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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일 | 1946년 4월 7일([age(1946-04-07)]주년) |
해체일 |
2020년
12월 8일(사실상) 2024년 12월경(예정, 완전 해체)[1] |
그룹 현황 | 사실상 해체[2] |
창업주 | 박인천 |
경영진 |
이원태(회장 직무 대행 겸 부회장) 박홍석[3] (부회장) |
규모 | 대기업[4] |
주요 사업 | 운송업, 건설업 등 |
직원 수 | 24,000명(2019) |
매출액 | 1조 5,972억 원(2019) |
영업 이익 | 552억 4,000만 원(2019) |
순이익 | 458억 7,000만 원(2019) |
본사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우정국로 26 센트로폴리스 A동 20층~26층 (공평동) |
관련 링크 | |
금호아시아나그룹 홈페이지(웹 아카이브) | [5] |
[clearfix]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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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재하던 시절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사업 포트폴리오.[6] |
해체 직전 본사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공평동 종로타워 옆에 있다. 2008년에 광화문 인근의 신문로1가에 사옥을 신축하여 사용하고 있었으나, 그룹이 위기에 빠진 2019년에 건물을 매각하고 종각역 인근 종로타워 옆의 오피스 빌딩인 센트로폴리스로 이전하여 고층부 7개층을 임차해서 사용 중이다. 기존 새문안로 사옥은 현재의 콘코디언 빌딩이다.
한진그룹처럼 운송업이 시초인 기업집단이었으며, 고속버스 운송사업으로 성장하여 민항사도 거느렸다는 점도 비슷하다. 금호그룹은 1946년에 일제 경찰 간부 출신인 박인천이 광주택시를 창업하면서 시작되었고, 금호(錦湖)는 창업주 박인천의 호이다. 광주택시의 후신인 금호고속을 기반으로 성장했으며, 2세 경영에 돌입하면서 건설기업인 금호건설, 석유화학기업인 금호석유화학, 그리고 금호타이어 등의 계열사를 추가하면서 사세를 확장했다. 특히 제5공화국 시절에 제2민항사 사업자로 선정, 1988년에 아시아나항공을 설립하면서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2002년 박인천의 3남이었던 박삼구 회장이 회장으로 취임한 후 2006년 대우건설을 인수한데 이어 2008년 대한통운까지 시세보다 비싼 값에 인수하면서 한때 재계 7위의 자리까지 올라 재계 10위 안에 드는 재벌 그룹으로 성장했으나, 무리한 차입 등으로 끌어모은 자금을 포함하여 10조 원 이상의 자금을 쏟아부은 후유증으로 재무구조가 크게 악화되어 그룹이 부실화되었고, 결국 워크아웃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박삼구 회장이 전문경영인 자격으로 복귀하였으나 부실을 만회하기 위해 무리하게 인수했던 대우건설, 대한통운은 물론이고 금호렌터카, 금호생명, 금호종합금융, 서울고속버스터미널, 금호타이어 등 주요 계열사들까지 제살깎기로 매각해야 했다. 또 경영 실패의 여파로 경영권 분쟁에 휘말리게 되어 불만을 표시한 박찬구는 석유화학 부문의 계열사들을 갖고 금호아시아나그룹을 박차고 나가 금호석유화학그룹으로 계열 분리되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박삼구 회장은 무리한 그룹 재건을 추진했지만 금호타이어는 재인수에 실패하여 중국 더블스타에 넘어갔고 아시아나항공 기내식 공급부족 사태가 초래되기도 했으며, 이후 회계보고서 파문으로 채권단에 의해 결국 아시아나항공까지 매각이 결정되어 결국 금호아시아나그룹에는 사실상 금호고속과 금호건설만 남게 되었다.
2020년 12월 8일 그룹 내 컨트롤 타워인 전략경영실을 해체했다. 이 결정으로 그룹 경영을 끝내고 사실상 그룹을 해체한 셈이다.
국제그룹[7], 대우그룹, 쌍용그룹, 기아그룹, 한보그룹 등과 더불어 한때 재계 10위권 안에 들었다가 몰락한 몇 안되는 대기업 해체 사례, 즉 대마불사의 반례이다. 국제그룹과 대우그룹 해체에는 정치권의 결정이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고 대우그룹, 쌍용그룹, 기아그룹은 IMF의 폭풍을 직격탄으로 맞은 사례인 반면,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오로지 순수하게 오너의 경영 실패만으로 그룹이 몰락하게 된 사례이다. 다만 대우그룹도 역시 오너 경영 실패도 해당되며, IMF 당시에 쌍용자동차를 인수하지 않고 쓸데없는 자회사를 매각 및 통폐합 했었더라면 지금도 현존해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IMF때 해체된 재벌 대부분이 문어발식 기업이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박성용은 금호그룹 경영 당시(1984~1996년)에 "이 기업은 무너뜨릴려 해도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라고 명언을 남기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동양그룹, 동부그룹(현 DB그룹), 웅진그룹, 동원그룹 등, 크지않은 재벌들도 위기를 거치며 중견기업으로 축소되거나 해체되기도 했다.
건재하던 시절엔 금호석유화학그룹, 대상그룹, 교보생명, 하림그룹, 부영그룹, SM그룹. 중흥그룹, 호반건설 등과 더불어 호남 지역을 대표하는 재벌이었다.
2. 역사
자세한 내용은 금호아시아나/역사 문서 참고하십시오.2.1. 부활 가능성
결론부터 말하자면 없다. 그렇기에 HDC가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추진하다가 취소한 이후에도 아시아나항공, 금호고속, 금호건설 상태로 그룹을 유지할 생각을 안 하고 다른 회사에 아시아나항공 매각을 추진한 것이다.애초에 사퇴했다가 전문경영인 신분으로 복귀한 박삼구가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전성기 시절 주요 계열사인 금호타이어, 금호렌터카, 금호생명 등을 무리하게 되찾으려다가 오히려 논란만 키우고 회장직에서 물러나 구속까지 됐다는 점에서 박삼구 본인이나 아들 박세창 등이 아시아나항공을 비롯해 과거 금호아시아나그룹 핵심 계열사였던 회사들을 되찾으려는 시도는 현재의 재무상황 상 불가능하고 설령 금호고속과 금호건설이 사업이 갑자기 잘 되서 그런 여력이 생겨 그걸 시도했다간 2010년대 박삼구의 선례 때문에 그룹 해체 이후 그나마 박삼구 일가에게 남은 금호고속, 금호건설의 경영권마저 채권단에게 뺏기고 박삼구 일가가 범금호가 회사 전체에 영원히 발도 못 들이게 될 가능성도 있다.
3. 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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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트로폴리스 A동 |
현재 종로구 공평동 센트로폴리스 A동 7개층(20층~26층)을 임차해서 본사로 사용하고 있다. 자금난에 빠진 아시아나항공의 유동성 자금 조성을 위해 기존 신문로 사옥 건물을 2018년 5월 도이치자산운용에 4,180억 원에 매각하였고 2019년 1월 종각역 부근의 센트로폴리스 A동으로 이전했다.
- 20층(표시층 22층): 아시아나항공[8], 아시아나티앤아이
- 21층(표시층 23층): 아시아나IDT
- 22층(표시층 25층): 아시아나IDT
- 23층(표시층 26층): 금호건설, 아시아나세이버
- 24층(표시층 27층): 금호건설
- 25층(표시층 28층): 금호건설
- 26층(표시층 29층): 금호아시아나
3.1. 구 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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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아시아나 퍼스트타워 |
그러다가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사세가 더욱 커지게 되면서 2006년 바로 건너편에 신사옥을 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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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아시아나 메인타워 |
기존 사옥(크레센도) 바로 건너편에 있으며 2008년 9월부터 2019년 1월까지 본사로 사용했다.[9] 특징으로 폭 23m, 높이 91.9m 규모의 LED 미디어파사드로 외벽을 장식하였다.[10]
여담으로 박삼구 회장이 전반적인 디자인, 설계에도 관여했을만큼 상당한 애착을 가졌던 건물이라고 한다. 준공식 당시에도 “500년 영속 기업의 터전이 됐으면 한다”며 큰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현금 마련을 위해 입주한지 10년만인 2018년 5월 도이치자산운용에 4,180억 원에 매각되었다. 이후 금호그룹은 광화문과 종로 인근에서 새 본사 건물을 알아보았는데, 구 사옥인 당시 대우건설 빌딩(현 크레센도 빌딩)으로 들어가는 것을 고려하다가 2019년 1월, 신축된 센트로폴리스 A동으로 본사를 이전했다.
금호그룹이 대우건설에 이어 대한통운까지 인수했던 최전성기에 입주했지만 이후 대우건설과 대한통운을 모두 매각하였고 오랜 계열사였던 금호생명, 금호렌터카 매각과 형제의 난으로 인한 금호석유화학 계열분리, 유동성 위기로 인한 금호타이어, 금호산업 워크아웃까지 겪게 되면서 결국 입주 10년만에 이 건물까지 매각하게 되었다.[11] 참고로 사옥 바로 옆에 흥국생명 본사가 있는데, 여기엔 그 유명한 조너선 브롭스키의 조각상 "망치질 하는 사람(Hammering Man)"이 있다. 옆에 있는 금호아시아나는 이것 때문에 풍수적 문제를 지적받았고 풍수적 이유 때문에 그룹에 위기가 닥쳤다는 의견이 있다.
4. 기업 정신
- 경영목표
- 21세기 세계 초일류 기업 (1996~2002)
- 업계 최고 1등의 기업가치를 창출하는 아름다운 기업 (2002~2021)
- 기업이념: (1996년 제정.)
- 세계 일류의 가치창출 기업, 종업원과 함께 가꾸는 기업, 이웃으로부터 사랑받는 기업
- 미션
- 금호아시아나그룹 이해관계자들의 삶의 질 향상
- 4대 핵심경영방침: (2002년 제정.)
- 윤리경영, 인재경영, 합리경영, 전략경영
- 슬로건
- 아름다운 기업 금호아시아나 (2006~2021)
- 금호아시아나 정신
- 열정과 집념
- 인재상
-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
- 연구하고 공부하는 사람
- 진지하고 적극적인 사람
- 관리자 덕목
- 솔선수범, 판단력, 결단력, 추진력
- 조직문화
- 질서와 자유가 조화된 열린 공동체 문화
5. 사가
- 사가: 작사/작곡은 김도향이 맡았다.
보라 눈부신 태양은 매일 떠오르고
우리 젊음은 여기에 새로움을 만든다
고객을 들어라 저높은 곳으로 미지의 세계로
무한한 지혜와 끝없는 용기로 우리 꿈 만들자
나가자 금호 우리의 꿈 우리미래
나가자 금호 온 세상에 펼쳐가자
우리 젊음은 여기에 새로움을 만든다
고객을 들어라 저높은 곳으로 미지의 세계로
무한한 지혜와 끝없는 용기로 우리 꿈 만들자
나가자 금호 우리의 꿈 우리미래
나가자 금호 온 세상에 펼쳐가자
6. 역대 임원
- 명예 회장
- 위창남 (1995~1996)
- 박성용 (1996~2003)
- 박삼구 (2009~2010)
- 회장
- 부회장
- 박성용 (1979~1984)
- 박정구 (1994~1996)
- 박삼구 (2002)
- 박찬법, 신훈 (2006~2009)
- 이원태, 박홍석 (2015~2020년 12월 8일)
- 회장 부속실장
- 박정구 (1981~1984)
- 박삼구 (1984~1991)
- 박찬구 (1991~1998)
- 비전경영실장
- 박찬구 (1998~2003)
- 전략경영본부장
- 오남수 (2003~2010)
- 기옥 (2010~2011)
- 박홍석 (2014~2020)
7. 계열사 목록
7.1. 현존
- 금호고속: 범 금호그룹 전체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모체 회사이며, 현재 금호그룹의 지주회사이다. 1984년 금호건설을 합병했다. 1993년 재편되어 금호건설 고속버스 사업부가 되었다. 1999년 금호산업으로 합병된 뒤 2006년 금호터미널과 금호기업의 합병으로 탄생한, 금호홀딩스와 합병하였다. 이후 금호홀딩스는 그룹의 지주회사 역할을 하고 있다. 금호고속 자체는 2012년 매각되어 그룹에서 분리되었다가, 2017년 채권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시 금호홀딩스가 인수했다. 2018년에는 금호홀딩스가 금호고속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박삼구 오너 일가가 71.2%를 가지고 있다. 금호고속이 보유한 전국 각지의 터미널을 관리하고 있다.
- 금호건설: 금호고속, 아시아나항공과 함께 그룹의 주력 계열사이다. 한때 그룹의 지주회사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73년 금호실업이란 무역업체를 시초로 1981년 금호산업, 1984년 삼양타이어를 각각 합병했고, 1996년 금호타이어로 사명을 변경했다가 1999년 금호건설을 합병 후 건설, 고속버스, 무역, 타이어, 렌터카 등을 총괄했다. 그러나 2001~2002년 두 차례 렌터카와 건설부문을 금호개발에 각각 넘기고 2003년 금호타이어, 2006년 금호터미널 및 금호리조트, 2011년 금호고속을 각각 분사해 사실상 건설 부문( 금호건설)만 남게 되었다. 2009년 워크아웃으로 채권단에 넘어갔으나, 2016년 다시 금호그룹에서 인수했다. 금호고속이 지분 45.17%를 가지고 있다. 2021년 3월 29일부로 22년만에 다시 사명을 금호건설로 변경했다.
- 아시아나항공[매각예정]: 1988년 국내 두번째 국적항공사로 성장하여 이전까지 대한항공의 독점 시장에서 복수 민항체제로 전환되는 계기를 맞았다. 그러나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자금난으로 인해 그룹 이사회가 매각을 결정하여 HDC현대산업개발에 매각을 시도하였으나 인수작업이 진행도중 코로나 사태로 인한 경기 불황과 인수작업 지연으로 무산되었다. 그후 다시 대한항공에서 인수작업 중이며, 아직까지는 아시아나항공과 에어서울, 에어부산, 아시아나IDT, 아시아나세이버, 아시아나에어포트, 아시아나티앤아이 등의 회사가 아직은 금호아시아나그룹 계열사를 유지하고 있다.
- 에어서울: 아시아나항공의 저가항공사(LCC)이다. 인천국제공항을 기반으로 기존 아시아나항공의 비인기 노선을 인수 받았다.
- 에어부산: 아시아나항공의 저가항공사(LCC)이다. 사명 답게 부산 지역 향토기업과 금호아시아나그룹의 합작으로 설립되었으며, 김해국제공항을 허브로 삼은 국내에서 몇 안되는 지역 항공사로 성장했다.
- 아시아나IDT: 금호아시아나그룹의 IT 서비스업 계열사이다. 모든 계열사의 홈페이지 및 사내 인트라넷인 '텔레피아(Telepia)'를 원격 관리하기도 한다.
- 아시아나세이버: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소프트웨어업 계열사이다.
- 아시아나에어포트: 아시아나항공/에어부산/에어서울의 항공 지상조업사이다. 이 외에도 약 30여개의 외국 항공사에 지상 조업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 아시아나티앤아이: 구 '금호티앤아이'. 2017년 1월에 설립된 소규모 계열사. 설립당시 사명은 케이아이인베스트먼트(주)로 기타 금융업을 영위하고 있으며 자회사로 케이브이아이, 손자회사로 베트남의 Kumho Samco Buslines와 Kumho Viet Thanh Buslines 등을 두고 있다. 대한항공의 아시아나항공 인수가 성공적으로 이루어 진다면 지배구조법상 걸림돌이 작용되므로 이 회사도 매각대상에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된다면 금호고속에서 재인수를 하지 않는 이상 중국[14]에 이어 베트남에서도 금호고속의 흔적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더불어 금호고속도 채권단 관리하에 운영 중이라 베트남 법인까지 인수할 여력도 없어보여 결국 베트남 사업 철수는 예견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2022년 10월 17일부로 '아시아나티앤아이(주)'로 사명을 변경했다.
- 금호문화재단: 1977년 설립되었다. 문화예술계를 지원하는 비영리 기업으로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구체적인 규모 등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으며, 실제로는 인력장사를 하며 아시아나항공의 하청 일감을 몰아받아 박삼구 회장의 돈줄로 이용되고 있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산하에 2010년부터 생겨난 이른바 "케이 계열사"들을 자회사로 거느리고 있다. 아시아나항공의 지상업무를 맡는 하청업체들이지만 정확한 규모 등은 알려지지 않았다. 아시아나항공 매각이 확정된 후 실직 위기에 처하게 된 금호문화재단 소속 하청 노동자 2,000여명이 고용 승계를 요구하며 투쟁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한 현대산업개발은 무려 1,144%에 달하는 아시아나항공의 부채를 해결하기 위해 강력한 구조조정 실시를 암시하고 있어 금호재단 소속 하청 노동자들의 고용 승계는 난항을 겪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 금호아트홀: 광화문 대우건설 사옥에 위치한 금호아트홀은 2000년 개관하여 클래식 영재 공연, 실내악 앙상블 공연 등이 펼쳐졌으나 2019년 4월을 끝으로 폐관되었다. 2015년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에 오픈한 금호아트홀 연세를 위탁 운영하면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 금호미술관
- 케이에이㈜: KA. 지상여객 서비스
- 에이에이치㈜: AH, 외국 항공사 체크인 카운터 및 게이트 업무
- 에이큐㈜: AQ, 국내 지방공항 체크인 카운터 및 게이트 업무[15]
- 케이오㈜: KO. 수하물 및 기내 청소
- 케이알㈜: KR. 정비 관련 서비스
- 케이에프㈜: KF. 청소 및 방제
- 에이오㈜: AO. 항공운송 보조
- 죽호학원: 중고등학교를 운영하는 학교법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역시 금호문화재단과 마찬가지로 아시아나항공의 인력 하청을 담당하는 케이 계열사들을 자회사로 거느리고 있거나 그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 금호중앙중학교
- 금파공업고등학교
- 금호고등학교
- 금호중앙여자고등학교
- 케이지: KG, 통근버스 등 육상운송 서비스[16]
- 케이아이: KI, 부동산 관련
7.2. 분가/분리한 기업
- 금호전기·모빌코리아윤활유공업: 조명기기 전문 회사 및 윤활유 업체. 1978년에 금호그룹에 편입된 후 박인천 초대 회장의 동생 박동복[17]이 경영하던 회사로, 1981년 분리 후 그의 아들 박명구[18]가 물려받았지만 이쪽 역시 경영난으로 2019년 12월 12일 부로 경영권을 포기하였다.
- 삼화교통: 1973년 박인천의 큰사위인 배영환에게 경영권 승계.
- 유승무역: 1998년 분리 후 이듬해 '서울화인테크'로 변경됨.
- 대의산업: 신양파크호텔 및 무등파크호텔 운영사로, 금호산업이 지분 26.9%를 가지고 있던 대주주였다. 1995년 계열분리 후 1997년에 부도, 2003년에 파산함.
- 금호엔지니어링: 2002년 계열 분리 후 2005년에 '동호'로 사명을 변경했으나, 2014년에 파산함.
7.3. 해산/매각
- 경일토건: 구 경일건설. 1996년 금호산업개발에 합병됨.
- 광주자동차공업: 1974년 광주고속에 합병됨.
- (구)금호고속: 2011년 금호산업에서 물적분할된 업체. 2017년 금호홀딩스(현 금호고속)에 합병됨.
- 금호고속관광(초대): 구 세광관광-광주고속관광. 1992년 동성관광에 합병됨.
- 금호고속관광(2대): 구 동성관광. 1998년 매각됨.
- 금호고속관광(3대)(서울, 전남): 2021년 10월 15일에 속리산고속과 함께 동부고속-파이오니아-휘밸류-애스턴 컨소시엄에 매각하였다. 금호고속이 지분을 보유한 금호고속관광(경기)는 그룹 내에 잔류했다.
- 금호기업: 2016년 금호터미널에 합병됨.
- 금호리조트: 1989년에 설립된 리조트사업 계열사. HDC현대산업개발의 아시아나항공 인수가 무산되고 대한항공으로의 흡수통합이 결정된 후 모회사인 아시아나항공의 유동성 확보를 위해 2021년 2월 23일 금호석유화학에 매각. 여담으로 금호고속의 화순 차적(면허)지 주소가 화순 금호리조트다.
- 금호렌터카(현 롯데렌터카): 금호산업-(구)금호렌터카-대한통운 산하를 거쳐 2009년 물적분할된 법인. 2010년 KT에 인수된 후 렌터카사업부문을 인적분할해 KT렌탈에 넘기고 '금호렌터카글로벌'로 사명을 바꿨다가 2013년에 청산됨. 2015년 이후로 롯데에 인수된 상태다.
- 금호몬산토: 구 KM화학-금호쉘화학. 2002년 금호석유화학에 합병됨(정밀화학).
- 금호부동산중개: 1996년 청산됨.
- 금호사옥 (현 콘코디언 빌딩): 광화문 본관 빌딩 소유주로, 2018년 도이치자산운용에 건물을 매각하고 청산함.
- 금호산업개발: 구 동호기업-북일건설. 1999년 금호개발에 합병됨.
- 금호생명 (현 KDB생명): 1996년에 인수했다가 2010년에 다시 내놨다.
- 금호섬유: 구 명천기업. 1985년 청산됨.
- 속리산고속: 충북의 향토 고속버스 업체이자 금호고속의 경부선 고속버스 업체였다.[21] 결국 2021년 9월 7일에 금호고속관광과 함께 동부고속-파이오니아-휘밸류-애스턴 컨소시엄에 매각되어 금호속리산고속에서 속리산고속으로 환원됐다.
- 금호알에이시: 구 금호개발-금호렌터카. 2008년 렌터카사업부문을 대한통운에 양수한 후 2011년 청산됨. 금호피앤비화학이 100%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다.
- 금호운수: 1980년 매각됨.
- 금호인베스트: 박삼구 회장이 금호타이어 재인수 자금 마련을 위해 설립한 회사. 2017년 3월 박삼구 회장의 개인회사로 설립되었다가 4월 그룹에 편입되었으나, 박삼구 회장이 금호타이어 인수 포기를 선언하면서 2017년 12월 청산되었다.
- 금호전자: 구 동남전기 안양공장으로 '제스퍼 텔레비전'을 생산했으나, 1980년 (구)금호산업에 합병됨.
- 금호캐피탈: 구 금호주택할부금융. 2001년 금호종합금융에 합병됨.
- (주)금호 스폰지사업부: 1992년 대종스폰지(현 금호화성)로 매각. 인수 도중 65명 노조원들이 파업을 일으킨 적이 있다. #
- (주)금호 철강부문 (현 YK스틸): 구 극동철강공업-금호산업. 1984년 한보그룹에 매각되어 한보종합건설에 합병됐다가, 1996년 (주)한보로 이관된 후 이듬해 한보사태로 부도나 2002년 일본 야마토공업으로 분할매각됨.
- 금호케미칼: 구 미원유화. 2001년 금호석유화학에 합병됨(합성수지).
- 금호타이어: 일반인들 기준으로 대부분 '금호'하면 제일 생각나는게 금호타이어였을만큼 아시아나항공과 더불어 그룹의 핵심 계열사 중 하나였으며 국내외로 금호그룹을 대표하는 계열사였다. 2003년 금호산업에서 인적분할된 뒤에 2009년에 워크아웃을 선언했다. 산업은행을 비롯한 채권단에서 가졌었다. 단 경영권은 금호아시아나그룹이 쥐고 있었다. 박삼구 그룹 회장은 여러 차례 "금호타이어 재인수를 통해 그룹 재건을 마무리해야 하는 마지막 과제가 남아 있다"라며 재인수 의지를 밝혔으나 실패하고, 2018년에 중국 산둥성 칭다오 소재의 국영 타이어 회사인 더블스타에 매각되었다. 박삼구가 금호타이어를 되사려는 과정에서 아시아나항공 기내식 공급부족 사태가 촉발되었다. 사실 금호아시아나그룹이 금호타이어를 중국에 매각한게 아니라 금호산업 재인수 처럼 계열사 자금 동원을 통한 재인수 방식을 통해 되찾고자 했었으나 "박삼구 회장 개인 자격외엔 인수 조건이 부여되지 않는다"는 반 대기업 사상 & 글로벌 기준으로도 듣보 수준에 머물러있는 중국 타이어 회사를 인수후보자로 불러오는 등 친중 성향이 충만했던 당시 산업은행장의 조건이 발목을 잡히게 되어 금호그룹 입장으로선 그룹의 상징과도 같았던 금호타이어의 경영권이 강제로 뺏기다시피 매각당한 케이스라 경제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말이 많은 편이다.[22]
- 금호텔레콤: 1999년 독립 후 '에버텔'로 변경했으나, 2010년 폐업됨.
- 금호특송: 구 제일특송. 1989년 출범 후 1994년 5월 동서배송운수에 매각. 이후 현대택배에 인수합병됨.
- 금호페이퍼텍: 구 조일제지. 2006년 아세아그룹에 매각된 뒤에 '아세아페이퍼텍'으로 사명을 바꿨다가, 2012년 아세아제지에 합병됨.
- 금호화순리조트: 구 대한리조트. 1998년 금호개발에 합병됨.
- 금호EQS컨설팅: 1999년 금호개발에 합병됨.
- 남일건설: 구 원일기업. 1996년 금호산업개발에 합병됨.
- 대한통운 (현 CJ대한통운): 2008년에 인수했다가 도로 2011년에 내놓았다.[23] "대한통운" 만 매각하는 것으로 그 산하의 다른 계열사는 제외였다. 금호그룹이 가졌을 때에는 대한통운의 현금을 빼오기 위하여 금호터미널, 한국복합물류, 아시아나에어포트, 금호렌터카 등의 회사를 비싼 값에 매각했는데, 대한통운의 재매각시 금호렌터카는 KT에 매각하였고, 다른 자회사는 분리하여 아시아나항공으로 재인수되었다. 그래서 대한통운이 가진 금호터미널 부지를 눈독들이고 인수전에 참여한 롯데는 나중에 빠지고, 그 대신 현대로지스틱스를 인수해 롯데글로벌로지스가 출범했다.
- 대한통운국제물류: 2008년 대한통운에 합병됨.
- 대한통운터미날: 2009년 청산됨.
- 동아생명: 2000년 금호생명에 인수합병됨.
- 마산항제4부두운영: 2008년 금호아시아나그룹에 세트로 편입된 후 2011년 CJ그룹에 매각됨.
- 삼양타이어 제사사업부: 구 전남제사. 1973년 삼양타이어공업에 합병된 뒤 1976년에 공장 부지를 매각함.
- 삼진고속버스: 1973년 광주고속에 합병됨.
- 서울고속버스터미널: 대주주였으나, 2013년 신세계그룹에 지분 매각되었다.
- 신인천관광: 1993년 매각됨.
- 아시아나개발 : 구 아시아나공항개발 인천공항 화물터미널 운영업체로 2023년 청산됨
- 울산항만운영: 2008년 금호아시아나그룹에 세트로 편입된 후 2011년 CJ그룹에 매각됨.
- 의료법인 송광의원: 구 (의)광주의원. 1988년 청산됨.
- 인천공항외항사터미널: 2002년 지분매각 후 2016년 폐업됨.
- 제일특송: 1991년 금호특송에 합병됨.
- 진양개발: 골프장 진주CC 운영업체로, 1998년 금호개발에 합병됐다가 2001년에 동성여객컨소시엄으로 분할매각되어 '진주개발'이 됨.
- 충일건설: 1990년 아시아나항공에 합병됨.
- 한국도로관리: 2009년 금호개발상사에 합병됨.
- 한국복합물류: 2011년 CJ그룹에 매각됨.
- 한국복합화물터미널: 1999년 금호개발에 합병됨.
- 한국합성고무공업: 1985년 금호화학에 합병됨.
- 한남고속버스: 1974년 광주고속에 합병됨.
- 호남고속버스: 1972년 광주여객자동차에 합병됨.
- 호남복합물류: 2007년 한국복합물류에 합병됨.
- 화인소재공업: 1997년 유승무역에 합병됨.
- 이탈리아 모터스: 1988년부터 1996년까지 피아트 계열 차량 위탁 판매 업체. 피아트 판다를 시작으로 피아트 크로마, 란치아 테마 등을 수입해서 판매한 적이 있으나 사업부진으로 1996년 한보그룹에 모든 영업권을 매각함. 이후 한보사태로 인해 1997년 주광모터스(주)가 사업권을 인수하였지만 경영난으로 인해 1999년 끝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7.4. 관련없는 회사
하기 회사들의 사명은 한글과 영문(KUMHO)은 동일하나 錦湖가 아닌 다른 한자를 쓰거나 애초 금호와 전혀 관련이 없다. 삼성과 현대처럼 금호 역시 생각보다 흔히 쓰이는 사명 중 하나이다.- 금호교통
- 금호금속
- 금호덴탈제약
- 금호로지스
- 금호마린테크
- 금호유통
- 금호엔비텍
- 금호이앤지
- 금호 익스프레스: 금호고속의 고속부 1팀을 분할한 금호익스프레스(주)와 이름이 같은 이삿짐 업체. 한 술 더 떠 여기는 대놓고 트럭의 도색을 금호고속과 완전 똑같은 도색을 복붙하듯이 칠해놨다.
- 금호정공
- 금호상사
- 금호테크
- 금호투어렌트카
- 이외에 여기에 기재되지 않은 금호라는 이름이 붙은 회사 및 기업들.
8. 오너 일가
자세한 내용은 범금호가 문서 참고하십시오.8.1. 지역색
금호그룹의 인식과는 관계없이 일반적으로 호남을 연고로 하는 향토기업으로 인식되는데, 금호그룹이 전라도를 기반으로 대기업으로 성장한 것은 불변의 사실이 맞다. 금호그룹의 모체인 광주여객을 세운 박인천 창업주는 전라남도 나주시 출신이었고 생전에 광주에서 살면서 광주를 지역 기반으로 삼아 사업을 벌였으며 훗날 금호의 사업을 이어받은 아들들인 박성용, 박정구, 박삼구, 박찬구, 박종구 등 아들들도 모두 광주에서 나고 자란[24] 인물들이었다.더구나 1960년대까지 지방의 흔한 버스 회사였던 광주고속은 1971년 호남고속도로의 개통 후 전라도의 고속버스 노선을 1위로 과점하는데 성공하면서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으며, 여기에는 고향에 대한 애착과 결집력이 유난히 강했던 전라도 사람들의 절대적인 성원이 큰 동력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거기에 전라도는 경상도에 비해 여객철도편이 상대적으로 적다 보니, 버스를 많이 이용할 수밖에 없다는 환경도 겹쳤다. 전라도에서 어렵게 상경해서 근근히 서울살이를 이어가던 중 고향 전라도에서 올라온 광주고속의 버스를 보고 반가움과 그리움의 눈물을 훔친 뒤 기사들에게 "이 버스 전라도에서 온 것이 맞소?"라고 물어봤다는 이들의 일화가 존재할 정도. 그리고 그들은 고향으로 내려갈 때 무조건 광주고속을 이용했으며, 주변인들에게도 광주고속을 이용할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광주고속이 급성장하던 1970~1980년대 호남에 대한 주류 사회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소외와 핍박이 극에 달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광주고속을 비롯한 금호그룹은 그야말로 해태 타이거즈와 함께 전라도 사람들의 한을 달래 주고 자존심을 지켜준 존재였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전라도 사람들은 본인들이 어려웠던 시절 금호라는 브랜드를 키워 줬지만 오히려 전라도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으로 성장한 금호그룹은 전라도 지역 사회를 향해 미온적으로 지원했고, 호남지역 출신 인재 채용에도 기대에 미치지 못한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에 금호를 사랑했던 전라도 사람들이 "다른 기업이 그러면 몰라도 금호가 우리한테 그러면 안된다"며 서운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렇게 그룹의 모태가 전라도에서 시작되어 성장한 연유로 전라도 기업으로 분류되지만, 정작 금호그룹 측에서는 전라도 기업만으로 인식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업의 규모 자체가 대단히 커져서 향토기업이란 타이틀에 큰 의미를 두기 보다는 고르게 시선을 분배해야 할 필요성도 있기 때문이다.[25] 70년대까지만 해도 전체 임원중 80~90%가 전라도 출신이었으나 지금은 전라도 출신과 아닌 임원의 비율이 5대5 수준의 균형을 갖췄다. 또한 재계 서열 기준으로 보자면 전라도를 대표하는 기업집단은 이제 중흥그룹 혹은 하림그룹이다.
- 이제는 단순히 광주택시로 시작했다는 이유로 금호아시아나그룹을 전라도 기업으로 보기에는, 현재 그룹의 매출과 채용 규모가 지역에 큰 영향을 준다고 보기 어렵다.
- 무엇보다 지역 사회에서 기여할만한 여지가 (상대적으로) 적다. 전라도에서 일자리 창출에 크게 기여하는 기업들은 광주광역시의 기아 Autoland 광주, 완주 봉동의 현대자동차 전주공장, 군산의 타타대우상용차, 익산의 하림 공장 내지 여수국가산업단지 내에 있는 GS칼텍스, 금호석유화학, 여천NCC, DL이앤씨 등이다. 본사가 광주에 있는 금호타이어도 전라도 내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고 있지만, 금호타이어는 2018년도 이후로 금호아시아나의 품에서 떠나 중국의 더블스타로 경영권이 넘어가 버려 지금은 안타깝게도 그룹과의 연관성이 없는 남의 기업이 되었다. 또한 계열사인 아시아나항공의 경우 제5공화국 시절 서울항공으로 시작하여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성장했기 때문에 전라도와 연관이 적다. 그래도 그나마 첫 국내선 노선은 김포-광주로 시작하긴 했지만.
- 그리고 운수회사 시절, 사세를 확장할 때 9~12개월씩 임금을 체불하고 다시 그 돈과 융자금을 합해 신규계열사(예, 삼양타이어)[26]를 설립하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에 지역 사회에서 인심을 많이 잃었다.[27]
상기의 내용은 그룹이 살아 있었을 때 이야기이며, 현재는 사실상 그룹이 해체되고 이제 남은건 고속과 건설뿐이니 한때 전국구를 넘어 타이어와 항공을 통해 글로벌 시장에서도 진출한 이력이 있었던 재벌그룹이 다시 중견 규모로 쪼그라들게 되면서 전라도로 귀환하게 되어 향토기업 타이틀이 다시 자연스레 부여된 셈.
이때문에 전라도에서는 투자를 바라는 경우가 많지만, 금호그룹은 전라도의 스포츠 구단에 투자하는 것이 실익이 없다고 판단하고 투자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우그룹이 야구장(무등경기장) 건설에 가장 많은 기금을 쾌척해 지역 사회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1980년대에는 소비재에 대한 광고 효과를 노리고 창단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금호에는 당시 그런 게 없었다. 우선 고속버스나 여객기의 경우 시간대와 노선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아파트의 경우 입지 조건을 고려하기 때문에 소비재에 비해 고객의 충성도가 낮을 수밖에 없다. 그나마 소비재라 할 수 있는 타이어의 경우 1980년대에 자가용 보유량이 낮았음을 생각하면 썩 효과적이지 못하며, 금호전자의 경우 1980년에 사업을 이미 접었기 때문에 프로야구 논의가 있던 1981년 시점에서는 의미가 없다. 이렇게 그룹 시스템이 아직 탄탄하지 못한 여건으로 인해 박인천 - 박성용 부자는 프로야구단 창단에 반대했다.[28]
결국 삼양사, 교보생명에도 거절당한 전라도의 프로야구단은 해태제과에 낙점되면서 해태 타이거즈가 창단한 것이다. 이후 해태 타이거즈를 매각할 당시에도 금호그룹에선 전혀 나서지 않았고, 대신 광주광역시에 제조 공장을 둔 기아( 현대자동차그룹)에서 인수해서 2001년 7월부터 KIA 타이거즈가 되었다. 만에 하나 금호 타이거즈가 되었어도 금호의 재무 상황이 나빠지는 모습을 보면 주인이 또 바뀔 운명이었을 것이다.
오히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2003년에 서울 연고의 프로축구단을 창단하려했으나 광주, 전남의 반발로 무산되고 말았다.
창업주의 5남인 박종구가 지역색이 다른 이명박 정부 하에서 교육과학기술부(현재 대한민국 교육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제2차관을 지내고, 자회사인 아시아나항공이 에어부산을 만드는 등 그룹 차원에서는 적극적인 듯. 이 때문에 전라도 연고의 프로 스포츠 관련해 그룹 측의 지원은 지역민들의 기대치가 그리 높지 않다.
다만 스포츠 문제의 경우엔 다른 이유도 있긴 하다. 본래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창업주인 박인천 회장부터 현재까지 주로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예술 분야에 대한 투자 및 인재 육성에 노력을 기울인 대신 상대적으로 프로 스포츠 분야에는 관심이 적은 편이었다. 한때 금호생명에서 WKBL 팀을 운영했던 게 거의 전부였고 이마저도 한국산업은행에 인수되어 운영하다가 OK저축은행의 위탁 운영을 거쳐서 BNK금융지주로 매각되어 부산 BNK 썸이 되면서 이전 역사를 가져가지 않고 완전히 새로 출발했다. 그나마 2013년부터 2018년까지 금호타이어가 KIA 타이거즈의 유니폼 스폰서로 참여한 바 있고, 1995년 광주비엔날레 설립 시 30억원을 후원함과 더불어 그 이후에도 광주비엔날레를 꾸준히 지원해 주었다. 2012 여수 엑스포, 2015 광주 하계 유니버시아드의 공식 후원사로 참여한 바 있으며, 그 훨씬 이전인 1990년대 말에는 일본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활약 중이였던 투수 선동열에게 3년간 아시아나항공 일등석 무료 항공권을 제공해 준 바가 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의 학교법인인 죽호학원에 소속된 광주 금호고등학교(운암동 소재)는 광주 FC의 U-18 유소년클럽이다.
9. 여담
- 여느 대기업과 마찬가지로 금호아시아나그룹도 항공업을 시작한 이후 총수 및 상부 경영진의 내부 코드명이 존재했었다. 명예회장은 HCC, 그룹 회장은 CCC, 그룹 부회장은 DDV, 사장은 DDP 등으로 불리었었다.
- 금호아시아나그룹에서 사용하는 폰트는 가을체[29]이다. 이는 박삼구 회장이 ‘가을체’가 가장 깨끗하고 단정해 보인다며 바탕체, 굴림체 등으로 혼용되 온 폰트를 통일하도록 했다. 다만 요즘은 전반적으로 보고서 작성시 맑은 고딕으로 바뀌어가는 추세이다. 요즘도 아시아나항공 체크인 카운터 혹은 유스퀘어 등 여러 현장에서 고객 대상 공지 사항이 있을 시 가을체로 작성해서 인쇄하기도 한다.
- 그룹을 상징하는 기업 배지가 존재했었다. # 윙 로고 이전에 사용해왔었던 K 로고 시절부터 그룹 임직원들에게 배지를 주었으며 색동 저고리를 입은 여인을 형상화 했던 아시아나항공의 배지도 있었다. 별도의 로고를 쓰는 에어부산 #과 에어서울 사진에도 독자적인 로고가 있다. 그룹이 살아 있었을 때엔 근무 중 무조건 뱃지를 착용해야 했으나 현재는 그룹이 해체됐으므로 아시아나항공, 아시아나IDT 등의 경우 배지를 착용하지 않는 임직원들도 있다. 그룹에서 분리된 금호석유화학그룹은 별도의 배지가 없다. 아무래도 이쪽은 사명 워드마크만을 로고로 사용하고 있기에 추후 별도의 아이덴티티를 담은 BI나 CI를 선보이기 전까진 배지를 만들 것 같지 않아 보인다.
10. 문화 예술 영재 육성 지원
문화 예술 분야 중에서도 특히 클래식 분야에 대한 후원은 상당한 수준이며 체계적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문호 박성용 회장이 상당한 수준의 클래식 애호가였던 것이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는 영재 육성에 관심이 많았기에, 최근에 두각을 나타내는 재능 있는 한국인 신예 음악가 치고 금호아시아나그룹의 후원을 받지 않은 이가 거의 없을 정도이다. 서울의 옛날 본사 건물[30]과 광주 서구 광천동 유스퀘어 안, 그리고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에[31] 금호아트홀이라는 실내악 홀을 만들어서 싼 값에 좋은 연주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특히 매년 영재들을 심사해서 이곳에서 연주 기회를 제공하고, 그 외에 각종 지원을 한다. 광화문 금호아트홀에는 심지어 박성용 회장이 생전에 매번 앉던 좌석이 따로 있다. 치우쳐 있는 곳이라 이른바 VIP석도 아니고 오히려 싸게 팔 가능성이 높은 자리지만 연주자는 잘 볼 수 있어서 매니아들이 좋아할 만한 자리이다. 그러나 광화문 금호아트홀은 2019년 4월 30일부로 폐관 예정으로, 클래식 뮤지션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다만 연세대 금호아트홀 건립 때는 그룹이 부실로 휘청거리고 있는데, 개인의 명예를 위해 모교에 수십억을 투자하는 것에 대해 좋지 않은 인식도 많았다.또한 워낙 몸값이 비싸서 수지타산이 안맞아 대한민국에는 못 데려오고 있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을 성사시켜 정기적으로 오게 만든 것도 금호아시아나그룹이었다. 티켓 값이 최고 45만 원이어서 올 때마다 욕도 많이 먹고 있지만 워낙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이니 그래도 표는 다 나간다. 문제는 개런티가 워낙 세서, 그래도 약간 적자가 나기에, 오죽했으면 박성용 회장 장례식에 재계보다 음악인들이 조문을 더 많이 왔을 정도였다.[32]
11. 관련 문헌
[1]
대한항공의 아시아나항공 합병이 중도 취소 없이 그대로 이어진다면.
[2]
아시아나항공이
대한항공으로 매각이 진행 중인 상태로 아직 남아있기에 명목상으로만 그룹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며 대한항공의 아시아나항공 인수 합병 절차가 완료되면 완전 해체된다. 현재 아시아나항공의 인수 절차를 진행 중인 대한항공은 현재 코로나 사태로 인해 인수 합병 작업을 서두르지는 않고 있지만 향후 인수 완료 후 아시아나와 대한항공의 완전 통합을 예고했다. 게다가 2020년 12월 8일 금호아시아나그룹 전략경영실 해체로 실질적으로 해체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로 인해 남은 회사인
금호고속과
금호건설 모두 각자 독자적인 경영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룹으로 보기 힘들고 아시아나항공이 예정대로 매각된다면 완전히 해체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다만 코로나 이전부터 추진 중이던 아시아나항공 매각이 코로나가 터지고 5년이나 지난 2024년 현재까지 못 되고 있는 것을 보면 명목상으로는 아직 그룹이 유지되고는 있다. 매각 성사와 동시에 공식적으로도 그룹이 자동 해체된다고 보면 된다. 2024년 11월 28일 대한항공의 아시아나 인수가 승인된 것으로 보아 이 승인 건이 중도에 취소되지 않는 이상 금호아시아나그룹의 해체는 확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3]
현재
박삼구 전 회장의 계열사 부당 지원 사건으로 인해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 받고 법정 구속되어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4]
아시아나항공의 매각이 완료되면, 대기업의 척도로 불리는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에서 제외되어 기업 규모가 변경될 예정이다.
[5]
2018년 1월 이후로 업로드가 멈췄다. 이는 2018년 아시아나 기내식 공급부족 사건 + 박삼구 기쁨조 논란 발생 이후 그런 것이며 2020년 금호아시아나가 해체 수순을 밟게 되면서 더 이상 업로드할 이유가 없어진 것.
[6]
사진 왼편부터
금호건설(사진은 대표작인
아부다비 국제공항 관제탑),
아시아나항공,
금호고속,
에어부산,
에어서울.
[7]
외환 위기로 해체된 대우, 쌍용, 기아 등의 그룹과는 달리
당시 정권에 밉보여서 직접적으로
해체된 케이스이다.
[8]
아시아나항공의 서울 분사무실이다. 일부 부서만 있을 뿐, 진짜 본사는
김포국제공항 인근
오쇠동 아시아나타운에 있다.
[9]
참고로 금호그룹 계열사가 방을 뺀 구사옥은
서울역 앞
대우센터빌딩 매각 후 사무실이 필요했던
대우건설이 들어와 사옥으로 사용하다가 2019년에 을지로4가 써밋타워로 이전했다.
[10]
사진에 보이는 쪽이 아니라 뒤쪽이다. 그래서 해가 진 후
서울광장에서 광화문 방향을 바라보면 미디어파사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여담으로 잠깐이나마 금호그룹의 손에 있었던
서울스퀘어(구 대우센터빌딩)에도 리모델링 후 미디어파사드가 생겼다.
[11]
저 건물은 금호건설이 지은 것으로 매각 당시 콜옵션을 행사해서 다시 구매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2]
금호고속관광이 그룹 내 3개 법인(서울, 경기, 전남)이 있던 시절, 편의상 각 법인을 금호고속관광(지역명)과 같이 표기했으나, 현재 그룹 내에는 경기 법인만 남아있어 기업공시 등의 문서에 지역명 표기 없이 금호고속관광 그대로 표기하고 있다.
[매각예정]
[14]
1994년에 진출하여 10개 이상의 합작법인을 설립할 정도로 잘 나갔지만 경영난 여파로 인해 2017~2018년도에 철수했다.
[15]
출처: http://www.mediasr.co.kr/news/articleView.html?idxno=48946
[16]
과거
금호타이어 통근버스로 운영되기도 하였다.
[17]
그의 호를 딴
금파공업고등학교가 광주광역시 북구에 있다. 바로 옆에 금호고, 금호중앙여고, 금호중앙중이 있다.
[18]
재벌 가문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엔지니어·발명가 출신 경영자이다.
광주제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전자공학과(1978학번)에 입학해
학사·
석사·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19]
과거 아시아나항공의 사업보고서 등에 기업집단 자료에 한국윤활유공업(주), 금호전자공업(주)과 함께 1973년에 설립된 것으로 명시되었다.
[20]
관련 자료,
현 광우고속 기업정보
[21]
금호고속으로 합병됐기에 이 회사와 관련이 없다. 코오롱고속 또한
코오롱그룹이 아니라 이미 떨어져 나간 방계 회사였다.
[22]
충분히 국내 대기업에 매각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채권단과 산업은행은 대중국 수출과 외교강화를 이유로 60여년의 역사와 기술력을 갖춘 금호타이어를 중국에 바친 꼴이 되었다.
[23]
2011년 인수전 막바지에는 친족간인
CJ그룹과
삼성그룹마저 참여하면서 그야말로
막장 드라마급의 치열한 인수전을 보여주었다. CJ에서
삼성증권에 인수 자문을 맡겼었는데, 갑자기 삼성SDS에서 포스코와 협력하여 인수전에 뛰어들더니 삼성증권은 급기야 인수자문을 철회해버렸다. 삼성증권이 가진 CJ의 정보는 어디로 갔을까? 때문에 CJ쪽은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내었고, 시장에서는 포스코+삼성의 승리를 기정사실화 했는데, CJ쪽이 분노파워로 가격을 무려 5,000억 원씩이나 높게 써내는 바람에 인수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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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장남 박성용 전 회장부터 사남 박찬구 회장까지는 전부 광주의 최고 명문 중학교였던
광주서중학교를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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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대표적인 전라도 기업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게 오늘날
전북특별자치도에선 금호의 영향력이 광주/전남에 비해 많이 약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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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타이어의 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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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종 업자였던
한진그룹의 조씨 일가 역시 자사 직원들을 그다지 후대하지 않았지만, 이쪽은 주로 미군들을 상대하며 성장했고 결정적으로 사세를 확장한 것도 월남전 때 현지 미군 및 파월한국군 사령부의 지원 하에 일을 맡았던 데에 힘입은 것이었다. 또한 전쟁 통에 중간중간 미군 물자를 전용하는 것도 가능했던만큼 굳이 직원들 월급에 손을 대지 않아도 되었던 것. 당시는 군에서 귀국 box나 손망실 처리 등으로 미군이 지원해준 양질의 물자들을 국내에 비공식적으로 반입하는 상황이었기에, 이런 부분까지는 파월사령부에서 큰 제재를 가하지 않았던 덕분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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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박성용 회장은 스포츠보다 음악에 관심이 더 많았다. 금호아트홀에 본인이 매번 고정적으로 앉는 자리가 있을 정도로 클래식 음악에 조예가 깊은
클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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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폰트는 2000년부터 2009년까지(타는 문 옆의 도시형버스 (L)폰트는 2013년까지 적용)
현대 슈퍼 에어로시티의 후면에 사용되었던 폰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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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설명한 인수합병시 하필 이 건물을 대우건설에 배정했고 그 결과 현재는 이미 남남이 되어버린 대우건설의 본사가 되었다. 음향에 신경써서 워낙 실내악 전용 공연장으로 제대로 만들어 놨기 때문에 대우건설 쪽에서도 방빼를 시전하기 어려웠고, 덕분에 대우건설 본사인데 3층만 금호아시아나가 쓰는 불편한 동거가 이어지고 있다. 참고로 대우건설은 원래
서울역 앞 대우빌딩을 가지고 있었고, 금호그룹에 인수된 이후에도 가지고 있었으나, 금호그룹이 회사 사정이 나빠지면서 대우빌딩도
모건 스탠리에 팔아치웠고, 대신 금호그룹 사옥을 대우건설에서 받아왔다.
한국산업은행에 팔릴 때에도 사옥을 고스란히 가져왔다. 여튼 구 대우그룹의 자존심 같았던 대우빌딩을 모건 스텐리에 빼앗긴 것 때문에 대우건설 직원들이 금호라는 이름만 들어도 이를 바득바득 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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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은 현재 그룹 회장인 박삼구가 연세대학교 동문회장이라 기부금을 출연해서 만들었다. 광화문에 있던 원래 금호아트홀과 구별을 위해 이쪽은 금호아트홀 연세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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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캐스터로 유명한
임용수가 바로 금호아시아나그룹과 연이 있다. 성악과를 졸업한 후 1993년 금호그룹에 입사했다. 당시 맡은 직책은 금호그룹의 사회 공헌 사업 중 하나인 클래식 음악 후원 재단의 직원으로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