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8 01:19:31

황남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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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릉
황남대총

皇南大塚
파일:Daerungwon_-_Hwangnam_Daechong.jpg
조성형태 돌무지덧널무덤
남분 피장자 내물 마립간 (추정)
실성 마립간 (추정)
눌지 마립간 (추정)
북분 피장자 보반부인 (추정)
아류부인 (추정)
차로부인 (추정)
자비 마립간 (추정)
조성시기 신라 5세기
홈페이지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external/blog.joins.com/53a61a3ea36b7.jpg
대릉원 내에서 황남대총의 위치
파일:황남대총 북분 금관2.jpg
황남대총 북분 금관
파일:황남대총 피장자.jpg
특수효과로 복원한 황남대총 피장자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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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州 大陵園 一圓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노동동 261 등
분류 유적건조물/무덤/고분군
면적 602,314㎡
지정연도 2011년 7월 28일
건축시기 신라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유네스코 세계유산
<colbgcolor=#000> 경주역사유적지구
Gyeongju Historic Areas
Zones historiques de Gyeongju
<colcolor=#fff> 국가·위치 <colbgcolor=#fff,#1f2023>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경상북도 경주시
등재유형 문화유산
지정번호 976
등재연도 2000년
등재기준 (ii)[1], (iii)[2] }}}

1. 개요2. 구조와 내용3. 발굴 과정4. 나무위키에 항목이 생성된 주요 출토 유물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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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www.heritage.go.kr/contn_img_PER030108_01.jpg
皇南大塚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 대릉원에 위치한 대형무덤.

대릉원 내 고분들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다. 남분과 북분을 합치면 120m에 달한다. 단, 높이는 가장 높지는 않다. 경주시에서 가장 높은 무덤은 노동동에 있는 봉황대다. 다만 이쪽은 아직까지 발굴된 적이 없어서인지 황남대총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편이다.

황남대총은 남분과 북분 두 무덤을 연결한 쌍릉이다. 피장자가 정확히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은데, 남분에 묻힌 남성을 보통은 5세기 내물왕, 실성왕, 눌지왕 정도로 추정하지만 왕이 아니라는 설도 있어서 확실하진 않다. 그나마 황남대총 남분의 연대가 5세기 중엽, 즉 삼국사기 기록상 눌지왕의 사망년도인 458년과 일치해 눌지왕릉설이 다수설로 인정받고 있다. 만약 남분이 눌지왕이라면 여성이 묻힌 북분의 주인은 차로부인이고 실성왕일 경우 북분의 주인은 아류부인, 내물왕일 경우는 북분의 주인이 보반부인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러나 황남대총이 부부의 무덤이 아니라 선후왕의 무덤으로 남분의 피장자는 눌지 마립간, 북분의 피장자는 왕비가 아닌 자비 마립간이라는 주장도 있다. # # 다만 해당 기사에도 적혀있지만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 등 학계 중진들은 이러한 견해에 대해 그동안 신라의 대형 표형분에 대한 기존 연구의 맥락을 싸그리 무시하고, 세부 유물의 연대도 곡해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고고학적 비정에 관한 내용은 신라왕릉 문서 참조.

금관도 출토되어 천마총과 함께 아직은 신라고분들 중 인지도가 가장 높은 편이다.

황남대총은 사적 제512호인 '경주 대릉원 일원'에 포함되어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2. 구조와 내용

비슷한 시기에 축조한 신라 고분들처럼 돌무지덧널무덤이다. 대릉원에 있는 고분들의 봉문과 달리 황남대총은 봉분이 표주박 누군가는 엉덩이라고도 한다 모양이라는 특징도 있다. 쌍릉인데 남분이 먼저, 북분이 나중에 축조되었다. 그리하여 발굴할 때에는 '유적이 겹칠 경우 나중 것을 먼저 발굴한다.'는 원칙에 따라 북분부터 발굴하였다.

파일:황남대총 북분 출토 가락바퀴, 굵은고리귀고리.jpg
북분에서 발굴된 여성용 채화 가락바퀴. 사진 출처: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 ‘줄서는 왕릉뷰’ 포토존…신라 쌍무덤 ‘금관 왕비, 금동관 왕’의 정체

1973년 북분에선 금관이, 남분에선 그보다 한 등급 낮은 금동관 은제 관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금관이 나온 북분에서 금제 허리띠도 발굴되었는데, 여기에 부인대(夫人帶)라는 명문이 있어서 큰 파장이 있었다. 금관이 나왔으므로 처음에는 피장자가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아예 부인대라고 쓰인 명문까지 나왔으니 여자 아니냐는 것이었다. 이외에도 북분에 묻힌 피장자가 여성이라는 다양한 정황증거가 나왔는데 특히 가장 주요한 증거로 북분에서 기하학 무늬를 새긴 채화 가락바퀴(실을 뽑는 도구)가 여럿 발굴되었다는 점이었다. 이는 대표적인 여성 지표 유물로 발굴이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오직 여성용 무덤에서만 발굴되었고 남성용 무덤에서는 전혀 발굴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해당 유물 자체가 당대에 여성들만 사용하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동안 고고학계에서는 수십년 간의 발굴을 통해 여성 무덤에서는 '굵은고리 귀고리'가 남성 무덤에서는 '가는고리 귀고리'가 부장된다는 점을 확인했는데(예: 남성( 금령총 금제 가는고리 귀걸이, 여성( 서봉총 금귀걸이)) 북분에서 발굴된 금귀걸이가 모두 '굵은고리 귀고리'이고 이후 남분에서 나온 귀고리가 '가는고리 귀고리'임도 확인하였다. 마지막으로 신라시대 여성용 무덤에서는 '은장도'가 남성용 무덤에서는 '환두대도'가 출토되는데, 금관이 나온 북분에서 은장도 형태의 여성용 작은 장식손칼이 2점, 남분에서는 환두대도형 큰 칼이 10점 출토되었다. # 이러한 모든 유물 증거는 북분에 묻힌 피장자가 여성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파일:서봉총 설명.png
관모가 남성만의 전유물임을 설명하는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 교수 출처: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북분에서 관모가 전혀 출토되지 않은 것도 의문을 키웠다. 당시 남성들은 상투를 튼 위에 조우관 등의 다양한 관모를 썼는데, 당연하겠지만 상투는 성인 남성들의 예식 문화였기에 남성이 묻힌 무덤에서만 관모가 출토된다. 실제로 신라왕릉 중 성인 남성이 피장된 무덤인 금관총( 금관총 관모), 천마총( 천마총 관모)에서는 관모가 출토되었지만, 여성용 무덤인 서봉총과 아직 상투를 안 튼 10세 미만의 어린 남자아이 무덤인 금령총에서는 관모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황남대총 발굴 결과 남분에서는 은제 관모 금제 관모 장식이 발견되었으나 북분에서는 서봉총, 금령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관모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오랜 세월에 삭아 없어진 것 아니냐고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애초에 부장용은 금이나 은으로 만드는 데다, 관모는 금관 그리고 관식과 공반 유물인지라 금관까지 아예 안 나왔다면 모를까 금관이 나왔는데 관모만 없어졌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이 역시 북분의 주인이 여성이였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파일:황남대총 허리띠 금장도.png 파일:황남대총 허리띠 금장도2.png
사진 출처: 경향신문 - 은장도와 큰 칼을 함께 찬 1500년 전 무덤 주인공…백제왕의 총애를 받은 그 누구?

그 외에 소소한 차이점으로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허리띠의 패용 방식 역시 성별에 맞춰 남분에서 출토된 금제 허리띠 북분에서 출토된 금제 허리띠가 서로 달랐으며, 특히 북분의 허리띠에 달린 금제 띠꾸미개 중 하나가 여성용 은장도 형태인 것도 주목을 받았다. 고고학계에서는 고분에서 은장도가 나오면 피장자의 성별이 여성인 것으로 보통 판단하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폐기된 가설이지만, 황남대총 발굴 초기엔 남분과 달리 북분에서 승마용구가 전혀 나오지 않은 것도 북분의 피장자가 여성이라는 증거로 여겨지곤 했다. 남분이 비록 금관은 나오지 않았으나 대신 황남대총 비단벌레 장식 금동 말안장 뒷가리개 황남대총 비단벌레 장식 금동 말띠드리개, 황남대총 비단벌레 장식 금동 발걸이 등 온갖 화려한 황금 승마용구들이 잔뜩 튀어 나왔는데, 반면 위세가 더 높은 북분에서는 이러한 것이 전혀 나오지 않아 조선시대 유교적인 입장에서 여성의 승마가 엄금되었던 역사적 고정관념으로 인해 '위세가 낮은 남분에서도 잔뜩 나온 승마용구가 북분에서는 전혀 안 나왔으니 이는 북분의 피장자가 말을 타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럼 여성이다'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상기한 대로 지금은 완전 파기된 설로, 황남대총 발굴 이후 황남동 1호분이나 쪽샘 44호분 등 수많은 여성 무덤에서 바둑이나 승마도구 등 기존에 남성 전용이라 여겼던 다양한 유구들이 출토되면서 이제는 이를 근거로 피장자가 여성이라고 말하는 학자는 없다. 즉 현재 학계의 공식 입장은 조선시대 때와는 달리 신라 여성들은 남자랑 같이 바둑도 두러 다니고, 바깥에서 말을 타고 질주하기도 하고, 장사치 역할도 해보고, 자위도 마구 하고 다녔다는 쪽이며, 그냥 북분의 여성이 승마가 취미가 아니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에 북분 발굴을 정리하고 1975년에 남분을 발굴하였을 때에는 특히나 더욱 금관의 유무에 학자들이나 언론들도 주목하였다. 쌍릉이므로 부부묘라고 생각하는데, 여자가 묻힌 북분에서 금관이 나왔다면 남자가 묻혔을 남분에서도 반드시 금관이 나오리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남분에서는 은제 무구와 (금관보다 격이 낮은) 금동관, 그리고 은관이 나왔을 뿐 금관은 출토되지 않았다. 남분에서 피장자의 유해 일부가 나와 검사하니 60대 남자라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에, 이쪽이 남자임도 의심하기 어려웠다. 이런 이유로 피장자가 누구인지 미궁에 빠졌다. 신라 초기에 종종 있었던 사위 계승 때문에, 아내 쪽이 남편보다 신분이 더 높아서 북분의 여성은 금관, 남분의 남성은 금동관을 쓰지 않았겠느냐는 설도 있다. 예를 들면 흘해 이사금에게 아들이 없어 미추왕의 사위 내물 마립간이 왕위를 이었다. 그런데 남분의 주인으로 유력시되는 눌지 마립간은 왕비의 아버지인 실성 마립간을 죽이고 왕이 되었기에 사위계승이긴 하지만 왕비보다 신분이 낮다기엔 애매하다.

아무튼 금관에 금동관이 나왔으며 보기 드물게 큰 무덤이므로, 왕릉이거나 왕에 준하는 고위귀족의 무덤이라고 추정한다. 서구권 학자들은 피장자가 여왕과 그 남편이라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세라 넬슨 교수는 황남대총의 축조 시기에 기록된 신라 여왕이 없다는 점을 들어 Ruling King이었겠지만 정확히 누구였는지는 특정할 수 없다고 했다.
파일:황남대총 출토 부장품.png
황남대총 출토 부장품 가운데 도기 및 제기, 철기의 일부.
국립경주박물관 전시실 하나를 채울 정도로 양이 엄청나다.

황남대총에서는 금관 외에도 유물이 무려 5만 8천 점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에는 서역에서 수입된 것으로 보이는 로만글라스 스타일 유리병도 있었다. 이중에는 손잡이 부분을 청금석으로 염색한 봉수형 유리병도 있는데, 부러진 손잡이를 수리하지 못하자 금실을 감아서 땜빵을 해놓았다.

비단벌레 날개로 장식한 금동 말안장은 그 화려함에 모두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15세쯤으로 보이는 여자아이의 유골도 나와 지증왕 3년(502)에 금지된 순장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즉, 502년 전에 만들어진 무덤이라고 대략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

황남대총 남분에서는 바둑돌로 추정되는 자갈돌이 대거 나왔다. 자갈돌 유물을 실제로 보면 검은색과 흰색이 잘 구분되지 않는 자연석이라서 바둑돌처럼 보이지 않는다. 신라고고학을 전공한 이은석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해양유물연구과장은 원래는 흑백으로 칠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며 고분 내 환경적 요인으로 칠이 벗겨졌거나 발굴 이후 세척 과정에서 칠이 지워졌다고 주장했다.

같이 출토된, 바둑돌을 담았던 그릇으로 추정되는 중국산 칠기에는 3~4세기 중국 서진시대의 바둑고수로 '기성(棋聖)' 칭호를 받았던 마랑(馬朗)의 이름이 쓰여있다. # 바둑용품이 황남대총에 부장품으로 묻힌 것을 볼 때 황남대총 남분의 주인공도 생전에 바둑을 좋아했던 듯하다. 여성으로 추정되는 황남대총 북분에서는 바둑용품이 출토되지 않았다. 당시 바둑이 남자의 전유물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이미 상대 신라에도 백제처럼 바둑이 이미 보급되었음이 확실해졌다.

3. 발굴 과정

<colbgcolor=#315288> 대한뉴스에 방영된 발굴 당시 모습
황남대총 남분 발굴 당시를 촬영한 1977년 제작 영상.

1970년대 초 도굴되지 않은 무령왕릉의 우연한 발견 이후, 박정희 정권은 고분 조사, 그리고 새로운 국보급 유물이 홍보 효과도 크고 민족주의 교육 수단으로 유용함에 주목했다. 그리고 황남대총 발굴조사는 경주관광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황남대총 발굴은 졸속으로 치러져 아직까지도 고고학계의 흑역사로 남아있는 무령왕릉 발굴을 반면교사로 삼아 좀 더 계획적으로 진행되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중요 유물이 나오는 성과를 얻기 위해 경주시는 물론 국내를 통틀어 가장 큰 고대 무덤인 98호분을 발굴하라 지시하였다. 하지만 고고학계는 신라 대형고분을 한국인 학자들이 발굴조사한 것은 일본인 학자 아리미츠 쿄이치(有光敎一 1907~2010)의 협조를 받아 발굴한 호우총과 은령총 정도뿐이었고, 직전인 1971년에 백제 무령왕릉을 터무니없이 졸속으로 발굴한 후유증 때문에 또다시 대형고분을 발굴하기를 주저하였다. 그리고 황남대총 발굴 당시 경주 김씨, 박씨, 석씨 문중의 반대도 있었다. #[3]

그러나 당시 대통령의 의지가 워낙 강하였고, 시대가 시대였던지라[4] 권력자의 독촉을 거스를 수 없었기 때문에 비록 학술적으로는 무모하지만 대형분을 발굴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일단 황남대총 대신 고고학계의 발굴 역량을 시험하고 기르자는 의미로 그 옆에 있는, 98호분보다 훨씬 작고 바로 옆에 있어 시대나 무덤양식이 비슷하리라 추정되하던 155호분으로 먼저 경험을 쌓아보자고 제안하였다.

이 155분은 1973년 4월부터 8월까지 발굴하였다. 상대적으로 작은 무덤이었으므로 고고학계는 별다른 중요 유물이 나오지 않으리라 예상한 듯하지만, 1973년 7월에는 금관이, 8월에는 자작나무에 하늘을 날아 오르는 듯한 말을 채색한 그림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대성공에 힘입어 아직 155호분 발굴을 마무리 짓지도 않은 동년 7월에 98호분도 발굴 작업을 시작하였다. 155호분이 오늘날의 천마총이고 98호분이 황남대총이다.

1974년 10월, 천마총처럼 황남대총 북분에서도 금관이 나왔지만, 이때는 육영수가 8.15 행사 때 저격당해 목숨을 잃은 지 두 달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금관이 나왔다고 대통령실에서 마냥 좋아라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다음해 7월엔 박 대통령 본인이 직접 황남대총 남분을 방문했다. 허나 북분과 달리 남분에선 금관이 안 나와 실망했으며 대통령은 한 번 더 주변의 무덤을 발굴하여 금관을 찾도록 발굴단장에게 지시했다고 한다. 이에 김정기 단장은 "미추왕릉 앞의 규모가 작은 고분을 고려해 보겠다."라고 했지만 실제 시행되진 않았다. 10·26 이후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면서 정권이 반강제로 밀던 발굴 작업도 흐지부지되었다.

4. 나무위키에 항목이 생성된 주요 출토 유물

5. 기타

황남대총도 원래는 천마총처럼 무덤 내부에 따로 시설을 만들 계획이 있었지만 취소하고 지금처럼 보존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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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들어선 황남대총의 뒷쪽, 정확하게는 황남대총 동쪽 포인트가 대릉원에서 인기 있는 사진 찍는 장소로 유명해졌다. 원래는 역사 유적 전문 사진작가의 작품으로서 그 구도 가 알려졌는데, 이후 신라 고고학과 관련된 연구 저서의 표지에도 같은 앵글에 밤에 찍은 사진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러고 한참 후 SNS를 통해서 사진 찍는 포인트로 유명해져 지금은 줄 서면서까지 찍는 포인트가 되었다.

황남대총이 유명하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이 황남대총을 경주 지역에서 가장 큰 고분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대릉원 지구 내에서도 황남대총보다 큰 봉황대가 있고, 외곽 지역에도 서악동 고분군, 금척리 고분군 등 다양한 유적지에 황남대총과 크기가 비슷한 왕릉들이 꽤 있다. 다만 이중에서 현재까지 발굴한 곳이 황남대총 하나뿐이라 다른 곳은 듣보잡화(...) 되어서 그런 점도 있다. 황남대총도 4공 시절 국가 규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지 못했다면 발굴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돌무지덧널무덤 특성상 컨베이어 벨트까지 동원해서 봉분을 통째로 다 들어내야 하기 때문. 물론 고고학 기술이 발달한 지금은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면 파볼 순 있을 것이다.


[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3] 천마총을 발굴할 때는 경주 김씨 문중에서 "왜 하필 미추왕릉 부근의 무덤을 파느냐"고 항의했다면 황남대총 발굴할 때는 경주 김씨뿐 아니라 박, 석, 김씨의 합동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문화재 발굴도 좋지만 조상의 뼈와 얼을 지키기 위해서도 왕릉을 마구 파헤치는 것을 후손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4] 당시 박정희 정권은 유신독재로 나아가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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