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일 1세의 남이탈리아 원정 Manuel I's Southern Italy expedi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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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155년 ~ 1158년 | |
장소 | 남부 이탈리아 | |
원인 | 시칠리아 왕국을 굴복시켜 아드리아 해의 안보를 확보하고 남부 이탈리아를 수복하려는 마누일 1세의 야망. | |
교전국 | 동로마 제국 | 시칠리아 왕국 |
지휘관 |
마누일 1세 미하일 팔레올로고스 요안니스 두카스 알렉시오스 악수흐 |
굴리에모 1세 ← 로베르토 3세 드 로리텔로 |
결과 | 동로마 제국의 원정 실패. | |
영향 | 동로마 제국과 시칠리아 왕국의 평화 협약 체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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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55~1158년, 마누일 1세 황제의 남부 이탈리아 탈환을 위한 원정. 초기에는 동로마군이 승승장구했으나 시칠리아 왕국의 반격과 현지인들의 이탈로 실패했다.2. 배경
로베르 기스카르 전쟁 이래, 동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남이탈리아는 로베르 기스카르의 후손들이 수립한 노르만족 계통의 시칠리아 왕국의 수중에 넘어갔다. 그들은 대대로 동로마 제국에 적대적이었으며, 서유럽 국가들에 "저들은 기독교도가 아니라 이단이다", "순박한 기독교도들을 무슬림들에게 팔아넘기고 있다", "겉으로는 점잖은 체 하지만 속으로는 음험한 음모를 꾸미는 족속이다" 등 동로마 제국에 대한 악성 선전을 벌이면서 힘을 합쳐 정벌하자고 주장했다.1147년,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는 2차 십자군이 발칸 반도를 통과하는 동안 벌어질 부작용을 최소화하고자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는 제국군을 대거 동원해 십자군이 지나가는 경로 주변에 배치시켜서 십자군을 통제하게 했다. 이로 인해 아드리아 해 방위가 상대적으로 허술해지자, 시칠리아 왕 루지에로 2세는 이 기회를 틈타 코르푸를 기습 공략하고 이어서 테베와 코린트를 약탈했다. 하필이면 쿠만족이 다뉴브 강을 넘어 쳐들어오는 걸 막아야 했기도 했기에, 마누일 1세는 시칠리아군의 공격에 곧바로 대처할 수 없었다.
1149년, 마누일 1세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원에 힘입어 코르푸를 탈환했다. 그 후 시칠리아 왕국을 응징하고 이참에 남부 이탈리아를 탈환하기 위한 원정을 준비했다. 마침 1154년 2월 루지에로 2세가 사망하면서 시칠리아 왕국이 어수선해지자, 그는 원정을 단행할 호기라고 여기고 주변 국가들과 현지 주민 포섭에 나섰다. 우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게 선왕 콘라트 3세와 남부 이탈리아를 함께 협공하자는 협약을 맺었던 일을 상기시키며 지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남이탈리아 현지의 귀족 및 시민들과 접촉해 막대한 금을 뿌려 충성을 맹세받았고, 교황청에도 접근해 "야만스러운 노르만인보다는 로마인을 곁에 두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라며 협조를 잘해준다면 차후에 교황령을 지킬 병력 모집에 필요한 군자금을 지원하는 등 많은 선물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포섭에 공을 들인 그는 1155년 원정을 단행했다.
3. 경과
1155년, 마누일 1세는 마누일 팔레올로고스와 요안니스 두카스에게 서방 전선에서 차출한 군대를 맡겨 아풀리아에 상륙하도록 명령했다. 군대 운송은 베네치아 공화국이 맡았으며, 현지 주민들도 이질적인 문화를 가진 노르만족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고 싶었기에 호응했다. 원정군은 옛 총독부가 있었던 바리에 입성하고 노르만인들이 세웠던 주변 성채들을 모조리 허물었다. 뒤이어 트라니, 지오비나초, 안드리아, 타란토, 브린디시가 잇따라 동로마군에 넘어갔다. 시칠리아 왕 굴리에모 1세는 2,000명의 노르만 기사를 포함한 군대를 파견해 이들을 막게 했으나 격퇴되었다.그러나 상황은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다. 먼저 기대했던 신성 로마 제국의 지원이 좀처럼 오지 않았다. 사실 프리드리히 1세는 북이탈리아를 통제하는 데 사활을 걸고 있었는데, 또다른 제국이 남이탈리아에 진출한다면 북이탈리아를 통제하기 힘들어진다고 여기고 병력을 보내주지 않기로 했다. 게다가 원정군 총사령관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는 현지 귀족들에게 고압적으로 일관해 반감을 샀다. 이에 로리텔로 백작 로베르트 3세는 그를 경질하지 않는다면 협조하지 않겠다고 경고했고, 마누일 1세는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를 소환했다.
그러나 미하일 팔레올로고스가 고압적이기는 했지만 군략은 뛰어난 장군이었던 반면, 요안니스 두카스는 범용한 인물일 뿐이었다. 굴리에모 1세는 12,000명의 보병과 5천 기사대를 소집한 뒤 1156년 봄 풀리아의 동로마군과 반란군을 상대로 여러 전투에서 격파했다. 이후 시칠리아군이 육상과 해상에서 압박을 가하면서 급료 마련이 어려워졌다. 동로마 용병들은 급료 지급이 미뤄지자 "당장 금을 달라"고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이탈해버렸다. 이로 인해 동로마군의 전력이 크게 줄어들자, 현지 귀족과 시민들은 실망해 동로마군에 등을 돌렸다.
1158년, 황제는 알렉시오스 악수흐를 안코나로 보내 제국군을 지원하게 했다. 그러나 그의 가세에도 불구하고 전세는 바뀌지 않았고, 동로마군은 속절없이 밀린 끝에 브린디시에서 최종적으로 떠났다. 굴리에모 1세는 반란의 씨앗을 자르기 위해 반란군 잔당을 무자비하게 처형했다. 이리하여 동로마 제국 최후의 이탈리아 수복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다.
4. 이후
비록 동로마 제국의 침공을 물리치긴 했지만, 굴리에모 1세는 동로마 제국이 작심하고 대군을 동원해 또다시 쳐들어오면 승산이 희박하다고 판단하고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시칠리아는 아드리아 해 건너편 일리리아 해안을 공격하지 않으며 안코나가 제국의 영역으로 편입되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 대신 동로마 제국은 시칠리아 왕국의 주권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이 정도 성과는 원정에 들어간 엄청난 비용[1]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다.마누일 1세는 프리드리히 1세가 막대한 돈을 받아먹고 협조를 약속했으면서 정작 군대를 보내주지 않은 것에 반감을 품었고, 이탈리아를 제국령으로 편입하려는 그의 야심에 경각심을 가졌다. 이에 따라 프리드리히 1세에 대항하는 구엘프에 자금을 대폭 지원하고 일부 병력을 보내줬으며, 신성 로마 제국군에 의해 파괴된 밀라노 성벽 복구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그 결과, 구엘프는 1176년 5월 29일 레냐노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1세를 물리쳤고, 프리드리히 1세는 이탈리아 병합 시도를 단념했다.
[1]
니키타스 호니아티스에 따르면, 216만 전의 금화를 이 원정에서 소모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