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철민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오철민의 역대 등번호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해태/
KIA 타이거즈 등번호 21번
|
|||||||||||||||||||||||||||||||||||||||||||||||||||||||||||||||||||||||||||||||||||||||||||||||||||
안상준 (1996) |
→ |
오철민 (1997~2006) |
→ |
이인철 (2007) |
}}} ||
<colbgcolor=#fff><colcolor=#000> | |
오철민 吳喆珉 | Oh Cheol-Min |
|
출생 | 1973년 5월 28일 ([age(1973-05-28)]세) |
전라남도 목포시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영흥고 - 영남대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좌투좌타 |
프로 입단 | 1997년 1차 지명 ( 해태) |
소속팀 | 해태- KIA 타이거즈 (1997~2006) |
지도자 | 목포과학대학교 야구부 감독 (2021~2023) |
[clearfix]
1. 개요
한국프로야구에서 뛰었던 좌완투수로 해태 타이거즈와 KIA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었다.2. 선수 경력
1973년 5월 28일 전남 목포시 출생으로 야구 무명 학교인 영흥고등학교에서[1]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 8강과 전국체전을 4강으로 이끌었으며 청소년대표로 선발되었다. 이 당시 포수는 김지영이었다.[2] 1992년 한미일 고교야구대회 미국전에서 선발투수로 등판해 호투했다.영남대에서의 활약을 인정받아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대표로 선발됐고 한.일전 선발 투수로 출전해 4 1/3이닝 1실점으로 호투하였다. 1997년 KBO 드래프트 1차 지명을 받았으며 해태는 IMF 시대 직전의 가난한 팀 사정에도 불구하고 계약금 2억 4천만 원, 연봉 2천만 원의 거금을 안겨주었다. 이는 그 당시까지 해태에 입단한 신인 투수 계약금 최고액이었다.[3][4]
그러나 프로에서의 성적은 1997~2006년 10시즌 동안 241경기에서 16승 31패 2세이브 9홀드 평균자책점 5.48을 기록하며 두 번의 수술(무릎, 어깨)로 인해 화려한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다. 2006년을 끝으로 은퇴 후 ING생명 재정설계사(FC)로 취업하며 새로운 인생을 걷고 있다.[5]
프로 5년차이던 2001년에는 시즌 첫 경기에 선발승을 광주 현대전에 신고했다. 선발로 등판한 4월 8일 현대 유니콘스전[6]에서 6과 3분의 1이닝 동안 삼진 7개를 잡으며 4안타 2실점만 내주는 호투였다.
3. 여담
2022년 5월 전설의 타이거즈에 최상덕과 함께 출연했다. 2021년부터 목포과학대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고 있다고 밝혔다.삼성 라이온즈에서 양준혁이 해태로 트레이드되면서 광주 동림동의 아파트로 이사 올 때 청소도구를 들고 아파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2명 중의 한 명이다. 다른 한 명은 곽현희였으며 오철민과 곽현희는 모두 양준혁의 영남대 후배들이다. 이 장면이 유독 양준혁의 기억에 남았는지 해태 타이거즈의 팀 분위기를 이야기 할 때 꼭 이 사례를 들곤 한다.
제구력이 좋지 않아 코감독의 지시로 1999년에 불펜에서 반성투구를 한 적이 있다. 기사[7]
2017년 레전드스크린야구 부천중동점에서 레슨을 진행한 바 있다.
이대진과 친구 사이로 지내는 것으로 보아 유급 내지는 입학유예를 한 것으로 보인다. 대학도 93학번으로 원래는 동갑내기인 곽현희, 전병호가 그의 선배였다.
4. 관련 문서
[1]
최향남의 후배다. 같은 학교를 나온 인연으로 최향남과 최근에도 자주 연락을 한다고 한다.
[2]
김성한 구타 사건의 당사자다.
[3]
당시 해태의 고졸 우선지명 동기생 중 한 명이 바로
김병현이었다. 해태 입단을 거절하고
성균관대에 장학금 2억원을 받으며 입단했다가 1999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유니폼을 입었다.
[4]
그 후 2001년 6월에 해태가 1차지명한
김진우가 계약금 7억원에 사인했지만 그 때는 타이거즈의 모기업이
기아로 바뀌기 직전이었다.
[5]
대다수의 고객은 일반인이지만 이종범, 김창희, 장성호 등 옛 팀 동료들도 그의 고객이라고 한다.
[6]
2000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등 팀 전력이 절정이었다.
[7]
김응용 감독은 좌완투수, 좌타자가 희귀한 팀 사정상 왼손잡이라고 하면 사족을 못 쓴다고 할 정도로 많은 기대를 건 것으로 유명하다. 이 당시 아꼈던 좌완투수로
강영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