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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민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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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방콕 아시안게임 야구 종목 금메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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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
KIA 타이거즈 등번호 27번 | ||||
이호성 (1990~2001) |
→ |
<colbgcolor=#09081c><colcolor=#f01e23> 강철민 (2002~2007) |
→ |
리마 (2008) |
KIA 타이거즈 등번호 21번 | ||||
이인철 (2007) |
→ |
강철민 (2008) |
→ |
정성철 (2009) |
KIA 타이거즈 등번호 27번 | ||||
리마 (2008) |
→ |
강철민 (2009~2009. 4. 19.) |
→ |
김상현 (2009. 4. 20.~2013. 5. 5.) |
LG 트윈스 등번호 26번 | ||||
김상현 (2009~2009. 4. 19.) |
→ |
강철민 (2009. 4. 20.~2011. 5.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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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진 (2011. 7. 11.~2012) |
한화 이글스 등번호 46번 | ||||
이영기 (2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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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민 (2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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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 (2014) |
KIA 타이거즈 등번호 67번 | ||||
김재열 (2020. 9. 8.~2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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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민 (2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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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도현 (2022~2023) |
KIA 타이거즈 등번호 91번 | ||||
서동욱 (2020~2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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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민 (2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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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연 (2024~) |
A대표팀 참가 경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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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민 姜喆珉 | Kang Cheolm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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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79년 7월 22일 ([age(1979-07-22)]세) |
전라남도 순천시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순천성동초 - 순천이수중 - 순천효천고 - 한양대[1]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 입단 | 1998년 고졸우선지명 ( 해태) |
소속팀 |
KIA 타이거즈 (2002~2009) LG 트윈스 (2009~2011) 한화 이글스 (2013) |
지도자 |
광주진흥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2015~2018) 화순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2019~2020) KIA 타이거즈 2군 투수코치 (2021~2022) 대구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2023) 호원대학교 야구부 코치 (2023~) |
병역 |
예술체육요원 (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야구 부문 금메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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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야구선수, 前 KIA 타이거즈 2군 투수코치. 포지션은 투수였다.좋은 신체 조건을 가지고 있어 KIA 타이거즈에서 거는 기대가 컸다. 2002 시즌부터 2005 시즌까지는 5선발 로테이션을 돌며 포텐셜이 폭발 직전까지 갔으나 2006 시즌부터 부상으로 장기간 등판하지 못했고, 결국 2009 시즌 초 김상현, 박기남을 상대로 트레이드되어 LG 트윈스로 이적했다. 그 결과 강철민은 LG에서 등판을 거의 하지 못하며 매우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고, 김상현은 포텐셜이 대폭발하여 2009년 한국시리즈 우승의 주역이 됐다.[2][3] 이로 인해 KIA팬들 사이에서는 농담 삼아 '강철민이 V10의 주역'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나왔다.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2.1.1. 고등학교
순천효천고 출신으로, 고교 시절에는 조용준과 함께 활약했다. 장호연 인스트럭터[4]의 지도하에 성장한 두 투수는 1997년 대붕기 결승 진출에 기여했으나 김진웅의 대구고에게 패했다.2.1.2. 대학교
1998년 해태 타이거즈의 고졸우선지명을 받지만 한양대학교에 입학했다. 같은 해에 지명된 선수로는 최희섭[5], 이현곤 등이 있다.한양대 1학년이던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대표팀으로 선발되어 금메달을 획득, 병역특례를 받기도 했다.[6]
1999년과 2001년에 각각 전국대학야구선수권대회 우승을 경험했다. 2001년 대회에서는 고려대와의 결승전에서 호투했으며 최우수선수(MVP) 및 우수투수로 뽑혔다.
2000년에는 회장기 전국대학야구 추계리그 결승전에 선발 지승민의 뒤를 이어 등판하여 2-0으로 승리하며 우승으로 이끌었고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됐다. 7회부터 6타자 연속 삼진을 포함 8개의 삼진을 얻어냈으며 4.2이닝동안 단 2안타만 내줬다.
그 활약 덕분에 대학을 졸업하고 무려 5억원의 계약금을 받고 자신을 지명했던 KIA 타이거즈에 입단한다.[7]
2.2. KIA 타이거즈
엄청난 기대를 받고 입단한 것과는 달리 프로 입단 후 잦은 부상과 수술의 연속으로 별 활약을 못 보였다. KIA에서 5년간 1군 117경기 등판에 그치고 성적도 두드러지지 않았다. 2004년에 그나마 선발 로테이션을 돌며 규정이닝을 돌파했으나 10승에는 실패했고 무엇보다도 평균자책점이 5점대에 다다르는 등 아마 시절의 명성에 비해서는 프로에서 그렇게 실력을 보이지 못했다.2006년 시즌 초부터 그나마 포텐이 터지는 듯 싶었지만 얼마 뛰지도 못하고 팔꿈치 부상으로 드러누운 뒤 그대로 시즌 아웃되었고, 이후 재활하느라 2007년과 2008년은 1군 경기에 나오지도 못했다. 덕분에 호세 리마에게 등번호를 빼앗기기도 했다. 참고로 강탈당한 27번의 전 주인은 김봉연과
후일담에 의하면 2006년 스프링캠프에서 코치들이 훈련량이 적다는 얘기를 자주 하였다고 한다. 투구수를 늘려야 아픈 부위에 내성이 생긴다며 매일 100개에서 150개의 공을 던졌고 결국 전반기 10경기로 시즌을 마감했다. #
2.3. LG 트윈스
2009년 4월 19일 KIA가 김상현, 박기남 ↔ 강철민 트레이드로 강철민은 LG 트윈스로 이적됐다. 김상현이 이적 첫 해 홈런왕과 MVP[8]를 차지했고, 대수비 요원으로 활약하던 박기남도 2009 시즌 백업으로서 완벽하게 활약하고 2010 시즌에는 무등야구장으로 인해 부상당한 김상현의 공백을 메우고 계속해서 활약해 커리어 통산 최고의 활약을 펼치는 가운데, 강철민은 2010년 7월 18일 대구 삼성전에서야 1군에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사랑해요 LG가 울려퍼지게 된 촉매. 덕분에 LG팬들은 강철민을 떠올릴때마다 아주 그냥 이를 갈아댔다.마지막으로 1군에 등판했던 때가 2006년 6월 7일인데, 계산해보면 무려 49개월만의 등판. 그 정도로 1군 무대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이 때문에 얼굴 보기가 정말 힘들어 실존인물인지 의심된다는 이유로 사이버 투수라고 불렸다.
190cm가 넘는 장신이다 보니 KIA에 있을 시절 주로 상체로만 투구를 했다고 한다. 2군에서 투구 폼 자체를 뜯어고쳤으며, 2010년 7월 4일 경찰청과의 경기에서 5이닝 3실점 2자책으로 LG 유니폼을 입고 2군에서 첫승을 거두었다. 참고로 상대 패전 투수는 당시 복무 중이었던 우규민이었다.
7월 18일 삼성전에서 처음으로 등판하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으며 150km/h에 육박하는 속구로 4이닝 1피안타 1피홈런 1실점을 기록하며 비교적 준수한 모습을 보였지만, 박석민에게 홈런을 얻어맞고 차우찬의 데뷔 첫 완봉승의 희생양이 되며 패전 투수가 되었다.
하지만 2010 시즌 막판 체력 저하로 출전하지 못했으며, 구속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며 2군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2011년 다시 도진 어깨 부상으로 5월 20일 웨이버 공시되어 방출되면서 정말로 사이버 투수로 거듭나고 말았다. 이로 인해 LG팬들 사이에선 강철민 본인의 이름에서 착안된 반의적인 별명 '유리민'이라는 멸칭이 생긴건 덤.
2.4. 한화 이글스
헌데 2012년 10월 15일, 뜬금없이 신고선수로 한화 이글스로 입단이 결정되었다.[9]그러나 구속을 회복하지 못해 사이버 투수가 되고 말았다. 2013년 한화의 투수난 덕에 한 번쯤 1군 콜업이 될 법하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결국 재활군에서도 구속은 물론 기량을 회복하지 못한 채 6월 27일 은퇴를 선언한 외야수 오재필과 함께 방출되었다. 고질적인 부상에 나이도 적지는 않은 편이라 사실상 은퇴 수순을 밟게 되었다. 시즌 후 보류명단 제외자에는 없는 것으로 보아 신고선수 계약을 해지한 듯.
3. 은퇴 이후
광주일보 김여울 기자 트위터를 통해 2013년 12월 6일 열린 타이거즈 OB 모임에 참석했음이 밝혀졌다.2014년 12월 13일에 결혼했다고 한다. 2016년 말에 올라온 이영미 칼럼에서 오랜만에 근황을 알렸다. 2015년부터 2018년까지 광주진흥고 코치로 활동했으며 2019년 화순고 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2021년에 KIA 타이거즈 2군 투수코치로 오게 되었다. 등번호는 67번.[10] 1년만에 등번호를 다시 바꿨다. 2022 시즌 후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았고 2023년 대구고등학교 야구부 코치로 부임했으나 몇 달 지나지 않아 호원대학교 야구부 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2023년 12월 28일 최해식과 함께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했다.
2024년 해남군에서 지원하는 해남리틀야구단 감독으로 이동했다. #
4.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 ||||||||||||||||
<rowcolor=#fff> 연도 | 소속팀 | 경기 | 이닝 | 승 | 패 | 세이브 | 홀드 | ERA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2002 | KIA | 26 | 77⅔ | 5 | 6 | 0 | 1 | 5.68 | 100 | 9 | 22 | 2 | 46 | 51 | 49 | 1.57 |
2003 | 27 | 90⅓ | 6 | 7 | 0 | 1 | 4.88 | 82 | 16 | 44 | 9 | 44 | 54 | 49 | 1.40 | |
2004 | 31 | 145⅓ | 8 | 12 | 1 | 0 | 5.33 | 159 | 14 | 61 | 13 | 86 | 94 | 86 | 1.51 | |
2005 | 23 | 92⅓ | 3 | 8 | 0 | 0 | 4.68 | 99 | 14 | 52 | 11 | 68 | 52 | 48 | 1.64 | |
2006 | 10 | 58⅔ | 3 | 2 | 0 | 0 | 2.76 | 54 | 5 | 36 | 1 | 32 | 19 | 18 | 1.53 | |
2007 | 1군 기록 없음 | |||||||||||||||
2008 | ||||||||||||||||
<rowcolor=#fff> 연도 | 소속팀 | 경기 | 이닝 | 승 | 패 | 세이브 | 홀드 | ERA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2009 | LG | 1군 기록 없음 | ||||||||||||||
2010 | 3 | 11⅔ | 0 | 1 | 0 | 0 | 5.40 | 8 | 2 | 8 | 1 | 10 | 7 | 7 | 1.37 | |
2011 | 1군 기록 없음 | |||||||||||||||
<rowcolor=#fff> 연도 | 소속팀 | 경기 | 이닝 | 승 | 패 | 세이브 | 홀드 | ERA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2013 | 한화 | 1군 기록 없음 | ||||||||||||||
KBO 통산(6시즌) | 120 | 476 | 25 | 36 | 1 | 2 | 4.86 | 502 | 60 | 223 | 37 | 286 | 277 | 257 | 1.52 |
5. 여담
- 이미 은퇴한지 오랜 기간이 지난 선수지만, 그와 트레이드된 김상현은 다시 송은범과 트레이드 되고, 송은범의 FA 보상선수로 기아에 입단한 임기영이 여전히 현역으로 뛰고 있으며, 박기남은 기아의 코치로 오래 재직하고 있어서 현재까지도 가끔씩 언급되기도 한다.
6. 관련 문서
[1]
1998학번
[2]
더군다나 LG에서 먼저 박기남까지 주겠다고 해서 KIA는 안정적인 내야 백업인 박기남도 덤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3]
단, 이 부분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은 게 KIA가 요구한 끝에 박기남까지 받아왔다는 얘기가 거의 정설이다. 실제로 이때의 KIA는 김선빈, 안치홍이 포텐을 터뜨리기 전이라 내야 뎁스가 매우 얕아 김상현을 트레이드로 데려왔어도 김종국의 노쇠화로 내야 자원이 추가로 더 필요한 상황이었고 유격수로 기용될 예정이었던 이현곤이 계속 3루수 혹은 유격수를 번갈아서 출전할 정도로 내야 풀이 부족했어서 아무래도 KIA가 박기남을 요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애초에 KIA는 이 당시, 이미 전년도부터 내야수 트레이드를 위해 두산 베어스와 트레이드 딜을 했었고 두산에서 이대수를 제시함과 동시에 양현종을 요구하여 무산된 적이 있었을 정도로 내야 기근에 시달리고 있는 수준이었다.
[4]
당시 프로야구와 아마야구의 갈등이 극에 달하던 시기라 프로야구 출신 지도자들은 아마추어팀 야구부의 코치로 바로 뛸 수 없었고 인스트럭터 직함을 달고 활동하였다.
[5]
1998년 해태의 지명을 받았으나 고려대로 진학했고 얼마 다니지 않고 미국으로 건너가며 지명권이 사라졌다. KIA 입단은 2007년
해외파 특별 드래프트를 통해 이뤄졌다.
[6]
여담으로 당시 대표팀 최연소 선수였다. 같은 79년생인
박한이와
김병현은 빠른 79년생이라 강철민보단 1년 선배다.
[7]
이 때 계약금으로 엔터프라이즈 1대를 구매했다.
[8]
트레이드된 당해에 MVP를 수상한 것은 KBO 사상 최초다.
[9]
한화 이글스는
LG 트윈스 선수 영입을 엄청나게 했지만 2014년까지 성과가 처참한 수준이다. 예를 들면
추승우,
김재현(투수),
김준호,
이학준,
김광수,
송신영. 추승우, 김재현은 반대 급부는 전혀 없이 영입한 것이어서 성과 운운하기에는 좀 어려움이 있기는 했고 강철민도 마찬가지였다.
[10]
보통 코칭스태프들은 70번대 이상의 번호를 많이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