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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사망 | 미상 |
아버지 | 퀸투스 아퀼리우스 사비누스 |
남편 | 엘라가발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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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세베루스 왕조의 아우구스타, 로마 황제 엘라가발루스의 황후.2. 생애
출생 당시의 이름은 아퀼리아 세베라이며, 엘라가발루스와 결혼한 이후 이름에 시리아 에메사 왕가의 성씨 율리우스를 여성화 시킨 이름 율리아를 덧붙였다.카라칼라 황제 시대인 서기 214년과 216년에 집정관을 역임한 퀸투스 아퀼리우스 사비누스의 딸로, 엘라가발루스 황제가 집권했을 당시에 베스타 여사제를 맡고 있었다. 이 당시 나이는 보통 베스타 여사제의 선정 작업, 교육 훈련, 사제 활동 등을 생각하면 대략 35~40세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베스타 여사제는 순결을 지킬 의무가 있었으나, 엘라가발루스는 220년 하순경 저명한 귀족가문의 여식이었던 율리아 코르넬리아 파울라 황후와 이혼하고 그녀를 새 황후로 들였다. 디오 카시우스는 엘라가발루스가 이런 일을 벌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는 이리 함으로써
폰티펙스 막시무스와 베스타 막시움의 자녀를 낳고자 했다.
엘라가발루스와 아퀼리아 세베라의 결혼은 로마 시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고, 원로원은 로마 전통과 로마법을 조롱한 황제의 발언과 태도에 큰 불쾌감을 표시했다. 이는 신부가 된 아퀼리아 세베라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녀는 이 결혼을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사건에 대해, 고대 기록들은 16세의 엘라가발루스가 스스로를 엘라가발의 대리인을 자처한 뒤, 베스타 여사제 중 훌륭한 가문을 둔 가임기의 아퀼리아 세베라를 점찍고 강간 후 강제로 결혼했다고 말한다. 즉, 종교적인 이유로 이 결혼을 강행했다는 이야기인데, 일부 고대기록들에 엘라가발루스를 폄하한 주장이 여럿 있어, 이를 연구한 학자들은 엘라가발루스가 베스타 여사제를 강간하는 미친 짓까지는 안 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반발은 심했고, 아퀼리우스 사비누스는 자신과 딸, 가문, 로마 제국의 정체성까지 능욕한 엘라가발루스의 태도에 불쾌감을 표현했다. 이는 원로원 의원들도 비슷해, 여러 의원들은 황제의 행동이 로마의 정신을 훼손한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엘라가발루스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결혼에 반대하는 입장이던 신부의 아버지를 죽이려 했다. 하지만 명령을 받은 장교는 황제가 사용하는 시리아어(혹은 시리아 방언이 섞인 그리스어)를 잘 몰랐기 때문에, 죽이라는 명령을 추방하라는 것으로 알아들었다. 그래서 퀸투스 아퀼리우스 사비누스는 목숨은 건진 채 이탈리아를 떠났다. 율리아 마이사는 이대로 가다가는 민중이 봉기하거나 야심가가 반란을 일으켜 겨우 복구한 왕조가 또다시 무너지고, 자신과 가문의 입지마저 위태로워질 것임을 직감했다. 이에 엘라가발루스에게 아퀼리아 세베라와 이혼할 것을 설득하였고, 엘라가발루스는 이에 따라 아퀼리아 세베라와 이혼하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혈통을 이어받은 안니아 파우스티나와 약혼했다.
그러나 마이사의 요청에 따라 카이사르로 삼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에게 민심이 급격하게 쏠리자, 엘라가발루스는 자기가 속았다고 여기고 221년 12월 안니아 파우스티나와 이혼하고 아퀼리아 세베라와 재혼했다. 여러 고대 기록들의 직간접적 증언에 따르면, 재결합 이후에는 그녀의 의지로 엘라가발루스와 함께 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알렉산데르를 제거하려 했으나 222년 3월 12일 어머니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총신 히에로클레스와 함께 근위대에게 피살되었다.
222년 이후의 아퀼리아 세베라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그렇지만 그녀가 살해됐다거나 처벌을 받았다는 말이 없고, 의지와 상관없이 반강제로 결혼하면서 베스타 여사제 직을 포기한 점, 엘라가발루스 몰락 후 울피아누스, 파울루스 등과 함께 그녀의 아버지 역시 명예회복을 하고 이탈리아로 귀국한 점을 생각해보면, 아퀼리아 세베라 역시 조용히 여생을 보낸 듯 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