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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 라틴어: Quintus Caecilius Metellus Pius |
|
생몰년도 | 기원전 129(또는 128)년 ~ 기원전 63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칭호 | 피우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칼부스(조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아버지)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달마티쿠스(삼촌) 카이킬리아 메텔라 달마티카(사촌) 술라의 아내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사촌)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장인) 리키니아 세쿤다(아내)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 스키피오 나시카(양자) 코르넬리아 메텔라(손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손녀사위) |
참전 |
유구르타 전쟁 동맹시 전쟁 술라의 내전 세르토리우스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폰티펙스 막시무스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80년 |
전임 |
마르쿠스 툴리우스 데쿨라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
동기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
후임 |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이사우리쿠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
로마 공화정 최고 사제 | |
임기 | 기원전 81년 ~ 기원전 63년 |
전임 |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
후임 |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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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로마 공화정의 정치가이자 장군이다.메텔루스 피우스는 기원전 109년에 집정관에 선출된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의 아들로 아버지를 따라 유구르타 전쟁에 참전한 것으로 군 경력을 시작했고 동맹시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두 번째 로마 진군에서 그의 중요한 동맹으로 참전하여 술라 정권의 2인자가 되었으며 최고 제사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집정관 역임 이후 세르토리우스 전쟁을 위해 스페인으로 파견되어 초반에는 고전했으나 폼페이우스와 함께 세르토리우스를 몰아넣는 데 성공했다. 귀국 후에는 폼페이우스와 루쿨루스가 정치적 견제와 경계를 주고받는 가운데 유유히 말년을 보내다 사망했다.
2. 생애
메텔루스 가문은 기원전 123년부터 109년까지 집정관을 6명이나 배출했을 정도로 공화정 후기를 대표하는 명문 귀족 가문이었다. 피우스의 아버지인 메텔루스 누미디쿠스는 그 세대의 메텔루스 집정관들 중 가장 어리고 집안 서열이 낮으면서도 능력적으로는 가장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었다. 그는 연설 능력과 청렴함으로 이름이 높았지만 귀족적인 성품으로 야심 넘치는 평민 출신의 부하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갈등을 빚어, 이후 마리우스에 반대하는 원로원 옵티마테스파의 수장격이 되었다. William Smith의 『A Dictionary of Greek and Roman Antiquities』에서는, 키케로의 서술을 바탕으로 하여 메텔루스 누미디쿠스가 '로마의 알키비아데스'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웅변 솜씨로 유명했다고도 주장한다.유구르타 전쟁을 지휘했던 집정관 메텔루스 누미디쿠스는 아들 피우스를 전쟁에 데려갔다. 이 때 누미디쿠스는 투르필리우스의 처형 문제로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불화가 생겼고, 마리우스가 집정관 출마를 위해 귀국을 요구하자 자신의 어린 아들 피우스가 집정관 후보가 될 때까지 기다리라며 마리우스를 조소하였다.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의 『유구르타 전기』는 이때 메텔루스 피우스의 나이가 20세였다고 말하며, 메텔루스 누미디쿠스의 지휘권을 바탕으로 가늠할 때 메텔루스 피우스는 기원전 129년~기원전 128년 사이에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마리우스는 이에 거짓 소문을 퍼뜨려 로마에서의 누미디쿠스의 여론을 악화시켰고, 결국 집정관에 선출된 마리우스가 유구르타 전쟁을 지휘하게 되자 피우스는 아버지 누미디쿠스와 함께 귀국하였다. 마리우스는 휘하 호민관 사투르니누스를 움직여 누미디쿠스를 로마에서 추방시켰지만 피우스는 아버지를 로마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열성을 다해 노력했고 이로 인해 '피우스'라는 별칭을 얻었다. 브로턴의 서술에 따르면 당시 호민관이었던 퀸투스 칼리디우스 (혹은 칼리두스라고도 함)가 기원전 99년 메텔루스 누미디쿠스의 귀환을 승인하였고, 따라 메텔루스 누미디쿠스는 로마로 돌아오게 된다.
동맹시 전쟁이 발발하자 기원전 89년도 집정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의 군단장으로 참전했다. 이때 마르시족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공적으로 이듬해인 기원전 89년에 법무관으로 선출되었다. 브렌넌과 브로턴의 서술에 기반한다면 기원전 88년에 법무관직을 역임했으나, 『키케로의 시인 아르키아스를 위한 변론』에는 기원전 89년에 법무관을 역임하였다고 서술되어 있으며 60일 이내에 무기를 내려놓은 이탈리아인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플라우티우스-파피리우스 법을 집행한 것을 보아 기원전 89년에 법무관을 역임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기원전 88년에 마르시족의 지도자인 퀸투스 폼파이디우스 실로를 격퇴하면서 기원전 87년에 전직 법무관 권한으로 삼니움족을 상대하게 될 예정이었으나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가 술라에 의해 북아프리카로 추방된 마리우스를 불러들이자 삼니움족과 평화 협정을 맺고 북아프리카로 피신한다.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는 메텔루스 피우스가 이 당시 집정관이었던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 대신 군대 지휘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거절했다고도 서술했다.
그 해에 마리우스의 장교였던 퀸투스 세르토리우스가 히스파니아에서 민중파를 규합하자 메텔루스 피우스는 기원전 79년에 히스파니아로 파견되어 세르토리우스 전쟁을 지휘하게 된다. 하지만 히스파니아의 총독인 마르쿠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혹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와 메텔루스 휘하의 군단장 루키우스 토리우스 발부스가 세르토리우스에게 전사하고, 독재관이 되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외삼촌 가이우스 코타 역시 세르토리우스의 재무관 퀸투스 히르툴레이우스에게 패배하며 불리한 형세를 보인다. 기선이 꺾인 메텔루스는 세르토리우스의 게릴라 전술에 고전을 면치 못했으나, 치명적인 손실을 피하며 전쟁을 접전으로 이어나가는 수완을 보였다.
에트루리아에서 집정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반란을 진압한 폼페이우스가 지원군을 이끌고 히스파니아 전선에 합류하게 된다. 하지만 폼페이우스가 도착했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레피두스의 군단장 마르쿠스 페르페르나 베이엔토와 합류하면서 군세가 늘어난 세르토리우스가 기원전 76년 라우론 전투에서 폼페이우스를 격파하였다. 수크로 강변의 전투에서는 폼페이우스가 세르토리우스를 격퇴하였고, 메텔루스 피우스가 이때 폼페이우스의 목숨을 구해주게 된다.
기원전 75년에 폼페이우스가 발렌티아에서 페르페르나를, 메텔루스 피우스가 이탈리카에서 루키우스 히르툴레이우스를 격퇴하였다. 후대의 전술가 프론티우스의 『전략론』에 따르면 메텔루스 피우스는 이탈리카에서 히르툴레이우스를 상대로 한니발과 같은 완전한 포위섬멸전을 성공시키고 전략적 우세를 거머쥐었다. 사군툼에서 벌어진 세르토리우스와의 결전에서 히르툴레이우스를 사살하는 등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게 된다.
원래 폼페이우스와의 관계는 약간의 마찰이 있었으나 크게 문제시되지 않았다. 은퇴 후에도 두드러진 분쟁은 없었으나, 기원전 70년의 가이우스 베레스의 재판이 당시 베레스의 동업자로서 메텔루스 피우스의 친척인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크레티쿠스와 연루되어 있었고, 에리히 그륀에 따르면 베레스 재판은 기존 옵티마테스와 키케로를 필두로 한 신흥 세력의 갈등 표면화였다. 반면 필립 마티작은 메텔루스 피우스가 아프리카로 도주했을 때 히스파니아에서 도망쳐 온 크라수스와 갈등이 있었다고 말한다.
친자녀가 없었기에 스키피오 가문에서 들인 양자로 메텔루스 스키피오-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 스키피오 나시카-가 있었다. 메텔루스 피우스가 죽은 후에야 그 재산이 스키피오에게 상속되었다. 메텔루스 스키피오 또한 양아버지, 양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옵티마테스파의 리더로서 끝까지 카이사르에게 맞서다가 사망했다.
기원전 63년[1]그의 사후 그가 맡고 있던 최고 제사장 자리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당선되었다.
[1]
로널드 사임의 『로마 혁명사』는 그의 죽음을 기원전 64년으로 서술하였으나 플루타르코스의 서술을 감안할 때 카틸리나 반란사건의 직전인 기원전 63년으로 추정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