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5:08:34

찰디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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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디란 전투
시기 1514년 8월 23일
장소 이란 서아제르바이잔 주 찰도란 군 일대
원인 오스만 제국 사파비 왕조의 갈등관계
교전국 [[틀:깃발|]][[틀:깃발|]][[오스만 제국|]] [[틀:깃발|]][[틀:깃발|]][[사파비 제국|]]
지휘관 셀림 1세
헤르제키 아흐메트 파샤
하듬 시난 파샤
무스타파 파샤
제이넬 파샤
하산 파샤†
이스마일 1세
무함마드 칸 우스타즐루
누르 알리 칼리파
두르미쉬 칸 샴루
사루 피라 우스타즐루†
후사인 베그 샴루†
압드 알 바크 야즈드†
병력 약 60,000~100,000 명 약 12,000~80,000 명
피해 약 2,000 명 약 5,000 명
결과 오스만 제국의 승리.
영향 사파비 왕조, 이란 민족의 정체성 형성.

1. 개요2. 배경3. 양국의 준비4. 양국의 격돌
4.1. 전투전야4.2. 격돌
5. 결과6. 영향

[clearfix]

1. 개요

찰디란 전투란 1514년 현재 이란 북서부 서아제르바이잔 주에 위치한 찰도란(Chaldoran)[1]에서 오스만 제국 사파비 왕조 페르시아가 격돌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오스만 제국은 사파비 왕조의 서진을 저지하고 역으로 서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 일대로의 동진을 시작하였으며 이후 수백 년 동안 이어지게 될 오스만-페르시아 전쟁의 시작을 알린 사건이다.

파일:external/m2.i.pbase.com/153409292.6JpGLUTF.jpg

2. 배경

시아파 신비주의 교단인 사파비야의 지도자였던 이스마일 1세는 사파비야 소속 튀르크계 기마집단인 키질바시의 지지를 받아 거병하였고 불과 몇 년 사이에 이란 전역을 차지하고 있던 백양 왕조를 멸망시키고, 티무르 제국을 멸망시킨 부하라 칸국까지 격파하며 메소포타미아부터 호라산에 이르는 사파비 제국을 건설하였다. 불과 20대의 아주 젊은 나이에 대제국을 건설하며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시아파 성지들까지 장악한 이스마일은 자신을 시아파의 성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화신으로 선전하며 전 중동의 시아파를 자신의 아래에 결집시켰다.

문제는 이 사파비 제국이 현대 이란처럼 전 중동을 통합한 시아파 제국을 세우려고 했는데 이것이 서쪽에서 한참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오스만 제국과의 격돌을 의미한 것이다. 사파비 제국이 세력을 확장하자 시아파가 많이 거주하던 오스만 제국령 동아나톨리아 일대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중앙집권주의에 반대하는 친사파비 시아파 튀르크, 쿠르드 유목부족들의 반오스만 움직임이 크게 팽배해지고 있었다. 이미 셀림 1세의 부황 바예지트 2세 당시 2차례의 투르크족 시아파의 대반란이 동아나톨리아에서 폭발하였다.[2] 당시 오스만 제국의 술탄으로 즉위한 셀림 1세는 즉위 이전 동아나톨리아의 트라브존 총독으로 있으면서 시아파 반란을 진압한 전적이 있는데다 개인적으로 시아파를 무척 혐오하였기 때문에 제국 동부의 시아파를 후원하는 사파비 왕조를 제국에 대한 위협으로 여겼다. 게다가 이스마일이 오스만 제국의 적국인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와 손을 잡고 오스만을 견제하려 시도하고 셀림 1세의 왕위 계승 과정에서 그의 조카를 지원하는 등 계속 문제를 일으키자 그는 사파비를 먼저 격멸하여 후환을 처리하고자 하였다.

3. 양국의 준비

3.1. 오스만 제국

먼저 셀림 1세는 황형 아흐메트를 비롯해 자신에게 반기를 든 조카 무라트를 포함하여 자신의 모든 형제[3]를 2년에 걸쳐서 숙청한다. 그 다음 이슬람 카디[4]랑 무프티[5]에게서 이단인 시아파를 정벌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라는 파트와[6]를 받아냈다. 또한 이스마일이 무라트의 반란을 지원한 것에 경고로 이전부터 제국 내에서 분란을 일으키던 시아파 키질바시 4만여 명을 대거 학살하거나 추방한다. 이에 이스마일이 셀림을 비난하는 내용의 서신을 보내자 똑같이 이스마일을 비난하는 내용의 서신을 보내면서 서로를 비난하는 비방전을 펼친다. 마지막으로 유럽에 대한 공세를 중단함과 동시에 평화협정을 맺음으로써 전선을 한 곳으로 집중한다. 그리고 1514년이 되자 오스만과 페르시아 사이의 무역을 전면 중단하였다.

3.2. 사파비 왕조

여기까지 온 이상 어떤 사람이라도 오스만 제국이 사파비에 쳐들어올 것이라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사파비 왕조의 상황은 최악이었는데, 하필 이 시기에 우즈베크인들이 제국의 동방을 침공한 것이다.샌드위치 자칫하면 양면전을 수행하게 될 상황에서 이스마일 1세는 제국의 서부를 초토화 하여 오스만의 군대가 일체 보급을 받을 수 없도록 하였다.[7]

4. 양국의 격돌

4.1. 전투전야

사실 비록 사파비 왕조가 우즈베크의 침공 때문에 제대로 전력을 투사하기 어려웠다지만, 셀림 1세의 오스만이라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당장 이스마일 1세의 초토화 작전에 동부 아나톨리아와 코카서스 지방의 척박한 지형은 행군하는 군대들의 신경질을 돋구기에는 차고도 넘쳤다. 게다가 시아파라지만 그래도 무슬림이었기에 굳이 이들과 싸워야 되느냐는 불만 역시 팽배하였다.

이게 어느 정도까지 올라갔냐면 예니체리 중 한 명은 불만을 표출하기 위해 황제인 셀림이 머무는 천막에 공포탄총을 발사할 지경이었다! 이 와중에 이스마일의 군대가 찰디란에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자마자 셀림은 속전속결을 위해 전장으로 이동한다.

오스만군이 전장에 도착한 때는 8월 23일. 이미 전장에 도착해 있던 사파비군은 대응방안에 대해서 정면충돌한다. 무함마드 칸 우스타즐루와 누르 알리 칼리파는 오스만군의 전술에 능통한 인물이었기에 지금 바로 오스만군을 공격해야 한다고 간언하였지만, 키질바시 중 한 명이었던 두르미쉬 칸 샴루는 '무함마드 칸 우스타즐루는 자신의 영지에만 관심이 있는 자'라고 하면서 대놓고 모욕하였다. 여기에 이스마일 1세 역시 정정당당한 무슬림 기사도를 자부하며 한 마디 거들었다.[8]
그리고 이게 얼마나 거대한 실책이었는지 이스마일 1세는 바로 다음 날, 온 몸으로 겪게 된다.

4.2. 격돌

오스만 제국은 사파비 왕조의 기병돌격에 대비해서 예니체리와 대포를 수레로 만든 장벽 뒤에 배치하였다. 사파비 왕조의 기병대는 적의 포격을 회피하기 위해 양익으로 배치되어 오스만 진영을 돌파하려 시도하였으나 오스만군의 포격으로 큰 피해를 입는다. 물론 당시 전투에서 포격을 퍼부어도 사파비군의 돌격을 완전히 막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오스만군도 사파비군과 치열하게 싸우고 상당한 사상자가 발생해서 힘들게 이겼다.[9] 특히 이때 사파비군이 오스만군의 포격을 넘어와 공격하면서 오스만군은 사파비군과 치열하게 싸웠는데 이를 막던 오스만 측 지휘관이었던 루멜리 베일리베이 하산 파샤가 전사하며 사상자가 2천명이 나오는 등 혈전이 벌어졌을 정도였다. 그러나 사파비의 돌파 시도는 실패로 끝나버리고 도리어 군이 괴멸되어 지휘관 여럿이 전사하는 상황까지 몰린다. 결국 전선에서 직접 나서서 지휘하던 사파비 황제인 이스마일까지 팔에 부상을 당하고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에 이르렀고 그 시점에서 전투는 사파비의 참패로 끝났다.

5. 결과

찰디란 전투로 시르반샤, 백양조, 우즈벡 샤이바니 조를 패배시키고 승승장구하며 중동 전역을 시아파로 정복할 기세였던 사파비 왕조의 기세는 완전히 꺾여버렸다. 영토 손실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오스만 군은 사파비의 수도 타브리즈까지 함락시키고 셀림 1세는 내친김에 페르시아 전체를 정복하고자 하였으나 보급선이 지나치게 길어지고 예니체리들이 불만을 품자 친시아파 반란을 우려하여 얼마 안 가서 본국으로 철수한 것이다.[10] 그러나 이 전투로 사파비는 오스만을 전면전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특히 반오스만 친사파비를 표방하던 동아나톨리아, 메소포타미아의 친시아파 투르크, 쿠르드족은 찰디란 전투 직후 오스만 제국에게 확실히 제압되고 사파비 왕조는 동아나톨리아, 메소포타미아를 잃게 된다.[11]

사파비 왕조는 어디까지나 이스마일 1세 개인의 카리스마로 유지되던 국가였는데 이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에게 대패하고 수도까지 함락당하는 굴욕을 겪으면서 팽창기가 끝나버리고 샤의 권위가 무너져 내린 것이다. 특히 타브리즈가 함락되면서 타브리즈의 주민들이 전부 오스만군에 의해 오스만 영토로 끌려갔으며 이스마일 1세의 왕비 2명과 하렘의 첩들도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12] 자신이 전 이슬람의 정당한 군주이자 알리의 화신으로까지 믿던 이스마일 1세는 찰디란에서의 패배 직후 커다란 충격을 받아 검은 옷만 입고 한번도 웃지 않았으며 심지어 국정을 팽개치고 술에만 빠져 살다가 사망해 버린다. 이 때를 기점으로 해서 아바스 1세의 등장 이전까지 사파비 제국은 건국세력이자 실세인 키질바시들의 전횡으로 큰 혼란을 겪게 되었다.

반면 은근슬쩍 사파비가 이기길 바라던 맘루크 왕조는 같은 수니파인 오스만이 시아파인 사파비에게 승리를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오스만에게 승리 축전을 보내는 것을 거부하고 오스만의 승리를 기념하는 것도 금지했다. 셀림은 사파비를 겨누던 그 칼끝을 곧바로 맘루크 왕조 쪽으로 돌렸고 2년 후인 1516년 대대적으로 맘루크 왕조를 침공한다.

6. 영향

또한 사파비 왕조의 성격도 찰디란 전투를 기점으로 변화하게 되는데 찰디란 전투 이전 사파비 왕조는 비록 이스마일 1세가 스스로가 페르시아인[13]으로써 이란을 부활시킨 제국이라 선언했으나 그 본질은 사파비 이전 몽골- 왕조들처럼 여전히 타브리즈, 술타니야 아제르바이잔을 기반으로 한 키질바시 투르크족의 지지를 토대로 이루어진 튀르크인 중심의 왕조였다. 하지만 찰디란 전투에서 사파비 왕조가 패배하자 동아나톨리아와 메소포타미아의 튀르크족이 오스만에 복속되고 아제르바이잔이 대오스만 전선의 전방이 되면서 사파비 왕조는 이란 내륙의 카즈빈, 이스파한으로 천도하여 이란 민족의 비중이 높아지게 된다. 찰디란 전투 이후 사파비 왕조는 이란 민족 중심의 국가가 되었다. 즉 현재의 이란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규정한 데 찰디란 전투는 상당한 역할을 한 것.

반대로 오스만 제국은 이 전투에서 동방 최대의 적수를 꺾어버리면서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승전 이후 오스만 제국은 이집트로 남진하여 맘루크 왕조까지 무너뜨리고 중동의 절반을 접수하였으며 셀림 1세는 칼리프의 자리에 오르면서 자신감을 한껏 드러내었다. 그리고 그러한 기세는 곧 사방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한다. 반면에 사파비 왕조는 아바스 1세의 중흥기 이전까지 오스만의 공세를 막아내며 영토 유지에만 급급한 신세가 된다.

전쟁사에서도 찰디란 전투는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이전까지 무적이라 평가받던 유목민의 기병이 화약무기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면서 본격적으로 전쟁의 패러다임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오스만의 화약무기에 뜨거운 맛을 본 사파비 왕조는 이스마일 사후 타흐마스프 1세 대부터 본격적으로 화약무기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패러다임 변화는 11년 후 유럽에서도 재현되며 화약의 시대를 본격적으로 가져오게 된다.


[1] 튀르키예어로는 çaldıran이며, i(이)가 아닌 점이 빠진 ı(으)이다. 때문에 본래는 '찰드란'이 맞지만 잘못된 발음인 찰디란이 알려져 있어서 그대로 유지한다. 동네 이름이 좀 기이한데, '훔치게 하는'이라는 뜻으로, 심지어 아제리어로 읽으면 '범하게 하는'이라는 므흣한 의미가 되어버린다. [2] 재상까지 친히 출정하여 진압해야 할 정도의 시아파 대봉기였다. [3] 셀림 1세는 심지어 부황 바예지트 2세도 살해했다는 의혹이 있다. 황위를 계승하는 중입니다 [4] 이슬람 법관 [5] 이슬람 율법학자 [6] 이슬람의 율법적 판결문 [7] 사실 이게 오스만이 찰디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사파비의 수도를 함락시켰음에도 사파비를 멸망시키는데 실패한 큰 이유다. [8] 아랍인들이 원래 유목민족으로서 기마 문화가 일상에 뿌리 깊게 박혀 있었고, 오랫동안 프랑크족 십자군과 오랫동안 싸우면서 군사문화적 교류도 활발했다 보니 문화적, 문학적 전통이자 계급적 코드로서 기사도는 중동 이슬람권에서도 아랍어로 푸트와(فتوة)라 부르며 존재하는 개념이었고, 약자에 대한 보호, 상무의식, 신실함 but 종교가 다르더라도 가치 있는 적에 대한 경의 같은 측면 또한 서방의 기사도 문화와 공유했다. [9] 16세기의 대포들은 명중률이 떨어지고 발사 속도가 느린 데다가, 지금처럼 물체에 맞으면 폭발하는 작렬탄도 아니고 그저 화약의 힘으로 돌이나 금속으로 만든 포탄을 멀리 날려보내는 것에 불과해서 적에게 그리 큰 타격을 주기가 어려웠다. [10] 사실 전근대에는 기술력의 한계로 장거리 보급을 시킨다는 것이 힘들었다. 그러다보니 전근대의 많은 제국들이 영토 확장에 나서도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11] 후일 사파비 왕조를 중흥시킨 아바스 1세 재위 때 동아나톨리아랑 메소포타미아를 탈환하지만 다시 오스만에 뺏기고 결국 상실된 영토는 현대의 터키, 이라크에 이어지게 된다. [12] 이스마일은 막대한 선물을 물론이요 셀림을 찬양하는 온갖 미사여구까지 갖다붙히며 제발 아내들을 돌려달라고 애원했으나 셀림은 이를 비웃듯 사신단의 코를 잘라 돌려보냈다. [13] 후대의 연구 결과 이스마일 1세는 튀르크족 혹은 튀르크어를 쓰는 쿠르드족 출신으로 밝혀졌다(…).이놈이 약을 팔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