2002년 7월 성명문을 통해 이를 지시한 사장 토미 모톨라를 "악마", " 인종차별주의자"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결국 잭슨과 대립했던 토미 모톨라는 해임되었다.

앨범을 위해 100여곡의 후보곡을 준비했다는 뒷이야기와 수록곡 "Butterflies"의 완결을 위해 200번 이상의 녹음을 시도했다는 사례는 그가 이 앨범에 쏟았던 열정이 얼마나 뜨거웠는지를 짐작케 한다. 강렬한 기타 솔로를 덧입힌 "Privacy"에서 그는 개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파파라치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고, 인더스트리얼 록과 힙합을 배합한 "2000watts"에서는 역동적인 보컬 에너지를 쏟아냈다. <Butterflies> 는 2002년 빌보드 연간 HOT 100 차트 64위를 기록하기도 했으며, 이 곡은 마이클 잭슨 생전 HOT 100 연간차트에 든 마지막 곡이 되었다.

베이비페이스의 달달한 R&B 스타일을 잘 소화해낸 "You Are My Life"와 어린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호소하는 "The Lost Children"은 마이클 잭슨 특유의 미성과 부드러움을 빛내주는 곡이다. 절친한 동료인 배우 크리스 터커와의 대화로 시작되는 "You Rock My World"에서는 짜임새있는 구성과 열정적인 가창이 돋보인다. 기타리스트 카를로스 산타나와 흥겹게 어울린 라틴스타일의 "Whatever Happens"도 앨범의 다채로운 면면을 채우며 감상의 포인트가 되어주었다.

평론가들에게는 다양한 평가를 받았는데, 데이비드 브라운은 " Invincible새로운 모습이 없는 마이클 잭슨의 첫 번째 앨범"이라고 평가했으며 앨범에 큰 히트곡이 없는 것 또한 비판의 대상이었다. 롤링 스톤의 제임스 헌터는 발라드가 이 앨범을 지나치게 지루하게 만든다고 말했고, 로버트 크리스트고 또한 지루하다고 묘사했다. Q 매거진은 "일관성은 없지만 흥미로운 앨범"이라는 평가를 내놓았고, 니키 트렌터는 "일부 파격적인 곡들이 포함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시간이 지나며 긍정적인 평가가 더해졌는데, "'You Rock My World'의 성공은 잭슨의 상징적인 스타일과 음악성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실행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다."라고 평가됨과 동시에 " 팝의 황제로부터 Invincible은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다. 신선하고 독창적이며 대중음악의 무조건적인 성공 공식을 따르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조나단 해리스는 "완벽한 작품"이라는 찬사를 내놓기도 했다.

마이클 잭슨은 이듬 해인 2002년까지 각종 시상식과 콘서트, 세계 각지에서 열리는 행사를 누비며 활발히 활동했다. 2002년 4월 24일 뉴욕에서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부부가 참석한 가운데 <Apollo 2002> 콘서트를 개최했는데, 마이클 잭슨의 공연 중 공식 라이브 영상이 제작되지 않은 몇 안 되는 사례로 뽑힌다. 6월에는 런던을 직접 방문해 공연하고 런던의 2층 버스에서 자신과 분쟁 관계에 있었던 소니뮤직을 비판하는 플래카드를 내보이는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8월 열린 2002 MTV 뮤직비디오 어워즈가 공교롭게도 그의 생일과 겹쳤는데, 시상식 중 그의 생일을 축하하며 직접 순서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마이클 잭슨은 이 날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소개로 직접 무대에 등장했는데, 브리트니가 그에게 밀레니엄 아티스트상을 수상했다며 소개해서 잭슨은 실제 상을 받는 줄 알고 기대하고 왔으나 알고 보니 브리트니의 장난(...) MTV 측에서는 실제 그런 상은 없다고 일축했다. 이 후 가을까지 활발히 활동하며 11월에는 베를린에 방문, 자선행사에 참석하여 연설하고 공연하기도 했다.[33] 이 때 자신의 셋째 아들을 호텔 발코니에서 팬들에게 보여주려다 발코니 밖으로 아들을 들고 내밀었고, 이로 인해 아동학대라는 비판이 일어 잭슨은 "끔찍한 실수였다" 라며 사과했다.

2002년 미국 중간 선거에서는 민주당을 전격 지지해 화제를 모았다. 앞서 가진 <Apollo 2002> 공연 역시 빌 클린턴의 미국 중간 선거 지원을 위해 개최한 것이었고, 알 샤프턴 목사 등과 함께 민주당 지지 호소를 했다. 마이클 잭슨이 데뷔 이래 정치적 활동에 참여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또한 직전 해 9.11 테러를 추모하기 위해 합동 제작한 곡 <What More Can I Give> 를 라디오에서 선공개했고, 이듬 해 디지털 음원으로 내놓았다. Invincible 자체의 성적은 그리 좋지 못했다 하지만, 2002년 이 앨범으로 7관왕을 차지하면서 여전히 식지 않은 그의 영향력을 증명할 수 있었다.

2003년 11월 22일 싱글 <One more chance> 를 발매했는데 이는 잭슨 생전 마지막으로 발매한 곡이 되었다.

9. 2003년~2005년: 2차 아동 성추행 혐의와 무죄

2003년 2월 3일에는 영국의 기자 마틴 배셔가 마이클을 240일 동행하며 찍은 'Living With Michael Jackson' 프로그램이 ITV 방송국을 통해 최초 방영되며 큰 파장을 몰고 왔다. 프로그램 속의 마이클이 지나치게 수줍어하며 유아같이 행동했고 일반 사람들의 상식과는 굉장히 동떨어진 말을 했기 때문이다. 마이클 측에서는 마틴이 악의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편집한 것이라며 즉각적으로 성명을 발표하고 FOX와 자체적으로 따로 프로그램을 제작해 반박 방영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틴에게 보여준 마이클의 모습은 이상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이클 측의 성명에 공감하지 못했다. 리사 마리 프레슬리는 이 프로그램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그 프로그램 속에 마이클은 내가 알던 마이클이 아니다. 실제 마이클은 그 프로그램에서 방영된 모습과는 무척 다르다. 아마도 그 프로그램이 찍힌 시기에 마이클은 약물에 심하게 중독된 것 같다. 그래서 인터뷰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준 것 같다. 또 마틴 배셔가 악의적으로 편집을 했을 것이다." 2월 6일에는 미국에서 방영됐고 그리고 이 날 1993년 아동 성추행 혐의에 대한 합의 문건이 유출되며 다시 마이클에 대한 혐의 여부가 미디어를 통해 불이 타올랐다.

제일 문제가 된 것은 프로그램 후반부 장면에 '개빈 아르비조'라는 소년과 함께 한 것으로 마이클과 개빈은 친밀했으며 마이클은 한 방에서 같이 잤다고 말했다.(한 방에서 같이 잤다는 것을 뒤에서 상세하게 다뤘다.) 기자가 왜 40살 가까이 남자가 소년과 자냐고 의문을 제기했고 "아이들과 자는 게 왜 이상한가? 그것을 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 아닌가"라며 항변했다. 맥컬리 컬킨의 아버지는 마이클의 침실에 대해 말하길 그곳은 언제나 개방적이고 열려있는 곳으로 누구든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소년들 뿐 아니라 다 큰 성인들도 잘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은 아동 성추행 혐의 재판을 몰고오는 원인이 됐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는 2009년 온스타일이 수입하여 마이클 잭슨의 잔인한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방영했는 데 개빈과의 만남은 나오지 않는다. 재판이라는 법적 문제가 있어서 삭제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튜브에 가면 개빈이 나오는 장면을 실컷 볼 수 있다.

이 프로그램을 본 일부 심리학자와 정신과 의사들은 마이클과 개빈의 관계가 부적절 해 보인다며 산타 바버라의 어린이 보호당국과 LA의 아동복지국에 자체적으로 조사에 착수해야 한다고 서신을 보냈다. 결국 산타 바버라 보안관 부서와 아동복지국은 비밀리에 조사에 착수했다. 이들은 개빈과 그의 가족들과 접촉하여 마이클과 어떤 관계인지 물었다. 개빈은 결코 마이클과 성적인 행위 같은 건 없었다고 말했으며, 개빈의 어머니인 '재닛 아르비조'는 마이클은 우리들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이며 다정한 사람이라고 칭찬하며 눈물을 흘렸고, 개빈의 누나 '데블린'은 마이클은 우리에게 축복이나 마찬가지였다며 울었다. 개빈의 아버지인 '데이비드 아비조'는 마이클 덕분에 자신의 아이들과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아동복지국은 이 같은 조사 결과와 함께 모든 가능성을 검토한 후 성추행 혐의가 없음을 밝히면서 사건을 종결했다. LA의 경찰당국과 산타바버라 카운티 보안국 또한 마이클에게는 혐의가 없다며 사건을 공식적으로 종결했다. 그러나 훗날 이번 사건으로 마이클을 기소한 검사인 톰 스네던은 아동복지국과 경찰당국의 조사 결과를 엉터리라며 무시하고 은폐했다. 심지어 톰 스내던 검사는[34] 개빈 가족들과 인터뷰를 하지도 않았다. 또한 톰 스네던 검사는 마이클을 'Wacko Jacko'라고 공개적으로 발언했는 데 왁코 잭코는 마이클 잭슨을 경멸하는 단어의 비하 용어로 스네던은 사건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에서 시종일간 미소를 보였다. 공격적인 조사 방식도 유명해서 Mad Dog(미친 개)라는 별명을 가졌다고 한다. 2003년 언론에서는 스네던이 마이클 잭슨에게 개인적인 악감정이 있는 것이 아니냐고 추측했었다.

그렇다면 1993년 혐의를 설명할 때 처럼 먼저 아르비조 가족들에 대한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 개빈 아르비조는 신장과 비장에 영향을 끼치는 암에 걸린 소년으로 2000년 여름 병원에서는 신장과 비장 중 하나를 제거하며 화학 요법을 시작했다. 개빈은 코미디언들의 열렬 팬이었고 코미디언 Jamie Masada가 소유한 할리우드의 코미디 클럽인 Laugh Factory에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 왔다. 개빈은 거기서 연예인도 포함된 가족들과 사귀었고 그 중 한명은 개빈이 투병 생활을 하고 있는 병원에 방문했었다. 딱한 개빈의 사정을 안 친구는 개빈이 특정 연예인을 만나고 싶다고 3명을 썼는데 그 3번 째가 마이클이었다. 그 요청을 받은 Masada는 자신들의 인맥을 통해 개빈의 요구를 마이클에게 알려줄 수 있었고 마이클은 병원에 20번 정도 방문했으며 개빈과 그 가족들이 네버랜드에 와도 된다고 말했다. 2000년 8월 가족 전체가 네버랜드를 방문했다. 그리고 첫 방문에서 개빈과 마이클은 한 방에서 잤다. 그렇다면 어떻게 잠을 잤는가? 그 방에는 개빈과 마이클만 있던 게 아니었다. 개빈의 동생 스타 아르비조, 그리고 마이클의 자녀들인 프린스와 패리스 또 성인 친구인 프랭크 카시오. 성인인 마이클과 카시오는 바닥에서 어린 아이들은 침대에서 잤었다. 그렇다면 개빈은 왜 마이클과 한 방에서 같이 잤는가? 그 아이들은 엄마가 괜찮다고 했다며 마이클의 침대에서 잠을 자고 싶다고 애원했다.

또한 그들의 어머니인 자넷 아르비조도 괜찮다고 발언했고 마이클은 이 일로 그녀가 아이들을 내게 밀고 있는 것 같다고 친구에게 우려를 표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틴 배셔는 마이클과 개빈이 같이 잠을 잤다는 사실을 전후 맥락 없이 마이클과 개빈이 침실에서 단 둘이서만 잤다는 식으로 묘사해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것 때문이었을까? 2005년 개빈은 재판에서 증언할 때 마틴 배셔의 다큐멘터리가 촬영된 2002년 9월까지 마이클은 그들 가족과 별로 접촉하지 않았었다고 말했다.(마틴 배셔는 마이클이 암에 걸린 소년들을 도와준다는 것을 촬영하고 싶었고 그래서 마이클이 개빈을 불러 촬영한 것 같다.) 그들은 네버랜드에 가기 위한 허락을 받았고 가족들은 7~10번 방문했는 데 마이클은 거의 없었고 있었을 때는 아르비조 가족들을 의도적으로 피했다는 것이다.

또 개빈의 화학 요법 치료가 4회정도 시행됐을 때 마이클은 전화 번호를 바꿨는데 이를 알리지 않아 개빈은 화를 냈고 산타 바버라 보안관에게 진술할 때는 마틴 배셔 사건이 있기 전까지 마이클을 보지 못했다고 불평했다. 더 구체적으로 마이클이 자신을,가족을 버린 것 같다고 마이클과 접촉을 잃지 않기 위해 아르비조 가족들은 편지와 카드를 보내기 시작한다. 2000년 10월 마이클은 아르비조 가족들에게 흰 색의 밴을 선물한다. (마이클은 자신들의 지인들에게 항상 값비싼 선물을 했었다.) 그리고 개빈을 위한 혈액 공급을 위해 네버랜드에 있는 모든 직원들이 혈액을 기부하도록 조치했었다. 2001년 여름 마이클이 선물한 밴이 고장나 마이클에게 돌려보내지고 그 이후 마이클은 아르비조 가족에게 그 어떤 선물도 주지 않았다고 한다.

2001년 9월 24일 아르비조 가족들은 JC 페니 백화점에게서 합의금을 받았다. 무슨 일인가? 1998년 8월 개빈 가족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J.C 페니 백화점에서 절도 혐의로 구금된 적이 있다. 구금에서 풀려난 뒤 개빈의 어머니인 재닛은 백화점을 상대로 경찰에게 폭행을 당했다며 300만 달러의 민사소송을 걸었다. 백화점 측에서 고용한 정신과 의사는 재닛이 정신분열증과 망상증을 앓고 있다며 진단했다. 재닛을 직접 치료했던 다른 의사는 그녀는 불안장애 우울증을 앓고 있지만 망상증은 없었다고 했다. 재닛은 2년 후 백화점을 상대로 구금 당시에 경찰들에게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다며 또 다시 민사소송을 걸었다. 백화점 사건은 13만 달러의 합의금을 주고 종결된다. 이후 백화점 측을 변호했던 톰 그리핀 변호사는 개빈 가족이 마이클을 고소 한 것에 대해서 "재닛은 끔찍한 이야기를 지어내서 아무 생각 없이 주위에 지껄이는 경향이 있고 이번에는 아예 홈런을 치려는 작정인 것 같다며 이를 갈취사건 제2부"라고 의견을 표했다.

2002년 봄 아르비조 가족들은 며칠 동안 네버랜드에 있었는데 마이클의 친구였던 'Christ Tucker'와 함께 보냈다고 한다. 마이클은 그 곳에 없었다. 9월에는 앞에서 말한 마틴 배셔의 촬영을 위해 마이클도 있었고 2003년 2월에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마이클이 이미지의 타격을 입자 아르비조 가족들은 마이클을 지원하기 위해 마이애미에서 마이클 측과 기자회견을 하려고 했고 'Christ Tucker''도 참여했었다. 근데 기자회견은 취소됐고 2월 7일 마이클과 아르비족 가족들은 마이애미에서 비행기로 타고 네버랜드로 돌아왔으며 아르비조 가족은 3월 12일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그리고 2003년 2월 7일부터 3월 12일까지가 아르비조 가족들이 아동 성추행 혐의를 만든 중요한 시기이다. 아르비조는 2003년 2월 7일부터 마이클이 개빈을 성추행 했다고 주장했었으며 이는 2003년 12월 18일 검찰의 초기 고발문에도 잘 나타난다. 그리고 2월 7일 비행기를 타고 LA로 돌아올 때 마이클이 잠자는 개빈의 머리를 핥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넷 아르비조는 그것을 목격했다고 주장한다. 앞에서 말했듯 2월 3일과 2월 6일은 프로그램 방송으로 마이클 측에서 난리가 났을 때였고 마이클은 Fox와 'Michael Jackson, Take Two: The Footage You Were Never Meant To See'라는 반박 프로그램 제작을 준비했을 때였다. 그리고 2월 20일 아르비조 가족들은 그 프로그램을 위해 촬영을 했고 그들은 마이클을 굉장히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하며 마틴 배셔의 촬영 방식이 불쾌하다고 언급했었다. 그리고 같은 날 아동복지국도 방문하여 그들을 조사했으며 마이클과 그 어떠한 부적절한 관계도 없다고 말했다. 참고로 그때 촬영된 비디오는 지금도 유튜브에 업로드 돼 있으며 훗날 수사 중 Moslehi's의 집을 수색할 때 검찰에 의해 발견됐다.

여기서 굉장한 의문이 몇 가지가 있다. 아르비조 가족의 주장이라면 마이클은 2000년과 2003년 2월 6일까지 성추행을 저지르지 않았는데 왜 프로그램 방송으로 마이클이 소아성애자라는 여론이 들끓었을 때인 2월 7일 갑자기 왜 그는 성추행을 시작했다는 것인가? 더군다나 아르비조 가족들과의 접촉을 의도적으로 회피했던 사람인데 그리고 아르비조는 2월 7일 핥은 것을 보고도 왜 네버랜드에서 마이클과 같이 지내며 방송 촬영이나 아동복지국과의 조사에서 웃고 떠들면서 마이클을 기쁘게 칭찬했는가 그리고 왜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는가? 결국 이야기를 바꿔야 했다. 2월 7일이 아닌 2월 20일부터 성추행을 당했다고 아르비조 가족들은 전체 이야기를 바꾼다.

또 마이클이 협박을 했고 납치를 해서 우리는 네버랜드에 억류됐고 아르비조 가족은 마이클을 무서워했고 그래서 촬영에서 거짓말을 했다고, 그러나 개빈은 2005년 재판의 증언에서 반박 비디오를 촬영했을 때 마이클이 여전히 위대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며 네버랜드를 좋아했고 거기 있던 모든 시간이 행복했었다고 증언하는 모순되는 발언을 했다. 그런데 재판에서 나온 또 다른 흥미로운 정보가 있다. 이 기간 동안 마이클과 아르비조는 거의 같은 시간,같은 장소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2월 25일~3월 2일까지는 아르비조는 네버랜드가 아닌 Calabasas에 있는 호텔에 머물렀으며 3월 초 마이클은 Kenneth Morgan이라는 익명을 쓰며 다른 호텔에 적어도 3월 7~8일까지 머물렀다는 것인데 3월 6일에는 네버랜드에 아르비조가 있었다. 또한 전화 기록을 바탕으로 하면 2월 20일 마이클은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의 턴 베리 아일 리조트에 있었으며 Azja Pryor도 마이클이 2월 20일 네버랜드에 없었다고 증언했다.

또한 협박과 납치와는 동떨어져 있는 행동을 했다. 2월 21일 자녀들이 네버랜드로 돌아가는 동안 자넷 아르비조는 민사 사건 변호사 William Dickerman을 만났고 2월 25일 다시 만났다. 이 방문 중 어느 한번도 자넷은 변호사에게 네버랜드에서 납치되었다는 발언은 물론 성추행에 대한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다. 자넷은 Dickerman을 만난 이유를 프로그램에서 자녀의 초상과 사진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만났다고 한다. 2월 25일~3월 2일까지 아르비조 가족은 몇 차례 쇼핑도 했으며 2~3월 동안 개빈과 스타의 치아 문제로 치과 의사를 만나기도 했다. 또한 2월 25일 개빈은 아까 마이클과의 만남을 주선한 Masada를 만나기도 했다. 3월 11일에는 자넷은 폭력 때문에 헤어진 남편 데이브 아르비조와의 아동 양육권 문제로 법원에 출두했고 변호사인 Michael Manning도 동행했다. 아르비조 가족들은 법원,변호사,의사,친구 및 상점 직원에게 자신들의 주장을 말할 기회가 충분히 있었는데 그들은 한번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납치된 사람들이 그리 자유롭게 넘나들며 심지어 변호사까지 만날 수 있다는 말일까? 또한 3월 1일 아르비조는 브라질로 휴가를 떠날 계획을 잡았다. Azja Pryor도 재판에서 증언하길 자넷 아르비조는 카니발을 보고 싶다며 브라질로 갈 것이라고 우리 같이 가자고 언급했다고 한다. 당시 검사 톰 스네던은 이 증언을 막기 위해 이의제기를 했으나 판사는 허락하지 않았다. 또 납치 시기에 자넷은 한화 700만원의 무단식사를 하고 마이클 측에 대신 내달라고 요구했었다.

2003년 3월 24일 자넷 아르비조는 William Dickerman를 민사 사건 변호사로 정식으로 고용했으며 Dickerman은 마이클의 변호사 Mark Geragos와 가구, 옷, 서류 등 여러 물품의 반환 문제로 서신을 보냈었다. 아르비조는 여기에서 아동 성추행 혐의나 납치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Dickerman은 자넷에게 변호사로 래리 펠드만을 추천한다. 1993년 아동 성추행 혐의 때 챈들러의 민사소송을 대표한 변호사였다. Dickerman은 자신이 래리에게 많은 것들을 배웠고 그가 캘리포니아 최고의 변호사 중 한 명이기에 마이클 잭슨과 관련한 문제라면 잘 처리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아르비조에게 추천한 것이다.

2003년 5월 펠드만과 자넷은 만나고 6월 펠드만은 심리학자 박사 스탠리 카츠(카츠는 펠드만에 의해 1993년 조단 챈들러를 만났었다.)에 개빈을 보낸다. 카츠는 논쟁의 여지가 많은 McMartin 사건에 관여했으며 Children 's Institute International (CII)에서 전문 교육 담당 이사를 지냈었다. McMartin 사건에서 CII의 인터뷰 기술이 강압적이고 조작인 것이어서 아동이 성적 학대에 대한 거짓 진술을 할 것으로 비판을 받아온 것으로 카츠는 그 재판에 참여했다. 여기서 명심할 것은 개빈은 2005년 재판에서 자신이 성추행을 당했다고 말한 첫번 째 사람이 카츠 박사라며 펠드만은 물론 그의 어머니에게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튼 6월 13일 래리 펠드만은 산타 바버라 보안관의 사무실에 개빈의 주장을 보고한다. 그런데 여기서도 많은 모순이 있다. 2003년 11월 17일 검찰 수사부의 진술서에서 자넷 아르비조는 2003년 9월까지 경찰이 성추행 사실을 알릴 때까지 개빈의 혐의에 대해 알지 못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개빈이 아동 학대 전문가인 심리학자에 보내졌고 며칠 후 변호사는 보안관의 사무실에 보고했으며 자넷은 2003년 2월 7일 마이클이 개빈의 머리를 핥고 있다고 주장했는 데 9월까지 자넷이 그 혐의에 대해 몰랐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CNN의 유명 MC 래리 킹은 사적 자리에서 래리 펠드만을 만난 적이 있는 데 펠드만이 단지 그들은 돈을 원하며 자넷을 'Whacko(미친 사람이라는 뜻)'라고 느꼈다며 그들을 믿지 않았다고 말했다며 마이클의 재판에서 이렇게 증언했었는데 펠드만은 재판에서 킹의 발언을 거부했다.

1993년 혐의를 다룰 때 챈들러가 민사소송을 먼저 걸었고 그 영향으로 성폭력 사건은 형사 수사에 앞서 민사 재판이 먼저 시작될 수 없다고 설명했다. 특히, 아동 성범죄와 같은 악질적인 범죄의 경우 형사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동일한 사실의 민사 소송에 걸린다면 결론은 뻔하다. 마이클이 이 사건에서 유죄 판결을 받을 경우 아르비조는 민사에서 그 유죄 판결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마이클이 유죄 판결을 받았고 아르비조가 그것을 근거로 민사소송을 제기한다면 남은 유일한 쟁점은 부자였던 마이클에게 얼마나 많은 돈을 받느냐 하는 것이다.

2003년 11월 18일 개빈 아르비조의 주장에 근거한 마이클 잭슨에 대한 체포 영장이 발부됐다. 당시 마이클은 라스베가스에 있었는데 체포 소식을 듣고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300만 달러의 보석을 내고 석방됐다. 같은 날에는 마이클이 부재한 가운데 70명의 보안관들이 네버랜드 목장의 집에 수색 영장을 신청했다. 당시 검찰은 "사춘기 소년인 개빈에게 끊임없이 전화하고 부적절하게 만지며 키스하고 핥고 껴안았고 납치했으며 브라질에서 거주하게 만들려고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앞에서 봤듯 마이클은 아르비조 가족을 피하려고 했었고 마이클에게 끊임없이 접촉을 시도한 것은 아르비조 가족이었으며 성범죄 혐의는 교차검증을 통해 이것을 확증해 줄 증인은 없으며 증언도 모순됐다. 또한 마이클은 아르비조 가족을 브라질에 억류시키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고 자넷 아르비조 스스로가 브라질로 카니발을 보기 위해 여행을 하려 했음이 드러났다.

체포영장 발부 2일 후인 2003년 11월 20일 구속 수감되었지만 몇 시간 후 보석금을 내고 풀려나왔고, 잭슨은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게 된다. 네버랜드 랜치의 압수수색이 종료된 후 마이클 잭슨은 무죄 판결전까지 네버랜드에서 거주하다가 무죄 판결이 난 직후 네버랜드를 떠났다.

2004년 4월 3일 대배심은 검찰 측의 이야기를 듣고 마이클 잭슨을 기소하며 4월 21일 검찰은 구체적 혐의를 특정지었다.

2005년 2월 28일부터 6월 3일까지 재판이 열렸다. 앞에서도 말했듯 마이클의 모든 것은 수색 대상이었고 네버랜드를 다 수색했지만 마이클의 범죄 혐의를 입증할 증거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4월 13일 재판에서 자넷 아르비조는 마이클이 열기구로 자신과 아이들을 납치하려 했다고 주장하는 등 수많은 증언들을 했다. 그런데 주장들이 너무나도 황당해서 당시 공판을 직접 본 기자들의 대다수는 잭슨이 무죄라고 생각했다고, 또한 앞에 썼듯 고소인들의 증언은 많이 모순됐기에 배심원들을 설득하기에는 부족이었으며 한 가지 더 이야기 할 것은 아르비조 가족들은 마이클이 자신들에게 성인용 포르노 잡지를 보여줬다고 주장했었다. 하지만 성인용 포르노 잡지에서 발견된 마이클과 아르비조의 지문은 동일한 페이지가 아닌 떨어져 있는 다른 페이지에 있었으며 아르비조는 네버랜드에 마이클이 없을 때도 그의 침실에 무단으로 들락나락 거렸었다. 재판에서 드러난 것을 보면 아르비조는 치과 의사의 사무실에서도 Vernee Watson Johnson의 집에서도 마음대로 들락나락 거리며 물건을 만졌었고 아르비조는 성인 포르노에 순진하지 않았음이 드러났는 데 네버랜드의 직원 Julio Avila는 개빈의 동생 스타 아르비조가 포르노 잡지를 가지고 이리저리 움직이기에 그것을 어디에서 가져왔느냐고 물었더니 집에서 가져왔다고 말했다고 증언했으며 Maria Gomez는 스타 아르비조의 배낭에서 포르노 잡지가 있는 것을 봤다고 증언했다. 즉, 개빈과 그의 동생이 마이클의 방을 뒤지다 그가 소유하고 있던 포르노 잡지를 만졌을 확률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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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 판결을 받고 법정을 빠져 나오는 마이클.
마이클은 재판에서 이겼지만 너무나 많은것을 잃었다.[35]

2005년 6월 13일 마이클 잭슨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36] 당시 배심원은 백인 7명 히스패닉 4명 아시아인 1명으로 흑인은 없었다.

마이클은 무죄를 받았지만, 당시 일반 대중들은 마이클의 무죄 판결을 신뢰하지 않았고 마이클은 가장 바보스러운 미국인 1위에 뽑히는 등 유언비어와 비방에 시달렸다.[37] 또한 마이클이 돈이 많다는 이유 하나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말하며 이 사건을 O. J. 심슨 사건에 비교하는 사람들이 있는 데 O.J심슨의 경우는 재판에서 배심원 중 흑인이 9명이고 백인이 2명에다 이 재판이 흑백 인종 대결로 옮겨갔으나 마이클의 배심원은 백인이 다수에 당시 여론조사에서도 흑인의 50%는 마이클을 유죄라고 생각할 만큼 인종 불문 (백인은 75%가 유죄 13%가 무죄라고 응답)하고 유죄라는 여론이 형성돼서 흑백 인종 대결도 없었다. 또한 마이클의 변호사 Thomas Mesereau도 재판을 담당할 때 인종카드는 없다고 공개적으로 말했었다. 또한 O.J심슨은 증거나 정황들이 유죄를 가리키고 있던 반면 마이클 재판의 경우 증거는 아무 것도 없었으며 모든 정황,증언들은 교차검증의 대상이었고 고소인들은 신뢰성이 없었다. 즉, 모든 것들이 무죄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전체 재판 과정에 대한 내용은 관심이 없으며 안티팬들은 재판 과정에서 검찰의 이야기만을 가지고 와 마이클을 유죄로 만드는 짓을 아직도 인터넷에서 하고 있다. 이 재판에서 언론도 문제가 컸는 데 미국의 언론들은 자극적인 이야기만 보도를 했고 많은 사람들이 유죄라고 생각했기에 변호단에 있던 한국인 변호사는 그런 편견에 맞서 싸우는것이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마이클 잭슨은 무죄 판결 이후 자신이 17년간 살던 네버랜드 랜치를 떠나 로스앤젤레스에 따로 거처를 마련했고, 이 후 사망한 해인 2009년까지 단 한번도 네버랜드를 방문하지 않았다.

마이클 잭슨이 죽고 나서 2009년 마이클의 성추행 혐의에 대한 FBI 파일이 공개됐는데 FBI는 마이클에게 혐의점을 찾을 수 없었고 아동복지국 조사 결과에서도 마이클이 개빈 아르비조와 가족들에게 성추행을 했다는 증언을 얻지 못해서 검찰에게 불기소처분을 할 것을 권유했지만 검찰은 FBI와 아동복지국의 의견을 무시했다. 또한 FBI는 검찰이 네버랜드와 마이클 잭슨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수사에서도 성추행에 대한 단서를 찾지 못하자, 루머로 마이클 잭슨을 괴롭혔던 타블로이드들의 보도가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하나의 가정을 가지고 이들 보도에 대한 수사까지 진행 했고 실제로 타블로이드 언론들의 보도는 개연성과 증거가 없었다는 것도 밝혀냈다.

마이클과의 재판 이후 자넷 아르비조는 2007년 공문서 위조를 통해 최저생계비용을 부당으로 취득한 사실이 드러나 기소당하여 벌금과 사회봉사명령을 받았다.

마이클 잭슨은 2차 성추행 사건 이전까지 네버랜드에서 관광객을 받고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등 대중들과 소통하는데 열정적이었으나, 성추행 사건 이후 네버랜드 랜치의 페쇄와 함께 이러한 활동들을 모두 중단했다.

10. 2006년~2009년: 황제의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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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월드 뮤직 어워드 시상식[38]

재판 이후, 그는 미국을 떠나 바레인과 영국 등 외국에서 생활했다. 이 시기부터는 시상식에 몇 차례 등장한 것 외에는 눈에 띄는 활동은 하지 않았고, 레코드사에서 몇 장의 베스트 앨범을 발매했을 뿐이었다. 또 자주 휠체어를 타는 모습을 보여 건강 상태 문제가 심한 것으로 추정되기도 했으며,[39] 마이클 잭슨의 음악 경력은 끝이라는 소리도 나왔다. 2006년 1월 말에는 바레인의 한 쇼핑몰에서 아랍 전통 의상으로 온몸을 가린 체 쇼핑하다가 한 파파라치에 걸려 도망치는 모습이 사진으로 찍히기도 했다. 워낙 근황이 안 나오다 보니 파파라치와 타블로이드의 추측성 보도가 극에 달했던 시점도 바로 이 때이다.

재정적인 문제도 심각해졌다. 마이클 잭슨은 상당한 부채에 시달리고 있었다.자신의 네버랜드 랜치를 관리하는 직원들에게 제때 급여를 지불하지 못해 캘리포니아 주정부로부터 네버랜드가 강제로 폐쇄되는 등 큰 곤란을 겪었다.[40] 이때 잭슨이 파산한 것 아니냐는 주장이 나올정도였는데, 심한 재정적 문제를 겪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마이클이 소유한 판권이나 일부 자산 등으로 해결이 가능한 문제였다. 네버랜드 랜치의 관리비가 어마무지한 건 사실이지만, 그 정도의 손실은 마이클 잭슨 정도의 재산이면 다 메꾸고도 남는다...

이후 2007년부터 마이클 잭슨은 슬슬 컴백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일단 몇 차례의 잡지 화보를 찍었고, 국가별로 컴플레이션 앨범 <King Of Pop>을 발매했으며 Thriller의 발매 25주년을 기념하여 "Thriller 25"를 발매했다. 그리고 2009년, 마침내 컴백을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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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팬들과 취재진 앞에서 컴백을 발표하는 마이클 잭슨[41]
2009년 3월 마이클 잭슨은 영국 런던 O2 아레나에서 열릴 <This Is It> 콘서트 발표로 컴백을 선언한다. "이번이 정말로 나의 마지막 공연이 될 것이며 팬들이 원하는 노래를 부를 것이다."라고 말한 잭슨은 ''See you in July!"라는 말을 남겼다. 단순 컴백 선언인데도 불구하고 BBC, CNN, ABC 등 영미 주요 언론들은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긴급 속보로 그의 컴백 발표를 실시간 생중계했다.

황색언론들은 여전히 마이클 잭슨을 괴롭혔지만, 황색언론들의 음해에도 불구하고 마이클 잭슨의 컴백 발표 후의 열기는 그야말로 뜨거웠다. <This Is It> 공연은 2009년 기준으로 역사상 가장 빨리 매진된 공연으로 기록될 정도로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첫 컴백 무대의 표를 못 산 사람들이 이베이에서 우리나라 돈으로 2000만 원에 해당하는 금액을 지불해서라도 표를 구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팬들의 엄청난 반응에 10회로 예정되었던 공연을 50회[42]로 늘어났으며, 백댄서와 코러스, 무대효과, 의상 등의 공연을 준비하는 모든 부분에 직접 관여하는 열정을 보이고 3D 특수효과와 특별마술을 요청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면서 매우 열심히 공연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마이클은 This Is It 공연의 안무 측면에서는 내심 자신없어했다. 공백기간 동안 몸과 마음이 쇠약해졌고 당시 기준으로 나이도 50대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이전만큼 화려한 안무를 보이는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This Is It 공연 연습 영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전성기에 비하면 안무의 화려함과 격렬함이 많이 줄어들었으며, Billie Jean 리허설때는 아예 문워킹을 비롯한 각종 퍼포먼스를 선보이지도 않았다.[43]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벽주의자답게 어떻게든 안무 솜씨를 예전처럼 끌어올리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혹독하리만큼 연습을 반복했는데, 마이클의 딸인 패리스 잭슨은 '그때 아빠는 피곤한 기색이 드러날 정도로 집에서도 끝없이 연습하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Earth Song을 리허설하는 마이클
사망하기 전날 새벽에 마지막으로 리허설한 노래. HIStory 앨범에 수록된 <Earth Song>이다. 리허설에서도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손가락에 테이프를 붙인 것을 볼 수 있다. 이 리허설은 사후 주치의 재판에서 증거물로 채택되어, 검사쪽에서 마이클은 사망하기 전날까지도 생명과 직결될 정도의 심각한 문제는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

11. 팝의 황제, 세상을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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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의 사망을 보도하는 신문 뉴욕 포스트와 뉴욕타임스 신문의 앞면에 그의 사진이 나와있다.[44]

2009년 6월 25일 마이클 잭슨은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인해 숨을 제대로 못 쉬는 상태로 발견되어 로스앤젤레스의 현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향년 50세에 세상을 떠났다. 팬들도, 그리고 마이클 잭슨 자신도 기다려왔던 무대 복귀를 한 달 앞둔 상황에서였다.[45]
사망 소식을 긴급 속보로 보도하는 CNN영상[46]

그 뒤 이미 발권된 런던 공연에 대해서는 환불이 진행되었는데, 대다수는 런던 공연의 티켓을 잭슨의 유품으로 여기며 환불하지 않고 소장하여 회수율이 매우 낮았고 오히려 이 티켓은 이베이 등지에서 원래 가격의 10배가 넘는 비싼 값에 거래된 적이 있다. 일각에서는 모차르트 등과 비교하며 천재는 요절한다는 말이 사실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마이클이 불면증을 호소하며 프로포폴을 찾았다. 그러나 난 거부했는데 사망 4일 전 마이클의 직원 한 명에게서 전화가 왔다. 마이클이 지금 당신을 보고 싶어한다고 말하는데 그 뒤에서 마이클이 '몸 한쪽이 아주 뜨거운데 다른 한쪽은 춥다. 매우 춥다.'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곤경에 처해 울부짖고 있었다.
마이클 잭슨의 간호사, 셰릴린 리
마이클 잭슨의 사망 전 건강 상태는 50대 미국인에 비춰봤을 때 괜찮은 수준이었지만 심한 스트레스와 불면증으로 인한 약물 문제가 있었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약물은 마약을 말하는 게 아니다. 마이클 잭슨은 절대 마약을 하지도 않았고, 오직 합법적으로 구할 수 있는 것만 구했다. 프로포폴은 2009년 당시 전세계적으로 마약으로 분류되는 약물이 아닌 마취제였다.
  • 마이클 잭슨의 사인은 정확히 말하면 급성 프로포폴 벤조디아제핀 중독으로(acute propofol and benzodiazepine intoxication), 둘 다 오피오이드 마약성분(opioid)이 없는 약물로 벤조디아제핀은 불안증세, 불면증 등을 치료하는 약물이고 프로포폴은 마취유도제이다.[47]
    당시 잭슨의 주치의로 고용된지 몇 주 밖에 지나지 않은 콘라드 머레이는 잭슨의 불면증을 치료하기 위해 프로포폴을 이용했는데, 이게 벤조디아제핀 사용과 겹쳐[48] 죽음에 이르게 된 것. 프로포폴은 수술 도중 마취제로 사용되며 절대 수면제 대용으로 사용될 수 없음에도 마취 관련 훈련을 받지 않은 머레이가 남용해 비극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에 머레이는 잭슨이 고집을 피워서 프로포폴을 처방했으며 본인은 오히려 잭슨의 의존증을 줄이려고 애썼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머레이의 잘못된 처방에 의해 잭슨이 사망하게 된 것은 분명하며, 머레이의 주장이 맞다고 쳐도 애초에 환자가 고집부린다고 해서 의사가 잘못된(심지어 위험한) 처방을 해주는 것 자체가 잘못이기에[49] 머레이는 과실치사로 징역 4년형을 받았다.[50]

2009년 6월 25일에 세상을 떠난 후 수많은 빚이 있었다는 말이 나와 여러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사실 그는 소니EMG의 50%의 지분을 가지고 있었고 마이클 잭슨 본인의 것은 물론 75만개의 노래에 대한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기에 이러한 지분과 저작권의 현 시가만 해도 5억 달러 그 이상에 이르며 수많은 부동산, 세계 각국의 건물과 성을 소유하고 있으니 돈으로 환산한다면 실제로 빚이 있었더라도 갚고도 남는다. 실제로 빚이 있다는 언급이 있은 지 몇 주 후에 그의 재산은 빚을 제외하더라도 1조 5천억 원 정도가 남을 거라는 기사가 나왔으며 2010년 3월에선 이제 잭슨이 지고 있던 빚은 없다는 말이 나왔다.[51]

그의 사후 미국 의회에서는 잭슨을 기리고자 정치인 출신이자 목사인 재시 잭슨의 주도하에 국회의원들의 단체 묵념이 있었고 CNN을 비롯한 몇몇 해외의 유명 언론들이 정규 뉴스를 중단하고 긴급 속보 체제에 돌입했으며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애도를 표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연예인"이라는 타이틀이 과장이 아님을 증명하였다. 더불어 사망 소식 이후 음반 판매량 1~5위까지 잭슨이 석권할 정도로 당시 1위였던 블랙 아이드 피스의 앨범보다 많이 팔렸으나 빌보드 200에서는 발매 된 지 2년이 지나면 차트에 집계하지 않아 빌보드 앨범 200 차트에 잭슨의 앨범이 올라가지 못 했다. 이에 대해 논란이 생기자 빌보드는 결국 아무리 오래 전에 발매됐어도 언제든 성적만 좋다면 200 차트에 올라갈 수 있도록 규정을 수정했다. 세계적 음반체인점 HMV는 잭슨의 사후 음반판매가 1977년 엘비스 프레슬리, 1980년 비틀즈의 존 레논이 사망했을 때의 반응을 압도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타임지에서는 9.11 테러 이후 처음으로 특집판이 발매됐고[52] 2010년에는 VH1 선정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순간에 잭슨의 사망이 1위에 올랐다.

폭스 뉴스에 재직하며 2005년 마이클 잭슨과 인터뷰를 했었던 Geraldo Rivera는 "그는 혼자였다, 그가 도움이 필요했을 때 다들 어디있었냐"며 죽어서야 그를 치켜세우는 사람들을 향해 강력히 비판했다.

마이클의 30년지기 친구이자 마이클의 공연마다 항상 드럼 세션으로 참여한[53] 조나단 모펫은 마이클의 사망 소식을 믿지 못했다. 사망 하루전날만 해도 함께 술을 마시며 런던 공연도 힘내자고 이야기 했던 만큼 자고 일어나니 마이클이 죽었다고 하니 조나단 입장에서는 어이가 날아가는 일이다. 조나단은 어제만 해도 잭슨과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이야기를 나눴다며 매우 슬퍼했다.

잭슨의 사망 소식이 보도되고 뉴스 웹사이트는 사용자 폭주로 빠르게 과부하에 걸린다. 잭슨의 사망 소식을 최초 보도한 TMZ와 뉴욕타임즈는 서버 폭파 현상을 겪었으며, 구글은 마이클 잭슨 검색어 량이 수백만씩 폭등하자 DDoS 공격으로 간주하고 30분동안 마이클 잭슨 관련 검색을 차단했다.
그때 사상 최초로 사람들이 다 함께 인터넷을 무너뜨렸습니다.
National Geographic <세계적 문화 아이콘, 마이클 잭슨의 사망> 데이비드 셀링거(아마존 닷컴)

그리고 사망 이후 그의 인격적인 측면이 지인과 자녀들을 통해 증언되고 과거에 있었던 몇몇 추문들의 진실들이 밝혀지며 본국인 미국에서도 영웅적인 이미지를 많이 회복했다. 놀라운 것은 그의 사후 유튜브에 그의 공연 영상들이 마구 업데이트되어 잭슨에 대한 미국 10대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그의 10대 팬 층도 상당히 증가했다. 덕분에 2009년 말 미국 여론조사에서 미국 10대, 20대들이 가장 좋아하는 뮤지션 1위에 마이클 잭슨이 선정되었다.

팝의 황제답게 "이 모든 것이 쇼이며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다."라는 팬들의 극성적인 말들이 나오기도 했으며 그 덕분에 한동안 영문판 위키백과에서는 죽었다 안 죽었다 가지고 수정전쟁이 발생하기까지 했다. 관련 기사

미 현지 시각으로 2009년 7월 7일 마이클 잭슨 추모식이 열렸고 약 3만 명이 그 자리에 참여했다. 가수 한 명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이러한 행사가 열릴 정도라는 것은 그가 얼마나 위대했는지를 알려주는 또 하나의 증거로 남아있다. 추모식은 FOX, BBC, CNN 등 영미 주요 방송사들에서 생중계됐는데 미국에서만 3,100만명이 시청하여 역대 추모식 시청률 3위를 기록했고[54] 전 세계적으로는 20억명 이상이 본 것으로 추산돼 TV 역사상 가장 많은 시청자를 끌어모은 방송 중 하나로 기록됐다.[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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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영면하고 있는 묘

그의 생일인 2009년 8월 29일에는 뉴욕, 베이징, 도쿄, 서울, 파리, 런던, 베를린, 상파울루 등등 전 세계에서 그를 추모하기 위한 " Beat It" 플래시몹이 벌어졌다.

2009년 7월 11일, LA 경찰에서 타살 설을 제기했고 15일에 잭슨의 사망을 미국 법상 살인으로 결론지었다. 의도적인 살해는 아닐지언정 치료과정 중 과다한 약물투여로 인한 2급살인(= 과실치사)로 판결했다. 참고로 미국 법의 1급 살인이 우리나라의 살인죄(고의 있음)이고 2급 살인은 우리나라의 과실치사(의도 없음)에 해당한다. 즉, 미국 법에는 '과실치사'라는 용어가 없고 일단 사람을 죽였다면 살인이며 그 고의 유무에 따라 1급과 2급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2009년 2100만장 가량을 판매해서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한 아티스트 3위에 오르기도 했다. 또한 그의 음반 Number Ones는 가장 많이 판매된 앨범 3위에 기록되었다.

2011년 9월 28일부터 미국에서 잭슨의 주치의 콘래드 머레이(Conrad Murray)에 대한 공판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잭슨의 사망 직후의 사진이 공개되어 논란이 일고 있다. 머리는 공판에서 잭슨이 자의에 의하여 불면증 치료제인 프로포폴을 주입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을 통해 잭슨 스스로는 주입할 수 없는 것이 밝혀졌고, 사진과 함께 사망 전의 음성 녹음파일도 공개되었다. # 결국 2011년 11월 7일 # 과실치사(involuntary manslaughter) 유죄로 판결이 내려지고 2013년 출소했다.

"사람들이 이 쇼를 떠날 때, 사람들이 내 쇼를 떠날 때 나는 사람들이 '내 생애에 본 적이 없는 최고의 쇼였어.'라고 말하기를 바란다."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고 한다.[56] 언론에서도 '약물에 취한 것 같은 목소리' 라고 말하며 잠정적으로 그의 약물 남용 설을 미는 눈치다.[57] 슬프게도 육성 속 고인의 꿈이 실현되지 않았지만 마지막 공연에 대한 고인의 열정을 잠시 느낄 수 있다.

12.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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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7월 6일 마이클 잭슨이 한때 머물렀던 대저택인 ´네버랜드´에 정체불명의 그림자가 카메라에 포착됐다. 영상 1분 20초 부터[58] 얼핏보면 섀도 맨과 흡사하다. 일부 팬들은 "그림자는 잭슨의 영혼일 것"이라며 "마이클 잭슨이 애착을 갖고 있던 네버랜드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팬들은"여러 가지 측면에서 가능성이 존재하는 만큼 억측은 금물"이라며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후 이 그림자의 행방은 알 수 없다.

2009년 10월 12일 신곡 "This Is It"의 음원이 공개되었다. 또한 "This Is It"은 개봉하지도 않은 상황임에도 갖은 기록을 세웠다.

사망 직전 준비 중이던 런던 투어의 리허설 영상과 인터뷰 영상이 포함된 다큐멘터리 영화 마이클 잭슨의 디스 이즈 잇이 2009년 10월 29일 전 세계에서 동시 개봉되었다. 영화는 #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는데 영국에선 당일 가장 빨리 매진된 영화라는 기록을 세웠고 미국에서만 1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으며 현재까지도 다큐멘터리 영화 역사상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익을 거둔 영화 4위로 남아있다.

사망 직후 국내에서도 마이클 잭슨의 음반 판매량은 133배 이상 급증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수립했다. 한국은 물론 해외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나온 지 수년이 지난 그의 베스트 앨범이 갑자기 앨범차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 오래된 앨범들은 당시 빌보드 차트 정상에 위치했던 블랙 아이드 피스의 The E.N.D.보다도 많이 팔렸는데, 이런 현상은 빌보드 사상 최초였다. 오래된 앨범은 빌보드 메인 차트에 랭크될 수 없는 룰이 있었지만 이를 계기로 이후 12월 5일부터는 과거의 앨범들 또한 랭크될 수 있도록 변경됐다. 마이클 잭슨이기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11월 8일 선보인 "Breaking News"가 공개되었다. 잭슨이 완성하지 못한 노래를 소니에서 완성시킨 것. 미국의 팬들은 빌보드 200 데뷔 1위를 기대하고 있는 눈치다.[59] 결국 이번에도 발매하자마자 1위를 찍어버린 위용을 자랑했다.

2009년 12월 24일 미국 FBI는 마이클 잭슨에 대한 수사 파일들을 공개했다. 여기에는 살해 협박 편지 등을 포함해 마이클 잭슨의 아동 성추행 수사 파일들도 들어있다. 이 정보 공개를 통해 그가 아동 성추행에 혐의가 없음을 다시 확인하게 됐다.

2010년 12월에는 앞서 공개한 "Breaking News"가 수록된 첫 번째 사후앨범 " Michael(음반)"을 발매했다. 전 세계적으로 150만 장이 팔렸다. 앨범에 수록된 곡 중 몇 곡이 마이클 잭슨의 목소리가 맞냐는 논란이 있었다.

2012년 Bad 앨범 25주년 기념으로 미공개 곡과 다큐멘터리 영화 그리고 1988년 Bad World Tour공연 영상을 수록한 Bad 25가 발매됐다.

2013년 6월 마이클 잭슨의 딸인 패리스 잭슨 자살을 기도한 것이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없지만 유산 싸움으로 인한 스트레스 및 여러 고달픔이 크다고 한다. 기사.

2014년 5월 14일에는 두 번째 사후앨범 " Xscape"가 발매됐다. 전작 "MICHAEL"이 평론가들과 팬들에게 엄청나게 까인 반면 "Xscape"는 긍정적인 평가를 많이 받았고, 49개국 아이튠즈에서 앨범차트 1위에 올랐으며 빌보드 200에서 2위를 기록했다. 싱글 "Love Never Felt So Good"은 빌보드 hot에서 9위를 기록하며 마이클 잭슨은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50년대 연속으로 빌보드 top 10을 기록한 유일한 아티스트이다. 18일에는 미국에서 열린 빌보드 뮤직 어워드에 홀로그램으로 등장해 "Slave to the Rhythm"를 공연했다.[60] 기사.

2015년 사망 6주기 기념으로 소니에서 드디어 음원을 스트리밍으로도 들을 수 있도록 공개했다! 12월에는 Thriller 앨범이 미국 내에서 최초로 30X 플래티넘(3000만 장 판매)을 인증받으며 또 다시 신기록을 세웠다.

2016년 2월 1일 Thriller 앨범은 미국 내 32X 플래티넘(3200만 장 판매)을 인증 받았다.

뒤이어 2017년 2월 16일 'Thriller' 앨범의 미국 내 판매량 33X 플래티넘 (3300만장 판매)을 인증받았다.

2017년 9월 29일에는 모음집인 Scream(음반)이 발매되었다.

2018년 6월에 뜬금없이 Drake의 신보 Scorpion의 피쳐링진으로 이름이 올라갔다. 드레이크가 마이클 잭슨이 생전 남긴 샘플을 구입해 재작업한 "Don't matter to me"란 곡 때문인데 이 곡이 빌보드 차트 9위를 기록하면서 비록 피쳐링이긴 하지만 또다시 빌보드 top 10에 본인의 노래를 기록했다.

2022년 마이클 잭슨의 사후 앨범 Michael의 논란의 수록곡 Breaking News Keep Your Head Up Monster가 스트리밍이 중단되었다. 소니는 이건 모창논란과 관계없다고 밝혔으나 사실상 인정한 셈이다.

2022년 마이클 잭슨의 Thriller 40주년 기념 앨범 Thriller 40이 발매되었다.

2024년 2월. 소니뮤직그룹이 음반 및 작곡 저작권의 절반을 최소 6억달러(약 8천억원)에 사들이는 계약을 체결했다. #

[1] 첫 만남은 1972년에 있었다고 마이클의 자서전인 Moonwalk에서 밝혔다. [2] 참고로 1979년은 록 음악 팬과 백인우월주의자들의 디스코 혐오 정서에 말 그대로 불을 지른 사건인 디스코 폭파의 밤이 일어난 해였다. [3] 훗날 이 앨범은 뛰어난 음악성을 인정받아 그래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4] 원래 곡명은 Heartbreak Hotel이였으나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와 혼동할 것을 우려해 앨범에는 This Place Hotel이라는 제목으로 바꿨다고 한다. [5] 이전까지 흑인 아티스트들은 시청률이 낮은 시간대에 편성되었고 이 때문에 데이비드 보위는 "MTV에서 흑인 아티스트를 볼 수 없다 왜 그런거냐"는 비판을 했다. [6] 여담으로, Thriller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이 마이클에게 200만 장만 팔려도 잘 팔린 것이라고 하자 마이클은 "당신들 지금 뭔 말 하는 거예요? 이건 우리가 열심히 같이 제작한 것이라구요"라며 화를 내고 기분이 불쾌해져서 앨범 발매를 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레코드사 사장인 길 프리슨이 마이클에게 전화하여 겨우 타협을 해서 Thriller 앨범이 발매되었다고 한다. [7] 레이건 대통령은 Victory Tour가 워싱턴 D.C.에서 개최될 수 있도록 마이클 잭슨에게 요청했었다. [8] 자세한 내용은 We Are the World 문서 참조. [9] 이때의 화상을 기점으로 잭슨의 백반증이 악화되기 시작한다. 어렸을 시절의 사진을 보면, 백반증은 과거부터 진행 중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0] 마이클의 악성 루머의 시발점이 된 사진이다. [11] 정확하게는 엘리펀트 맨의 뼈이다. 엘리펀트 맨은 심한 기형에 의해 서커스 구경거리가 되어 버린 19세기의 영국인이다. 물론 잭슨이 이것을 샀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루머이다. [12] 잭슨이 데려오기 전까지는 약물 실험용 침팬지였으며, 이름은 "버블스"이다. [13] 마이클의 동의도 없이 형제들이 추첨식 표판매를 하려고 했으며 이것 때문에 마이클은 당시 온갖 욕은 다 먹었다. 그리고 이후 정상적인 표 판매를 하겠다고 밝혔다. [14] 특히 특유의 목소리, 성형, 섹스할 것 같지 않은 무성애 이미지에 집중하며 [15] 이 또한 신기록이다. [16] Bad 7번, Dangerous 5번, HIStory 3번 [17] 사비에서 'Demerol' 부분이 Morphine과 흡사하다. [18] 아마 자신이 키우는 애완동물 침팬지 버블스와 관련된 것 같다. [19] 대표적으로 추가된 국가가 루마니아, 러시아 [20] CNN에 나온 한 러시아 PD의 증언 [21] 1, 2위는 각각 U2와 롤링 스톤스 [22] 이때 Gone Too Soon은 당시 미국에서 엄청난화재였던 라이언 화이트를 추모하는 의미로 짧은 연설을 하고 불렀다. [23] 그러나 이때 오프라 윈프리가 잭슨에게 타블로이드 내용들과 연관 있는 무례하고 성의없는 질문을 하거나 도중에 대화를 중단을 하는 등의 뜻밖의 행동을 취해서 대단히 논란이 많은 토크쇼였기도 했다. [24] 펩시는 마이클 잭슨으로 인해 청량음료 시장에서 2%의 몫을 더 증가 시켰는데 이 가치가 무려 당시금액으로 1조원에 달하는 9억 4,000만 달러였다. 또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펩시가 코카콜라의 판매량을 넘어섰다. [25] 조단이 Sodium Amytal라는 기억을 조작할 수 있는 마취제를 투여받고 거짓 기억이 심어져 성추행을 진술했다는 언급이 있으나, 이는 7월 16일 조단의 최초 진술 이후와 뒤에 있는 Pellicano의 8월 4일 상황에 대한 증언을 보면 모순돼 신뢰성이 떨어진다. 그러나 챈들러 측의 마크 토비너에서 치과 치료를 위해 마취제를 사용했음을 인정했다. 마크 토비너는 치과 치료에 모르핀 등을 사용하는 이상한 의료 방법 때문에 논란이 있었는데, 조단이 이를 빼기 위해 마취를 사용했다는 것은 드문 일이기에 가능성은 약간 남아있다. [26] 이 앨범의 프로모를 위하여 마이클은 앨범 커버와 똑같은 동상을 제작하여 세계의 랜드마크에 전시하였다. [27] 당시 댄스여가수로는 마돈나와 함께 최고 주가를 달리던 여동생 자넷 잭슨의 프로듀서이다. 1986년부터 2006년까지 자넷 앨범 프로듀싱을 하며 이른바 자넷의 시대를 여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28] 여담으로 빌보드 싱글차트 3위를 기록하며 성공을 거두었다. [29] 가장 많이 팔린 더블 앨범은 핑크 플로이드 The Wall이며, 총 30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30] 마이클 잭슨의 자녀들이 전형적인 흑인의 피부가 아닌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친부 논란이 시작됐으나 잭슨은 혼혈로, 누나인 라토야 잭슨은 백인에 가까운 흰 피부이며 마이클의 친척들도 피부색이 다양하니 이 또한 교차검증 없는 전형적인 흥미 위주 루머인 것이다. 마이클은 2003년 마틴 바쉬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친부임을 밝혔다. 마이클 사후에 해명된 여러 루머들과 마찬가지로 친부 논란 또한 프린스에게서도 백반증이 나타난 것이 포착되고 패리스도 점차 머리와 피부색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면서 가라앉기 시작했다. 사실 친부 논란을 제기하는 쪽 자체가 아무런 의학적 근거가 없는 것이며 흑인 혼혈과 백인 사이의 혼혈에선 백인과 가까운 외모의 자녀가 출생하는 것이 드문 일도 아니다. 당시의 이러한 지나친 사생활에 대한 타블로이드식 가십들은 사실 후반부로 갈수록 사회비판적인 내용의 음악 활동을 했던 마이클의 메시지에 대한 주목도를 떨어뜨리기 위한 당시 제도권의 반발이 들어간 미디어의 주동이 작용한 것이란 해석도 있다. [31] 당시 피날레 무대에서는 H.O.T.가 공연했다. [32] 이는 IFPI의 추산으로 2001년에 판매된 앨범 중 9위에 해당하는 순위이다. 또한 2009년 사망 당시 마이클 잭슨의 음반 판매량이 급작스럽게 증가했으므로 invincible의 음반 판매량은 더 올라갔을 것으로 추산된다. [33] 이 때도 앙드레 김의 옷을 입고 갔다. [34] 1983년부터 2006년까지 산타 바바라 카운티 법원의 검사를 지냈다. 1993년과 2003년 두 차례의 재판건의 검사를 맡았으며 마이클 잭슨에게 인종차별적인 언행을 하고 신체수색을 하는 등 비인권적인 태도를 보여 현재까지도 큰 비판을 받고 있다. 마이클 잭슨이 자신의 정규앨범에 그의 행적을 비판하는 'D.S.' 라는 노래까지 수록했을 정도. 마이클의 재판이 끝난 이듬해인 2006년 은퇴했고 8년 뒤인 2014년 작고했다. [35] 참고로 그의 뒤를 부축해주는 노년의 흑인남성은 마이클의 아버지 조지프 잭슨이며 오른쪽의 여성은 누나 라토야 잭슨 그 뒤에 절뚝거리는 노년여성은 그의 어머니 캐서린 잭슨이다 [36] 훗날 FBI 파일에서 드러났듯이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고,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뒤죽박죽 뒤섞인 증언과 위증을 일삼았기 때문에 무죄 판결을 받을 수 있었다. [37] 여담으로 2위는 당시 니플게이트 사건으로 미국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여동생 자넷 잭슨이었다. [38] 해당 시상식에서 마이클은 기네스로부터 역사상 가장 성공한 연예인이라는 기록을 인정받았고 상패를 수여받았다. [39] 또한 이 시기부터는 선글라스나 안경을 쓰고 나오는 경우도 잦아졌다. [40] 네버랜드는 2005년을 마지막으로 마이클이 이미 떠났었기 때문에 거주문제 관련에서는 문제가 없었다. [41] 이때 입은 옷은 앙드레 김이 보내준 것으로, 원래 그를 전속 디자이너로 원했으나 대한민국을 대표한다는 소신이 있기에 거부한 대신에 매년 맞춤복을 보냈다고 한다. [42] 이는 잭슨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진행된 계약이며, 아직까지도 그 내막에 대해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43] 마이클이 40대였던 '데뷔 30주년 기념 콘서트' 1차 공연 당시에도 Billie Jean 문워킹 퍼포먼스를 완벽하게 보여주지는 못했다. 2차 공연 때는 전성기 시절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성공했지만, 1차 공연 때 실패했던 것을 보면 그때부터 슬슬 나이 때문에 몸이 따라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44] 대문짝만하게 'DEAD'가 적혀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마이클 잭슨의 미국 내에서의 위상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다. [45] 참고로 그의 사망일은 한국에서 2번째 공연을 가진 지 정확히 10년이 되던 날이었다. [46] 초반에는 마이클 잭슨이 병원으로 이송 중이라고 보도하였으나 중간에 코마 상태에 빠졌다고 보도하고 얼마 못 가 사망했다는 보도를 하였다. [47] 연예인들이 프로포폴 불법 투약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아 오해가 많은데, 저건 의사의 제대로 된 처방 없이 불법적으로 투약해서 문제가 되는 것이지 프로포폴은 정상적인 약물이다. 애초에 진통제가 아닌 마취제이기 때문에 모르핀 같은 마약성 약물과도 전혀 다르며, 잭슨이 사용한 두 약물 모두 마약성이 아니다. [48] 두 약물 모두 GABA 수용체에 작용한다. [49] 애초에 의사도 아닌 마이클 잭슨이 의약품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달라는 대로 처방을 하며, 환자가 해달라는대로 처방전만 써준다면 주치의가 왜 필요로 하겠는가? 환자가 "이거 써보니까 좋던데 이걸로 해줘요"라고 해도 제대로 처방하는 것이 의사로서 당연한 의무이며, '마이클 잭슨이 해달라고 해서 해줬다'는 주장도 따지고보면 자기가 의사로서 자신의 의무를 저버린 돌팔이라고 인정하는 거나 다름없다.(물론 머레이 입장에선 살인자보단 돌팔이가 나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긴 하다) 심지어 그 처방이 위험하기까지 하다면 더더욱 그렇다. [50] 수감 2년만인 2013년에 모범수로 석방되었다. 이 사건으로 텍사스에서 의료면허가 박탈, 캘리포니아, 네바다에서 면허는 정지되었으며, 현재도 환자를 보긴 하지만 무료 자문만 해주고 있다고 본인은 주장한다. [51] 사실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빚이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반인들의 인식과 달리 기존 사업에서 생긴 이득만 갖고 재투자해 사업 확장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으며, 특히 대규모 사업을 하는 이들은 더더욱 그러하다. 농담삼아 "빌 게이츠 대출 받는 소리"라고 하는데, 실제로 대기업들은 사업 관련 대출을 받는다. 다만 압도적인 자산 수준과 사업 규모 때문에 일반인들보다 훨씬 낮은 금리와 훨씬 큰 규모로 받을 뿐이다. 잭슨은 단순한 연예인일 뿐 아니라 저작권과 음악 관련 사업에 투자를 하는 사업가이기도 했기에 그 과정에서 빚이 있는 건 지극히 당연하며, (본인이 급사할 줄 몰랐으니 당연히) 미리 청산하지 않아 남은 빚이 있었을 뿐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52] 타임지는 9.11테러 같은 일이 아니면 1면에다가 대문짝만한 사진을 올리지 않는다. [53] Bad Tour와 Dangerous Tour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54] 인터넷 실시간 스트리밍은 반영이 안 된 수치다. 1위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2위는 다이애나 비. 그러나 레이건 시절에는 인터넷 중계가 활발하지 않았고 다이애나 시절에는 인터넷 중계가 없어서 1대1 비교는 무리라고 한다. 추모식 당일 미국 언론들의 인터넷판에 인터넷 생중계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서 상당한 트래픽이 몰렸다고 한다. [55] 보도기사가 있긴 하지만 20억이라는 수치를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확실한 증빙자료가 없기 때문에 많이 과장됐을 가능성이 크다. [56] 사망 1달쯤 전인 5월 10일 녹음된 음성이다. [57] 이는 마이클 잭슨이 사망한 지 얼마 안 됐었던 2010년까지만 해당하며 현재는 언론에서도 과다처방으로 사망했다고 보도한다. [58] 래리 킹도 나왔다. [59] 다만 이번 신보는 제이슨 말라카이라는 목소리가 비슷한 짝퉁 마이클 잭슨을 가지고 대리 녹음을 했다니, 가족들은 단 한 번도 못 들어본 노래라니 등 여러 가지 증언들이 겹쳐서 잡음이 엄청나게 끼어있다. [60] 다만 대부분의 팬들은 공연 영상을 보고 마이클이 아니다, 춤을 못춘다 등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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