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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포에니 전쟁 중이던 기원전 212~211년, 이탈리아 중남부 캄파니아의 카푸아에서 발발한 공방전.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가 이끄는 로마군이 한니발 바르카와 연합한 카푸아를 공격하면서 벌어졌다. 로마는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한니발의 이탈리아에서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데 성공했다.2. 배경
카푸아는 고대 에트루리아인들이 건설한 도시 국가로, 로마와 카르타고에 이은 서지중해 제3의 도시였다. 기원전 424년 삼니움인에게 점령된 뒤 기원전 343년 정복자들에 맞서 로마에 도움을 청했다. 로마군이 삼니움인들을 몰아낸 뒤에는 로마와 동맹을 맺었고, 카푸아 시민들은 투표권이 없는 시민권을 받았다. 기원전 312년엔 로마와 아피아 가도로 연결되어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로마에게 있어 카푸아의 의미는 무척 남달랐다. 그들은 풍요로운 자원에 기름지고 드넓은 농경지를 보유해 무수한 식량을 생산할 수 있었으며, 3만 명의 보병과 4천 명의 기병을 독자적으로 양성할 수 있었기에, 대외 전쟁을 지속적으로 벌이는 로마에게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동맹시였다. 그래서 로마는 카푸아를 다른 도시들보다 특별히 대접했다.카푸아는 제2차 포에니 전쟁 발발 후에도 로마에 충실했다. 그러나 기원전 216년 8월 2일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가 사상 최악의 패배를 당하자, 그들은 로마가 한니발에게 조만간 패망할 거라고 판단하고, 한니발과 동맹을 맺기로 결의했다. 이 소식을 접한 이탈리아 남부의 여러 도시들이 대거 한니발에게 항복하면서, 로마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했다. 한니발은 카푸아를 겨울 숙영지로 사용하면서 입지를 든든히 다졌고, 카푸아인들은 한니발에게 적극적으로 지원해 그의 승리에 일조했다. 로마인들은 이 일로 카푸아에게 이를 갈았고, 반드시 배신의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던 기원전 212년, 한니발이 로마로부터 배신할 기미가 보이는 타렌툼을 자신에게 복속시키기 위해 남하했다. 타렌툼의 로마군 수비대는 한니발의 절묘한 계략에 의해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근처 요새로 도주했고, 타렌툼은 한니발의 편이 되었다.( 1차 타렌툼 공방전) 한니발은 이제 필리포스 5세의 마케도니아군이 타렌툼에 상륙하여 자신과 힘을 합쳐 로마를 공동으로 치길 희망했다. 그러나 필리포스 5세는 로마에 가담한 아이톨리아 동맹, 페르가몬 왕국, 스파르타, 엘리스, 메시네 등의 공세로 인해 이탈리아에 상륙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사이, 두 집정관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가 이끄는 로마군은 카푸아를 응징하기 위해 삼니움으로 진군했다. 두 사람은 기병대를 파견하여 카푸아 인근의 농경지를 약탈해, 그들이 굶주리게 했다. 이에 카푸아인들이 한니발에게 사절단을 보내 로마군으로부터 농성하고자 하니 밀을 보내달라고 부탁하자, 한니발은 한노에게 군대를 이끌고 브루시움에서 캄파니아로 진군해, 그들에게 밀을 공급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한노는 2차 베네벤툼 전투에서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의 로마군에게 격파당했고, 기껏 모았던 밀과 수송 마차, 그리고 소떼를 모조리 빼앗겼다. 그 후 플라쿠스는 풀케르와 연합하여 카푸아를 포위했고, 카푸아 시민들은 한니발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리하여 카푸아 공방전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로마군
- 지휘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 병력: 4개 군단. 대략 40,000명으로 추정됨.
3.2. 한니발과 카푸아군 연합
- 한니발: 3만 명
- 카푸아 수비대: 미상
4. 전투 경과
두 집정관 풀케르와 플라쿠스는 베네벤툼에서 집결한 뒤 카푸아로 진군하는 한편,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에게 루카니아에서 베네벤툼으로 북상하도록 했다. 그라쿠스는 이에 따라 군대를 이동시키면서, 루카니아 부족 동맹 지도자 플라부스의 안내를 받았다. 그러나 플라부스는 한니발이 타렌툼를 공략한 뒤 카르타고 편을 들기로 마음먹고, 그라쿠스를 카르타고군에게 바침으로써 자신의 뜻을 한니발에게 보여주기로 했다. 삼니움인 마구스가 지휘하는 카르타고군은 약속 장소에서 플라부스의 인도를 받는 그라쿠스를 기다렸다. 결국 매복에 걸려든 그라쿠스는 소규모 호위대와 함께 혈투를 벌였으나 끝내 전사했다. 마구스는 그라쿠스의 시신을 한니발에게 보냈고, 한니발은 이를 화장하였다. 그가 이끌던 해방노예 부대는 주군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뿔뿔이 흩어졌다.카푸아로부터 적군이 카푸아에서 불과 하루 만에 당도할 수 있는 베네벤툼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접한 한니발은 적군의 카푸아 약탈을 막기 위해 2,000명의 기병을 파견했다. 카푸아 주변 지역을 약탈하던 로마군은 그들의 급습을 받아 1,500명 이상이 전사했다. 이후 한니발은 카푸아를 포위한 적군을 향해 진격했고, 양측은 곧 전투를 벌였다. 초기에 카르타고 기병대의 맹돌격으로 상당수의 로마군이 전사했지만, 로마군은 곧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했다. 한창 격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가 이끄는 분견대가 멀리서 나타났는데, 양측 모두 그들이 적군을 도우러 왔다고 여기고 전투를 중단했다. 그 후 두 집정관은 한니발과 회전을 벌이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그날 밤 카푸아를 떠났다. 풀케르는 루카니아로 이동했고, 플라쿠스는 쿠마이로 이동했다. 그들은 한니발이 한 쪽을 추격하여 카푸아에서 떨어지게 한 뒤, 다른 쪽 부대로 카푸아를 재포위하기로 했다.
로마군이 2개 그룹으로 나뉘어 각자의 진로로 후퇴하자, 한니발은 루카니아로 이동하는 풀케르를 추격했다. 풀케르는 계속 후퇴하면서 한니발이 자신을 멀리까지 쫓아가게 유도했다. 이때 백인대장 마르쿠스 켄테니우스 페눌라가 원로원에게 자신이 그동안 한니발의 승리를 쭉 지켜봤기에 그의 전략전술을 훤히 꿰뚫고 있으며, 루카니아 지리를 잘 알고 있으니 5천 명만 주면 카르타고군을 물리치겠다고 주장했다. 원로원은 그의 용기와 기백에 감동하여 1개 로마 군단병과 1개 동맹시 군단병으로 구성된 8천명을 주기로 했다. 그가 이들을 데리고 진군하자, 시민들이 여기에 가담하면서 총 1만 6천에 달하는 병력이 편성되었고, 페놀라는 즉각 한니발을 향해 이동했다. 정찰병을 통해 이를 파악한 한니발은 즉시 요격에 나섰고, 양군은 실라루스 강변에서 대치했다. 이후 벌어진 실라루스 전투에서, 한니발은 2시간 만에 적군을 섬멸하였고, 켄테니우스는 적진에 자살성 돌격을 하다 전사했다. 당시 전투에 투입된 장병 중 살아남은 이는 단 1천 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니발이 페놀라의 군대를 섬멸하는 데 집중한 사이, 풀케르는 카르타고군의 추격을 따돌릴 수 있었다. 또한 플라쿠스는 한니발이 동료 집정관을 멀리 추격한 사이에 카푸아로 돌아와 포위했고, 얼마 후 풀케르가 돌아와 그와 합세했다. 그들은 카푸아 주변에 3개 요새를 짓고, 해자와 성벽으로 도시를 에워쌌으며, 샤르데냐와 카실리눔으로부터 대량의 밀을 공출해 장기 포위할 태세를 갖추었다. 한니발은 카푸아를 버리고 싶지 않았지만, 플라쿠스의 동생인 법무관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가 한니발의 근거지인 아풀리아에서 여러 도시를 공략하며 근거지를 위협하자, 일단 그부터 물리친 뒤 카푸아로 돌아가기로 했다. 한니발은 아풀리아로 귀환한 후 헤르도니아 근교에서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의 군대를 공격해 완전 섬멸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18,000명의 로마 병사 중 2,000명 만이 가까스로 살아남았다고 한다.( 1차 헤르도니아 전투)
풀케르와 플라쿠스는 집정관 임기가 만료된 뒤에도 전직 집정관으로서 카푸아 포위를 이어갔다. 카푸아인들은 도시 내 식량이 부족해져 기아의 기미가 보이자 한니발에게 사절을 보내 어서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한니발은 자신이 나서서 그들을 구해줄 테니, 안에서 호응할 준비를 하라고 답했다. 카푸아인들은 한니발이라면 능히 자신들을 구해줄 것이라 믿었다. 기원전 211년 3월 로마군은 카푸아 시에 전령을 보내 "지금이라도 항복한다면 자유와 재산을 그대로 인정해주겠지만, 공성추가 성문에 닿은 뒤에는 용서할 수 없다."라고 알렸다. 그러나 카푸아인들은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으며 단호히 거부했다.
기원전 211년 봄, 한니발 바르카의 카르타고군이 카푸아 인근에 당도했다. 이리하여 두 전직 집정관은 도시 수비대와 한니발의 양면 공격을 받아야 했다. 이에 플라쿠스는 한니발과 맞서기로 했고, 풀케르는 카푸아인과 맞서기로 했다. 그동안 로마군이 해자를 깊게 파고 외벽을 세우고 요새 3곳을 짓는 등 많은 공을 들였지만, 희대의 명장 한니발과 오랜 세월 그를 따르며 숱한 전장에서 로마군을 살육한 정예 카르타고군은 과연 그 위력을 충분히 발휘했다. 플라쿠스는 카르타고군의 맹공으로 매우 고전했다. 한때 중앙 대열이 돌파되어 전투 코끼리 3마리와 이베리아 병사 일부가 성벽 바로 앞까지 이르기도 했지만, 다른 전선에서 차출된 로마 별동대가 반격을 가해 코끼리들을 도랑에 빠뜨려 죽이고 이베리아인들을 축출하면서 가까스로 막아낼 수 있었다. 또한 누미디아 기병이 로마 진영에 침투한 뒤 "진영이 이미 함락되었으니 당장 도망쳐라"라고 소리쳤지만 로마군이 듣지 않고 반격하자 물러가기도 했다.
하지만 카푸아 수비대는 한니발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그들은 한니발의 공격에 맞춰서 성벽 밖으로 나왔지만, 풀케르의 로마군이 즉각 반격하자 금세 무너져 성내로 달아났다. 풀케르는 이들을 맹렬히 추격하다가 왼쪽 어깨 아래에 창이 박히면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카푸아군이 완전히 패퇴한 걸 확인한 한니발은 어쩔 수 없이 공세를 중단했다. 이후 로마군이 방비를 더욱 굳건히 하고, 일전의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카푸아군이 두 번 다시 성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자, 한니발은 적군이 알아서 포위망을 풀게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는 카푸아 시민들이 자기가 도망친다고 오해할 것을 우려해 사절을 은밀히 도시로 잠입시킨 뒤, "내가 로마로 진군해 그들을 위협하겠다. 그러면 로마군은 나를 막으려고 로마로 철수할 테니 포위망은 저절로 풀릴 것이다."라고 알렸다. 카푸아인들은 이에 용기를 얻고 농성을 계속 이어가기로 했다.
그 후 한니발이 로마로 쳐들어와서 성문 앞에까지 이르러 숙영지를 세운 후 주변 지역을 약탈하자, 로마 시민과 원로원은 발칵 뒤집혔다. 긴급 소집된 회의에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나 등 많은 의원들은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모든 군대를 불러들이자고 주장했고,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는 카푸아 포위망을 풀지 않고도 로마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있는지 알아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한니발이 군대를 로마 쪽으로 유인하려고 허세를 부리는 것뿐이니, 어떤 군대도 로마로 돌아오게 하지 말고 농성만 하면 된다며 묵살했다. 며칠간 로마 주위를 약탈하면서 도발했지만 로마군이 끝내 성밖으로 나오지 않자, 한니발은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그는 철수 도중 카푸아 포위망이 여전히 굳건하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도저히 카푸아를 구할 방법이 없다고 판단하고, 레지오 지방의 칼라브리아를 급습했지만 공략에 실패하자 아풀리아로 돌아갔다.
한니발이 끝내 돌아오지 않고 로마군의 포위가 갈수록 심화되자, 카푸아 시민들은 절망에 빠졌다. 그들은 로마가 자신들을 용서해주지 않을 거라 여기고 농성을 이어갔지만, 식량이 완전히 바닥나 수많은 이가 굶어죽는 참극에 이르자 결국 항복하기로 했다. 일찍이 로마와 동맹을 끊고 한니발과 손잡기로 했던 비비우스 비리우스 등 여러 인사들은 연회를 벌여서 음식을 배불리 먹은 후 독이 든 포도주를 마셔서 집단 자살했다. 로마군은 곧 도시에 진입했고,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는 걸 지지한 53명의 인사들이 체포되었다. 풀케르는 이들의 처분을 원로원에게 맡기자고 주장했지만, 플라쿠스는 당장 처형하길 원했다. 풀케르는 중상을 입은 상태라 플라쿠스의 강경한 입장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고, 53명의 인사들은 티아나와 칼라에서 처형되었다. 그 직후, 풀케르는 부상이 악화되면서 사망했다. 이리하여 카푸아 공방전은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