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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거점으로 하는 오케스트라.2. 연혁
1900년에 지휘자 페르디난트 뢰베가 빈 연주협회(Wiener Concertverein) 산하의 악단으로 창단한 것이 악단의 시작이다. 1913년부터 빈 콘체르트하우스를 상주 공연장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 1919년 빈 톤퀸스틀러 관현악단과 합병되었다. 1925년 뢰베 사후 4년간 지휘자가 공석이었다가 1929년 후고 고테스만이 상임지휘자에 취임했다. 코테스만은 악단의 콘서트마스터로 있으면서 지휘까지 겸하였는데, 혼란스러웠던 전간기 시절에 리더십을 가지고 사정이 어려웠던 악단을 이끌어나가는데 공헌했다. 악단은 그동안 여러 차례 명칭을 바꾸었는데, 1933년에 현재과 같은 명칭으로 완전히 고정했다. 동시에 빈 시청으로부터 보조금을 지원받기 시작해 시립 관현악단의 위치도 갖게 되었다. 1934년에는 오스발트 카바스타가 후임으로 상임지휘자에 취임했다. 카바스타의 인솔하에 악단 역사상 최초로 영국으로 연주여행을 떠나기도 했다.1938년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에 합병된 후 나치 총독은 악단을 각종 관제 행사나 군수공장 위문 공연에 악단을 동원하기도 했으며, 전쟁 기간 동안 상임 지휘자였던 한스 바이스바흐도 나치 당원으로서 악단 활동에 정치색을 입혔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황이 악화되면서 악단도 폭격 등의 위험에 노출되었고, 결국 1944년 9월 괴벨스의 국가 총동원령에 따라 강제 해단되고 말았다. 단원들은 독일군에 징집되거나 군수공장에서 강제 노동을 해야 했다.
전쟁이 끝난 후 1945년 9월 16일 요제프 크립스의 지휘로 연주회를 재개했다. 1945년에는 한스 스바로프스키가 수석 지휘자로 부임했으며, 1946년 여름부터 오스트리아 서부의 브레겐츠에서 열리는 여름 음악제인 브레겐츠 음악제의 상주 관현악단이 되었다.
1947년 스바로프스키가 물러난 후 빈 악우협회 음악 감독이었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악단을 정기적으로 지휘하기 시작했다. 카라얀은 정식으로 상임지휘자에 취임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상임지휘자와 같은 역할과 권한을 행사했다. 빈 심포니 신규 단원을 뽑을 때도 카라얀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니[1] 상임지휘자에 해당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다만 빈 심포니는 유럽에서 결코 일류라고 할 수 없는 수준의 오케스트라였고, 장래에 베를린 필과 빈 필(빈 국립가극장)의 지휘자가 목표였던 카라얀이 빈 심포니의 상임지휘자라는 직책에 정식으로 취임하는 것을 꺼렸던 것으로 보인다.
카라얀은 그의 이름을 딴 음악회 시리즈인 '카라얀 치클루스'로 큰 인기를 거두었다. 또 카라얀은 악단 최초로 해외순회 공연을 갖는 등 악단의 명성을 세계화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카라얀이 1955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에 취임하면서 빈 심포니와는 멀어지기 시작했다.
1950년대 당시 악단은 빈 시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는 대신 프로그램 선정 등에 있어서 자치권을 가지지 못했다. 1960년 악단 이사회는 공식적인 상임 지휘자 제도를 부활시키고, 볼프강 자발리슈가 상임 지휘자로 초빙되었다. 자발리슈는 1970년까지 악단을 이끌면서 미국과 일본 등지에서 순회 공연을 했고, 필립스에 정기적으로 녹음을 취입하는 등 악단의 명성과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자발리슈 퇴임 후 3년간 상임지휘자 자리는 공석이었으나, 요제프 크립스가 예술 고문 자격으로 1973년까지 재임했다. 1973년 이탈리아 지휘자인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가 상임 지휘자로 1976년까지 재임했다.
줄리니 사임 후에는 약 네 시즌 정도 객원 지휘에 의존했고, 1980년에 소련 지휘자인 겐나디 로제스트벤스키가 상임 지휘자로 취임했다. 하지만 로제스트벤스키도 1982년까지 단기간 재임에 그쳤고, 이후 고국으로 돌아갔다. 악단 측은 역시 네 시즌 가량 객원 지휘에 의존하다가 1986년 프랑스 지휘자인 조르주 프레트르를 수석 객원 지휘자 자격으로 초빙했다.
프레트르의 후임으로는 스페인 출신 지휘자인 라파엘 프뤼베크 데 부르고스와 러시아 지휘자인 블라디미르 페도세예프가 차례로 상임 지휘자를 맡았고, 2005년부터는 2013년까지 이탈리아 출신의 파비오 루이시가 상임 지휘자로 재직했다. 2014년부터 스위스 출신의 필리프 조르당이 취임하여 2020년까지 역임한 후 빈 국립 오페라 음악감독으로 자리를 옮겼고, 2021년부터는 콜롬비아 출신의 안드레스 오로즈코-에스트라다가 수석지휘자직을 수행하고 있다.
2012년 5월에는 공석이었던 플루트 수석 주자를 뽑는 오디션에서 신시내티 교향악단 부수석 주자였던 플루티스트인 최나경(미국 이름은 재스민 최)이 합격해 화제가 되었고, 2012-13년 시즌이 시작된 8월부터 활동했다. 하지만 불과 1년 여 만인 2013년 여름 수습기간이 끝난 후 재신임 투표에서 찬성 47표, 반대 66표로 재계약에 실패했다. 악단 측에서는 자신들과의 음악적 부조화가 원인이 되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최나경 측에서는 외국인, 동양인, 여성, 수석 지위, 미국에서 공부한 것, 유럽에서 산 적이 없는 것, 빈에서 공부하지 않은 것 등에 대한 차별의 뉘앙스를 띈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어서 논란을 야기했다. 정확히는 영국의 음악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리면서 ‘인종 차별’ 논란을 촉발하고, 자신의 이야기가 블로그에서 논쟁화하는 것을 지켜보며 최나경 스스로 입장을 밝히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3. 역대 상임 지휘자
- 페르디난트 뢰베 (Ferdinand Löwe, 재임 기간 1900-1925)
- 후고 고테스만 (Hugo Gottesmann, 재임기간 1929-1933)
- 오스발트 카바스타 (Oswald Kabasta, 재임 기간 1934-1938)
- 한스 바이스바흐 (Hans Weisbach, 재임 기간 1939-1944)
- 한스 스바로프스키 (Hans Swarowsky, 재임 기간 1945-1947)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Herbert von Karajan, 재임 기간 1948-1964. 빈 악우협회 공연 감독)
- 볼프강 자발리슈 (Wolfgang Sawallisch, 재임 기간 1960-1970. 퇴임 후 명예 지휘자 호칭 수여)
- 요제프 크립스 (Josef Krips, 재임 기간 1970-1973. 예술 고문)
-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Carlo Maria Giulini, 재임 기간 1973-1976)
- 겐나디 로제스트벤스키 (Геннадий Рождественский, Gennady Rozhdestvensky, 재임 기간 1980-1982)
- 조르주 프레트르 (Georges Prêtre, 재임 기간 1986-1991. 수석 객원 지휘자. 퇴임 후 명예 지휘자 호칭 수여)
- 라파엘 프뤼베크 데 부르고스 (Rafael Frühbeck de Burgos, 재임 기간 1991-1996)
- 블라디미르 페도세예프 (Владимир Федосеев, Vladimir Fedoseyev, 재임 기간 1997-2004)
- 파비오 루이시 (Fabio Luisi, 재임 기간 2005-2014)
- 필리프 조르당 (Philippe Jordan, 재임 기간 2014-2020)
- 안드레스 오로즈코-에스트라다 (Andres Orozco-Estrada, 재임 기간 2021-현재)
이외에 야코프 크레이츠베르크가 2003-2009년 동안 제1객원 지휘자로 활동했다.
4. 특징
같은 도시에 상주하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워낙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자리를 오랫동안 지키고 있어서 콩라인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빈이라는 한정된 도시의 음악적 자원을 빈 필에 빼앗겨서 피해를 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상은 음악의 도시 빈 그리고 빈 필의 버프를 받아 실제 실력 이상으로 과대평가 받는 면도 많다. 당장 시중에 나와 있는 빈 심포니의 음반을 들어봐도 알겠지만 그렇게 뛰어난 수준의 오케스트라는 아니다.빈 필이 너무 비대하여 빈의 많은 음악적 자원들을 독식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빈 국립오페라극장의 상주 오케스트라 역할을 겸임하고 있는 빈 필은 예비 단원까지 합하면 200명 규모의 매머드급 악단으로, 심지어 세 개의 도시에서 동시에 개별적인 콘서트를 열 수 있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또한 빈 음대 출신들이 해외의 다른 도시, 특히 인근 독일 오케스트라에 취업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입단하는 단원들의 수준은 생각만큼 뛰어나지는 않다. 실제로 빈 음대 출신의 우수한 자원들은 빈 필에 입단하지 못할 경우 빈 심포니에 취직하는 것보다 독일의 다른 유명 오케스트라에 입단하는 것을 선호하며, 빈 필 역시 독일 오케스트라 출신 단원을 뽑는 경우는 있어도 빈 심포니 출신 단원을 뽑는 경우가 의외로 드물다.
악단의 기량도 명성에 비해 들쭉날쭉하다. 악단의 리즈 시절이라 불리던 1950년대 녹음들을 들어보아도 상당히 열악한데 음정이나 발음과 같은 오케스트라의 기본적인 면에서도 미숙한 점을 보일 때가 있다. 기본적으로 다른 악기와의 조화를 이루며 연주하는 습관이 결여되어 있다고 느껴질 때도 많다. 금관악기의 경우 표현이 매우 거칠고 비음악적일 때도 많으며 밸런스가 극단적으로 왔다갔다하는 아마추어적인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자주 관찰된다. 1950년대 빈 심포니가 해외 순회 공연을 했을 때 현지의 신랄한 리뷰에도 빈 심포니의 이런 결점이 지적되고 있다.
창단 초기부터 빈 연주 협회나 빈 악우 협회 같은 상부 단체의 입김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악단 자체의 지휘자 제도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악단의 리즈시절을 이끌었던 카라얀도 공식적으로 상임지휘자직을 맡지는 않았다.
전후 악우 협회를 둘러싼 푸르트벵글러와 카라얀의 대립은 빈 필과 빈 교향악단까지 끌어들여 진행한 대규모 병림픽이었고, 카라얀은 빈 필에 붙은 푸르트벵글러의 대항마로 빈 교향악단을 집중 육성해 나름대로 리즈 시절을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나중에 베를린 필로 옮겨가면서 결국 버림받았다는 인상을 강하게 풍겼다.
이후 카라얀이 빈 교향악단을 지휘한 사례는 두 번 있는데, 첫번째는 1962년 9월 24~26일에 소련의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와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을 녹음한 것이다. 당시 서방에서 연주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리흐테르가 중립국이었던 오스트리아의 빈에 왔을 때 도이체 그라모폰이 급작스럽게 녹음을 성사시켰는데, 당시 빈 필은 데카와 전속계약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빈 교향악단이 어부지리로 동원되어 녹음 세션이 이루어졌다. 두 번째는 영상물 제작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카라얀이 프랑스의 영화 감독 앙리-조르주 클루조와 1965년 11~12월에 빈 로젠휴겔 필름 아틀리에에서 시범적으로 촬영한 슈만의 교향곡 제4번 흑백 영상물.
이 때문에 자발리슈 시대 부터는 악단의 독자성을 확고히 다지기 시작했는데, 상임 지휘자 목록을 봐도 알 수 있듯이 그 후에도 상임 지휘자가 제대로, 혹은 오래 재임한 이력이 없어서 악단 육성이 순탄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나마 프뤼베크 데 부르고스 이후로는 큰 중단 없이 상임직 인계가 이루어지고 있어서, 1990년대에 들어서야 안정세를 찾았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레퍼토리 선정에 있어 보수적인 성향의 빈 필에 비해 상대적으로 근현대음악을 많이 다루는 편이다. 1988-89년에는 일본 작곡가인 단 이쿠마의 교향곡 전곡(6곡)을 데카에서 취입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이스라엘 지휘자인 엘리아후 인발의 지휘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전곡(15곡)을 일본 음반사 덴온에 녹음하는 등 일본과의 연계도 꽤 부각되고 있다.
일단 소속은 빈 시로 되어 있지만, 동시에 여름마다 참가하는 브레겐츠 음악제나 국영 방송국인 오스트리아 방송 협회(Österreichischer Rundfunk)에서도 해당 행사나 부서의 연주회 의무 개최를 전제로 한 지원금도 들어오고 있다. 단원 선발에 있어서도 빈 필과 달리 여성 연주자나 비유럽게 연주자도 별 거리낌 없이 영입하고 있다.
관악 파트는 빈 필과 마찬가지로 19세기 빈(Wien)식 악기를 그대로 쓰는 보수적인 경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는 눈속임이다. 현재 빈 심포니는 19세기의 빈식 관악기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원래부터 19세기의 빈식 악기를 계속 사용해온 것은 아니다. 오보에는 대체로 빈식 악기를 계속 사용해 온 것 같지만, 호른은 현대적인 악기를 사용해오다가 최근에야 빈 호른을 도입해서 사용하고 있다. 클라리넷은 외관으로 빈 식 여부의 식별이 어렵고, 플룻은 최나경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다른 악단과 같은 악기를 사용한다.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영상 자료가 많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확인에는 한계가 있다. 최근 빈 호른을 재도입하고 나서, 빈 필처럼 빈의 전통을 고수한다는 점을 크게 어필하고 있는데, 어려운 빈 호른을 연주하면서 버벅거리는 경우가 많아 오히려 빈 필의 위엄을 느끼게 할때가 많다. 이건 빈 심포니의 호른 단원들이 못한다기 보다 빈 필 단원들이 먼치킨이라고 봐야 한다. 현재 빈 심포니 호른 수석 중 한명인 헥토 맥도널드는 베를린 필 출신이지만[2] 빈 필 단원들에 비해서 빈 호른을 연주하는데 훨씬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 듯 하다. 다른 호른 수석인 에릭 쿠쉬너는 빈 호른 사용에 저항하면서 일반 호른을 사용할 때가 많다.
2000년대 들어 악단 실력이 크게 개선되었다. 이는 빈 심포니 뿐만 아니라 20세기 후반부터 클래식 저변과 교육 여건이 크게 되면서 전세계적으로 오케스트라 수준이 많이 향상되고 있는 추세와 맞물리는 것이기도 하다. 유럽 지방의 마이너 오케스트라도 최근 기량이 급성장하여 세계적 수준을 보이는 경우도 있고, NHK 교향악단을 제외하면 이렇다할 훌륭한 오케스트라가 없었던 동아시아에서도 일본과 한국에 정상급 수준의 오케스트라가 여럿 나타나고 있다. 빈 심포니 역시 과거에 비해 최근 기량이 제법 개선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빈 심포니 뿐만아니라 과거에는 클래식 팬들에게 안중에 없었던 ORF 빈 방송교향악단, 빈 포크스오퍼 오케스트라도 최근에는 상당히 괜찮은 연주를 들려줄 정도로 기량이 향상되었다. 빈 식 악기들로 교체한 후 시간이 많이 지나 단원들도 익숙해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파리 국립 오페라에서 이임한 상임 지휘자 필리프 조르당이 악단을 맡은 이후로는 자체 내놓은 음반에서 다른 메이저 오케스트라에 비해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상주 공연장은 빈 콘체르트하우스로 되어 있지만, 옛 근거지였던 빈 음악협회 대강당에서도 종종 공연하고 있다. 브레겐츠 음악제 때는 축제극장이나 호숫가에 설치된 특설 야외 공연장인 슈필 아우프 뎀 제(Spiel auf dem See)에서 공연하며, 오스트리아 방송 협회 주최의 공연일 경우 방송국 대강당을 사용하기도 한다.
여담이지만, 애국가와 한국환상곡의 작곡자인 안익태도 2차대전 중 이 악단을 두 차례 지휘한 바 있다. 다만 관제 단체인 일본-독일 협회의 주선으로 이루어졌고 '에텐라쿠' 와 '만주국 환상곡', '일본 축전 음악' 같은 문제작이 같이 연주되었다는 점 때문에 흑역사로 여겨질 공산이 크다.
1942년 3월 12일 공연 기록
1943년 2월 11일 공연 기록
5. 대중음악, 영화음악, 크로스오버
보수적인 빈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빈 심포니는 상당히 개방적인 면을 가지고 있고 대중적인 이미지로 어필하려고 노력하는 악단이다. 유럽의 오케스트라들 가운데서도 특출날 정도로 대중음악, 영화음악 심지어 애니메이션 음악까지 자주 다루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웃의 빈 필이 정통 클래식계에서도 '고급스러운' 이미지의 정점에 있는 만큼 빈 필과의 차별화를 통해 살아남기 위한 전략으로 분석된다. 빈이 인구가 200만명이 안되는 도시이기 때문에 한정된 도시 규모를 고려할 때 빈 필과 같은 방식으로는 충분한 관객을 확보하기에 어려움이 있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대중음악, 크로스오버, 영화음악 등 세미 클래식 콘서트도 상당히 자주 한다. 매년 영화음악 콘서트도 한다. 이미 20세기부터 연말에는 유명 성악가와 팝 가수를 초청하서 크리스마스 콘서트를 열기도 한다. 1981년에는 슈테판 솔테슈의 지휘로 토에이의 극장판 애니메이션인 '세계명작동화 백조의 호수'의 OST를 녹음하기도 했다.
5.1. VSOP
1980~90년대에는 록 음악이나 팝 음악들을 관현악용으로 편곡해 연주하는 VSOP(Vienna Symphonic Orchestra Project)[3] 프로젝트을 진행하기도 했는데, 이 프로젝트에 만들어진 팝송 음원은 배경음악, CF 등에 상당히 자주 쓰인다. TV나 라디오에서 나오는 팝송의 가사없는 경음악이 바로 빈 심포니가 VSOP로 녹음한 음원인 경우가 상당히 많다. 셀린 디온의 power of love, 배철수의 음악캠프 오프닝으로 유명한 롤링스톤즈의 Satisfaction가 있다.Power of Love
" TV는 사랑을 싣고" BGM으로 사용된 무척 유명한 음원이다. 원곡은 작사, 작곡에 참여한 제니퍼 러쉬(Jennifer Rush)가 직접 불렀으며, 나중에 셀린 디온에 의해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손에 손잡고
1988 서울 올림픽 주제가인 손에 손잡고도 VSOP의 일환으로 녹음했다.
6. 여담
2020년 9월부터 한국인 김여진 지휘자가 부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1]
1952년
니콜라스 아르농쿠르를 단원으로 뽑은 것도 카라얀이었다.
[2]
헥토 맥도널드는 사업을 한다고 베를린 필을 퇴단하고 11년 후 다시 연주자로 복귀하면서 빈 심포니 수석이 되었다.
[3]
브랜디의 일종인
코냑 등급과 동음이의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