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C0C0FF> 야르무크 전투 battle of Yarmouk |
||
시기 | 서기 636년 8월 15일 ~ 20일 | |
장소 | 시리아 - 요르단 국경 지대 야르무크 강변 | |
원인 | 이슬람 제국의 가열한 정복 전쟁. | |
교전국 |
동로마 제국 사산조 페르시아 가산 왕국 타누흐 |
이슬람 제국 |
지휘관 |
테오도로스 트리티리오스† 바한† 그레고리† 니케타스[1] 자발라 이븐 알 아이함 |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아부 우바이다 이븐 알 자라 슈라빌 이븐 하사나 야지드 이븐 아비 수피안 압둘 라만 이븐 아비 바크르 |
병력 | 15,000 ~ 200,000명 | 15,000 ~ 40,000명 |
피해 | 50,000 ~ 120,000명 | 3,000명 |
결과 | 이슬람 제국의 대승 | |
영향 | 동로마 제국, 서남아시아 강역 상실. |
[clearfix]
1. 개요
서기 636년 동로마 제국군과 아랍계 가산 왕국군이 이슬람 제국군과 교전한 전투.무함마드 사후 그의 뒤를 이은 칼리프들은 정복 사업으로 급격히 영토를 늘렸다. 1대 칼리프 아부 바크르는 유능한 지휘관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를 파견하여 먼저 사산 왕조의 혼란을 틈타 메소포타미아를 휩쓸고 시리아로 침공했다. 동로마 군대는 격파당했고 시리아의 일부를 이슬람 군대가 점령했다. 아부 바크르가 칼리프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지만, 2대 칼리프 우마르는 정복 사업에 더 적극적이었다. 그는 여러 방면으로 군대를 나누어 시리아와 레반트를 공격하게 하였다. 할리드는 이들 중 한 부대의 지휘관이었다.
2. 진행
2.1. 제국의 역습
동로마의 이라클리오스는 이 일이 닥치기 전까지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고 있었다. 최대의 위협이자 400년 넘게 제국을 괴롭혔던 라이벌 사산 왕조도 굴복했다. 그런데 갑툭튀한 사막의 유목민들이 제국의 허리를 동강내려 하였기에 대군을 조직하여 출정한다. 자세한 내막은 이슬람/정복 문서의 우마르 단락 참고. 요약하자면 시리아 남부를 정복한 아랍 군대가 에메사(현재 시리아의 홈스)를 포위하자 그를 구원하러 간 것이다.이라클리오스의 군대는 동로마 군대뿐 아니라 프랑크족, 슬라브족, 조지아군, 아르메니아군, 아랍계 가산 왕국군이 연합한 형태였고, 심지어는 사산 왕조의 왕자이자 샤흐르바라즈의 아들인 니케타스까지 참여했다고 전해진다. 이라클리오스는 안티오키아에 머물면서 이들 군대를 하나로 조직하여 4개로 분산된 이슬람 군대가 뭉치기 전에 제압하려고 했다.
2.2. 전략가 할리드
하지만 시리아 북부를 휘젓던 할리드는 포로 심문을 통해 곧 정보를 입수했고, 다른 부대들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던 아부 우바이다에게 군대를 물려 하나로 모을 것을 제안했다.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슬람 군대는 가산 왕국군의 후방 기습까지 감안해 충분히 후퇴한 뒤 야르무크 강 근처의 평원에서 동로마 군을 기다렸다. 여기서 아부 우바이다는 할리드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그리고 얼마 후 동로마의 대군 역시 야르무크 강변에 집결해 진영을 설치했다.2.3. 전투
사실 바로 전투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이라클리오스는 사산 왕조의 군대가 재편되어 양동 작전을 개시할 때까지 시간을 끌고자 하였다. 반대로 우마르 역시 사산 왕조를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기에 두 군대는 협상을 하며 여러 날을 대기했다. 이슬람 군대의 총사령관은 아부 바크르 사후부터 (634년 8월) 아부 우바이다였지만 그는 이번 전투는 회전에 강한 할리드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2선으로 물러났다.
할리드는 대담하게도 한 줌의 호위병만 대동하고는 동로마 측의 사령관 바한과 적진에서 회담까지 하곤 했다.[2] 이후로도 양군은 대치를 지속하였다.[3] 하지만 그동안 우마르가 할리드에게 계속해서 정예 증원군을 보내고, 할리드가 바한에게 고압적인 자세를 취하자 빡친 바한[4]은 동로마군의 공세를 명령했다.
전투는 약 6일간 계속되었다. 처음 5일간은 동로마군의 파상공세를 이슬람군이 막아내는 형식으로 전투가 진행되었다. 특히 동로마군 좌익과 우익이 이슬람군을 강하게 밀어붙였는데, 그때마다 이슬람군과 함께 종군하던 이슬람 여성들이 기지를 발휘[5]하여 군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또한 할리드 역시 중앙에서 기병대를 지휘하며 전선에 구멍이 생길 때마다 적절한 타이밍에 기병대를 투입해서 동로마군의 공세를 견뎌냈다. 하지만 이슬람군은 확실히 매번 밀리고 있었으며 계속 전투를 지속한다면 패배가 자명했다.
마지막 6일째, 할리드는 동로마군 지휘관 바한의 휴전제의를 받아들이자는 다른 지휘관들의 요청을 거절하며 동로마군의 휴전제의는 그들의 나약함을 드러낸 것이니 오히려 공세로 나서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6일째 아침, 동로마군의 우익 지휘관이던 그레고리[6]가 이슬람군 진형에 일기토를 신청하였고, 이를 최고사령관 아부 우바이다가 받아들이면서[7]최후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아부 우바이다는 50대의 나이에도 그레고리를 밀어부쳤으며, 끝내 그레고리의 목을 베는데 성공한다. 기세를 잡았다고 생각한 할리드는 8000기의 기병을 우익에 숨겨둔 후[8] 나머지 부대를 거느리고 총공격에 나섰고, 갑작스런 이슬람군의 공세전환에 당황한 동로마군이었지만 대등하게 이슬람군을 막아내었다. 하지만 곧 할리드가 숨겨두었던 8000기의 기병을 거느리고 동로마군 좌익을 담당하던 슬라브 군단을 타격했다. 할리드는 직접 선두에서 교전했으며 적의 창을 칼로 두동강내기도 했다. 동로마군 사령관 바한은 정예 카타프락토이 부대를 이용하여 이슬람군 기병을 막아내고자 했지만 이슬람군의 경기병의 기동에 압도당해 무너졌다. 기병대마저 패배하자 동로마군 보병들 역시 붕괴되었고,[9] 부대의 후방에 위치한 야르무크 절벽을 건너는 다리마저 차단당하자 수천명이 절벽에 몸을 던지는 등의 필사의 탈출을 감행, 전멸은 면했지만 결국 대패를 당하면서 전투는 막을 내린다
2.4. 결과
테오도로스와 바한 등 동로마군의 주요 지휘관들이 전사하고 절반의 병력을 잃은 동로마 제국은 더이상 레반트 지역을 지킬 수가 없게 되었다. 이라클리오스는 인생의 절정기에 나락으로 굴러떨어지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망치듯 돌아갔다. 가산 왕국은 이슬람 제국 밑의 속국으로 편입되었고, 육로가 단절된 이집트는 본국의 지원으로부터 취약해졌다. 이슬람 군대는 바로 사산 왕조를 상대하기 위하여 이동했다. 약 3개월 뒤 까디시야 전투가 일어난다.3. 의의
인류 역사적으로 결정적인 전투의 하나이다. 이슬람 제국은 이 전투로 시리아, 레반트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얻게 되고, 까디시야 전투로 사산 왕조 페르시아를 멸망으로 몰아가게 되어 현대의 튀르키예 지역을 제외한 서남아시아 전역에 대한 이슬람 패권을 확립한다. 비록 19-20세기 제국주의 시대 중동 이슬람권의 거의 모든 지역이 식민제국의 직간접적 종속 지역의 처지로 떨어졌었지만, 기층 민중의 종교, 문화는 거의 그대로 유지되어 오늘날까지도 중동 지역이 계속 이슬람권으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야르무크 전투의 여파는 계속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
사산조 페르시아의 제33대 샤한샤
샤흐르바라즈의 아들.
[2]
바한은 그때까지도 이슬람군을 도적떼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음식과 금을 줄테니 물러가라고 했지만 할리드는 이슬람으로 너희가 개종하면 물러나겠다고 맞받아쳐 바한을 빡돌게했다.
[3]
무려 3개월 동안이다(...).
[4]
할리드에게 '너희보다 대단한 군대도 우리 제국을 정복하는데 실패했다'라고 말했다고 알려져있다.
[5]
말들이 낙타를 무서워하는 것을 이용하여 낙타를 풀어놔 동로마군 기병을 저지시켰으며, 후퇴하는 이슬람 남성들을 겁쟁이라고 욕하며(?) 다시 사기를 회복시켰다.
[6]
그리스 군단을 지휘
[7]
말을 타고 나서면서 할리드에게 자신이 돌아오지 못하면 모든 지휘권을 맡긴다고 했다.
[8]
저지대에 언덕까지 있어서 기병을 숨기는데 안성맞춤이었다.
[9]
이 과정에서 총사령관 바한이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