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1 10:37:19

풍경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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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도성 및 궁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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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건축4. 외부 링크5. 같이보기

1. 개요

豊慶宮

대한제국 평안남도 평양부에 있던 이궁(離宮). 한국의 마지막 궁궐이자 행궁이다. 이 궁궐을 마지막으로 행궁제도와 이궁제도가 막을 내렸다.

광무 6년(1902)에 평양을 제2의 수도인 서경(西京)으로 육성하려던 고종 황제에 의해 공사를 시작했지만 나라가 망하기 10년도 남지 않은 시점에 혈세를 궁전 짓는 데 쓰겠다고 우길 정도로 고종의 상황 판단력이 심각하게 문제가 있었던 사례였다. 고종의 신임을 받던 외국인 호러스 뉴턴 알렌도 고종의 풍경궁 건설에 경악하여 그를 로마 제국의 대표적인 암군 네로 황제에 빗댈 정도로 혹독하게 비판했다. 결국 러일전쟁에 휘말려 완성하지도 못하고 대한제국의 아방궁으로 끝났다.
건설당시 사진과 평양자혜의원 도면 등으로 전하는 풍경궁 주요 전각모습

2. 역사

고종의 명에 의하여 짓기 시작했으며, 당시 완공 직전이었고 고종의 어진과 순종 황태자의 예진(睿眞)도 미리 봉안했다. 풍경궁 영건의 의도는 대한제국의 정통성 확립[1]이었으며 한반도에서 열강(러시아, 일본)의 무력 충돌 발생 시 사용할 대한제국 황실의 피난처를 조성할 목적도 있었다[2].

공사가 시작되었을 때에 고종의 입장은 궁궐을 짓긴 하되,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지나치게 성대하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장명숙, 2019 p.11) 하지만, 당시 대한제국의 상황을 보았을 때, 새로운 궁궐을 짓는 것은 아무래도 재정상 무리였고, 민영철과 신우균을 비롯한 관리들의 횡령과 평양에 주둔하던 군인들의 약탈과 강간을 비롯한 범죄행위로 인해 민심이 떨어지게 된다. 사람들은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닌 사치스러운 행위라고 비판하기 시작하였고, 구한말 정부의 이미지 추락에 크게 기여한다. 이후 러일전쟁이 일어나 일본군 평양부에 들어와서 점거하는 바람에 공사가 중단되었고 어진도 서울로 다시 되가져갔다. 이후 풍경궁의 주변은 병참기지로 사용되었다. 1907년 8월 7일 해산되기 전까지 40명의 병정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후 1907년에 풍경궁은 일본에 의해 근대식 병원 평양부 동인의원으로 탈바꿈하게 되었고, 철도 부설 중에 상처입은 노동자들을 치료하는 용도 등으로 사용되었다. 1908년에는 풍경궁의 관제(官制)가 폐지되었고, 봉안되어 있던 어진은 덕수궁 정관헌으로 이전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시기인 1913년에는 평양 자혜의원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923년에는 풍경궁의 서쪽에 근대식 병원 건물을 새로 짓게 된다. 1933년에는 자혜의원이 평양의학전문학교로 바뀌었고, 지금은 북한의 평양의학대학이 이 건물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물론 경복궁 등 다른 궁궐과 같이, 풍경궁도 훼손을 피할 수 없었다. 1925년에 경성 대화정 조계사[3]의 요청으로 풍경궁의 정문인 황건문을 경성으로 가져가 조계사의 산문으로 삼았다. 그래도 사진과 평양의 지도 등을 보면 풍경궁의 주요 건물과 행각 등은 1935년까지만 하더라도 남아 있었지만, 이후 6.25 전쟁 때 송두리째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풍경궁에 대해 더 알고 싶으면 여길 참고하자. 풍경궁에 대해 매우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3. 건축

  • 태극전(太極殿) : 풍경궁의 정전(正殿)이다.
  • 지덕전(至德殿) : 편전이다.
  • 중화전(重華殿) : 동궁전으로 황태자가 사용하는 전각이다.
  • 황건문(皇建門) : 풍경궁의 정문.
    파일:attachment/HGgate.jpg
    황건문(皇建門)은 원래 풍경궁의 정문이었다. 크고 시원하게 뻗은 기둥들의 아름다움으로 이름이 높았다. 1925년에 일본사찰이었던 경성 대화정 조계사[4]에서 이 문을 사들여 산문으로 쓰게 된다. 이 은 지금의 동국대학교 서울 필동 캠퍼스 자리에 있었다. 1926년 8월에는 폭우로 인해 황건문 지붕이 반이 붕괴되어 당시 돈으로 2천만원의 피해가 났다. 해방 이후 이 경성 대화정 조계사 자리에 동국대학교가 건립되고 황건문은 동국대학교 정문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1971년 학생회관이 옆에 신축되면서 현대식 건물과의 부조화와 유지보수부실로 인해 학교당국에서 해체/철거하였다. 이후 주춧돌마저 도서관 근처로 치워지고, 현판은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렇게 유일한 풍경궁의 건축이 사라졌다. 동국대학교 흑역사 중 하나. 경희궁 숭정전이 '정각원' 건물로 동국대를 대표하는 랜드마크 중 하나로 꼽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4. 외부 링크

5. 같이보기



[1] 전통적인 동아시아 제국은 양경(兩京: 두 수도) 제도를 운용했다고 한다. 더욱이 평양은 고조선(단군 조선 및 기자 조선)의 수도로서 전통과 예악(禮樂)이 시작된 곳이었으므로 의미를 부여하기에 좋았다. [2] 당시 황실은 러시아의 주도하에 관철된 삼국간섭에 깊은 인상을 받고 친러적 성향을 띠었다. 더욱이 을미사변 직후였던지라 일본에 대한 경계심이 극대화되어 더욱 러시아에 경도되었던바, 평양에 러시아식으로 편제된 지방군, 진위대가 주둔하고 있었음을 고려하여 그곳에 제2의 궁궐을 영건코자 한 것으로 보인다. [3] 지금의 동국대학교 자리에 있던 일본식 절. 지금의 조계사와는 다르다. [4] 大和町 曹溪寺:현재의 조계사와는 다른 절이니 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