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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남대총 皇南大塚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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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KBS 역사스페셜 - 로마유리 신라에 오다
1. 개요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현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한 황남대총의 북분에서 출토된 삼국시대 신라의 유리구슬 제조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2. 내용
거푸집과 함께 발견된 황남대총 북분의 유리구슬들. 사진 출처 : 1600년 비밀의 문을 연 황남대총
함께 발견된 황남대총 출토 유리구슬 중 일부를 접사한 사진. 사진 출처 : 국립경주박물관 ‘오색영롱, 한국 고대 유리와 신라’
황남대총 북분에서 발견된 유리구슬 거푸집으로, 제작 연대는 대략 4세기 후반~5세기 초반(서기 300~400년대 사이)로 추정되고 있다. 황남대총에 함께 묻힌 황남대총 북분 금관,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 황남대총 남분 금목걸이, 황남대총 북분 금팔찌 및 금반지, 황남대총 북분 은제 관식, 황남대총 북분 금제 고배, 황남대총 북분 은잔, 황남대총 북분 금은제 그릇 일괄, 황남대총 남분 금제 관식, 황남대총 남분 은관, 황남대총 남분 은제 팔뚝가리개 등 총 7만여점에 이르는 막대한 양의 유물들과 함께 발견되었다.
4~5세기 경 신라인들이 유리구슬을 만들 때 사용한 것으로, 지금까지 한국에서 유리 생산과 관련된 자료가 출토된 유적은 서울 풍납토성을 시작으로 한반도 남부 지역에 여러 곳이 있으나 이 유물은 그 중에서도 연대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유리작품으로 따진다면 이보다 더 이전의 것으로 기원전 2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부여 합송리 유리 관옥이 있긴 하지만 이 유물은 푸른빛이 나는 긴 대롱형으로 납- 바륨 성분을 포함한 전형적인 중국의 유리제품이기 때문에 규소, 나트륨, 칼슘이 주성분인 소다석회유리로 만드는 한국제 유리를 주조하는 도구로는 이것이 최초라 할 수 있다.
3세기 후반부터 신라는 무역업을 크게 발전시켜 주변국의 경계를 벗어나 지구 반대편의 서아시아 및 지중해 연안의 국가들과 교역을 시작하였는데, 이때 고대 로마에서 제작된 로만글라스 형식의 유리제품들도 다수 수입되었다. 이후 신라인들은 서양인들을 통해 자체적으로 유리 제조기술을 습득, 송풍관과 유리 슬래그를 만들고 유리구슬을 생산하는 공방을 다수 운용하였는데 이때 자주 사용하던 도구들이다.
신라는 유리구슬을 제작할 때 원석을 가공하는 방법과 유리용액을 부어 만드는 방법 2가지를 사용했다. 전자의 경우 반용융 상태의 유리를 막대에 감아 만드는 방식이었고, 후자의 경우 방형 점토판에 작은 구멍을 벌집 모양으로 뚫고, 구멍 중앙에 침으로 세울 수 있도록 작은 구멍을 뚫은 형태의 거푸집을 만든 후 녹인 용액을 틀에 부어 작은 구슬을 한꺼번에 많이 만드는 양산형 방법이었다. 전자의 경우 유리의 품질이 좋아 귀족층이 주로 사용하였고, 후자의 경우 상대적으로 유리의 질은 떨어지지만 값싸게 양산이 가능하여 가난한 서민들이 주로 사용하였다. 이 거푸집들은 후자의 방법으로 구슬을 만들 때 사용하던 것이다.
이렇게 거푸집으로 만드는 양산형 구슬들은 주로 수정제 구슬을 비롯해 청색, 감색, 황록색 마노구슬 등이 있었고, 조금 신경을 쓴 경우 금(金)과 은(銀) 구슬 사이를 장식하고 모양과 색깔을 다채롭게 꾸민 경우도 있었다. 그 외에 금박(金箔)을 씌운 후 표면을 다시 유리로 감싼 금박(金箔)구슬도 있었다.
이러한 한반도의 유리 제조 방법은 신라가 멸망한 후 언제부터인가 기술이 완전히 실전되었다. 정확히 언제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조선시대에는 보석인 수정을 깎아 유리 대용으로 사용했고 1902년 이용익(李容翊)이 국립유리제조소를 건립하기 전까진 국내 제조 기술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