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10:51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라틴어: Gnaeus Pompeius Magnus
파일: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jpg
생몰년도 미상 ~ 기원전 45년
출생지 로마 공화국 로마
사망지 로마 공화국 히스파니아 속주 라우로
지위 평민 귀족
국가 로마 공화국
가족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조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아버지)
무키아 테르티아(어머니)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동생)
폼페이아 마그나(누나)
클라우디아 풀크라(아내)
참전 카이사르의 내전
직업 로마 공화국 옵티마테스파 장군
1. 개요2. 생애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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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군인, 정치인. 폼페이우스의 아들로,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맞섰지만 연전연패하다가 문다 전투 패전 후 피신하던 중 살해되었다.

2. 생애

평민 귀족 집안인 폼페이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폼페이우스'라는 명칭은 캄파니아 지방의 폼페이 시와 같은 기원을 가지고 있지만, 이 집안과 폼페이 시간의 관련성은 알려진 바 없다. 조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는 기원전 89년 집정관을 맡았고, 동맹시 전쟁 때 활약했지만 뒤이은 내전 때 가이우스 마리우스에 맞서던 중 병사했다. 스트라보의 아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는 18살의 나이에 아버지 휘하 병력을 거느리고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에 가세했고, 뒤이은 내전에서 맹활약했다. 기원전 81년에 술라로부터 마그누스(Magnus: 위대한 자)라는 칭호를 받았고, 그와 후손들은 대대로 이 칭호를 이어갔다.

폼페이우스는 이후로도 히스파니아의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폰토스 왕국 미트리다테스 6세 등 강적들을 무찌르고, 해적들을 쓸어버리고 지중해 동부 세계를 제패하는 등 맹활약해, 당대 최고의 명장으로 떠받들어졌다. 그는 일생 동안 결혼을 여러 번 했지만 기원전 95년 집정관을 역임한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의 딸 무키아 테르티아와의 세번째 결혼에서만 자식을 봤다. 장남 그나이우스가 이 문서의 주인공이고, 차남으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뒀다. 폼페이아 마그나라는 딸도 두었는데, 독재관 술라의 아들인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 결혼하여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를 낳았다.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다만 아버지가 무키아 테르티아와 기원전 81년에 결혼했고, 히스파니아로 출진하여 퀸투스 세르토리우스와 전쟁을 벌이던 시기(기원전 77년)에 테르티아가 로마에 남아있었던 점을 고려했을 때, 기원전 80년에서 기원전 76년 사이에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버지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71년이 되어서야 세르토리우스 전쟁을 마무리하고 귀환하였고, 기원전 67년부터 해적 토벌에 이어 미트리다테스 6세와 전쟁을 벌인 뒤 지중해 동방 일대를 재편성했다. 기원전 62년 로마로 돌아온 뒤 간통 혐의로 아내와 이혼했다. 무키아 테르티아는 곧 독재관 술라의 의붓아들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와 결혼하여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라는 또다른 아들을 낳았다.

고대 기록은 그의 행적에 관해 기원전 49년 이전까지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단지 기원전 61년에 폼페이우스가 원로원 옵티마테스 대표인 소 카토에게 "내 장남과 그대의 두 딸 또는 조카 중 한 사람을 결혼시키자"라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는 것만 전해진다. 그러다 기원전 49년 1월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하자, 그는 아버지의 편에 서서 카이사르에 맞섰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추적을 회피하여 발칸 반도로 넘어간 뒤, 지중해 전역에서 배를 끌어모아 이탈리아를 봉쇄했다. 이때 그는 아버지의 명을 받고 알렉산드리아로 보내졌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이집트에서 클레오파트라 7세의 아름다운 용모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기원전 55년 아버지의 부관이자 시리아 총독이었던 아울루스 가비니우스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복위시킨 뒤 이집트에 남긴 로마 군인 중 500명의 기병을 받아냈고, 50~60척의 군함을 확보했다. 이 군함은 폼페이 함대의 일부로서 '이집트 편대'를 구성했다. 그는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 휘하에서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등 다른 함대 지휘관들과 함께 이탈리아에서 이피로스와 일리리아 해안으로 넘어가려는 카이사르 함대를 저지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기원전 48년 1월 초 폭풍우가 심해서 감시가 덜해진 틈을 타 기습적으로 일리리아 해안가에 상륙했다. 이후 카이사르가 여러 항구를 점령하면서 폼페이 함대의 보급난이 심해졌고, 급기야 비불루스가 육지에서 쉬지 않고 해상에서 감시를 계속 이어가다가 급병에 걸려 사망해버렸다. 이후 폼페이 함대는 특정 지휘관의 지도 없이 개별적으로 활동했다.

그는 카이사르에게 점령된 오리쿰 시를 공격해 그곳에 있던 전함을 불태우고 도시를 공략했다.( 오리쿰 공방전) 이후 리시를 공격하여 수송선 30척을 불태웠지만 도시를 점령하는 데 실패했다. 이후에도 해상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카이사르 측의 해상 보급을 차단했으나, 기원전 48년 8월 9일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아버지가 참패하고 어디론가 도망쳤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집트 함대는 더 이상 싸우길 거부하고 조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일단 코르키라로 향했고, 그곳에서 메텔루스 스키피오, 소 카토, 티투스 라비에누스,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 키케로 등과 만나 앞으로 어찌할 지 논의했다. 키케로는 자신을 임시 총사령관으로 세우겠다는 제의를 뿌리치며, "이제 전쟁은 끝났다. 나는 이탈리아로 돌아가서 카이사르에게 복종하겠다."라고 밝혔다. 그는 이 말에 분노하여 키케로를 반역자라고 욕하며 검을 빼들었다. 카토는 급히 그를 제지했고, 키케로는 곧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그 후 옵티마테스 세력은 각자 흩어졌다. 소 카토는 키레나이카로 갔고, 마르쿠스 옥타비우스는 일리리아 산악지대에 숨었으며,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폰토스로 향했고, 그는 아프리카로 향했다. 우티카에 상륙한 뒤, 그는 계모 코르넬리아 메텔라와 동생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재회했고, 그들로부터 아버지가 이집트에서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기원전 47년 초 아프리카에 도착한 카토는 그에게 폼페이우스의 수많은 클리엔테스가 있는 히스파니아 속주로 가서 병력을 끌어모으라고 권유했다. 그는 이를 받아들이고, 먼저 30척의 배와 빈약한 무장을 한 자유민과 노예로 구성된 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모레타니아로 진군하여 아스쿠룸 시를 공격했으나 수비대의 반격으로 패퇴했다.( 아스쿠룸 전투) 이후 북쪽으로 항해하여 발레아레스로 갔다.[1]

폼페이우스는 이바자에서 수개월간 공성전을 벌인 것 외에는 발레아레스 제도를 순탄하게 공략했다. 그러나 풍토병에 걸려서 오랫동안 아무런 일도 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히스파니아 본토에서는 카이사르에 의해 총독으로 임명된 퀸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의 폭정에 분노한 속주민들이 대대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발레아레스 제도에 사절을 보내 자신들을 이끌어달라고 청했고, 그는 이를 받아들여 기원전 46년 여름 베티카에 상륙했다. 과거 카이사르에 맞서다가 패배했던 폼페이우스파 장병들이 대거 가담하였고, 퀸투스 아포니우스와 티투스 퀸티우스가 이끄는 봉기군도 그에게 가세했다. 코르도바, 문다, 히스팔리스 등 히스파니아의 여러 도시가 자발적으로 귀순했으며, 신임 총독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의 2개 군단 마저 알로브리게스 부족과 함께 그에게 귀순했다. 그는 여세를 이어가 히스파니아의 수도인 카르타고 노바를 점령했다.

이후 아프리카에서 탑수스 전투 패전 후 카이사르의 추적을 피해 히스파니아로 피신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티투스 라비에누스,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 푸블리우스 아티우스 바루스 및 잔여 병사들과 합세했다. 그는 히스파니아 대부분을 장악한 뒤 독자적으로 주화를 주조했으며, 13개 군단과 6천 명의 기병대가 그의 휘하에 들어갔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이들은 카이사르로부터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감에 전투 의지를 불살랐다고 한다. 카이사르가 파견한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퀸투스 페디우스의 군대를 격퇴하여 오쿨보에 가둬놓고 포위 공격했지만, 카이사르가 본대를 이끌고 도착할 때까지 공략하지 못했다.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에 도착한 뒤 그나이우스가 여전히 자신을 따르지 않는 몇 안 되는 도시인 울리아 시를 포위 공격하느라 정신 없는 틈을 타 코르도바를 공격했다. 하지만 그나이우스가 구원군을 보내자 일단 철수했다. 기원전 45년 1월, 카이사르는 그나이우스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인 아테구아를 포위 공격했다. 그는 즉시 구원에 나섰으나 카이사르의 긴밀한 대처로 인해 쉽사리 구원하지 못했다. 결국 2월 15일 도시는 함락되었고, 히스파니아 속주민들은 이 사건 후 그의 군사적 역량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에 결정적인 전투를 벌여 카이사르를 꺾기로 마음먹고, 기원전 45년 3월 17일 문다 시 인근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

그는 언덕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고, 카이사르군의 맹공격을 오랫동안 저지했다. 한때는 그들이 승리하는 듯했고, 카이사르 본인도 병사들이 달아나는 걸 막기 위해 수많은 투창을 방패로 막아가며 최전선에서 싸워야 했다. 그러던 중 카이사르의 무어인 기병대가 측면에서 돌파를 시도하자, 티투스 라비에누스는 5개 코호트를 이끌고 그들을 막고자 후방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폼페이우스 측 병사들은 라비에누스가 달아나는 줄 알고 전의를 급격히 상실했고, 급기야 전선 전체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카이사르군은 이 틈을 타 언덕 위를 공략하고 적을 밀어붙였고, 결국 폼페이우스군은 섬멸되었다. 고대 기록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라비에누스와 아니우스 바루스를 포함하여 3만 명의 폼페이우스군이 전사했고, 13개의 군단기를 전부 상실했다고 한다. 반면 카이사르군의 손실은 1,000명 전사, 500명 부상에 그쳤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과장일 가능성이 높으며, 카이사르는 나중에 문다에서만 승리를 위해 싸운 게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싸웠다고 회고했다.

그 후 카이사르군은 코르도바, 문다, 히스팔리스 등 여러 도시를 순조롭게 공략했고, 그나이우스는 50명의 기병과 함께 함대가 주둔하고 있는 카르테아로 달아났다. 그곳 주민들이 카이사르에게 항복하려 하자, 그는 함대를 끌고 바다로 향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배에 타던 도중에 그의 발이 밧줄에 걸렸고, 동료 중 한 명이 급히 이 밧줄을 검으로 자르려 했다가 그의 다리를 쳐버린 것이다. 그는 이로 인해 중상을 입고 들것에 실리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렇게 함대를 타고 바다로 향했지만, 카르테아에서 급히 떠나느라 식수를 비축하지 못했기에 항해 4일째에 해안가에 상륙하여 식수를 구했다. 그러나 가이우스 디디우스가 이끄는 카이사르 함대가 습격하여 배를 모조리 불살라 버렸고, 그는 라우로 인근 숲에 숨어 목숨을 연명했다.

그러나 얼마 후 루키우스 카이세니우스 렌토가 이끄는 추격대가 이들을 습격했다. 그를 끝까지 따랐던 장병들은 방어 대형을 편성하여 2차례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세번째 공격에 결국 무너졌다. 들것에 실려 있던 그는 몸을 일으켜서 자기에게 달려드는 적에게 용감하게 싸웠으나 끝내 살해되었다( 라우로 전투). 그의 수급은 기원전 45년 4월 12일 카이사르에게 전달되었고, 카이사르는 이를 매장하도록 했다. 한편 동생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가까스로 탈출하여 발레아레스 제도로 피신했고, 나중에 형의 뒤를 이어서 카이사르파와 대적한다.

그는 기원전 54년경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딸 클라우디아 풀크라와 결혼했지만 자식을 낳지 못했다. 처남으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있었다.

3. 평가

사후에 쓰인 역사가들의 기록에서나 후세의 역사서는 은근히 대 폼페이우스의 잔당이라고 폄하하는 경우가 많은데, 동시대의 사람들은 그나이우스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자신의 권리를 찾고 로마 공화국을 지키고자 했던 위대한 로마 귀족이라고 생각했다.[2] 그는 해상에서 카이사르의 함대를 여러 차례 격파해 카이사르를 곤란하게 만들었고, 히스파니아에서 카이사르 군대의 8개 군단에 대항해 13개의 군단을 일으켜 카이사르를 압도했으며, 문다 전투에서 거의 승기를 잡고 카이사르군을 궤멸시킬뻔 했다. 이렇듯 그나이우스는 카이사르 최후의 적수였고, 카이사르는 그를 격파한 후에야 진정한 로마의 패권자로써 자리잡을 수 있었다.


[1] 다만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그는 코르키라에서 히스파니아로 곧장 향했고, 티투스 라비에누스가 동행했다고 한다. [2] 사실 원로원파는 원래 로마의 수뇌부였으므로 이들에게 정통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카이사르는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쥐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카이사르가 명분에서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반대로 원로원은 갈리아에서 승리하고 로마를 구한 카이사르를 견제의 차원을 넘어 아예 죽이려고 했기 때문. 그렇다고 카이사르가 무슨 뚜렷한 죄를 지은 것도 없고 거기다 카이사르가 몇 번이나 타협안을 제시했는데도 원로원은 이를 거부하고 원로원 최종권고를 통해 카이사르의 무조건적인 굴종과 무장해제만을 요구했는데, 이는 사실상 카이사르를 불법적으로 살해하겠다고 공언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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