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23:12:13

베티스 고지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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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티스 고지의 전투
Battle of the Upper Baetis
시기 기원전 211년
장소 히스파니아 콰달키비르 강 근처
교전국 파일:attachment/mon_256_1.png 카르타고 파일:attachment/mon_256.png 로마 공화정
지휘관 파일:attachment/mon_256_1.png 하스드루발 바르카
파일:attachment/mon_256_1.png 마고 바르카
파일:attachment/mon_256_1.png 하스드루발 기스코
파일:massyli_mon_256.png 마시니사
파일:attachment/mon_256.png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파일:attachment/mon_256.png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
파일:illergetes_mon_256.png 인디빌리스
파일:illergetes_mon_256.png 만도비우스
병력 총원: 불명
보병: 12,000명 이상
기병: 4,500명
용병: 7,500명
총원: 40,000명
로마군: 20,000명
←용병: 20,000명
피해 불명 사망: 11,000 ~ 12,000명
탈영: 20,000명
결과 히스파니아 로마 원정군의 궤멸
영향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히스파니아 원정

1. 개요
1.1. 명칭에 관하여
2. 배경3. 전개
3.1. 스키피오 형제의 진군3.2. 하스드루발의 책략3.3. 격파당한 푸블리우스3.4. 그나이우스 추격전
4. 이후

[clearfix]

1. 개요

기원전 211년, 하스드루발 바르카[1]가 이끄는 카르타고군이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2]와 그의 형인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가 이끄는 로마군과 싸운 전투이다. 이 전투는 카르타고의 승리로 이어졌으며 두 스키피오 형제는 전사한다.[3] 이 전투는 제2차 포에니 전쟁 기간 전체에 걸쳐서 한니발이 지휘하지 않은 카르타고군이 로마군을 상대로 거둔 유일한 회전에서의 승리다.[4]

1.1. 명칭에 관하여

"베티스 고지 전투"는 적절한 명칭인가?

우선, 이 전투에 대한 합의된 명칭은 의외로 존재하지 않는다. F. Walbank는 'the disaster of the Scipios in Spain'[5]을, A. Goldsworthy는 'The defeat of Cnaeus and Punlius'[6]를, D. Hoyos는 'Destruction of the Scipios in Spain'[7]을, E. MacDonald는 'the death of the Scipio brothers and the destruction of their armies in Iberia'[8]를 사용하였다. 심지어 시오노 나나미도 '코르넬리우스 형제의 2개 군단이 잇따라 패하여 두 사람은 전사'[9]했다고만 언급했을 뿐이다.

다만 영문 위키백과에서는 상술된 대로 Battle of the Upper Baetis라는 명칭을 표제어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정황상 양군의 대치 및 전투가 바이티스(Baetis) 강[10] 상류(Upper) 유역 일대에서 벌어졌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명칭이 현재 인터넷에서 본 전투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통용되고 있다. 사실상 독자연구에 가까운 표제어이지만, 해당 문서 개설이 2005년으로 매우 오래 전이라 어영부영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한국 역덕들이 이 전투에 대해 주로 사용하는 이름인 '베티스 고지(의) 전투'는 위의 'Battle of the Upper Baetis'를 오역한 명칭이다. 'Upper Baetis'를 '베티스 고지'로 해석한 듯하나, 정작 전투 내용을 살펴보면 고지에서 싸워본 사람은 2명의 스키피오 형제 중 형인 그나이우스뿐이며[11] 해당 고지의 이름도 베티스가 아니라 일로르카(또는 로르키)이다. 'Battle of the Upper Baetis'가 적절한 명칭인지 여부와 별개로 '베티스 고지의 전투'는 그런 고지가 존재하지도 않는 명백한 오역인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로르카 언덕은 바이티스 강 상류를 한참 벗어난 곳이기 때문에 '바이티스 강 상류의 전투'라고 해도 완전히 맞는 호칭은 아니긴 하다. 스키피오 형제가 한 싸움에 몰살된 것도 아니고 각기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패했으므로,'전투'라는 규정 자체도 '전역'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따라서 '베티스 고지 전투'가 이상한 명칭인 것은 틀림없지만, 어째서인지 다들 대충 알아들으며 이 명칭으로 쓰고 있다.[12]

2. 배경

하스드루발 바르카 데르토사의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로마군은 스페인에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스키피오 형제가 승리를 거듭하며 카르타고의 영토를 조금씩 점령한 결과 푸블리우스의 로마군은 사군툼까지 전진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214년 이후 이 두 세력은 잠시 전투를 멈춘다. 그 이유는 카르타고군이 로마의 외교술에 인한 스페인 원주민의 반란을 진압하느라 시간을 보냈고 스키피오 형제는 외교전에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스키피오 형제는 로마 본국으로부터 군사 보급을 받지 못했는데 이는 이탈리아에 있는 한니발이 이탈리아 내에서 강한 압박을 가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카르타고 본국은 2개의 부대와 사령관을 파견하였다. 한 부대는 그의 동생인 마고 바르카가 이끌었고 다른 군대는 하스드루발 기스코가 이끌었다. 두 부대는 로마군과 여러 차례 싸웠으나 승리를 하지 못하였다. 그동안 스키피오 형제는 카르타고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누미디아 왕 중 하나인 시팍스와 동맹을 맺었다.

어쨌건 카르타고 본국이 보낸 증원부대 덕에 스페인에서 카르타고의 입지는 호전되었으며 하스드루발 바르카가 기원전 213년과 212년 시팍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건너갈 수 있는 여유까지 생겼다.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기원전 212년에 스페인으로 되돌아왔는데 그는 누미디아의 왕자 마시니사가 이끄는 3천 명의 누미디아 기병을 데려왔다.

이탈리아 전선에서는 타렌툼을 점령한 한니발이 루카니아와 브루티움, 그리고 아풀리아의 여러 도시가 로마를 배신하도록 유도했고, 로마인은 파비우스 전략으로 한니발과 맞섰다. 이 전략의 성과로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의 로마군이 시칠리아의 대도시 시라쿠사를 점령하였고 풀비우스의 로마군은 카푸아를 포위하였다.

3. 전개

3.1. 스키피오 형제의 진군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의 사료에 따르면 기원전 212년(현대 학자들은 기원전 211년일 가능성이 높다고 함) 스페인의 카르타고군은 여러 곳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다.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1만 5천의 병사를 이끌고 암토르기스라는 마을에, 마고 바르카와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각각 1만을 이끌고 서쪽 떨어진 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스키피오 형제는 그때까지 스페인에서 성공적으로 전쟁을 수행해왔다. 그동안 거둔 군사적, 외교적 성공에 고무된 스키피오 형제는 5개 군단에 맞먹는 2만 명의 켈티베리아인(Celtiberians)들을 새로 용병으로 고용한다. 이들 병력은 3만 보병과 3천 기병으로 구성되어있던 그들의 기존 군대를 강화했으며 이 증강된 전력에 자신감을 얻은 스키피오 형제는 그해에 스페인에서의 전쟁을 마무리짓기로 하였다. 이 둘은 하스드루발을 격파하면 마고와 기스코가 산지에 숨어 게릴라 전투를 벌임으로써 전쟁이 길어질 것을 우려하였고 따라서 이들을 한꺼번에 격파하기 위해 군대를 둘로 나누어 각각 지휘하기로 하였다.

푸블리우스는 스페인에서 활동하는 로마군 총 병력의 3분의 2인 2만여 병력을 이끌고 마고 바르카와 하스드루발 기스코를, 그나이우스는 3분의 1인 1만여 병력에 2만의 켈티베리아인 용병을 합한 3만여 병력으로 하스드루발 바르카를 치기로 정한다. 그 뒤, 두 형제의 로마군은 일제히 남하한다.

3.2. 하스드루발의 책략

둘 중 먼저 목적지에 도착한 그나이우스는 하스드루발 바르카와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다. 하스드루발은 그나이우스의 주력이 로마인이 아닌 켈티베리아인들인 것을 파악하였고, 용병의 습성을 이용하여 이들을 매수할 계획을 세운다. 이윽고 로마인 몰래 열린 켈티베리아 족장과의 회담에서 하스드루발은 그들이 철수하는 대가로 상당한 양의 보수를 주기로 약속한다. 족장과 병사들은 싸움 없이 돈을 벌 수 있는 상황에 기뻐하였고, 다음날 로마군이 보는 앞에서 군기를 모두 내리고 군대를 철수한다.

로마군은 이들의 대담한 행동에 놀랐으나 그들의 수는 전체 병력의 3분의 2에 해당하어 무력으로 제지할 수 없었고 그저 떠나지 말아달라고 간절히 애원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켈티베리아인들은 고향에서 전쟁이 나서 집에 간다고 둘러댄 뒤 그대로 캠프를 떠나 자신의 고향으로 떠났다.[13]

3.3. 격파당한 푸블리우스

한편, 그나이우스의 동생인 푸블리우스는 카스툴로에 도착했는데 마고와 기스코의 군대에 있던 누미디아 왕자 마시니사와 그가 이끄는 누미디아 기병이 밤낮으로 로마군을 괴롭힌다. 로마인이 물을 긷거나 공사를 하러 캠프 밖에 나가면 곧바로 공격하였으며, 한밤중에도 기습하여 큰 소동을 일으키고 물러나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하였다. 이에 시달린 로마군은 마치 포위된 것처럼 아무런 군사행동도 하지 못하고 캠프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푸블리우스는 스페인 족장 인디빌리스가 7천 5백 명의 이베리아군을 이끌고 마고 바르카에게 합류한다는 소문을 듣는다. 푸블리우스의 로마군은 점점 궁지에 몰리는 중이었는데, 인디빌리스까지 합류하면 전세가 더 절망적으로 될 것을 우려, 그들이 합류하기 전에 신속히 격파하고 돌아올 계획을 세운다. 이에 푸블리우스는 2천 명의 병사를 티베리우스 폰티우스에게 맡겨 캠프에 남긴 뒤, 전 병력을 이끌고 캠프를 나섰다.

한밤중 내내 진격한 로마군은 마침내 인디빌리스와 그의 군대를 따라잡았다. 전투는 전투대형을 갖추지 못하고 행군하는 모습 그대로 황급히 이루어졌으나, 1만 8천 대 7천으로 우세한 병력을 가진 로마군에게 점점 유리해졌다. 그런데 전투 중 마시니사가 이끄는 누미디아 기병이 도착한다. 누미디아 기병은 사방으로 퍼져 측면과 후방을 공격하였으며 이에 로마군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마고 바르카와 하스드루발 기스코가 각각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 도착한다. 앞뒤로 적에게 포위당한 로마군은 어디를 공격해야 하고 어디로 돌진해야 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저항한다. 이어진 전투는 치열하였고 푸블리우스는 가장 격렬히 전투가 벌어지는 곳에 가서 직접 병사들을 지휘한다.

푸블리우스의 모습을 본 카르타고의 기병은 쐐기 대형을 짠 뒤, 그를 향해 돌진하였다. 푸블리우스는 오른쪽에 창을 직격당해 쓰러졌고 바로 절명한다. 낙마한 푸블리우스가 사망한 것을 확인한 카르타고군은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지는 전열 곳곳을 돌아다니며 그의 죽음을 외쳤고, 이를 들은 로마군은 마침내 전장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카르타고 기병은 도주하는 로마군의 상당수를 죽였고, 밤이 되어 어두어져서야 비로소 이 살육이 끝났다.

8년간 그들을 괴롭힌 스페인 전역의 총사령관이었던 푸블리우스를 죽인 성과를 이룩한 마고와 기스코는 기뻐할 틈도 없이 곧장 하스드루발 바르카의 캠프로 이동하였다. 이들은 합류하여 그나이우스의 로마군만 격파하면 스페인의 전쟁이 승리로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3.4. 그나이우스 추격전

마고와 기스코가 하스드루발 바르카의 캠프에 합류했을 때까지 강 건너에서 대치 중이던 그나이우스는 푸블리우스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마고와 기스코의 합류로 인해 늘어난 카르타고군의 규모를 보고 동생인 푸블리우스의 로마군이 격파되었거나 혹은 무슨 큰 문제가 생겼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또한 3분의 2에 달하는 켈티베리안의 이탈로 병력의 수 역시 크게 밑돌았으므로 그나이우스는 스페인 북부로 철수하기로 한다.

그나이우스는 한밤중에 카르타고군이 눈치채지 못하게 캠프를 버리고 달아났으나 아침에 하스드루발이 급히 파견한 누미디아 기병이 이들을 추격하여 낮에 따라잡는다. 로마군은 싸우면서도 북쪽을 향해 전진했으나 행군 속도는 매우 느렸고, 밤이 되자 그나이우스는 군대를 일로르카라는 언덕 위에 숙영케 하기로 하였다. 그 지형엔 그 언덕 외엔 높은 지형이 없었다.

그날 밤 카르타고군의 주력부대가 도착한다. 하스드루발 바르카, 마고 바르카, 하스드루발 기스코가 이끄는 스페인 전선의 카르타고 총병력이 그 장소에 집결한 것이었다. 이 병력에 의해 언덕에서 포위된 로마군은 절망적인 상황이 되었는데, 이들은 요새화된 숙영지를 지으려 하였으나 언덕이 돌투성이여서 이 들어가지 않았고 따라서 참호와 나무 울타리를 세울 수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짐과 안장을 얹어 그 언덕을 둘러싼 수비벽을 만든다.

다음 날 아침 카르타고군은 총공격을 시작하였다. 이 어설픈 수비벽을 본 카르타고 병사들은 일단은 깜짝 놀라 잠시 멈췄는데 이런 방어벽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소식은 곧장 카르타고 장교들에게도 알려졌다. 하지만 장교들은 이 벽을 보자 병사들을 꾸짖으며 고함을 질렀다.
왜 여자와 아이들을 겨우 붙잡을 수 있는 이 멍청하고 우스꽝스러운 물건을 부수고 찢지 않고 멈춰섰느냐? 짐 뒤에 숨은 적은 너희의 손에 포로가 될 것이다!
(Why were they stopped, they asked, and why were they not tearing down and ripping apart this ludicrous object that was barely strong enough to hold back women and children? The enemy was captured and in their hands, lurking behind their baggage!)
그래서 카르타고 병사들은 장대를 가져와 이 짐벽을 허물어뜨렸고, 그 틈새로 돌격하는 카르타고군에 의해 그나이우스의 로마군은 전멸한다.

리비우스는 해당 사건을 서술하면서 그나이우스의 죽음에 대해 두 가지 설을 이야기한다. 일설에 따르면 그나이우스는 카르타고군의 첫 번째 공격에 전사하였다고 전하고, 다른 설에 따르면 캠프 근처의 타워에 올라갔는데 그곳에 카르타고군이 을 놓아 그 안에서 병사와 함께 타 죽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리비우스는 그나이우스는 그가 스페인 전쟁을 시작한 지 8년째 해에, 푸블리우스의 죽음으로부터 29일 뒤에 죽었다고 언급하는데, 이에 따라 현대 학자들은 해당 전투는 기원전 212년이 아닌 211년에 일어났다고 생각하며, 마고와 기스코의 하스드루발 캠프와의 합류, 그나이우스의 대치, 그리고 로마군의 후퇴와 카르타고군의 추격이 장장 한 달에 걸쳐 이루어졌다고 추정하고 있다.

4. 이후

뿔뿔히 흩어져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로마군은 에브로강 북쪽에 집결하였는데 그들은 모두 8천명 정도였다. 그리고 카르타고군은 이들을 추격하여 완전히 섬멸하지 못하였다. 로마 원로원은 그해 말에 1만명의 병력을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에게 주어 이 패잔병과 합류하도록 지시한다. 하지만 네로는 합류한 이후에도 아무런 전공을 세우지 못했는데 카르타고군이 그를 공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음해에 푸블리우스의 아들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1만명의 추가 병력을 이끌고 이들과 합류하였다. 뒤이은 그의 활약은 카르타고인들이 살아남았던 로마군을 추격하여 섬멸하지 않은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하였다.
[1] 한니발 바르카의 동생 [2]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아버지 [3] 이 전투 이전까지 이들 형제는 7년에 걸쳐서 스페인에서 전쟁을 수행하면서 스페인에서 한니발을 지원하는 것을 성공적으로 차단해왔다. [4] 게릴라전이나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한 경우는 간혹 있지만, 로마 주력군을 상대로 한 회전에서는 없다. [5] "A historical commentary on Polybius"(1967) vol.II, p7. [6] "Fall of carthage"(2003), p.395 [7] "Hnnibal's dynasty"(2003), p.235 [8] "Hannibal: a Hellenistic life"(2015), p.174 [9] 로마인 이야기 2권(1995), 247쪽 [10] 오늘날의 과달키비르 강 [11] 게다가 그나이우스는 휘하 병력이 더 적은 쪽에 속했고, 언덕에서 싸울 당시에는 이미 승부가 대충 갈려서 한참 후퇴하던 중이기도 했다. [12] 상술했듯 학술적으로 권위있는 지칭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아 경로의존성을 넘어설 편익이 있는 명확한 대안이 없다. [13] 이 사건을 서술한 로마인 역사가 리비우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로마군 지휘자들은 이 사건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절대로 용병을 군의 주력으로 삼은 뒤 의지하면 안 되며, 캠프 내에서 로마인의 다른 병력에 대한 우세함을 유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