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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포에니 전쟁(Secundum Bellum Punicum)은 기원전 218년에 발발하여 기원전 202년까지 벌어진 로마 공화국과 카르타고 공화국 사이의 전쟁이다.2. 배경
기원전 237년, 카르타고의 장군 하밀카르 바르카는 로마가 갈리아에서 전쟁을 하는 동안에 히스파니아로 건너가 원주민을 복속시키고, 카르타고 노바[1]라는 도시를 남쪽 해안에 만들어 강력한 육군을 양성했다. 하밀카르는 뛰어난 장군답게 8년에 걸친 정복 끝에 히스파니아 반도 대부분을 식민지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하밀카르는 기원전 228년에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했고, 그 후임을 맡은 하스드루발[2]은 7년간 통치하면서 히스파니아 내에서의 카르타고 세력을 점점 넓혀나갔는데 이것을 경계한 로마는 하스드루발과 접촉하여 에브로 강을 경계로 더이상 세력을 뻗지 않도록 조약을 맺었다. 이후 하스드루발은 그의 갈리아인 노예와 사소한 일로 다투다가 암살당했고, 그의 뒤를 27세의 젊은이인 한니발 바르카가 이어받았다. 하밀카르의 장남인 한니발은 이미 아버지와 매형을 따라 여러 전투에 종군한 경험이 있었으며,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병사들 사이에서의 한니발에 대한 지지는 대단했다.3. 기원전 2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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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발발 무렵 지중해 형세[3] |
3.1. 개전 - 사군툼 공방전
기원전 219년 한니발 바르카는 2년 동안 히스파니아 내부의 반란 세력을 진압한 뒤 에브로 강 이남의 사군툼이라는 도시를 공격했다.한니발은 우선 사군툼과 분쟁이 있었던 투르데타니족을 지원했고, 그들과의 전쟁을 핑계로 사군툼을 공격하여 겹겹이 포위했다.
사군툼인들은 로마인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나 당시 로마군은 이탈리아 북부에서 갈리아족(켈트족)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었으며 또한 정복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일리리아, 사르데냐 섬, 코르시카 섬 등지의 전후 처리를 진행중이었으므로 구원할 여력이 없었다.[5] 이 사건에 대해 토의를 붙인 원로원은 우선 사절을 한니발과 카르타고에 보내 그들의 의도를 파악한 뒤 전쟁을 할 것인지 결정하기로 하고, 원로원 의원으로 구성된 사절단을 한니발에게 보냈다. 그러나 한니발은 로마 사절단을 전투가 급하다하여 만나주지도 않았고[6] 이에 로마 사절단은 카르타고 본국까지 건너가 항의했다.
이때 사절을 만난 카르타고 원로원은 사군툼인들이 전쟁을 일으킨 것이지, 한니발이 일으킨 것이 아니며, 사군툼과 카르타고 모두 로마의 동맹국인데 왜 사군툼을 우선하느냐라고 말하며 그들을 돌려 보냈다.
이렇게 로마가 외교 교섭을 하는 동안, 사군툼의 상황은 점점 절망적으로 흘러갔다. 사군툼인의 저항은 한니발에게 심한 상처를 입히는 일까지 일으킬 정도로 처절했지만, 한니발이 동원한 물적, 인적 자원은 사군툼인을 웃돌았기 때문에 그들은 조금씩 거점을 빼앗겨갔다. 그동안 히스파니아의 부족이 반란을 일으켜 카르타고군의 장교를 억류하는 일이 생기자 한니발이 그들을 진압하러 잠시 진영을 떠난 일이 있었다. 사군툼인들은 희망을 품었으나 임시로 한니발을 대신한 마하르발은 한니발의 공백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공성전을 잘 지휘했으며 최종적으로는 사군툼의 중앙 성채를 제외한 모든 거점을 빼앗았다. 결국 어느 날 밤 사군툼 시민 한 명과 히스파니아 원주민 한 명으로 이루어진 두 명의 사군툼 측 교섭단이 몰래 한니발 진영으로 가서 강화 제의를 시도했다. 한니발의 강화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모든 시민은 그들이 가진 모든 재산을 성 안에 두고, 옷 한 벌씩만 들고 나온다. 이후 한니발이 지정한 지역으로 이주해 새로운 마을을 건설하
이를 들은 사군툼 시민은 이를 사군툼인들에게 알려주면 그들에게 맞아 죽을 것으로 생각해 그대로 한니발 진영에 남았고, 히스파니아 부족 사람만 사군툼으로 돌아가 강화조건을 알려주었다. 이에 사군툼 시민들은 그들이 가진 전 재산을 성채 한가운데에 있는 공터에 쌓아놓고 불을 질렀으며, 많은 이가 그 불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런 소동을 틈타 한니발은 사군툼을 공격했으며 이로 인해 사군툼은 함락되고, 모든 시민들은 살육당하거나 노예로 전락했다(
사군툼 공방전).사군툼의 점령으로 한니발은 상당한 전리품을 손에 넣었고, 이를 통해 봉급과 부채를 모두 갚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남은 자원으로 새로운 전쟁을 계획했는데 이는 로마와의 전쟁이었다.[7]
사군툼의 멸망 소식이 로마 원로원에 전해지자 원로원은 즉시 6개 군단병(로마 시민 보병 2만 4천, 기병 2400명)과 동맹시 보병 4만명, 동맹시 기병 4400명을 편성했고, 카르타고에게 두 번째 사절을 보냈다. 해당 사절단은 카르타고에게 선전포고의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는데, 따라서 사군툼 문제를 항의하러 한니발과 카르타고를 잇따라 방문한 첫 번째 사절보다 더 중량감이 있는 전직 집정관이 두 명이나 포함된 원로원 의원으로 구성되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이후 파비우스 전략을 주창한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또한 이 사절단에 리더로서 포함되었다고 했다.[8]
이들을 만난 카르타고 원로원과 로마 사절단은 언쟁을 벌였다. 로마 사절단은 과거 하스드루발과 맺은 조약에 따라 로마와 사군툼과의 동맹을 적법하게 맺었는데 한니발이 불법적으로 공격했으니 조약 위반이라고 지적했으며, 이에 대해 카르타고 원로원은 과거 하스드루발이 로마와 사군툼과의 동맹을 인정한 일이 카르타고 본국의 의견을 거치지 않은 점 등 조약의 위법성을 집중적으로 추궁했다. 카르타고 본국이 인정하는 조약은 카르타고 본국의 인가를 거친, 즉 로마가 에브로 강을 사이로 경계를 그어놓은 조약뿐이고, 따라서 한니발이 에브로 강 남쪽의 사군툼을 공격해 점령한 사건은 합법이라는 주장이었다. 이를 들은 로마 사절단은 격분하여 카르타고 원로원에게 로마와의 전쟁이냐, 평화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엄포를 놓았고 카르타고 원로원은 전쟁을 하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고 답변했다. 이를 들은 로마 사절단은 카르타고에 선전포고를 했다.
4. 기원전 218년
4.1. 스페인을 떠나는 한니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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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의 진군로. 큰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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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에 병력을 분산시킨 한니발은 보병 3만 8천 명, 기병 8천 명, 전투 코끼리 37마리를 데리고 히스파니아를 떠나 피레네 산맥으로 출발했다.
한편 사군툼 함락 이후 카르타고 본국은 함대를 동원하여 시칠리아 주변의 섬들에 대한 공격을 가했다. 사실 카르타고 본국은 일반적인 인식과 다르게, 매우 적극적으로 전쟁에 임했다. 오히려 전쟁 직전 로마 사절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할 테면 해봐라라고 강경하게 나오는 등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를 보였고, 칸나이 전투 직후에는 한니발의 원조 요청을 받자 즉시 대규모 지원군을 편성했다. 이를 위해 로마의 히스파니아와 지중해 방어거점들을 돌파하고자 하였고 히스파니아에도 지속적으로 원병을 파견하고 사르데냐 섬과 시칠리아 섬에도 직접 원정군을 보냈다. 후술하겠지만 베티스 고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히스파니아에서 로마를 몰아내는가 싶었지만 왠 24살짜리 로마 장군에게 모조리 빼앗겼다. 지중해 전선의 경우 기원전 218년 여름, 시칠리아 섬의 릴리바이움(현재의 마르살라) 근해에서 로마 해군과 카르타고 해군이 격돌했는데, 전투는 로마의 승리로 끝났고 카르타고 함대는 퇴각했다.( 릴리바이움 해전) 이 전투는 에브로 강 해전과 더불어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몇 안 되는 대규모 해전 사례이다.
그동안 한니발은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는 과정에서 피레네 산맥의 원주민들을 진압했는데, 큰 피해를 입었지만 제압에 성공했다. 그 후 병력 1만 1천을 따로 떼어 점령한 피레네 지역에 주둔시킨 후, 갈리아 지방(현 프랑스 남부)에 보병 5만, 기병 9천 명과 함께 진입했다. 이 과정에서 한니발은 보병 3만 8천 명, 기병 7천 명, 전투 코끼리 37마리로 론 강 도하를 저지하려는 원주민 갈리아인들과 론 강 유역에서 맞닥트렸다. 여기서 한니발을 저지하려는 갈리아인의 군대 규모는 보병 5만 명, 기병 9천 명으로 전해진다. 한니발은 휘하 장교인 한노에게 군대 일부를 떼어내 론 강의 상류로 이동시켜 밤중에 도하시켰고, 이들이 지핀 연기를 통해 작전이 성공했음을 확인한 한니발은 강을 건너 총공격을 시도했다. 이와 동시에 한니발의 별동대가 갈리아군의 배후에 등장해 이들의 진영을 짓밟았고, 이를 본 갈리아인들은 혼란에 빠진 뒤 모두 퇴각해 한니발은 무사히 론 강을 건널 수 있게 되었다.( 론 강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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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 강 전투의 상황. 큰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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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 강 전투 전개도.[9] 큰 그림 |
한편 사군툼에서의 참변에 분노한 로마 시민들은 집정관 푸블리우스 스키피오와 그의 형 그나이우스 스키피오에게 군사를 주어 히스파니아 원정을 위임했다. 또한, 로마 원로원은 사절단을 히스파니아의 부족들에게 보내 히스파니아 원정에 필요한 동맹과 지원을 요청했는데, 이들은 로마인들이 사군툼이 멸망하는 것을 구경만 했음을 지적한 뒤 거부했다. 이들은 갈리아에 가서 갈리아 부족들에게 한니발의 갈리아 진군을 막아달라고 요청했으나 부족들은
로마가 그들에게 무엇을 해준 것이 있기에 이런 요청을 함부로 하는가.
라고 비웃으며 내쫒았다.이때 한니발이 에브로 강을 건넌 시점에서 이탈리아 북부의 갈리아인들이 로마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북이탈리아의 보이족은 무티나라는 도시를 포위 공격하고 로마 사절들을 억류하는 일을 감행했으며, 이런 상황에 대해 로마는 진압을 위해 법무관을 파견하여 싸워야 했었다.
한편 스키피오가 이끄는 3개 로마 군단, 동맹시 군단 1만 4천 명은 바다를 타고 동맹 도시인 마실리아(현 마르세유)에 상륙했는데, 본래는 한니발이 론 강을 건너기 전 막을 생각이었다. 스키피오는 로마 기병 300명에게 한니발의 위치를 파악하라는 명령을 내려 보냈고, 론 강을 북상한 이들은 한니발이 정찰병으로서 보낸 누마디아 기병 500명과 우연히 조우하여 교전했다. 이로써 스키피오와 한니발 모두 서로가 도착했음을 파악하였다.
4.2. 알프스를 넘는 한니발
로마인의 도착을 알게 된 한니발은 로마인과 그 지역에서 전투를 벌이느냐, 아니면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반도로 진입하느냐를 결정해야 했는데, 마침 이탈리아 북부의 갈리아 부족들이 보낸 사자를 만났다. 여기서 한니발은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에서 싸우면 그 지역의 갈리아인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고, 따라서 알프스를 넘기로 결정했다.이때, 한니발은 알프스를 보고 공포에 질린 병사들에게
이 사자가 하늘을 날아서 알프스를 넘었는가? 이 사자처럼 우리도 충분히 알프스를 넘을 수 있다.
라는 연설을 하여 병사들에게 용기를 준 뒤, 군대와 함께 알프스를 넘는 전대미문의 일을 감행했다.집정관 푸블리우스 스키피오는 한니발이 로마인과 싸우기 위해 마실리아 지역으로 남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한니발의 의도가 알프스를 넘는 것이라 예상하고, 이에 휘하 군대의 상당수를 형 그나이우스에게 위임하여 카르타고령 히스파니아의 수도인 카르타고 노바를 침공하게 한 다음 자신은 남은 군대와 함께 바다를 건너 북이탈리아로 돌아왔다.
이렇게 군대를 넘겨받은 그나이우스 스키피오는 보병 2만 명과 기병 2천 명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히스파니아로 향했다. 이 군대는 에브로 강 북쪽의 키사라는 곳에서 카르타고 방위군[10]과 조우했는데 이들은 한니발이 이탈리아로 가는 도중 에브로 강 북부에 남겨놓고 간 부대였다. 그런데 이 부대의 카르타고인 지휘관인 한노[11]는 거의 2배에 이르는 로마군을 상대로 기습도 아닌, 정면으로 싸움을 거는 무모한 짓을 저질렀다( 키사 전투). 숫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열세인 카르타고군은 이내 패퇴했고, 한노와 합류하러 올라오던 하스드루발이 그대로 철수함으로써 로마군은 에브로 강 북부에서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 실제로 이 전투 이후 히스파니아의 카르타고 세력은 두 번 다시 에브로 강 북쪽으로 진출하지 못했다.
한니발이 알프스를 오를 때 상당수의 부족군을 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알프스 산 중에 사는 부족과 두 번의 전투를 치러야 했다. 첫 번째 전투에서 한 부족은 언덕에 포진하여 카르타고군을 공격했는데 한니발은 그들을 무시하고 지나치는 척하면서 밤중에 그 부족들이 점거한 언덕을 점령해 이들을 격퇴했으며, 두 번째 부족은 한니발과의 우호를 맹세하며 한니발을 초대하는 척을 한 뒤 매복 공격을 시도했으나 미리 의심하고 있었던 한니발의 신중한 대처로 간신히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수백 명을 동원해 좁은 길을 막고, 산을 오르는 카르타고군에게 바위와 통나무를 굴려댄 적도 있었으며, 이 공격에 의해 카르타고는 많은 피해를 입었다. 여기에 추가적으로 갈리아인들의 공격에 놀란 전투 코끼리들이 날뛰면서 수많은 병사들이 밟혀 죽었다. 알프스의 산맥은 절벽투성이의 매우 험준한 지형이었던 데다가 산을 넘는 시기가 가을이 끝나갈 무렵이라 알프스는 이미 겨울이나 다름없었으므로 그 추위로 인해 카르타고군은 로마 영역에 진입하기도 전에 엄청난 고생을 해야만 했다. 더구나 산맥을 오를 때는 코끼리를 밧줄로 묶어 끌어올렸다고 하며, 내려올 때는 수많은 병사들이 절벽에서 떨어졌다고 하니 당시 병사들의 고통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한니발은 알프스 정상에서 아래에 펼쳐진 이탈리아 평원을 두고 격려하는 연설을 했는데, 알프스를 내려오는 일은 올라오는 행군보다 더 어려웠다. 카르타고군은 눈과 빙판을 가로지르기 위해 길을 건설하면서 내려왔는데 이때 바위를 식초로 쪼갠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이런 노력 끝에 한니발 바르카는 마침내 16일 만에 알프스 산맥을 넘는 데 성공했다. 알프스를 넘었을 때 카르타고군의 병력수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알프스를 넘은 뒤 남은 병력은 보병 2만 명, 기병은 6천 명 남짓이라 추산한다. 보병 3만 8천 명, 기병 8천 명을 데리고 히스파니아를 떠났으니, 로마군과 싸우기도 전에 보병의 절반 가량이 사라진 것이었다. 한니발이 데려온 전투 코끼리 37마리는 알프스를 넘는 도중에 다 죽고 1마리만 살아남았다는 얘기가 널리 퍼져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상당수의 손실이 있긴 했지만, 트레비아 전투 당시 살아남은 약간의 코끼리가 전투에 참여했다. 그러나 소수의 코끼리는 전투에서 큰 도움이 안 되었으며 그나마 이 전투때 도망가거나 죽는 바람에 단 1마리만 살아남았다. 이 남은 코끼리 1마리는 그 뒤 한니발이 타고 다녔다.
4.3. 트레비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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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비아 전투의 전개도.[12] 큰 그림 |
북이탈리아로 입성한 한니발은, 그 지역의 갈리아족이 로마에게 적대하는 부족들과 그렇지 않은 부족들로 나누어진 것을 확인했다. 로마로 진군하기 전에 배후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던 한니발은 일단 알프스를 가로지른 원정군에게 충분한 휴식을 준 후, 이탈리아 북부의 갈리아 각 부족의 도시에 동맹을 요청했다. 그 중 투리니 지방의 갈리아족은 동맹을 거부했는데, 한니발은 투리니를 점령하여 그 곳의 갈리아족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때 한니발이 이끈 카르타고군의 규모는 최소 보병 2만 8천 명, 기병 6천 명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한니발이 북이탈리아의 투리니에서 학살을 자행하고 있었을 때, 북이탈리아로 돌아와 있었던 푸블리우스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이탈리아 공세에 대비하여 병사를 모으고 있었다. 투리니 학살의 보고를 접한 푸블리우스 스키피오는 즉시 북상하여 학살을 자행하던 한니발의 원정군과 티키누스 지역에서 맞닥뜨려 소규모의 전투를 벌였다.( 티키누스 전투) 이 전투에서 스키피오는 부상을 입었는데, 이는 직후의 트레비아 전투에서 로마군이 전멸에 가까운 궤멸적인 피해를 입는 데 영향을 미쳤다.
한편 한니발과 스키피오가 이탈리아에 있다는 소식에 놀란 로마 원로원은 북아프리카 침공을 준비하며 시칠리아 섬에 주둔하고 있었던 집정관 셈프로니우스에게 신속한 북상을 요청했다.[13]
셈프로니우스가 북이탈리아에 도착하고 스키피오의 병력과 합류한 후, 한니발은 두 집정관이 이끄는 로마군과 트레비아 강 근처에서 대결하게 되었다. 로마 측에서는 두 집정관이 취하는 전술적인 방향이 서로 달랐음에도 불구하고,[14] 셈프로니우스가 일련의 이유로 이전의 전투에서 심각하게 부상당한 스키피오의 군권까지 넘겨받은 후, 숫적으로 우세한 병련 4만 명으로 공세에 들어갔다.( 트레비아 전투) 결과적으로 셈프로니우스는 한니발의 유인전술에 말려들어 대패했고, 전멸의 위기를 맞았지만 일부의 보병들이 중앙 돌파에 성공하면서 기사회생했다. 이 전투의 결과로 로마군은 병력 4만 중 2만 명을 잃는 큰 손실을 입었고, 카르타고군은 로마로부터 독립하길 바라는 갈리아족이 참가하여병력이 6만 명에 다다르게 되었다.
5. 기원전 217년
5.1. 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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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지도.[15] 큰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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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트루리아 지역.[16] 큰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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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노 강의 대략적인 위치.[17] |
한니발이 이렇게 무리한 진군을 강행한 것은 예상된 장소에서 예상된 전투를 치르는 것을 원치 않았던 이유였을 것이다. 상대가 무능하지 않다면 이렇게 뜻밖의 요소(element of surprise)가 없는 곳에서 싸울 때 상대의 실수를 이용하여 대승을 거두는 방식의 작전은 성공하기 훨씬 힘들다.[20] 전투의 경과를 예상하여 분석하고, 이해하도록 교육을 받은 로마 장군들을 상대로, 보급이 무원한 외지에서 소모전의 형식으로 그것도 예상된 장소에서 예상된 전략과 전술로 전쟁이 진행된다면 아무리 날고 기는 한니발이라도 승리를 장담하기는 힘들었다. 한니발의 이런 희생을 무릎쓴 과감한 기동은 로마 장군들이 미리 작전을 준비하는 것을 불허하는 결과를 낳았고, 결국 이탈리아 반도에서 벌어진 일련의 중요한 전투들에서 한니발은 모두 승리했다.
어찌되었건 이탈리아 중부에 전투없이 진입한 한니발은 도시를 약탈하고 농지를 불태우면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한편 이탈리아 중부가 뚫렸다는 것을 파악한 플라미니우스는 로마 가까이에서 다른 장군들과 합류하여 수비전선을 펴기 위해 즉시 남진했지만 진군 속도는 한니발이 더 빨랐고, 곧 추월당하게 되었다. 플라미니우스는 한니발에 의한 약탈을 최소화하기 위해 속도를 올려 뒤따라오는 한니발에 맞설 준비를 했고, 세르빌리우스의 군단과 곧 접선할 예정이었다. 그렇지만 한니발은 그런 상황을 원치 않았고, 바로 앞에 있는 플라미니우스를 먼저 해치울 작전을 세웠다.
플라미니우스를 끌어내기 위해서 한니발은 플라미니우스의 바로 눈앞에서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던 도시를 약탈했다. 또한 이 약탈은 로마가 자신의 동맹국을 지켜줄 힘이 없다는 것을[21] 만천하에 알려 로마 연합의 와해를 촉구하기 위함이었다. 그리스인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이에 관해 아래와 같이 서술했다.
"...플라미니우스는 적이 자신을 멸시한다는 느낌에 자극받고 대노했다. 사방으로 도시가 파괴되어 연기가 자욱한 광경을 그는 차분하게 견뎌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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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남부 지역인 아풀리아. 큰 그림 |
이에 대응하여 플라미니우스의 부관들은 상관에게 본군은 세르빌리우스와 합류할 때까지 기다리고, 기병 별동대만 파견해 한니발의 무차별적인 약탈만 방해하자는 조언을 했지만 한니발의 약탈을 지켜만 본 것에 대해 민중으로부터 받을 비난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분노로 뒤섞인 플라미니우스에게는 소 귀에 경읽기였다. 결국 플라미니우스는 전군에 한니발을 뒤쫓아 추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대해 역사가 리비우스는
"정치적인 선전보다, 안전하게 다른 집정관을 기다려 군을 규합하여 싸울 것을 촉구한 의회의 권고를 무시하고... 분노에 찬 플라미니우스는... 전투를 위한 행군의 지시를 내린 것이다."
라고 비판적으로 서술했다.플라미니우스가 자신을 추격한다는 보고를 접한 한니발은 매복하기 좋은 트라시메노 호수의 좁은 길을 보고 매복작전을 준비했다. 숲으로 우거진 골짜기에 보병을 매복시켜 놓고, 긴 종열로 행군하는 로마군을 섬멸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더해 한니발은 로마군이 안심하고 길을 지나가도록 일부러 멀리 불을 피워놓아 이미 길에서는 멀리 떨어져 진군한 것처럼 위장했다.
다음날 아침 플라미니우스의 로마군은 좁은 트라시메노 호수의 길목을 지나가다가 카르타고군의 매복에 걸려 퇴로가 앞뒤로 끊긴 상황속에서 공격받은 끝에 처음의 병력 3만 명 중 1만 명만 성공적으로 후퇴하고, 나머지는 전부 죽거나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플라미니우스 자신도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거기에 더해 한니발의 카르타고군은 전투가 일어날 것을 파악한 스키피오의 군대에서 지원을 온 별동대 4천 명 역시 패퇴시켰는데, 이 일련의 전투에서 한니발이 입은 피해는 전사자 2500명가량과 부상자들이었다고 전해진다. 트라시메노 호수 전투의 참혹함에 대해 리비우스가 제시한 일화가 있다. 그에 따르면 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 당시 이탈리아에 큰 지진이 일어났는데, 끔찍한 전투에 정신이 팔린 양측 군대는 지진이 일어났음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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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시메노 전투의 전개도. |
5.2. 독재관 파비우스와 스키피오 형제의 히스파니아 전선
한니발은 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로마를 지나쳐 로마의 동맹도시를 공격했는데, 이는 칸나이 전투에서도 일어나는 일이었다. 여기서 "왜 한니발이 승기를 몰아 로마를 공격하지 않는가"라는 의문은 카르타고군 내부에서도 나온 의문으로, 당시 한니발 휘하에서 누미디아 기병을 통솔하던 장군이던 마하르발이 칸나이 전투 이후 한니발에게 건넨 말이 유명하다.신은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주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장군님은 승리하는 법은 알지만 그 승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는 모르는 것 같군요.
이 의문은 고대부터 논의되어 온 의문인데, 전통적으로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한니발이 실수했다는 목소리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현대 연구가들 사이에서는 한니발의 카르타고군이 실제로 로마를 공격하여 성공적으로 공성을 해낼 병기가 부족했다는 평가가 있다. 자세한건 아래에. 어쨌든 전쟁의 천재인 한니발이 로마를 쳐서 함락시키면 전쟁이 끝난다는 그토록 당연한 걸 생각하지 않았을 리는 거의 만무하기 때문에 후자의 평가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 이후, 로마는 공화정을 세우고 나서부터 전통적으로 로마가 매우 위험할 때 선출하던 독재관(Dictator)을 선출했다. 집정관이 독재관을 지명하는 관례를 깨고, 원로원이 직접 지명한 이는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였는데 그는 유명한 파비우스 전략으로 대표되는 지구전을 주창했다.
파비우스 전략은 전통적으로 로마군의 방침이었던 적과 대치하는 상황에서는 바로 교전에 들어가는 식의 행동을 하지 않고, 대신 로마군은 카르타고군을 추격하며 견제하되 대규모의 전투는 벌이지 않고, 소규모의 부대가 본군과는 분리된 적의 부분(보급로 등)을 공격하여 이득을 보는 전략이었다. 현대 역사가들은 파비우스가 한니발의 공격을 파비우스 전략을 이용해 두 가지 면에서 받아쳤다고 평가한다.
- 첫째, 본국과의 보급이 완전히 끊긴 카르타고군이 이탈리아 반도에서 승리할 방법은 한니발이 계속 전투에서 승리한 결과로 로마의 동맹국들이 로마에 대한 신뢰를 잃어 한니발에게 합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니발과의 전투를 완전히 피함으로써 한니발은 승리할 수 없고, 도시들은 배반하지 않는다. 따라서 카르타고군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소모전에서 불리한 입장이 된다.
- 둘째, 한니발의 군대는 대부분 용병으로 이루어진 군대였다. 한니발의 용병들은 로마와 매우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한니발을 따랐지만, 모든 용병이 그렇듯 용병은 보통 충성심이 부족하고, 또한 대규모 전투로 전리품을 약탈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전투를 하지 않음으로서 그 목적을 차단하고, 결국에는 용병들의 충성심을 떨어뜨릴 수 있다. 또한 용병들은 최대한으로 전리품을 약탈하기 위해서 무겁고 휴대성이 없는 공성 병기를 지참하지 않는데, 이 때문에 카르타고군은 공성전이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성벽으로 방어된 도시 안에 틀어박혀 있다면 카르타고군은 로마군을 공격할 수 없다.
사실 이런 식으로 한니발을 무시하는 지구전이 가능했던 것은 로마군이 한니발이 있는 이탈리아 전선을 제외하고는 우세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결과가 어떻든 이 파비우스 전략은 점점 인기가 없어져 갔다.
한니발은 그를 지지하는 카푸아 출신의 장교들로부터 카푸아를 넘겨주겠다는 의사를 전해 듣고, 캄파니아로 진입한 바 있었는데, 그만 그해 겨울을 보낼만한 식량 확보가 불가능한 분지에 진입했다. 길 안내인이 카실리눔을 카시눔으로 잘못 알아듣고 그곳으로 인도한 것이었다. 한니발은 그를 십자가형에 처했으나 이미 파비우스는 곧바로 길목을 차단하여 한니발을 궁지에 몰아넣은 상태였다. 그런데 한니발은 한밤 중에 그 지역에서 약탈한 소 3천여 마리의 뿔에 불을 붙여 로마 측 진영에 풀어놓아 마치 카르타고군이 기습하는 것처럼 위장했다. 이에 멋지게 속아 넘어간 파비우스는 그 소동 사이에 카르타고군 전원이 그 지역을 빠져나가는 것을 방관해야 했다.( 아게르 팔레르누스 전투)
또한, 한니발이 약탈할 때 파비우스의 영지를 건드리지 않자 파비우스는 국가의 책무보다 자신의 영토 보전에 신경쓴다는 로마 대중의 의심을 받게 되었고, 카르타고와 로마의 포로 교환때 더 많은 수의 로마군을 넘겨받는 대가로 몸값을 지급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관해 원로원이 토의하는 중, 파비우스가 개인 자금으로 선지급하여 포로를 받은 것이 원로원 내부로부터 불만을 샀다. 파비우스가 이끄는 군대 내부에서도 파비우스의 전략을 강하게 비판했는데, 특히 원로원에 의해 독재관을 보좌하는 2인자 직책인 기병장관으로 임명된 전직 집정관 출신의 미누키우스가 가장 앞장서서 비판하는 입장이었다. 미누키우스와 그를 따르는 장교들 및 병사들은 전쟁 내내 한니발이 지역 주민들을 약탈하고 학살하는 광경을 전투 없이 구경만 해야 했고, 이런 무능해 보이는 방침에 크게 격분했다. 마침내 파비우스는 로마로 소환되었다.
로마로 소환된 파비우스는 정치적 공세에 시달렸다. 때마침 파비우스 대신 군권을 대리하는 기병장관 미누키우스가 한니발과 전투를 벌여 약간의 성과를 내는 데 성공했다. 미누키우스는 한니발의 진영 근처에 바짝 군대를 이동시켰고, 한니발의 기병들이 주변 지역을 약탈할 때 이들을 공격했으며, 이후 두 진영 사이의 언덕을 점거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우세함을 보여 한니발의 병사를 캠프 속으로 몰아넣는 데 성공했다. 미누키우스는 곧장 승전보를 로마시에 보냈고, 이를 들은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은 파비우스의 전략을 비판의 도마 위에 올려놓았다.
이때 로마의 호민관 중 한 명이 파비우스는 독재관의 자격이 없다고 말하면서 그가 독재관으로서 받은 유일한 군권(임페리움)을 미누키우스에게도 동등하게 부여하는 법안을 민회에 내놓았고, 이를 전직 법무관 출신인 바로가 찬성하면서[22] 이 법안이 통과되었다. 또한, 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에서 전사한 플라미니우스를 대처할 수 있는 그해의 신임 집정관을 선출할 것을 주장하여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를 선출했다. 이를 모두 지켜본 파비우스는 더 심한 정치적 공세를 당할 것을 우려하여 밤중에 로마시를 빠져나가 자신의 군대로 돌아갔다. 파비우스는 돌아가는 길에 원로원에서 보낸 편지를 받았는데, 그 서한에 미누키우스와 군권을 나누어 가지라는 원로원의 명령이 적혀있었다.
파비우스를 맞이한 미누키우스는 군대를 교대로 지휘할 것을 제안했으나 파비우스는 이를 거부하고, 군대를 둘로 쪼개 각각 지휘하기로 했다. 이를 본 한니발은 미누키우스를 유인하여 전투를 치르기로 결심하고, 이를 위해 미누키우스 진영 근처의 언덕을 밤중에 소규모의 병력으로 점령했다. 이 소규모의 병력은 미누키우스를 끌어내기 위한 미끼였다.
다음날 아침 카르타고군이 점령한 언덕을 본 미누키우스는 우선 경보병을 선두에, 기병을 바로 뒤에 배치하여 군대를 보냈다. 이에 대응하여 한니발이 자신의 병력을 추가 파병하자 미누키우스는 자신의 모든 보병을 이끌고 진격했다. 이때 로마 경보병과 기병은 언덕 위에 포진한 한니발군이 퍼붓는 투창 세례를 맞고, 패주해 달아났으나 3열의 로마 군단병은 흔들리지 않고 진군했고 언덕 위의 카르타고군과 교전을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언덕 아래에 매복하고 있었던 카르타고군이 쏟아져 나와 사방에서 공격하기 시작했고 로마 군단병은 패주해 달아났으나 근처에 머물던 파비우스가 이들을 구원하여 전멸을 면하게 되었다. 간신히 패배를 면한 미누키우스는 이후 군사적인 행동을 중단했다( 게로니움 전투).
그 동안 파비우스의 임기가 마침내 끝나게 되었고, 파비우스의 임기 동안 해군을 이끄는 것으로 보직이 변경된 두 로마 집정관들, 즉 게미누스와 새로 선출된 아틸리우스가 시칠리아 섬에서 북상해 전장에 도착하여, 이들의 군대를 인수하고, 군대는 그들의 지휘하에 그해의 겨울을 보내었다.
한편 히스파니아에서 키사 전투 이후 그나이우스 스키피오는 에브로 강 북부의 타라코에 거점을 마련하고, 히스파니아의 카르타고 영토에 대해 본격적인 공세를 펴기 시작했다. 동시에 이베리아 원주민 부족들과 접촉하여 카르타고군에 반기를 들도록 회유하는 작업도 지속적으로 진행했다.
히스파니아 방어의 총책임자였던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키사 전투 이후 이베리아 용병을 고용해 군대를 강화하고 로마 함대에 산발적인 기습을 가했다. 그리고 기원전 217년 봄, 하스드루발은 수륙 양면을 통한 대대적인 반격을 감행했는데, 이때 자신은 육군을 지휘하고 함대는 자신의 부관인 히밀코에게 맡겼다. 그런데 히밀코가 지휘하는 함대는 부주의하게 북상하다가 에브로 강 하구에서 로마 해군의 대규모 기습을 받아 궤멸적인 피해를 입고 패주했으며, 이때문에 하스드루발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군대를 물려야만 했다( 에브로 강 해전). 그리고 로마에서는 푸블리우스 스키피오가 병력을 이끌고 히스파니아에 도착하여 그나이우스와 합세했다.
한편 하스드루발은 이 시점에서 다시 북상했는데, 이는 에브로 강 상류 남쪽에 사는 켈티베리아인의 반란 때문이었다. 이들의 반란은 곧 로마인과의 동맹을 의미했으므로 하스드루발은 즉시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북상하여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이런 정세를 지켜본 스키피오 형제는 군대를 이끌고 에브로 강을 건너 남쪽의 카르타고의 영역에 진입했다.
두 스키피오 형제는 곧 폐허가 된 사군툼에 상당량의 전리품과 히스파니아 부족들에게서 받은 인질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바다를 타고 남하하여 그 지역에 당도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맞서 사군툼을 지키던 카르타고 지휘관[23]은 휘하 장교에게 속아 인질을 로마에 그냥 넘겨주는 큰 실책을 저질렀다.[24] 하스드루발에게 넘겨준 인질들이 로마군의 손에 넘어갔음을 알게 된 히스파니아 원주민들은 잇달아 카르타고군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6. 기원전 216년
6.1. 포위섬멸전의 영원한 교본, 칸나이 전투
새해에 접어들자 로마에서는 정치가를 선출하는 선거가 열렸다. 관례대로라면 집정관이 와서 선거를 주관해야 했으나 두 집정관 모두 군대를 지휘하는 상황이라 자리를 뜰 수 없었다. 따라서 원로원은 단 14일 임기의 선거를 주관할 임무를 받은 독재관을 선출했다.이때 로마 민중은 원로원에게 매우 분노한 상황이었다. 이들은 로마 귀족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일부러 전쟁을 질질 끌고 있다는 의심을 품고 있었다. 평민들은 사군툼에게 즉시 원군을 보내지 않은 이유, 한니발이 알프스 산맥을 넘는 것을 방관한 이유에 대해 미심쩍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던 중 원로원은 집정관이 독재관을 지명하는 관례를 깨고 직접 그들이 파비우스를 독재관으로 임명했고, 이 파비우스가 대놓고 지연전략을 펴자 원로원이 고의로 전쟁을 늦춘다는 민중의 의심은 확신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때 선거철을 맞아 공직에 선출되기를 원하는 평민 출신 정치가들이 이를 선동하여 불에 기름을 질렀다. 호민관 한 명이 나서서 한 연설에서 원로원이 그간 한니발을 상대로 대군을 편성하지 않고, 겨우 두 개, 세 개 군단씩 쪼개서 보내 각개 격파당하는 상황을 맹비난했고, 대군을 편성할 필요성과 평민 출신의 집정관이 선출될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연설은 로마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결국, 이들이 원하는 대로 당시 평민 출신 중 가장 인기가 있었던 정치가인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집정관에 당선되었으며 원로원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를 설득하여 출마시켜 그를 집정관에 당선시켰다.[25] 이렇게 선거가 끝나자 '일부로 전쟁을 늦춘다, 고의로 대군을 투입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의식한 원로원은 한 명의 집정관에게 무려 4개 군단씩 맡기기로 결정하고 각 군단의 정원에 1천 명씩 추가하여 대략 8만 6천 명에 달하는 로마 군단을 조직했다.
그간 한니발은 그해 임기가 끝난 두 명의 전직 집정관의 견제를 받았으나 그렇다고 약탈의 방해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이탈리아 중부를 짓밟았고, 바로와 파울루스가 이끄는 대군이 도착하자 잠시 대치했다가 칸나이로 이동했다. 이 대치 과정에서 소규모의 충돌이 있었는데 한번은 카르타고군 1700명이 전사하고 로마군은 단 100명의 피해를 본 승리를 한니발이 고의로 선물하기도 했고, 일부러 진영을 비워놓은채 거기에 전리품을 쌓아놓은 뒤 주변에 병사를 매복시킨 후 로마군이 캠프에 들어와 전리품을 주울 때 기습하려는 기만책을 쓰기도 했으나 로마군은 정찰을 먼저 하여 걸려들지 않는 등의 사건이 있었다. 이후 한니발은 진짜로 캠프를 버리고 칸나이로 이동했으며 정찰병을 내보낸 로마군은 한니발의 이동을 확인한 뒤 칸나이로 쫓아왔다.
이윽고 칸나이에서 두 집정관은 한니발과 대규모 회전을 벌였다. 한니발은 기발한 기병, 보병 간의 유기적인 조합으로 로마군을 포위하여 그들을 섬멸해버렸다. 이 싸움에서 한니발은 망치와 모루 전술의 교과서적인 사례로 전사(戰史)에 영원히 남는 영광을 얻었다. 한니발은 로마군 8만 6천 명을 병력 5만 명으로 맞서 싸웠는데, 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4만 5천 명이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고 간신히 탈출한 1만 4천여 병력만 뺀 채, 나머지는 한니발군의 포로로 잡히는 대참패를 당했다. 그리고 집정관 파울루스와 앞에 등장하는 인물인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루푸스 및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도 이 싸움에서 전사했다( 칸나이 전투).[26]
6.2. 칸나이 전투 이후
칸나이 전투의 처참한 참패 소식이 전해진 후 로마는 큰 충격에 빠졌다. 시민들은 경악했고 여인들은 광장에 나와 울부짖었다. 단 지배 집단인 로마 원로원만은 이 초유의 대위기 상황 속에서도 상당히 침착한 대응을 했다.이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우선 여자들이 길거리에 나오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거리에 울부짖는 소리가 사라졌다. 이렇게 도시를 조용하게 한 뒤 경기병을 파견해 생존한 장병의 수가 어디 있고 얼마나 되는지, 집정관 바로는 어디 있는지, 한니발은 뭐 하는지 정보를 파악하기로 했다. 그 와중에 바로와 장교들이 보낸 전령이 속속 로마시에 도착했다.
전령의 정보와 정찰병이 보내는 정보를 바탕으로 현 상황을 파악한 원로원은 집정관 바로를 로마로 소환하고, 카누시움에 집결한 바로의 병사를 지휘할 장군으로 법무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를 파견했다. 그 뒤 독재관과 기병장관을 선출했는데 이들은 마르쿠스 유니우스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였다.
그 뒤 독재관 유니우스의 주관하에 4개 군단병을 새로 징집하고 노예로부터 2개 군단을 뽑아 6개 군단병을 새로 편성했다. 그 뒤 신을 달래는 의식을 치렀는데, 그러던 중 성관계를 했음이 밝혀진 베스타 신전의 여사제[27] 두 명을 생매장하고, 상대남을 채찍으로 쳐 죽였으며, 그 뒤에 전대미문의 인신공양, 즉 갈리아인 남녀, 그리스인 남녀 등 네 명을 포룸에 생매장하는 의식을 치렀다.[28]
그 뒤 한니발이 보낸 로마군 포로의 몸값 교섭을 거부한 뒤, 강화를 제의하러 온 사절은 로마 땅에 발도 들이지 못하게하고 쫓아냈는데, 이런 로마 원로원의 신속하고 의연하며 침착한 대처에도 불구하고, 칸나이 전투의 참패는 이웃한 동맹시들에 영향을 미쳐, 캄파니아의 대도시였던 카푸아와 이탈리아 반도 남부의 칼라브리아 지방의 거의 모든 도시가 한니발 편으로 돌아섰다.[29]
칸나이 전투 이후 한니발은 군대를 둘로 나눠, 하나는 마고에게 주어 이탈리아 남부에서 로마를 배반하는 동맹시를 접수하게 했고, 자신은 캄파니아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는 캄파니아의 해안 도시 중 그리스계 도시인 네아폴리스( 나폴리)의 점령을 시도했는데 방어 태세가 굳건한 것을 보고 카푸아로 이동했다.
6.3. 카푸아의 반기
로마의 동맹시들 중에서 상당한 입지를 자랑했던 캄파니아의 대도시 카푸아의 배반은 로마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카푸아 시민들이 로마에 대해 유독 큰 불만을 가졌던 것은 당연했다. 로마와 친밀하고 번영했던 만큼 로마가 다른 동맹시들보다 더 많은 수의 병력을 차출해갔기 때문이다. 게다가 카푸아 시민들은 자신들의 도시가 로마에 뒤질 것이 없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와의 종속관계를 자존심이 상하는 일로 여기고 있었다. 로마군이 칸나이 전투에서 궤멸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카푸아 시민들은 반로마 폭동을 일으켰다. 카푸아 원로원은 이들을 달래야했다. 하지만 이내 카푸아 원로원과 그 시민들은 한통속이 되어 위기에 처한 로마를 배신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은 한니발이 로마를 무너트리면 자신들이 이탈리아 반도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이때 카푸아 원로원 의원들이 목숨을 건진 방법이 꽤 흥미롭다. 원로원 의원 중 한 명이 나서서 자신이 의원들 모두를 구할 방법이 있다고 말한 뒤 동료들을 모두 원로원에 감금시켜놓고 카푸아 시민들을 불러모았다. 이후 그 의원은 의원들의 목숨을 시민들에게 맡긴다고 한 뒤, 자신의 동료를 한 명씩 불러왔다. 이때 카푸아 시민들은 각 의원들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분개하면서 죽이겠다고 고함쳤다. 그런데 그 일을 꾸민 의원이 이 동료 의원이 죽으면 그 공석을 메꿀 다른 이를 추천하라고 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어떤 이가 추천받아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거나 그 사람은 의원을 할 그릇이 아니라며 비웃었다. 결국 모든 카푸아 원로원 의원들은 지위와 목숨을 유지했다. 카푸아 시민들은 모르는 악당보다 잘 아는 악당이 더 낫다고 낄낄대며 해산했다.
하지만 카푸아가 로마에게 반기를 든 계기는 또 있었다. 카푸아 사절단은 한니발과 접촉하기 이전에 심사숙고를 위해서 전임 로마 집정관인 바로를 만났다. 그런데 바로는 카푸아를 철석같이 믿어서 지나칠 정도로 정직하게 로마가 얼마나 위기에 처했는지를 밝혔다. 그러면서 카푸아가 동원할 수 있었던 최대 한도인 중보병 3만 명과 기병 5천 명을 요청했다. 이에 카푸아 사절단은 로마가 큰 위기에 빠졌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리비우스가 신빙성이 없다고 하면서도 기록한 일화가 하나 있다. 카푸아 원로원은 한니발과 동맹을 맺기 전 마지막으로 로마 원로원에 사절을 보냈다. 그들은 로마를 지원하는 대가로 다음과 같은 조건을 요구했다.
1. 카푸아군을 지휘하는 총사령관 중 한 명을 카푸아인으로 임명해 줄 것.
2. 카푸아인에게 로마 원로원의 의석을 줄 것.
2. 카푸아인에게 로마 원로원의 의석을 줄 것.
위의 조건은 로마에 있어서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당시 로마에서의 총사령관은 최소 집정관급 레벨이었다. 즉, 이는 단 둘뿐인 집정관 자리 중 하나를 카푸아에게 넘기라는 요구나 마찬가지였다. 두 번째 조건은 오직 로마만이 누릴 수 있었던 로마 연합 최고 회의의 의석을 카푸아인에게도 나눠달라는 요구였다. 만약 두 번째 조건을 수락하면 다른 속주들도 로마 원로원의 의석을 달라고 요구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러한 제안을 받은 로마 원로원은 매우 격노하여 이런 상황에서 이익과 권력만 따지냐며 즉시 카푸아 사절단을 내쫓았다.
한니발은 카푸아가 로마를 배신하고, 그에게 붙는다는 소식을 듣자 카푸아를 방문했다. 이때 한니발은 이미 전설적인 장군이 된 그의 모습을 보러온 수많은 카푸아 시민들의 환호를 받았다. 카푸아는 시내에 카르타고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을 허용해주었다. 그래서 한니발은 그해 겨울을 카푸아에서 보냈다. 카푸아의 이탈은 많은 도시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뒤이어 시칠리아 섬의 가장 큰 도시인 시라쿠사 역시 로마를 배반했다. 이는 강력한 친로마파였던 히에로 2세가 승하한 후에 친 카르타고파가 집권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거기다가 이탈리아 남부의 또다른 대도시인 타렌툼( 타란토)도 내분을 일으키다가 이내 한니발 편에 붙었다.
이때 마고는 이탈리아 반도의 장화 발끝의 지역, 즉 브루티움의 대부분 지역을 배반케 하고, 곧장 카르타고에 건너갔다. 카르타고에서 행한 연설에서 마고는 한니발의 전공을 보고하고[30] 노획한 로마인의 금인장을 수북이 쌓은 퍼포먼스를 선보인 후 한니발에게 지원할 원조를 요청했다. 기쁨에 넘친 카르타고 원로원 의원 중 한 명이 당시 원로원 내 전쟁 반대파의 거두였던 대(大) 한노 2세(Hanno II the Great)에게
자 한번 떠들어보게. 카르타고 원로원에 계신 로마 원로원 씨?
라고 비꼬듯이 묻자 대 한노 2세는 마고에게 로마가 속한 이탈리아 지역인 라티움 중 배반한 도시가 있는지, 그리고 로마의 35개 부족 중 배신한 자들이 있는지에 대해 물었고, 이에 마고가 모두 아니라고 대답했다. 이에 대 한노 2세는 이렇게 말했다.그렇다면, 이 전쟁의 승패는 아직 결정나지 않았다. 그러니 이 시점에서 로마와 강화협상을 하는 것이 좋다.[31]
대 한노 2세는 이 시점에서 로마와 강화협상을 시도해야하며, 지금으로선 승리의 기쁨을 느끼기엔 불충분하다는 취지의 연설을 한 뒤 마고의 원조 요청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흥분에 가득찬 카르타고 원로원은 대 한노 2세의 발언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압도적인 찬성으로 한니발에게 군사 원조를 보낼 것을 결의했다.[32] 한편 로마에선 집정관 바로와 독재관 유니우스가 새로 뽑은 6개 군단을 훈련하는 등의 일을 하느라 분주했다. 6개 군단병의 병력으로는 부족하다고 본 원로원은 범죄자들로부터 사면의 대가로 6천 명을 새로 모집한 뒤 이들을 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에서 전사한 플라미니우스가 과거 갈리아족을 격파하고 치른 개선식때 가져온 갈리아인들의 무기로 무장시켰다. 한편 한니발은 카푸아를 떠나 항구도시인 놀라로 이동했고, 놀라 민중들은 영웅이 된 한니발에게 붙고 싶어했다. 하지만 로마와의 동맹을 유지하고자 한 놀라 원로원은 카실리눔에 머무는 마르켈루스에게 사절을 보냈고, 마르켈루스는 급히 군대와 함께 놀라로 진입했다. 뒤이어 벌어진 전투에서 마르켈루스는 한니발의 공격을 막아냈다( 1차 놀라 공방전).
놀라에서 물러난 한니발은 누케라와 아케라이를 점령한 뒤 카푸아로 이동하여 겨울을 보냈고, 추위가 잦아들자 카실리눔으로 이동해 공격했다. 당시 기병장관인 그라쿠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근처에 있었으나 한니발의 공격을 막을 수는 없었고, 한니발은 식량의 보급을 끊어버림으로써 카실리눔 주민의 항복을 받아냈다. 무릎을 꿇은 카실리눔의 주민들은 모두 몸값을 지급하고, 풀려났다.
7. 기원전 215년
이윽고 새해가 밝았다. 지난해의 칸나이 전투의 결과, 카푸아와 타렌툼을 필두로 한 이탈리아 남부의 동맹시들이 로마를 배신하고 한니발 편에 붙었으나 여전히 많은 동맹시들은 로마 편에 남아 병력과 물자를 계속 지원하고 있었다. 이들을 와해시키기 위한 한니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로마를 맹주로 한 동맹시들의 연합은 아직까지는 충분히 견고한 상태였다. 한편 로마에서는 공직 선거를 치르게 되었는데 우선 마르쿠스 파비우스 부테오가 원로원 의석수를 채울 권한을 받은 독재관으로 선출되었다. 부테오는 독재관이 두 명이 되는 상황은 좋지 않다고 말하며 177명의 신임 원로원을 지명하고, 바로 직위를 반납했다.이후 열린 공직선거에서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가 집정관에 선출되었는데, 집정관에 당선된 포스투미우스는 이탈리아 북부에서 갈리아족과 싸우는 중이어서 부재시 투표를 통해 선출된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때 신임 집정관 포스투미우스와 그의 군대가 전멸했다는 참혹한 소식이 원로원에 당도했다.
포스투미우스는 2개 군단병 및 17,000명의 동맹시 보병과 함께 갈리아족이 파놓은 함정으로 진입했고, 여기서 통나무 더미에 깔려 집정관과 군대가 몰살당하고 말았다. 10명의 생존자를 제외한 전원이 전사했으며 포스투미우스의 머리는 갈리아인의 신전으로 보내져 금도금되어 제례의 술잔으로 사용되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실바 리타나 전투) 칸나이 전투의 참사에서 분주히 회복하려고 노력하던 로마 시민들은 이런 끔찍한 소식을 듣자 절망하여 모든 이들이 가게 문을 닫았다. 밤이 되면 무덤과 같은 고요함이 로마시를 뒤덮었다. 이에 원로원은 우울한 분위기를 제거하기 위해 안찰관에게 도시를 순례하면서 문 닫힌 가게를 보면 강제로 열게 하도록 명령했다.
한편 히스파니아를 맡은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히스파니아의 전황이 매우 악화된 상태에서 이를 수습하기에 분주했다. 히스파니아의 카르타고군 전황이 나빠진 이유 중 가장 큰 원인은 파괴한 사군툼에 잔류한 히스파니아 부족들의 인질들이 로마군의 기습과 휘하 장교의 배반으로 인해 로마군에게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인질이 없는 상태의 히스파니아 부족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수습하기 위해 하스드루발은 수많은 회전까지 치르면서 이들을 제압하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이라 하스드루발은 필사적으로 본국에 원군을 요청했고, 카르타고로부터 4,000명의 보병, 500명의 기병이라는 원조를 받자 군사 행동을 재개했다.
이때 카르타고 본국에서 하스드루발에게 서신을 보내 즉시 한니발이 있는 이탈리아 반도로 가 합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스드루발은 이에 자신이 지금 히스파니아를 떠나면 에브로 강을 건너는 순간 히스파니아는 로마의 영토가 될 것이니, 자신을 대신할 사령관과 병력을 보내주면 그때 갈 수 있다고 대답했다. 카르타고 본국은 이에 히밀코에게 부대와 선박을 주어 파견했고, 그에게 자신이 가진 정보와 대처 방안을 알려준 하스드루발은 이탈리아로 가기 위해 북상했다.
이 소식을 들은 스키피오 형제는 하스드루발이 이탈리아로 가서 한니발과 합류하면 로마는 멸망할 것으로 생각했고, 이에 급박해진 두 형제가 군대를 합쳐 하스드루발을 데르토사의 전투에서 격파하여 저지했다.
한편 로마에서는 그라쿠스가 집정관 직무를 시작했다. 그라쿠스와 원로원은 칸나이 전투의 패잔병과 각 군단의 부적응자를 모아 시칠리아 섬으로 보냈고, 그들에게 한니발이 이탈리아 반도를 떠날 때까지 복무하라는 처벌을 내렸다. 이들이 시칠리아 섬에 가자 그 곳에 주둔하고 있었던 기존의 2개 군단은 바다를 건너 이탈리아로 소환되었다.
그리고 전직 집정관 바로의 임페리움을 연장했으며, 죽은 집정관을 대신할 새 집정관을 선출했는데 전해의 놀라 방어전에서 한니발을 격퇴한 군사적 성과를 유일하게 보여준 마르켈루스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선출되었다.
하지만 마르켈루스가 선출되자 나쁜 전조가 발생했고, 평민 출신 집정관이 두 명이라서 신이 분노했다는 신탁을 받은 로마 원로원은 마르켈루스의 집정관직을 취소하고,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집정관으로 선출했다. 대신 마르켈루스는 전직 집정관 자격의 임페리움을 받았다. 이후 원로원은 세금을 2배로 늘리고, 해당 세금을 즉시 납부하라는 명령을 내린 뒤, 뽑힌 4명의 법무관과 전직 집정관, 전직 법무관을 전선에 골고루 배치했다.
한편 카르타고에서는 한니발의 동생인 마고 바르카가 12,000명의 보병, 1500명의 기병, 20마리의 전투 코끼리와 1,000탈렌트를 가지고 히스파니아로 향했으며, 사르데냐 섬의 원주민들이 대로마 반란을 일으킬 것이니 원조해달라는 요청을 듣자 대머리 하스드루발을 파견했다. 대머리 하스드루발이 지휘하는 병력의 규모는 마고의 병력과 비슷했다.
한편 안티고노스 왕조 마케도니아 왕국의 왕 필리포스 5세가 보낸 사절이 로마 법무관에게 잡혔는데, 이 사절은 자신은 로마와 동맹을 맺으러 왔다는 거짓말을 해 위기를 모면한 뒤 오히려 융숭한 대접까지 받으며 로마로 향했다가 밤에 몰래 탈주, 한니발에게로 와서 밀약을 맺었다. 그러나 돌아가다가 다시 붙잡혀 로마 원로원 앞으로 끌려갔다. 그들을 심문한 원로원은 즉시 마케도니아 전선쪽의 병력을 증강하고 아드리아 해안의 경비를 강화했다. 붙잡힌 마케도니아 사절 중 일부가 간신히 탈주해 주군인 필리포스 5세에게 사실을 보고하자 그는 두 번째 사절을 보냈고, 이 사절은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료해 마케도니아와 한니발 간의 밀약을 성사시켰다.
로마 원로원은 이후 사르데냐 섬에서의 반란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사르데냐 섬은 당해에 선출된 법무관 퀸투스 스카이볼라가 담당했는데 그는 병을 앓고 있었고, 병력도 부족했다. 이에 원로원은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를 파견했는데 그는 두 번의 집정관, 감찰관[33] 경력, 사르데냐 섬을 무려 두 번이나 평정한 경력을 가진 유능한 사령관이었다.
토르콰투스는 사르데냐 섬에 상륙한 뒤 법무관의 병력을 인수한 후 이들을 이끌고 원주민 군대의 앞에 도착했다. 이때 반란의 수장이었던 함프시코라가 병력을 모으러 자리를 떴는데 그를 대신해서 군대를 맡은 그의 아들이 멋대로 회전을 치렀고, 로마군은 크게 승리했다. 때마침 카르타고군이 상륙하자, 패배한 원주민군은 함프시코라의 인솔하에 카르타고군에 합류했다.
상륙한 카르타고군은 로마군을 지지하는 지역을 약탈하기 시작했고, 이에 토르콰투스가 로마군을 이끌며 이들 앞에 나타났다. 뒤이어 벌어진 회전은 4시간에 걸칠 정도로 격렬하게 전개되었는데, 마침내 사르데냐 원주민군이 로마군의 맹공에 못이겨 패주하기 시작했고, 카르타고군은 포위당하여 섬멸되었다.( 데키모마누 전투) 카르타고에서 건너간 대머리 하스드루발과 바르카 가문 출신의 마고[34]가 로마군에 생포되었으며, 원주민군의 수장이었던 함프시코라는 자살했다. 그리고 카르타고 - 사르데냐 연합군의 패잔병들이 대피한 도시가 로마군에게 함락됨으로써 사르데냐 섬의 대로마 반란은 완전히 평정되었다.[35]
한편 카푸아는 쿠마이를 독자적으로 공격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카푸아인들은 캄파니아 지역의 축제를 개최한 뒤 쿠마이의 원로원 의원들을 초대하여 이들을 사로잡을 음모를 꾸몄는데 쿠마이인들이 눈치챘다. 쿠마이인은 근처에 노예 군단을 이끌고 있었던 로마 집정관 그라쿠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라쿠스는 쿠마이인에게 축제에 참가하는 것처럼 위장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그라쿠스는 정찰을 통해 캄파니아 축제에서 쿠마이인들을 사로잡기 위해 근처에 매복한 카푸아군의 위치를 파악하고 축제가 무르익었을 때, 그 곳을 야습하여 카푸아의 최고 책임자[36]를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소식은 곧 카푸아 근처의 티파타 산(Tifata mountains)에 캠프를 차려 머물고 있었던 한니발에까지 전해졌다.
한니발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그라쿠스군의 행군로를 차단하여 공격하기 위해 산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한니발이 이렇게 반응할 것이라고 예측한 그라쿠스는 서둘러 그들의 캠프로 돌아갔다. 그라쿠스를 놓치고 자신의 숙영지로 돌아간 한니발은 다음날 군대를 이끌고 쿠마이를 공격했다. 그러나 그라쿠스는 이것도 예측하고 있었기에 이미 그들의 거점을 쿠마이에 옮긴 뒤였고, 공성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었다. 하루 정도 공격해본 한니발은 다음 날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한니발은 그해 내내 티파타 산을 거점으로 삼아 캄파니아에 머물렀다.[37]
한편 이탈리아 남부의 루카니아 지역에선 한노가 이끄는 카르타고 병력이 셈프로니우스 롱구스[38]가 이끄는 로마군과 싸워 2,000명이 죽는 패배를 당했다.
그 기간 내내 집정관 파비우스는 제사를 지내고 신탁을 받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이 일이 끝나자 군대와 함께 남하하여, 한니발과 카푸아로 가는 길목에 진영을 꾸렸으며, 마르켈루스를 군대와 함께 따로 보내 배반한 삼니움족의 영토를 유린했다.
이때 사르데냐 원정군을 내려주고 돌아가는 카르타고 함대가 로마 법무관의 추격을 받아 7척이 나포되는 일이 있었다. 로마 해군이 추격을 하는 동안 다른 카르타고 해군이 보밀카르(Bomilcar)와 4,000명의 누미디아 기병 및 40마리의 전투 코끼리를 로크리에 내려주고 떠났다. 이것은 한니발이 이탈리아 반도에서 고군분투하는 동안 카르타고 본국으로부터 받은 몇 안되는 병력 지원 사례였다. 시칠리아 섬의 담당을 맡은 다른 로마 법무관이 이를 추격했으나 법무관이 로크리에 도착했을 때 보밀카르는 브루티움에 있는 한노의 부대와 이미 합류한 상태였다.[39]
이때 삼니움족은 티파타 산에 있는 한니발에게 사절을 보내 마르켈루스의 약탈이 너무 심하니 도와달라는 요청을 했다. 한니발은 직접 가지는 못하고, 로마의 동맹시를 공격해서 견제하겠다고 답한 뒤 놀라로 이동했다. 한니발은 이때 브루티움에 있는 한노의 부대를 소환했는데 이는 카르타고로부터 받은 기병과 코끼리를 휘하 병력에 합류시키기 위해서였다. 한노는 놀라로 넘어와 한니발과 합세했다.
뒤이어 벌어진 2차 놀라 공방전에선 도시의 수비를 맡은 마르켈루스의 활약으로 또 다시 로마가 한니발 군을 격퇴했다. 한니발의 병사들은 사기가 높고 전투경험이 풍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놀라를 함락시키지 못했는데, 이는 정면에서 순수한 전투력만으로 로마군을 상대하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다시 보여준 것이었다. 또한, 공성전의 경우 지형적인 악조건에서 싸워야 하며, 사군툼의 경우처럼 점령당하면 살육과 약탈이 기다리고 있으므로 수비측 병사들의 사기 또한 높은 상황이므로 공격해서 점령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니발은 포위를 풀고 한노를 브루티움으로 돌려보낸 뒤, 자신은 이탈리아 남쪽 장화 발꿈치 부분인 아풀리아로 이동했다.
한니발이 캄파니아 지역을 떠나자 집정관 파비우스는 카푸아 근처에 당도해 카푸아 영토의 농지를 약탈했는데, 이때 가을의 수확을 앞둔 식량들이 농토에 있었으므로 카푸아인들도 병력을 이끌고 나와 파비우스와 대치했다. 이때 파비우스와 카푸아인들 사이에 기병 2명이 일기토를 벌이는 일이 일어났으며, 이후 파비우스는 군대를 물려 겨울 캠프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다른 집정관이었던 그라쿠스는 한니발을 쫓아 아풀리아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때 히스파니아의 스키피오 형제는 로마 원로원에 선원과 병사의 봉급을 주기 위한 자금을 요청했다. 원로원은 국고가 바닥났음을 확인하고, 이를 민간의 지원에 의존하기로 했는데, 이에 3개의 민간 업체가 응해 자금을 빌려주는 대가로 그들의 군 면제, 그리고 지원금을 운수하는 배에 대한 국가의 보험을 요청했으며, 로마 원로원은 이를 받아들였다.
히스파니아에서 스키피오 형제는 히스파니아의 부족 도시를 공격 중인 마고 및 하스드루발 형제와 보밀카르 한니발 등 세 명의 캠프를 급습하여 대승을 거두었고, 포위를 푼채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세 사령관의 카르타고 군대와 회전을 벌여 다시 격파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로써 히스파니아의 부족은 카르타고에게서 돌아섰고, 거의 로마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7.1. 시라쿠사의 반란
한노는 브루티움에서 20,000여 명의 카르타고 병력을 이끌고 있었다. 그는 레기움을 공격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이후 로크리라는 브루티움의 항구도시를 공격했는데 겁에 질린 로크리 시민 중 많은 이들이 처자식을 이끌고 성 밖을 나와 탈주를 시도했다. 하지만 이들 무리는 카르타고 기병에게 포착되었다. 카르타고 기병은 그들을 죽이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라 그들이 움직이지 못하게 저지만 하고 있었고, 이들을 인질로 삼아 로크리의 항복을 받아냈다. 로크리 시민과 한니발이 맺은 조약은 카푸아와 거의 같은, 상당히 온건한 내용이었다.이후 브루티움인들은 크로토나를 독자적으로 공격했다. 크로토나의 평민들 다수가 항복했고, 친로마파인 유력 귀족들이 성채로 들어가 저항했으나 로크리인들이 사절을 보내 그들의 망명을 받아주겠다고 하자 이들도 항복하고 로크리로 망명했다.
이때 시라쿠사의 왕 히에로 2세가 승하하고, 14살에 불과한 히에로니무스(Hieronymus)가 그를 계승했다. 히에로니무스는 과거 피로스 전쟁을 일으킨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 1세의 손녀 네레이다와 히에로 2세의 맏아들인 겔론 2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였다. 히에로 2세는 죽기 전 히에로니무스의 나이가 어린 것을 근심해 15명의 중신에게 보좌를 맡겼으나 히에로니무스는 등극하자마자 그들 대부분을 해임시켰다. 히에로니무스는 자신의 두 삼촌들인 아드라노도로스(Adranodoros)와 조이푸스(Zoippus), 그리고 트라소(Traso)라는 신하만 보좌역으로 남겨두었다. 아드라노도로스와 조이푸스는 친카르타고파였으며, 트라소는 친로마파였다.
이때 히에로니무스의 암살 음모를 꾀하는 무리 중 한 명이 잡혔다. 그는 암살의 배후가 트라소라는 허위자백을 하여 트라소는 처형당했다. 트라소가 죽자 히에로니무스는 두 삼촌의 의견대로 로마인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기로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시칠리아 담당 로마 법무관은 사절을 보냈는데 히에로니무스는 이들에게 카르타고 사절들이 알려준 칸나이 전투에 대한 묘사를 믿을 수 없다, 이를 구체적으로 묘사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이는 조롱하려는 의도였고, 눈치챈 로마 사절은 우리를 진지하게 대할 때 다시 만나겠다, 동맹을 그렇게 쉽게 바꾸는 게 아니라는 경고를 남긴채 자리를 떴다.
히에로니무스는 나이가 어렸으며, 헬레니즘 세계의 명장이었던 피로스 1세의 혈통이 흐른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기원전 214년 여름, 그는 로마와의 동맹을 파기한 뒤 히포크라테스와 에피키데스에게 2,000명의 병력을 주어 로마 수비대가 주둔하는 도시들을 공략하도록 하고, 자신은 15,000명의 병력을 편성한 뒤 이 군대를 직접 지휘해 로마 법무관을 상대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한니발과 맺은 조약을 카르타고 본국에 보내 인가를 받으려고 했다. 이 조약엔 로마군을 격파한 뒤 시칠리아 섬을 반씩 나눠 갖자는 협정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히에로니무스는 카르타고 본국에 사절을 다시 보내 로마군이 물러나면 시칠리아 섬 전체를 자기에게 달라는 요구를 했다.
카르타고 원로원은 히에로니무스가 14세의 소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이런 돌출 행동에도 불구하고, 짐작하고 있는 듯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으며 그냥 순순히 인가해주었다. 이들은 시라쿠사와 로마와의 동맹을 파기시키는 것이 중요하고, 나중 일은 상관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히에로니무스는 얼마 안 있어 암살을 당했다. 소집한 15,000명의 병력과 합류하러 가는 길에 자신의 경호원과 암살단이 파놓은 길로 들어가 그들의 칼에 찔려 사망한 것이었다. 그가 왕위를 물려받은 지 13개월 만이었다.
8. 기원전 214년
이러는 동안 그 해가 다 지나갔고, 로마에서는 공직 선거가 열렸다. 집정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파비우스 전략의 주창자)가 해당 선거를 주관하기 위해 로마를 방문했다. 이때 선거에서 법무관 티투스 옥타킬리우스(Titus Otacilius)와 마르쿠스 레길리우스(Marcus Aemilius Regillus)가 집정관에 당선되었는데, 갑자기 파비우스가 이 결과를 두고 반대 연설을 시작했다. 옥타킬리우스는 파비우스의 처동생의 남편이었는데, 파비우스는 옥타킬리우스가 자신의 인척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집정관 자격이 없다고 질책한 것이었다.당선된 법무관 옥타킬리우스는 그 해의 시칠리아 담당 해군의 총사령관이었는데, 해당 업무는 카르타고 본국에서 한니발에게 보내는 보급을 저지하고, 이탈리아 반도 전체의 해안을 경비하며, 북아프리카의 해안을 약탈하는 임무를 맡은 중책이었다. 그런데 그 해에 카르타고 해군은 군대를 사르데냐 섬에 상륙시켰으며, 한니발에게 누미디아 기병과 코끼리를 보급했고,[40] 북아프리카의 해변 도시들은 그다지 약탈을 당하지 않은 것이었다. 파비우스는 이런 시기에는 한니발을 상대할 수 있는 사령관을 집정관에 당선시켜야 하는데 옥타킬리우스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또한, 다른 집정관 당선자인 레길리우스는 마르스 신전의 제관이므로 사령관에 걸맞지 않다고 말한 뒤 재투표를 명령했다. 이를 들은 옥타킬리우스는 분노해 파비우스가 집정관을 또 하려고 수작을 부린다고 외쳤으나 파비우스는 릭토르를 시켜 그를 현장에서 쫓아버리고 재투표를 감행했다. 로마 민중은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다시 집정관에 선출했고, 다른 집정관으로는 마르켈루스를 선출했다. 옥타킬리우스는 법무관에 선출되었고 명예회복을 하라는 의도인지는 몰라도 다시 해군 총사령관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 뒤 파비우스는 로마 원로원과 군대를 얼마나 편성할 것인지 토의에 부쳤다. 여기서 로마 원로원은 과감한 결정을 내리는데, 그 해에 무려 18개 군단과 150개의 전함을 투입하기로 한 것이었다.
군단은 다음과 같이 배분되었다. 각 집정관이 2개씩 이끌고, 시칠리아 섬, 사르데냐 섬, 갈리아에 2개씩 모두 10개 군단이 투입되며, 임기가 완료되는 집정관 그라쿠스의 2개 군단, 아풀리아에 2개 군단을 남기고 피케눔에 있는 칸나이 전투 당시의 사령관 바로와 마케도니아 견제 임무를 받은 법무관이 1개씩, 그리고 2개 군단은 로마시를 수비하기 위해 남긴 것이었다. 이 계산에는 히스파니아에 있는 스키피오 형제의 군단이 제외되어 있는데, 이를 합치면 모두 20개가 넘어가는 군단이 투입되는 것이었다. 동맹시 군단, 그리고 전함의 선원들을 포함하면 모두 250,000명의 대군에 해당하는 엄청난 물량이었다.
이 물량을 맞추기 위해 새로 건조되는 전함이 많았는데 이 전함에 선원을 제공하기 위해 원로원은 인구조사에 등록된 시민들의 재산별로 등급을 나눠 많은 순서대로 7명, 5명, 3명, 1명씩 사비로 무장해서 제공할 것을 명령했고, 원로원 의원들은 각자 8명씩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로마가 대군을 편성했다는 소식은 카푸아 시민을 공포에 떨게 했다. 이들이 아풀리아에 있는 한니발에게 사정하자 한니발은 곧장 북상하여, 카푸아의 뒷산인 티파타 산에 진영을 꾸렸다. 로마는 대군을 편성한데다가 두 집정관인 파비우스와 마르켈루스가 모두 카푸아 근처에 주둔하는 중이었으나 여전히 한니발 직속부대와의 전투를 피했고, 이윽고 한니발은 병사를 이끌어 유명 명소에 제사를 지내러 떠났다.
이때 타렌툼 출신의 젊은 귀족 5명이 한니발을 방문했다. 이들 중 몇 명은 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와 칸나이 전투에서 생포당했다가 풀려난 장교들이었는데 풀어주면서 한니발이 보인 호의에 감동한 청년들이었다. 이들은 타렌툼의 젊은 귀족과 평민들은 한니발을 지지한다고 하며 한니발이 군대와 함께 타렌툼 근처로 오면 타렌툼은 한니발 편으로 돌아설 것이라고 말했다. 한니발은 그들을 치하하고 자신에게 협조한 대가로 그들의 정치적 야망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뒤, 적당한 시기에 타렌툼으로 이동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때 놀라 시민이 다시 와서 한니발에게 내통을 약속하며 공격해달라고 청했다. 한니발은 그들을 만난 뒤 푸테올리라는 도시를 공격했는데 로마군 수비대 6천 명이 또다시 한니발군의 공격을 막아냈다.[41] 이후 한니발은 놀라로 이동하여 그 해에 선출된 집정관 마르켈루스와 교전을 벌였으나 이번에도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마르켈루스는 기병을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에게 맡겨 교전 중 한니발의 배후를 치도록 명령했으나 네로는 타이밍을 놓쳐 급습하는 데 실패해 마르켈루스의 심한 질책을 받았다.( 3차 놀라 공방전)
한편 전직 집정관 그라쿠스는 노예로 이루어진 군단병을 이끌고 베네벤툼으로 이동했으며, 북상하는 한노군과 교전을 벌였다. 승리의 대가로 해방을 약속받은 노예 군단병의 사기는 높았고, 한노군을 격파했다. 이 승리의 대가로 노예 병사들은 모두 자유 시민이라는 직위를 얻었다. 이때 한노군은 2천 명을 제외한 나머지가 전멸했다고 전해지는데, 얼마 안 있어 로크리에서 한노군이 다시 활동하는 것을 고려하면 로마의 역사가들이 그라쿠스의 전공을 부풀렸다는 의혹이 있다.( 1차 베네벤툼 전투)
로마에서는 원로원의 감찰관이 인구조사를 통해 4년간 명확한 사유 없이 군 복무를 하지 않은 시민의 수를 조사했고, 여기서 잡힌 시민 2천 명과 칸나이 전투 후 다른 나라로 도망가야 한다고 말한 자들을 모두 잡아 시칠리아 섬의 칸나이 전투 패잔병 출신 군단에 보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복무하라는 형벌을 내렸다.
로마 시민들은 신전 봉사를 무상으로 하겠다고 했으며, 그라쿠스가 해방시킨 노예 병사들의 주인들은 보상금을 전쟁이 끝난 뒤에 내어달라고 했다. 또한 고아와 과부를 위한 신용 기금이 만들어졌고, 기병과 백인대장들은 봉급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집정관 파비우스는 카실리눔을 공격했다. 카실리눔에는 한니발이 남긴 수비대 2700명이 있었기에 파비우스의 군단병으로는 점령이 불가능해 놀라에 있는 집정관 마르켈루스를 불렀다. 두 집정관이 이끄는 4개 군단병은 카실리눔을 점령했고 파비우스는 삼니움 지역으로 가서 약탈과 점령을 시작했으며, 마르켈루스는 놀라로 돌아가 그동안 걸린 질병을 치료했다.
이때 한니발은 캄파니아를 떠나 타렌툼으로 이동했다. 타렌툼 근처에 주둔하면서 타렌툼 시민들의 사절을 기다렸으나 타렌툼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로마의 전직 법무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가 1개 군단을 받아 마케도니아를 견제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이 법무관이 타렌톰에 휘하 장교인 마르쿠스 리비우스를 파견해 대비를 굳게 했기 때문이었다. 리비우스는 병사들로 하여금 시민들을 철저히 감시하게 하고, 성벽의 경비를 밤낮으로 감시해 도시의 수상한 움직임을 예방했다. 며칠간 헛되이 기다린 한니발은 분통을 터뜨린 뒤 북상해 아풀리아의 경계선 지역으로 이동한 뒤 그 지역을 약탈했다.
8.1. 시라쿠사 공방전
한편 공화정으로 복귀한 시라쿠사는 심각한 내분에 빠졌다. 로마인들은 시칠리아 섬의 상황이 심각하다고 판단하여 해당 문제를 시칠리아 담당 법무관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가 아닌 집정관에게 맡기기로 했다. 집정관 마르켈루스는 놀라를 떠나 시칠리아 섬으로 향했다.시칠리아 시민들은 어린 왕 히에로니무스의 암살에 충격을 받았으나 시라쿠사 원로원이 공화정으로의 복귀를 발표하고 왕의 난잡한 성생활을 이야기하자 여론이 반전되었다. 이때 살해된 왕의 삼촌인 아드라노도로스는 병사들과 함께 요새화된 섬에 들어가 버텼지만 시라쿠사 원로원의 항복 권고를 받자 성문을 열고 원로원에 출두했다. 그는 시민들과 원로원의 결단에 감명받았다고 칭찬한 뒤 왕의 금고를 공개함으로써 시민들의 호평을 받았다. 이후 열린 선거에서 아드라노도로스는 공직에 선출되었다.
이로써 시라쿠사의 상황이 진정된 것처럼 보였으나 곧 카르타고와 로마 사이의 동맹 선택 문제로 의견이 갈리게 되었고, 친로마파 정치가들이 권력을 장악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를 반대하는 친카르타고파와 민중들로 인해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졌고, 이를 지켜본 친카르타고파의 아드라노도로스와 그의 아내인 히에로 2세의 딸은 몰래 군대를 모아 시라쿠사를 장악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 쿠데타 음모를 그의 친구가 시라쿠사 원로원 의원들에게 밀고했는데, 시라쿠사 원로원은 아드라노도로스가 원로원에 입장할 때 그를 암살해버렸다.
갑작스러운 아드라노도로스의 죽음은 그를 지지하는 시민들을 분노하게 했고, 이들은 회의장 근처에 모여 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부렸다. 이때 원로원 의원 중 한 명이 나서서 왕가의 악행을 상기하고, 아드라노도로스의 음모를 공개하자 여론이 반전되었고, 격분한 시민들은 왕족을 모두 죽여야 한다며 고함을 질렀다. 이를 들은 원로원은 신속하게 히에로 왕가의 모든 일족을 학살했다.
이때 죽은 소년왕 히에로니무스의 섭정들 중 한 명이었던 조이푸스의 아내이자 히에로 2세의 딸이었던 헤라클리아가 자신의 두 딸을 데리고 신전으로 도망갔다. 당시 조이푸스는 생전의 히에로니무스가 이집트에 사절로 보낸 상태라 시라쿠사에 없었다. 헤라클리아는 자신의 무고함을 호소하면서 두 딸만이라도 살려달라고 애원했으나 병사들은 말을 하고 있던 헤라클리아의의 목을 그어버렸다. 이를 본 두 딸은 비명을 지르면서 거리로 뛰쳐나갔으나 쫒아온 병사들이 에워싸 죽을 때까지 사정없이 찔렀다.
이 처참한 상황을 목격한 시라쿠사의 군중들은 원로원의 포악함을 비판하고, 왜 원로원이 히에로 왕가의 숙청에만 신속하게 움직였는지 성토했다. 그러면서 아드라노도로스의 죽음으로 생긴 공직을 메우기 위한 선거를 개최하라는 요구를 했다. 뒤이어 열린 선거에서 히포크라테스와 에피키데스(Hippocrates, Epicydes)가 선출되었다.
이 두 사람은 시라쿠사인와 카르타고인의 혼혈이었는데, 로마군의 보조병 지휘관으로 종군했다가 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때 한니발에게 항복하여 부하가 된 뒤, 히에로니무스가 조약을 맺을 때 한니발로부터 파견된 사절들이었다. 이들은 히에로니무스가 암살된 뒤에도 계속 시라쿠사에 머물렀는데 한니발의 부하라는 이력을 가진 이들 주위로 친한니발파의 민중들과 시라쿠사의 불량배, 용병, 탈주병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선거가 열리자 잽싸게 이들을 동원해 공직에 선출된 것이었다.
시라쿠사는 회의를 열어 카르타고와의 동맹을 취소하고, 로마와 동맹을 맺기로 했다. 당시 로마의 전직 법무관 아피우스는 전함을 시라쿠사 앞바다에 보내 무언의 압박을 가했다. 시라쿠사의 사절이 아피우스에게 갔고, 아피우스는 그때 막 도착한 집정관 마르켈루스에게 이 사절을 보냈다. 사절을 만난 마르켈루스는 시라쿠사의 최고 책임자와 만나 직접 조약을 갱신하자는 답변을 했다. 이로써 모든 상황이 진정될 것 같았다.
그런데 엉뚱한 곳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때마침 레온티네(Leontine)라는 도시에서 내분이 생겨 도시의 지도자들이 시라쿠사에 군사 지원 요청을 했다. 시라쿠사 원로원은 민중들이 선출했지만 달갑지 않고 골치거리로 보고 있는 히포크라테스와 그를 따르는 지지자 및 불량배들로 병력 4천을 구성해 파병했다. 그들 무리를 꼴보기 싫어서 내린 조치였으나 이들을 무장시켜서 벌어질 문제를 고려하지 않은 큰 실책이었다.
아니나다를까 레온티네로 가던 히포크라테스는 갑자기 그 군대로 주변의 로마 동맹시 영역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이를 막으러 온 로마 군대까지 공격해 패주시키는 일까지 벌어지자 격분한 마르켈루스는 시라쿠사로 사절을 보내 히포크라테스와 에피키데스를 시라쿠사에서 추방함은 물론 아예 시칠리아 섬에서 추방할 때까지 동맹을 맺을 수 없다고 강경하게 답변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히포크라테스의 동료 에피키데스는 곧장 시라쿠사를 떠나 히포크라테스가 머무는 레온티네로 갔다.
레온티네에 온 에피키데스는 시라쿠사와 로마와의 조약 내용을 공개했다. 여기엔 조약의 대가로 시라쿠사가 레온티네을 통치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분노한 레온티네 시민들은 히포크라테스와 에피키데스를 지지하기로 하고, 히포크라테스와 에피키데스를 추방하라는 시라쿠사 원로원의 요청을 거부했다.
이 소식을 들은 마르켈루스는 자신의 전 병력을 이끌고 레온티네로 이동했다. 마르켈루스는 전 해의 법무관이자 시칠리아 섬의 로마군을 담당한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군대까지 소환해 후방을 치게 하고, 자신은 전방을 치기로 했다. 곧이에 이루어진 첫 번째 공격 시도에 레온티네는 함락되었다. 히포크라테스와 에피키데스는 헤르베수스(Herbesus)로 달아났다.
이때 시라쿠사의 병력 8천 명이 동맹시 군단으로서 로마군에 합류하려고 진격 중이었는데 레온티네에서 온 전령이 잘못된 정보를 전해주었다. 즉 레온티네의 모든 성인 남성이 죽임을 당하고, 도시의 재산을 로마군이 약탈했다는 소식이었다. 실제로 로마군은 레온티네 주민을 모두 살려주고 재산을 돌려주기까지 했으나, 그 와중에 탈영병 2천 명을 참수한 것이 레온티네 시민 전원 몰살로 잘못 알려진 것이었다. 이를 전해 들은 시라쿠사군은 행군을 거부했고 사령관은 군대를 메가라(Megara)로 철수시켰다. 그 다음날 시라쿠사군은 헤르베수스로 진군하여 히포크라테스와 에피키데스의 잔당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헤르베수스에서 포위된 히포크라테스와 에피키데스는 공격하는 부대 중 과거 자신들의 전우였던 크레타인 600여 명이 포함되었음을 보았다. 이 크레타인들은 과거 그들의 지휘하에 로마군에 종군했으며, 트라시메노 호수에서 한니발에게 생포되었다가 함께 풀려난 동료들이었다. 이들에게 접근한 두 사람은 애원했고, 크레타인들은 그들과 운명을 같이 하겠다고 대답한 뒤 몰래 부대에 숨겨주었다. 그 뒤 크레타 병사들은 본대에 합류했다.
그런데 본대에 합류했을 때 이미 히포크라테스와 에피키데스가 그들 중에 숨어있다는 소문이 부대 전체에 퍼진 상태였다. 시라쿠사군 사령관은 이런 일이 생기는 군대가 세상에 어디 있느냐고 질책한 뒤 이 둘을 포박해 끌고 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명령이 떨어지자 크레타군뿐 아니라 부대 전체에 야유와 분노에 찬 함성이 울려 퍼졌고 여기에 굴복한 사령관은 명령을 취소한 뒤 전 군을 메가라로 이동시켰다.
이 행군길에서 히포크라테스는 자신이 몰래 위조한 서신을 꺼내 들고 읽기 시작했다. 이 서신엔 시라쿠사 원로원이 마르켈루스에게 용병들이 로마군에 합류하거든 바로 처형해달라는 요청이 담겨있었다. 이를 보고 분노한 용병들은 시라쿠사군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히포크라테스가 이들을 저지해 간신히 막아냈다. 시라쿠사군 사령관은 시라쿠사로 도주했으며 이 8,000명의 병력은 히포크라테스와 에피키데스가 장악했다.
히포크라테스는 병사 한 명을 매수한 뒤 레온티네의 학살극에서 살아남은 자로 위장시켜, 시라쿠사 원로원에 보냈다. 이로써 로마인의 잔악함에 대한 헛소문은 시라쿠사 전체에 퍼졌고, 이후 시라쿠사로 진군한 히포크라테스와 에피키데스는 멋대로 성문을 연 수비대에 의해 방해없이 시라쿠사 시내로 진입했다. 시라쿠사 시내에 들어온 두 사람은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은 바 있는 공직자들과 원로원 의원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학살은 밤새도록 이어졌고 다음날 아침에 열린 공직 선거에서 히포크라테스와 에피키데스가 최고 책임자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두 사람이 시라쿠사의 권력을 장악했다.
이 사건을 보고받은 마르켈루스는 즉시 전군을 이동하여 시라쿠사의 성벽 앞에 당도했다. 성문 앞에서 시라쿠사인을 만난 로마 사절은
로마는 시라쿠사에 전쟁이 아닌 도움을 제공하기 위해 왔다. 살육의 피해자를 보호하고, 살육의 책임자를 처벌함으로써 혼란을 막을 것이다. 로마는 동맹 시민을 살육하는 자를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로마에 망명하는 자는 안전하게 집으로 보낼 것이며, 시라쿠사의 자유와 헌법이 원상태로 회복하고, 살육의 책임자를 로마에 넘기면 전쟁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수행되지 않으면 로마의 분노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전했다. 이를 들은 에피키데스는 시라쿠사를 공격하면 시라쿠사가 다른 도시들과 다름을 알 게 될 것이다.
라고 대답했다. 마르켈루스는 즉시 시라쿠사를 에워싼 뒤 수륙 양면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이로써 시라쿠사와 로마의 전쟁이 시작되었다.시라쿠사의 성벽은 육지와 바다를 둘러싸고 있었다. 바다쪽 성벽 중 취약한 부분이 있었고, 마르켈루스는 여기에 전함 60척을 띄워 공격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 로마군의 공격을 막은 사람은 과학자 아르키메데스였다. 당대 최고의 과학자이자 공학자인 아르키메데스가 시라쿠사 성벽에 그가 발명한 온갖 공성무기를 배치해 놓은 것이었다. 전함이 원거리에 있을 땐 무지막지하게 큰 바윗덩어리가 날라왔고, 이를 피해 성벽에 가깝게 접근하면 작은 투석 무기들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성벽 바로 앞에 접근하면 성벽에서 튀어나온 갈고리가 배의 고물을 걸고 허공에 날려버렸다. 로마인은 바다 쪽을 포기하고 육지 쪽으로 공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육지 쪽에도 아르키메데스의 공성무기가 배치된 상태여서 공격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마르켈루스는 회의를 열어 공격보다는 포위하여 식량을 끊어버리는 쪽으로 전략을 세웠다. 이후 마르켈루스는 시칠리아 담당 법무관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를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라고 로마에 돌려보냈다.[42]
이때 카르타고 본국에서 보낸 히밀코가 보병 2만 5천, 기병 3천, 전투 코끼리 12마리와 함께 시칠리아 섬에 상륙했다. 그는 곧장 아그리겐툼(Agrigentum)을 점령했다. 시라쿠사 측에서는 성을 지키는데 많은 병력이 필요없다고 생각해 히포크라테스에게 보병 1만, 기병 500명을 주어 히밀코와 합류하도록 했다. 히밀코의 도착으로 인해 시칠리아 섬의 많은 도시가 카르타고에 붙으려 했고, 이 소동 과정에서 엔나에 있는 로마 수비대가 시민들을 살육하는 소동이 벌어지는 등 시칠리아 섬 전체가 혼란스러운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한편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5세는 아폴로니아를 공격했고, 이를 담당한 로마 법무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가 바다 건너 그리스의 오리쿰에 상륙한 뒤 병력 2천 명을 아폴로니아에 보냈다. 이를 이끄는 로마 측 장군은 방심한 필리포스 5세의 군대 캠프를 야습하여 격파했다. 발레리우스의 1개 군단은 그대로 오리쿰에 숙영지를 짓고 그곳을 이후 군사활동의 근거지로 삼았다(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
히스파니아에서는 마고와 하스드루발 형제의 군대가 히스파니아 부족이 연합하여 집결한 대군을 회전을 통해 섬멸하여 진압한 일이 일어났고, 이 소식을 들은 스키피오 형제는 일제히 에브로 강을 건넜다.[43]
강을 건넌 스키피오 형제의 로마군은 마고와 하스드루발, 기스코와 삼연전을 치러 모두 승리했고, 이 승리로 인해 카스툴로(Castulo)라는 매우 번영한 도시가 로마 측에 붙었는데 한니발의 아내가 이 곳 출신이라고 전해진다. 후대의 로마인 서사시인인 이탈리쿠스에 따르면 한니발의 아내 이름은 이밀케(Imilice)였다.
9. 기원전 213년
로마에 공직 선거가 열려 소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가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소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파비우스 전략을 세웠던 전 해의 집정관, 파비우스의 친아들이었다. 로마는 기존과 같이 히스파니아 전쟁을 수행하는 군단을 빼고 남은 전장에 18개 군단을 투입하기로 했다.이때 로마시에 대화재가 발생했다. 그리고 많은 로마인들이 외국 종교에 빠져들고 토착 신앙을 버리는 경향이 생겼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고통에 빠진 국민들이 외국 종교에 몰입하는 현상이었다. 원로원은 안찰관을 보내 수습하려고 했으나 맞아죽을 뻔한 일이 생기자 법무관에게 이 일의 해결을 맡겼다.
북아프라카에서는 누미디아의 왕 중 한 명인 시팍스가 카르타고를 배신했다. 스키피오 형제는 백인대장 세 사람을 보내 시팍스와 조약을 맺었다. 카르타고는 다른 누미디아의 왕인 가이아(갈라)에게 접근해 그와 동맹을 맺고 시팍스를 공격했다. 가이아에게는 유능한 아들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마시니사였다. 로마인 기록으로는 그의 나이가 18세로 나오나 기원전 149년에 90세로 죽은 것을 고려하면, 적어도 27세는 되었다고 학자들은 추정한다.
마시니사는 아버지인 가이아에게 카르타고군에 종군하게 해달라고 간청했고, 허락을 받은 뒤 누미디아 기병을 이끌고 참전했다. 이후 벌어진 카르타고군과 시팍스군 간의 회전에서 마시니사는 시팍스군을 격파했다. 이후 마시니사는 달아난 시팍스를 추적하러 나섰다. 히스파니아의 스키피오 형제는 켈티베리아인과 동맹을 맺고 용병을 고용했다. 역사가 리비우스에 따르면 로마가 용병을 고용하기는 역사상 최초였다고 한다.
이탈리아 남부에서는 아풀리아에 위치한 한니발이 몇 개의 도시를 점령했고, 이 지역엔 한니발을 견제하기 위해 두 집정관과 법무관, 그리고 전직 집정관인 테렌티우스 바로가 7개 군단병과 함께 대치하고 있었다.
브루티움 지방에서는 로마 동맹시 군단이 티투스 폼포니우스 베이엔타누스의 인솔하에 카르타고 동맹시를 약탈하고 다니다가 이를 저지하러 나온 한노의 카르타고군과 회전을 벌였다. 한노가 이끄는 카르타고군은 동맹시 군단을 섬멸하고 베이엔타누스를 생포했다. 이는 이탈리아 내의 카르타고군을 상대하려면 적어도 로마 집정관, 법무관급이 이끄는 로마 군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또한 이 해에 삼니움의 최대 부족인 아르피족이 로마에게 정복당했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현직 집정관인 자신의 아들 소 파비우스의 진영에 머물며 사령관 역할을 했는데, 카르타고에게 변심하고 로마 캠프를 방문한 아르피족의 리더를 억류한 뒤, 아르피족의 도시를 공격한 것이었다. 파비우스의 로마군은 공성전때 비가 오는 틈을 타 성내의 요소를 점령했다. 뒤이어 벌어진 시가전에서 마주친 카르타고군은 카르타고 진영에서 싸우다가 갑자기 변심한 아르피족과 로마군의 공격을 받아 전멸당했다.
아르피의 함락으로 인해 로마인은 그들과 인접한 삼니움에 대한 군사적인 부담을 크게 덜게 되었고, 로마는 이후 벌어질 카푸아 공방전을 착수할 수 있는 여력을 갖출 수 있었다. 이 해에는 이 정도의 사건만 일어났고, 어느덧 한 해가 지나 로마에 공직 선거가 개최되었다.
10. 기원전 212년
10.1. 타렌툼의 함락
그 해를 담당할 집정관 선거에서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가 당선되었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전전해 이전부터 계속 시칠리아 섬에서 마르켈루스가 도착할 때까지 군사 활동을 벌이던 그 법무관이었다.안찰관에 당선된 인물 중 주목할 자가 있었는데 22세 젊은이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였다. 훗날 '아프리카누스'라는 명예로운 존칭을 받는 그는 호민관으로부터 출마하기엔 나이가 어리다고 지적받자 아래처럼 대답했다.
로마 시민이 나의 선출을 원한다면 그걸로 내 나이는 충분하다.
이후 원로원은 군단의 수를 늘려 히스파니아 군단까지 포함, 모두 25개 군단을 전장에 투입하기로 했다. 이때 징집할 시민의 수가 부족하여 징집 연령의 하안선을 낮추었고, 17세 미만 중 복무하기로 맹세한 자는 17세로 간주한다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이때 칸나이 전투 패잔병 출신 병사들이 보낸 서한이 원로원에 당도했는데 용서를 구하는 한편, 그 전투를 지휘한 사령관들이 멀쩡히 공직에 임명되는 상황에서 병사들에게만 책임을 지우는 것은 부당하다는 내용이었다. 이들은 전공을 세워 죄를 씻기를 원했다.
원로원은 동료를 버리고 도주한 자들에게 국가의 안보를 맡길 수는 없으나 마르켈루스가 이들을 기용하는 것을 막지는 않겠다. 그러나 어떤 무공을 세운다고 해도 한니발이 이탈리아 반도를 떠날 때까지 시칠리아 섬에 머무는 형벌을 철회하지는 않겠다고 대답했다.
그 해 타렌툼이 보낸 인질들이 몰래 로마시를 탈출해 달아나다가 붙잡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로마인들은 이들을 타르페이아 절벽(Rupes Tarpeia)에서 내던지는 방식으로 처형했고, 이 소식을 들은 타렌툼의 젊은 장교들은 로마를 배신할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니코와 필렌메누스(Nico, Philenmenus)가 이들 반로마파를 이끌었다.
한니발은 타렌툼에서 도보로 약 사흘 거리에 주둔 중이었는데, 음모를 꾸민 필렌메누스는 한니발을 만나고자 했다. 그는 타렌툼에서 사냥 애호가로 유명했으므로 사냥을 한다는 핑계로 성문을 빠져나가 한니발과 만났다. 한니발은 그를 크게 치하하고 격려한 뒤, 상당한 보상을 약속하고 가축 1마리를 내어주어 돌려보냈다. 돌아온 필렌메누스는 이 가축을 사냥해서 잡은 거라고 둘러대며 성에 무사히 돌아왔다. 이후 필렌메누스는 매일 같이 한니발을 만나기 위해 왔다 갔다 했는데, 돌아올 때마다 짐승을 가져왔고 항상 선물로 바쳤으므로 성문 수비대는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급기야 나중엔 그가 성문 앞에서 휘파람만 불면 성문을 자동으로 열어주었다.
이를 보고받은 한니발은 드디어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후, 군사 행동을 개시했다. 타렌툼 점령 과정은 과연 한니발이라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주도면밀했다. 우선 한니발은 사흘 거리 캠프에 계속 주둔하면서 큰 병에 걸린 것처럼 위장한 뒤 한동안 군사활동을 멈추었다. 타렌툼의 로마군 사령관은 한니발이 병에 걸렸다고 판단하여 한니발의 동향에 대한 경계를 늦추었다.
이 상태로 며칠을 보낸 한니발은 사전작업으로 누미디아 기병 50기를 파견했다. 그들에겐 타렌툼 주변의 농가를 약탈하고 보이는 농부는 무조건 죽이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 누미디아 기병대의 활동 목적은 타렌툼 시민과 로마 수비대의 주의를 끌어 한니발 본대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 뒤 한니발은 밤에 보병 1만 명과 기병을 이끌고 자신의 캠프를 떠나 타렌툼으로 이동했다. 먼저 보낸 누미디아 기병대의 활약으로 한니발의 군대는 누구에게도 발각되지 않은 채 타렌툼 성벽에서 15마일 떨어진 곳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그대로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밤이 되자 한니발은 필렌메누스에게 보병의 일부를 주어 그가 자신이 자주 다니는 성문으로 가게 했으며, 자신은 주력군을 이끌고 다른 성문으로 향했다. 그 성문엔 한니발과 내통한 니코가 있었다.
성문에 도착한 한니발이 횃불을 켜자 니코도 횃불을 켰다. 신호로 한니발의 도착을 확인한 니코는 수비병을 죽이고 타렌툼의 성문을 열었다. 다른 성문에 도착한 필렌메누스는 큰 돼지를 선물로 가져갔고, 이를 수비병이 받는 순간 그의 옆구리를 찔러 살해했다. 그리고 필렌메누스는 보병과 함께 열린 성문 안으로 들어왔다.
한니발과 그의 병사들은 그들을 안내하는 내통자들의 인도를 받아 성내로 순조롭게 진입했고, 한니발은 로마인만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행군 중 그들을 목격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그들과 아는 사이인 내통자들이 그들에게 가서 침묵을 다짐시켰다. 이 상태로 은밀히 로마인의 수비대 캠프에 당도한 한니발의 병사들은 그 안에 들어가 그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방심한 로마인들은 고요한 밤에 자다가 영문도 모른 채 계속 살해당했으며, 마침내 깨어난 로마군 수비대가 지르는 소리와 소동은 로마군 사령관을 잠에서 깨웠다. 그는 함성을 듣자마자 타렌툼 시민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생각해 절벽 꼭대기에 있는 성채로 병사와 함께 서둘러 달아났다. 한편 타렌툼 시민들 또한 이 함성 소리를 듣고 로마군 수비대가 시민들을 약탈한다고 생각했다. 이 소동이 누구에 의해 일어난 것인지 밝혀진 것은 어느덧 동이 터서 주변을 밝힌 햇빛이었다. 날이 밝자 한니발 병사들의 히스파니아 및 갈리아 군복이 모두의 눈에 띄었고, 이로써 타렌툼 시민들과 로마인들은 소동을 일으킨 장본인이 다름아닌 성내에 들어온 한니발임을 알게 되었다.
살아남은 로마군이 모두 성채로 달아나고 타렌툼 시민들만 남게 되자 사태는 진정되었다. 한니발은 타렌툼 시민들을 소집했고 이 요청을 들은 시민들은 모두 나와 한니발을 맞이했다. 이어진 연설에서 한니발은 자신이 동맹시민에게 보인 호의를 상기시키고, 로마인의 압제를 비판한 뒤 타렌툼 시민들에게 모두 그들의 이름을 대문 앞에 쓰라고 명령했다. 한니발군은 이름이 적혀지지 않은 집에 들어가 약탈했으며 상당한 전리품을 챙겼다.
그 뒤 한니발은 그와 함께 타렌툼을 장악한 친카르타고파 정치인과 동맹 조약을 맺었고, 로마군 수비대가 달아난 성채를 포위한 뒤 공격했다. 그런데 그 성채는 방어에 매우 적합한, 3면이 바다를 면한 절벽으로 막히고 한 면만 육지로 이어진 곳이라 한니발은 이 성채를 점령할 수가 없었다. 한니발은 타렌툼 시민들에게 이들에 대한 곡물 수송을 끊게 했으나, 타렌툼 주위의 로마 해군이 곧장 타렌툼의 항구를 봉쇄하는 한편 성채에 꾸준한 병사와 식량을 보급하여 이곳을 지켜냈다( 1차 타렌툼 공방전).
10.2.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죽음
한편 새로 선출된 집정관 풀비우스와 아피우스는 군단병의 규모를 늘린 뒤 카푸아 공방전에 착수했다. 로마는 한니발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한 삼니움 지역의 배신 세력 대부분을 평정했으므로 캄파니아 지역에 병력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로마군은 카푸아 주변 지역의 곡식을 깨끗이 소멸시켰고, 카푸아 군대는 이런 로마인의 군사 활동을 저지할 수 없었다. 그 해의 곡식을 수확하지 못해 식량이 바닥난 카푸아 시민들은 한니발에게 곡물을 요청했다.타렌툼에 있었던 한니발은 브루티움의 한노에게 이 일을 맡겼다. 한노는 자신의 부대와 함께 브루티움에서 징발한 곡물을 싣고 베네벤툼에 도착했다. 이때 카푸아 시민들은 고작 짐마차 300대를 보내 맞이했는데 이들의 무성의한 태도를 본 한노는 배고픈 짐승들만도 못하다고 디스한 뒤 짐마차를 더 보내라고 명령했다. 이 사이에 한노군의 주둔 소식은 로마인들에게 알려졌고, 집정관 풀비우스가 약탈하러 한노가 진영을 비운 틈을 타 캠프를 공격했다. 사령관이 없는 카르타고 캠프의 수비병은 처절하게 저항했으나 결국 점령되었고, 로마군은 카푸아에게 보내기로 한 식량을 모두 가로챘다( 2차 베네벤툼 전투).
이때 다른 집정관이었던 아피우스가 그의 군대와 함께 도착해 합류했다. 두 집정관이 이끄는 6개 로마 군단병, 6개 동맹시 군단병(1개 군단병: 4200명)이 카푸아를 공격하기 위해 집결하자 카푸아 시민들은 다시 한니발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때 한니발은 우선 기병 2천 명을 원군으로 보냈다.
그 사이에 집정관 2회 경력에 노예로 구성된 군단병을 이끌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전사했다. 그라쿠스의 친구 중 루카니아의 리더급 유력자가 있었다. 그는 카르타고와 내통한 상태였다. 그는 그라쿠스를 만나 지금 루카니아인들이 한니발과의 동맹을 끊고, 로마에 돌아오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로마인이 처참하게 보복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이 걱정을 덜어주면 루카니아는 로마로 돌아올 것이나 민중들이 자신의 말은 믿지 않을 것이므로 로마 원로원 의원이자 전직 집정관 출신인 그라쿠스가 직접 그들을 만나 이를 말해주길 요청했다.
그라쿠스는 이 요청을 받아들여 릭토르 및 소수의 호위병과 함께 떠났다. 그런데 숲에서 그 유력자와 내통한 카르타고 기병의 복병을 만나게 되었다. 사방에서 포위된 상태이므로 살아날 길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라쿠스는 휘하 호위병에게 가축처럼 순순히 죽을 것인가, 용기를 보여주고 로마인답게 죽을 것인가 선택하라고 연설한 뒤 병사와 함께 자신을 배신한 유력자를 향해 돌진하여 장렬히 전사했다. 그라쿠스의 시체는 곧바로 한니발에게 보내졌고, 한니발은 그라쿠스의 장례식을 예우를 갖춰 치러주었다고 전해진다. 그라쿠스가 전사하자 그라쿠스의 2개 노예 군단은 모두 캠프를 떠나 흩어졌다.
타렌툼의 배신 이후 그 도시 인근의 메타포툼은 로마군이 지역 방어를 위해 자리를 뜨자 곧장 카르타고에 붙었고, 투리에선 시민들과 군인이 그 지역을 방어하는 로마 수비군을 카르타고군과 함께 협공해 대패시켰다.[44]
10.3. 북상하는 한니발의 연이은 승리
카푸아의 원군 요청을 여러차례 들은 한니발은 카푸아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군대와 함께 타렌툼을 떠나 캄파니아로 북상하기 시작했다. 한니발과 그의 휘하 병사들은 방해 없이 카푸아의 근처 지역에 당도했다. 한니발의 도착 소식을 들은 집정관 아피우스와 풀비우스는 카푸아의 포위를 풀고 각각 루카니아와 쿠마이로 이동했다. 이들은 한니발을 유인하여 카푸아와 떨어뜨려 놓으려는 계획이었다. 한니발은 이 두 로마 집정관의 생각대로 집정관 아피우스와 그의 군대를 추적하기 시작했다.이때 로마에는 만기제대한 백인대장 마르쿠스 켄테니우스 페눌라가 있었다. 그는 우람한 덩치와 전쟁터에서 보여준 용기로 유명했고, 로마 시민들과 병사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한니발을 격파할 계획이 있다고 주장했으며 이를 들은 병사와 시민들이 퍼뜨린 소문을 전해 들은 법무관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그를 만난 뒤 곧장 로마 원로원 앞에 데려갔다. 페눌라는 자신의 계획을 말한 뒤 병사 5천 명만 요청했는데 놀랍게도 원로원은 그를 믿고 그의 요청에 3천 명을 더한 1개 로마 군단병, 1개 동맹시 군단병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페눌라가 이 병력을 데리고 진군을 하자 그의 백인대장으로서의 명성을 들은 로마 시민들이 계속 합류해 8천 명에서 1만 6천 명까지 규모가 늘어났다.
켄테니우스는 집정관 아피우스를 추적 중인 한니발군을 향해 이동했는데 이 군대의 이동 경로를 파악한 한니발은 자신의 병력을 이동시켜 전투를 걸었다. 한니발이 직접 지휘하는 회전(pitched battle)은 칸나이 전투 이후 4년 만이었다.
이 교전에서 한니발은 역시 회전에선 다른 카르타고 장군들과 차원이 다른 사령관임을 입증했다. 로마군 1만 6천 명은 한니발의 카르타고군과 교전한 초반에 이미 전열이 무너졌으며, 그 상태에서도 로마군은 2시간 동안 버티었다. 그러나 마침내 전투가 가망이 없어짐을 확인한 사령관 마르쿠스 켄테니우스 페눌라가 적진에 자살돌격을 하여 죽었고, 사령관을 잃은 병사들은 달아났으나 이미 퇴로를 한니발이 미리 보낸 기병이 차단하고 있었다. 로마군 1만 6천 중 살아남은 자는 단 1천 명뿐이었다( 실라루스 전투).
로마의 2개 군단병에 달하는 군대를 소멸시킨 한니발은 타렌툼이 속한 아풀리아를 담당한 현직 법무관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45]가 군대와 함께 맹렬한 기세로 아풀리아 지역을 휩쓸고 다닌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한니발은 그와 싸우기 위해 곧장 아풀리아로 이동했다.
타렌툼은 아풀리아의 최대 도시이자 이탈리아 반도 전체에서도 로마를 제외한 도시 중엔 카푸아와 쌍벽을 이루는 대도시였는데, 이런 타렌툼이 배신하자 그 지역의 많은 도시가 로마를 배신했다. 그 지역 담당 사령관이었던 그나이우스 풀비우스의 로마군은 이들에게 강한 압박을 가하면서 많은 승리를 거두고, 전리품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연이은 승리로 인해 로마군 병사들의 사기는 매우 높았으며, 때마침 그들 앞에 카르타고군이 당도했다는 소식을 듣자 로마 병사들은 전투를 간절히 희망했다. 풀비우스는 병사들에게 강요된 상태가 반, 그들의 의욕에 거는 희망이 반인 상태로 그들을 전장에 세웠다. 그러나 이들에겐 불행하게도 그들이 상대할 카르타고군은 다름아닌 한니발이 친히 이끄는 부대였다.
뒤이어 벌어진 회전에서 한니발은 전설적인 명장인 그의 클래스를 입증하며 또다시 로마군을 일방적으로 살육했다. 전투에 앞서 한니발의 경기병은 농지 주위에 숨어 있다가 로마군 라인의 배후를 쳤으며, 로마군의 퇴각로엔 카르타고 기병 2천이 지키고 서 있다가 달아나는 로마인을 추격해 죽였다.
교전이 시작되자마자 카르타고 보병대는 전진하다가 길어진 로마군의 보병 라인 사이를 돌파했고, 로마군의 전열은 쪼개졌다. 이후 카르타고군은 로마군의 분대를 고립시킨 뒤 안으로 파고들어 오기 시작했는데, 이를 본 그나이우스 풀비우스는 즉시 휘하 기병 2천 명과 함께 로마를 향해 달아났다. 로마군 1만 8천 명 중 오직 2천 명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1차 헤르도니아 전투).
10.4. 카푸아 공방전
로마는 한니발의 공격과 그라쿠스 휘하 노예 군단의 탈영으로 무려 6개 군단이 소멸했음에도 불구하고, 카푸아 포위를 예정대로 진행했다. 집정관은 법무관 네로를 불러들여 기병을 맡기고, 이 세 부대로 카푸아의 포위망을 좁혀 들어갔다. 이를 저지하려는 카푸아군과 로마군은 산발적인 교전을 계속 벌였으나 로마군의 전투력은 강력해 카푸아군이 계속 패주했으며 마침내 카푸아 시민들은 성안에 갇히게 되었다. 로마 원로원은 카푸아에 전령을 보내 아래처럼 최후통첩을 보내었다.이듬해 3월 15일까지[46] 카푸아 성벽을 나오는 자는 자유와 그의 재산 모두를 보장해주겠다. 그러나 성내에 남는 자는 로마의 적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카푸아 시민 대부분은 이 요청을 무시했다.카푸아 시민들은 로마인을 상대로 항상 승리하는 한니발을 굳게 믿었고, 아풀리아에 있는 한니발에게 다시 사절을 보내 구해달라고 간절히 요청했다. 한니발은 이렇게 대답했다.
로마 집정관 두 명이 자신의 모습을 보자마자 포위를 풀지 않았는가? 두 번째도 마찬가지일 테니 걱정하지 말라.
10.5. 시라쿠사의 함락
이때 시칠리아 섬의 마르켈루스는 시라쿠사를 어떻게 해야 함락시킬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고심하고 있었다. 원래 계획은 식량을 차단하는 방침이었으나 카르타고 본국이 계속 시라쿠사에 식량을 보급해주고 있었다.[47] 그런데 시라쿠사 공략의 실마리는 엉뚱한 데서 풀렸다.로마 경비대는 시라쿠사가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5세에게 보낸 사절을 잡았는데 그는 스파르타인이었다. 당시 로마는 스파르타와 아테네를 비롯한 아이톨리아 동맹을 지원하여 마케도니아 왕국과 싸우게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스파르타인을 함부로 다룰 수 없었다. 시라쿠사는 이 사절을 구하기 위해 몸값을 지급하겠다고 전했고 마르켈루스는 동의했다.
이때 로마 장교 중 한 명이 두 사절이 포로를 인도하는 장소의 방어력이 상당히 취약한 것을 목격했다. 그는 마르켈루스에게 이를 보고했고, 그 장소를 둘러 본 마르켈루스는 공격하기에 아주 좋은 장소라고 생각했다. 마르켈루스는 곧 다가오는 아르테미스 축제일에 맞춰 그곳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아르테미스 축제는 시라쿠사의 최대 명절로, 시민들은 광장에 나와 와인과 각종 진미를 먹는 행사를 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시라쿠사인들은 포위를 당하는 중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그대로 개최했다. 로마인의 포위덕에 식량의 질은 나빴으므로 시민들은 와인을 많이 마셔댔다.[48] 시민들이 곯아떨어지자 마르켈루스는 행동을 개시했다.
우선 병사 1천 명을 보내 그전에 봐둔 포로가 드나드는 작은 성문의 벽에 올라갔다. 이 병사들이 수비대 몇 명을 죽이고 그 성문을 열자 로마군은 그 문으로 들어가 수비대를 죽이기 시작했다. 어이없게도 많은 수비대원이 술에 취해있었고, 로마군이 성의 방어용 성문을 부술 때까지 시라쿠사인들의 반응은 없었다. 성문이 부숴진뒤 나팔이 울려 퍼지면서 로마군이 총공세를 개시하자 비로소 수비대원들은 대부분 잠에서 깼으나 취한 상태인 이들은 성이 이미 점령되었다고 보고 달아났다.
성벽을 장악한 마르켈루스는 포위망에 있는 모든 로마 군단병을 소집해 성내로 진입했다. 로마인이 성내의 광장을 장악하자 날이 샜고, 잠에서 깬 시라쿠사인들은 비로소 상황을 파악했다. 시민들은 매우 놀라 달아나거나 뛰쳐나오는 등 도시 전체에 큰 소동이 일어났다.
이때 시라쿠사의 최고 권력자인 에피키데스에게 로마군이 시라쿠사 내부에 들어왔다는 상황이 전달되었는데, 정확히 전달되지 않았으므로 에피키데스는 로마인 몇 명이 잠입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서둘러 병사를 이끌고 광장을 향해 진군했다. 가는 길에 달아나는 시라쿠사 시민들의 무리를 만났는데 그는 시민들에게 그들의 흥분상태가 상황을 악화시킨다고 꾸짖으며 진격했다. 그런데 에피키데스가 광장에서 도착하자 본 것은 광장이 무장한 로마 군단병으로 가득 메워진 광경이었다. 에피키데스는 자신의 병사를 이끌고 얼른 시라쿠사 외곽에 있는 성채로 달아났다.
시라쿠사를 점령한 마르켈루스는 매우 감격스러워 눈물을 지을 정도로 감상에 잠시 젖었다. 그 이유는 어느 외부 세력도 점령한 적이 없는, 그리고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 아테네의 총공세를 막아내고 아테네 원정군을 전멸시켜 사실상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스파르타의 승리로 마무리지은, 당대의 난공불락으로 유명했던 곳이 시라쿠사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성을 점령한 성취에 도취하여 감격에 젖은 마르켈루스는 곧 감정을 추스르고 성내의 공성전을 지시했다.
성내에 들어온 로마 군단병은 전투에서 계속 우위를 점해 성내의 요충지를 점령했으나 에피키데스가 들어가서 버틴 성채의 방어는 단단했고, 히밀코와 히포크라테스가 이끄는 아그리겐툼의 카르타고 - 시칠리아 연합군이 도착해 외각에 주둔하며 재탈환을 노렸다. 또한 카르타고 해군까지 나타나 로마군의 외부와 성내의 차단을 시도했다. 로마군은 자칫하다간 성내의 시라쿠사 시민과 외부에 있는 연합군의 협공을 받아 패주할 수도 있는 위기에 빠졌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로마인의 승리로 결정지은 것은 또 엉뚱하게도 다른 요인이었다. 당시 시라쿠사는 매우 더웠고, 군대 주둔지는 불결했는데 이 때문에 전염병이 터졌다. 대치 중인 로마군과 카르타고군은 전염병으로 자꾸 죽어 나갔다. 그러나 로마군은 이미 2년간의 포위 경험으로 다소 상황에 익숙했으나, 카르타고군은 이에 대한 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로마군과 카르타고군은 모두 시체를 매몰하고 전염병에 저항하느라 전투를 중단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중 카르타고군의 상당수가 병사했는데, 어이없게도 카르타고와 시라쿠사 연합군의 사령관들인 히밀코와 히포크라테스가 전염병에 걸려 죽어서 시라쿠사 외부의 카르타고군은 와해되어 버렸다.
카르타고 해군 사령관인 보밀카르는 육군이 전멸당한 것을 본국에 보고했는데 카르타고는 그에게 싸우라고 함대 130척을 주었다. 아직도 시라쿠사 성내 곳곳의 구획 요충지에서 시라쿠사 병사들이 저항하는 상태였고, 이들에게는 보급이 필요했다. 카르타고는 보밀카르에게 이들에게 보내는 보급 임무를 맡겼다.
그런데 그는 어찌된 영문인지 로마군과의 전투를 겁냈다. 에피키데스는 전투를 해달라고 요청하기 위해 요새를 떠나 보밀카르에게 왔는데, 그에게 설득된 보밀카르는 시라쿠사를 향해 이동했다. 그런데 해전을 치르기 위해 로마 함대가 모습을 드러내자 보밀카르는 군대를 철수할 것을 명령하고 타렌툼을 향해 떠났다. 희망이 사라진 에피키데스는 시라쿠사로 가지 않고 아그리겐툼으로 향했다.
시라쿠사의 권력을 장악한 에피키데스가 시라쿠사를 포기하자 그의 부하들은 다시 지도자 3명을 뽑아 저항해 보았으나, 시라쿠사 시민들은 로마와 항복 교섭을 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이 지도자 중 한 명이 배신하고 로마군을 성채 내로 진입시킴으로써 마르켈루스는 시라쿠사 점령을 마무리 지었다. 그는 군대를 풀어 히에로 왕실의 금고를 확보하고, 병사를 풀어 전리품을 노획하게 했는데 이때 과학자 아르키메데스도 목숨을 잃었다.
시라쿠사는 외부의 점령을 당한 적이 없어서 상당수의 그리스 예술품과 문화재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마르켈루스는 값진 예술품은 모두 쓸어담아 로마로 보냈는데, 리비우스에 따르면 로마가 그리스의 우월한 예술문화를 최초로 접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때 한니발은 시라쿠사의 함락 소식을 듣고 무티네스(Muttines)라는 휘하 장교를 시칠리아 섬에 파견했다. 카르타고 본국은 한노라는 장군을 지휘관으로 임명해 군대와 함께 시칠리아 섬에 상륙시켰다. 에피키데스와 무티네스는 이 카르타고 군대와 합류했고, 무티네스는 기병대의 지휘권을 받았다.
이때 무티네스는 기병을 이끌고, 시칠리아 섬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친 카르타고파 도시들에게 군사적인 원조를 제공했다. 시라쿠사의 함락 소식에 상심한 친 카르타고파 정치가들은 무티네스의 실력에 상당한 기대를 품게 되었고, 곧 그는 그들의 영웅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무티네스의 출신 성분이었다. 그는 카르타고 혈통이 아닌 누미디아인이었던 것이다.
당시 카르타고군 지휘관의 면면을 보면 지나치게 혈통을 중시하여 임명되는 상황이었고, 이는 한니발군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히스파니아 담당 사령관은 한니발의 동생인 하스드루발과 마고 형제였으며, 이탈리아 남부 브루티움을 담당하는 사령관인 한노는 한니발의 사촌이었다. 기병대장으로 등장하는 마하르발 또한 한니발과 친척 관계였다.[49]
반면 로마는 철저히 실력 위주로 공직자가 선출되어 지휘권을 받았는데 이들 중 가장 대표적이고 뛰어난 인물들은 평민 출신의 그라쿠스와 마르켈루스였다.
어찌됐건 무티네스는 이런 출신 성분 때문에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누미디아 기병만 지휘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마르켈루스의 로마 군단병과 한노, 에피키데스, 무티네스의 시라쿠사 - 카르타고 연합군 병력이 히메라 강에서 만났다. 마르켈루스의 본대가 도착했을 때 무티네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처럼 갑자기 강을 건너 돌진했고, 완전히 허를 찔린 마르켈루스의 군대는 캠프로 후퇴했다.
이후 두 군대가 대치 중인 상황에서 누미디아 기병 300명이 탈영하는 사건이 생겼다. 무티네스가 그들을 잡으러 본대를 이탈하면서 한노에게 자신이 없는 동안에는 싸움을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한노는 무티네스의 뛰어난 명성을 질투했고, 그의 출신 성분을 무시했다. 그는 무티네스의 요청이 자신의 지휘권에 대한 참견이라고 생각하여 청개구리처럼 무티네스가 없는 동안 로마군에 전투를 걸었다. 마르켈루스는 이전에 허를 찔려 캠프로 달아난 사건 때문에 심한 자존심의 상처를 입은 상태였으므로 이에 즉각 응했다.[50] 이 회전에서 마르켈루스의 로마군은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가 마르켈루스의 시칠리아 섬에서의 마지막 군사활동이었다.
10.6. 베티스 고지의 전투
이때 히스파니아에서 푸블리우스 스키피오와 그나이우스 스키피오 형제가 전사하고 로마군이 섬멸당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자세한 설명은 해당 항목 참고.베티스 고지의 전투 이후 모인 로마군의 패잔병은 에브로 강 북쪽에 집결했다. 이들을 지휘할 사령관이 없었으므로 병사들은 유능한 기병인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셉티미우스를 그들의 사령관으로 추대했다. 마르키우스는 공직자도, 장교 출신도 아니었지만 상당히 숙련된 지휘 솜씨를 발휘하여 패배를 잘 수습하고 히스파니아 주둔 로마군의 대위기를 넘겼다.
11. 기원전 211년
원로원에 히스파니아의 마르키우스가 보낸 서신이 도착했다. 원로원은 마르키우스가 보낸 서신의 서두에 자신을 칭한, 아마도 사령관을 의미하는 전직 법무관(Propraetor)라는 문구를 보고 매우 불편해했다. 병사들이 마음대로 사령관을 추대한 사건과 그 사령관이 공직을 자칭하는 것이 달갑지 않았던 원로원은 새로운 사령관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그 와중에 민회는 기원전 212~211년 겨울, 과거 1차 헤르도니아 전투에서 한니발에게 대패한 법무관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를 탄핵했다. 탄핵에 나선 호민관은 그가 싸우는 중인 군대를 놔둔 채 내뺀 비겁한 행동을 강력하게 규탄했다. 첫 번째 재판과 두 번째 재판에서 벌금형이 선고되었으나 세 번째 재판에서는 그와 싸운 군인들이 증인으로 나와 싸우는 도중 사령관과 그의 부관이 모두 도주한 것을 발견했으며, 사령관이 도망한 데엔 틀림없이 이유가 있다고 본 병사들이 전투를 멈추고 도주하기 시작했다는 증언을 하자 시민들은 격분했다. 민회는 그나이우스 풀라쿠스에게 사형에 해당하는 처벌을 내리기로 결정했다.
그나이우스가 형인 현직 집정관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에게 서신을 보내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퀸투스는 동생을 구하기 위해 로마 법정에 출두하려고 했는데, 원로원은 이런 사건으로 카푸아 포위라는 국가의 중대사를 비우는 것은 국익에 반한다며 거부했다. 결국 그나이우스는 당시 로마에서 사형에 필적하는 형으로 간주된 추방형을 선택하고 로마를 떠났다.
이런 사건 뒤에 이어진 공직 선거에서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켄투말루스 막시무스(Gnaeus Fulbius Centumalus)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막시무스가 기원전 211년도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갈바는 상당히 특이한 이력으로 집정관에 선출되었는데, 그는 아무런 공직을 맡아 본 적이 없는 상태로 집정관에 입후보해 당선된 것이었다.
11.1. 한니발이 문 앞에 서다
로마군에 포위된 카푸아는 식량이 바닥난 상태가 되어 위급한 상황에 빠졌다. 카푸아인들은 한니발에게 사절을 다시 보냈고, 한니발은 구원 약속을 전달했다. 한니발을 굳게 믿고 있었던 카푸아 시민들의 사기가 크게 상승했다. 로마군의 계속된 포위 공사를 훼방놓기 위해 카푸아인은 군대를 이끌고 성 밖에 나와 공격했고, 그 결과 보병 전에서는 패배했으나, 기병전에서는 승리를 거두었다. 총사령관 풀라쿠스는 백인대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로마 기병의 뒷자리에 투창병을 태웠고, 기병전이 벌어지는 순간 이 투창병이 말에서 내려 투창을 던지거나 말을 찌르는 방법으로 승리를 거두었다.마침내 로마군은 포위망을 완성했고, 이때 타렌툼에 있었던 한니발이 카푸아를 구하기 위해 북상하기 시작했다. 한니발은 과거에 보급된 40마리의 전투 코끼리 중 그때까지 살아있었던 33마리 모두를 데리고 출발했다.
행군하는 동안 마을 몇 곳을 점령한 한니발은 드디어 카푸아의 인근에 도착했다. 그는 카푸아 성내에 전령을 보내 로마군의 포위망 공격 시각을 알렸고, 이 타이밍에 맞춰 카푸아 시민군도 로마군을 총공격하도록 명령했다. 한니발의 도착을 알게 된 로마군의 지휘관 풀비우스와 아피우스는 각각 한니발 부대와 카푸아 부대를 담당하기로 하고 공격에 대비했다.
그리고 예정된 시각이 되자 카푸아군과 한니발군이 동시에 성밖의 로마군의 포위망을 공격했다. 성문을 열고 뛰쳐나온 카푸아군은 전력을 다해 총공격했으나 아피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로마군은 카푸아군을 손쉽게 격퇴하고 오히려 열려진 카푸아 성문 앞까지 밀어붙힌 뒤, 성문 내의 진입을 시도했다. 하지만 성문의 위에 배치된 투창병이 던진 투창에 의해 많은 로마병사가 부상을 입었고, 이들을 지휘하던 아피우스의 왼쪽 가슴이 꿰뚫리게 되자 전투를 중단했다.
풀비우스가 담당한 쪽에서 벌어진 한니발의 공격은 매우 강력했다. 한니발의 부대는 전투 코끼리를 앞세워 로마군의 전열을 돌파했고, 캠프 외각의 도랑에 진입했다. 이 캠프의 목책과 그 앞에 파놓아진 도랑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코끼리의 대부분이 죽었는데, 도랑을 메운 코끼리의 시체를 넘은 히스파니아 보병대는 로마군의 캠프 내부까지 들어와 그 캠프의 일부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로마군은 이 위기를 보고만 있지 않았다. 히스파니아 보병대의 공격을 정면에서 받는 하스타디들이 전력을 다해 버텼고, 풀비우스는 백인대장들에게 다급한 명령을 내려 전진을 멈춘 한니발군을 포위하라고 명령했다. 이를 들은 백인대장들이 병사들을 이끌고 사방에서 치고 들어왔고, 이후 카르타고 보병대의 전열이 분열되었으며 캠프에 진입한 히스파니아 보병대는 고립되었다. 이를 본 한니발은 퇴각 신호를 보내는 한편 즉시 기병을 보내 이들의 퇴각로를 안전하게 보호했다. 이렇게 한니발은 공격을 중단하고 군대를 퇴각시켰다.
카푸아 포위망의 대비가 매우 잘 되어 있고[51] 카푸아 시민군의 공격력이 너무도 빈약한 것을 확인한 한니발은 다른 방법으로 포위망을 풀려고 했다. 이는 다름 아닌 도시 로마를 직접 공격하는 것이었다.
한니발은 우선 서신을 카푸아에 보내 로마 공격의 의도를 알렸다. 그 뒤 즉시 강을 도강하여 로마로 향했다. 한니발 부대의 움직임은 총사령관 풀라쿠스에게 보고되었고 그는 로마 원로원에게 상황을 알렸다.
이어진 로마 원로원 회의에서 파비우스는 한니발의 의중은 카푸아의 포위를 푸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각지에 배치된 로마군을 조금도 움직여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 의견 대신, 좀 더 신중한 반론이 채택되어 원로원은 병력 1만 6천 명을 소환했다
이윽고 한니발의 군대가 로마에 도착했다. 로마 시민들은 한니발과 그의 병력을 보고 큰 패닉에 빠졌다. 여자들은 신전에 나와 머리를 풀어헤친 채 로마를 구원해달라고 울부짖었으며, 남자들은 포룸에 나와 로마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말하며 웅성거렸다. 한니발은 진영을 건설한 뒤 기병 2천 명과 함께 로마 성벽을 빙 돌면서 관찰했다. 이윽고 풀비우스가 도착했는데 그는 한니발의 대담한 태도를 보고 격앙되어 우선 기병을 파견해 한니발의 기병과 전투를 벌이도록 했다. 이때 로마 집정관들은 성내에 있었는데[52] 이들은 탈주한 누미디아 기병 1200명에게 성을 가로질러 뒷문을 통해 나가 한니발군의 배후를 치도록 명령했다.
로마인들은 패닉에 빠진 상태에서 광장에 있었는데 마침 1200명이나 되는 누미디아 기병이 출현하자 큰 공포에 질렸다. 한 명이 그들의 언덕이 점령되었다고 외치자 시민들은 집으로 도주하거나 우왕좌왕하다가 서로 걸려넘어지는 등 큰 소동이 일어났다. 어떤 시민들은 로마를 수호하겠다고 큰 소리로 맹세하면서 지붕에 올라가 누미디아 기병에게 돌과 기왓장을 던져댔다. 누미디아 기병은 진격을 멈추었다.
원로원은 집정관, 집정관 역임자, 법무관 역임자 모두에게 임페리움을 갖게 한 뒤 공성전 준비를 하리고 한 뒤 풀비우스와 집정관에게 군대를 이끌고 한니발과 대치하도록 했다.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는데 리비우스는 비가 많이 내려 할 수 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대치 중에 한니발은 두 가지 광경을 목격했다. 하나는 한니발의 병력이 포진했음에도 불구하고, 히스파니아로 파견되기로 결정된 로마 군대가 그대로 성 밖을 빠져나와 행군한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소식은 다소 황당했는데, 한니발이 진영을 꾸린 그 땅의 소유주가 그 땅을 팔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판매가가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즉 로마 시민들이 보여준 패닉에도 불구하고, 부동산 매매가의 변화가 없었다. 이 소식은 한니발에게 실망감을 주기에 충분했고, 로마군이 카푸아의 포위망을 풀 생각이 없음을 알자 즉시 캠프를 거둔 후 로마를 떠나 한노가 있는 브루티움으로 향했다.
11.2. 카푸아의 함락
한니발이 로마를 떠나자 전직 집정관 풀비우스도 군대와 함께 카푸아로 돌아왔다. 카푸아 시민들은 풀비우스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한니발이 오지 않은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 마침내 그가 그들을 버린 것임을 알게 된 카푸아 시민들은 절망했고, 이는 고위 공직자와 카푸아 원로원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모두 출근을 하지 않은채 집에 틀어밖혀 있었으며 원로원도 마찬가지라 회의도 열리지 않았다.카푸아에는 한니발이 남긴 카르타고 수비대가 머물고 있었다. 카푸아 시민이 활동을 멈추자 이 수비대 사령관이 방어를 자연스레 책임지게 되었는데 그는 한니발에게 서신을 보내고자 했다. 그와 함께 알프스 산맥을 넘은 시민과 전우를 그렇게 냉정하게 버릴 수 있느냐는 감정적이고 신랄한 질책으로 시작된 서신은 카르타고는 로마인과 전쟁을 하러 왔지, 로마의 동맹시와 전쟁을 하러 온 게 아님을 주장하며 여기에 있는 로마 군단병을 피하지 말고 싸워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문구엔 한니발이 와서 외부를 치면 자신이 카르타고의 모든 수비대원과 카푸아 시민군을 이끌고, 최후의 공격을 감행하겠다는 다짐으로 끝맺었다.
이 가련한 편지를 한니발이 받았으면 마음을 바꿔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로마인이 이 편지를 가로채고 말았다. 서신을 지니고 탈주한 척 빠져나온 누미디아 병사 중 한 명의 애인인 카푸아 여자가 이 사실을 밀고한 것이었다. 끌려온 누미디아 기병은 처음엔 부인했으나 로마인이 가져온 고문 도구를 보고 공포에 질려 모든 일을 자백했다. 풀비우스는 이 병사들을 모두 잡아다가 채찍질한 뒤 두 손을 잘라 카푸아로 돌려보냈다.
이 병사들의 몰골을 본 카푸아 시민은 원로원과 공직자의 집으로 몰려갔다. 이들은 공직자와 원로원들이 계속 출근을 하지 않으면 집안으로 쳐들어가서 모두 길거리로 끌어내겠다고 협박했다. 이렇게 되자 카푸아 원로원은 서둘러 모임을 가졌다. 이어서 열린 회의에서 원로원은 로마에게 항복 사절을 보내는 방향으로 논의했다. 이를 들은 비루스라는 카푸아 원로원의 리더격인 인물이 이런 논의를 하는 원로원을 비판했다.
이어진 비판에서 한니발을 원망하는 말을 하고, 항복한들 로마인들이 카푸아인을 용서해 줄리 있겠는가라고 반문한 뒤, 과거 카푸아가 항복했을 당시 성내의 로마인 수비대를 모두 잡아다가 온갖 고문을 해서 죽였으므로 로마인이 이에 대한 복수를 할 것임을 강조했다. 그렇게 비평을 한 비루스는 곧바로 그의 대책을 이야기했는데, 웃기게도 자신의 집에서 동반자살하자는 내용이었다. 카푸아 원로원 중 27명이 이에 동의하여 비루스의 집에 가서 동반자살했고, 나머지 원로원 의원들은 어찌 되었건 사절을 보내 로마군에게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다음날 열린 성문에서 기병 2천 명이 선두에서 전진했고, 나머지 보병들과 함께 풀라쿠스가 입성했다. 그는 병사들을 보내 사방에 있는 성문을 봉쇄한 뒤 전쟁의 책임이 있었던 원로원 의원과 공직자들의 재산을 몰수한 후, 그들을 성밖의 두 마을에 나누어보내 감금했다.
이때 치료할 수 없는 심한 부상을 입은 아피우스가 아직 살아있었는데 그와 풀비우스는 카푸아 시민에 대한 처우에 대해 논의를 했다. 풀비우스는 점령한 담당 사령관으로서 카푸아 지도자들에게 배신의 처벌을 강경하게 함으로서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는데, 아피우스는 이에 반대해 로마 원로원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풀비우스는 아피우스의 말을 듣지 않고 권리를 행사하려 했고, 아피우스는 독자적으로 원로원에 서신을 보내 어떻게 할지를 물었다.
풀비우스는 원로원에 서신이 갔을 것이라고 짐작했으므로 서둘러 카푸아 귀족들이 잡혀있는 두 마을 중 하나를 향해 떠났다. 마을 하나에 도착한 그는 그곳에 머물고 있었던 카푸아의 원로원 의원들 수십 명을 모두 채찍질한 뒤 처형했다. 그 다음 다른 마을에 도착하여 형을 집행하려는 찰나 로마 원로원이 파견한 법무관이 카푸아 시민에 대한 처벌의 지시 사항이 담긴 '원로원의 권고'(Decree of the Senate)가 담긴 서찰을 전달했다. 풀비우스는 해당 권고문의 개봉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집행을 그대로 진행했고, 모든 이에 대한 집행이 끝난 뒤 그 권고문을 개봉하고 처벌을 멈추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아피우스는 중상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그는 한니발이 알프스 산맥을 넘은 이래 싸우다 죽은 10번째 로마 사령관이었다.[53]
로마 원로원은 점령한 카푸아의 시민들을 노예로 삼고,[54] 카푸아의 자치권을 박탈하여 이들이 원로원도 공직자도 구성하지 못하게 했으며, 로마에서 파견한 공직자가 카푸아의 통치를 일임하는 방침을 선포했다. 단 도시는 약탈되거나 파괴하지 않았는데 이는 한니발에게 돌아선 도시들이 다시 로마에게 항복하면 전범을 제외한 시민들의 목숨과 재산, 그리고 도시를 온전히 보장해주겠다는 정치적인 제스처였다.
이후 로마 원로원은 풀비우스 휘하에서 전직 법무관으로서 로마 기병을 지휘하고 있었던 네로를 히스파니아에 파병했다. 네로는 카푸아 포위전을 수행한 병사 중 그가 직접 고른 5천 명과 함께 히스파니아로 건너가 에브로 강 북부에 머물던 패잔병을 인수한 뒤 수습했다. 그리고 로마에선 히스파니아 전선 사령관을 선임할 선거를 개최했는데[55] 여기서 26세 젊은이 스키피오가 자원했고, 그를 본 시민들은 환호하며 당선시켰다. 단 그의 젊은 나이와 빈약한 경력, 그리고 히스파니아에서 두 스키피오 형제가 비참하게 죽었는데 세 번째 스키피오를 보내는 것은 나쁜 징조라며 걱정하는 시민들이 많았는데, 스키피오는 자신감을 피력하면서 그들의 지지를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이윽고 로마 원로원은 그 해의 에트루리아 전선을 담당하기로 되어 있었던 전직 법무관,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와 함께 스키피오를 히스파니아로 부임시켰다.
12. 히스파니아
한니발이 이탈리아에서 승승장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카르타고 본국의 지원을 받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은 로마 측이 한니발 이외의 다른 카르타고 장군과의 싸움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기 때문이었다. 로마는 이탈리아에서 한니발을 고립시키는 동시에 한니발의 본거지인 히스파니아의 카르타고 식민지를 제압하여 화근을 없애려고 했다. 특히 히스파니아를 공략한 코르넬리우스 형제가 지휘하는 로마군과의 싸움에서 카르타고군은 연패를 거듭했고, 이 연패의 손실을 메우기 위해 카르타고 본국은 용병을 고용하는 족족 히스파니아에 파병해야만 했다.위기에 처한 하스드루발 바르카를 구원하기 위해 카르타고 본국은 하스드루발 기스코가 이끄는 대군을 히스파니아로 파견했다. 원래 한니발에게 돌아가기로 되어있었던 막내동생 마고도 지원군과 함께 히스파니아로 가게 된다. 이때의 지원군은 이례적으로 대규모였는데 실제로 두 장군이 이끌고 간 병력을 합하면 보병과 기병을 합해 4만 명 가까이 달했으며, 거기에 전투 코끼리 수십 마리나 포함된 대군이었다. 이는 카르타고 본국이 이베리아 식민지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으로는 그만큼 히스파니아의 상황이 심각했음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유야 어찌 됐든 대규모의 지원을 받아 히스파니아의 전황은 다소 안정될 수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북아프리카에서 누미디아의 시팍스가 카르타고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는 사태가 발생했는데, 이때 하스드루발은 본국의 지원을 위해 군대를 이끌고 북아프리카로 향했다.[56] 성공적으로 반란을 진압한 하스드루발은[57] 신 카르타고(카르타헤나)로 개선했으며, 이때 누미디아 왕자 마시니사와 누미디아 기병 3천여 명을 대동하고 귀환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히스파니아에 병력을 쏟아부은 카르타고 본국의 근성이 드디어 효과를 본 것인지 베티스 고지의 전투에서 마침내 한니발이 지휘하지 않는 카르타고 군대가 로마군을 최초로 격파하는 일이 일어났다.
당시 하스드루발은 스키피오 형제 중 그나이우스의 군대와 대치하면서 로마군에 합류한 이베리아 용병에 대한 금전적인 매수 작업을 본격화했고, 이로 인해 수많은 병력이 로마군에서 탈주하기 시작했다. 당시 카스툴로 근처에 있었던 푸블리우스 스키피오는 인디빌리스라는 히스파니아 족장 휘하의 병력이 배후에서 접근해오는 것을 알자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이들을 추격했다. 그러나 히스파니아 병사들과 교전하는 사이, 마시니사의 누미디아 기병대가 이들을 급습했고, 곧이어 마고와 하스드루발 기스코의 카르타고 대군이 로마군을 협공했다. 수적으로 열세인 로마군은 포위된 상황에서 저항하다가 전멸당했고 사령관 푸블리우스도 전사했다. 그리고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있었던 그나이우스도 퇴각하던 도중 일로르카 언덕에서 카르타고군에게 고립되어 싸우다가 전사했다.
베티스 고지의 전투로 스키피오 형제가 히스파니아 전선에서 거둔 성과는 무(無)로 돌아갔으며, 에브로 강 북쪽으로 달아나는 데 성공한 로마 병력은 약 8천 명가량에 불과했다. 그러나 카르타고 측 지휘관 3명은 이 절호의 기회에도 불구하고 에브로 강 이북의 로마군을 완전히 섬멸하지 못했고, 이는 곧 재앙의 씨앗이 되었다.
한편 히스파니아 전선을 절대 포기할 수 없었던 로마는 클라우디우스 네로[58]에게 병력 1만 명을 주고 히스파니아 전선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파견했다. 하지만 카르타고 장군들이 로마군과의 대결을 피했기 때문에 네로는 아무런 전공도 세우지 못했다.[59] 그리고 이듬해인 기원전 210년, 네로의 후임으로 푸블리우스 스키피오의 아들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병렉 1만을 추가로 이끌고 도착하여 히스파니아의 로마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이례적으로 젊은 나이에 두각을 드러낸 스키피오의 등장으로 카르타고군은 다시 밀리기 시작했다. 스키피오는 세심한 전략과 전술로 단 하루 만에 카르타고 식민지의 주요 거점이었던 카르타헤나를 함락시켰다( 카르타고 노바 공방전). 사실상 히스파니아 식민지의 수도였던 카르타헤나를 빼앗기면서 이베리아 반도의 카르타고 세력은 매우 큰 타격을 입었고, 더이상 본국이나 한니발 원정대에게 보급을 보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후 스키피오는 이베리아 반도의 전투에서 계속 승승장구하여 이베리아 반도의 카르타고 세력을 거의 지워버렸고, 바이쿨라 전투에서 하스드루발 바르카의 군대를 격파했다. 또한 일리파 전투에서는 마고와 기스코가 이끄는 카르타고군과 마시니사가 이끄는 누미디아 연합군을 대파하고 마시니사와 협상을 벌여 그를 로마의 편으로 만들었다.
13. 장화 발가락으로 밀려나다
카르타헤나가 로마에게 넘어가는 동안 한니발은 이탈리아의 전황이 악화되어 가는 것 때문에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나마 그를 끈질기게 괴롭히던 마르켈루스를 전사시키는 등 여전히 승리를 거두고는 있었지만 공성장비도 없고, 물량에서도 점점 밀리면서 이탈리아의 우호적인 도시들을 하나 하나 다시 로마에게 내주게 되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한니발에게는 매우 기쁜 소식이, 로마로서는 매우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 바르카가 대군을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북이탈리아 안으로 들어오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비록 바이쿨라 전투에서 패배하기는 했지만 마고가 보낸 지원군 등으로 하스드루발이 보유한 군대는 패잔병이기는 해도 꽤 위협적인 규모였고, 후방에 대한 기습을 염려한 스키피오가 추격을 삼간 탓에 하스드루발은 잔여 병력을 이끌고 히스파니아를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한니발은 자신의 경험상 동생이 험준한 알프스 산맥을 그렇게 빨리 넘을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동생의 합류 날짜가 좀 더 늦을 것이라 생각해 북으로 올라가는 속도가 매우 느렸는데 이는 결정적인 패착이 되었다.[60]
한편 로마 입장에서 하스드루발의 지원군은 엄청난 위협이었다. 당시 로마는 인적, 물적 자원을 총동원해 전략적인 면에서 한니발을 몰아붙이고 있었지만, 전술적인 측면에서는 매우 적은 규모의 군대를 이끌던 한니발을 상대로[61] 여전히 제대로 된 승리를 단 한 번도 거두지 못하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로마가 동원할 수 있는 인적, 물적 자원도 거의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62] 거기에 더하여 로마는 마르켈루스를 비롯한 뛰어난 장군들 역시 전쟁이 지속되면서 다수를 잃었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는 전쟁 내내 자원을 엄청나게 소모하고 한계에 다다랐는데, 한니발이 다시 전쟁 초기의 병력을 회복한다는 것은[63] 로마에게는 상상조차 하기 싫은 악몽이나 다름없었다.[64]
그 때문에 로마군은 하스드루발의 병력이 진군한다는 것을 알아채자 신속하게 요격할 준비를 했다. 로마군은 마르쿠스 리비우스에게 급하게 하스드루발을 막을 것을 지시했고, 전령을 붙잡아 페니키아어 편지를 해독하여 상황을 알게 된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도 한니발과 대치하던 상황에서 급하게 휘하에서 젊고 건장한 체격의 병사들로 구성된 보병 6천 명, 기병 1천 명으로 구성된 군대 7천을 이끌고 리비우스와 합류했다.[65] 하스드루발이 이끄는 카르타고군과 네로와 리비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메타우로 강 근방에서 만나 전투를 벌였고, 치열하게 진행되던 전투는 네로가 지휘하던 로마군 우익이 빠르게 우회하여 로마군 좌익으로 이동해 카르타고군의 우익을 공격하자 로마군이 카르타고군을 포위하는 양상이 되면서 승패가 결정되었다( 메타우루스 전투).
이 전투에서 카르타고 최후의 지원군은 전멸했고, 하스드루발은 전사하여 그의 목이 형인 한니발에게 보내졌다. 그제서야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한니발은 크게 상심하여 이탈리아 반도 끝에 웅크려 나오지 않았다. 이탈리아 원정이 완전히 물거품이 된 것이다.
14. 이베리아 상실과 마고의 상륙
하스드루발이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히스파니아에서는 마고와 하스드루발 기스코의 카르타고군이 누미디아 왕자 마시니사와 연합해 일리파에서 스키피오의 로마군과 회전을 벌였다( 일리파 전투). 그러나 4만 8천 남짓한 로마군을 상대로 거의 2배에 달하는 병력 7만 명 이상을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군 지휘관 스키피오의 전술에 휘말린 카르타고군은 전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했고, 이로 인해 히스파니아의 카르타고 세력은 사실상 괴멸되었다.일리파 전투 이후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북아프리카로 돌아갔고, 마고는 히스파니아 남해안의 도시인 가데스(오늘날의 카디스)에 머물며 재기를 꾀했다. 그러나 가데스 주민들의 배반으로 도시 밖으로 쫓겨나자 잔여 병력을 규합한 뒤 발레아레스 제도를 거쳐[66] 북이탈리아로 향했다.
리구리아에 상륙한 마고는 게누아(지금의 제노바)를 기습, 점거하는데 성공하고 리구리아인과 갈리아족 용병을 고용해 병력을 재편성했다.[67] 이 사실을 알게 된 로마 원로원은 하스드루발의 침공때와 마찬가지로 마고가 한니발에게 합류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군단을 편성하여 파견했다.
마고의 카르타고군은 포 강 계곡에서 로마군과 격전을 벌였으나 결국 로마군의 저지를 뚫지 못하고, 전투 도중 마고의 부상으로 퇴각하여 제노바에 고립되었다.[68]
15. 로마군의 북아프리카 상륙과 어린진의 영원한 교본, 자마 전투
한편 전황이 다시 로마에게 유리해지자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등을 위시로 한 많은 로마인들이 카르타고의 본거지인 북아프리카를 직접 공격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원로원은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의 경험( 바그라다스 전투) 등으로 북아프리카에 병력을 보내다가 크게 깨지면 어떡하나 하는 이유로 망설였지만 스키피오가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이자 그를 아프리카 방면 집정관으로 임명한 후 병력을 원하는대로 모집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69]북아프리카에 상륙한 스키피오는 새로 누미디아의 왕이 된 시팍스에게 로마의 편이 될 것을 권유했다. 실제로 시팍스 자신도 제안을 검토한 후에 진심으로 로마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카르타고가 절세미녀인 소포니스바와 마시니사의 약혼을 억지로 파기하고, 그녀를 시팍스에게 보내어 그와 혼인시킨 후 회유하자 아내의 유혹에 넘어간 시팍스는 카르타고 편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스키피오는 당대 로마 장수 중에서도 걸출한 능력을 가진 장군이었다. 그는 우티카 전투와 바그라다스 전투 등에서 카르타고-누미디아 연합군을 크게 격파했으며, 마침내는 누미디아의 수도 키르타를 점령해 시팍스를 체포하고, 마시니사를 누미디아의 왕으로 앉혀 로마의 세력에 복속시키는 동시에 누미디아 기병대를 마음껏 지원받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다.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에서 모든 세력을 잃은 카르타고는 사실상 멸망 직전에 몰렸지만 스키피오는 의외로 관대한 내용의 협상 조건을 제시했는데 한니발과 그의 동생 마고의 이탈리아 철수, 그리고 카르타고가 배상금을 낼 것 등을 요구했다.[70] 하지만 한니발이 휘하 군대를 이끌고 다시 북아프리카로 돌아오자 카르타고는 협상을 파토내고 다시 전쟁에 들어갔다. 스키피오와 한니발의 군대는 자마에서 만났고, 여기에서 최후의 전투가 벌어졌다.
한니발의 군대 규모는 로마군보다 컸고, 코끼리도 80마량 가량 보유했지만, 기병이 적었고 보병도 질적으로 현저히 열세여서 이탈리아에서 데려온 병사들만이 유일한 승부수였다. 반면 스키피오의 로마군은 양적으로는 열세처럼 보였지만 질적으로는 우위에 있었고, 이전과는 달리 기병 전력에서 우위를 갖고 있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스키피오가 포위 섬멸에 성공하며 승리를 거두었고 한니발은 간신히 목숨만 건져 달아날 수 있었다( 자마 전투). 그리고 이를 본 카르타고가 결국 항복하면서 오랜 기간 격렬하게 펼쳐졌던 제2차 포에니 전쟁도 로마의 승리로 종결되었다.[71]
16. 전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을 무찌르고,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종결시켜 '아프리카누스'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리고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또한 한니발을 이탈리아 반도에 잘 묶어둔 공로를 인정받아 '쿵크타토르'(지연자)라는 별명이 붙었다.로마는 히스파니아 반도를 얻었으며 카르타고는 항복 후 굴욕적이고 감당하기 어려운 강화조약을 맺어야 했다. 무엇보다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의 패전으로 카르타고는 로마와 비교가 되지 않는 소국으로 전락했는데, 위에 보이는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를 아우르는 대영토가 전부 날아가고, 사실상 카르타고와 주변의 페니키아계 도시국가만 남은 반면 로마는 이베리아를 비롯해 갈리아와 그리스까지 뻗치는 대제국의 기틀을 마련했기 때문이었다.
한니발에게 당한 충격이 너무나도 엄청났던 로마는 제2의 한니발이 나올 것을 두려워해 카르타고를 철저히 탄압했다. 사실상 카르타고가 로마의 속국이 되었는데도 로마는 카르타고를 계속 핍박했고, 이는 결국 제3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하는 원인이 되었다. 물론 수도 로마와 이탈리아 반도가 외적에게 이렇게 위협받은 건 서기 3세기 위기의 시절 이전까지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시대에 벌어진 킴브리 전쟁과 한참 전 갈리아에게 털리던 시절이 고작이었고, 3세기의 위기 때도 아퀼레이아 선에서 저지되었다. 서로마 제국이 북부 이탈리아, 판노니아 방어선을 완전히 상실했던 4~5세기에야 로마의 존망을 위협할 수준의 본토 침공이 이루어진 것을 고려하면 한니발 바르카라는 먼치킨에게 로마가 받은 충격과 공포는 충분히 공감된다.
또한 이 전쟁으로 로마군은 한니발식 망치와 모루 전술을 체계적으로 익히면서 전쟁기계로 거듭났다.로마군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도입한 글라디우스, 그리고 한니발식 망치와 모루 전술을 적용했고, 이는 로마군에 전술적인 유연성을 부여하여 헬레니즘 문화권의 전통적인 팔랑크스 전술과 켈트족과 게르만족의 청야 및 돌파전술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해주어 전쟁 직전까지 이탈리아 반도와 근방의 섬 정도에만 미치던 로마의 패권은 불과 한 세대만에 그리스 전역을 굴복시키고, 동방 전체를 주름잡았던 셀레우코스 왕조마저 박살내면서 지중해 전역에 뻗치게 되었다. 그리고 한니발은 로마에 대한 징벌의 맹세를 지키기 위해 셀레우코스 왕조로 망명하여 온갖 도움을 주었지만 역으로 로마가 지중해 최강국이 되는 것만 두눈 뜨고 지켜보면서 한많은 생을 마쳐야 했다.
17. 여담
카르타고는 한니발이 싸우는 와중에 방관했다는 이야기가 많이 퍼져 있는데, 카르타고 자체가 한니발이 분투하는 동안 손 놓고 구경만 하고 있었던 건 절대 아니다. 오히려 수시로 한니발을 지원해주기 위해서 스페인 방면과 지중해 방면으로 수차례 돌파를 시도해보았지만 전부 로마군에게 좌절당했다. 결국 로마가 한니발이란 걸출한 장군을 상대로 승리하게 된 데는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의 근본적인 국력의 차이가 가장 컸다.이에 대해서 한니발 개인은 너무도 뛰어났음에도 그 외의 다른 카르타고 장군들은 심각할 정도로 무능했다는 통설이 있다. 실제로 제2차 포에니 전쟁 기간 내내 한니발을 제외한 다른 카르타고 장군들은 단 한 번 ─ 베티스 고지의 전투를 제외하고, 모든 주요 전투에서 로마 장군들에게 패배했다. 그리고 그 한번의 승리마저 전술로 인한 것이 아니라 로마측이 고용한 이베리아 용병들을 카르타고군이 돈으로 매수하여 얻은 승리였다. 심지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북아프리카에 왔을 때는 압도적인 기병 전력에서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조금도 활용하지 못한채 처참하게 패배하고 말았다는 것이 국내에 알려진 통설이다.
그러나 다른 카르타고 장군들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원주민들을 상대로 보여준 모습이나, 여러 전술적인 판단들을 고려해보면 그다지 무능하진 않았다.
한니발 아래에서 일군의 지휘관을 맡아 활약을 보여줬던 장군들, 심지어 단독 임무를 맡아 이베리아나 켈트 원주민과의 교전에서 활약했던 장군들이 많았음에도 로마군과 단독으로 맞섰을 때마다 박살이 났다. 물론 이들이 한니발의 손발이 돼서 움직였을 때는 유능했을지도 모르지만 독립적인 지휘권을 가진 장군으로는 형편없었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그러나 한두 사람도 아니고 모든 카르타고 장군들이 항상 로마군에게 패배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로마군이라고 해도 항상 스키피오가 지휘했던 것이 아닌데도 졌다는 것이다. 심지어 기록을 참고하면 이들이 특별히 잘못된 선택을 내렸다고 볼 수도 없다. 즉, 한니발 급의 장군이 아니라면 전쟁에 숙달된 로마군에 맞설 수 없었을 정도로 카르타고와 로마 사이에 근본적인 역량 차이가 존재했다고 보는 편이 훨씬 타당하다.
분명히 한니발은 이탈리아 반도에 들어온 이후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이에 대해 한니발을 시기한 한노 가문의 영향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지원을 보내고 싶어도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가 지중해를 서서히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보급이 오는 족족 중간에서 끊겼기 때문이라고 봄이 더 타당하다. 카르타고 본국은 여러 번 병력을 해상으로 보내줬지만 이 병력은 해로를 지키고 있었던 로마군에게 그대로 수장당했고, 육로로 오던 지원군도 로마가 한니발에 합류하기 전에 필사적으로 막아냈기 때문이다.
이 정도로 보급이 끊기고 역량차가 극심한 상황에서도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깽판치면서 회전에서 연전연승을 거듭한 한니발이 진정한 먼치킨이다. 또한 자마 전투에서의 신성기병대 불참설도 근거가 없다. 해당 항목 참고. 사실 적군이 코 앞에 있는데 아무리 수뇌부가 무능하다고 해도 저 상황에서 최정예 병력을 아껴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전쟁을 부르는 다른 이름으로 ' 한니발 전쟁' 이 있다. 카르타고 측에서 한니발 바르카 혼자만 나서서 싸운 건 아니지만, 불행히도 카르타고의 다른 장군들은 로마군을 상대로 연전연패를 거듭했으며, 한니발이 지휘하지 않은 상황에서 거둔 승리는 딱 한번 - 그것도 상대 요병을 매수하는 편법으로 이긴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전쟁의 경과는 한니발이 사군툼을 쳐부숨으로 시작해 한니발이 대승을 거둔 칸나이 전투에서 절정에 이르고, 끝내 한니발이 마지막 자마 전투에서 대패함으로서 종결되는 양상이 되어버려, 전쟁 자체가 한니발을 주역으로 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때문에 '한니발 전쟁'이라 불리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카이사르 시대와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도 한니발은 증오의 대상이었으며, 아이들을 혼낼 때
"집 대문 앞에 한니발이 와있다."
라고 했다고 하니...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
콤모두스 황제 이전까지 로마군은 한니발에게 당한 수준의 참패를 손꼽았으며, 대표적인 완패인
토이토부르크 전투와
카르헤 전투에서 4만 명이 넘는 로마군과 독수리 군기를 뺏어간 파르티아 제국과 게르만족도 이런 영광스러운 칭호를 얻지 못했다. 물론 두 패전 모두 지휘관이었던 바루스와 크라수스 모두 초장부터 개판으로 지휘하며 말아먹은 것이 크고, 굴욕 이후 로마가 대대적으로 반격에 나서 토이토부르크의 패배의 경우 게르마니쿠스가, 카르헤 전투는 아우구스투스의 협상으로 극복했다는 차이점이 존재한다.[72]18. 주요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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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는
카르타헤나라고 불리는 곳이다.
[2]
하밀카르의 사위로 한니발의 매형이었다. 한니발의 동생과는 동명이인이다. 하밀카르의 사위이기 때문에 성이 바르카가 아니다.
[3]
영토는 카르타고가 로마보다 약간 더 커보이지만, 카르타고는 북아프리카에서 소수민족인 페니키아인이 대다수의 원주민들을 지배하는 구조였던 반면, 로마는 주류민족인 라틴 동맹시들의 연합이었기 때문에 실제 인구나 국력은 로마 쪽이 훨씬 높았다.
[4]
당시 카르타고 본국에서 사군툼을 공격하라는 명을 내렸는지 알 수 없다. 이후 정황적으로는 본국에 사후 승인을 얻은 것처럼 보이나 사료 부족으로 정확한 사정은 불명이다.
[5]
당대 이탈리아 북부의 갈리아족을 크게 패배시킨 플라미니우스는
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에서 매복당해 패배했고, 일리리아를 평정한 파울루스는 저 유명한
칸나이 전투의 지휘관으로서 전사했다.
[6]
리비우스의 사료에 따른 기술이다. 다만 폴리비오스의 사료에 따르면 만났으나, 한니발이 협박하여 내쫒았다고 나온다.
[7]
《
로마인 이야기》에서 시오노 나나미는 한니발이 사군툼 점령을 일부러 늦추었다는 가설을 제기했으나, 사료에 나온 사군툼 시민의 항전은 점령이 오래 걸린 것이 이해될 수 있을 정도로 처절했다.
[8]
단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마르쿠스 파비우스 부테오가 사절단의 리더였다.
[9]
한니발이 도하하는 타이밍에 한노의 별동대가 갈리아족의 후방을 습격했다. 이 작전은 성공했고 갈리아족의 군대는 뿔뿔이 흩어져 퇴각했다.
[10]
보병 1만여 명과 기병 1천 명가량
[11]
다른 카르타고 장군들과는 동명이인이다.
[12]
로마군이 카르타고군 양익의 보병과 기병 별동대에 의해 포위당했다.
[13]
원래 로마 측의 작전은 스키피오의 군대가 한니발을 이탈리아 바깥쪽에 잡아둔다는 것을 전제로 북아프리카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 북아프리카 침공을 지휘하게 될 장군이 셈프로니우스였다. 셈프로니우스군이 북상했기 때문에 자연히 원래의 계획이었던 북아프리카를 통한 카르타고 본국 침공은 무효화되었다.
[14]
셈프로니우스는 공격을 주장했고, 스키피오는 그것에 반대했다.
[15]
이탈리아 반도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아펜니노 산맥 때문에 종횡무진 돌아다닐 수는 없었다. 위의 한니발의 진군 루트와 비교해서 보자.
[16]
옅은 노란색으로 표시된 지역으로 플라미니우스는 지도에 표시된 아레티움 지방으로 갔고, 스키피오는 이탈리아 북부에서 에트루리아로 통하는 서쪽 가도를 수비했으며, 세르빌리우스는 아레티움에서 동북쪽에 위치한 아드리아 해안 근처의 도시인 아리미눔[73]에 주둔했다.
[17]
대략적인 아르노 강의 위치에 관해서는 한니발의 진군로를 함께 참조할 것.
[18]
물이 배꼽까지 차오르는 곳에서 어떻게 진지를 치고, 휴식을 취할 수 있겠는가!
[19]
다만
코르넬리우스 네포스라는 로마 역사가는 해당 일화를 부정했다. 오른쪽 눈에 시력 손상을 입었으나 애꾸에는 이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행군 이후에도 조금도 쉬지 않고 지휘한 것을 보면 애꾸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가능성도 높다.
[20]
수비 측인 소련군이 독일군의 공격을 미리 예상했던 제2차 세계대전때의 쿠르스크 전투를 보자. 지지부진한 엄청난 소모전이 일어났지, 어느 한쪽의 결정적인 승리는 없었다.
[21]
이때의 로마는 수도에 집중된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아니었고, 여러 동맹시들의 연합이었다.
[22]
바로는 다음해에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23]
이름은 보스터(Boaster) 또는 보스타르(Bostar)였다고 한다.
[24]
따지고 보면 하스드루발도 형인 한니발 못지 않게, 아니 형보다 훨씬 더 부하들 복이 없었다. 그래도 한니발의 휘하 장교들은 총지휘 능력은 꽝이었어도, 전투에서의 부대 운용 능력만큼은 월등했고 충성심 또한 남달랐지만 하스드루발쪽은 그런 것도 없었다.
[25]
리비우스에 따르면 당시 집정관 후보들 중에 군사적인 능력을 갖춘 인물이 없어 원로원 의원들이 출마를 거절하는 파울루스를 끈덕지게 설득해 집정관에 출마시켰고, 그러자 다른 후보들이 출마를 포기했다고 한다.
[26]
칸나이 전투 항목에도 적혀 있지만, 시오노 나나미는 한니발의 전술과 전투 경과에 대해서 잘못 서술했다.
칸나이 전투와
자마 전투를 헷갈린 듯하다.
[27]
헤스티아 문서 참조. 헤스티아 여신의 로마식 이름이 베스타였는데, 베스타를 섬기는 무녀들은 처녀성을 지켜야만 했다. 베스타의 무녀를 가리키는 라틴어 단어가 베스타의 처녀(Virgo Vestalis)였을 정도.
[28]
본래 로마인들은 인신공양을 악독한 관습으로 여겨 금기시했다. 하지만 시민들의 공포와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그 금기시되는 인신공양을 치를 정도로, 당시 로마가 칸나이 전투의 참패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29]
이 지방에서 유일하게 로마 편에 잔류한 도시는 반도 맨 끝에 있는 레기움(지금의
레조디칼라브리아) 뿐이었는데, 이는 시칠리아 섬의 로마 세력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30]
이때 마고는 무려 20만 명에 달하는 로마군을 전멸시키고, 포로 5만 명을 잡았다는 엄청난 스케일로 보고했다.
[31]
결과적으로 한니발과 로마가 싸우면 카르타고가 망한다는 판단도 옳았고, 계속해서 카르타고와 싸우지 않으면 로마가 망한다는 판단도 옳았으며, 카르타고에게 가장 유리한 시점인 이 시점에서 제2차 포에니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대 한노 2세의 판단은 더더욱 옳았다.
[32]
해외파의 수장인 바르카 가문과 달리 대 한노 2세는 북아프리카의 농경 활동을 중시하는 국내파의 수장으로서, 일단 지금은 적극적인 해외 팽창보다는 카르타고 내부의 재정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과거에 벌어진 제1차 포에니 전쟁의 피해가 완전히 수습되지 않은 상태에서 로마와의 또다른 전쟁에 지속적으로 반대의사를 펼쳤다. 이때문에 대 한노 2세의 발언은 거의 지속적으로 카르타고 원로원 내에서 거부당하거나, 카르타고의 정책 결정도 항상 대 한노 2세의 의견과 정반대로 내려졌다. 대 한노 2세는 흔히 한니발 바르카에게 보낼 원조를 적극적으로 훼방을 놓았다고 알려져 있으나 1차 사료에 나오는 카르타고가 보인 모습은 사실상 '원조할 의지가 있긴 했으나 할 여력과 여유가 없었다'가 더 정확했다. 한니발의 이탈리아 반도 진입 이후, 제2차 포에니 전쟁은 히스파니아 반도, 북아프리카, 시칠리아 섬, 그외 지중해 전역에 걸치게 되었으며, 더군다나 이탈리아에서 한니발이 직접 이끄는 부대를 제외한 모든 카르타고군의 전선이 연패하여, 이때마다 카르타고는 그 구멍을 메꾸기 위한 물자, 병사, 그리고 식량을 파견해 한니발에게 가야 할 원병을 이베리아로 보내는 등 광활하게 확장된 전선을 유지하기도 벅찬 상태였다.
[33]
당시 로마에서 감찰관은 원로원 임명 및 해임 권한을 가진 원로원 의원 중 최고 권위자였다. 해당 역임 경력은 원로원 의원들 중 최고 중진에 해당되어야 가능했다.
[34]
한니발 바르카의 친척으로, 한니발의 동생이었던 마고 바르카와는 다른 인물이었다.
[35]
시오노 나나미의 《
로마인 이야기》 2권에서는 사르데냐 섬의 원주민들이 로마군 편에서 싸워 카르타고군을 물리쳤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이는 실제와 정반대되는 서술로 명백한 오류이다. 당시 사르데냐 섬에서는 전염병이 돌고 있는 와중에 주둔한 로마군이 원주민들로부터 물자를 지나치게 공출해 원주민들의 반감이 상당한 상황이었으며, 결국엔 카르타고에 원조를 요청하고 로마에 반기를 들었다.
[36]
즉 카푸아의 로마 집정관 같은 직책임
[37]
로마는 당해에 집정관 그라쿠스, 첫 번째로 선출된 보궐 집정관 마르켈루스, 마르켈루스 대신 선출된 보궐 집정관 파비우스를 모두 캄파니아에 투입했다. 한니발이 캄파니아에 머문 이유는 이들 3개의 집정관급 로마 군단에 맞서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38]
트레비아 전투때의 사령관이자 전직 집정관
[39]
한니발은 칸나이 전투 이후 병력을 둘로 나눠 마고에게 줬고, 마고가 카르타고로 가자 한노가 이 병력을 지휘했다. 한노는 론 강에서 별동대를 이끌고, 갈리아족의 배후를 급습한 사령관이었다.
[40]
사실상 한니발이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거의 유일하게 본국으로부터 보급받는데 성공한 사례였다.
[41]
한니발이 정예병의 손실을 꺼렸거나, 보조병의 전투력이 로마군의 상대가 못되었는지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한니발의 공성전 승률은 매우 좋지 않았다. 로마가 전쟁 내내 상대하지 못할 정도로 강하다는 평가를 받던 직속부대로도 푸테올리와 같은 작은 도시도 함락시키 못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42]
법무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는 2년 뒤인 기원전 212년에 로마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43]
단 두 형제가 에브로 강을 건너 시점은 2년 뒤인 기원전 212년에 일어났다고 학자들이 추정한다. 이하는 리비우스의 사료를 옮긴 것이나 2년 뒤에 일어났다고 가정하면서 봐야 한다.
[44]
로마 역사가들이 로마의 통치를 매우 온건하고 자비로운 듯 묘사하나, 당시 정복받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로마의 전쟁 스케일이 커진 이유도 배신할지 모르는 도시들을 견제하기 위해 카르타고군이 없는 지역에 조차 최소 1개 군단 이상을 배치해 놓아야 했기 때문이었고, 이는 로마가 어디까지나 자발적이기보단 무력으로 로마 동맹을 유지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가령 로마는 자신들의 전쟁에는 반드시 자신의 군사력 이상의 동맹 시민들을 동원했는데 승리의 영광과 그 이후의 통치는 어디까지나 로마인이 독점했으니 여기서 오는 박탈감은 상당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로마인들은 과거 패배한 너희를 멸망시키지 않고, 자치를 보장해주면서 침략 때 우리가 지켜주는 게 어디냐 우리만큼 선량한 패권국이 있냐 이리 생각한 듯하지만...
[45]
기원전 212년에 당선된 법무관으로, 그 해의 집정관이었던 퀸투스 풀비우스의 동생이었다.
[46]
로마는 3월 15일에 집정관이 교체되었다.
[47]
즉 로마의 카르타고에 대한 해상 봉쇄가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완벽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48]
당시 와인은 오늘 날의 와인 형태가 아니다. 과거 와인은 물에 타서 마셔야 할 만큼 독했다.
[49]
단 마하르발은 리비우스의 사료에는 나오나 폴리비오스의 사료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리비우스의 기록에서 한니발이 사군툼 공성전의 지휘를 잠시 비웠을 때 마하르발이 한니발 대신 지휘했으므로, 그의 위치는 한니발 본대에서는 마고 바르카를 제외하고는 2인자의 위치에 가깝다. 그런데 문제는 해당 인물이 칸나이 전투 이후 이어진 군사활동 어디에서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리비우스의 기록엔 칸나이 전투 당시 우익 기병의 지휘관이 마하르발이었다고 하나 폴리비오스는 한노라고 했고, 리비우스의 기록에서도 한니발군이 론 강을 건널 때 배후로 돌아 대치한 갈리아 군대를 습격한 지휘관은 한노였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마하르발은 한니발의 기병대장이었는데, 기병으로 이루어진 해당 별동대의 지휘관이 마하르발이 아니라 한노였던 것이다. 두 사람의 지휘 직책과 한니발 본대에서 마고 바르카를 제외한 제2인자의 위치, 한니발의 친척이라는 배경들이 모두 겹치고, 또한 칸나이 전투에서 한노와 마하르발이 폴리비오스 및 리비우스의 기록에 교차하여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이탈리아 남부 브루티움에서 군대를 나누어 받아 활동한 한노와 마하르발은 동일인물일지도 모른다.
[50]
기록에 따르면 마르켈루스는 놀라에서 한니발과 겨룰 때마다 자신이 퇴각시킨 데다가 시라쿠사 함락이라는 당대 최고의 군사적 성취를 이룩했는데, 패잔병과 신병들로 구성된 오합지졸에게 당했다면서 펄펄 뛰었다고 전한다.
[51]
로마인은 카푸아 포위망을 반년에 넘는 기간 동안 건설했다.
[52]
이 해에 당선된 두 로마 집정관들은 특이하게도 임페리움을 받아 군대를 이끄는 전형적인 역할을 하지 않은채 모두 로마에 머물고 있었다. 카푸아 포위전에 들인 물량을 감안하여, 이 해의 로마 시민들은 보급과 그를 위한 행정을 담당하는 관료 위주로 집정관을 선출한 것 같다. 두 집정관 모두 군사적으로 빈약한 인물들이었는데, 한 명은 관직 경험이 아예 없었고, 다른 한 명도 한니발 전쟁 내내 법무관급 군단 지휘권을 수행한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53]
임페리움을 수여받은 로마군 사령관 중 이때까지 죽은 사령관은 다음과 같다. 플라미니우스, 게미누스, 파울루스, 미누키우스, 포스투미우스, 그라쿠스, 켄테니우스, P 스키피오, G 스키피오, 아피우스.
[54]
단 시민 전체를 노예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55]
선거를 통해 뽑힌 자에게 임페리움을 수여하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조치였는데, 임페리움은 집정관, 법무관, 또는 전직 집정관, 전직 법무관이 원로원으로부터 수여받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었다.
[56]
마고와 기스코의 대군이 히스파니아 영토를 지켜주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57]
영문 위키의 설명에 따르면 하스드루발의 카르타고군이 마시니사의 도움을 받아 시팍스 휘하 누미디아 반란군 3만 명을 쳐부수었다고 한다(다만 시팍스는 살아남아 마우레타니아로 도망쳤다). 비록 형인 한니발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하스드루발 역시 나름대로 우수한 지휘관이었던 것이다. 이후 베티스 고지에서 스키피오 형제의 전력을 소모, 분산시키는 전략으로 승리를 거둔 것이나, 바이쿨라 전투에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의 전술에 허를 찔렸음에도 침착한 지휘로 주력을 온전히 보존하는 등의 사례를 보면 로마 역사가들이 그를 '한니발 다음 가는 카르타고 장군'이라 평가한 것도 과장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전쟁 초기 히스파니아에서 고전한 것도 데르토사 전투 이전까지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밑에 있는 부하들의 삽질과 그로 인한 병력의 손실이 주요 원인이었다.
[58]
이후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맹활약하는 바로 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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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는 하스드루발 바르카가 계략으로 네로를 속여 파면당하도록 만들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일단 계략으로 속인 것 자체는 리비우스의 기록에 언급된다. 그런데 그 일로 네로가 파면당했다는 내용은 리비우스의 기록에는 언급되지 않는데, 대신 카시우스 디오의 기록에서 이 일로 인해 질책성 경질을 당했다는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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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다 한니발과 대치하던 집정관 네로의 로마군이 워낙 강력하게 한니발을 견제하고 있었으므로 한니발군의 북상 속도는 더욱 느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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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이 이탈리아에 들어올 때 카르타고군은 대략 4만~5만 명 정도였지만 계속되는 전투에서 손실되는 병력이 많았고, 그나마 남은 병력 중 2만 명 남짓을 한노라는 장군에게 맡겼는데 카푸아를 구원하러 가던 한니발에게 합류하려다가 로마군에게 걸려 이 병력을 다 말아먹었다. 결국 당시 한니발의 휘하에 남은 병력은 3만 명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로마는 한니발과 정면승부하기를 두려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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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로마는 군대에 동원할 자유민의 수가 부족해서 자유를 미끼로 죄수들과 노예들까지 동원했고, 남은 인적, 물적 여력이 더 이상 없다는 이유로 로마에 지원을 거부하는 동맹시들도 하나씩 나오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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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에서는 하스드루발의 원군이 공성장비도 가지고 있다는 미확인 정보도 있었는데 이 말인즉슨 하스드루발의 원군이 한니발과 합류하면 한니발이 병력의 부족과 공성장비의 부재로 엄두를 내지 못했던 로마 공성전을 벌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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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사 연구의 대가인 프란츠 하이켈하임은 "하스드루발의 원군이 한니발과 합류했다면, 로마는 전쟁에서 졌다."라고 단정적으로 서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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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로의 군대 이동은 매우 신속해서 대치하고 있었던 한니발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아예 식량 휴대도 금지했으며 통과하는 도시에 비밀지령으로 군대의 식사를 준비하라고 극비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네로가 하스드루발의 합류 소식을 듣고 리비우스와 합류한 뒤 전투를 벌이고 다시 한니발과 대치에 들어가는 데 걸린 시간은 2주 정도였다. 그러나 군대 이동은 원로원의 승인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이때 네로의 행동은 명백한 군무이탈이었으나 워낙에 급박한 상황을 원로원에서도 납득했는지 네로를 처벌하거나 문책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사실 이 상황에서 함부로 융통성없게 군무이탈에 대해서만 따지면 잘못하다가 한니발 편드냐고 로마의 배신자로 오해받기 대단히 좋은 상황이기도 했다. 결국 네로의 활약으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지만 네로 자신은 개선의 영광을 얻지 못한채 리비우스에게 개선식의 지휘관 행렬 자리를 양보하고 죄익 지휘관으로 리비우스의 뒤를 따라야 했다. 일설에는 메타우루스 전투의 네로의 활약에 대한 소식을 듣고 개선식에서 네로에게 환호하는 민중도 다수 있었다는 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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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발레아레스 제도의 도시들 중 Mahon이란 도시가 있는데, 이는 마고의 이름을 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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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는 여기서도 또 엉뚱한 서술을 하고 있는데, 북이탈리아의 갈리아족이 마고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마고를 공격했다는 것이다. 이 또한 위의 사르데냐 원주민의 경우와 같이 사실과 정반대되는 틀린 말이다. 물론 로마군의 거센 반격으로 갈리아족이 다시 위축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고, 이 때문에 마고에게 적극적으로 동조한 리구리아인들과 달리 알프스 산맥 일대의 갈리아족은 합류를 다소 꺼렸다. 그렇지만 용병으로 지원한 갈리아족의 숫자는 상당했으며, 마고는 이들의 합류로 자신의 군대를 대폭 강화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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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한니발과 마고의 부대가 귀환할 때 이들 중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일부는 종전 이후에도 북이탈리아에서 갈리아족의 지원 아래 게릴라전을 벌이다가 로마군에게 진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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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그의 나이는 서른이었다. 좀 더 나이가 들어야 높은 권한을 주던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일 정도로 높은 관직과 권한을 받는다. 그만큼 신뢰가 높았다는 이야기도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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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는 귀환하던 중 전투에서 입은 부상이 회복되지 않아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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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2권에서는 자마 전투가 끝나고 강화를 맺기로 했을 때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시스코네(하스드루발 기스코)가 강화에 반대했다고 나오는데, 이 시점에서 벌써 죽고 없었다. 한니발이 북아프리카로 귀환하기 전 스키피오는 하스드루발 기스코와 시팍스의 카르타고-누미디아 연합군을 바그라다스(또는 그레이트 플레인스)에서 전멸시켰다. 이때 전투가 끝나고 카르타고로 돌아오는 길에서 기스코는 패전을 당한 것 때문에 카르타고 시민들에게 린치를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즉 한니발이 카르타고로 돌아오기 훨씬 전에 이미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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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카르헤 전투 참패의 복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직접 파르티아를 정복하여 이룩하려고 했지만 출정 직전 암살당하면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오히려 이 상황에서의 카이사르 암살은 공화파 암살단에게 불리하게 작용되었는데 파르티아 정복을 위한 카이사르 고참병들은 로마시 외곽에서 숙영중이었고, 시민들 역시 카르헤의 복수를 외치는 불패의 카이사르에 대한 기대가 굉장히 컸었다. 안그래도 민중파의 수장이자 불패의 영웅을 2만 명의 로마군 복수 원정 직전에 죽여놓고서 그를 '왕위를 노린 자'라며 비판한 암살파는 당연히 민중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로마 시민들에게 자신의 재산 일부를 증여한 카이사르의 유언장이 공개되자마자 민중들은 완전히 카이사르파로 돌아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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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리미니(Rimini)라고 불리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