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모폰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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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모폰 명예의 전당은 예술적 탁월함, 혁신, 혹은 상상력을 통해 클래식 음악 녹음에 기여한 예술가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 ★는 첫 발표(2012년)때 헌액된 인물들이다. ☆는 두번째 발표(2013년)때 헌액된 인물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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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게오르그 솔티 | 클라우디오 아바도 | 존 바비롤리 | 다니엘 바렌보임 | 토머스 비첨 | 레너드 번스타인 | 피에르 불레즈 | 존 엘리엇 가디너 |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 카를로스 클라이버 | 오토 클렘페러 | 사이먼 래틀 | |||||||
☆ | 카를 뵘 | 에이드리언 볼트 | 세르주 첼리비다케 | 콜린 데이비스 |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 마리스 얀손스 | 라파엘 쿠벨릭 | 제임스 리바인 | 찰스 매케러스 | 주빈 메타 | 조지 셀 | 브루노 발터 | 구스타보 두다멜 | ||||||||
벤저민 브리튼 | 리카르도 샤이 | 크리스토퍼 호그우드 | 네빌 마리너 | 예브게니 므라빈스키 | 유진 오르만디 | 안토니오 파파노 | 트레버 피노크 | 프리츠 라이너 |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 | 마이클 틸슨 토머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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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치아노 파바로티 | 플라시도 도밍고 | 마리아 칼라스 | 유시 비욜링 | 자네트 베이커 | 안젤라 게오르기우 | 체칠리아 바르톨리 | 엔리코 카루소 |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 비르기트 닐손 |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 | 조안 서덜랜드 | 조이스 디도나토 | ||||||
☆ | 몽세라 카바예 | 르네 플레밍 | 토머스 햄프슨 | 안나 네트렙코 | 레온타인 프라이스 | 브린 터펠 | 프리츠 분더리히 | ||||||||
토머스 앨렌 | 빅토리아 데 로스 앙헬레스 | 호세 카레라스 | 표도르 샬리아핀 | 캐슬린 페리어 | 시르스텐 플라그스타 | 니콜라이 갸로프 | 티토 고비 | 마릴린 혼 | 한스 호터 | 드미트리 흐보로스톱스키 | 군둘라 야노비츠 | 요나스 카우프만 | 사이먼 킨리사이드 | 엠마 커크비 | 제시 노먼 | 안네 소피 폰 오터 | 레나타 테발디 | 키리 테 카나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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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렌 굴드 | 마르타 아르헤리치 | 클라우디오 아라우 | 알프레드 브렌델 |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 머리 페라이어 | 마우리치오 폴리니 |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 |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 다니엘 바렌보임 | ||||||
☆ |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 에밀 길렐스 | 빌헬름 켐프 |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 |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 그리고리 소콜로프 | 레이프 오베 안스네스 | ||||||||
프리드리히 굴다 | 마르크 앙드레 아믈랭 | 안젤라 휴이트 | 스테판 허프 | 예브게니 키신 | 구스타프 레온하르트 | 디누 리파티 | 라두 루푸 | 안드라스 쉬프 | 아르투르 슈나벨 | 우치다 미츠코 | 랑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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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블로 카잘스 | 자클린 뒤 프레 | 야샤 하이페츠 | 예후디 메뉴인 |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 이작 펄만 |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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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브레인 | 정경화 | 아르튀르 그뤼미오 | 프리츠 크라이슬러 | 기돈 크레머 | 나탄 밀스타인 | 존 윌리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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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예후디 메뉴인(Yehudi Menuhin)[1] (1916년 4월 22일 ~ 1999년 3월 12일)은 미국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겸 지휘자이다.2. 생애
뉴욕에서 유대인 랍비 가문에서 태어나 4세 때였던 1920년부터 샌프란시스코에서 루이스 퍼싱어에게서 교육을 받고, 7세 때였던 1923년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으로 데뷔하였다. 이후 1925년 파리에서 제오르제 에네스쿠, 스위스에서 아돌프 부슈에게 배운 후, 파리에서 라무르 관현악단과 함께 연주하였다. 귀국 후 12세였던 1928년에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독주자로서 베토벤의 협주곡을 연주하여 천재 소년으로 명성을 얻고, 세계 각국을 순회 공연하면서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10대 부터 에드워드 엘가나 브루노 발터 같은 거장과 협연했는데 1930년대에 들어 오이스트라흐나 야샤 하이페츠 등이 부각되었다. 하지만 메뉴인은 기교적인 부분보다 깊은 감성과 몰입감 있는 해석으로 자신만의 차별화된 색채와 음악성을 구축해 나가며 명성을 얻었다.
랍비 가문 출신의 정통 유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어려움에 처한 독일로 가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였다. 당시 소련 군정이 베를린 필의 공연을 방해하기도 했지만, 미국 출신의 유대인이 그가 나서 해결하기도 했다. 베를린에서 그는 베를린 필의 임시 지휘자였던 세르주 첼리비다케, 그리고 1947년 복귀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여러 공연을 하였으며 음반을 남겼다.
1950년 시가코 심포니가 푸르트벵글러를 영입하려 하자 미국의 유대인 음악가들이 대대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하지만 그는 푸르트벵글러는 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단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면서 그를 옹호했다. 또다른 유대인 거장인 브루노 발터 역시 개인적으로 푸르트벵글러와 관계가 좋지 않았지만, 푸르트벵글러를 반대하는 것은 미국 유대인 음악가들이 자기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벌리는 치졸한 짓이라고 비판했다.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한 후 그는 영국과 스위스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59년에 지휘자로 데뷔했다. 오이스트라흐 부자[2]와 협연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오이스트라흐가 지휘하는 협주곡에 바이올린주자로 섰다가 역으로 오이스트라흐 부자의 연주의 지휘를 맡아주기도 했다.
70년대에 들어서서는 지휘자로 주로 활동했다. 자선사업을 하며 뛰어난 인재들을 발굴해냈고 그들을 데리고 병원이나 복지센터등을 찾아가 무료로 공연을 했다고 한다.
그는 어릴때 바흐의 샤콘느를 성당에서 연주하면 세상의 악이 다 사라질거라 믿었다는데 거기에서 기인했는지 평생 헌신하는 삶을 살다가 떠났다. 그의 비전은 정의실현에 있었다고 하니 말 다한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