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만니 전쟁 영어: Marcomannic Wars 라틴어: bellum Germanicum et Sarmaticum[1] |
||
시기 | 166년 ~ 180년 | |
장소 | 갈리아, 게르마니아, 이탈리아 북부, 발칸 반도 | |
교전국 | 로마 제국 |
마르코만니 콰디 이아지게스 랑고바르드 부리 반달 록솔라니 바스타르네 나리스티 채티 차우치 헤르문두리 코티니 코스토보키 |
지휘관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콤모두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 페르티낙스 티투스 푸리우스 빅토리누스† 마르쿠스 바세우스 루푸스 마르쿠스 마크리니우스 빈덱스† 푸블리우스 타루티우스 파테르누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프론토†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가이우스 베티우스 사비니아누스 티투스 폼포니우스 프로쿨루스 비트라시우스 폴리오 |
발로마르 푸르티우스† 아리오게수스 ◎ 바나다스푸스† 잔티쿠스 |
병력 | 13개 군단, 2개 벡실라티오, 다뉴브 함대, 58개 보조 코호트 | 977,000명[2] |
피해 | 불명 | 불명 |
결과 | 로마 제국의 승리 |
[clearfix]
1. 개요
서기 166년~180년, 마르코만니족, 콰디족, 랑고바르드족, 부리족, 반달족 등의 게르만 계열 민족과 이아지게스족, 록솔라니족 등의 사르마티아 계열 유목민족이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로마 제국을 침략하면서 벌어진 전쟁으로, 팍스 로마나를 구가하던 로마 제국이 직면한 대규모 전쟁이었다.
2. 배경
로마 제국이 지중해 세계를 정복하고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던 2세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치세 아래에서, 국경 너머 게르마니아에서는 민족 대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흑해로 이주한 고트족과 게피드족이 중유럽으로 이주하면서, 도나우 강 유역을 중심 양쪽을 따라 거주 중인 게르만 세력 사이의 충돌이 시작된 것이다. 이때 로마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이를 분명히 인식 중이었고, 이 문제가 로마에게 장차 불가피한 전쟁이 벌어질 것을 깨닫고 있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일련의 민족 이동과 부족간의 유혈 출동이 중유럽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벌어지면서, 로마 제국의 주요 국경 중 최정예 군단들이 상주한 다누비우스 강(오늘날의 도나우 강, 다뉴브 강) 일대 전선 양쪽에서도 그 여파가 미쳤기 때문이다. 게르만족들은 북유럽에서 내려온 세력들이 남하하면서, 밀려난 세력과 정주한 세력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고, 밀려난 세력이 다시 이동해 다른 세력과 싸우고 동맹하는 일 속에서 점 조직 형태 세력에서 하나의 세력으로 통합되는 일 역시 시작됐다. 다시 말하면, 게르만 세력의 이동 아래에서 연쇄 반응이 일어났던 것이다.결국 안토니누스 피우스 재위 후기, 로마의 동맹자로 로마와 오랫동안 국경에서 교류하고, 로마 서방 속주들로 이주하여 보조병으로 근무한 비율이 높은 '가까운 게르만족' 세력들이 공식적으로 로마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들은 '먼 게르만족'의 이같은 압박 아래에서 로마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입장이 굳건했다. 그렇지만 영국의 역사가 애드리언 골즈워디, 역사가 하퍼 등에 따르면,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그의 양자, 사위로 공동황제와 다름없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이사르는 그들을 돕더라도 현실적인 이유 아래에서 직접적인 개입은 꺼렸다. 이들이 이렇게 결정을 내린 이유는 두 사람의 군사경험이 부족하거나 전무한 까닭이 아니었다. 원로원과 군부의 의견을 들어 검토한 두 사람은 자칫 섣불리 개입했다가 인력과 재정 손실을 입을 수도 있고, 로마의 지원을 받아 '먼 게르만족'을 흡수한 '가까운 게르만족'이 로마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이렇게 결정한 진짜 이유 중 하나에는 로마가 트라야누스의 대규모 정복전쟁 이후 가까스로 국력과 국고 상황을 회복시킨 상황에서 군사작전이 벌어지면, 겨우 안정시킨 이탈리아 전체의 경제가 다시 흔들릴 위험 때문이 컸다. 트라야누스 아래에서의 전쟁들을 하드리아누스가 내치의 안정으로 정상화로 돌렸지만,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벌인 대대적인 내치 집중이 로마 입장에서는 최우선 과제였던 것이다. 이런 이유 외에도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그에게 조언을 건넨 원로원, 총독, 군부는 그 개입시 로마군이 최소 몇년 이상 발을 빼지 못할 것을 알아, 제대로 된 군사계획 없이 움직일 경우의 위험을 크게 경계했다. 따라서 로마는 표면적으로 불개입 의사를 천명한 후, 국경 근처의 가까운 게르만족 세력들을 위해 각 속주 총독, 군단장들에게 그들이 위협에 닥치면 군사적 지원을 하는 방향으로 조치를 취한다. 그리고 이런 상황 아래에서 게르마니아에서는 이런 로마의 입장을 인지한, 고트 족 등 '먼 게르만족'이 영리한 방법 아래에서 잠식하는 형태로 그들의 패권을 확보하게 된다.
이렇게 상황이 흘러가자, 먼 게르만족과 강력한 가까운 게르만족 세력 사이에서 밀려난 세력들은 생존을 위해 움직이게 됐고, 이중 로마에게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 세력들은 불만 아래에서 당연히 라인 강과 도나우 강 너머의 풍요로운 땅으로 눈을 돌렸다. 어차피 세력 단위로 로마가 이민을 허락하지 않고, 개인 단위로 보조병을 받거나 자유민으로 국경 근처 정주를 허락하는 상황 속에서 그들이 세력을 유지하려면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에서 서기 161년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서거하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가 공동황제로 즉위한다.
162년, 동방의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 제국이 로마 제국과 그들 사이의 완충 지대 역할을 하고 있던 아르메니아를 침공한다. 파르티아군은 아르메니아를 단번에 공략했다. 이때 시리아에 주둔한 로마군 역시 궤멸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는 서방에서의 상황을 주시하면서 현실에 맞게 조치를 취하던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그의 두 후계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가 이후에도 로마의 개입을 요청한 가까운 게르만족들에게 비슷한 입장을 취하는 것을 강화시켰다. 그래서 골즈워디로 대표된 학자 일부는 두 황제의 선황이며 아버지인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아마도 파르티아와의 문제 때문에 군사 개입을 더욱 망설이게 됐고, 이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신중함 아래에서 그 현상유지 조치가 유지돼 게르만족과의 관계 역시 그렇게 됐을 것이라고 평한다. 그리고 이런 예상의 근거와 어울리게도, 로마는 파르티아와의 전쟁을 위해, 라인 강과 도나우 강변에 주둔하던 정예병을 차출했다. 자연히 이런 로마의 움직임은 게르만 세력을 막고 있던 로마 양대 전선의 방어력이 약화되는 것을 보여준 모습이 됐다.
설상가상으로, 파르티아와의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군단은 안토니누스 역병을 함께 가지고 오고, 파르티아 전쟁 개선식을 기점으로 로마와 이탈리아를 넘어 제국 서방 전체를 덮치는 대규모 전염병이 창궐한다. 이 전염병으로 수많은 로마인이 목숨을 잃었고, 로마군 역시 그 피해를 입는다. 이렇게 상황이 흘러가자, 생존의 이유 아래에서 돌파구가 필요한 게르만 세력들은 로마 국경을 공격해, 대규모 침공을 시작한다.
3. 제1차 마르코만니 전쟁
166년 말, 롬바르드족 6,000여 명이 다뉴브 강을 건너 로마의 판노니아 속주로 침입했다. 마르쿠스 마크리니우스 아비투스 카토니우스 빈덱스 장군은 제1 아디우트릭스 군단의 벡실라티오와 기병대를 이끌고 그들을 요격해 격파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167년, 마르코만니 족장 발로마르와 콰디 족장 아리오게수스는 다른 9개 부족들과 함께 로마에 정착할 권리를 요구했다. 판노니아 총독 마르쿠스 랄리우스 바수스는 이들 11개 부족과 협상했는데, 발로마르가 중재자 역할을 했다. 그 결과 평화협약이 합의되었고, 국경을 위협하던 게르만족은 철수했다. 일부 게르만 부족에서는 로마와의 전쟁을 요구하는 선동가들이 사형당하기도 했다.그러나 167년 반달족과 사르마티아 계열의 이아지게스족이 다키아 속주를 침공하여 그곳의 총독이었던 칼푸르니우스 프로클루스를 죽이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로마 측은 이에 맞서기 위해 파르티아 원정에서 활약한 제5 마케도니카 군단을 모이시아 인페리오르 속주에서 디키아 속주로 이동시켰다. 또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168년 봄 동료 황제인 동생 루키우스 베루스와 함께 아퀼레이아에 본부를 세우고 이탈리아와 일리리쿰의 방어 조직을 개편한 뒤 제2 이탈리카 군단과 제3 이탈리카 군단을 창설해, 그들을 이끌고 판노니아로 진군해 시르미움에서 이아지게스족의 침략으로 흐트러진 질서를 바로잡았다. 그러다가 겨울이 찾아오자 아퀼레이아로 돌아갔다. 그런데 169년 1월 루키우스 베루스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39세의 루키우스 베루스는 곧 죽었고, 동생이자 사위인 그를 잃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루키우스의 장례식을 상주로 치르기 위해 로마로 돌아갔다.
169년, 이아지게스족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동생의 죽음, 아퀼레이아에 퍼진 전염병 대책 등으로 정신없는 틈 속에서 재차 침략을 감행했다. 그들은 도나우 강(다뉴브 강)을 건너면서 교란작전으로 로마군을 정신없게 했고, 로마는 고전했다. 하 모이시아 속주 총독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프론토가 전사하고, 모이시아 일대가 이아지게스인들의 기습과 파괴전술 아래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앞서 로마 제국과 평화협약을 맺었던 마르코만니족 등 여러 부족들 역시 기존 협약을 파기했다. 따라서 로마는 이에 대한 응징과 휴전 종료라는 명분 아래, 곧바로 다뉴브 강을 건너 트라키아로 쳐들어갔다.
이런 가운데 코스토보키족은 동쪽으로 이동하여 우회 후, 트라키아를 침공했다. 이들은 트라키아를 지나면서 모조리 황폐화시키고, 그리스 반도인 아키이아 지방까지 남하했다. 아테네 인근의 엘레우시스에 이르러 그곳의 명승지인 '신비의 신전'을 파괴한 일이 이때 벌어졌다. 한편 마르코만니 족장 발로마르는 게르만 부족 연합군을 통솔하여, 로마 제국의 본체인 본국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그들은 카르눈툼 인근에서 20,000명 가량의 로마군을 섬멸하고, 북이탈리아로 진격했다. 이중 마르코만니족 군대는 오데르초와 노리쿰을 파괴한 뒤, 북이탈리아 최대 도시로 당시 본국 이탈리아의 2번째 대도시인 아퀼레이아를 포위했다. 외적이 이탈리아에 쳐들어온 건 기원전 101년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을 물리친( 킴브리 전쟁) 이후 200여 년만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이렇게 되자 티투스 푸리우스 빅토리누스 장군이 아퀼레이아를 구원하기 위해 출격했다. 그러나 로마군은 참패했고, 빅토리누스는 전투 중 전사했다.
상황이 이토록 악화되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원로원에 추가 군자금 확보를 요구했다. 그는 마르쿠스 마크리니우스 빈덱스 장군과 마르쿠스 바세우스 루푸스 장군에게 다뉴브 전선을 책임지게 한 뒤, 사위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파르티아 전쟁 당시 용장으로 이름을 날린 페르티낙스에게 군대를 각각 맡겨, 이들의 지휘 아래 포위된 아퀼레이아를 구원하도록 했다. 폼페이아누스는 로마에서 북상했고, 페르티낙스는 다뉴브 강 전선에서 군대를 차출해 진군했다. 여기에 새로운 군사령부인 '이탈리아와 알프스 고원 수비대'가 이탈리아로 향하는 도로를 보호하기 위해 설립되었고, 다뉴브 강 함대가 강화되어 마르코만니족의 추가 도하를 막았다. 이후 격전이 벌어진 끝에, 마르코만니족은 침공 약 2년여만인 171년 말 아퀼레이아에 대한 포위를 풀고 퇴각했다.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곧바로 대규모 전쟁을 결심했다. 이를 위해 로마는 마르코만니족과의 전쟁에 전념하고자, 마르코만니족과 상호 경쟁 중이거나 이해관계가 상충된 다른 부족들과 평화협약을 맺기로 했다. 콰디족과 이아지게스족은 휴전에 응하여 고향으로 돌아갔고, 반달족은 로마 제국의 동맹 부족이 되었다.
172년, 마르쿠스 황제와 그의 맏사위 폼페이아누스가 주축이 된 로마군이 다뉴브 강을 도하했다. 로마군은 마르코만니족의 영역으로 쳐들어갔고, 반대로 마르코만니 근거지를 전쟁터로 삼아 대대적인 전쟁에 돌입했다. 이후의 세부사항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로마군은 기존 전통인 봄에 도강해 늦가을에 철군하는 방식 대신 마르코만니 세력을 재기불능으로 만드는 방식 아래 전쟁에 임했다. 이때 마르코만니족과 그들의 동맹인 바스타르네족, 나리스티족, 코티니족이 로마군에게 참패하여, 로마에게 평화협약을 강요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트렌친에서 발견된 비문에 따르면, 로마 장군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가 나리스티 족장 발라오를 전장에서 죽여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게 공개적으로 칭송을 받고 족장의 말과 장식 및 무기를 수여받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173년, 콰디족이 조약을 파기하고, 마르코만니족을 도와 로마 속주를 재차 공격했다. 이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원정군을 직접 이끌고, 그들을 몰아내는 것을 넘어, 콰디족의 영역으로 쳐들어갔다. 아버지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 당시 모이시아, 달마티아에서 군단장, 총독으로 재임했고, 본인과 여동생 남편 마리우스 막시무스 역시 이 일대에서 오랫동안 군생활을 한 디오 카시우스는 이때의 일을 적었다. 디오에 따르면, 제12 풀미나타 군단이 원정 도중 압도적인 수의 콰디족 군대에 포위되어 더위와 갈증 때문에 항복하기 직전까지 몰렸다고 한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소나기가 내려서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고, 콰디족은 번개가 연신 내리치는 바람에 공포에 질려 달아났다고 한다. 로마인들은 이를 신의 구원으로 여겼고, 이 자연 현상 아래 기세가 올라 콰디족을 박살냈다. 이 이야기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둥과 당시 발행된 동전에 묘사되었다.
로마군은 이 원정으로 콰디족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이 전쟁을 진두지휘하고 계획하면서 콰디족처럼 배신한 세력에 대한 로마군의 강함을 알렸다. 이에 고무된 로마군은 황제에게 "임페라토르"라고 자발적으로 찬사를 보냈고, 원로원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게 '게르마니쿠스'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같은 해 라인 강 방면 사령관이었던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체티족과 헤르문두리족의 침략을 격파했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의 활약은 이때 대단해, 그는 게르만족들에게 용장으로 두려움을 알렸다. 그러나 로마군은 율리아누스의 활약에도 차우치족이 바다를 통해 갈리아 벨기카의 해안가를 습격하여 약탈을 자행하고 돌아가는 것은 막지 못했다.
174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명령 아래 로마군이 콰디족을 향한 원정을 재차 단행했다. 로마군은 콰디족을 궤멸시킬 작전 아래 진격해 전투를 치렀다. 이에 콰디 족장 푸르티우스는 이제 전쟁을 그만두고 로마 제국과 평화협약을 맺으려 했다. 하지만 부족민들이 이에 불복해 그를 폐위시켜 죽이고, 그의 라이벌인 아리오게수스를 옹립했다. 이에 전투 중 만일의 차원을 대비해 협상 가능성을 내비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강경한 자세를 보여줬다. 황제는 아리오게수스를 통치자로 인정하길 거부했고, 아리오게수스를 잡아서 넘기는 자에게는 1,000데나리우스, 죽여서 수급을 가져오는 자에게는 500데나리우스를 포상금으로 주겠다고 약속했다. 동시에 로마군은 전투 수행 속에서 콰디족과 그 동맹부족들을 압박했다. 결국 174년 말, 콰디족은 로마에게 굴복했다. 아리오게수스는 체포됐는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를 그의 고향과 정반대에 위치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보내어, 감시 속에서 여생을 보내도록 했다.
그렇게 콰디족을 제압한 뒤, 로마군은 이아지게스족에 대해 공세를 펼쳐 몇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수세에 몰린 이아지게스 족장 바나바스푸스는 로마 제국과 평화협약을 맺으려 했다. 그렇지만 그는 부족민들에게 살해되었다. 그 뒤를 이은 잔티쿠스는 로마에 계속 대항했으나 도저히 승산이 없자 175년 평화협약을 체결했다. 이 협약에 따라, 사르마티아계 이아지게스족은 100,000명의 로마인 포로를 돌려주고, 8,000명의 보조군 기병을 제공했다. 이 8,000명의 기병 중 5,500명은 브리타니아 섬으로 보내졌다. 원로원은 이 승리 소식을 전해듣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게 '사르마티쿠스'(사르마티아 정복자)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이제 남은 부족들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일 계획을 세웠으며, 최근에 정복한 영토에 '마르코마니아'와 '사르마티아'라는 이름의 2개 속주를 새로 설치하려고 했다. 그러나 175년 5월 시리아 속주 총독 아비디우스 카시우스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붕어했다는 헛소문을 믿고 반란을 일으켰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계획을 취소하고, 로마군과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지휘하의 마르코만니족, 콰디족, 나리스티족 출신의 보조병들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진군했다. 도중에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수급을 전달받았지만, 예정대로 동방에 가서 민심을 수습하고, 유력자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재확인받은 후 통치 체계를 정비했다. 그 후 8년만에 로마로 귀환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176년 12월 23일 개선식을 거행하고, 아들 콤모두스를 차기 황제로 선출했으며, 트라야누스 기둥을 본뜬 아우렐리우스 기둥을 세웠다.
4. 제2차 마르코만니 전쟁
제1차 마르코만니 전쟁 이후 마르코만니족과 콰디족의 영역에 주둔한 로마군 수비대는 그들의 행동거지를 철저하게 감시했으며, 더 조용한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반감을 품은 마르코만니족과 콰디족은 177년 반란을 일으켜 수비대를 물리치고 로마 제국령 속주로 침략해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178년 여름 재차 원정을 떠났다. 그는 이아지게스족이 이 틈을 타 전쟁을 일으키는 걸 막기 위해 그들과 맺었던 평화 조건을 다소 완화하여, 이아지게스족이 흑해에 사는 록솔라니족과 교류하고 싶을 때는 총독의 동의하에 다키아 지방의 국경을 넘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마르코만니족과 콰디족의 영역에서 벌어진 전쟁의 경과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다만 트렌친에서 발견된 비문에 따르면,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179년과 180년 사이에 라우가링시오(현재 트렌친 근처)에서 콰디족을 상대로 전투를 벌여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콰디족은 대게르마니아로 도주한 뒤 재기를 노렸지만, 집정관 푸블리우스 타루티우스 파테르누스의 로마군에게 또다시 패배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이 시점에서 마르코만니아와 사르마티아 속주를 신설할 계획을 추진하려 했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다키아 속주, 모이시아 속주, 라이티아 속주, 판노니아 속주, 달마티아 속주, 갈리아 속주에 정복한 게르만족들과 포로들을 이주시켜 로마 주민으로 정착시키는 사업을 벌였다.
이 조치는 본국인 이탈리아 북부에서도 이뤄졌다. 포로로 잡힌 게르만 부족들은 이전까지는 노예로 팔리거나 광산에서 강제노동을 해야 했기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치세 동안 벌어진 이런 시혜책들은 그들 입장에서도 이례적이었다. 자유를 얻는 조건으로 로마 제국의 영내로 향한 게르만인들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정책에 따라 제국 방어선 내 속주들과 이탈리아에 항구적으로 정착해 로마 시민으로 동화되어 완전히 편입되었다. 다만 이탈리아 반도로 옮겨진 게르만족들만은 후방에서의 농사꾼 생활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다가 반란을 일으켜서 다시 진압해야 했다. 즉 이탈리아 반도에 정착시키려는 정책은 게르만족이 현지에 적응하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키는 등의 폐단을 낳아 중단되었다.
그러던 180년 3월 17일, 콰디족의 저항 세력을 분쇄하고 있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전염병에 걸려 자신이 설치한 병영기지인 빈도보나[3]에서 붕어했다. 후임 황제로 즉위한 콤모두스는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등 고위급 장군들의 간곡한 조언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끝내기로 결심한 후, 마르코만니족 및 콰디족과 평화협약을 맺은 뒤 180년 초가을 로마로 돌아가 10월 22일에 개선식을 거행했다.
하지만 로마군의 군사 작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클로디우스 알비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다뉴브 강과 다키아 속주 사이에 살고 있었던 부리족 등 '자유 다키아' 부족들을 향한 공세를 벌였던 것이다. 전쟁 경과가 어찌 되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서 확실하지 않으나, 그들을 복속시킨 것만은 분명하다. 콤모두스 황제는 182년 중반에 이 승리를 근거로 '게르마니쿠스 막시무스'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5. 결과
로마 제국은 14년에 걸쳐 대규모 전쟁을 벌인 끝에 마르코만니족과 이아지게스족 등 게르만인 및 사르마티아인들의 침략을 물리치고 국경을 사수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여기서 더 나아가 마르코만니족과 콰디족을 완전히 복속시키고 다른 부족들도 복속시켜서 넓은 완충지대를 확보해, 이민족의 침략으로부터 도나우(다뉴브) 강 이남의 로마화된 속주들을 보호하고자 했다. 그러나 콤모두스는 이 모든 계획을 백지화시키고, 옛 국경으로 후퇴하기로 했다.이 결정은 당대와 후대의 역사가들로부터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콤모두스가 훗날 폭군으로 규탄받았기 때문에, 그의 이 선택 역시 "얼른 로마로 돌아가 쾌락을 누리고 싶어서 전쟁을 그만뒀다"라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최근 일부 학자들은 당시 로마 제국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계획을 실현시킬 만한 인적 자원과 재정적인 여유가 부족했기에, 장기적으로 도나우 강 너머의 유산을 유지하는 건 불가능했으며, 수도 로마로 한시바삐 돌아가서 원로원의 승인을 받아 자신의 집권을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기에 콤모두스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