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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고르바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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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Gorbachev 2014.png
1980년대 중반 2014년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
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Горбачёв
Mikhail Sergeyevich Gorbachev
출생 1931년 3월 2일 ([age(1931-03-02)]세)
소련 러시아SFSR 북캅카스지방 스타브로폴 시
국적 파일:소련 국기.png 소련 파일:러시아 국기.png 러시아
학력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법학과( 학사)
종교 기독교
직업 정치인
신체 175cm
경력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 1985년 3월 11일 ~ 1991년 8월 24일)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 ( 1988년 10월 1일 ~ 1989년 5월 25일)
소련 최고회의 주석 ( 1989년 5월 25일 ~ 1990년 3월 15일)
소련 대통령 ( 1990년 3월 15일 ~ 1991년 12월 25일)

1. 개요2. 생애
2.1. 어린시절 및 출세가도2.2. 집권2.3. 개혁정책2.4. 개혁의 좌절과 소련의 해체
2.4.1. 문제점
2.4.1.1. 조급함2.4.1.2. 경제 개혁의 실패2.4.1.3. 정치 개혁의 실패
2.4.2. 소련의 해체
2.5. 퇴임후
3. 평가
3.1. 서방에서3.2. 구 소련 지역에서
4. 기타
4.1. 대중매체에서

1. 개요

하나의 완벽한 공산주의 모델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 누구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다. 한 국가의 장래와 그 체제는 그 나라 국민들만이 정할 수 있다. 어느 나라도 타국의 국내상황에 간섭하거나 압력을 가해서는 안된다.
- 브레즈네프 독트린 폐기를 선언하며
"농업 상황이 처참한 지경입니다. 1917년부터 말이지요."[1]
소련 정치인.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의 최고권력자로, 소련 공산당 제6대 서기장 소비에트 연방의 초대 대통령[2] 지냈다. 고르비(Gorbi)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소련 정치체제 및 경제체제의 문제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혁신( 글라스노스트(개방) · 페레스트로이카(개혁))을 시도했으나, 노멘클라투라로 불리는 기득권층의 반발(대표적으로 8월 쿠데타)과 보리스 옐친 등 신진세력의 대두를 적절히 통제하지 못하여 소련을 붕괴의 길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서구권에서는 냉전을 종식시킨 그를 높이 평가하지만, 정작 러시아에서는 ' 초강대국 소련을 붕괴시킨 장본인'이라는 부정적 평가가 많다.

한국에서는 블라디미르 레닌, 이오시프 스탈린과 더불어 인지도가 높은 소련 인물 중 하나이다.

2. 생애

2.1. 어린시절 및 출세가도

남러시아 캅카스 인근의 스타브로폴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러시아에 속해 있지만 여러 인종이 모여 살던 곳이었으며, 그의 외가는 코사크인과 러시아인의 혼혈 집안이었다. 터키계라는 소문도 있다. 공산국가에서 중요시되는 출신성분은 농민으로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집단농장에서 일을 하는 농부였고 그도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을 도와 콤바인을 모는 등 농장에서 일을 하였다. 이렇게 일을 열심히 해서 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일도 열심히 했고, 공부도 잘한데다가 출신성분도 우수했기 때문에 최고명문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법학부에 진학할 수 있었고, 1955년 법학 학위를 받는다. 재학시절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고, 이후 고향인 스타브로폴에서 관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중앙으로 진출했고, 중앙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아 안드로포프 같은 사람들 눈에 띄어 여러 모로 비호를 받으며 초고속 출세를 했다. 사실 고르바초프는 당대의 러시아인 공산당 당원치곤 술을 멀리하고 아첨을 할 줄 몰랐다.[3] 이 점은 당대의 소비에트 연방에서 흔했던 술고래 관료들을 몹시 한심하게 생각한 안드로포프가 주목하면서 오히려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고, 하루에 10시간 정도의 일은 전혀 불평 없이 해내던 근면한 근무 자세도 플러스가 되었다.

1980년대에 소련 공산당 정치국에서 최연소 정치국원이었으며, 브레즈네프 이후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가 각각 고령으로 인해 얼마 못 가 사망하자 정치적 안정을 위해 오랫동안 집권할 수가 있는 사람을 필요로 했던 정치국 안에서 가장 젊은 그가 떠오르게 되었다. 당시에 그는 기대를 한몸에 모았다.

2.2. 집권

앞서 보듯 그가 서기장이 되기 전에 소련에서는 세 명의 서기장이 1년마다 한 명씩 노환으로 사망하는 혼란기에 접어들어 있었는데, 때문에 당시 서기장 후보 중 가장 젊었던 그가 고작 54세의 나이로 서기장이 된다. 고르바초프는 소련 역사상 최초 러시아 혁명 이후에 태어난 서기장이다. 바꿔 말하면 처음부터 소련인이었다는 것.[4]

니키타 흐루쇼프 집권기에 시작된 소련의 개혁/개방 운동이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체제에 들어서 반동, 정체되다가 그의 시대에 다시 활성화되고 정점을 맞은 것으로 평가되곤 한다.

2.3. 개혁정책

소련 공산당 정치국에서 농업식량 담당 서기로 있다가 1985년에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되었다.

취임하면서 글라스노스트/페레스트로이카를 외치면서 당시 침체에 빠져 있던 소련에 대대적인 변화를 예고하였다. 그야말로 임기 매년을 뉴스와 역사의 소용돌이에 빠트렸던 인물이다. 타임지 선정에서도 볼 수 있듯이.

대외적으로는 사상 최초로 서방세계와의 군비 축소와 평화 무드를 만드는 업적이 있었던 것으로 평가되며, 무엇보다도 냉전을 종식시켰다. 소련 경제의 발목을 잡던 아프가니스탄에서 1989년 철군했다.[5] 1989년 5월에는 중국 베이징을 방문하여 덩샤오핑을 만나 1960년대 수정주의 논쟁 이후 격렬하게 대립하던 중국과 화해했다.

1989년에는 브레즈네프 독트린[6]을 폐기하고 중앙유럽 공산주의권 국가의 변화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10월 27일), 이는 곧바로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체코슬로바키아의 벨벳 혁명 등으로 이어지면서 대다수 중앙유럽 국가들의 민주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같은 해 몰타에서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조지 H. W. 부시와 정상회담을 가지면서 냉전의 공식적인 종결을 선언하였다. 한마디로 2차대전 후 40여년 이상 이어오던 공포, 대립의 시대에서 평화의 시대로의 물꼬를 튼 인물. 이러한 업적으로 서방세계로부터 이 사람이 확실히 뭔가 다르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결국 199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고르바초프 개혁의 원본 노선은 공산당 일당독재였던 소련과 중앙/동유럽을 사회민주주의 국가로 바꾸는 것이였다. 소련 공산당 역시 소련 사회민주당 비슷한 형식으로 바꾸려고 했고[7] 순수 계획경제에서 혼합경제로 이전, 복지나 사회보장제도는 전과 비슷하게 하고 기업의 자율성을 인정하면서 브레즈네프 이래로 만연했던 생산성 저하를 극복하려고 하였다. 즉, 그는 전반적으로 공산주의 체제를 북유럽식 사민주의 체제로 전환하려고 했다. 그러나 자칭 정통 공산주의자들의 쿠데타에, 옐친의 반역으로 인해서 연방은 멸망했다.

2.4. 개혁의 좌절과 소련의 해체

2.4.1. 문제점

2.4.1.1. 조급함
당시 소련은 소련-아프간전을 위해 매년 수백억 달러에 달하는 전비를 지출하고 있었던데다 1980년대 초에 비해 크게 떨어진 유가의 영향으로 재정적인 여유가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체르노빌 사태까지 터지는 바람에 급격한 개혁을 추진할 여건이 못 되었다. 그럼에도 고르바초프는 사회와 경제가 불안정한 상황에서 급하게 개혁안을 실시해 소련 사회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결과적으로 소련의 해체를 초래했다. 이는 온건하고 점진적인 개혁안을 추진한 덩샤오핑의 개혁이 성공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중국이 30여년에 걸쳐 계획경제를 자본주의로 이행하고 아직까지도 토지나 부동산 같은 경우는 공산주의적인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는 것을 본다면 고르바초프는 조급함에 경제를 더 망치고 자신의 정권 기반도 박살낸 것이다.
2.4.1.2. 경제 개혁의 실패
특히 내부적인 개혁의 실패가 가장 큰 문제였는데, 수십 년 동안 유지되어 온 계획경제와 과도한 국방비 지출에 따른 경제 침체를 탈피하고자 시장경제 도입을 추진하였고, 1990년에는 공산당 일당독재를 폐기하고 대통령에 취임하여 다당제와 의회 제도,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등 정치체제의 개혁도 시도하였다. 그러나 시장경제 도입은 침체돼 있던 경제를 오히려 더욱더 막장으로 몰아갔다. 수십 년간 공산당 지시로 결정되던 상품가격을 갑자기 수요-공급에 따른 시장자율 가격으로 대체하니 혼란이 닥쳤던 것.[8]
2.4.1.3. 정치 개혁의 실패
글라스노스트로 확대된 언론의 자유는 기존 소련 체제 내부의 문제점들을 좀더 투명하게 드러내서 해결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오히려 체제 개선보다는 그동안 억눌려있던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창구로 기능하면서 소련체제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특히 발트3국을 위시한 공화국들의 독립 요구가 거세지는 계기가 되어 소련 해체의 단초를 제공했고, 이런 난맥상에 군부와 관료 등 보수파를 중심으로 한 기득권층이 대거 반발하면서 8월 쿠데타로 이어지게 된다.

2.4.2. 소련의 해체



결국 1991년 소련 보수파가 쿠데타를 일으켜 고르바초프를 제압하는 데 성공했으나, 당시 러시아 공화국의 대통령이었던 보리스 옐친이 시민의 저항을 이끌어내면서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간다. 이후 고르바초프는 소련 공산당 해체 및 민주 국가로의 소련 개헌이라는 마지막 연방 유지 방안을 제시하나, 결국 소련은 옐친에 의해 1991년 12월 해체된다.

이후 2000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도 나갔으나 블라디미르 푸틴이 당선되었고 고르바초프의 지지율은 1%도 안 나왔다(...). 2011년 선거를 겨냥하여 2008년 9월에 레베데프와 함께 중도 성향의 러시아 민주당 창당을 발표하면서 12년 만에 정계에 복귀했는데, 그가 맡은 건 당 고문역이라 실질적인 힘은 그리 크지 않았다.

고르바초프가 일생 동안 겪은 위상 변화를 그의 이름이 점점 짧아지는 것으로 그려낸 만평도 있다.
집권 초기( 1985년)엔 "고르바초프!"
집권 중기( 1988년)엔 "고르비!"[9]
하지만 최후( 1991년)엔 "고!"(GO! 꺼져!)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세계적 공로(?)가 하나 더 있다면 집권 중이던 1986년에 터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북극해안의 핵 폐기물 문제를 세계에 공개한 점이다. 고르비 자신도 이 일을 통해 개혁 추진 속도를 더 낼 수가 있었다.[10] 체르노빌 사고 처리 과정에서 경직되고 비효율적인 관료주의 체제의 한계를 절감해서 급진적인 개혁을 밀어붙였다고 한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그의 인기에 타격을 준 일이 바로 보드카 판매와 소비를 규제한 정책이다. 러시아의 평균수명이 1960년대 중반 이래로 침체되었고 그 원인중 하나가 알코울 중독의 증가였는데 보드카 판매를 규제하면서 일단 평균수명을 늘릴수 있었지만 반대로 그의 정치적 인기는 줄어버렸고, 가뜩이나 석유값 하락으로 소련의 세수가 후달리던 형편이었는데 보드카 판매까지 규제시켜 놓으니 세금도 줄어들어 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술은 규제한다고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며 러시아인들 스스로 정신 차려야만 해결 가능한 문제니 결국 고르바초프가 밀려난 뒤 다시 원상태로 돌아갔고 사회복지제도의 붕괴와 더불어 러시아의 남성수명은 57세까지 떨어졌다. 옐친부터가

2.5. 퇴임후

파일:external/static01.nyt.com/05vuitton.600.jpg
2007년 루이뷔통 광고에 출연한 고르바초프 (76세)

퇴임후 보리스 옐친에게 푸대접을 받았다. 거기에 당시 러시아 경제와 사회복지제도가 붕괴되었고 연금도 제때 지급되지 못할 정도로[11] 고르바초프의 대우는 형편없었고, 고르바초프는 외국 대학이나 기관의 강연료까지는 그렇다 하더라도[12], 외국기업의 CF[13](...)로 생활비를 벌 정도였다. 어느 날, 자신의 매달 연금이 얼마일지 궁금해져 은행서 1달치 연금을 $로 환전했더니 불과 몇십 센트(...)에 불과했더라고 기자들 앞에서 한탄하기도 했다.

블라디미르 푸틴과 사이가 좋지 않은 편이다. 반푸틴 진영을 지지하며 푸틴과 대립각을 여러번 세웠다. 고르바초프는 푸틴이 독재자가 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 # 당연히 러시아의 집권 여당 통합 러시아당과의 사이도 좋지 않다. 통합 러시아당 국회의원들이 소련 붕괴의 책임을 물어 고르바초프를 고발한 적도 있다. 다만 2014년부터 갑자기 푸틴을 지지하고 나섰다. 사실 푸대접을 받았던 옐친 시대와는 달리 푸틴 집권 이후에는 대우가 좋아진 것도 사실이다.

2016년 5월 23일에 크림 합병은 올바른 결정이라는 발언에 문제를 제기한 우크라이나를 비난했다. # 이에 응수해 우크라이나 정부는 고르바초프를 입국금지했다.

앞서 서술되었듯이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했던 만큼, 현재는 주로 사민주의 계열 군소정당에서 활동하고 있다.[14]

2016년에는 언론에 많은 러시아 국민들이 자신을 미국스파이로 평가하는데 억울하다고 하였다가 러시아 국민들에게 냉소만 받는 안습의 극치를 이루었다. 기사

2016년 10월 10일. AFP와의 인터뷰에서 심해져가는 러시아와 미국간의 갈등을 "세계가 위험한 수준에 도달했다"며 "갈등을 멈추고 대화와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2017년 1월 27일 핵전쟁위험이 점점 현실화되면서 미-러가 대화를 해야 한다고 밝혔다. #

2017년 6월, 나토의 확대를 두고 푸틴과 설전을 벌였다. 푸틴은 고르바초프가 순진하게 나토 확장금지를 문서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토가 확장되어 러시아의 안보가 위험해졌다고 주장했고, 고르바초프는 옐친-푸틴 시절에 확장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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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현재의 고르바초프. 상당한 노화를 보여주는데, 마음고생이 심한 듯. 살도 찐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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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자신의 서기장, 대통령 시절 사건과 기억을 담아 나는 여전히 낙관론자 라는 제목의 새 책을 발표했다. #

책 출간행사에서 한 시민이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한 생각을 물었고,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가 불러온 긍정적 사실·부정적 사실 모두 있다. 하지만 페레스트로이카는 러시아와 러시아 국민에게 자극을 주었고 그것은 전 세계에 ‘시동을 거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는 후문.[15]

2019년에도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

3. 평가

3.1. 서방에서

서방 세계에선 냉전의 종결자, 평화 민주주의의 사도 등 대단히 높게 평가한다. 노벨 평화상까지 주었을 정도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그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공포를 가져다주던 냉전을 종식시키고, 동유럽 국가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준 것, 그리고 체르노빌과 같은 환경 오염 문제에 대해 공개한 것 등은 인류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큰 공헌을 한 것 맞다. 그러나 후술하듯이, 이걸 조국인 구 소련/러시아인 입장에서 보면(...)

3.2. 구 소련 지역에서

평가가 좋지 못하다. 아직까지도 러시아인들은 그를 강대한 조국을 미국에 헌납한 매국노라고 생각한다.

고르바초프가 덩샤오핑과 달리 무리한 개혁 정책을 강행함으로써 소련이 빠르게 망한 것도 사실이라 변명의 여지도 별로 없다. 소련 국민들이 기나긴 줄로 상징되는 생필품 부족과 KGB의 감시 같은 것에 살긴 했지만 교육, 의료, 주택 등 기본적인 삶의 질은 보장되었고[16], 소련은 미국과 함께 세계 최강의 군대, 세계 최고의 과학 기술, 스포츠, 예술을 보유한 초강대국이었기에 러시아인들은 국가에 대해 충분히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련 해체 이후 모든 게 산산조각나면서 어느 순간 러시아는 3류 국가가 되고, 기본적인 의식주 해결조차 힘들 정도로 사회 시스템이 붕괴해버린 것이었다. 군대의 경우, 서방 진영에서 가장 두려워하던 소련군이 건재할 당시에는 병력이 500만[17]이었고 실전 투입 가능한 장비도 1만~2만이 넘어 규모만 놓고 보면 미군을 압도할 정도였으나, 소련이 해체된 이후의 러시아군은 병력수가 120만 명으로 쪼그라들고 군용물자도 줄어들었는데 그나마도 노후화되고 고장난게 태반이다. 그렇다고 정치적으로 진보한 국가가 되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닌 것이, 구 소련 구성국 중 러시아를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는 독립 이후 그 보다 더한 독재자가 집권하게 되었다. 물론 소련 붕괴의 직접적인 책임은 옐친에게 있지만 옐친에게 잡아 먹혀 버렸던 고르바초프의 잘못도 크다.

원래 소련군은 동유럽에서 철수하는 조건으로 " 나토를 동유럽까지 확대하지 않을 것"를 내걸었고, 미국은 이를 받아들였는데, 당시 미국 대통령은 조지 H. W. 부시였다. 그러나 그 아들인 조지 워커 부시가 대통령이 되고 네오콘의 전략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미국은 소련 붕괴 당시 러시아와 맺은 약속을 파기하고 발트3국 및 동유럽국가들을 나토로 끌어들이게 된다. 이로 인해 러시아의 안보 상황은 극도로 악화되었고, 러시아인 입장에서는 그 발단을 만든 고르바초프에 대한 평가가 나쁠 수 밖에.


러시아 방송에서 방영한 고르바초프에 대한 평가 토론. 극우파 정치인 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키 러시아 자유민주당 당수와 이오시프 라이헬가우즈의 토론이다.

한편 일부는 그가 미국에서 보낸 첩자거나 희대의 무능아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중국 공산당처럼 하지 않고, 무제한 개방을 펼쳤기 때문에 소련이 무너졌다는 것.[18] 농담이 아니라 그는 2000년대 중국 공산당이 개최한 회의에 초청되어 자신이 너무 정치개혁에 성급했다고 인정하고, 중국공산당의 길이자 유리 안드로포프의 길이 더 바람직한 길같다며 뒤늦게 후회하기도 했다.

그도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는지, 중국 관영 언론 인터뷰에서는 “내가 중국의 친구들에게 전하고 싶은 충고는 ‘민주화’와 관련된 어떤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이라며 “ (민주화를 용납하면) 좋은 결과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소련 해체 과정에서 공산당이 영도력을 잃었던 부분에 대한 후회를 밝혔다. # # # 출처가 중국 관영 언론이라 비판적으로 볼 여지는 있지만 말이다.

소련 말기는 경제사정이 상당히 나쁘기는 했지만, 덩샤오핑이 정권을 잡은 문화대혁명 직후보다야 훨 사정이 나았으며, 고르바초프나 소련 공산당이 잘 수습했다면, 민주제도는 몰라도 현재의 중국식의 체제를 이뤄 국민의 경제생활을 훨씬 윤택하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의 성급한 개혁은 둘다 박살냈고, 현재는 민주제도를 가장하고 독재를 휘두르는 푸틴의 기형적인 정치체제를 만들어 냈다.[19]

덩샤오핑의 경우는 마오쩌둥이 대약진운동과 같은 급진책을 남발하다가 국가를 재앙에 빠뜨리는 것을 자신이 직접 목격했기 때문인지, 어떤 정책이라도 경험적으로 검증하며 조심스럽게 접근했고, 이런 시도는 성공을 거두어 중국을 재건할 수 있었다. 이런 느린 접근도 덩샤오핑이 워낙 혁명가나 행정가로서 명망이 높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고르바초프는 덩샤오핑 같은 권위는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방법을 사용해도 결국 보수파와 개혁파의 갈등속에 흐루쇼프처럼 실각했을 가능성이 많다. 중국이나 소련이나 계획경제의 모순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지속가능이 불가능했고, 양쪽 모두 개혁과정에서 반발은 엄청났으나, 중국은 덩샤오핑이 가졌던 엄청난 권위로 반발을 억누르면서 조심스럽게 당의 권위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경제개혁을 추진해서 성공을 거두었고, 소련은 조급하게 정치개혁까지 손댔다가 초가삼간을 다 태웠다고 할 수 있다.

어찌되었든지간에 러시아는 소련 해체후 10여년간 헤메다가 2000년대 중반에야 엄청나게 오른 유가 덕분에 어느정도 세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자원에 의존하는 경제체제는 자원가격에 민감한 법이라 2014년 유가가 급락하고 우크라이나에서 일이 터지자 러시아는 다시 혼란의 도가니로 빠지고 있다. 결국 이것도 알고보면 고르바초프의 개혁 실패와 옐친의 무능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물론 아직도 그 경제구조의 개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푸틴의 잘못도 있다. 2019년 기준, 20년이 지났는데도 러시아는 내세울만한 다국적 기업도 없이 아직도 한국이랑 GDP로 엎치락 뒤치락 하는 상황이다.

2017년 퓨 리서치 센터의 조사에 의하면 러시아인들 중에서 고르바초프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사람들의 비율은 22%에 불과했다. 이는 우크라이나(22%)나 조지아(18%), 아르메니아(13%)와 같은 다른 구소련 국가들도 마찬가지. 조사가 이루어진 국가들 중 고르바초프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가 50%를 넘긴 구소련 국가는 2차대전 때 소련에 강제로 병합당한 에스토니아(56%)가 유일했다. #

4. 기타

  • 김일성 크고 아름다운 혹으로 유명하듯 이분도 머리에 있는 점인지 흉터인지 모를 모반(birthmark)으로 유명하다.[20] 고르바초프의 검버섯은 메디브의 발자국을 닮았다 만화 같은 그림에서 이분을 묘사하면 열의 아홉은 저 자국을 빼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 시사 만화에선 '반점이'라고 나오면서 그의 정책을 비판하는 묘사도 있었다. 9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라면 몇몇은 알 수도 있는데 머리에 초코렛이 흘러내린 것 같다고 해서 한국에서의 별명이 "고르바초코"였다. 그러나 서기장 취임 이전 사진에는 수정이 가해졌기 때문에 그의 반점이 없다. 자세히보면 모양이 한반도와 만주쪽 지도를 닮았다. 고구려
  •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한민국을 방문한 구 소련의 지도자이다. 고르바초프의 방한은 소련 붕괴 직전인 1991년 4월 19일에 이루어졌는데 당시 일본 방문 일정을 마치고 바로 귀국하려는 고르바초프를 노태우가 제주도로 초청, 4월 19일 밤에 제주도를 방문하고 4월 20일 노태우와 정상회담을 가진 후 당일 본국으로 귀환했다. 대한뉴스 보도 소련이 붕괴된 후 1992년 10월 경향신문과 국제교류재단 초청으로 방한이 이루어질 뻔했다가 러시아 정부에서 고르바초프에게 출국 금지 조치를 내리는 바람에 무기한 연기되었고 1994년 3월이 되어서야 방한이 성사되었다.
  • 2001년에 내한했을 당시,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정치학 명예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그래서 학생들 사이에서는 외대 최고 아웃풋이 소련 서기장이란 이야기가 있다(...)
  • 서구권의 또라이들은 적극적인 유화 정책을 펼친 고르바초프조차 마음에 안 들었는지 그를 적그리스도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사람들은 그 근거로 고르바초프의 이마에 있는 붉은색 점이 용의 문양이고 성서에 나오는 짐승의 표식이라고 했다. 이런 논란이 계속되자 통계학자 로버트 페이드(Robert Faid)는 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과연 적그리스도인지를 수학적으로 규명하기로 했다. 그래서 나온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적그리스도일 확률은 710,609,175,188,282,000 분의 1.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할까? 어쨌건 이 통계학자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93년 이그노벨상을 수상했다.(수학 부문)
  • 어떤 이들은 미국과의 정상회담을 시점으로 다른 사람으로 바뀐거라는 음모론을 내놓기도 한다. 그때 전후로 머리의 반점 모양이 달라졌다고...근데 나라면 맨 처음에 그 반점부터 똑같게 만들었겠다 실제로 그때를 기점으로 고르바쵸프의 정책은 결과론적으로 미국에 도움이 도는 정책을 많이 내놓았기도 했다.
19금
뮤직비디오 맨 마지막에 하늘에서 코카콜라와 함께 떨어지는 노란색덩어리는 트윙키라 불리는 일종의 크림빵인데 굉장히 달고 기름진걸로 유명하다. 한 번 단종된 적이 있었으나, 인수합병을 거쳐 다시 생산되기 시작했다.
  • 고르바초프의 이름을 딴 보드카도 있다. 사실 정치인 고르바초프와는 관계없이 Leontowitsch Gorbatschow라는 러시아의 귀족이 러시아 혁명을 피해 외국으로 망명을 가서 1921년부터 생산하기 시작한 것. 러시아산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베를린, 독일산 보드카이다. 베를린에서는 마트나 24시간 매점 등에서 9유로 정도에 700ml 풀 보틀과 미니어처를 흔하 사먹을 수 있다. 홈페이지를 들어가면 마치 러시아에서 생산할 것 같은 분위기지만 실상은 독일산. 맛은 보장 못하며 심지어 독일에서 나고 자란 러시아계들도 기피한다는 것은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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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세 때의 고르바초프의 사진. 흔히 아는 이미지와 달리 뚜렷한 이목구비와 각도 있는 얼굴을 가진 미남이었다. 그리고 탈모도 없다! 오오 고르비

4.1. 대중매체에서

  • 풀 메탈 패닉에서는 이 사람이 죽으면서 소련의 탈공산화가 실패하여 소련이 남아있게 된다는 냉전 지속 시나리오가 기본 설정으로써 나온다. 상당히 가능한 이야기다..
  • 스트리트 파이터 시리즈에서는 바초프라는 이름으로 패러디되었다. 스트리트 파이터 5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저 '위대한 지도자'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스트리트 파이터 2에서는 한겨울에 설산에 오두막을 짓고 겨울잠을 자는 곰을 깨워 제압하는 수련을 하던 장기에프에게 세계의 강자와 싸우라는 요청을 한다. 장기에프가 베가를 쓰러뜨리면 헬리콥터를 타고 내려와 그의 공로를 치하하며, 고국으로 돌아간 뒤 수행원들과 함께 코삭 댄스를 춘다. 스트리트 파이터 제로 2와 포켓 파이터의 장기에프 엔딩에서도 등장하는데, 스트리트 파이터 제로 2에서는 장기에프가 그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다.
  • 뿌요뿌요 시리즈로 유명했던 컴파일의 게임 중 '고르비의 파이프라인 대작전'이라는 작품이 있다. 당시 페레스트로이카로 주목을 받고있던 고르비를 주인공으로 일본에서 모스크바까지 파이프라인을 연결한다는 스토리의 낙하물 퍼즐 게임. MSX와 패미콤(토쿠마쇼텐 발매), FM-Towns로 발매되었다. MSX2판 영상
  • 태양계의 4행성이 상당히 커서 대기가 있으며, 푸른 별이라고 해서 미네르바라 불리는 화성에는 생명체가 문명을 이루고 산다는 해리 터틀도브의 대체역사소설 《The World of Difference》에서는 취임 후 9개월 만에 뇌졸중으로 사망해서 스탈린주의화 된 소련이 나온다. 극중 소련 우주비행사들의 대사로 봐서는 고르바초프의 사망은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는 설정. 독살당했나?
  • 코미디 영화 총알탄 사나이 1편 극초반부에 등장. 카다피, 이디 아민, 호메이니, 아라파트 등 여러 독재자들과 함께 미국을 엿 먹일 계획을 짜고 있었다. 하지만 차 나르는 하인으로 변장해있던 주인공 드레빈 형사에게 신나는 음악과 함께(1분 55초부터)머리의 모반(북베트남 모양이다)이 지워지고 "이럴 줄 알았어!"벽에 처박혀 친구들과 함께 사이좋게 리타이어.그래도 이디 아민처럼 처량한 비명과 함께 추락사 하지 않은 게 어디냐 정신나간 코미디 영화 도입부다운 등장과 퇴장이었다.
  • 게임 크레믈린의 위기에서 고르바초프를 주인공으로 소련을 이끌어 갈 수 있다. 1992년 원작에서는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도 높은 지지율로 2017년 최종 엔딩까지 장기 집권이 가능하지만 2017년 리메이크작에서는 급격히 개혁했다가는 지지율이 떨어지고 정치적 안정성이 깎여나가 바닥을 기면서 쿠데타로 쫓겨나거나,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더라도 정책에 불만을 가지는 보수주의자 혹은 자유주의자들의 대대적인 시위로 쫓겨나거나, 선거에서 패배해 사임하면서 게임 오버되기 십상이다.
  • 체르노빌(드라마)에서 서기장으로 등장한다. 배우는 스웨덴계 배우, 다비드 덴시크(David Dencik). 레가소프 교수의 경고에 제법 귀를 기울이는 몇 안 되는 인물이지만, 마냥 긍정적으로 나오지만은 않는다. 초면에 격앙된 어조로 말을 내뱉는 레가소프나 그런 레가소프를 얕잡아보는 셰르비나를 직위와 위엄으로 누르는 장면, 48시간에서 72시간 내로 러시아와 유럽 대륙의 절반이 파괴될 거란 보고를 듣고 충격 받는 모습, 레가소프가 빈정거리자 전화를 툭 끊어버리는 모습 등이 나온다. 에필로그에선 실제 고르바초프가 2006년에 체르노빌 사건에 대해 남긴 글이 나온다.


[1] 체르넨코 정권 시기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과 회담장에서, 농업부 장관 역임 중 남겼던 말. [2] 러시아어 낱말(Председатель)은 국가주석, 대통령, 위원장, 회장, 의장을 모두 뜻하지만, 여기서는 프랑스 제5공화국 미합중국의 연방정부를 다스리는 대통령과 같은 뜻이다. [3] 스타브로폴 지구당 서기장 시절에 남들보다 매우 적극적으로 중앙에서 내려온 금주 조치를 실천한 까닭에 '광천수 서기'라는 별명마저 붙었을 정도였다. [4] 사실 러시아의 인물들을 보면 소련 탄생과 종말을 다 볼 뻔한 사람이 좀 된다. 일반인 중에서는 진짜 소련보다 오래 산 사람도 꽤 많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한 나라의 역사. 이런 농담도 있다고 하는데, "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페트로그라드(1914~1924)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레닌그라드에서 죽는 줄 알았는데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되더라..." [5]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러시아 미국 2001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제2의 베트남 전쟁이 될 거라고 미국에 경고했다. 당시엔 모두 무시했지만 지금 보면 정확한 판단이었다. 예상대로 미국은 아프간에서 삽질을 반복하다가 현재 빠져나오기 위해 탈레반과 교섭하고 있으며 미국 철수 이후를 대비하기 위해 구 북부동맹 출신 군벌 일부가 재무장을 시작했다. [6] 공산주의권 전체의 이익이 개별국가의 주권보다 중요하므로 특정 국가가 공산주의 체제에서 이탈하거나 독자행동을 한다면, 무력 개입도 정당하다는 주장.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의 봄을 바르샤바 조약군이 탱크로 깔아뭉개면서 브레즈네프 당시 서기장이 선언했다. 즉, 이는 중앙유럽 공산권이 사실상 소련의 위성국가라는 것을 명시적으로 선언한 독트린이다. [7] 볼셰비키의 정권 독점 이전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과 비슷한 노선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8] 덧붙여 이 때부터 북한의 경제도 마이너스 성장기에 접어들며 지상지옥이 시작되었다. [9] 그의 애칭이었다. "'고르비'라는 함성이 울리면 자유도 울린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10] 훨씬 이전인 1957년 예카테린부르크 근처 첼랴빈스크-40에서 약 800㎢ 정도 면적의 땅에 7600㎥ 규모의 방사능 폐기물이 쏟아져 우랄 강이 삼도천으로 변했을 적에, 24개 마을을 불도저로 쓸어버리고 거주민 1만 명을 강제 이주시켰을 때는 정보 통제로 철저히 묻었다. [11] 나름대로 전직 대통령이라는 고르바초프도 연금지급을 제대로 받지 못했는데 일반 연금생활자들은 말도 할것도 없어서 몇달씩 연금이 밀리는것은 일도 아니었다고 한다. [12] 미국의 클린턴 전 대통령은 퇴임후 이러한 강연료로 떼돈을 벌었다. [13] 피자헛 루비비통 등... [14] 그가 당수직을 역임했던 러시아 사회민주당은 후에 정의 러시아당으로 흡수되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는 이에 합류하는 대신 사회민주연대라는 신당을 창당했다. [15] 중국의 경제 모델을 호평한 적도 있다. [16] 무상의료, 무상교육이 보장되었으며, (신혼부부는 배정받는데 오래 기다려야 했지만) 대부분의 시민은 국가소유의 임대주택에 세들어살며 월소득의 10% 이하의 임대료를 냈다. 고급 정부관료나 당간부와 같은 공산귀족들은 이보다는 훨씬 안락한 생활을 하긴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 붕괴 이후의 경제수준과 불평등은 거기에 비교하는게 굴욕일 정도로 심각하다. [17] 이 숫자는 지금의 미국군, 중국군, 인도군의 병력을 합친 것과 비슷한 숫자다. [18] 고르바초프도 1990년대 초반에 이르면서 실수를 깨달았지만 이미 그가 통제권을 행사하기에는 모든 게 늦어 버렸다. [19] 흐루쇼프 이후 소련 시절에 반체제 인사들은 감방에 갈지언정 정식 사법절차를 밟았다. 아니, 스탈린 시절조차도 엉터리 재판이었을지언정, 정식 사법절차를 거쳐 강제수용소에 가거나 처형되었다. 하지만 옐친-푸틴시절에는 암살로 추정되는 여러 테러나 사고들이 언론인과 정치인을 덮치고 있다. # 2017년에도 푸틴을 비판하던 한 언론인이 피습당했다. # 명백히 소련시절보다도 후퇴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20] 영문판 위키백과에 따르면 'port-wine stain(화염상모반 또는 포도주색모반)'이라는 양성종양이라고 한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고 탈모가 온 이후에 생긴 거라고. 고르바초프의 어린 시절이나 젊은 시절 사진에는 이 모반이 없는 것으로 봐서 선천적인 것은 아닌 듯하다. [21] 고르바초프가 피자헛에 등장하자 한 중년 남성이 "저 인간 때문에 정치, 경제적으로 위기에 빠졌어!"라고 외친다. 그러나 아들과 부인이 각각 "그래도 우리는 기회를 얻었어요." / "피자헛 같은 곳에 올 수 있게 되었잖아요."라면서 고르바초프를 편들며, 결국 모든 이들이 고르바초프에게 감사를 표한다는 훈훈한(!) 이야기. 그러면서 깨알같은 셀프디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