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8 22:23:08

한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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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주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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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1983년 1984년 1985년 1986년
김용만 (2) 장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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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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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명)
강상진
김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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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홍 이종범 최재영 김동호 김종국
(고졸)
김상훈
김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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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998년 1999년 2000년 2001년
오철민
(고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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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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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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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2008년 2009년 2010년 2011년
정영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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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013년 2014년 2015년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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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023년 2024년
김도영 윤영철 (2) 조대현 (2)
(1) 지명 후 미입단 / 지명 거부
(2) 1차 지명 미시행 연도 (1라운드 지명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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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주의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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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퐁황.jpg 2004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MVP

파일:대통령배고교야구심볼.png
2005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s-2|{{{#a78329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MVP
김성훈
( 인천고등학교)
한기주
(광주동성고등학교)
이용찬
( 장충고등학교)

파일:KIA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10.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2009

파일:2008 베이징 올림픽 로고.svg
2008 베이징 올림픽 야구 종목
금메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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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주의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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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A 타이거즈 등번호 10번
서동욱
(2005)
<colbgcolor=#091231> 한기주
(2006~2011)
현철민
(2012)
KIA 타이거즈 등번호 52번
윤정우
(2011)
한기주
(2012)
윤민섭
(2013~2014)
KIA 타이거즈 등번호 17번
차정민
(2011~2012)
한기주
(2013~2013.7.3.)
홍재호
(2013.7.4.~2013)
KIA 타이거즈 등번호 14번
송은범
(2013.5.6.~2013.7.3.)
한기주
(2013.7.4.~2013)
김준
(2014~2015)
KIA 타이거즈 등번호 17번
홍재호
(2013.7.4.~2013)
한기주
(2014~2017)
서동욱
(2018~2019.9.17.)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27번
나성용
(2017)
한기주
(2018~2019)
김응민
(20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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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대표팀 참가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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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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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9539D> 투수 13 장원삼 · 14 류택현 · 17 전병호
19 정대현 · 22 한기주 · 47 권혁
51 류제국 · 61 박찬호 · 99 류현진
포수 26 박경완 · 44 조인성
내야수 2 김민재 · 3 고영민 · 7 박진만 · 8 정근우
10 이대호 · 18 김동주 · 31 이현곤
외야수 1 장성호 · 9 이병규 · 29 이택근
39 이종욱 · 53 이대형 · 69 민병헌
'''
감독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74''' 김경문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88 김기태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77 김광수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90 선동열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 역대 로스터 }}}}}}}}}

{{{#!wiki style="margin: -10px -10px; word-break: keep-all" <tablebordercolor=#fff> 파일: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모자 로고.svg 2008 베이징 올림픽 최종예선
김경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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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9539D> 투수 1 우규민 · 17 김광현 · 21 정대현 · 22 한기주
32 김선우 · 41 황두성 · 47 권혁
55 장원삼 · 61 손민한 · 99 류현진
포수 20 진갑용 · 44 조인성
내야수 7 박진만 · 10 이대호 · 13 손시헌 · 14 고영민
16 정성훈 · 18 김동주 · 25 이승엽
외야수 12 김주찬 · 15 이용규 · 29 이택근
35 이진영 · 39 이종욱
'''
감독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74''' 김경문
수석·수비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77 김광수
타격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88 김기태
투수 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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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펜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80 김태형
수비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73 김민호
벤치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72 유승안
트레이닝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87 김용일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 역대 로스터
}}}}}}}}} ||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bordercolor=#fff> 파일: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모자 로고.svg 2008 베이징 올림픽
김경문호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word-break: keep-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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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9539D> 투수 11 오승환 · 13 장원삼 · 17 김광현 · 21 정대현
22 한기주 · 28 윤석민 · 47 권혁
51 봉중근 · 91 송승준 · 99 류현진
포수 20 진갑용 · 37 강민호
내야수 3 고영민 · 7 박진만 · 8 정근우 · 10 이대호
14 김민재 · 18 김동주 · 25 이승엽
외야수 15 이용규 · 29 이택근 · 35 이진영
39 이종욱 · 50 김현수
'''
감독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74''' 김경문
수석·수비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77 김광수
타격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88 김기태
투수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76 조계현
불펜 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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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국기.svg 73 김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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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닝 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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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 역대 로스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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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한기주위원.png
한기주
韓基周 | Han Kijoo
출생 1987년 4월 29일 ([age(1987-04-29)]세)
광주광역시 북구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광주수창초 - 광주동성중 - 광주동성고 - ( 광주대)
신체 185cm, 90kg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2006년 1차 지명 ( KIA)
소속팀 KIA 타이거즈 (2006~2017)
삼성 라이온즈 (2018~2019)
지도자 우신고등학교 야구부 투수코치 (2020)
해설위원 MBC SPORTS+ 야구 해설위원 (2023)
병역 예술체육요원
( 2008 베이징 올림픽 야구 부문)
응원가 김추자 - 무인도[1][2]
종교 불교
링크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3]

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경력4. 해설자 경력5. 선발 도전기6. 혹사의 피해자7. 여담8. 연도별 주요 성적9.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야구 선수. 포지션은 투수.

고교 시절 3년 동안 수많은 이닝을 소화하면서도 4실점에 불과하였고, 당시 한국 고교 최고구속인 153km을 기록할 정도로 빠른 공과 제구력 까지 갖추면서 100년만에 나온 투수라는 평을 들었다.[4] 확실히 재능만은 탈 KBO 리그급 투수였다. KIA 타이거즈 입단 후에는 타이거즈의 살림꾼이자 애증의 존재였다. 그러나 오랜 시간과 선수 본인의 엄청난 의지로 재기 성공. 최고 구속은 무려 159km/h이며 전광판에는 160km까지 찍었다.[5][6][7]

2006년 데뷔 시즌에 바로 10승[8]을 기록하면서 서정환 시절 암울하던 꼴찌팀 KIA 타이거즈의 수호신이자 팬들의 몇 안 되는 자부심 같은 선수였다. 당시를 기억하는 올드 타이거즈 팬들로서는 속꽉남[9]이니 99.99니 하고 조롱받으며 불같은 강속구를 잃어버린 한기주를 보면 그저 눈물이 앞을 가릴 뿐.

2017년 시즌 종료 후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했으나, 결국 부활하지 못하고 2019년 11월 은퇴하였다.

은퇴 후에는 서울특별시 구로구에 소재한 우신고등학교 야구부에서 투수코치로 잠시 활동하였고 현재는 야구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으며 2023년부터 MBC SPORTS+의 해설로 합류하였다.

2. 선수 경력

한기주의 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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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 선수 경력: 한기주/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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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009년 2010년 2011년
2012년 2013~2014년 2015년
2016년 2017년 2018년 2019년
파일: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2007년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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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지도자 경력

2020년 우신고등학교 야구부 투수코치로 부임하였다. KIA 타이거즈 시절 같이 마운드를 지켰던 선배인 조태수 감독을 보좌하게 된다. 지도자 자격증을 취득했으며 팀원들의 부상 방지에 초점을 두고 지도하겠다고 밝혔다.

[엠스플 인터뷰] 한기주 “딸이 5살 때까지 뛰고 싶었는데…남은 야구 인생은 좀더 행복했으면”

이후 우신고 코치생활을 접고 KIA 타이거즈 입단 동기였던 김준무와[10] 함께 서울 문래동에 위치한 '87 베이스볼 클라쓰'라는 야구 아카데미를 열었다. # 아직 프로 코치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2022년 청춘야구단에 투수코치로 부임하였다.

4. 해설자 경력

2023년에 MBC SPORTS+ 새로운 해설위원으로 합류했고 현장 중계가 아닌 베이스볼 투나잇 패널로만 출연했다.

5. 선발 도전기

한기주의 선발은 KIA 팬들과 야구 관계자들 사이에 오랜 떡밥으로 작용했다. 확실히 고등학교 시절에는 선발투수로도 좋은 면모가 있었고 프로 데뷔 첫 해에도 선발로 뛰면서 3점대 방어율에 10승을 기록했다.[11]

한기주 본인도 선발 투수에 대한 의지가 강해서 2009년 4월 28일, 국내 언론에다가 선발로 뛰고 싶다는 뜻을 피력하여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어떤 팬들은 자기 욕심만 차리냐고 발끈했고, 한기주를 동정하는 팬들은 한기주도 나름대로 고생했는데 알아주지 못한다고 두둔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러 정황으로 보면, 선발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는 당장 하고 싶다는 소리는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수술을 시켜달라는 소리가 아니냐는 분석도 있기는 했었다.

결국 수술을 받고 재활을 하면서 본인은 선발에 대한 욕심이 있음을 숨기지는 않았고 조범현 감독도 의사를 존중해서 선발로 등판 시켜보았지만 역시 긴 이닝을 소화하기는 당장은 무리라는 판단에 따라서 다시 마무리로 전향시켰다.

또한 조범현 감독이 뜬금없이 심동섭의 선발 전향 가능성을 언급했다는 점에서, 한기주를 마무리로 고정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분석도 나왔다.

사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한기주가 신용운 이후로 가장 성적이 좋았던 클로져였던건 사실이고, 보통 강속구를 가진 우완 정통파 투수가 이상적인 클로져 투수감이기도 한 탓에 조범현 감독이 한기주 마무리에 여전히 미련을 두고 있었을 수도 있다. 또한 심동섭이 마인드 면이나 본인의 의사나 클로져감이긴 하나, 경험이 부족하고 좌완 투수라는 점에서 안정적인 성향의 조범현 감독이 클로저보다는 선발이 낫다는 판단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심동섭이 척추분리증을 앓았다는 점에서 긴 이닝을 소화할 수 있을 능력에 의문부호가 달렸고, 한기주는 마인드 상 클로저로서는 무리가 있다는 지적도 있었기 때문에 2011 시즌이 끝나고 KIA의 성적에 따라서 조 감독의 구상에 따라 달라질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일단 한기주가 선발로 정착하려면 긴 이닝을 소화할 능력과 결정구의 장착이 절실하다. 윤석민의 경우처럼 빠른 직구+고속 슬라이더 위주의 파이어볼러식의 선발투수가 되려고 한다고 해도 결국 문제는 이전의 빠른 직구의 회복 여부에 달렸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조범현 감독은 9월 29일 잠실 두산전에 한기주를 선발로 예고하면서 포스트 시즌에 한기주를 선발로 쓰겠다라고 밝혔다. 사실상 믿을 만한 선발투수가 윤석민- 서재응밖에 없는 상황에서 적어도 3명의 선발투수는 확보해야 하는 상황이라 한기주를 선발로 내세울 복안이었던 듯하다. 한기주는 남은 두산전 및 SK전에서 선발로 등판해 최소 4이닝 정도를 던지면서 선발로 적응할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선발투수로 뛰더라도 5이닝 정도는 막아줘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잘 될지는 미지수.

일단 9월 29일 등판에서 5이닝 1실점으로 호투해 전망을 밝게 했다. 포스트 시즌에서 선발로 호투할 경우, 2012 시즌에 본격적으로 선발로 풀시즌을 뛸 수도 있기 때문에 한기주로서나 팀으로서나 매우 중요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조범현 감독이 사퇴하고 후임으로 선동열 감독이 부임하면서 한기주의 2012년 보직에도 관심이 쏠렸다. 한기주 자신은 선발로 뛰는 걸로 거의 확정하다시피하고 있었지만 불펜 강화에 초점을 맞출 선동열 감독의 관점에서는 한기주를 마무리로 쓸 수도 있기 때문. 물론 선동열 감독이 조련한다고 해서 한기주가 오승환 급이 된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마무리 훈련 등을 거친 뒤에 주목해야 할 듯.

그리고 아니나다를까, 시즌 개막 후 마무리로 나오기 시작했다. 한기주 입장에서는 원하던 선발을 못 하게 되었으니 아쉬울 것이다.

재활하던 시기에도 지속적으로 불펜보다는 선발에 중점을 둔 기사들이 올라오면서 팀에서도 본인의사를 존중하는 듯 하고, 2015시즌 퓨처스리그에서 본인이 원해온 선발로 3경기 연속 출전하면서 앞으로 불펜 기용은 없을 듯 하다. 하지만 과연 많은 투구수를 소화할 수 있을지가 의문인데다가, 2016시즌 헥터 - 지크 - 양현종 - 윤석민 - 임준혁으로 기아의 선발 로테이션이 꽤 단단한 편이라 한기주가 비집고 들어가기는 당장은 힘들어 보인다. 물론 2015년에 재활이 끝난 투수를 16년에 바로 고정선발로 투입하는 짓은 선수를 위해서도 안 하는 것이 맞다. 2016년에 땜빵 선발로 몇 번 올라오기도 했고, 감격의 선발 승도 거두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선발로서는 실패하였다. 결국 2017년은 거의 2군 붙박이로 지냈고, 이후로는 본인도 선발에 대한 미련을 버려서, 한기주의 선발 도전기는 이로서 일단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18년 삼성으로 이적한 후에도 불펜으로 출장했다. 과거 선발을 뛰었던 경험이 있어 가끔 로테이션이 꼬였을 때 땜빵으로 한 두 경기 정도를 뛰어줄 수는 있었지만, 선발 로테이션 진입은 현실적으로 무리라는 것을 팀도, 본인도 납득하게 되었다.

6. 혹사의 피해자

한기주는 프로에 데뷔하기 전부터 혹사로 인해 팔꿈치 상태가 좋지 않은 편이었으나 번번이 수술할 기회를 놓치면서 다시는 이전과 같은 강력한 속구를 던지지 못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한국 야구계에서는 장명부, 최동원, 염종석, 전병두, 김윤동 등과 함께 혹사의 아이콘이 되었다.[12]

한기주가 처음 본인의 팔꿈치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2005년 KIA에 입단이 확정된 후 미국에서의 정밀검사를 통해서인데 당시에 팔꿈치 인대 3개중 2개가 90%정도 손상이 되었으며 수술을 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재활을 통해서도 치료할 수는 있다고 했다. 단 적정 투구수는 40개이며 50개 이상은 던지지 않도록 관리해 준다는 전제 하에.

그러나 당시 기아의 감독은 혹사를 통해 임창용, 신용운의 팔을 망가뜨린 서정환이었고 투구수 관리를 받아야 할 한기주는 2006년 데뷔 시즌 선발과 불펜을 오가면서 140이닝이나 투구를 했다.

2006년 선발로 나올 때 투구수가 50개 이상이 되면 급격히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를 두고 체력 부족 등의 이야기가 많이 나왔었지만 한기주의 팔꿈치상태에서 적정 투구수를 넘었기 때문에 급격하게 구위가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2007시즌에는 선발로 전향한 윤석민을 대신해서 마무리 투수로 전향해서 70이닝 평균자책점 2.43의 좋은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마무리투수가 55경기 70이닝을 던진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서정환 감독은 한기주의 투구수를 관리하지 않으면서 한기주의 팔꿈치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고 2007시즌 후 본인도 수술을 원했고 당시 단장도 한기주를 수술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조범현 감독을 비롯한 현장에서는 갑자기 마무리 투수가 빠지면 안 된다면서 한기주의 수술을 반대했고 한기주는 원래는 수술을 원했었지만 조범현 감독의 요청에 따라 1년 더 뛰기로 결정했다.[13]

결국 2008시즌 한기주의 팔꿈치는 투구할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되면서 팔꿈치를 사용한 투구가 어려워졌고 이 때문에 옆구리 근육을 키워서 팔꿈치가 아닌 옆구리 근육을 이용해서 투구했었다. 하지만 30개 이상의 공을 던지면 급격히 페이스가 떨어지고 통증이 증가했었고 2008시즌 중반부터는 페이스가 급격히 떨어진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2008시즌 후 한기주는 또 다시 수술을 받을 것을 요청했으나 조범현 감독은 또 거절했고, 2009시즌에도 수술받지 못한 채로 투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최고의 재능을 가진 한기주일지라도 망가진 팔로 4년을 버티는 것은 무리였다. 2009시즌 이전만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마무리 자리를 유동훈에게 내주었고 아이러니하게도 한기주가 가장 부진했던 2009시즌 KIA 타이거즈는 우승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9시즌이 끝난 후 그제서야 조범현 감독은 한기주의 수술을 허락해줬다. 당시 2009시즌 유동훈, 손영민, 곽정철 등 수준급의 불펜진이 나오자 이전처럼 한기주가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에 조범현 감독도 수술을 허락해준 듯. 그러나 한기주의 팔꿈치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수준까지 망가지게 되었고 미국행을 꿈꾸던 최고의 유망주는 그저 평범한 투수로 은퇴하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고교 시절부터 워낙 대단한 재능을 가졌던 탓에 오히려 심각한 혹사를 당해 팔꿈치가 망가졌으며, 프로에 와서는 관리가 필요했으나 서정환, 조범현 두 감독의 성적 욕심으로 인해 더욱 혹사당하는 바람에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 것이다.

7. 여담

  • 2013년 10월 4일에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올랐다. 이유는 박동희가 한기주와 일본 고시엔의 영웅 스지우치의 부상을 예로 들며, 선수를 망가트리는 고교야구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올렸기 때문. 박동희의 야구탐사 - 누가 한·일 ‘괴물’을 사라지게 했나 그런데 박동희가 "퇴물"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을 쓰면서 정작 기사 내용과는 관계없이 퇴물이다 아니다 혹은 한기주 퇴출시켜라 라는 식으로 댓글에서 키배가 벌어졌다. 웃긴 것은 퇴물이라 불렀다면서 빡친 것도 기아팬이고 한기주 제발 팔라면서 한기주 욕하고 있는 것도 기아팬들이었다.
  • 역대 최대의 계약금을 받고 입단했으나 선수 생활 내내 부상에 시달린 탓에 계약금보다 누적 연봉이 적은 선수이다.
  • 속꽉남, 99.99라는 불명예스런 별명으로 유명하지만 실상은 상당히 불운한 커리어를 지닌 선수로, 부상으로 인하여 커리어 내내 자신의 재능을 피우지 못하고 일찍 은퇴해버렸다. 그리고 구속 대비 성적이 나쁜 선수로 꼽히는데 이것 또한 심각한 수준의 혹사와 부상의 여파였던지라, 현역시절에는 한때 엄청난 조롱거리였지만 사정이 알려진 지금은 이러한 비판이나 조롱은 거의 들어갔다.
  • 팀 동료 였던 최지광의 안경을 쓴 모습과 상당히 닮았다. 그러나 외모만 닮은 게 아니었는지, 2021년 5월 8일, 최지광은 아웃을 하나도 잡지 못하는 동안 3실점하여 속꽉남의 타이틀을 물려받게 되었다.
  • 스톡킹에 출연하였다. 여기서 원래 야구 입문때부터 초등학교 5학년때까지는 포수로 출장했고 한기주 본인도 포수가 재밌었다고 밝혔다.
  • 삼성 라이온즈에 2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있었고 KIA 타이거즈로서의 이미지가 더 강하긴 하지만 의외로 삼성 라이온즈에 대한 애정이 큰 선수. 본인이 직접 트레이드를 요청했으며 STC에서의 재활 치료 등 선수를 관리해주면서 기용했던 점[15], 그리고 고참 선배들이 많았던 KIA와 달리 선수층의 나이가 어렸던 점 등에서 삼성이 더 좋았다고 느낀 듯하다. 기아와 삼성 두 팀에 대한 질문에, 저는 끝이 좋다고 생각한다며 우회적으로 삼성에 대한 애정을 언급하였다. 또한 최강야구 시즌 2의 트라이아웃에도 삼성시절 유니폼을 입고 등장하며 여전히 삼성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 KIA 시절에 당한 무지막자한 혹사로 인해 역대급 재능을 꽃 피우지 못하고 일찍 은퇴했기에 KIA 팬들도 이를 인정하면서도 안타깝게 생각하는 편이다.
  • 은퇴 후 프로 경기는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이 들어서 안 봤다고 한다.
  • KBS에서 방영하는 야구 예능 ' 청춘야구단'에 투수 코치로 출연했다.[16] 본인이 과거 부상 때문에 많이 고생한 경험이 있기 때문인지 투수들을 세심하게 신경쓰고 조언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특히 몸에 불편한 곳이 있으면 억지로 참으면서 하지 말고 솔직하게 말을 하라고 주문한다.
  • 고등학교 재학 때 유명해져 언론과 몇번 인터뷰를 했는데 당시 대박난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과 이름이 같아 꽤 주목을 받았다.
  • 2023년 3월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해서 2008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로 인한 병역특례가 오히려 본인의 커리어에 독이 됐고 차라리 병역의무를 성실히 이행했다면 좀 더 커리어를 길게 가져갈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밝혔다.[17]
  • 2023년 4월 10일부터 방송하는 최강야구 시즌 2의 트라이아웃에 출연하는 것이 알려졌다. # 트라이아웃에서 던진 직구 구속은 최고 123.5km/h. 한때 160을 노리던 투수라고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에 모든 야구팬들이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18] 그 후 트라이아웃에서는 신재영, 정현수, 선성권이 합격하면서 한기주는 최강야구에선 볼수 없게됐다. 다만, 구속과 달리 제구력은 여전히 좋은 편이었다. 어깨만 안 다쳤어도 여전히 뛰어난 활약을 보였을 듯.

8.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출장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6 KIA 44 140⅔ 10 11 1 8 0.476 3.26 117 8 64 78 57 51 1.20
2007 55 70⅓ 2 3 25
(5위)
0 0.400 2.43 53 4 28 66 19 19 1.02
2008 46 58 3 2 26
(3위)
0 0.600 1.71 44 1 18 46 11 11 1.03
2009 26 34 4 5 4 0 0.444 4.24 39 6 16 30 20 16 1.59
2010 1군 기록 없음
2011 16 28⅔ 1 3 7 0 0.250 4.08 31 0 12 20 13 13 1.47
2012 16 19⅔ 1 1 7 0 0.500 3.20 20 1 10 13 8 7 1.42
2013 1군 기록 없음
2014
2015 7 8⅓ 0 0 0 0 - 3.24 11 0 5 4 4 3 1.92
2016 29 56⅔ 4 3 1 1 0.571 7.62 81 11 35 27 48 48 1.96
2017 1군 기록 없음
연도 출장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잭점 WHIP
2018 삼성 33 39 1 4 0 3 0.200 6.69 54 8 17 30 32 29 1.69
2019 1군 기록 없음
KBO 리그 통산
(9시즌)
272 455⅓ 26 32 71 12 0.448 3.89 450 39 205 314 212 197 1.36

9. 관련 문서



[1] KIA의 한기주~ KIA~의 한~기주~ 승~리를 위~하여~ 워~어어 워~어어 [2] 과거 이재주의 응원가였다. [3] 한기주 본인이 직접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로 추정된다. 응원이나 투구 폼에 대한 질문 같은 댓글에 답글을 달아주기도 한다. [4] 당시 한국야구 99주년이라 이러한 평가가 나왔다. [5] 2008년 5월 8일 광주 삼성전에서 전광판에 160km/h가 찍힌 적은 있는데, 비공인에 그쳤다. 당시 경기 영상 [6] 영상의 2008년 6월 6일 경기에서도 TV 화면에 160KM를 찍었다. 6월 6일 경기 [7] 2000년대 후반 당시에는 한기주 정도의 구속을 가진 불펜 투수가 메이저리그에 당연히 없지는 않았지만, 아주 많지도 않았다. 물론 100마일이 보편화된 2020년대 기준으로는 메이저리그 불펜투수가 저 구속으로는 딱히 큰 경쟁력을 가지지 못한다. [8] 류현진이 당시 너무 괴물같은 피칭을 해서 신인왕을 가져갔지만 44경기 10승 11패 8홀드 1세이브 평균자책 3.26으로 순수 고졸 신인으로는 류현진 다음가는 성적을 올렸다. 다만 그해 장원삼도 워낙 잘해서 류현진이 없었어도 신인상은 힘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9] 자의 줄임말로 배일호의 노래 99.9의 가사에서 따온 것이다. [10] 서울고 출신의 내야수. 2008년까지 기아에서 활동하다 방출되었고, 군복무 이후 2010년에 롯데 자이언츠 신고선수로 입단하였으나 역시 방출되었다. 이후에는 아마추어 야구쪽에서 오랫동안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다. [11] 사실 후반기에는 불펜으로 전환했기 때문에 온전히 선발로만 뛰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12] 일본 야구에서는 최근 투수들 중에선 보통 사이토 유키가 혹사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13] 참고로 비슷한 상황이었고 역시 수술이 필요했었던 신용운에게도 조범현 감독은 1년 더 뛸 것을 요구했지만 신용운은 이를 거절하고 경찰청으로 입대했다. [14] 단, 양현종은 결혼하고나선 소녀시대 덕질을 그만뒀다. [15] 프로 입단 전부터 혹사로 지친 한기주에게 KIA 코칭스태프들은 당장의 성적을 내기 위해 수술보다는 재활을 계속 권유하며 기용했다. [16] 감독 김병현, 수석코치 정근우. [17] 한기주는 베이징 올림픽을 기점으로 혹사의 여파가 터져버려서 2009년에는 방화범이 되었고, 그 이후에는 토미 존 서저리를 받아야만 했다. 이후 복귀는 했으나 결국 한기주는 끝내 불같은 강속구를 되찾지 못했고 다른 수술도 받고 재활도 하면서 시간이 하염없이 흘러가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올림픽에 차출되지 않고 병역을 이행하면서 혹사를 피하고 조금이라도 어깨를 관리했으면 어땠을까하는 만약의 이야기가 생각날 수 밖에 없다. [18] 이 날 규칙으로는 투수 1명당 20구를 던지게 했는데 한기주는 모든 투구를 직구로만 던졌는데 구속이 이만큼 밖에 안 나왔고, 박용택 심사위원은 눈물까지 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