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12:11:01

창경궁 통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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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통명전
昌慶宮 通明殿
소재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 궁궐
수량 1동
지정연도 1985년 1월 8일
제작시기 조선 시대, 1484년 창건, 1834년 중건
파일:창경궁 통명전.png
파일:창경궁_통명전_전경.jpg
파일:창경궁_통명전_근경.jpg
<colbgcolor=#bf1400> 통명전[1]
[clearfix]
1. 개요2. 이름3. 역사4. 구조5. 지당(池塘)6. 열천(洌泉)7. 여담8.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창경궁의 침전이다.

창경궁 대비 등 왕실 가족들의 거주 공간 확보를 목적으로 지어진 궁이기 때문에, 왕실 구성원들은 다른 궁궐에 있을 때와 다르게 비교적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건물을 사용했다. 그래서 창경궁 내전 건물의 경우, 전각의 주인을 뚜렷하게 구분하기 모호하며 통명전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만 여러 기록을 볼 때, 주로 왕비 대비 왕실 내 최고위급 여성들의 공간으로 많이 사용한 듯 하다.

창경궁의 내전 전각들 중 위상이 가장 으뜸이었다. 《궁궐지(宮闕志)》에서 ‘통명전은 창경궁의 내정전(通明殿卽昌慶宮內正殿)’으로 표기한 것과, 영조가 통명전을 ‘내전의 법전(法殿)’이라 남긴 글, 그리고 《통명전 중건 상량문》에 ‘동쪽에 창경궁이 조성된 이후 내전은 통명전보다 높은 전각이 없다’라고 적혀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해준다.

2. 이름

이름은 창건 당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이던 서거정(徐居正)이 지었다. ‘통달(通)하여 밝다(明)’는 뜻으로, '크게 밝은(明) 전각에 앉아서 백성들의 삶을 통달(通)하여 국가를 잘 다스리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조선 인조 대의 문신 정백창(鄭百昌, 1588 ~ 1635)은 《통명전 상량문》에서 ‘크게 밝은 집(大明宮)’으로 풀이했고 ‘ 옥황상제 궁전’이란 뜻도 있기 때문에 숙종은 《통명전(通明殿)》 시에서 신선으로 풀이했다.

현판 건물 외부와 대청 한가운데에 2개가 걸려있으며 모두 순조가 직접 썼다.

3. 역사

파일:동궐도 통명전.png
<colbgcolor=#bf1400> 《동궐도》에서 묘사한 통명전. 1834년(순조 34년) 복구하기 이전에 그렸기 때문에 터만 남아있다.
1484년( 성종 15년) 창경궁 창건 때 처음 지었고, 1592년(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6년( 광해군 8년)에 중건했다. 그러나 1624년( 인조 2년) 이괄의 난으로 다시 소실되었고 1633년(인조 11년)에 복구했는데 이 때 인경궁의 청와전(靑瓦殿)을 옮겨지었다. 1790년( 정조 14년)에 다시 화재를 입어 1834년( 순조 34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4. 구조

  • 정면 7칸, 측면 4칸, 총 28칸에 1층[2]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평면은 ‘一’자 형태로 되어있다. 연회같은 행사를 할 수 있게 월대를 굉장히 큰 규모로 만들었으며 월대 위엔 박석을 깔고, 정면에는 5단의 계단을 3개[3], 그리고 동, 서에 각각 3단의 계단을 2개씩 배치했다. 이 월대 위에 다시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은 다음 그 위에 강회다짐을 하고 이어 주춧돌을 놓고 사각형의 기둥을 세워 건물의 뼈대를 만들었다. 쇠서[4] 2개를 둔 이익공 공포에 겹처마 양식으로 지었으며 기둥 사이에는 장화반을 놓아 단아하면서도 화려한 궁궐 침전 건물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 지붕의 각 마루는 양성을 하고 취두, 용두, 잡상으로 장식했으며 잡상의 수는 3개이다. 대한제국 시기 촬영한 사진을 보면 측면에 가퇴가 있었으나 현재는 없다. 창호는 다른 궁궐의 침전과는 다르게 ‘정(井)’자형으로 되어 있다. 다만 온돌방 쪽 툇간으로 드는 두 짝씩의 창호는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띠살을 쓰고 있다.
  • 내부는, 가운데 정면 3칸, 측면 2칸을 대청으로 놓고 칸을 나누지 않고 한 공간으로 뚫어 넓게 쓸 수 있게 했다. 대청의 천장은 전체적으로 우물 반자[5]로 막은 뒤 청판에 모란을 그려넣고 단청을 아름답게 칠하여 화려함을 부각했다. 대청을 중심으로 동, 서 양 옆의 정면 1칸, 측면 2칸을 온돌방을 두었으며 앞, 뒷면의 협칸은 툇마루로, 측면의 협칸은 온돌 쪽방으로 구성했고 방의 천장은 종이천장으로. 툇마루의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마감했다. 일제강점기에 통명전을 창경원 박물관 진열실로 쓰면서 온돌을 뜯어내고 , 마루 구분 없이 공간을 다 터서 크게 훼손되었으나 1980년대 이후 실내를 복원하여 현재에 이른다.

파일:창경궁_통명전_내부.jpg }}} ||
<colbgcolor=#bf1400> 통명전 내부 전경[6]
파일:창경궁 통명전 내부.png }}} ||
왼쪽은 통명전 대청, 오른쪽은 통명전의 천장과 실내 현판.
순조의 친필이라 오른쪽 끄트머리에 어필(御筆)이라 적혀있다.
시각적으로 다른 건물과 비교했을 때 눈에 띄는 차이점이 있는데 바로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 것이다. 이 것을 일컬어 ‘무량각(無樑閣)’이라고 하는데, 통명전 뿐 아니라 다른 궁궐 왕비의 정식 침전은 다 이렇게 되어있다. 이유로 여러 가지 가설이 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왕비의 침전의 경우 새로운 용이 만들어지기에 한 건물에 두 용이 있어선 안 되어서 만들지 않았다는 이야기이고, 또 다른 설은 당시 동아시아 최선진국이었던 중국 건축 양식을 모방했으나 조선에 익숙하지 않은 양식을 모든 건물에 적용하긴 어려웠기 때문에[7] 가장 존귀한 왕과 왕비의 집에만 선진 건축 기술을 적용했다는 설이다. 사실 용마루와 용과 관련 된 전통 기록은 하나도 없으며, 당장 중국만 가도 자금성 황제 황후 침전엔 용마루가 있고, 일반 서민 가옥들에 용마루가 없는 집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후자의 설이 좀 더 설득력이 있다.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중국 문물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떨어진 대한제국기에 지은 경운궁의 침전 함녕전은 용마루가 있다.[8]
  • 《한경지략》[9]에 “통명전에는 원래 푸른 기와를 덮었는데, 정조 화재로 탔다. 전하는 말로는 고려 때 건물이었다고 한다.”라고 되어있다. 물론 고려 때 지은 것은 사실이 아니지만 청기와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는데, 청기와를 많이 쓴 인경궁의 건물을 헐어 지은 것이며 무엇보다 옮긴 전각의 이름이 청와전(靑瓦殿), 즉 뜻 자체가 ‘ 청기와 ’이기 때문이다.
  • 1633년(인조 11년) 재건 당시 통명전 뿐 아니라 주변 건물 인경궁에서 헐어다 지은 듯 하다. 《창경궁수리소의궤》에 의하면 통명전의 서책방은 인경궁 함인당(涵仁堂)의 대청 앞 툇간과 헌잠당(獻箴堂)의 온돌을 옮겨서 조성했으며 동행각 역시 인경궁 함인당의 서온돌과 진연청(盡筵廳)의 북월랑을 옮겨 지었다고 한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5. 지당(池塘)

파일:창경궁_통명전_연지.jpg
<colbgcolor=#bf1400> 통명전 지당[10]
파일:통명전 지당 上.png
파일:통명전 지당 下1.png
파일:통명전 지당 수로.png
통명전 지당의 윗 부분 <colbgcolor=#bf1400> 통명전 지당의 아랫 부분 <colbgcolor=#bf1400> 통명전 지당 수로
통명전 서쪽에 화강암으로 조성한 사각형의 작은 연못이 있다. 연못 의 발원지는 통명전 서북쪽에 있는 샘물로, 이 물이 로 만든 직선으로 된 물길을 따라 흐르다 연못으로 떨어진다. 이 때 그냥 떨어지게 하지 않고 입수구를 봉황 부리 모양을 한 석조물로 만들어 물이 곡선을 그으면서 마치 폭포처럼 떨어지게 하여 한껏 운치를 더했다.

연못 가장자리에 하엽동자와 꽃봉오리를 세심하게 조각한 난간기둥을 세우고 기둥 사이사이에 돌 난간을 둘렀다. 연못의 약간 남쪽으로 치우쳐서 돌 다리를 만들어 가로지를 수 있게 했으며 연못 북쪽 한 가운데엔 괴석을 2개 놓고, 남쪽엔 앙련대석(仰蓮臺石)을 새긴 돌 기둥 하나를 놓았다.
파일:동전던지지 말라는 안내판.png
<colbgcolor=#bf1400> 동전던지지 말라는 안내판
동전을 던져 이 기둥 위에 놓이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는지 많은 관광객들이 여기서 동전을 던지는 경우가 많다. 물론 연못으로 떨어진 게 대다수. 하지만 계속 던지면 이 기둥이 손상될 우려가 있어 현재는 동전 던지지 말라는 표지판이 붙어있다.

창경궁 창건 당시 통명전과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처음 짓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실록에 존재가 확인되기 때문. 여기서 골때리는 일화 하나가 있다. 성종 연못 구리 수통을 설치했다가 사치라는 신하들의 반발에 로 바꿨는데, 정작 설치 비용은 석재 수통이 더 비쌌다.(...) # 결과적으로 돈지랄

현재 다리 서쪽으로 을 따라가면 높은 계단이 나온다. 이 계단을 올라가면 창덕궁으로 가는 함양문이 나온다.

6. 열천(洌泉)

파일:통명전 열천2.jpg
<colbgcolor=#bf1400> 통명전 열천
통명전 뒤뜰에 있는 이다. 이름은 열천(洌泉)으로, 1757년( 영조 33년) 5월에 영조가 직접 지었으며 #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이가) 굉장히 시리도록 차가운 샘’이라는 의미이다. 원래 나 다른 이물질이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올렸으나 현존하지 않는다. 현재 이 샘물은 마실 수 없다.

7. 여담

  • 늦봄에서 초가을 사이에 통명전 대청을 개방하여 누구든 들어갈 수 있다. 온돌방은 들어갈 수 없지만 문짝은 열어둬서 대청에서도 충분히 들여다 볼 수 있다. 특히 여름엔 굉장히 시원해 창경궁을 방문한 관람객들이 쉬어가는 곳으로 인기가 있다. 단, 안에서 음식을 먹거나 큰 소리로 떠드는 비매너적인 행동은 삼가자.

8. 대중매체에서


파일:킹덤 통명전.jpg }}} ||
<colbgcolor=#bf1400> 통명전이 등장한 〈킹덤〉 장면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 1회 때 세자( 주지훈 분)가 석고대죄하는 중궁전의 배경이 바로 여기이다. 〈킹덤〉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영향으로, 창경궁을 들른 외국인 관광객들이 특히 이곳을 많이 찾는다.

[1] 첫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유산포털: 창경궁 이야기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유산포털: 보물 창경궁 통명전
세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유산포털: 보물 창경궁 통명전
[2] 보통 한옥의 경우 단층(單層)이라 표현한다. [3] 그 중 왕이 다니는 가운데 계단의 길이가 더 길다. [4] 모양의 부재. [5] 서까래가 안보이게 천장을 가리고 평평하게 만드는 구조물. [6]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보물 창경궁 통명전. [7] 실제로 전통 가옥을 용마루 없이 지으면, 서까래를 고정하기 어려워 굉장히 힘들다고 한다. [8] 사실 함녕전은 경복궁의 침전 중 하나였던 만화당(萬和堂)을 옮겨 지은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황제의 침전인데 용마루를 그대로 둔 것을 봐서는 무량각에 그렇게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은 것 같다. [9] 조선 후기 정조 시기에 한성부 역사를 간략하게 서술한 . 저자는 수헌거사로 알려져있는데 실학자 유득공의 아들 본예로 추정하고 있다. [10]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보물 창경궁 통명전. [11] 아이러니하게도 통명전은 숙종과 장희빈의 오작교 역할을 해준 대왕대비 장렬왕후가 만수전이 화재에 불타고 승하할때까지 잠시 살았던 처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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