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 | |
|
|
출생 | 1005년에서 1010년 사이 |
사망 | 1063년 |
아버지 | 이반 블라디슬라프 |
어머니 | 마리아 |
형제자매 | 프레시안 2세, 알루시안 |
남편 | 이사키오스 1세 |
자녀 | 마누일 콤니노스, 마리아 콤니니 |
[clearfix]
1. 개요
동로마 제국 콤니노스 왕조의 아우구스타, 동로마 황제 이사키오스 1세의 황후.2. 생애
1005년에서 1010년 사이 불가리아 제1제국의 마지막 차르 이반 블라디슬라프와 마리아의 딸로 출생했다. 오빠 프레시안 2세, 알루시안이 있었다. 1018년 불가리아가 동로마 제국에게 멸망한 뒤, 그녀는 가족과 함께 포로 신세로 전락하여 바실리오스 2세에게 바쳐졌다. 다행히 황제는 그들을 잘 대해줬고, 귀족으로 대우받게 하였다. 이후 바실리오스에 의해 장군으로 발탁되어 활약하던 마누일 콤니노스의 아들 이사키오스 콤니노스와 결혼했다. 그녀는 이사키오스와의 사이에서 아들 마누일 콤니노스, 딸 마리아 콤니니를 낳았다. 마누일은 1030년에 출생하여 프로토파타리오스 헬리오스와 딸과 결혼하였고, 1042년에서 1057년 사이에 사망했다. 그리고 1034년에 출생한 딸 마리아는 미하일 프셀로스에 따르면 당대 최고의 미녀라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수녀가 되어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1057년 9월 1일, 남편이 군대의 추대를 받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해 미하일 6세를 몰아내고 황제가 되면서, 그녀 역시 황후가 되었고, 아우구스타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이사키오스는 곧 문제에 직면했다. 재정 회복을 위해 이전 황제들이 민간이나 교회, 수도원에 양도했던 모든 토지를 강압적으로 회수하는 바람에 강한 반발을 산 것이다. 특히 수도원 재산 압류 문제로 세계 총대주교 미하일 케롤라리오스와 심한 갈등을 벌인 끝에 해임하면서, 총대주교를 존경하던 민심이 등을 돌려버렸다. 군대의 지지 덕분에 황위를 유지할 수는 있었지만, 그의 입지는 매우 불안정했다. 그러던 1059년 11월 중순, 사냥에 나섰던 그는 벼락을 맞고 쓰러졌다. 이사키오스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나, 상태가 심각해지자 블라헤르네 궁으로 돌아갔다.
1059년 11월 24일, 이사키오스는 교회에서 '참회'를 하고 싶다며 굳이 몸을 일으켜 말을 타고 아야 소피아로 향했다. 예카테리나가 자신이 그의 죄를 대신 지겠다며 만류했지만, 이사키오스는 끝내 교회까지 이동했다. 그 후 참회를 마친 그는 콘스탄티노스 두카스를 차기 황제로 선출하겠다고 선언했다. 프셀로스에 따르면, 예카테리나는 남편에게 황위를 넘겨줘서는 안 된다며 강하게 반대했지만, 이사키오스는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고 한다. 결국 남편은 퇴위한 뒤 수도자가 되었고, 예카테리나도 1063년 딸 마리아와 함께 미렐라이온 수녀원에 들어갔다. 그녀는 정교회의 관습에 따라 속세의 이름을 버리고 '옐레니(Hélène)'로 개명했다.
예카테리나는 1063년경 사망했다. 사후 남편 이사키오스가 묻힌 스투디온 수도원 묘지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