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레카논 전투 영어: Battle of Pelekan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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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329년 6월 10일 ~ 11일 | |
장소 | 비티니아 지역 니코메디아 인근 펠레카논(현재 튀르키예 멜테페) | |
원인 | 튀르크군에게 포위된 니케아를 구하려는 동로마군과 이를 저지하려는 오스만 베이군의 대결 | |
교전국 | 동로마 제국 | [[틀:깃발| | ]][[틀:깃발| ]][[오스만 베이국| ]]
지휘관 |
안드로니코스 3세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 |
[[틀:깃발| | ]][[틀:깃발| ]][[오르한| ]]
결과 | 오스만 베이국의 승리 | |
영향 | 동로마 제국의 아나톨리아 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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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329년 6월 10~11일, 오르한이 이끄는 오스만 베이국 군대가 니케아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오던 안드로니코스 3세 휘하 동로마군을 저지하면서 벌어진 전투. 동로마 제국은 이 전투에서 패한 뒤 아나톨리아에서 더 이상 군사 활동을 하지 못했다.
2. 상세
1326년 부르사 공방전에서 승리하면서 비티니아의 중심지인 부르사를 공략한 오르한은 수도를 쇠위트에서 부르사로 옮겼다. 그 후 그는 지하드를 명분삼아 동로마 제국의 아나톨리아 영토를 향한 지속적인 공세를 감행했고, 1328년경 니케아를 포위했다. 한편, 안드로니코스 3세는 제1차 팔레올로고스 내전에서 할아버지 안드로니코스 2세를 상대로 최종적으로 승리했다. 그는 아나톨리아의 남은 영토를 보전하기로 마음먹고, 최측근인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와 함께 니케아를 구원하기 위해 정예병을 소집했다.1329년, 안드로니코스 3세는 2,000명의 트라키아 정예 중기병대와 2,000명이 넘는 민병대를 이끌고 헬레스폰트 해협을 넘어 칼케돈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그의 움직임은 곧 첩자를 통해 오르한에게 전해졌다. 오르한은 황제가 니케아에 근접하기 전에 요격하기로 마음먹고, 일부 병력을 남겨서 니케아를 계속 포위하게 한 뒤 자신은 8,000가량의 튀르크 경기병대 및 보병대를 이끌고 적을 요격하러 이동했다.
1329년 6월 10일, 양군은 펠레카논 평원에서 마주쳤다. 먼저 그곳에 도착한 오르한은 언덕에 숙영지를 세운 뒤 적을 언덕으로 유인하고자 기마 궁수 300명을 보내 적에게 접근하게 했다. 그러나 유인책이라는 것을 눈치챈 동로마군은 그들을 밀어낼 뿐 추격하지 않았다. 이에 오르한은 수적으로 우월한 만큼 밀어붙이기로 마음먹고 전군을 이끌고 돌격했다. 하지만 동로마군은 2배 많은 적을 상대로 분전했고, 어둠이 깔릴 때까지 승패가 갈리지 않았다. 이때 황제 안드로니코스 3세는 허벅지에 화살이 꽂혀 중상을 입었지만 전장에 끝까지 남았다.
어둠이 깔리면서 전투가 종료된 후, 양측은 진영으로 돌아가서 하룻밤을 보냈다. 이때 안드로니코스 3세는 신하들의 조언에 따라 인근 도시로 후퇴한 뒤 부상을 치료하기로 했다. 그러나 다음날 새벽 동로마군이 철수하는 것을 감지한 오르한이 추격하면서, 양군은 또다시 충돌했다. 이때 황제가 사망했다는 뜬소문이 퍼지면서, 동로마 민병대는 삽시간에 공포에 질려 패주했다. 튀르크군은 이들을 맹추격해 모조리 죽이거나 사로잡았고,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가 남은 병력을 수습한 뒤 황제와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퇴각했다.
동로마 제국은 북방의 세르비아 왕국과 불가리아 제2제국의 압력이 거세지는 상황에도 어렵게 차출한 정예병을 이 전투에서 대거 잃어버렸다. 이 이상 손실을 본다면 제국을 유지할 가망마저 사라질 가능성이 높았기에, 안드로니코스 3세는 아나톨리아를 운명에 맡기기로 했다. 니케아는 2년 더 버텼지만 결국 1331년 3월 2일 항복했다. 오르한은 1333년 니코메디아를 포위했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니코메디아에 식량을 제공하고 오르한에게 매년 12,000개의 금화를 바칠 테니 니코메디아를 빼앗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오르한은 꿋꿋이 공성전을 이어갔고, 결국 니코메디아는 1337년 오스만 베이국의 수중에 넘어갔다. 1338년, 튀르크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 건너편의 칼케돈을 공략했다. 1341년 6월 15일 안드로니코스 3세가 붕어했을 때, 동로마 제국의 아나톨리아 영토는 비티니아의 흑해 쪽 연안의 헤라클레아 폰티카, 아마스트리스(오늘날 아마스라), 페가이(오늘날 카라비가), 그리고 에게 해 연안의 필라델피아와 포카이아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