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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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燕[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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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1세기 ~ 기원전 222년 | ||
별칭 | 언(匽) | |
위치 | 허베이, 랴오닝 | |
수도 | 계(薊) | |
국성 | 희(姬) | |
국가원수 | 백작 → 후작 → 왕[2] | |
주요 군주 |
역왕 희퇴 소양왕 희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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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 상고 중국어 | |
문자 | 전서 (대전체) | |
종교 | 중국 토속 종교[3] | |
종족 | 화하족 | |
통화 | 명도전 | |
성립 전 | 주나라 | |
멸망 후 | 진나라 | |
현재 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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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상고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국가들 중 하나였다. 시조는 주문왕의 아들이자 주무왕의 아우였던 소공 석(召公 奭)으로 형인 무왕을 도와 상나라을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워 오늘날의 베이징과 허베이성 일대를 분봉받은 것이 연나라의 시초가 되었다.[4]춘추전국시대에는 언(匽)으로 불렸고, 연(燕)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진한시대 이후였다고 한다. 황하 근처의 허난성 신향시 연진현(延津縣) 북동쪽이 세력의 출발 기반이었다. 수도는 현재의 베이징시 팡산구(房山区) 인근인 계(薊)였으며, 분봉 당시의 작위는 후작이었으므로 처음엔 후국이었다.[5]
영토는 동쪽으로 고조선, 서쪽으로는 조나라, 남쪽으로는 제나라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다. 건국 당시 연나라 일대는 완전한 화하족 즉 한족의 영토가 아닌 개척 과정에 있는 지역이었으며, 따라서 연나라 건국 이후 한족들이 많이 이주했다.[6][7]
2. 역사
2.1. 서주시대
상나라 멸망 시점의 요하 지역 문화권 분포.
연나라가 처음 분봉된 것은 요하 지방이 아닌 황하 근처였고, 이후 요서와 요동 지방으로 끊임없는 전쟁과 복속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여 우리가 아는 그 영역을 완성했다. 연나라 건국 시점에 가장 가까이 위치한 이민족이었던 장가원 상층유형의 경우, 상나라 시절에도 여러번 침략하여 약탈하는 등 중국의 북방 안보를 위협하는 세력이었는데, 연나라 건국 이후 이들과의 전쟁을 통해 기원전 10세기 중반 즈음 정복한 것으로 보인다.
2.2. 동주시대
2.2.1. 춘추시대
아무래도 중원에서 상당히 떨어진 외곽에 위치한 국가이다보니 서주시대에나 춘추시대에는 별 두각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른 나라와 엮인 침략 기록이 딱 한번, 장공(壯公)때 말고는 거의 없고,[8] 타국과 엮인 정변도 거의 없었다.즉 이 시기의 연나라 역사에 대해서는 알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다른 중원의 국가와 교류가 적었고 연나라 자체적으로 남긴 역사서가 죄다 소실되었기 때문에 남은 기록이 없는 것이다. 《 사기》, 《 춘추》, 《 전국책》에도 연나라와 관련된 기록은 매우 부실하다.
타국과의 정치적인 교류가 적었던 것은 중원에서 한발짝 벗어난 변경 국가였기 때문에 그렇다 치고, 자체적인 기록이 실전된 것에는 두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는 이민족과의 다툼이다. 연나라는 당시 중원의 한족들 시각으로는 다른 이민족들과 접경한 최전방에 위치한 국가였고, 실제로도 많은 이민족과의 전투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건국 초기의 연나라는 수도 계 근처를 제외하면 하북성 전역이 이민족 세상이었고, 바로 근처에 고죽국, 산융, 중산국, 영지 같은 이민족 국가나 집단도 많았다. 따라서 이들의 잦은 침략으로 많은 기록이 소실되었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두 번째 가설로는 진시황에 의해서 6국(六國)의 역사서를 불에 태웠을 당시 남겨진 것이 없지 않나 하는 가설이다. 실제로 진시황이 많은 역사서를 없애버린 것은 사실이며, 다른 5국들은 그렇게 없앴어도 많은 기록이 남아 어느 정도 남은게 있지만 연나라는 교류가 적어 그때 없애버린 기록외에 다른 기록이 안남은 것이 아니냐는 설이다. 물론 두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많은 기록이 사라졌을 수도 있으며, 이유야 어찌되었건 연나라는 자체적으로 남긴 기록이 거의 현전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이름만 남은 듣보잡 소국도 아니고, 전국칠웅의 반열에 든 나름의 강대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연나라는 건국 초기의 기록을 제외하면 관련 기록이 지극히 무미건조하다. 시조인 소공때부터 연왕 쾌(噲)[9]때까지의 기록은 군주가 즉위하고 사망한 기록 외에는 남아 있는 게 별로 없을 정도이다. 《사기》 <연소공세가>에는 소공 석이 분봉된 이후, 그의 9대 손인 혜후(惠侯)의 기록으로 바로 넘어와 아예 기록이 한 줄도 채 남지 못하고, 존재가 실전된 군주들이 있었을 정도였다. 그나마 《연국사고》, 《 죽서기년》, 발견된 금문 등을 통해 실전된 군주들의 이름 정도는 알 수 있게 되었다.
부실한 기록과는 별개로 국가 자체는 춘추시대 난세의 소용돌이에서 한발짝 빗겨나가 있었던 덕분에 조용히 힘을 길러, 연장공때는 나라의 영토를 크게 넓혔고, 공작을 칭할 정도로 강성해졌다. 고고학적으로는 춘추시대부터 연나라의 동진이 서서히 시작되고 있었다.
2.2.2. 전국시대
기원전 4세기경 연나라와 접한 유목문화였던 옥황묘 문화를 정복했다. 옥황묘 문화는 중국과의 지속적인 교역을 통해 유목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상당 부분 잃고, 중국에 거의 동화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후 능원의 오도하자 문화까지 흡수하여, 황하- 내몽골- 요서의 중간에 위치한 요충지를 점유하는 데 성공했다.그후에도 별 일 없이 지내다가 전국시대 중반 연문후가 여기저기서 박대당하던 유명한 변설가 소진(蘇秦)을 등용해 재상에 앉혔다. 소진은 연나라 재상의 신분으로 진나라를 제외한 다른 6국을 돌며 진나라에 대항한 동맹을 설파했는데, 이를 합종책(合縱策)이라고 부른다.[10]
이후 역왕(易王)의 치세때 전국시대 다른 나라와 같이 왕을 칭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이었던 연왕 쾌의 치세때는 정치적으로 대혼란이 일어나 수백년 동안 이어져오던 나라가 허무하게 멸망할 뻔했다. 어리석은 암군이었던 연왕 쾌가 간신인 자지(子之)에게 선양하면서 혼란이 시작되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자지의 패거리였던 대부 녹모수(鹿毛壽)가 늙은 연왕 쾌에게 신하에게 선양하는 것은 아름다운 덕을 보이는 것이라면서 자지에게 선양한다고 하면 자지는 사양하여 받지 않을 테니 두 명 모두 아름다운 이름을 후세에 길이 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를 그럴 듯하게 여긴 연왕 쾌가 자지에게 진짜 선양하자 자지는 그대로 연나라를 냉큼 먹어치웠다는 것이다.
어쨌든 어처구니없는 선양이 정말로 이루어진 후에 태자 평(平)과 장군 시피(市被)가 반 자지 반란을 일으켜서 몇 달간 싸우게 되었고, 이로 인해 연나라는 막장으로 흘러가게 되었으며 결국 시피는 내전에서 패배하고 죽게 되었다. 이 와중에 강대국인 제나라의 선왕이 보낸 광장 휘하의 군대가 쳐들어오면서 찬탈자인 자지는 살해당했고, 암군 연왕 쾌는 자살했으며 연나라는 제나라의 속국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한나라(韓)로 도망가 있었던 공자 직(職)[11]이 왕위에 오르면서 최악으로 치달은 상황이 간신히 수습되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연나라 중흥의 명군이었던 연소양왕(昭襄王)이었다. 연나라는 소양왕의 치세하에서 단숨에 최전성기로 뛰어오르게 되었는데 소양왕은 국가를 부강하게 해줄 인재를 찾기 위해 대부 곽외(郭隗)에게 그 방법을 물었다.
곽외: "옛날에 어떤 왕이
천리마가 갖고 싶어서 신하에게 1,000금을 주며 천리마를 구해오라고 했습니다. 허나 그 신하는 뜬금없이 죽은 천리마의 뼈를 1,000금을 준 후 사왔고, 화가 난 왕이 이유를 묻자 그 신하가 '천리마 뼈도 1,000금을 주고 살 정도이면 진짜 천리마를 크게 쳐줄 것이라는 소문이 돌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 신하의 말대로 1년도 되지 않아 진짜 천리마가 세 마리나 들어왔다고 합니다."
소양왕: "갑자기 천리마는 왜 이야기하는 것이오?"
곽외: "마찬가지로 별볼일 없는 인물을 후하게 대한다면 천리마 같은 인재가 모여들 것이 아니겠습니까?"
소양왕: (아직도 감을 못 잡고) "그럼 그 말뼈다귀 같은 인간은 어디 있는 것이오?"
곽외: " 바로 신이옵니다."
소양왕: "갑자기 천리마는 왜 이야기하는 것이오?"
곽외: "마찬가지로 별볼일 없는 인물을 후하게 대한다면 천리마 같은 인재가 모여들 것이 아니겠습니까?"
소양왕: (아직도 감을 못 잡고) "그럼 그 말뼈다귀 같은 인간은 어디 있는 것이오?"
곽외: " 바로 신이옵니다."
소양왕이 곽외를 중용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자신의 재능을 뽐내고 싶었던 인재들이 연나라로 물밑듯이 몰려들었고,[12] 특히 악의(樂毅)를 기용해 제-연 전쟁에서 제나라의 성 두 개[13]를 남겨 놓고 모두 함락시켜 약 5년 동안 제나라를 거의 멸망시켰다. 또한 소양왕은 진개(秦開)[14]에게 명령하여 고조선을 침범해 2,000여 리의 영토를 획득했으며 동호 또한 굴복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소양왕의 사후에 즉위한 어리석은 아들인 혜왕(惠王)이 제나라의 왕족 출신 명장인 전단의 이간계에 걸려 악의를 내치고 기겁을 기용함으로 인해 거의 이긴 제-연 전쟁에서 참패하게 되어 연나라의 국력은 점점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이때 성안군(成安君) 공손조(公孫操)가 쿠데타를 일으켜 암군인 혜왕을 시해하고, 왕족인 무성왕(武成王)을 옹립했다.
제-연 전쟁 외에도 혜왕은 괜히 옆나라인 조나라(趙)를 건드려 싸우면서 국력을 많이 소모했다. 사소한 오해로 인해 벌어진 싸움에서 무려 600,000명이나 되는 대군을 소모해버렸고, 수년 후 그 한맺힌 원수를 갚겠다고 극신이 200,000명의 대군을 이끌며 복수전을 펼쳤지만 조나라의 장수 방난에게 전멸당했다. 이때가 전성기의 조나라라면 모를까 장평대전으로 400,000명에 달하는 장정을 잃고, 피폐해져 있었던 시절의 조나라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후 연나라의 군사적 방위력이 전무해지다시피 한 전국시대 말기에는 진시황의 통일전쟁에 위험을 느낀 연왕 희(喜)의 태자 희단(丹)이 진시황을 암살하기 위해 형가(荊軻)를 함양으로 보냈지만 결국 암살에 실패했고, 격노한 진시황의 침략으로 공포에 빠져 진나라에 태자 단의 머리를 보내어 사죄했지만 기원전 222년에 연왕 희가 압록강에서 생포되면서 멸망하게 되었다.
2.3. 초한쟁패기
진말한초에 일어난 진승·오광의 난때 장초의 왕 진승의 부하였던 무신(武信)의 측근이었던 한광이 자립하여 연왕이 된 후, 희성 연씨들에 갈음하여 연나라를 재건했으나 항우의 18제후왕 분봉에서 장도에게 쫓겨나게 되었고, 이후 장도는 전한의 태조 유방의 제후국이 되었으나 반역을 일으켜 숙청당했으며, 유방의 친구빨로 노관이 임명되었다가 역시나 노관이 모반하여 흉노로 달아나 한나라의 동성 제후국으로 이어지게 되었다.이후 연이라는 이름은 북경 일대의 하북성 지역을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는데 《 삼국지연의》의 장비가 자신을 '연인'(燕人)이라고 칭하는 것도 장비의 출신 지역이 옛 연나라의 땅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북경에 연경(燕京)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15]
3. 고조선과의 관계
한국사와 가장 연관성이 있었던 춘추전국시대의 국가였다. 춘추전국시대때 연나라는 고조선과 국경을 마주하며 충돌했다. 연나라 자체의 기록이 소략하고, 고조선의 기록 또한 매우 부실하기 때문에 갈등 관계가 어떤 양상이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기 힘드나 충돌 자체는 고죽국이 멸망한 이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조선(과 그 원류로 추정되는 예족)도 처음에는 요서에서 자리를 잡았지만, 연나라가 제환공 시절 제나라의 군사력을 빌려 고죽국의 땅을 차지하게 되면서, 고조선과 경계를 맞닿게 되었다. 이때문에 고조선은 서쪽 방면으로의 확장이 어려워지자 동남부로의 확장을 선택하여 요동 지방의 부족 국가들을 점차적으로 복속시켜 나갔고, 기원전 6세기를 전후하여 아예 중심지를 연나라에서 가까운 요서의 조양에서 요하 근처 요동의 요양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323년 천자국인 동주가 약해지자 연나라의 제37대 국군이었던 희퇴가 스스로 왕(王)을 칭하며 국경 근처의 고조선을 치려 했고, 이 시기 고조선을 다스리고 있었던 조선후 역시 비슷한 시기 왕을 칭했다. 당시 조선후도 연나라를 치려고 했으나 신하인 대부 예가 간언하여 양 측은 군대를 물리고 화해를 했다.
이후 기원전 4세기~3세기 초 연나라의 장수였던 진개가 2,000리 정도의 넗은 영토를 고조선으로부터 빼앗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고조선의 중심지가 랴오닝 일대에서 청천강 - 대동강으로 이동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고고학적으로 어느 정도 입증된다. 이 시기에 요서와 요동에서 예맥계 문화 자체가 극적으로 퇴조하고, 요동의 절반 지역인 천산 산맥 이서 지역은 연나라가 직접 지배한 반면, 천산 산맥 이동에서 청천강까지는 예맥 계열의 토착 세력이 여전히 세력은 유지하지만 주요 거점에서는 연나라의 영향력이 강하게 보이면서 예맥계 수장 세력들을 통제하는 것이 나타난다. 단, 고조선이 영유하고 있었던 걸로 추정되는 요동 동부 변경 지대는 영유하지 못했는데 이 일대의 고조선 잔민들이 바로, 훗날 전한- 신 제국에게 맥족으로 알려지게 되는[16] 사람들이다.
이 시기에 전과 같이 살았던 고조선인들이 훗날 부여에서 남하하는 집단과 연합하여 요동의 동부 집단인 고구려가 되었고, 청천강 이동으로 물러나서 나라를 유지한 고조선은 위만조선에 이르게 된다. 즉 그전까지는 고구려인들의 조상이 고조선의 요동 동부 지역을 구성하는 고조선인들로 살았으나, 연나라가 고조선을 요서와 요동에서 밀어내는 바람에 요동 동부 지역은 고조선이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월경지가 되었다. 그 이후로는 고조선도 연나라도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공백지가 되면서, 고구려의 시초가 형성되는 것이다. 훗날 한성백제와 마한의 건마국을 구성하는 집단의 일부, 진한의 사로국을 구성하는 집단의 일부도 이 시기에 고조선 지역에서 내려온 걸로 판명되고 있다.[17] 그러므로 고구려, 백제, 신라가 국가 체제로 봐선 하나였다가 갈라진 걸로 보긴 어렵지만, 그 시원의 뿌리이자 서로 갈라진 계기를 논한다면 결국 전국연에게 패배하기 이전 요서, 요동, 평안도 일대에 자리한 고조선이 된다.
역사적인 기록은 진개의 정벌 외엔 없으나, 고고학적으로는 요서, 요동, 서북한 등지에서 훗날 조선의 4군 6진 개척처럼 고조선과의 충돌이나 흡수 과정 등이 있었을 것으로 유력하게 추측된다. 즉 연나라가 처음 개척될 즈음에는 요서는 물론이고 춘추연의 국도인 계(지금의 북경) 주변에도 이런저런 이민족들의 흔적이 많이 나타나지만, 이후 계 주변에서 한족의 유물이 많아지는 것과 동시에 이민족들의 물질 자료는 퇴조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요서 일대에서 유력했던 예족의 물질 자료가 퇴조하고, 중원계의 유물 자료가 많아지며, 이런 흐름은 계속 요동에서 서북한까지 진전된다.
고고학에 입각해 연나라의 세력 형성을 뒤따라가보면 하북에서 시작해서 요서와 요동으로 전진하는 과정으로, 이 와중에 하북을 기점으로 동쪽으로의 확장이 한동안 멈춰지는데 이는 요서에 있었던 고조선이 동남부로의 확장을 진행하면서, 요동과 한반도 북부의 부족들을 흡수하고, 제나라와 북방 민족들과의 교류를 통해 국력을 키워나가며 연나라에게 맞선 것으로 해석된다. 이마저도 기원전 3세기 초반에 진개의 정복 활동으로 요녕성 전역이 연나라의 통치하에 들어왔고 고조선은 멸망할 당시까지도 요서와 요동 상당수 지역을 수복하는데 실패했다.[18][19]
이 가설이 만약 사실이라면 한민족의 원류는 원래 요서에서 생활하다가 점차 밀려나가 요동을 거쳐 한반도까지 밀려나갔고, 그 과정 속에서 많은 교류와 다툼을 겪었을 것이다. 따라서 춘추전국시대의 연나라는 다른 어떤 중원 국가보다도 초기 한민족의 형성과 많은 관련을 주고받은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연왕 희가 요동을 넘어 압록강까지 도주하려다가 실패하고 이신에게 붙잡혔다는 기록이 있다. 후기 고조선의 수도가 평양이었기에, 연나라가 멸망하자 조선으로 도망치려던 것이 아니었냐는 추측이 있다.
이외에도 한고조 유방의 부하였던 노관이 북쪽으로 달아날 때 연나라 유민 출신인 위만이 고조선으로 망명해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는 일도 있었다. 연나라가 멸망하면서 많은 연나라 피난민들이 고조선으로 이주했고, 이후 초한쟁패의 혹독한 난세를 거치면서 더더욱 많은 연나라 인구가 조선에 유입되어 위만조선 그리고 이후 한반도 남부 삼한의 역사에도 도움을 주게 되었다.
4. 연의 역대 군주
4.1. 춘추전국시대 연(희연)의 역대 군주
연 국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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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국군 소강공 |
1대 국군 연후 극 |
2대 국군 연후 지 |
3대 국군 연후 무 |
4대 국군 연후 헌 |
5대 국군 연후 화 |
실전
|
7대 국군 연후 성 |
실전
|
9대 국군 혜후 |
|
10대 국군 희후 |
11대 국군 경후 |
12대 국군 애후 |
13대 국군 정후 |
14대 국군 목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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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대 국군 선후 |
16대 국군 환후 |
17대 국군 장공 |
18대 국군 양공 |
19대 국군 환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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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국군 선공 |
21대 국군 소공 |
22대 국군 무공 |
23대 국군 문공 |
24대 국군 의공 |
|
25대 국군 혜공 |
26대 국군 도공 |
27대 국군 공공 |
28대 국군 평공 |
29대 국군 간공 |
|
30대 국군 헌공 |
31대 국군 효공 |
32대 국군 성공 |
33대 국군 민공 |
34대 국군 희공 |
|
35대 국군 후환공 |
36대 국군 후문공 |
초대 왕 역왕 |
2대 왕 연왕 쾌 |
비정통 연왕 자지 |
|
3대 왕 소양왕 |
4대 왕 혜왕 |
5대 왕 무성왕 |
6대 왕 효왕 |
말대 왕 연왕 희 |
|
초한쟁패기 연왕 한광 | 연왕 장도 | 연왕 노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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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 | 시호 | 휘(이름) | 재위기간 | 인적 관계 | 사료 출처 | 기타 |
강공(康公) | 석(奭) | 서기전 1046년 ~ 서기전 996년 | ||||
1 | 극(克) | 소 강공의 장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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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
2 | 지(旨) | 소 강공의 3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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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3 | 무(舞) | 지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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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4 | 헌(憲) | 무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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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5 | 화(和) | 헌의 아들. |
|
'' | ||
6 | (군주 불명) | |||||
7 | 성(聖) | 헌의 손자로 추정? |
|
'' | ||
8 | (군주 불명) | |||||
9 | 혜후(惠侯) | 서기전 864년 ~ 서기전 827년 | 강공의 9세손. 성의 손자로 추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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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희후(僖侯) | 장(莊) | 서기전 826년 ~ 서기전 791년 | 혜후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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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 경후(頃侯) | 서기전 790년 ~ 서기전 767년 | 희후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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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 애후(哀侯) | 서기전 766년 ~ 서기전 765년 | 경후의 아들. |
|
||
13 | 정후(鄭侯) | 정(鄭) | 서기전 764년 ~ 서기전 729년 | 애후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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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 목후(穆侯) | 서기전 728년 ~ 서기전 711년 | 정후의 아들. |
|
||
15 | 선후(宣侯) | 서기전 710년 ~ 서기전 698년 | 목후의 아들. |
|
||
16 | 환후(桓侯) | 서기전 697년 ~ 서기전 691년 | 선후의 아들. |
|
||
17 | 장공(莊公) | 서기전 690년 ~ 서기전 658년 | 환후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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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양공(襄公) | 서기전 657년 ~ 서기전 616년 | 장공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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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 환공(桓公) | 서기전 617년 ~ 서기전 602년 | 양공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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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선공(宣公 | 서기전 601년 ~ 서기전 587년 | 환공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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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 소공(昭公) | 서기전 586년 ~ 서기전 574년 | 선공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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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 무공(武公) | 서기전 573년 ~ 서기전 555년 | 소공의 동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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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 문공(文公) | 서기전 554년 ~ 서기전 549년 | 무공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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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의공(懿公 | 서기전 548년 ~ 서기전 545년 | 문공의 동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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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 혜공(惠公)/간공(簡公) | 관(款) | 서기전 544년 ~ 서기전 536년 | 의공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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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도공(悼公) | 서기전 535년 ~ 서기전 529년 | 혜공의 동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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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 공공(共公) | 서기전 528년 ~ 서기전 524년 | 도공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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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평공(平公) | 서기전 523년 ~ 서기전 505년 | 공공의 동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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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 간공(簡公) | 서기전 504년 ~ 서기전 493년 | 공공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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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 헌공(獻公) | 서기전 492년 ~ 서기전 465년 | 평공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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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 효공(孝公) | 환(桓)[21] | 서기전 464년 ~ 서기전 455년 | 평공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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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 연성공(成公) | 재(載)[22] | 서기전 454년 ~ 서기전 439년 | 효공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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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 민공(閔公/湣公) | 서기전 438년 ~ 서기전 415년 | 성공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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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 간공(簡公)/희공(僖公) | 재(載) 혹은 관(款) | 서기전 414년 ~ 서기전 373년 | 민공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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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 환공(桓公) | 서기전 372년 ~ 서기전 362년 | 후간공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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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 문공(文公) | 서기전 361년 ~ 서기전 333년 | 후환공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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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 역왕(易王)[23] | 퇴(脮) | 서기전 332년 ~ 서기전 321년 | 후문공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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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 쾌(噲) | 서기전 320년 ~ 서기전 318년 | 역왕의 아들로 간신인 자지에게 선양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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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 자지(子之) | 서기전 317년 ~ 서기전 314년 | 연왕 쾌의 신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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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 소왕(昭王)/ 소양왕(昭襄王) | 직(職) | 서기전 313년 ~ 서기전 279년 | 연왕 쾌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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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41 | 혜왕(惠王) | 악자(樂資), 융인(戎人)[25] | 서기전 278년 ~ 서기전 271년 | 소왕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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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42 | 무성왕(武成王) | 환(讙) | 서기전 270년 ~ 서기전 258년 | 혜왕의 아들로 추정?[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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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43 | 효왕(孝王) | 우(遇) | 서기전 257년 ~ 서기전 255년 | 무성왕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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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 희(喜) | 서기전 254년 ~ 서기전 222년 | 효왕의 아들. 태자 단(丹)의 아버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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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초한쟁패기때 연의 역대 군주
[1]
Baxter-Sagart의 재구에 의하면
상고음은 /*ʔˁen-s/. 燕은 현대의 한자이며, 진나라 시대의
전서 소전체 표기는 이렇다.
참조
[2]
기원전 323년부터.
[3]
단, 춘추전국시대 사람들은 세속적인 편이었다.
[4]
소공 희석 본인은
주공 희단처럼 주나라의 원로 관직이었던 소공이었기 때문에 수도 호경(현재
장안)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멀리 있었던 연나라를 직접 통치할 수 없었기에 장자인 극(克)을 계에 보내 다스리게 했다고 전한다.
[5]
잠시 중간에
백작으로 강등되기도 했다.
[6]
그래서 그런지 연나라 유물과 동일한 시기의 고조선 관련 유물(나중에 고조선을 형성하는 사람들의 문화적 유물들이 나온다)들도 많이 출토된다.
[7]
현재의 지도에서는 전국칠웅 중 변방에 있을 뿐이지 딱히 작다는 느낌이 없다. 왜냐하면 수천년 동안 황하의 범람과 퇴적으로 인해 엄청난
평야지대가 생성되었기 때문이다. 2,000년전 지도를 볼 경우 연나라는 해안가를 중심으로 한 좁은 평야지대를 산악지형이 둘러싼 국가였고, 당연히
중원의
조나라나
제나라보다 훨씬 작은 나라였다.
요서와
요동으로 진출할만한 이유가 명확했던 것이다.
[8]
연나라 장공때 북쪽의
융적이 쳐들어와서 크게
개발살나 나라가 멸망할 뻔했다. 다행히 그때
춘추시대의 첫 번째 패자인
제환공 강소백의 도움으로 융적을 몰아내고 나라를 되찾았다. 인접한 데다가
제나라가 워낙에 강성하다 보니 연나라는 좋은 쪽으로건 나쁜 쪽으로건 종종 제나라의 간섭을 받곤 했다.
[9]
왕이었으나
시호를 받지 못했다.
[10]
말하자면 연나라는 소진의 제2의 고향인 셈이었다. 소진의 마지막 활약(?)도 연나라를 위해 제나라에 벼슬을 하며 제나라의 국부를 탕진시키는 것이었다.
도림 대사
[11]
태자 희평의 이복동생으로 연왕 쾌의
서자였다. 《사기》 <연소공세가>에는 태자 평으로 나오는데 《사기》 <조세가>에는 '공자 직이 연왕이 되었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
죽서기년》에 '자지가 공자 평을 죽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결정적으로 옛 연나라 유물에 연왕의 이름을 직으로 새겨놓은 유물이 발굴되었다.
[12]
여기서 유래된
사자성어가
매사마골, 선시어외이다.
[13]
남아 있는 성이 즉묵과 거 땅밖에 없었다. 즉묵성은 나중에 제나라의
전단이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곳이었고, 거성은 암군인 제민왕이 피난 중이었던 곳이다.
[14]
형가와 진시황을 암살하려던
진무양(秦舞陽)이 그의 손자였다.
[15]
조선 시대에는
청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조공 사신행을 연행, 사절단을 연행사(燕行使)라고 불렀는데,
연경으로 가는 사신이라는 뜻이었다.
명나라때는
왕조의
천자를 뵈러 간다고 조천사(朝天使)라고 불렀는데,
오랑캐 취급을 하던
만주족인 청나라 황제를 천자로 인정하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고, 그렇다고 청나라를 무시할 수도 없어서 이름이라도 깎아내려 부른 것이었다.
[16]
간단히 말해 고구려인들의 선조이다.
[17]
이후로도 고조선
준왕의 남하,
역계경의 남하 등, 북쪽에서 한반도 중남부 지방으로의 인구 유입은 계속 진행되었다.
[18]
단, 연나라가 예족을 포함한 주변 이민족을 동화시키는 흐름은 요동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천산산맥에서 멈추게 된다. 연나라가 청천강 일대까지 영역으로 복속시켰으나 직접 지배는 천산산맥 이서까지만 할 수 있었고, 천산산맥 이동에서 청천강 일대까지는 간접 지배했다. 시간이 흐르면 이 지역까지 직접 지배화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럴 수 있기 전에 고조선 및 중원의 조나라, 제나라에게 계속 저지되었고, 그러다가 진시황의 진나라에게 멸망했기에 연나라의 동진은 그 시점에서 멈추게 된다.
[19]
이와 다르게 고조선 후기에 고조선이 요동 대부분을 수복했다는 주장도 있다. 진한교체기에 요동이 혼란한 틈을 타 고조선이 요하 부근의
혼하까지 진출했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천산산맥에서 청천강까지는 이후 연나라 땅이 아니라 고조선의 영역이 된다. 이 학설은 현재 국내 학계에서 꽤 유력한 설로 취급받고 있다.
[20]
극, 지, 무, 헌, 화, 성 등 여섯 명의 군주들은 《사기》 <연소공세가>에는 기록이 안 되어 있는 군주로 팽화(彭華)의 《연국사고》(燕國史稿)와 금문에만 나오며,
시호는 전해지지 않는다.
[21]
《
한서》에 기록된 이름.
[22]
《
죽서기년》에 기록된 이름.
[23]
칭왕
[24]
이복형으로는 자지에게 피살당한 태자 평이 있었다.
[25]
연나라 유물의 명문(銘文)에는 융인(戎人)으로 기록.
[26]
자연사 또는
성안군(成安君) 공손조(公孫操)에게 시해당함.《사기》 <연소공세가>에서는 혜왕이 죽었다면서 자연사한 걸로 나오지만 <조세가>(趙世家)에서는 연나라 재상 성안군 공손조(방계 왕족으로 추정)가 그들의 왕을 시해했다고 나온다. <조세가>가 맞다면 시기상 그때 시해당한 왕이 혜왕인데 이들이 왜 혜왕을 죽였는지는 알 수 없다.
[27]
육조시대
동진(東晉)의 역사가였던
서광(徐廣)의 가설이다.
[28]
《
사기》에서는 아예 혜왕과 무성왕의 관계가 불분명하게 전혀 언급되지 않고, 혜왕이 승하하자 무성왕이 뒤를 이었다고만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