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3 17:07:53

천왕

1. 군주의 칭호
1.1. 주나라 왕의 별칭1.2. 오호십육국· 남북조 시대 유목 민족 왕조 군주의 칭호1.3. 그 외 중국사의 자칭 천왕1.4. 동아시아 황제와 유사한 칭호 목록
2. 경칭
2.1. 한국 신화2.2. 불교 신화2.3. 그 외
3. 지명4. 데스티니 가디언즈의 무기 천둥의 왕5. 성전의 등장인물6. 무협소설

1. 군주의 칭호

天王

하늘 천 자와 임금 왕 자로 구성돼 있으며 하늘의 임금이란 뜻이다. 중국사에서 은~주까진 임금의 별칭이었지만 이후 5호16국 시대나 남북조 시대에 정식 군주호로 사용됐다.

천왕은 일본의 천황 칭호의 성립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여겨진다. 중화사상, 도교[1], 불교의 융합이다.

천왕의 은 (특히 군주의 칭호일 때) 영어의 celestial, heavenly, 즉 '하늘에 관한', '하늘스러운', '하늘의 권위를 받은' 정도의 뉘앙스로 해석하는 게 적절할 듯하다. 만약 천왕의 天을 '하늘의(of the Heaven)'라고 해석하면 말 그대로 하늘을 다스리는 최고 신()이라는 의미가 되는데, 천왕의 칭호를 쓰는 군주들이 동시에 '천자(하늘의 아들)'를 칭한 것[2]이 되므로 모순이 된다. 그래서 天 부분을 영어로 직역할 때는 'celestial' 또는 'heavenly'로 옮기는 게 일반적이다.[3] 신을 천왕이라고 칭하는 경우는 of the Heaven으로 봐도 상관 없지만, 인간 군주의 칭호로 사용할 경우도 고려한다면 celestial, heavenly가 가장 무난하다.

1.1. 주나라 왕의 별칭

주나라 왕은 천자(天子)라고도 칭하였다. 또한 '천왕(天王)'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천자(天子)인 주왕(周王)'의 줄임말이다.

1.2. 오호십육국· 남북조 시대 유목 민족 왕조 군주의 칭호

중국에 '침투'해 나라를 세운 북방 유목 민족들은 황제라는 칭호 대신 천왕이라는 칭호를 쓰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중국의 역사서에는 천왕이라는 칭호가 ·의 제도를 취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외에도 불교의 영향 등 복합적 이유가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최근 연구에는 다음과 같은 이론이 제시되고 있다. 북방 유목 민족은 본래 중국의 천자에 대응되는 선우(單于)라는 칭호가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한족 왕조가 외부 유목 민족의 지도자에게 책봉해주는 제후 칭호처럼 변질돼서 이를 대체할 칭호로서 천왕이 등장했다는 것. 아직 통치 체제상 북방 유목 민족과 한족의 융합이 이뤄지기 전이라 전자를 위한 칭호를 천왕, 후자를 위한 칭호를 황제로 했으리라고 추정되고 있다.[4][5]

그래서 오호십육국과 남북조 시대의 북방 유목민 왕조의 군주들은 평생 천왕만 칭하고 사후에 황제의 시호를 받거나, 아니면 천왕을 했다가 아들에게 천왕 직위를 물려준 뒤 본인은 태상황제라고 한다든가 하는 일들이 있었다. 또 황제를 칭하고 있다가 중간에 천왕으로 바꾸거나,[6] 반대로 천왕을 칭하다가 황제로 바꾸는 등의 일들이 기록에 보인다.

참고로 역사학자들은 고구려가 자국의 왕을 태왕(太王)이라고 한 것이나 백제· 왜국이 자국의 왕을 대왕(大王)이라고 한 것 등이 이 천왕 칭호와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관련성을 연구한다.

다음은 이 시대에 천왕을 칭한 사례들 중 일부다.
  • 전조(前趙)[7]: 318년 외척인 근준(靳準)이 황제 유찬(劉粲)을 죽이고 대한 천왕(大漢天王)을 자칭하였다.
  • 후조(後趙)
    • 330년에 석륵(石勒)이 대조 천왕(大趙天王)을 칭했다가 같은 해에 황제를 칭하였다.
    • 334년에 석호(石虎)가 거섭조천왕(居攝趙天王)을 칭했다가 337년에 대조 천왕(大趙天王)으로 고치고, 349년에 황제를 칭하였다.
  • 전진(前秦): 357년 부견(苻堅)이 즉위하고 대진 천왕(大秦天王)을 칭하였다. 385년 부견 사후에 아들 부비(苻丕)는 황제를 칭하였다.
  • 적위(翟魏): 388년, 적료(翟遼)가 대위 천왕(大魏天王)을 칭하였고, 391년에 그 아들 적소(翟釗)가 이어서 대위 천왕을 칭하였다.
  • 후량(後凉)
    • 396년 여광(呂光)이 대량 천왕(大凉天王)을 칭했다. 399년에 아들인 여소(呂紹)에게 천왕위를 물려 주고 스스로는 태상황제(太上皇帝)가 되었다.[8]
    • 여소 이후로 여찬(呂纂), 조카 여륭(呂隆)이 천왕을 칭하였다.
  • 후진(後秦): 399년, 요흥(姚興)이 황제 칭호를 천왕으로 바꾸었다. 416년 요흥이 사망한 뒤 아들 요홍(姚泓)은 다시 황제를 칭하였다.
  • 후연(後燕)과 북연(北燕): 400년, 모용성(慕容盛)이 황제 칭호 대신 서인천왕(庶人天王)을 칭하였다. 그 후 모용희와 북연의 고운(高雲)[9], 풍발(馮跋), 풍홍(馮弘)의 존호도 모두 천왕이었고 사후에 시호를 황제라고 하였다.
  • 북주(北周): 557년 우문각(宇文覺)이 대주 천왕(大周天王)을 자칭했고, 559년에는 우문육(宇文毓)이 황제를 칭했다.

1.3. 그 외 중국사의 자칭 천왕

오호십육국 시대와 달리 다른 시대에는 천왕이라는 칭호가 종교적 색채가 강한 경우가 많았다.
  • 후한(後漢) 시기에 복직(服直)이 145년에 파군에서 수백 명의 무리를 모으고 천왕을 자칭했다.
  • 남송(南宋)의 양요(楊幺)가 대성천왕(大聖天王)을 자칭했다.
  • (金)나라 말년에 포선만노(蒲鮮萬奴)가 동진(東眞)을 세워 대진 천왕(大眞天王)을 자칭했다.
  • 수당교체기에는 왕수발(王須拔)이 만천왕(漫天王)을 자칭했다.
  • 원나라(元) 때 두가용(杜可用)이 원나라에 반기를 들고 거병하였고 담린(譚麟)이 그를 따랐는데, 두가용은 스스로를 두 성인(杜聖人)이라고 부르며 천왕(天王)을 자칭하였고 담린(譚麟)은 부천왕(副天王)을 자칭했다.
  • 원나라 때 장병(蔣丙)이 순천왕(順天王)을 자칭했다.
  • 명나라(明) 때 왕금강노(王金鋼奴)가 사천왕(四天王)을 자칭했다.
  • 명나라 때 하묘순(何妙順)이 천왕(天王)을 자칭했다.
  • 청나라(淸) 말기 태평천국(太平天國)을 일으킨 홍수전(洪秀全)과 그 아들 홍천귀복(洪天貴福)이 천왕을 자칭했다.

1.4. 동아시아 황제와 유사한 칭호 목록

2. 경칭

2.1. 한국 신화

역대 한국 왕조에서 '천왕(天王)' 호가 공식 군주호로 채택된 적은 없다. 천왕은 민간 신앙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남성 신 중 유명한 신이 ‘~대왕’이나 ‘~천왕’ 호칭을 가졌다[11]. 이 대왕 혹 천왕 칭호를 가진 신은 신사(무교)에서 신상과 함께 모셔졌다. 《동국이상국집》 '제동서양악대왕문'에 따르면 '대왕' 칭호는 나라에서 숭(崇)한 이름이라고 한다. 즉 대왕은 정부에서 높힌 이름이고 천왕은 민간에서 높힌 이름이다. 《고려사》가 인용한 《편년통록》에선 호경이 '구룡산 대왕'으로 나오지만 제왕운기에선 '구룡산 천왕'으로 나온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 삼성사는 가장 오래된 단군의 사당인데,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당시 ' 단인천왕', ' 단웅천왕', ' 단군천왕'을 모셨으며 각기 나무로 만든 신상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 개화기 이후 문헌에서는 천왕이 황제 급 칭호라는 생각이 희박해졌는지 천왕 대신 천황으로 고쳐 쓴 예도 있다.
  • 부여 및 고구려 건국 신화의 등장인물 해모수'천왕' 혹 '천왕랑(天王郞)'[12]이란 별칭이 있었다.

고려 건국설화의 등장인물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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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경
강충의 어머니(전처) | 평나산신(후처)
강충
구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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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주
덕주
보육
진의
당숙종
진의의 언니 작제건
저민의(서해용녀)
강씨부인 용건
몽부인 (성모천왕)
왕평달
도선 왕건 왕식렴
아랫첨자는 배우자를 나타낸다.
보라색 바탕은 혈연 관계가 없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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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사가 인용한 편년통록에 따르면 고려 태조의 시조인 호경은 여신인 평나산신과 결혼해 산 이름을 구룡산으로 바꾸고 '구룡산 대왕'이 됐다고 하는데, 제왕운기의 경우 호경이 '구룡산 천왕'이 됐다고 한다. 이는 대왕 급 신과 천왕 급 신이 동격이었다는 걸 보여준다. 또 제왕운기에 따르면 '지리산 성모'가 도선에게 명해 세조를 찾아가게 했다. 이승휴는 지리산 성모가 즉 '지리산 천왕'이라고 주석을 달았다[13]. 이는 지리산 성모가 여성 신격과 남성 신격을 모두 가졌기에 두 칭호를 모두 가진 것이다[14].
  • 지리산 태백산은 민중의 사랑을 매우 많이 받았다. 위에서 언급했듯 지리산신은 여성 신격과 남성 신격을 모두 가졌는데, 그래서 지리산 성모, 지리산 천왕이란 이름을 동시에 가졌다[15]. 또 세종실록 지리지, 신중동국여지승람을 따르면 지리산신과 태백산신은 유이하게 '대천왕(大天王)'이란 이름을 가졌다는 걸 알 수 있다[16].

2.2. 불교 신화

불교에서는 천신(天神)에 대한 경칭으로 천왕이 쓰이고 있다. 예를 들어 사천왕(四天王) 같은 용어가 그 예다.
  • 가야 건국 신화의 등장인물 정견모주는 남성화되어 칭호가 '정견천왕(貞見天王)'이 된 적 있다. 정견천왕은 불교적 의미의 천왕으로 보인다.
  • 묘청은 서경 임원역에 대화궁을 지은 후 8신을 골라 그 중 한 명에게 '증성악 신인 - 실덕 늑차천왕'이란 이름을 올렸는데, 늑차천왕은 불교 사천왕 중 남방천왕이다.

2.3. 그 외

  • 힌두교에서는 '데바라자'와 대응된다. 데바는 신이고 라자는 왕을 뜻한다.
  • 고대 삼한엔 불가침의 영역인 '소도'가 있었고 그 제사장인 ' 천군(天君)'이 있었다고 한다.
  •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고려 말~세종 재위 당시 송악산 정상에 대황당(大皇堂)이란 신사(무교)가 있었다고 한다. 이 대황(大皇)은 중국 도교 삼황과 한국 신화 천왕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3. 지명

天王 또는 天旺 등 포기가 있으며 높은 산의 봉우리에도 천왕봉이란 이름이 자주 붙는다.

4. 데스티니 가디언즈의 무기 천둥의 왕

천둥의 왕 항목 참조.

5. 성전의 등장인물

해당 항목 참고.

6. 무협소설

황규영 작가의 무협소설. 총 7권 완결.


[1]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삼황으로 천황, 지황, 태황이 있었다. 사마천은 삼황이 실제 역사가 아닌 신화라고 여겨 기록하지 않았다. [2] 주나라의 왕은 천왕 또는 천자라고 불렀다. [3] 일반적으로는 의역해서 그냥 emperor로 쓰지만 천왕의 정확한 뜻을 풀어서 설명할 때는 heavenly prince/heavenly king(천왕)으로 직역한다. 또한 중화 제국을 번역할 땐 황제들이 천자를 자칭했으므로 celestial emipre라고도 한다. celestial이라는 단어가 중국의 용어를 번역하는 데 사용되는 빈도가 높아서 아예 이 단어에 '중국의'라는 뜻이 추가되었다. [4] 최근 이 시대를 연구하는 한국의 중국사학자들이 이런 천왕/황제 이원화를 비롯하여 이 시대만의 독특한 사회 질서를 가리켜 호한체제(胡漢體制)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이 용어로 검색해 보면 한국에서 쓰여진 관련 논문들을 찾아볼 수 있다. [5] 또, 당시까지만 해도 '황제'는 한족 왕조만 사용했었기 때문에 이민족 군주가 사용하기에는 이민족 피지배층에 대해서도, 한족 피지배층에 대해서도 껄끄러웠으리라는 추정 또한 존재한다. 실제로 중국 밖에서 군주들이 스스로 중국와 황제와 비슷하게 행세하긴 했어도 아예 칭호까지 '황제'나 '천황' 같은 칭호를 쓰는 예가 등장한 것은 오호십육국시대(304~439) 이후의 일이다. 예를 들어 일본 천황은 7세기 후반 덴무 덴노 지토 덴노 때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게 정설이다. 베트남 딘 왕조의 시조 딘보린이 베트남 최초의 황제가 된 것은 968년이다. 한국사에서 '황제'라는 칭호를 대놓고 처음 쓴 것으로 보이는 군주는 고려 광종인데(물론 그 이전 군주들도 국내에서는 사실상 황제와 다름 없었지만 아예 칭호를 황제라고 한 건 광종이 처음이라고 추정) 그의 재위 기간은 949~975년이다. 따라서 중국의 이웃나라나 이민족 입장에서 황제라는 칭호는 진시황 이후 한족 특유의 칭호로 인식해 거부감이 있었고, 그래서 황제 칭호의 채택이 늦어졌을 개연성이 지적되고 있다. 반면에 '왕'은 진시황 훨씬 이전부터 있었고 이미 한족 이외의 민족들에게도 전파돼서 일부 국가에서 쓰고 있었다. 따라서 이런 배경에서 천왕 같은 칭호가 고안된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다. [6] 이 경우 역사서의 집필자들이 해석하길, 천왕으로 바꾼 것은 스스로 칭호를 낮춘 것으로 여겨서 그렇게 기재한 경우가 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최근 연구에서는 '낮춘 게 아니'라는 반론들이 있다. 황제와 천왕 사이에 단순하게 상하관계가 있다고 보아 스스로 '낮췄다'고 이해하기 곤란하다는 것. 대표적인 반례로 드는 케이스로는 전진 부견이 있다. 부견은 일시적이긴 하지만 북조(北朝)를 통일했고 더 나아가 남방의 동진까지 흡수해 통일할 뻔했는데 끝까지 황제의 칭호를 쓰지 않았다. 부견은 자신의 출신 민족인 저족 뿐만 아니라 한족이나 다른 이민족들 모두를 포용하고 아우르려 했던 이상주의자로 평가되는데, 한족 중심의 황제 칭호보다는 천왕이라는 칭호를 통해 여러 민족을 통치하는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려 한 것으로 해석된다. [7] 본래 국호가 '한(漢)'이었으나 훗날 이름이 '조(趙)'로 바뀌어 흔히 전조라고 부른다. 다른 표현으로는 먼젓번 이름과 나중 이름을 합쳐서 한조(漢趙)라고도 한다. [8] 당시 후량이 황제 대신 천왕 칭호를 썼으므로 태상천왕(太上天王)이 맞는 게 아닌가 해서 그렇게 '정정'해 적는 경우도 있긴 하다. 하지만 뭔가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 일부러 정말로 아들은 '천왕', 본인은 '태상황제'로 했을 수도 있다. 정식명칭은 이것. [9] 고구려계이다. [10] 진성여왕 대에 세워진 월광사 원랑선사 탑비에서는 진성여왕의 아버지 경문왕에게 '황왕(皇王)'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11] 여성 신은 성모 혹 신모 호칭을 가졌다. [12] '천왕의 아들' 혹 '천왕 도령'이란 뜻이다. [13] 신중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여말 이성계가 왜구를 몰아내자 왜구들은 '지리산 천왕'이 자신들을 내쫓았다고 여겨 칼로 지리산 천왕 신상을 쳤다고 한다. 그래서 현존하는 지리산 천왕 신상에 칼자국이 남아있다고 한다. [14] 신중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지리산 천왕은 또 위숙왕후라고 한다. 유명한 여성 인물과 융합된 것이다. [15]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지리산신은 워낙 유명한 신이라 신사도 각기 남원, 진주, 함양 세 곳에 있었다. [16] 세종실록 지리지엔 진주의 '지리산 대천왕사'가 나오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엔 근산신사(태백산신에게 망제를 올리던 곳)가 '대천왕사'였다고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