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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별궁 자수궁 慈壽宮 |
||
<colbgcolor=#bf1400><colcolor=#ffd700> 위치 |
한성부 북부 순화방 (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대로 68[1][2]) |
|
설립시기 | 1450년 | |
해체시기 | 1661년 |
|
<colbgcolor=#bf1400> 현재 자수궁 터 |
[clearfix]
1. 개요
지금의 일대에 있던 조선의 별궁.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2. 역사
원래 무안대군 이방번이 살던 집 터였다. 그러다가 문종이 무안대군의 옛 집을 수리하고 아버지 세종의 후궁들을 옮겨 살도록 한 것이 자수궁의 시초다.[3] 성종 시절에는 폐비 윤씨 및 세조와 예종의 후궁들이 살았는데, 그 중 세조의 후궁인 근빈 박씨가 살게 되면서 잠시 이름을 창수궁(昌壽宮)으로 바꾸기도 했다.[4] 이 외에도 단경왕후가 폐출되고 한동안 머무른 적도 있었고, 인종의 후궁 귀인 정씨도 자수궁에서 살았다.당시 왕실 여성들은 불교에 대한 믿음이 강해서 후궁들도 머리를 깎고 출가하거나 또는 비구니와 함께 거주하는 경우가 많았다.[5]
"대저 여승[尼]이라는 것은 가장 상서롭지 못한 것인데 안일원(安逸院)ㆍ자수궁(慈壽宮)이 있으니, 그로 인연한 화(禍)가 지금 어찌 없겠습니까?"
《 중종실록》 중종 12년 8월 20일
《 중종실록》 중종 12년 8월 20일
"자수궁(慈壽宮)은 선왕(先王)의 후궁(後宮)이 사는 곳이므로 엄숙하기가 궁금(宮禁)과 다를 것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듣건대 미천하고 요사한 여중이 섞여 거처하는데 그 수가 매우 많아서 늘 불사(佛事)를 하는가 하면 요사한 방법을 하지 않는 것이 없어서 요령(搖鈴)과 목탁 소리가 바깥에서 들린다 하니, 매우 불미스러운 일입니다."
《 인종실록》 인종 1년 3월 24일
이때문에 자수궁에서 불사를 행한다고 끊임없이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정희왕후,
소혜왕후,
문정왕후 등의 불심 깊은 왕실 고위급 여성들의 비호가 있었고, 자수궁에서 사는 이들이 선왕의 후궁들이라는 점에서 유지될 수 있었다. 심지어
불교가 잠시
권력 층과 가깝던
명종 때에는 이 곳에 종각과 나한전을 지어주기도 하였다.[6][7]《 인종실록》 인종 1년 3월 24일
임진왜란 이후 궁궐 공사에 병적이었던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인왕산의 왕기(王氣)를 누른다는 명분으로 인경궁, 경덕궁[8] 등과 함께 옛 자수궁 일대에 큰 궁궐을 짓고 이름도 그대로 자수궁이라 불렀다. 그러나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광해군은 사용하지도 못한 채 쫓겨났고, 자수궁은 '자수원(慈壽院)'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번에는 아예 이원(尼院), 즉 비구니들을 위한 전용 공간으로 활용하였으며 많을 때는 최대 5,000여명의 비구니들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명나라 황실의 궁녀였던 굴씨(屈氏)도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함께 들어와 이 곳에 머물렀다.
3. 최후
|
<colbgcolor=#bf1400> 옛 자수궁 자재로 세운 성균관 비천당[9] |
이 자리에 도성 내 5학 중 하나인 북학(北學)을 세웠으며 1663년(현종 4)에는 자수원 건물의 자재로 성균관 서쪽에 비천당(丕闡堂)과 일량재(一兩齋), 벽입재(闢入齋)를 세웠다.
4. 기타
<colbgcolor=#bf1400> 《경성부사》에 실린 자수궁교 | <colbgcolor=#bf1400> 자교교회 |
[1]
구
지번주소
종로구 옥인동 45-1.
[2]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최악의
친일반민족행위자이자
매국노가 되는
윤덕영의
벽수산장과
이완용 집 터 사이다.(...)
[3]
문종실록 1권, 문종 즉위년 3월 21일 을축 1번째기사.
#
[4]
성종실록 179권, 성종 16년 5월 9일 무오 2번째기사.
#
[5]
세종의 후궁
신빈 김씨도 세종이 승하하자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는데, 왕의 허락없이 한 일이라서 논란이 되었다.
[6]
나한전은
절에서 아라한과(아라한의 깨달음의 경지. 곧,
소승불교의 궁극에 이른 성자의 지위)를 얻은
성자를 봉안하는 곳이다. 그래서, 아무리 비구니들이 같이 산다해도 엄연히 왕실 사람이 머무는 곳이라 하여 신하들이 반대했다.
[7]
명종실록 17권, 명종 9년 10월 30일 정유 3번째기사.
#
[8]
훗날
경희궁으로 개칭.
[9]
사진에서 보이는 지금 건물은
6.25 전쟁 때 불탄 것을 1988년에
복원한 것이다.
[10]
비구니들이 잘못을 한 건 아니었다. 단지
사대부의 입장에서
도성 한복판에 큰
절이 있고 비구니 수천 명이 머무른다는 것 자체가 못마땅하였을 것이다. 또한, 비구니 중에서 나이가 40세 이하인 자는 모두 시집가도록 한 조치에서 보듯이 무엇을 폐해로 여겼는지 알 수 있다.
[11]
폐지 논의를 하던 때에는 선왕의 후궁들 중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다.
[12]
다만 한자는 '紫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