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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 | |
제19회 올림픽 경기대회 Juegos de la XIX Olimpiada Juegos Olímpicos de Verano de 1968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 경기대회 Games of the XIX Olympiad ™ Mexico City 1968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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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기간 | 1968년 10월 12일 ~ 10월 27일 |
개최국 |
[[멕시코| ]][[틀:국기| ]][[틀:국기| ]] 멕시코 시티 |
참가국 | 112개국 |
참가선수 | 5,516명[1] |
경기종목 | 20개 종목, 172개 세부 종목 |
개회선언 |
구스타보 디아스 오르다스 멕시코 대통령 |
선수 선서 | 파블로 게이도 |
성화 점화 | 노르마 엔리케타 바실리오 데 소텔로 |
개·폐회식장 | 에스타디오 올림피코 우니베르시타리오 |
[clearfix]
1. 개요
|
Olympic Flame & Opening Ceremony |
멕시코 당국은 이 대회를 통해 1940년대부터 1960년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멕시코가 경제 성장과 사회안정을 통해 제3세계를 선도하는 나라가 되었다고 과시하려는 행사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촌향도와 빈부격차, 제도혁명당 정권의 권위주의 통치 같은 문제점으로 인해 올림픽에 대한 불만이 학생들 사이에서 적지 않았고, 개막식 전날에 틀라텔롤코 광장에서 반정부 시위를 벌이던 수백 명의 학생이 멕시코 경찰에게 숨진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 사건이 바로 멕시코 현대사의 분수령으로 불리는 틀라텔롤코 광장 학살사건이다.
그래서 멕시코 내에서는 한창 경제적으로 잘나갔을 때 치러진 올림픽이기는 하지만[2] 올림픽 전후에 일어났던 일이나 이후의 멕시코 현대사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생각해보면 차마 웃을 수 없는 올림픽으로 기억된다.
2. 유치 과정
<rowcolor=#fff> 국가 | 도시 | 1차 |
멕시코 | 멕시코 시티 | 30 |
미국 | 디트로이트 | 14 |
프랑스 | 리옹 | 12 |
아르헨티나 | 부에노스 아이레스 | 2 |
3. 특징
동독과 서독이 서로 갈라져서 출전한 최초의 하계 올림픽으로[3], 이후 동서독 통일이 되기 전까지는 분리해서 출전하게 된다. 그 이유는 그냥 따로 출전했기 때문이었다. 동독은 아예 서독을 외국 취급하기 시작했다.[4]성화 점화는 멕시코의 전 육상선수인 엔리케타 바실리오가 맡았다. 여성이 성화를 최종 점화한 것은 그녀가 최초다.
멕시코 시티가 해발 2,240m에 있다보니 각 종목 선수들마다 다른 불편함이 나오곤 하였었다. 중, 장거리 달리기 선수들은 산소가 희박하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욱 큰 인내력을 요구하여 기록이 늦어지는 등 트랙경기에서는 부진이 이어졌지만, 산소가 희박하기 때문에 공기저항도 적어져서 단거리 달리기나 높이뛰기나 멀리뛰기같은 필드경기들의 기록은 상당히 좋아졌다. 특히 멀리뛰기는 금메달을 차지한 미국의 밥 비먼이 세계기록을 55cm이나 경신하고, 2위와의 격차는 71cm로 벌려놓은 8.90m의 신기록으로 우승하게 된다. 이 기록은 23년이 지난 1991년 도쿄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미국의 마이크 포웰이 8.95m로 경신했다.[5] 100m 달리기도 10초 벽이 깨졌다.[6]
하지만 높이뛰기에서는 고도의 장점뿐 아니라 새로운 기술도 나왔는데, 딕 포스버리가 선보인 포스버리 플롭(배면뛰기)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뒤돌아서 점프하는 방식. 이 뒤로 이 기술은 높이뛰기에서 주로 사용되는 기술이 되었다.
또한 도핑 테스트가 시범적으로 시행된 올림픽으로, 스웨덴의 근대 5종 선수인 한스건너 리젠웰은 알코올이 검출되어 자격을 박탈당하기도 했는데 경기 전날 술을 과하게 마셨기 때문이다.
마라톤에서는 아베베 비킬라의 3연패를 예상했으나 그는 17km 즈음에서 기권했다. 사실 아베베는 이전에 무릎 부상을 당한 것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자 같은 에티오피아 선수인 마모 웰데를 도와주기 위해서 스스로 페이스 메이커 역할을 맡는다. 대회 전까지 자신은 이미 회복되었다며 블러핑을 친 다음 경기가 시작되자 초반부터 의도적으로 싸움을 붙은 것이다. 다른 선수들은 올림픽 2연패의 위업을 달성한 아베베가 초장부터 강하게 나오자 견제를 하느라 페이스가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고, 아베베의 의도를 알고 있던 마모 웰데는 차분하게 페이스를 조절하여 결국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다.[7]
에티오피아의 우승에 가려지긴 했지만 '아름다운 꼴찌' 이야기도 있다. 마라톤에서 맨 마지막에 들어온 선수는 탄자니아의 존 스티븐 아크와리(John Stephen Akhwari)라는 선수로 경주 도중 넘어져 무릎이 탈골되는 부상을 입었다. 의료진은 당장 병원으로 가서 치료해야 한다고 권고했지만, 붕대를 감는 응급처치만 한 채 끝까지 마라톤을 완주했다. 결승점인 주경기장에 도착하자 기자들은 왜 부상을 입고도 끝까지 달렸는지 질문했다. 그러자 그는 '탄자니아는 참가만 하라고 나를 이 곳에 보낸게 아니다. 탄자니아는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완주하라고 보냈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전 대회에서 정식종목이 되었던 유도는 이 대회에서 정식종목에서 제외되었으며, 테니스가 다시 시범종목으로 채택이 되었다.
전 IOC위원장인 자크 로게가 요트 종목 대표로 처음 대회에 출전한 대회이기도 하다.
개최국인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은 3, 4위전에 올라가서 일본과 경기를 벌이게 되었다. 모국 관중들의 일방적 응원 속에서 멕시코가 이기리라 전망했는데, 일본이 2-0으로 이기고 아시아 첫 올림픽 축구 메달을 수상했다. 당시 멕시코 반응은 월드컵 탈락 수준으로 매우 실망이었다고.[8]
3.1. 검은 장갑 사건
별별스포츠 #94 - 올림픽 영웅이 조국에서 평생 배신자로 낙인찍혔던 이유는? |
시상대에 올라선 스미스는 "우리는 흑인이다"를 뜻하는 검은색 장갑을 오른손에 끼고, 목에 "흑인의 자부심"을 뜻하는 검은 스카프를 둘렀으며, 왼손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올리브나무 묘목이 담긴 상자를 들고 있고, 3위인 카를로스 역시 왼손에 검은색 장갑을 끼었고[11], "흑인의 가난"을 상징하는 검은색 양말을 끼었으며, 은색 목걸이에 점퍼를 풀어해쳐서 미국 노동자들의 연대감을 표시하고 있다. 두 선수 모두 운동화를 벗어 그들 옆에 두었으며, 또한 2위를 한 호주 선수 피터 노먼(Peter George Norman)이 미국 선수들의 설명을 듣고는 즉석에서 흔쾌히 시위 참여를 결정, 세 메달리스트 모두가 왼쪽 가슴에 흰 동그란 배지를 달고 있는데 이것은 '인권을 위한 올림픽 위원회(Olympic Committee for Human Rights; OCHR)를 상징하는 배지였다.
이들의 행위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아직 인종 차별이 인류 보편의 해악이라는 인식이 확립되기 이전이라 국제올림픽위원회는 '올림픽 정신을 훼손하는 폭력적 행위'[12]라며 이들을 선수촌에서 추방했다. 당시 IOC 위원장이었던 미국인 에이버리 브런디지는 "일부 몰지각한 니그로들의 추태"라면서 격렬히 비난할 정도였으며 이들의 메달을 박탈하는 것까지 고려하였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두 선수는 시상식 직후 일부 관객들의 야유를 받았고, 귀국하는 길에 공항에서 토마토 세례를 받아야 했다. 이후에도 백인들의 암살 협박에 시달리면서 오랜 시간 동안 자의반 타의반에 의해 은둔 생활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시상식 당시의 모습과 금메달을 받은 스미스의 인터뷰를 담은 뉴스 영상 |
검은 장갑은 끼지 않았으나 뱃지를 달아 시위에 동참했던 피터 노먼 역시 큰 시련을 겪었다. 피터 노먼은 어릴 적부터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아버지와 함께 차별받는 유색 인종 극빈자들을 위해서 무료 급식을 실시하는 등 인권 운동에 적극적이었는데, 같이 시상대에 오르는 스미스와 카를로스의 계획을 우연히 알고 그에 감명받아 보트 경기에 출전했던 다른 미국인 흑인 선수에게서 OPHR 뱃지를 빌려 착용한 상태로 시상대에 올랐다. 그러나 당시 호주는 백호주의로 인한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과 배척이 매우 심각하던 시절이라, 호주 최초의 육상 메달을 획득했음에도[13] 피터 노먼은 선수 자격을 박탈당하고, 인격적으로도 이단자로 매도당하면서 살아갔다.
그러나 그는 이런 모욕적인 대우를 모두 감내했고, 스미스와 카를로스를 비난하면 복권시켜주겠다는 제의를 수차례나 받았으나 모두 거절했다.[14] 피터 노먼은 신념을 지킨 대가로 모두에게 잊힌 채 2006년 쓸쓸히 사망하였고, 스미스와 카를로스는 장례식에 참석해 노먼의 관을 운구하며 그를 기렸다. 이후 2008년, 그의 조카인 맷 노먼이 'SALUTE'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피터 노먼의 일화는 사람들에게 다시 회자되기 시작했고, 마침내 사건 발생 후 44년이나 지난 2012년 호주 의회가 피터 노먼의 퇴출에 대해 고인에게 사과하면서 그의 명예가 회복되었다. 하지만, 국제올림픽위원회의 사과는 현재까지 한마디도 없다.[15]
1972 뮌헨 올림픽에서도 육상 남자 400m 금메달리스트 빈센트 메튜스, 은메달리스트 웨인 콜렛도 비슷하게 흑인 차별에 대한 항거로 미국 국가를 경례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즉각 정치적 행위로 간주하고 IOC부터 영구 출전 금지를 내렸다. 이 때문에 4X400m에서도 출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2022년에 IOC에서 출전 금지를 해제했다. 웨인 콜렛은 2010년에 암으로 사망한 뒤였다.
4. 경기 종목
- 근대 5종
- 농구
- 레슬링 - 그레코로만형, 자유형
- 바스크 펠로타[시범][17]
- 배구
- 복싱
- 사격
- 사이클 - 도로, 트랙
- 수영 - 경영, 다이빙, 수구
- 승마 - 마장마술, 장애물, 종합마술
- 역도
- 요트
- 육상
- 조정
- 체조 - 기계체조
- 축구
- 카누 - 스프린트
- 테니스[시범]
- 펜싱
- 필드 하키
5. 대한민국 선수단
- 대한민국 참가 현황: 임원 21명, 선수 55명 참가[19]
- 농구: 곽현채, 김무현, 김영일, 김인건, 박한, 신동파, 유희형, 이병구, 이인표, 최종규, 하의건
- 레슬링: 김익종, 서용석, 서훈교, 신상식, 안천영, 오정용, 장경무, 최정혁
- 배구: 곽룡자, 김영자, 김외순, 문경숙, 박금숙, 서희숙, 안경자, 양진수, 이은옥, 이향심, 황규옥
- 복싱: 김사용, 김성은, 박귀일, 서상영, 이창길, 장규철, 지용주
- 사격: 김용배, 안재송
- 사이클: 권중현, 김광선
- 수영: 남상남, 박정자, 송재웅
- 역도: 양무신, 원신희, 윤석원, 이종섭, 이춘식, 황호동
- 육상: 김봉래, 백옥자, 이명정, 이상훈
- 체조: 김충태
- 대한민국 참가 성적: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 획득. 종합순위 36위.
- 은메달: 복싱(라이트플라이급) 지용주
- 동메달: 복싱(밴텀급) 장규철
6. 주요국 메달 집계
<rowcolor=#ffffff> 순위 | 국기 | 국가 | 금 | 은 | 동 | 메달 합계 |
1 | 미국 | 45 | 28 | 34 | 107 | |
2 | 소련 | 29 | 32 | 30 | 91 | |
3 | 일본 | 11 | 7 | 7 | 25 | |
4 | 헝가리 | 10 | 10 | 12 | 32 | |
5 | 동독 | 9 | 9 | 7 | 25 | |
6 | 프랑스 | 7 | 3 | 5 | 15 | |
7 | 체코슬로바키아 | 7 | 2 | 4 | 13 | |
8 | 서독 | 5 | 11 | 10 | 26 | |
9 | 호주 | 5 | 7 | 5 | 17 | |
10 | 영국 | 5 | 5 | 3 | 13 | |
36 | 대한민국 | 0 | 1 | 1 | 2 |
[1]
남자: 4,735명 / 여자: 781명
[2]
당시의 멕시코는 현재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비록 정치적으로
제도혁명당이 정권을 독점하는 나라이기는 했어도 경제적으로
수입대체산업화 정책을 바탕으로 매년 7%대의 고도경제성장을 누리던 국가였고, 그래서 멕시코의 기적이라는 찬사까지 들으며
개발도상국의 모범쯤 되는 나라로 손꼽혔다.
[3]
단,
국기와
국가는
단일팀 깃발과
환희의 송가를 그대로 사용했으며, 다음 대회부터 각자의 국기와 국가를 사용했다.
[4]
사실 단일팀 시절에도 말만 단일팀이지 실제로는 동-서독 선수와 임원들이 완전 따로 놀았다. 눈가리고 아웅할 바에는 그냥 따로 나가자는 주장이 득세한 이유다. 근본적인 이유는
국제올림픽위원회가 이때까지 동독올림픽위원회를 승인해 주지 않았다는 것. 서독의 독일올림픽위원회에 껴서 출전을 시켰기 때문이다. 동독은 올림픽 참가를 포기하든지 서독에 붙어서 나가든지 양자택일을 하다가 이제서야 승인을 받아서 단독 참가가 가능해진 것이다. 단, 각종 종목 협회에서는 동독을 전부터 인정했기 때문에 세계선수권 등에서 동, 서독이 별개로 참가를 한 경우도 있었다.
축구는 지금의
영국처럼
FIFA는 별개 가입했으며 올림픽만 단일팀을 구성했다. 하지만 말만 단일팀이지 실제로는 동서독 팀이 대결하여 이기는 팀이 독일 대표가 되는 방식이었다.
[5]
이 기록은 30년 넘게 깨지지 않고 있다.
[6]
9초 95. 단, 당시 공식 기록은 소수점 이하 한 자리만 나타냈기에 9초 9다.
[7]
불행하게도 아베베는 이듬해에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되면서 더 이상 마라톤에서 뛸 수 없게 되었고, 이후 장애인 대회에 출전하며 선수생활을 지속하던 중 다시 교통사고를 당해
1973년에 유명을 달리했다.
[8]
그리고 44년이 지나
2012 런던 올림픽 남자축구 4강전에서 다시 재회한 멕시코는 3:1로 일본에게 역전승을 거두면서 설욕하며 결승에 올라가서
브라질까지 제치고 사상 첫 축구 금메달까지 받았다. 53년 뒤인
2020 도쿄 올림픽 3, 4위전에서 양국은 다시 만났고, 개최국 일본이 멕시코에 패했다. 재미있게도
2012년처럼 3:1로 이겼다는 점이며 53년전처럼 2골차로 이긴 것도 같다.
[9]
같은 해 6월에는 대선 후보로 유력했던
존 F. 케네디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도 암살되었는데, 그 또한 인권을 중시했던 사람이었다.
[10]
훗날 존 카를로스는 당시 자신들의 행동이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과
남승룡이
일장기를 달고 시상대에 섰던 모습을 담은 기록영상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회고했다.
# 공교롭게도 두 장면 모두 당사자가 자신들의 정체성(손기정과 남승룡은
일본 제국의
식민통치 아래에 있던
한국인, 스미스와 카를로스는
미국 내의 인종차별로 박해받던
흑인)을 부정받았던 이들이었으며 금메달, 동메달을 각각 수상했다.
[11]
원래 둘 다 검정 장갑을 끼고 오기로 계획했으나 카를로스가 깜빡 잊고 장갑을 가져오지 않아서 곤란한 상황에 처했는데 은메달을 딴 피터 노먼이 '그럼 나눠 껴라' 라고 조언해 줬다고 한다.
[12]
당시에는 이런 식으로 극도로 부정적인 문장으로 표현했는데, 사실 이 규정은 21세기에도 표현만 바꿔서 어느 정도 비슷한 맥락에서 잔존해있다. '스포츠의 정치적 중립 위배'가 바로 그것.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박종우의 '독도는 우리땅' 세리머니가 문제시된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스미스와 카를로스의 시위가 21세기에 일어났다면 국가적/사회적으로는 문제시할 이유가 없고 다수에게 지지받았겠으나, 올림픽이라는 무대에 한해서는 여전히 문제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3]
보통 스포츠에서 특정 국가에 기념비적 수상, 기록을 달성한 선수는 국민적 영웅으로 불리고, 해당 선수의 사상이나 발언 등이 국민 여론에 적잖게 영향을 주는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러나 호주는 그러한 스포츠 영웅의 사상이 여론의 비난 세례에 시달리고 국민적인 모욕으로 치부되었으니, 인종 차별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알 수 있다.
[14]
존 카를로스는 본인과 토미 스미스는 차라리 본인들은 인종 갈등 자체가 당대의 뜨거운 이슈였던 만큼 미국에 돌아와서 옹호해주는 사람들과 자기편이라도 있었지만 남의 나라 사회 문제에 양심적으로 한마디 한 노먼은 호주로 귀국 이후 자기편 한 명도 없이 오히려 더 외롭고 힘든 세월을 보냈다는 뉘앙스로 인터뷰한 바가 있다.
[15]
이 이야기를 다룬 별별스포츠의 두 진행자 역시 영상 말미에 이 점을 지적했고, 에이버리 브런디지의 미국 올림픽위원회 위원장 재임 당시
1936 베를린 올림픽의 나치즘에 대해 입을 꾹 다문 내로남불적 행보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시범]
시범 경기 종목
[17]
라크로스와
스쿼시가 반반 섞인 종목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시범]
[19]
출처 국제스포츠정보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