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 (Gaius Sallustius Crispus) |
출생 | 기원전 86년 |
사망 | 기원전 35년 |
직위 | 누미디아 총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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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정 말기의 역사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부관으로서 카이사르의 내전에 참여하였고, 누미디아 총독을 역임했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정치 경력을 중단하고 역사서 집필에 전념했다.2. 생애
기원전 86년경 중부 이탈리아 아미테르눔의 사비네에서 출생했다. 그의 집안은 사비네 지역의 유지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초기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기원전 70년에서 60년 사이에 동방에 주둔한 로마군에서 경력을 쌓았으며, 기원전 52년 호민관에 선출되었다. 훗날 그는 자신의 역사서에서 호민관으로 일했을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젊은이로서 처음에 정치에 관여하려는 성향에 이끌렸을 때, 많은 상황들이 나에게 불리하였다. 왜냐하면 (로마에서) 겸손, 절제, 그리고 정직함 대신에 뻔뻔함, 부패, 그리고 탐욕이 만연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마도 당시 로마 공화정의 혼란스럽고 부패가 만연한 상황에 깊은 혐오를 느꼈던 듯하다. 또한 사비네 일대에서는 명망 높지만 로마에서는 보잘것없는 신분으로 취급받는 현실에 반감을 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입신양명을 이루기 위해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기원전 52년 카이사르와 동맹했던 급진파 호민관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가 원로원파 정치 깡패인 티투스 안니우스 밀로 일당에게 살해되었다. 키케로는 밀로를 변호했지만, 살루스티우스 등 호민관들이 그를 강하게 공격했다. 결국 밀로는 유죄 판결을 받고 이탈리아에서 추방되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기원전 50년, 부도덕한 죄를 저지른 혐의로 기소된 후 추방되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가 내전을 감행한 뒤, 그는 카이사르의 군단 중 하나를 지휘했지만 이렇다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기원전 48년 치안관을 맡았고 원로원 의원에 선임되었다. 기원전 47년 로마에서 카이사르의 병사들이 전역을 요구하며 파업을 일으켰다. 그는 다른 의원들과 함께 병사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병사들은 의원 2명을 살해했고, 그는 가까스로 죽음을 모면했다. 기원전 46년 카이사르가 아프리카 원정을 단행했을 때 함께하였고,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케르케나 제도에서 여러 척의 보급선을 조직하여 보급이 원활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힘썼다.
기원전 46년부터 44년 초까지 누미디아 총독으로 활동했지만, 로마로 돌아온 직후 속주 약탈과 속주민 착취 혐의로 고발되어 처벌받을 위기에 몰렸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그가 무죄 판결을 받을 수 있도록 힘써줬다. 얼마 후 카이사르가 암살당하자, 그는 정치 경력을 완전히 끝내고 퀴리날레에 있는 호르티살루스 티아니 정원을 구매한 후 그곳을 매우 화려하게 꾸몄다. 그는 정원에서 여생을 보내며 여러 편의 역사서를 집필하다 기원전 35년경에 사망했다.
3. 저서
그는 저서에서 투키디데스를 존경한다고 밝혔으며, 그의 저서 전반의 문체는 투키디데스의 것과 유사하다. 그는 카르타고 멸망 후 로마 공화국의 부정부패와 원로원 귀족들의 권력 독점으로 인해 정치가 혼란스러워졌다고 강조하면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원로원에 맞서 내전을 벌인 것을 정당화했다.3.1. 카틸리나 전쟁(Bellum Catilinae)
그의 첫번째 역사서인 '카틸리나 전쟁'은 기원전 63년 카틸리나가 로마 공화정을 전복시키려는 음모를 꾸미다 몰락하는 과정을 다루면서 로마 정치의 부패상을 폭로했다. 그는 기원전 149년 카르타고가 멸망한 후부터 로마가 문란해지기 시작했고, 술라의 독재 정권 이후 이러한 경향이 심화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상황이 카틸리나같은 자가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음모를 꾸미는 배경이 되었다고 지적했다.그는 카틸리나를 귀족 출신이지만 악랄하고 타락한 기질의 소유자라고 평하며, 대담하고 교묘한 마음을 가졌지만 다른 사람의 재산을 탐냈고, 얻을 수 없는 것들을 감히 원했으며, 말솜씨가 좋았지만 지혜가 별로 없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인물이 수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릴 수 있었던 건, 당시 로마의 부정부패로 인해 비참한 지경에 처한 퇴역군인, 가난한 농민들, 그리고 과도한 부담을 지고 있는 채무자들의 호응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는 음모의 진행과정과 당시 집정관이었던 키케로와 원로원의 대응을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특히 기원정 63년 12월 5일에 열린 원로원 회의를 큰 비중으로 다루었다. 그는 키케로가 아니라 카이사르와 소 카토의 연설에 초점을 맞추면서, 두 사람이 시민적 미덕을 대변했으며, 그들의 죽음은 공화국의 종말을 알리는 것으로 여겼다. 한편 이 저서는 카틸리나의 타락한 성격과 악랄한 행동에 비난을 쏟아냈지만, 카틸리나가 마지막 전투 때 매우 용감하게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평했다.
3.2. 유구르타 전쟁(Bellum Jugurthinum)
살루스티우스의 두번째 저서인 '유구르타 전쟁'은 기원전 2세기 말 로마에 반기를 든 누미디아의 군주 유구르타를 다루었다. 그는 이 저서에서 로마 공화정이 전쟁 초기 매우 무능하게 행동했음을 지적하며, 이는 자신들의 탐욕과 이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공공의 이익을 희생한 "강력한 소수"의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특히 유구르타가 로마 시를 떠나면서 "참으로 돈에 좌지우지되는 도시로다! 이제 돈으로 사들이는 자가 나타나면 로마는 곧 망할 것이다!"라고 조롱한 걸 강조했다. 또한 이 전쟁에서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대두된 점을 강조하며, 그가 등장한 이후로 원로원을 장악한 귀족집단의 오만함에 처음으로 저항이 일어나고 나중에 파멸적인 정치 투쟁이 벌어졌다고 밝혔다.3.3. 역사(Histories)
기원전 78년부터 로마의 역사를 다뤘다. 아마도 그가 사망하기 직전까지의 사건들을 다뤘을 것으로 추정되나, 기원전 67년에 관한 제 5권의 일부 구절을 제외하고는 전해지지 않는다. 남아있는 구절들은 술라 이후의 도덕적 쇠퇴를 비판하는 내용이다.4. 평가
고대와 중세의 역사가들은 대체로 그를 역사가로서 호의적으로 평했다. 타키투스는 로마 공화정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폭로한 점을 높이 평가했으며, 퀸틸리아누스는 그를 "로마의 투키디데스"라고 칭하며, "그는 로마 역사가들의 왕자로 등극할 것"이라 호평했다. 또, 제롬은 그를 매우 신뢰할 수 있는 역사가라고 극찬했다. 중세에서는 학교에서 라틴어를 가르치기 위해 그의 저서가 종종 사용되었으며,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 등은 그의 공화정에 대한 비판이 담긴 구절을 자주 인용하여 가톨릭의 부정부패를 비판하는 데 써먹었다. 레오나르도 브루니, 콜루치오 살루티타, 니콜로 마키아벨리도 그의 저서를 통해 말기의 로마 공화정을 연구하였으며, 유스투스 리프시우스는 타키투스 다음으로 유명한 로마 역사서로 그를 지목했다.그러나 근대 이후의 역사가들은 그가 친 카이사르파 인사였음에 주목하고, 저서의 신뢰성을 의심하고 있다. 카이사르가 원로원을 상대로 내전을 단행한 걸 옹호하기 위해 로마 공화정의 부패상을 지나치게 부풀렸다는 것이다. 현대 학자들은 도덕적 실패가 로마 공화정의 붕괴 원인으로 치부하기엔 불충분하다며, 그의 관점은 로마 정치의 실상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킨다고 비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