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16 17:05:58

앙굴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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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1. 개요

Angoulême / Engolesme

프랑스 서남부 누벨아키텐 주의 도시. 보르도에서 동북쪽으로 80km, 푸아티에에서 남쪽으로 80km 떨어진 평원에 위치한 도시이다. 인구 5만명의 소도시이지만 중세 앙굴렘 백작령의 중심지로서 유서깊은 도시이다. 시가지는 사랑트 강의 남쪽 언덕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낮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비잔틴/고딕 양식의 성당이 여러개 남아있다. 현대 들어서는 프랑스 앙굴렘 국제만화제가 개최되는 도시로 유명하다.

2. 역사

파일:앙굴렘 백작 문장.svg
앙굴렘 백작의 문장
로마 시대에는 작은 도시였으나 주교구가 설치되었고 서고트 왕국 시대에 성당이 지어졌다. 푸아티에 인근에서 벌어진 507년의 부이에 전투 이후인 508년에 프랑크 왕국에게 함락되었으며 부상을 입은 클로비스 1세가 머물기도 하였다. 프랑크 제국의 분열 이후, 앙굴렘은 두 차례에 걸쳐 바이킹의 침략을 받았다. 첫번째인 848년에는 도시가 함락되었으나 두번째의 침공 시에는 백작 기욤 1세의 활약으로 격퇴, 그들을 포위하고 항복시키기까지 하였다.

이 활약으로 앙굴렘 백작 가문은 방어자 (Taillefer)라는 호칭을 얻었는데 12세기 말의 상속녀 이사벨까지 이어졌다. 그녀는 본래 뤼지냥 백작인 위그 9세와 약혼한 몸이었는데 미모에 반한 잉글랜드 존 왕이 빼앗다시피 결혼해버렸다.[1] 이에 위그가 주군인[2] 프랑스의 필리프 2세에게 하소연, 12세기부터 잉글랜드 왕실이 프랑스 왕국 내에 소유하고 있던 막대한 영지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필리프는 이를 빌미로 영지 회수에 나섰다.

1205년까지 잉글랜드 왕실은 프랑스 내부의 영토를 전부 상실 (보르도 등 아키텐 해안 지역인 가스코뉴는 1249년의 파리 조약으로 수복)하고 존 왕의 인기는 급락하게 되는데, 이 거대한 사건의 시발점이 바로 앙굴렘이었던 것이다. 한편, 1217년에 존이 사망한 후 이사벨라는 1220년에 전 약혼자의 아들인 위그 10세와 결혼하였고 앙굴렘 백작위는 뤼지냥 가문에 넘어갔다. 1236년에는 푸아티에, 보르도와 함께 십자군에 의해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어 개종을 거부한 수백명이 학살되기도 하였다.

1302년에 위그 13세가 후사없이 죽자 앙굴렘 백국은 프랑스 왕령지가 되었다. 백년전쟁 기인 1360년에 잉글랜드가 150여년만에 앙굴렘을 회복하였으나 1373년에 프랑스 군이 재차 입성하였고 샤를 6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 루이가 백작이 되었다. 1498년에 발루아 왕조 본가가 단손되고 1515년에 발루아-오를레앙 가문마저 단손되자 루이의 증손자인 앙굴렘 백작 프랑수아 1세가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발루아-앙굴렘 왕조 1515 ~ 1589년)

한편, 프랑수아의 시대에는 북아메리카 식민지 개척이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프랑스 측에 고용된 피렌체 출신의 항해사 조반니 다 베라차노가 한 해안을 국왕의 출신지를 본떠서 누벨 앙굴렘으로 명명하였다. (1524년) 이 도시는 1624년에 네덜란드에게 점령되어 뉴 암스테르담으로 개명되었고 1654년, 잉글랜드에게 넘겨져 뉴욕으로 바뀌어 현재에 이른다. 앙굴렘은 종교개혁 시기에도 중요한 도시였는데, 1533년에 장 칼뱅이 도시 인근의 동굴로 피신 오기도 하였다. 그리고 1548년에는 높은 세금에 반발한 소작농들의 반란 (jacquerie des Pitauds)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위그노 전쟁 시에 앙굴렘은 서쪽의 라로셸과 함께 위그노의 도시였으나 1562년에 국왕군에 함락되었다. 1565년에는 전국 순행 중이던 샤를 9세가 도시를 지나기도 하였는데, 1568년에 앙굴렘은 재차 신교도의 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1569년에 재차 가톨릭 군대가 도시에 입성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앙굴렘은 심하게 파괴되었고 18세기 후반까지 작은 마을로서 명맥을 유지해야 했다.


[1]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혼인 동맹을 위한 목적일 가능성도 컸다. 그러고 나서도 적당히 보상금을 줬으면 넘어갈 수도 있었을 지 모르지만 존은 그마저도 무시해 버렸다. [2] 1차 주군은 존이었지만 존도 프랑스 내의 영지는 프랑스 왕국의 봉신으로 다스리는 것이었으므로 최종 주군은 프랑스 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