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5년 시칠리아 왕국의 발칸 침공 영어: The Sicily kingdom invasion of 1185 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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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185년 | |
장소 | 발칸 반도 | |
원인 | 안드로니코스 1세의 폭정으로 혼란한 동로마 제국을 정복하려는 굴리에모 2세의 야망. | |
교전국 | 동로마 제국 | 시칠리아 왕국 |
지휘관 |
안드로니코스 1세 요안니스 두카스 다비드 콤니노스 요안니스 콤니노스 테오도로스 콤니노스 안드로니코스 팔레올로고스 니키포로스 알렉시오스 브라나스 이사키오스 앙겔로스 |
굴리에모 2세 탕크레디 리샤르 다케라 보두앵 |
결과 | 동로마 제국의 승리. | |
영향 | 아센과 페터르의 난 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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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85년 시칠리아 왕국의 굴리에모 2세가 안드로니코스 1세의 폭정으로 혼란에 빠진 동로마 제국을 정복하기 위해 발칸 반도 침공을 개시하면서 벌어진 전쟁. 동로마 제국은 이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그 과정에서 군비를 마련하기 위해 불가리아인들에게 막대한 세금을 착취했다가 아센과 페터르의 난을 초래했다.2. 배경
1183년 9월 안드로니코스 1세가 어린 황제 알렉시오스 2세를 시해하고 황위를 찬탈한 이래, 동로마 제국은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다. 마누일 1세의 조카인 요안니스 콤니노스 바타지스가 서부 아나톨리아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안드로니코스 콘토스테파노스와 안드로니코스 두카스 앙겔로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안드로니코스 1세를 축출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다 발각당했다.안드로니코스 1세는 제위를 지키기 위해 대숙청을 감행했다. 먼저 반란이 일어난 아나톨리아에 군대를 대대적으로 파견하여 로파디온, 니케아, 프루사 등 비티니아 일대의 여러 도시를 파괴하고 시민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뒤이어 음모를 꾸미다가 적발된 인사들은 물론이고, 조금이라도 의심가는 자들을 귀족, 황족, 명사(名士) 가리지 않고 모조리 잡아다가 처형하거나 실명형에 처했다. 이때 100여 명에 달하는 귀족들이 실명형에 처해졌기에, 안드로니코스 1세는 후세 역사가들에게 "미소파이스(Misophaes: 햇빛을 싫어하는 자)"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안드로니코스의 가혹한 숙청은 제국의 단결력을 급격히 떨어뜨렸다. 1183년 또는 1184년 키프로스의 이사키오스 콤니노스가 키프로스에서 독립하여 황제를 칭했으며, 동로마 제국의 속국이었던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도 제국으로부터 독립했다. 헝가리 왕국의 국왕 벨라 3세는 자신의 처제이자 알렉시오스 2세의 모후였던 안티오키아의 마리아의 원수를 갚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다뉴브 강을 넘어 제국의 북방 도시 몇 곳을 공략했으며, 룸 술탄국도 제국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아나톨리아 내륙 지역을 갉아먹었다.
로베르 기스카르 전쟁 이래 동로마 제국을 도모할 야심을 간직하고 있던 노르만계 오트빌 가문의 일원이자 시칠리아 왕국의 군주인 굴리에모 2세는 지금이야말로 오랜 숙원을 달성할 때라고 여겼다. 1184-1185년 겨울, 굴리에모 2세는 메시나에 육군과 함대를 집결시킨 뒤 함대 지휘권을 사촌 탕크레디에게, 육군 지휘권을 아케라 백작 리샤르와 보두앵에게 맡겼다. 이리하여 시칠리아 왕국의 마지막 발칸 원정의 막이 올랐다.
3. 전개
1185년 6월 11일, 메시나에서 출항한 시칠리아 함대는 그해 6월 24일 발칸 반도의 아드리아 해 인근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도시인 디라히온에 진입했다. 100여년 전 로베르 기스카르가 발칸 원정을 감행했을 때 디라히온에서 오랜 공성전을 치러야 했지만, 이번에는 안드로니코스 1세에게 반감을 품은 수비대와 주민들이 별다른 저항을 하지도 않고 항복하면서 무혈 입성할 수 있었다. 그 후 시칠리아군은 적의 미약한 저항을 물리치며 동진한 끝에 8월 6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이어 제국 제2의 도시인 테살로니카를 육상에서 포위했고, 8월 15일 시칠리아 함대가 해상을 봉쇄했다.당시 테살로니카엔 안드로니코스 1세의 친척이었던 다비드 콤니노스가 4개 부대를 이끌고 주둔하고 있었다. 다비드는 성벽을 보수하고 병사들에게 보너스를 지급하는 등 어떻게든 도시를 지키려 애썼지만, 안드로니코스 1세를 위해 싸울 마음이 없던 3개 부대가 8월 24일 항복해버리는 바람에 나머지 1개 부대만 챙기고 도주했다. 시칠리아군은 테살로니카에 입성한 뒤 1182년 4월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벌어진 라틴인 학살에 보복하겠다며 테살로니카 시민 8,000여 명을 학살하고 건물들을 모조리 파괴했다.
테살로니카를 공략한 뒤, 시칠리아군은 3부대로 나뉘었다. 한 부대는 테살로니카 수비를 맡았고, 한 부대는 세레스로 진군했으며, 가장 많은 병력을 보유한 부대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했다. 한편, 테살로니카가 파괴되었다는 소식에 분노한 안드로니코스 1세는 다비드 콤니노스를 투옥한 뒤 반격에 착수했다. 하지만 한 사람에게 대군을 맡겼다가 자신을 향해 칼을 겨눌 것을 우려해 아들 요안니스와 테오도로스, 장군 안드로니코스 팔레올로고스와 알렉시오스 브라나스, 그리고 환관 니키포로스에게 각각 한 부대씩 맡겨 시칠리아군을 저지하게 했다. 그러나 다섯 지휘관들 중 누가 우선적으로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지를 명확히 정하지 않았기에 지휘체계가 문란해졌고, 결국 동로마군은 연전연패했다.
시칠리아군이 파죽지세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접근하자, 안드로니코스 1세는 스테파노스 하기오크리스토포리테스에게 적과 내통할 지도 모르는 인사들을 모조리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히기오크리스토포리테스가 명령에 따라 여러 인사를 잡아 처형하고 있을 때, 이사키오스 앙겔로스가 자신을 잡으러온 하기오크리스토포리테스를 우발적으로 죽이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사키오스는 하기아 소피아로 피신한 뒤 시민들에게 호소했고, 안드로니코스 1세의 폭정에 반감을 품고 있던 시민들이 그를 황제로 추대하면서 황궁을 향해 진격했다. 대세를 읽은 수도 방위군과 근위대는 폭동 진압을 거부하고 안드로니코스 1세를 체포했다. 폐위당한 안드로니코스는 시내로 끌려가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새 황제가 된 이사키오스 2세는 알렉시오스 브라나스를 제국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남은 병력을 지원군으로 편성해 합류시키면서 군대를 독려했다. 브라나스는 군대를 재정비한 뒤, 거듭된 승리에 자만하고 있던 시칠리아군을 요격하여 트라키아의 모시노폴리스에서 격파하고 마케도니아까지 추격했다. 시칠리아군은 암피폴리스로 물러난 뒤 브라나스에게 평화 협상을 제안했다. 하지만 브라나스는 이를 무시하고 재차 총공격을 가했다. 시칠리아군은 괴멸되어 상당수가 스트리온 강에 익사했고, 육군 지휘관 리샤르와 보두앵은 사로잡혔다.
해군 지휘관 탕그레드와 핀도스 산맥을 넘어 이피로스로 달아난 소수의 패잔병만이 이탈리아로 탈출했다.
4. 이후
안드로니코스 1세의 폭정을 틈타 감행했던 시칠리아 왕국의 발칸 원정이 허망하게 실패한 지 4년 후인 1189년 11월 18일, 굴리에모 2세는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뒤이어 왕위에 오른 탕크레디는 제3차 십자군 원정을 감행한 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가 시칠리아에 진입하여 자신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 메시나를 파괴한 사건 처리에 골머리를 앓아야 했고, 신성 로마 제국의 남이탈리아 공략을 저지해야 했다. 그러다 1194년 2월 20일 팔레르모에서 후계자를 두지 못한 채 사망하면서 노르만 왕조는 단절되었고, 시칠리아 왕위는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하인리히 6세에게 넘어갔다.시칠리아 왕국의 침공을 격퇴한 동로마 제국 역시 사정이 좋지 않았다. 이사키오스 2세는 시칠리아 왕국과의 전쟁에 투입할 국방비를 마련하기 위해 불가리아에 무거운 세금을 매기고 장정들을 징집했으며, 심지어 새로 황후를 맞아들인 뒤 결혼 축의금을 마련하라는 명분으로 특별세를 부과했다. 이에 타르노보 인근에 사유지를 경영하고 있던 토도르와 아센 형제는 1185년 킵셀라에 있던 이사키오스 2세에게 세금 경감과 자치권, 그리고 세금을 내는 데 필요한 수도원 수입을 받기 위해 하이모스 산 근교의 토지를 하사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요청은 거부당했고, 황제의 삼촌인 요안니스 두카스는 아센의 얼굴을 때리며 요구가 너무 무례하다고 꾸짖었다. 이에 두 사람은 동료들을 설득하여 1185년 여름 반란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 제국은 4차 십자군에 의해 결정적으로 몰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