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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별궁 영희전 永禧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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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700> 위치 |
한성부 남부 훈도방 ( 서울특별시 중구 수표로 27 (저동2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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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시기 | 1428년 | |
해체시기 | 190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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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현재의 영희전 터. 주황색 선 안 영역 어딘가에 영희전이 존재했다. |
1. 개요
조선 시대의 별궁. 세조의 잠저[1]이자 역대 왕들의 어진을 모셨던 진전(眞殿)이다. 현 영락교회 자리에 있었다.2. 역사
세조는 세종과 소헌왕후의 둘째 아들로, 1428년(세종 10년) 윤번의 딸과 혼인하면서 궁을 나와 여기서 살았다. 그리고 의경세자와 해양대군(예종)과 의숙공주를 여기서 낳았다. 그 후 왕위를 찬탈한 세조가 가족과 함께 궁궐으로 들어가면서 빈 집이 되었다. 의숙공주가 혼인한 후 이 집을 공주 부부에게 내려주었고 한 동안 후손들이 소유하며 살았다가 중종 치세에는 한 때 폐비 신씨가 잠시 거처하기도 했다.2.1. 이후
이후 선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된 광해군은 대신들의 반대에도 1610년(광해군 2년) 어머니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했다. 그리고 기존의 의숙공주 집을 어머니의 사당으로 고쳐 신주를 모시고 ‘봉자전(奉慈殿)’이라 했다. 1615년(광해군 5년)에는 공성왕후의 신주를 종묘로 옮긴 뒤 이곳에 태조와 세조의 어진을 모시고 ‘남별전(南別殿)’이라 불렀다.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난 후 즉위한 인조는 친아버지 원종(정원군)의 영정을 남별전에 봉안하고 ‘숭은전(崇恩殿)’이라 했다. 숙종은 전주 경기전(慶基殿)에 있는 태조의 영정을 베껴 그리게 한 뒤 이 곳에 봉안하고 ‘영희전(永禧殿)’으로 이름을 고쳤다. 그리고 입구에 홍살문을 두었고 홍살문 앞에는 하마비 [2]를 설치했다. 이 때부터 세조의 잠저는 영희전으로 불리게 되었고, 음력설 · 한식 · 단오 · 추석 · 동지 · 납일[3]에 제사를 지냈다. 영희전에서 지내는 제사를 받들기 위해 왕은 1년에 여러 차례 창덕궁에서 수표교를 건너야 했는데, 이 때 숙종이 영희전을 참배하고 돌아오던 중 희빈 장씨를 만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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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영희전 중수공사를 기록한 《진전중수도감도처의궤》 |
대한제국 시기 영희전 근처의 높은 지대, 현재 명동인 명례방에 명동성당 건립이 완공되었다. 나라에서는 영희전의 현무봉[4]인 언덕에 천주교 성당을 지으면 영희전의 기운이 파손됨을 우려해 영희전을 옮기려고 했다. 그러던 찰나에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어 1900년( 광무 4년) 종묘로 신위가 옮겨가자 기존의 사도세자 사당인 경모궁이 비면서 영희전을 경모궁 자리로 옮겼다.
그리고 빈 영희전에 영조의 잠저인 창의궁에 있던 정조의 형 의소세손의 사당 ‘의소묘[5]’와 정조와 의빈 성씨의 장남 문효세자의 사당 ‘문희묘’를 옮겨왔다. 그러나 8년 후인 1908년( 융희 2년) 7월에는 제사에 관한 칙령 제50호 ‘향사이정에 관한 안건(享祀釐正件)’에 따라 의소세손과 문효세자의 신주는 땅에 묻고, 영희전은 국가 소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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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영희전 터 표지석 |
3. 여담
- 이 일대가 유독 벼락이 잘 맞는 동네였던 듯 하다. 숙종 때인 1705년(숙종 31년) 4월 3일에 영희전 동쪽 담장 안에 있는 오래 된 버드나무에 새벽부터 아침까지 두 번이나 벼락이 쳐 근처에 있던 아이가 놀라 죽었고 영조 때인 1765년(영조 41년) 6월 11일엔 영희전 뜰 회화나무에 또 벼락이 쳐서 상처가 나자 아예 벼락 좀 그만 떨어지라고 제사까지 지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