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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로(Rollo)[1]의 동상 |
1. 개요
고대 노르드어 | Hrólfr (흐롤프르) |
노르만어 | Rou (루) |
프랑스어 | Rollon (롤롱) |
9세기 ~ 10세기에 활동한 바이킹 출신의 모험가이자 약탈자, 정복자이다. 노르망디 공국의 시조이며 프랑스 센 강 어귀에 정착하여 프랑스화한 노르드계 노르만족의 시조이기도 하다. 또한 노르만 정복으로 유명한 기욤 2세( 윌리엄 1세)의 현조(5대조) 할아버지이기도 하기 때문에 멀리 보면 현대 영국 왕실의 시조이기도 하다.[2]
2. 생애
2.1. 약탈자의 삶
부모는 확실하지 않으나 스칸디나비아 반도 서부에서 로근발드 에위스테인손(Rǫgnvald Eysteinsson)의 아들[3]로 태어났다는 설이 있다. 유년 시절은 알려진 바 없으나 노르웨이의 국왕 미발왕 하랄 1세의 아들을 살해한 뒤 도주하여[4] 고향을 떠나 북해 연안 해안가를 무대로 약탈을 일삼으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이후 네우스트리아[5]를 대대적으로 약탈했는데 885년 파리 약탈을 감행했고,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당시 서프랑크의 제5대 왕이었던 비만왕 카를 3세[6]는 상당한 금을 주어 물러나도록 했지만 흐롤프는 금만 받아 챙긴 후 파리에서 물러나 다른 지역을 약탈했다. 이 파리 약탈로 인해 신망을 잃은 카를 3세는 조카인 아르눌프를 중심으로 한 귀족들의 쿠데타로 축출되었고, 방어전에서 공적이 컸던 로베르 가문 출신의 파리 백작 외드가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서프랑크의 제6대 왕이 되었다. 훗날 이 사건은 카롤링거 왕조의 붕괴를 야기하는 계기가 되었다.[7]890년에는 바이외에 상륙하여 카롤루스 왕실의 방계 후손이었던 바이외 백작 피핀 2세를 살해하고, 그의 딸인 포파를 납치해 부인으로 삼았다. 이후 흐롤프는 기수를 돌려 서부의 브르타뉴를 침략했으나 브르타뉴 대공 알랭에게 크게 패배했다. 891년에는 리지외를 약탈했고, 892년에는 다시 한번 파리를 공략했으나 실패했다. 898년에는 센 강 하구의 루앙을 점령하고, 무리들과 함께 정착했다. 911년 샤르트르를 습격했는데, 당시 권신이었던 외드의 동생 로베르에게 대패했다. 한편 대바이킹 전쟁의 영웅이었던 로베르와 권력 투쟁을 벌이던 단순왕 샤를 3세는 흐롤프를 회유하기로 마음먹었다.
2.2. 생클레르쉬레프트 조약과 프랑스 북부 정착
기독교식 세례를 받는 흐롤프(롤로). |
911년 7월 20일, 샤를 3세와 흐롤프는 생클레르쉬레프트에서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샤를 3세는 흐롤프와 그의 무리에게 점령된 느스트리(네우스트리아)의 일부인 센 강 하구 양편을 양도하고, 루앙 백작으로 분봉하며 샤를 3세의 서녀인 기셀라를 흐롤프의 부인으로 내주는 대신, 흐롤프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장인인 샤를 3세를 주군으로 받들며 다른 약탈자로부터 방어한다는 조건이었다.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흐롤프는 로베르라는 세례명을 받았으며, '흐롤프'였던 본명은 프랑스어로 불리면서 롤로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롤로는 처음에는 약속을 지켰으며 몇 차례 다른 약탈자를 물리치기도 했다. 하지만 장인인 샤를 3세가 로베르 1세와 느스트리 귀족들의 쿠데타에 의해 폐위되자 다시 파리를 습격하고 다른 여러 곳을 약탈했다.
한편 롤로가 센 강 하구에 자리잡자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와 프랑스 북부에 정착했다. 후에 이 지역을 북부인의 땅이란 뜻에서 노르망디(Normandie)로 부르게 되었다. 이들은 거칠고 무지몽매했으나 프랑크 왕국의 언어와 풍습, 종교를 받아들이고 약탈을 자제했다. 이 프랑스어를 쓰고 가톨릭을 믿는 금발벽안의 거인들을 노르만족(Normands)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윽고 923년 수아송 전투에서 로베르 가문의 로베르 1세가 결국 단순왕 샤를 3세에게 암살당하면서 왕위쟁탈전이 샤를 3세의 승리로 끝나는 듯 했으나 로베르 1세의 아들인 대 위그가 반격하여 샤를 3세의 군대를 격파했다. 하지만 샤를 3세를 지지했던 롤로는 약탈을 중지했다. 그러나 923년 로베르 1세의 사위 라울과 베르망두아 백작 에르베르(헤르베르트) 2세에 의해 샤를 3세가 포로로 잡혀 감금당하자 이를 구실로 다시 서프랑크 왕국의 여러 곳을 침공하여, 약탈했다. 롤로는 노르망디 중부를 빼앗고, 925년에는 플랑드르까지 진출하여 일부를 할양받았다. 933년에는 코탕탱 반도까지 확장하여 오늘날 노르망디 지방의 영역 대부분을 차지했다.
2.3. 죽음과 사후
루앙 대성당 롤로의 석관 |
롤로와 그 후계에 의해 완성된 노르망디 공국의 강역 |
3. 기타
부인들을 얻은 경위와 부인들의 혈통이 좀 후덜덜한데 첫 번째 부인이었던 바이외의 포파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납치해서 얻은 부인이었다. 포파의 아버지는 바이외 백작 '베르망두아의 피핀 2세'로, 카롤루스 대제의 현손이었다.또 두 번째 부인이었던 프랑크의 기셀라는 생클레르쉬레프트 평화조약의 증표로 얻은 경우였는데, 기셀라의 부왕이었던 단순왕 샤를 3세 역시 카롤루스 대제의 현손이었다. 즉, 롤로의 자손들은 로마 제국 이후 최고로 명망있는 영웅이었던 카롤루스 대제의 후손들이었던 것이다.[8]
롤로의 직계 후계는 6대 만에 단절되었지만 혼인 관계를 통해 영국과 프랑스의 여러 귀족 가문의 선조가 되었다.
덩치가 컸던 롤로를 보고 동료 노르만인들이 걷는 자 흐롤프라고 불렀는데 그가 탈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말(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롤로는 평생 자신의 이름을 흐롤프라 했고, 그의 세례명이 로베르였기 때문에 일설에는 로베르 1세로도 부르는데, 흐롤프를 롤로 또는 로베르라 부른 것은 프랑스인들이었다고 한다.
17세기의 어떤 연극과 작품들에서는 롤로를 까다로운 성품의 인물로 묘사하기도 했다.
4. 대중문화에서
- 중세 대전략 게임 <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 등장한다. 구현 자체는 게임 발매부터 있었지만 노르망디 가문의 시조로 가계도상에만 구현되었던 것이 유료 DLC <고대의 신> 발매 후 처음 플레이 가능한 인물로 등장했는데, 이때만 해도 바이킹의 시대 시나리오에서 니달로스 족장 로근발드의 영지가 없는 가신으로 구현되어 있었다. 이름은 흐롤프 드 노르망디. 무력 20에 뛰어난 전략가, 강인함, 바이킹, 용감함 트레잇을 가지고 있는 인간흉기로 나오는데 대신 영지가 없어서 철인 모드 플레이는 불가능했다. 그랬던 것이 가장 최신 DLC이자 무료 DLC인 <철의 세기> 이후에는 나이가 20살 정도 어려지면서 전설대로 니달로스 족장 로근발드의 7살 아들로 등장하는걸로 바뀌었다. 즉, 철인 모드 플레이가 가능해진 것이다. 대신 노르망디 가문의 문장을 사용할 수 없게 된 건 아쉬운 부분이다.[9]
- < 어쌔신 크리드 발할라>에 롤로라는 이름의 청년이 등장한다. 본명은 흐롤프이며 롤로는 에스트리드 부인이 프랑크어로 지은 애칭이라고 한다. 이후 이 청년은 에스트리드의 요청으로 에이보르와 함께 그녀를 위장납치하고 프랑크 왕국으로 향하는데, 시기와 본명을 보면 이 청년이 훗날 노르망디의 시조가 되는 롤로로 보인다.
4.1. < 바이킹스>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의 동생[11]으로 각색.[12]
시즌 5 9화에서 직접 등장은 안했지만 비요른을 살려주는 조건으로 이바르에게 원군을 보낸다. 그 뒤 10화 마지막 장면에서 잠시 등장. 함대를 이끌고 자신의 몫을 찾으러 카테가트로 향하면서 파트1의 대미를 장식한다.
11화에서 자신의 몫이라는 것의 의미가 드러나는데 그것은 라게르사와 자신의 아들일 가능성이 있는 비요른을 프랑크 왕국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1]
생몰년도: 846년/854년경 ~ 933년경
[2]
노르만 왕조의 직계는 윌리엄 1세의 막내 아들이었던
헨리 1세에서 마감되었지만 헨리 1세의 외손자인
헨리 2세가
플랜태저넷 왕조를 창설하면서 이어졌고, 이후에도
몇
차례
왕조의 변화는 있었지만 모계나 방계로
윈저 왕조까지 이어졌다. 즉, 이후 수많은 영국 왕을 낳은 수많은 모후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가정하면 공식적으로 현재
찰스 3세와 그 가족들에게는 바이킹 수장이었던 흐롤프, 즉 롤로의 피가 흐른다고 볼 수 있다.
[3]
외손자라는 설도 있다.
[4]
혹은 하랄 1세의 노여움을 사 추방당했다고 한다.
[5]
느스트리. 현재 프랑스 북부 지역
[6]
카롤루스 대제의 아들인 경건왕
루도비쿠스 1세의 손자로 본디 동프랑크의 국왕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지만 일시적으로 서프랑크의 왕위를 획득했다.
[7]
외드가 서프랑크의 제6대 왕이 되면서 그의 일족은 서프랑크의 왕위를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외드는 훗날 카롤루스 가문의 단순왕
샤를 3세를 추종하는 세력에 의해 샤를 3세에게 왕위를 넘기고 죽었지만 외드의 동생인
로베르 1세가 느스트리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제8대 왕이 되었고, 로베르 1세의 손자인
위그 카페가 왕이 된 이후, 서프랑크의 왕위를 세습하여,
카페 왕조
프랑스 왕국의 기초를 다졌다.
[8]
다만 롤로 자신이 인생 전반기가 베일에 싸여진 반(半) 전설적인 인물이고, 기록은 언제나 승자의 기록이며 작성을 주도한 세력의 입맛에 맞게 쓰여진다는 점을 고려하자.
[9]
가문명은 게임 수정 도구로 이용해 바꿀 수 있지만 문장은 고유 문장이라 변경하려면 세이브 파일을 뜯어 고쳐야 된다.
[10]
롤로의 일본식 발음
[11]
<바이킹스> 공식 설정 자료집에 다음과 같이 명시됨. "Ragnar's younger brother Rollo has always lived in Ragnar's shadow." - Michael Hirst(<바이킹스> 제작 / 각본)
[12]
물론 실제로는 활동 시기가 60년 정도 차이가 나고, 본거지도
노르웨이와
스웨덴으로, 당시 기준으론 동족도 무엇도 아닌 그냥 먼 타지인들이었다.
[13]
사실 판결을 한 입법자는 라그나르의 뇌물로 롤로의 판결을 그렇게 한 것이다. 재판 이전, 라그나르는 잉글랜드에서 털어온 금화 한 냥을 비요른에게 보여주는데 비요른은 금화를 뺏은 뒤 이게 비싼거냐며 묻는다. 입법자가 롤로를 살려주는 것으로 판결을 내리자 라그나르에게 백작의 권리로 처형하라는 동료의 말에 신성한 바위에서 내려진 판결이라며 거절하곤 비요른이 물어봤던 그 금화를 손에 쥔 입법자에게 시선을 맞춘다.
[14]
결국 왕의 가신인 롤랑이 짐짝처럼 들쳐메어 침실에 배달했다.
[15]
물론 롤로와의 결혼을 무효로 돌리려고 벌인 공작이다.
[16]
바이킹의 증표
[17]
하지만 이전 시즌에서도 롤로가 지략을 구사하는 장면은 종종 나오긴 했다. 하지만 라그나르가 워낙 지략이 월등했고, 롤로는 무력이 더 돋보였기에 롤로의 지략은 크게 주목받을 일이 없었다.
[18]
비요른과의 임시 동맹에 대해 아내가 된 기슬라가 반대하며 따지자 롤로는 "나의 몸속에는 바이킹의 피가 흐르며, 번개가 칠 때 나는 토르가 망치를 휘두르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볼 때 바이킹에 대한 정체성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실제로도 역사적으로 롤로는 끝까지 바이킹 신앙을 유지했다고 한다.
[19]
예고 영상에서도 과거 비요른과 다정했던 관계까진 아니지만, 다시 같이 전쟁을 함께하며 그때의 관계가 되살아나는 듯한 서로의 정을 보여주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했다.
[20]
기슬라가 만류하는 것도 뿌리치고 참가했다 버젓이 돌아와서는 기슬라에게 욕먹으며 두들겨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