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4 14:54:23

왕륭

세조(고려)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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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녀 : 태조 ~ 문종 · 선종 ~ 공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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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 고려 호족과 군벌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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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경
강충의 어머니(전처) | 평나산신(후처)
강충
구치의
이제건 보육(손호술)
덕주
덕주
보육
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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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의의 언니 작제건
저민의(서해용녀)
강씨부인 용건
몽부인 (성모천왕)
왕평달
도선 왕건 왕식렴
아랫첨자는 배우자를 나타낸다.
보라색 바탕은 혈연 관계가 없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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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 松嶽郡 沙粲
신라 송악군 사찬
? 왕륭 태봉에 합병

泰封 金城 太守
태봉 금성 태수
신규 책봉 왕륭 ? }}}
<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고려 추존 국왕
왕륭 | 王隆
파일:고려 창릉.jpg
창릉 전경
출생 연대 미상[1]
신라 패강진 송악군
(現 개성시 수창동)
사망 897년 5월
신라 금성군
(現 강원도 김화군)
능묘 창릉(昌陵)
재임기간 태봉 금성군태수
896년 ~ 8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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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본관 개성 왕씨
용건(龍建) → 륭(隆)
부모 부왕 의조
모후 원창왕후
형제자매 4남 1녀 중 장남
배우자 위숙왕후[2]
자녀
1남 [ 펼치기 · 접기 ]
외아들 - 태조(太祖, 877 ~ 943)
종교 불교
문명(文明)
묘호 세조(世祖)
시호 원렬민혜위무대왕
(元烈敏惠威武大王)
골품 6두품[3] }}}}}}}}}

1. 개요2. 생애3. 성씨와 이름
3.1. 이름에 관련된 이모저모
4. 대중매체에서
4.1. 소설 《왕건》4.2. 드라마 <태조 왕건>

[clearfix]

1. 개요

통일신라 말기 송악군의 호족이자 고려를 건국한 창업군주 왕건의 아버지로서 고려의 추존 국왕.

의조 작제건과 원창왕후 저민의의 맏아들로 남동생으로는 왕평달과 이름이 남아있지 않는 두 명이 있고, 여동생이 한 명 있었다. 성씨 왕씨(王氏)였는데 그가 살던 시절에 이미 왕씨를 사용했는지는 미심쩍은 부분은 있으며, 이름은 처음에는 용건(龍建), 나중에 융(隆)으로 고쳤다. 그러나 왕건의 숙부이자 왕식렴의 부친인 왕평달 또한 이미 왕씨 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예단할 수 없다. 후백제의 창업군주인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도 속성은 이씨(李氏)였다고 전해진다. 이런 저런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선대부터 왕씨 성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4]

한편으론 고구려의 중심지였던 오늘날 서북한 일대( 낙랑군 대방군 일대)를 토대로 이후에 왕씨를 쓰는 고구려인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거문고를 개량한 왕산악은 물론, 고구려 시대 때 재상을 지냈던 왕고덕도 있었고, 일본의 신찬성씨록에 고려(고구려) 출신 도래인의 조상으로 (고구려인인) 왕충마려, 왕중문, 왕주 등 왕씨 성을 썼던 고구려인이 언급된다. 출신 지역과 성씨, 지지 기반으로 봤을 때 아들 왕건이 고(구)려의 재건을 추구한 것은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저런 정황들을 통해 유추해보면 송악의 왕씨 가문이 고구려의 귀족계 왕씨 가문에서 분파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은 사실이나, 이들 외에도 같은 시기 강주 일대의 호족이었던 왕봉규나 이전 통일신라에서 유학자로 활동했던 왕거인 등이 있었기 때문에 속단하기는 어렵다. 물론 이들 또한 마찬가지로 고구려 유민들이라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말이다.[5][6]

아내는 위숙왕후 한씨(韓氏)로 에서 만나 결혼했기 때문에 '몽부인(夢夫人)'이라는 별칭이 있었으며, 자식으로 왕건이 있었다. 《고려사》 <태조 세가> 총서를 보면 태조가 세조의 장남(長男)이라는 표현이 있어 세조가 태조 외에도 아들이든 딸이든 자식이 더 있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현재 남아있는 기록에서는 세조의 자식이 태조 하나뿐이다.

사후 태조 왕건 고려를 건국하고 국왕으로 등극한 뒤 대왕으로 추존한 세 명의 직계 조상 중 한 명이다.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원렬민혜위무대왕(元烈敏惠威武大王), 자는 문명(文明).

2. 생애

고려 건국설화의 등장인물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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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 왕건 왕식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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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 고려 호족과 군벌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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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악 일대를 지배했던 성주(城主) 출신으로 현대에는 왕륭같은 지방 세력을 호족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시기의 지방 세력가들을 현재 학계에서 일괄적으로 호족이라고 하기 때문에 왕륭이 송악 일대의 호족이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정확히 '송악군 사찬(松嶽郡 沙粲)'이라는 제8등위 관등을 가지고 있었다. 왕륭이 진골일리 없으니 사찬이라면 6두품이라고 봐야할 것이지만 골품이라는건 중앙에서나 의미있기에 지방세력가로 6두품 대우를 해주겠다 정도의 의미였을것이다. 아버지 작제건, 설화 속 조상인 강충, 보육 등 윗대 모두가 부자였다는 기록이 있어 설화의 진실 여부는 차치해도 왕건 일가가 부자였다는 것은 신빙성이 높다. 송악의 유력자로서 평주 박직윤- 박지윤, 황주 황보제공, 정주 유천궁 등과 함께 패서 지역을 대표했던 유력한 호족이었다.
체격이 우뚝하고 수염이 아름다우며 도량이 넓고 커서 삼한(三韓)을 아울러 삼키려는 뜻이 있었다.
《고려사》 <고려세계> 《편년강목》 중.

< 고려사>에는 위와 같은 묘사가 있어 단순히 송악뿐만 아니라 신라를 삼키려는 야욕이 있었다는걸 알 수 있다. 왕륭은 어느 날 꿈을 꿨는데 어떤 미인과 만나 결혼하는 꿈이었다. 꿈을 꾼 뒤 언젠가 영안성(永安城, 아버지 작제건이 살던 곳)에 갔는데 그 곳에서 꿈 속의 미인을 만났으며 이에 놓치지 않고 말을 걸어 나중에 결혼에 성공했다. 근데 아무도 이 미인의 정체에 대해 몰라 세간에서는 꿈의 부인인 몽부인(夢夫人)이라 불렀다고 한다. 혹자는
그가 '삼한의 어머니(三韓之母)'이기에 성(姓)을 한씨(韓氏)로 하였다.
《고려사》 <고려세계> 《편년강목》 중.

라는 설명도 덧붙여져 있다. 877년 4월 아내와 결혼도 하고 집에 도 많으니 송악 남쪽에 을 새로 짓고 거주하기 시작했다.[7] 어느 날 백두산에서 송악까지 유람하던 도선(道詵)이 왕륭의 집을 보더니,
기장[穄]을 심을 땅에 왜 삼[麻]을 심는가?
《고려사》 <고려세계> 《편년강목》 중

이때 도선이 말한 '기장'은 먹는 음식이지만, 사실 이 말은 중세 한국어긔ᄌᆞ와 발음이 비슷하다. 이 '긔ᄌᆞ'는 임금, 즉 군주란 뜻이다.

도선이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던걸 부인 한씨가 듣고서는 왕륭에게 알리자 놀란 왕륭이 버선발로 뛰어가 도선을 만나고자 했고, 도선은 그를 데리고 송악산 정상에 올라가서 배경을 가리켰다.
"(송악의) 이 지맥(地脉)은, 임방(壬方)의 백두산(白頭山) 수목대간(水母木幹)에서 나와 마두(馬頭)에 내리는 명당(明堂)이오. 군(君)은 또 수명(水命)을 타고 났으니[8] 물의 대수(水之大數)를 이어 집(宇)을 여섯 채 또 여섯 채(六六)를 지어 서른여섯 구역(三十六 區)를 만드시오. 그러면 천지의 대수(天地之大數)에 응하여 내년(明年) 필히 성자(聖子)를 낳을 것이니 이름을 왕건(王建)이라 하시오."
그리고 편지를 써 봉인하니, 바깥에 제목이 이랬다.
"삼가 봉서(奉書)를 백배(百拜)하며 바치니 미래통합삼한지주(未來統合三韓之主) 대원군자(大原君子) 족하(足下)께 드립니다."
《고려사》 <고려세계> 《편년강목》 중

그러고서 떠났다고 한다. 명망 높은 도선이 그렇게 말하니 그말대로 집을 고쳐 지었는데 진짜로 이듬해 아들을 낳아 이름을 왕건이라 했다. 도선은 왕건이 17살일 때 다시 돌아와 임금으로서의 도리를 가르쳐주고, 또 홀연히 떠났다고 한다. 이후 시대는 갈수록 혼란스러워져 왕륭은 명주(오늘날 강원도 강릉시)부터 철원을 점령하고 황해도까지 세력을 뻗어온 궁예에게 896년에 귀부했다.

자신의 기반인 송악을 내주고 태봉 수도로 활용하라고 한 점은 귀부한 다른 성주들이 제지 기반을 인정받아 자신의 터전을 지속적으로 보존하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황주는 황보씨의 영지였는데 태봉과 후삼국을 넘어 고려 초기 천추태후 시대에도 황주는 황보씨의 기반이었다. 언뜻 보면 왕륭의 판단이 궁예를 인정하고 따르는 것 같지만 아들 왕건을 송악 성주이자 궁성 공역 책임자로 기용하라고 권한 점을 볼 때 자신의 가문이 새 정권 내에서 유력한 위치를 점하기 위한 행동은 아니었나 생각된다. 아니면 더 높은 뜻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으며 실제로 왕건은 태봉 초기부터 중용되었다. 태봉이 멸망하고 고려가 건국된 후에 세조라는 묘호를 얻은 것은 이러한 점이 반영된 면도 있을 듯싶다.
"대왕(大王)께서 만약 조선, 숙신, 변한 땅(朝鮮肅愼卞韓之地)[9] 의 왕(王)이 되고 싶으시다면, 먼저 송악(松嶽)에 성을 쌓아 제(吾) 장자(長子)를 그 주인으로 삼으소서."
《고려사》 <태조세가> 총서 중. 세조 왕륭이 대왕 궁예에게 조언하다.

이후 금성(金城, 오늘날 북한 강원도 김화군) 태수로 있다가 1년만인 897년 5월에 사망했고, 이후 고향인 송악에 안치되었다. 이후 아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후에 세조(世祖)라는 묘호를 추존했고 그의 무덤 창릉(昌陵)이라 하였는데 미수복 지역인 개풍군의 하위 행정 구역인 남면 창릉리라는 곳에 있다.

3. 성씨와 이름

일각에서는 초명인 용건(龍建)과 후명인 융(隆), 그리고 그의 부친 작제건, 아들 왕건 등의 이름들이 창업의 뜻을 너무 강하게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야 왕건 가문의 조상들이 미래를 보는 초능력이 있지 않은 이상, 후대에 왕건이 실제로 나라를 건국해서 왕으로 오른 뒤에 작위적으로 조정한 느낌이 강하게 난다는 것이다. 이름도 그렇지만 호경으로부터 시작되는 왕씨 집안에 얽힌 설화들은 그냥 신라 말 당대의 그럴듯한 설화들과 당숙종까지 끌어들인 잡탕으로 현대인 관점에서 보기엔 이후에 윤색한 티가 너무 난다.

그래서 원래 이름은 '왕륭'이 아니었는데 고려가 창업한 이후에 개명된 것이라 보는 설도 있다. 마침 성씨가 민간에 정착하기 시작하던 시기가 후삼국시대였다. 호족 세력과 개국공신들에게 한해 성씨가 본격적으로 소급되었음을 의미. 이때부터 그냥 이름 앞 글자 따와서 성으로 삼거나, 그렇게 쓰다가 나중에 다른 성을 얻는 경우가 많았다. 즉, 왕건도 원래 성명(姓名)이 아니라 그냥 이름(名)이었는데, 나라를 세우면서 이름의 앞 글자를 성씨로 정하고, 그 성씨를 아버지에게 소급함과 동시에 피휘를 위해 비슷한 의미의 새로운 이름을 지어 올렸다는 것이다.

이때까진 유교가 불교에 비해 그 세가 크진 못했고, 신라 왕실도 중국에서 들어온 관습인 피휘라는 개념을 알고는 있었지만 내부 사정이 있었는지 굳이 철저히 지키려 하지는 않았다.[10] 그런 세태에 중앙 귀족도 아니고 수도 서라벌에서 가장 먼 북방 변경 깡촌의 호족이 유가의 관점을 지켜가며 이름을 지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왕건 가문 이외에도 평주의 호족인 박직윤(朴直胤)의 아들 이름이 박지윤(朴遲胤)이고, 아자개(阿玆蓋)의 아들 이름이 용개(龍蓋)·보개(寶蓋)·소개(小蓋)인 점 등 나말여초의 호족들이 피휘 관습에 신경을 쓰지 않은 정도를 넘어서 오히려 부모의 한자를 자식이 그대로 이어받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흡사 중세 유럽이나 중동, 혹은 전국시대 일본의 작명과 유사한데 소국들이 난립한 봉건제에서 귀족들이 이름만으로도 부모가 누군지 알릴 수 있도록 비슷하게 형성되는 작명 관습이다. 현대에 유가 관점으로 볼 이유 또한 없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이미 후삼국시대 이전부터 진골과 6부(이하 신라의 육두품 계층) 외에도 다른 유력 민호들 사이에서 성씨가 사용되고 있었음을 간과하고 있다. 일례로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는 그 출신 성분이 진골이나 왕경인에 해당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속성이 이씨(李氏)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고구려계 호족들 가운데 유천궁, 황보제공, 박지윤 등은 이미 각자 성씨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는 다른 지방의 신라계 • 백제계 호족들도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왕씨 집안의 배경에 대한 윤색은 있을지언정 성씨와 이름의 사용 배경에 대한 확대 해석은 지양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왕륭은 당대 패서 호족들 가운데서는 가장 영향력이 강했던 축에 속한 명망 높은 해상 호족이였기 때문에 이전부터 왕씨 성을 사용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높다. 앞서 나왔듯이 고려 왕실과 고구려의 귀족 가문인 왕씨 사이의 혈연상의 친연적 연관이 제기되고 있다.

3.1. 이름에 관련된 이모저모

(이제현이) 또 논하였다.

《편년통록》을 쓴 김관의가, "도선이 세조를 송악 남쪽 저택에서 만나 이르길, '기장을 심을 땅에 왜 삼을 심는가?'라 했다. '기장'과 '긔ㅈㆍ(王, 임금)'는 방언(方言, 우리말) 상 비슷하다. 그리하여 태조께서 성을 왕씨(王氏)로 하셨다"고 기록했다. (…) 아버지(父)가 있는데 아들(子)이 성을 바꾸다니, 천하에 이런 이치가 있던가? 오호라(嗚呼)! 이것이 우리 태조(我太祖)께서 의도하신 바란 말이냐?[11] 게다가 태조께선 세조의 뒤를 이으셔 궁예를 도왔다. 예(裔)는 의심이 많고 질투도 많은데 태조께서 갑자기 왕(王)을 성으로 하시면 재앙이 알아서 오지 않겠는가? 그런즉슨 '《왕씨종족기(王氏宗族記)》'에 따르면 국조(國祖)께서 성(姓)이 왕씨(王氏)셨으니 (태조께선) 처음부터 성(姓)이 왕(王)이었던 것이다. (…) 그러니 기장을 심으라는 설이 어찌 허무맹랑하지 않은가? (김관의가) 또 이르길 의조(懿祖), 세조(世祖)의 휘(諱) 중 나머지(下字)가 태조(太祖)의 휘(諱)와 같다고 했으니 김관의는 개국 전 풍속이 순박해서[12] 그러려니 하고 적은 것이다. '《왕대력(王代曆)》'엔 의조께서 육예(六藝)[13] 그 중 글과 활쏘기에 특히 빼어나시다고 했다. 세조께선 어려서부터 그릇이 크고 삼한을 휘어잡을 의지를 가지셨다 하니 조고(祖考)의 이름을 범해 자신과 아들의 이름을 지으셨겠는가? 게다가 태조께선 창업수통(創業垂統)[14]하시고 동법선왕(動法先王)[15]하셨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면 이름 짓는 예법을 무시하셨겠는가? (…) 생각건대 신라의 시기(新羅之時)에 그 임금을 '마립간(麻立干)'이라 하고 그 신하를 '아간(阿干)', '대아간(大阿干)'이라 했다. 그리고 시골의 민(民)들도 '간(干)'을 자기 이름에 덧붙혀 불렀으니, 바로 존칭의 의미였다. 아간(阿干)은 혹 아찬(阿粲), 알찬(閼餐)이라 하니 '간(干), 찬(粲), 찬(餐)' 세 글자가 모두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의조, 세조의 휘 중 나머지(下字)[16]도 역시 '간(干), 찬(粲), 찬(餐)'의 발음과 비슷하다. 그러니 존칭의 의미로 덧붙여 부르던 것이지 원 이름이 아니었던 것이다. 태조께선 단지 이 존칭을 아예 이름으로 삼으신 것인데 호사가들이 거기다 의미를 부여해 '삼세일명(三世一名)이면 필왕삼한(必王三韓)이라'[17]고 말하니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고려사》 <고려세계> 이제현 <논평> 중

고려 말의 명망높은 유학자 이제현 작제건-용건- 왕건 3부자의 이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했다. <논평>은 《 고려사》 <고려세계>에 인용돼있다. 그 내용은 후대의 유가적 기준에 맞지 않는 부분을 가설을 통해 최대한 실드를 쳐주는 내용인데 본인이 고려 왕조의 녹을 먹는 대신이었므로 당연한 것이었다. 3대가 피휘를 지키지 않고 '건'자 돌림자를 쓴 것은 사실 이름이 아니라 고대 한국에서 존칭의 의미가 있던 '간'이 와전된 것이라고 보았다. 초기 신라의 왕호인 거서간, 마립간이나 신라 관등의 대아'찬', 파진'찬' 등의 '찬'도 간의 변형으로 보이는데 이것과 연결시킨 것이다. 기록을 요약하면 '태조는 단지 조상 대대로 '간(干)'이라 불리던 것을 자신의 이름으로 삼았을 뿐인데 김관의의 기록이 잘못되었다.'라고 볼 수 있다.

요약하자면
  • 김관의의 기록은 유교식 예법상 맞지 않다.
  • 그러니 예법을 아는 의조·세조·태조가 성명을 그렇게 지었을 리가 없다.
  • '건(建)'의 의미는 신라 때 존칭이던 '간(干)'과 같은 뜻이다.
  • 태조는 그걸 이름으로 썼을 뿐이다.
  • 그렇기에 '건'은 돌림이 아니라 어쩌다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4. 대중매체에서

4.1. 소설 《왕건》

김성한의 소설 《왕건》에서는 해적과의 싸움에서 아내와 자식들을 잃은 장사치로 등장한다. 외아들인 왕건 역시 평범한 장사치로 키우려 했으나 왕건의 재목을 알아본 궁예는 왕건을 자기 휘하에 둔다. 몇 년 뒤 간암으로 세상을 뜨면서 왕건에게 "항상 공은 남에게 돌려서 뾰족하게 나오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다.

4.2. 드라마 <태조 왕건>

파일:왕륭.jpg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왕륭(태조 왕건) 문서
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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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녀독남인 왕건이 877년생이니 840년대 ~ 850년대 전후 출생으로 추정된다. [2] 별칭 몽부인(夢夫人). 성씨는 한씨(韓氏). [3] 진짜 6두품이라기 보단 지방세력가로 6두품 취급해준 것에 가까울 것이다. [4] 설화적인 각색이 다분한 편년통록보다 더 사실적이라고 평가받는 왕대종족기에 따르면 이미 선대(국조)부터 왕씨 성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5] 물론 왕건 가문의 경우 명백히 고구려계 패서호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이건 기원을 논하는 부분이지 정체성 측면에서는 별다른 이견은 없다. 설령 왕건 가문이 고구려 왕씨 출신이 아닌 다른 어딘가에서 흘러들어왔던 것이라고 해도 어차피 왕건대에는 완전히 현지인과 혼합되어 있었을 테니 별다른 기록도 남지 않은 것이다. 당장 발해의 경우도 고구려화된 속말말갈인들이 건국에 크게 기여했다고 보여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발해의 위상에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닌 것과 비슷하다. [6] 참고로 같은 고구려계라 해도 당시 패서지방에는 여타 지방에서 이주해온 고구려인들이 엄청나게 뒤섞여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고구려가 멸망할 때 패서지방으로 어마어마한 피란민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왕건의 조상인 호경에게 백두산에서 내려와 정착하게 되었단 설화가 있는 것에는 이런 역사와 관련된 구전이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크다. [7] 《고려사》에는 이 자리가 옛 본궐( 연경궁) 봉원전 자리라고 했다. 본궐 문서 참조. [8] 음양오행 중 수성, 물의 속성이란 뜻이다. 서해 용왕의 외손자라 그런 듯마 [9] 각각 조선은 고조선의 중심지였던 지금의 평안도와 요동지역을, 숙신은 당시 여진족이 활동했던 지금의 함경도와 간도지역을, 변한은 지금의 한반도 남부를 칭하는것으로 보인다. 즉 과거 삼국시대에 영유했던 땅을 말하는 것이다. [10] 신라는 중기의 열조 원성왕 대까지 피휘를 하다가 말다가 한다. 일본도 잘 지켜지지는 않아서 헤이안 시대에 오오토모씨(大伴氏)가 준나 천황의 이름(오토모大伴)을 피한다고 성씨를 오오토모에서 토모伴로 바꾸기도 했다. 재미있게도 김관의의 주장과 비슷하게, 일본의 천황가는 집안 대대로 같은 이름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으며(물론 예외도 많다), 근현대 부계 직계로 이어진 천황들은 모두 도모히토 - 아야히토(恵仁) - 오사히토(統仁) - 무츠히토 - 요시히토 - 히로히토 - 아키히토 - 나루히토 이렇게 8대를 물려가면서 같은 히토(仁)라는 글자를 이름에 넣어 쓰고 있다(나루히토와 같은 항렬인 후미히토의 아들인 히사히토까지 합치면 9대에 달한다). [11] 고려 사람이자 유학자인 이제현은 김관의의 기록이 자신의 군주인 고려 태조를 모독하는 말로 보였을 것이니, 이 부분을 논하면서 깊은 빡침이 올라왔을 것이다. [12] 즉 중국의 풍습인 피휘가 정착하기 전이어서 [13] 선비가 배워야 할 6가지 기예. 즉 시 짓고 글 짓고 예법과 음악을 배우고 활쏘기와 수레 몰기(말타기)를 익히는 것. [14] 국가를 창건하고 왕통을 잇다. [15] 행동거지를 역대 선왕들을 본땀. [16] 즉 '건(建)'. [17] 3대가 한 이름을 쓰면 반드시 삼한의 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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