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14:03:53

이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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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별궁
이현궁
梨峴宮
<colbgcolor=#bf1400><colcolor=#ffd700> 위치 한성부 동부 연화방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김상옥로, 종로31길 언저리)[1]
면적 약 31,551㎡
설립시기 1587년
해체시기 1785년
파일:2017-10-11 14-25-35.jpg
<colbgcolor=#bf1400> 이현궁 터 현재 자리
1. 개요2. 역사3. 여담

[clearfix]

1. 개요

조선 시대의 별궁이자 광해군 잠저였던 곳이다. 면적이 대략 31,551㎡(9,544평)정도로 상당한 규모였다고 한다.

2. 역사

광해군은 13세 되던 해인 1587년( 선조 10년) 류자신의 딸과 혼인하여 따로 독립하여 나와 살았다. 정착한 동네는 배밭이 많은 걸로 유명해서 동네 이름이 '배오개'였는데 이를 한자로 '배나무 이(梨)'에 '고개 현(峴)'을 써서 '이현(梨峴)'으로도 불렀다.

이곳에서 살던 광해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세자로 책봉되었고, 이후 선조와 함께 에서 살면서 이곳은 빈 집이 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 이현의 옛집은 왕의 잠저로 ‘이현궁’으로 불렸다. 이후 광해군의 생모 공빈 김씨 사당을 두기도 했고 왕세자 이지의 결혼식 때 세자빈이 친영하는 별궁으로 삼기도 했다.

그러다 1623년(인조 1년) 광해군의 조카 능양군은 반정을 일으켜 인조로 즉위했다. 인조는 친아버지 정원군을 정원대원군으로, 친어머니 구씨를 연주부부인에 올린 뒤 어머니에게 광해군의 잠저였던 이현궁을 드렸고 ‘계운궁(啓運宮)’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괄의 난으로 창덕궁이 훼손되어 인조는 한동안 광해군이 지은 경덕궁을 사용했다. 인조는 계운궁에서 지내던 어머니를 경덕궁으로 모셨고 연주부부인 구씨는 경덕궁의 회상전에서 사망했다. 이후 병자호란으로 동생 능원대군이 집을 잃자 이현궁을 하사하여 살게 했다.

세월이 지나 숙종 때는 능원대군의 옛집을 사서 숙의 최씨의 제택으로 삼게 했다. 그 뒤 연잉군이 가례 후 이현궁에서 살기로 했으나 무산되고 숙종이 마련해준 창의궁에서 살게 된다.

1711년(숙종 37년)에는 이현궁을 환수하여 왕실에서 직접 관리했다. 1718년(숙종 44년)에는 민회빈 강씨를 복권하면서 강빈의 옛 신주를 이현궁에 옮겨 잠시 봉안하기도 했다. 영조 때는 당시 내수사에 소속되어 있던 이현궁을 서 3녀 화평옹주에게 주려고 경복궁 옛 터의 소나무를 베어 수리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파일:img010803_01.gif
<colbgcolor=#bf1400> 장용영의 본영을 그린 그림 〈본영도형〉
정조 즉위 후 설치된 장용위가 이곳 이현궁에 들어섰고 이후 장용영으로 승격된 뒤 규모를 늘려갔다고 한다. 그러나 순조 즉위 후 장용영은 폐지되었고 이현궁 터는 훈련도감의 동쪽 군영으로 사용되었다.

구한말에는 동쪽 군영 자리에 일본군 보병 59연대 1대대가 주둔했다. 1908년( 융희 2년) 부대가 용산구 병영으로 이전한 뒤에는 1909년(융희 3년) 동아연초주식회사 사택으로 대여했다가 그해에 다시 북측의 기존 가옥을 철거하고 경성재판소 관사의 신축이 결정되었다. 이후 한국담배인삼공사 서울영업본부로 사용되다가 1993년 대치동으로 이전하면서 국민은행, 태승플래닝으로 넘어가 현재는 효성쥬얼리시티가 들어서 있다.

이 밖에 다른 이현궁 부지들 대부분은 현재까지 국가 소유이다. 서울특별시선거연수원과 경찰공제회, 그리고 혜화경찰서 등 관공서가 들어섰으며 일부는 개인에게 넘어갔다. 개인 소유로는 종로플레이스, 인의빌딩 등이 있다.

3. 여담


파일:IMG1927.jpg }}} ||
<colbgcolor=#bf1400> 이현궁 터에 있는 나무
이현궁 터 근처에 나무가 한 그루 있다. 중종 시기인 1516년부터 500년이 넘는 지금까지 쭉 같은 자리에 있어 이현궁 역사의 산 증목으로 불린다. 서울특별시보호수 1-3으로 지정되었다.
  • 광해군 시기,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 친척의 노비 복동이라는 사람이 저주를 한 죄로 국문을 당했다. 하지만 위기는 기회라고, 복동은 이 때 도리어 궁에 들어가 저주한 물건을 파내고 기도를 해서 왕의 총애를 받았다. 복동이는 이현궁에 기도하는 곳을 설치하고 귀신을 그려놓았으며 밤낮으로 가무를 벌여 귀신을 즐겁게 했다. 사람들은 복동을 성인방(聖人房)으로 부르면서 조금만 의심나는 일이 생겨도 이곳에서 점보고 수많은 재물을 바치니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 했다고.

[1] 구 지번주소 종로구 인의동 28~48번지 일대. 종로플레이스, 인의빌딩 일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