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2:56:38

박한

파일:박한 감독.jpg
이름 박한 (朴韓)
출생 1946년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1948~
학력 인창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 / 학사)
포지션 센터
소속 구단 한국산업은행 농구단 (1969~1975)
지도자 고려대학교 농구부 감독 (1975~1997)
행정 고려대학교 체육위원회 부위원장 (1997~2002)
대한농구협회 전무 및 부회장 (2002~2004)
대한농구협회 회장 (2004.10)
한국대학농구연맹 회장 (2004~2009)
한국대학농구연맹 명예회장 (2009~)
대한농구협회 수석 부회장 (2013~)

1. 개요2. 선수 시절3. 감독 시절4. 전설의 에피소드5. 여담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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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농구인. 現 대한농구협회 수석부회장 겸 한국대학농구연맹 명예회장.

2. 선수 시절

1946년에 태어나 인창고등학교 고려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했는데, 인창고 때는 유재진 감독, 고려대 때는 주기선 감독 밑에서 각각 농구 수업을 받았다. 1969년 한국산업은행 농구단에 입단하여 이인표[1]와 신현수[2], 윤정근 등과 함께 뛰었다. 국내 남자농구 사상 센터로서는 처음으로 190㎝의 벽을 넘은 선수였다. 고려대학교 동기로 정광석과 함께 활약했다. 국가대표 주전 센터로 1969년 아시아농구선수권 대회(ABC)에서 처음으로 우승하고 이어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을 따 내며 농구의 인기를 수직상승하게 만들었다.

3. 감독 시절

1975년 산은에서 은퇴한 후 김원기 총재의 권유를 받아들여 모교 감독으로 돌아온 이래 1997년까지 무려 22년간 고려대학교 농구부를 이끌었으며, 이 덕에 카메라도 많이 탄 감독이다. 1977~1979년까지 황유하와 임정명, 진효준, 이충희 등을 이끌고 당대 신기록인 49연승을 달성했고, 1980년대 들어 중앙대와 연세대 돌풍에 밀리다가 1994년부터 전희철, 김병철, 양희승, 신기성, 현주엽 등을 이끌고 1996년까지 제2의 전성기를 열었다.

전설의 슈터 출신이었던 이충희 김진, 그리고 가드였던 최철권과 포워드에 진효준, 임정명 등에 이어 90년대 농구대잔치의 주역이었던 이민형 전희철, 현주엽, 김병철, 양희승, 신기성, 박재헌, 주희정 등 1980년대부터 이어진 수많은 고려대 농구부 출신의 선수들이 다 그의 손을 거쳐갔다. 박제영 교수(전 수원대학교 여자농구부 감독)도 그의 제자였다.

그러나 특유의 무작전 농구로 전설같은 에피소드들을 남겼다. 대학 시절 전희철이 친구들과 가진 술자리에서 '제대로 된 작전 구사하며 경기하고 싶어!!'[3] 라고 울부짖었다는 카더라도 존재한다나. 경희대학교를 이끌었던 최부영 前 감독[4]이 사석에서 "내가 고대 감독이면, 저 선수들 반으로 갈라서 A팀과 B팀으로 만들어서 두 팀을 결승전에서 붙일 수 있겠다"라고 디스했다는 카더라도 있다.

여담으로 안준호 서울 삼성 썬더스 감독의 작전타임도 박한의 작전타임과 유사하다고 평가받는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박한 감독의 무작전 방임 농구가 당시 고려대학교 선수들의 다재다능함을 빛나게 했다는 의견도 있다. 분업 부품 농구를 지향한 당시 연세대학교 최희암 감독과 대비되는 부분. 최희암 감독의 분업 농구로 올라운드 플레이어의 재능을 가졌던 연세대 선수들이 단순히 패스기계, 슛기계로 전락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문경은, 우지원 항목 참조.

특히 박한 감독의 후임으로 임명된 임정명과 정광석, 진효준, 이충희 감독 등은 강압적인 훈련, 선수진 융화 실패, 포워드 중복투자, 선수들의 이탈, 스카우트 비리 등으로 고려대 내부에서도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5] 고려대학교 농구가 개판 일보 직전, 아니 개판까지 가면서 박한 감독의 지도력은 다시 평가받았다.[6] ( 네이버 농구전문 블로거 뚱이의 견해)

경기 중의 모습과는 별개로 무식할 정도로 체력 훈련을 시킨 감독이기도 하다. 무슨 근성 스포츠물의 훈련이 무색할 정도였다고 하니. 그러나 구타가 만연했던 그 시절, 선수들에게 기합은 줄지언정 구타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임정명 코치가 출동하면 어떨까.

또 한편 농구계의 술꾼들 중에서도 초특급 수준의 주당. 술로 선동열에게 그나마 어느 정도는 버티기라도 했던 허재는 아예 상대도 안 되었다거나, 어느 해 합숙훈련 도중 농구부 선수들이 술을 마시고 싶다고 조르자 박한은 아예 부원 스무명과 20대 1로 술대결을 했는데 선수들이 전부 뻗어 버렸다거나 하는 일화도 있다... 사례1, 사례2

아직 미혼이다. 훤칠한 키에 미남형의 외모임을 고려한다면 상당히 미스테리하지만, 그를 아는 이들은 박한은 농구와 결혼했다.'고 한다. 대학 시절 첫사랑을 못 잊어서라는 카더라도 있다.

고려대 감독 사임 이후 숱한 프로팀에서 감독제의가 들어왔지만, 끝까지 '고대맨'을 고집하며 코트를 완전히 떠났던 로맨티스트.

아래 에피소드만 보면 그냥 단순히 사람 좋은 무능한(...) 지도자로 보이지만, 현역시절 국가대표 센터 출신답게 체력을 강조하며 고려대 특유의 '남자들이 좋아하는 힘있는 농구'를 이끌어낸 명장으로 평가받는 지도자임에는 틀림없다. 실제 선수 지도는 코치들한테 맡기고 본인은 중고교 감독들과 술푸러 다니면서 재능있는 선수들 스카웃만 신경썼다는 카더라도 있긴 하다. 어찌하든 49연승은 아무나 하는거 아니다. 한데 고려대 49연승의 경우 연승을 했다는 말은 많은데 그 당시의 기록이 정확하지 않고 주먹구구라 의심을 좀 받기도 한다. 하기야 그 당시엔 허재의 기록조차도 제대로 정리되어있지 않았으니.(이 점은 한국프로농구 출범 이후로 꽤 나아졌다.) 그렇지만 49연승까진 아니라 해도 대학 팀이 성인들만 모인 실업팀들과도 경기를 펼쳤는데 경이적인 승리를 이어갔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부분.

4. 전설의 에피소드

본 에피소드는 일부 사실도 있지만 상당수는 매우 과장되어 있다.

에피소드 1. 종료는 얼마 남지 않고, 고려대가 한 골차로 뒤지고 있는 긴박한 순간…고대의 마지막 공격찬스. 이번의 슛 하나로 경기가 역전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박한 : (선수들을 불러놓고) 야…야…잘 들어…이번이 마지막 공격이야…이번에 슛을 성공시키면 우리가 이기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우린 지는 거야… 희철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어?
전희철 : (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닦으며)예…
박한 : 그래… 그럼 이만 가봐…

에피소드 2.
박한 :(타임아웃 때 약간 성질을 내며) 야…야… 지금 너희 안 되고 있는 게 딱 2가지가 있어… 뭔지 알어? 지금 너넨 디펜스랑 오펜스가 안 돼!! 자자…힘내구 그 2가지만 제대로 해봐 응? 농구에서 디펜스 오펜스 빼면 뭐가 있수? 드리블, 탕탕이

에피소드 3.
박한 : (선수들 불러 놓고) 이봐… 왜들 그래? 왜 우지원 3점슛을 쏘게 놔두는 거야? 지금 누가 우지원이 막고 있어? 아까부터 계속 들어가잖아… 우지원이를 막아야지… 누구야? 누가 우지원이 마크야?
양희승 : 감독님 지금 우리 지역방어인데요…

이 에피소드는 1995-1996년 농구대잔치 당시 고려대 vs 연세대 경기에서 나온 일. 당시 고려대는 신기성, 김병철, 양희승, 현주엽, 전희철이라는 사기적인 라인업을 가지고 있었으나, 저 에피소드가 나온 경기에선 서장훈도 없고 문경은, 이상민도 없어서 만만하게만 생각한 연세대에게 발목 부상 달고도 원맨쇼를 펼친 우지원으로 인해 패배 직전까지 몰리는 꼴을 겪었다. 결국 이기긴 했지만...

에피소드 4. 고려대 한양대의 경기, 추승균이 크레이지 모드로 펄펄 날아 전력이 상당히 우세하던 고대가 3점차로 끌려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마지막 공격 때 전희철이 부저와 함께 3점슛을 쏘았으나 상대팀 파울로 공은 안 들어갔지만 자유투 3개를 얻은 상태에서 박한 감독이 타임을 불렀다.
박한 : 희철아 잘 들어라…
전희철 : 넵…
박한 : 희철아, 3개 다 넣어라. 알았지?
(이 부분은 과장으로 실제로는 위의 말처럼 이렇게 말하진 않고, 박한: "희철아 마음 편하게 해 ", 그리고 나서 박한 감독은 가슴을 졸이며 자유투 3개를 모두 지켜보았었던..)

이것도 1995-1996년 농구대잔치 당시의 에피소드. 경기 종료 1초를 남기고 얻은 자유투 전희철감독님 지시대로 정말로 3개 다 넣으며 동점으로 연장전까지 가서 고대가 간신히 이겼다.

에피소드 5. 이것은 전설로만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아마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던 일일 거다. 항상 말로만 작전지시를 하던 박한 감독, 다급했던지 작전시트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타임아웃을 부른 박한 감독 선수들을 불러 모아 놓구는 작전 시트에다가 크게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리고 나서는 그 옆에 타원의 동그라미를 그렸다.
박한 : 자자… 잘 보라구… (큰 동그라미를 가리키며)자 이게 뽈이야…오케이? (타원의 동그라미를 가리키며)자…이건 링이라구… (큰 동그라미에서 화살표를 죽으러 링 안으로 그리며) 넣어…알았어?

당시 선수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말로는 그 뽈이라 불리는 큰 동그라미는 링보다 훨씬 컸다고 한다.

에피소드 6. 작전타임때 선수들의 위치를 설명해주는 감독.
박한 : (동그라미를 그려주며) 희철아, 넌 여기…(역시 동그라미를 그려주며) 주엽이는 여기… 병철이는 여기…

그 때 부저가 울린다. 양희승 신기성의 위치는 설명도 못한 감독. 급하게 둘을 불러서
박한 : 야. 은 어딘지 알지?

에피소드 7. 고대 vs 연대. 작전타임.
박한 : ( 김병철에게) 우지원이가 공 잡으면 니가 파울로 끊으란 말야. 알았지?
병철 : 저 파울 4개인데요…

에피소드 8. 옛날 고대가 49연승을 할 때,(이충희가 있던 전성시절) 작전 타임 부른 다음 하는 말이 딱 하나.
박한 : '야! 충희한테 패스 해.'

에피소드 9. 이충희가 절정의 슛 감각을 뽐내던 시절.
(전반 작전타임) 박한 : 충희한테 패스해!
(하프타임) 박한 : 충희한테 패스하라니까!
(후반 작전타임) 박한 : …충희야, 어떻게 하면 좋겠냐?

에피소드 10. 공격이 안 풀리자,
박한 : 야! 주엽이한테 줘!

(현주엽이 공을 받자)
박한 : 그렇지! 주엽아! 쏴!

(그러나 노골)
박한 : 주엽아, 이제 어떡하냐…

에피소드 11. 감독이 손가락을 두 개 펼쳐 보이면 전희철이 인상을 쓰며 2점을 넣고 손가락을 세 개 펼쳐 보이면 김병철이 3점을 넣었다고 한다.

에피소드 12. 에피소드 11과 관련되어서 최희암 감독이 고대를 이기는 방법. 항상 연대와 고대의 경기에는 시소게임이 많다가, 보통 종료 10여초를 남기고 고대가 1점에서 2점을 뒤지고 있는 상황이 연출된다. 하지만 승리는 언제나 연대. 그 이유는 최희암 감독이 몰래 박한 감독의 싸인을 훔쳐보았기 때문이라는데…

2점차… 박한 감독이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인다. 이 때 최희암 감독이 외친다.
"야! 희철이야. 희철이 막아!"

연세대 승리.

3점차… 박한 감독이 손가락 세 개를 펼쳐보인다
"야! 병철이 3점이야"
연세대 승리.

에피소드 13. 위의 에피소드들이 전부 까는 내용이었다면 이번 것은 박한의 심성을 알게 해 주는 훈훈한 내용.

22세 이하 농구 대표팀 감독시절 범태평양 대회에서 우승 직후, 우승 상금으로 회식을 하자던 다른 코치들에게 근엄하게 한마디 하기를,

"상금 얼마 되지도 않는데, 이건 고생한 선수들 나눠주지. 술은 내가 사고."

5. 여담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 즉 미혼이고 노총각이다.

6. 관련 문서



[1] 선수 은퇴 후 초대 삼성 남자농구단 감독 및 삼성전자 농구부장을 역임함. [2] 선수 은퇴 후 상업은행 여자농구단 감독을 역임함. [3] 그렇지만 선수 시절이 아닌 감독 시절에야 이뤘다. [4] 고교농구 지도자들이 제자들에게 추천하는 감독이라고 한다. 다만 경희대 라인업이 워낙에 얇아서 2000년대 이전까지 이렇다할 성과가 적다. [5] 위와 같은 상황이 터진 건 감독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며, 비리 등으로 가득 찬 혼탁한 대학스포츠 문화와 학교 측의 무능한 대응 및 책임 전가, 회전문 인사, 학부모들의 과도한 간섭 등 시스템적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6] 다만 90년대 그 당시에는 농구 경기장을 찾은 고려대생들에게 박한 감독에 대한 평가가 박했다가 현 시점에서야 재평가를 받은 사실이라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하다. 그 때까지만 해도 박한 감독 후임부터 헬게이트가 열릴 줄 누가 알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