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아 전쟁의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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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5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끄는 로마군이 브리타니아 섬에 두 번째로 상륙하면서 발발한 전쟁이다.
2. 상세
기원전 55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선전효과를 노리고 브리타니아 상륙을 감행했다.( 카이사르의 1차 브리타니아 원정) 비록 원정 결과는 신통치 않았지만, 로마 시민들은 미지의 세계인 브리타니아 섬에 로마군이 상륙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고, 원로원은 20일간의 감사 축제를 열기로 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제2차 원정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카이사르는 지난 원정의 성과가 보잘 것 없었던 건 군대를 너무 적게 데려갔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이번에는 5개 군단에 기병 2,000명을 이끌고 가기로 했다.기원전 54년, 카이사르는 800척에 달하는 대함대를 이끌고 포투스 리투스 항구에서 출발했다. 이 함대에는 병력 수송만이 아니라 상선들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출발 전에 티투스 라비에누스를 항구에 남겨서 브리타니아 섬의 교두보까지의 정기적인 식량 수송을 감독하게 했다. 이때 갈리아인 기병들도 데려갔는데, 하이두이 족장 디비키아쿠스의 동생이었던 둠노릭스도 여기에 끼여 있었다. 둠노릭스는 과거 카이사르에 맞서는 헬베티족을 돕기 위해 식량 운송을 의도적으로 지연시킨 적이 있었기에, 카이사르는 그를 경계하여 일부러 브리타니아로 데려가려고 했다. 둠노릭스는 기회를 틈타 도주했으나, 추격대에게 따라잡히자 "나는 자유를 위해 싸우다 죽겠다!"라고 외치며 저항하다가 사살되었다.
그렇게 제2차 원정을 개시한 카이사르는 작년에 봐뒀던 상륙 지점에 도착했다. 브리튼군은 처음엔 그를 막으려고 했지만, 로마군의 규모가 대단히 많은 걸 보고 후퇴하여 그들이 상륙하는 걸 허용했다. 카이사르는 상륙 후 내륙으로 19km 이동하여 스투로 강 인근에서 브리튼군과 조우해 격파했다.(스투로 강 전투) 브리튼군은 켄트주 빅버리 우드의 언덕 요새에서 재편성을 시도했지만, 다시 패배하고 흩어졌다. 카이사르는 하루 동안 휴식한 뒤 다음날 더 멀리 진군하려고 했다. 그런데 해변에서 배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겼던 퀸투스 아트리우스로부터 또다시 폭풍우가 닥치는 바람에 함선 40척이 파괴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카이사르는 즉시 군대를 돌려 해변으로 가서 함대 수리에 착수하면서, 함대 주위에 요새화된 진영을 건설했다. 그러면서 라비에누스에게 더 많은 함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한편, 브리튼인들은 카이사르의 침략을 막기 위해 연합군을 결성하기로 하고, 지휘관으로 카시벨라우누스를 선임했다. 카시벨라우누스는 로마인들이 상륙하기 이전 다른 브리튼 부족들과 전쟁을 벌여 언제나 승리했으며, 에식스를 지배하던 트리노반테스족의 왕 이마누에테우스(Imanuentius)를 전사시켰다고 한다. 이마누에테우스의 아들인 만두브라키우스(Mandubracius)는 갈리아로 도망쳐 카이사르에게 투항했다. 카시벨라우누스는 로마군과 정면 대결하는 건 자살 행위라 보고, 전차 부대를 활용해 진군하는 로마군의 주변을 맴돌며 화살을 퍼붓다가 로마 기병대가 쫓아오면 잽싸게 후퇴한 뒤, 다시 행군하는 로마군을 공격하고 빠지는 게릴라 전술을 구사했다. 또한 식량을 마련하기 위해 주변 지역으로 흩어진 로마군 병사들을 습격하여 사상자를 늘렸다.
하지만 로마군은 브리튼 연합군의 연이은 습격에 굴하지 않고 템스 강에 도달했다. 템스 강의 유일한 건널목엔 말뚝이 박혀서 바리케이드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로마군은 끝내 이를 돌파하며 강을 건넜고, 이를 저지하려고 했던 적군을 격파했다.(템스 강 전투) 이에 카시벨라우누스는 대부분의 병력을 해산하고 전차 부대만 남긴 뒤, 숲 속으로 진입한 로마군을 상대로 게릴라 전술을 계속 이어나갔다. 지리를 잘 몰랐던 로마군은 전혀 예상치 않은 곳에서 출몰해서 습격했다가 빠져나가는 브리튼 연합군에게 시달렸고, 이를 추격했던 로마 기병대 다수가 매복에 걸려 죽거나 사로잡혔다.
카시벨라우누스의 게릴라 전술로 인해 손실이 갈수록 커지자, 카이사르는 이대로 끌려가기만 하면 답이 없다고 판단한 후 카시벨라우누스의 본거지를 공격하기로 했다. 마침 케니마니족, 세곤티아키족, 안칼리트족, 비브로키족, 카시족 등 5개 부족이 카이사르에게 귀순하면서, 카시벨라우누스의 거점 위치를 알려줬다. 그들은 지난날 카시벨라우누스에게 연전연패했던 전적이 있었기에, 카이사르의 힘을 빌려 그에게 복수하고 싶어했다. 이에 카이사르는 그들이 가르쳐준 곳으로 진군해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고, 뒤이어 카시벨라우누스의 요새를 포위했다.
이에 카시벨라우누스는 싱테토릭스족, 카르빌리아족, 타시마구이족, 세고박스족 등 4개 부족에게 해안가에 있는 로마군 숙영지를 공격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은 이 요청에 따라 공격했지만, 그곳에 주둔하고 있었던 로마군에게 격퇴되었고, 지휘관 중 한 명인 루고토릭스가 생포되었다. 공격이 실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영토가 파괴되자, 카시벨라우누스는 결국 카이사르에게 협상을 요청했다. 카이사르는 인질과 조공을 로마 공화국에 바치고, 만두브라키우스가 트리노반테스족의 부족장으로 복귀하는 걸 허용하며, 다시는 트리노반테스족과 싸우지 않기로 맹세하는 조건을 내걸었고, 카시벨라우누스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 후 카이사르는 갈리아로 돌아가기로 하고 병력을 양분해 절반의 병력을 먼저 갈리아로 보낸 뒤 라비에누스의 수송선을 기다렸다. 그런데 수송선이 좀처럼 올 기미를 보이지 않자, 카이사르는 이러다가 겨울을 브리타니아 섬에서 보낼 수도 있겠다고 우려했다. 이에 이를 피하고자 남은 수송선에 병력을 구겨넣은 뒤 브리타니아 섬을 떠났다. 이때 함선 일부가 급류로 인해 모리니족의 영역으로 표류했는데, 모리니족이 이들을 공격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카이사르는 기병들을 이끌고 친히 이들을 구원했다.
그 후 라비에누스에게 전 군단을 줘서 모리니족을 토벌케 해 항복을 받아냈고, 퀸투스 티투리우스 사비누스와 루키우스 아우룬쿨레이우스 코타에게 14군단과 다른 군단에서 차출한 5개 대대를 이끌고 모리니족 북쪽에 살고 있었던 메나피족을 토벌하도록 했다. 그 뒤 전 부대를 벨가이인의 영토에 남기고 북이탈리아로 돌아가 행정 업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그해(기원전 54년) 겨울, 벨가이족의 영역에서 가장 북쪽에 사는 에브로네스족의 부족장 암비오릭스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카이사르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