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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라게놀드(Ragenold)[1] |
출생 | 미상 |
사망 |
930년 브르타뉴 왕국 낭트 |
재위 | 남스보르크 공작 |
919년 ~ 93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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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낭트를 장악하고 브르타뉴 일대를 휩쓴 노르드인.2. 행적
노르웨이에서 몰려온 바이킹 무리의 지도자로, 919년 루아르 강 유역을 습격한 뒤 낭트 백국을 장악했다. 당시 낭트는 앙주 백작과 낭트 백작을 칭한 풀크 1세가 다스렸으나, 그는 낭트가 공략당할 때 감히 바이킹을 물리칠 엄두를 못 내고 가만히 있었다. 921년 파리 백작 로베르 1세가 군대를 일으켜 낭트를 포위해 5개월간 공성전을 벌인 끝에, 라게놀드로부터 인질을 넘겨받고 기독교로 개종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대신 낭트를 지배하는 걸 허용하기로 했다. 이후 라게놀드는 낭트와 그 주변 지역의 공작이 되었는데, 당대 연대기에는 '남스보르크 공국'(Namsborg)으로 명시했다.922년 서프랑크 왕국의 국왕 샤를 3세를 전복하는 데 관여했으며, 923년 롤로와 함께 우아즈 강 유역을 휩쓸며 각지를 약탈했다. 새로운 서프랑크 국왕 라울은 롤로와 협상한 끝에, 롤로가 루앙 외에도 에모아, 베생 등지를 소유하는 걸 허용하는 대가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러자 라게놀드는 자기도 영지를 받기 위해 공세를 이어가 루아르 강과 센 강 사이의 영지를 파괴했다.이에 아키텐 공작 기욤 2세, 파리 백작 겸 오를레앙 백작이며 네우스트리아 총독 위그가 연합군을 결성해 그를 저지하려 들었고, 라게놀드는 일단 브르타뉴로 철수했다.
923년, 라게놀드는 부르고뉴로 침입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이에 상스의 가르니에 백작, 디종 백작 마나세 2세, 랑 그르의 조슬랭 주교, 트루아의 앙세기즈 주교가 연합군을 결성한 뒤 924년 12월 6일 칼라우스 몽스[2]에서 라게놀드에게 심각한 패배를 안겼다. 927년, 라울 왕은 롤로의 뒤를 이은 기욤 1세와 평화 협약을 맺은 뒤 낭트를 상대로 네우스트리아 총독 위그, 베르만두아 백작 에르베르트 2세와 함께 공세를 벌였다. 라게놀드는 5주간 포위된 끝에 주권을 인정받는 대가로 서프랑크 왕국의 봉신이 되는 걸 받아들였다.
<성 베네딕토의 기적>(Miracles de St Benoit)에 따르면, 라게놀드는 루아르의 성 베네딕토 수도원을 약탈하려 했다가 성인으로부터 수도원을 당장 떠나라는 명령을 받고 두려움을 느껴 떠난 뒤 곧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질병에 걸려서 930년경에 낭트에서 사망했을 것으로 보인다. 인콘이 뒤를 이어 그가 세운 바이킹 공국의 수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