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 벨라루스 | 우크라이나 |
1. 개요
폴란드,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의 삼각관계에 대한 문서이다. 3국은 슬라브 국가에 속해 있지만, 동슬라브족에 속한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과는 별개로 폴란드인은 서슬라브족에 속하며 언어와 종교, 문화 관련하여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폴란드는 독일, 체코와 문화적으로 접점이 많으며 반대로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및 그리스와 접점이 많다. 이러한 연유로 폴란드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3국은 역사적, 정치적인 이유로 입장 차이가 달라지는 상황이다.오늘날 기준으로는 신냉전 시대 벨라루스가 친러- 반서방 노선을 타면서 폴란드, 우크라이나와 갈등이 늘어나고 있다.
2. 역사적 관계
2.1. 중세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게르만족들이 서쪽으로 대이동하는 과정에서 서슬라브족에 속하는 폴란인들이 오늘날의 폴란드 일대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폴란인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피아스트 왕조를 건국하던 시점에서 우크라이나 일대에는 키예프 대공국이 번성하였으며, 폴란드 동부 벨라루스 일대에는 투로프 공국, 폴로츠크 공국 같은 키예프 루스 계열 공국들이 등장하였다. 키예프 대공국을 비롯한 동슬라브족들은 동로마 제국의 영향으로 정교회로 개종하였다.키예프 대공국이 몽골 제국에 의해 멸망한 이후, 폴란드 왕국은 점차 동쪽으로 영토를 넓혀 포돌리아와 갈리치아 지방을 병합하였다. 폴란드의 지배 하에서 갈리치아 지방은 15세기부터 황소를 사육하여 실레시아 지방으로 수출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이를 계기로 황소는 서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금화나 은화에 상응하는 교환의 단위가 되었다.
2.2. 근세
자세한 내용은 폴란드-리투아니아 문서 참고하십시오.14세기 말 폴란드 왕국은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대부분 지역을 정복한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동군연합을 맺었고, 16세기 루블린 조약을 통해 연방제로 통일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 거듭났다. 이러한 과정에서 키예프 공국에 속했던 지역 상당수가 폴란드의 영토가 되었다. 루테니아인 귀족 상당수가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폴란드어를 사용하고 폴란드인과 통혼하며 사실상 폴란드인들과 동화되었다. 벨라루스 일대의 영토는 리투아니아 대공국 측의 영토로 계속 남아있을 수 있었으나, 벨라루스의 토지는 비옥도가 떨어지고 생산성이 높지 못했다. 대신 벨라루스는 우크라이나의 곡물들을 그단스크 항으로 옮기는 뗏목에 사용될 목재를 공급하는 역할을 맡았다.
다른 한편으로 16세기 말 이후 폴란드 리투아니아는 루테니아 정교회 소시민들과 농노들에게 정교회 전례를 보전하되 교황수위권을 인정하는 동방 가톨릭 교회로 개종할 것을 강요하면서 심각한 갈등이 일어났다.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모스크바 대공국의 후신 루스 차르국과 사이가 무척 나빴는데, 그 이유는 루스 차르국이 폴란드 리투아니아의 속국이던 리보니아 연맹의 공국들을 공격하는 동시에 리투아니아 대공국 동부의 주요 도시 스몰렌스크를 계속 공격하였기 때문이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지그문트 3세 시절 루스 차르국이 혼란 시대에 빠지자 모스크바를 점령하기도 했다. 루스 차르국과 코사크는 정교회라는 공통 분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했던 상황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심지어 우크라이나 대초원 지대의 반자치 집단이었던 코사크들한테까지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를 강요하자 코사크들은 보흐단 흐멜니츠키를 중심으로 대대적으로 봉기하였고, 이를 계기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키예프를 포함한 우크라이나 영토 대부분을 상실하게 되었다.
루스 차르국은 표트르 대제 때부터 근대화 정책을 실시하면서 러시아 제국으로 거듭났고, 다른 한편으로 이웃한 합스부르크 제국 그리고 프로이센 왕국의 국력 역시 급속히 신장되었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국력을 추월하게 되었다. 18세기 후반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폴란드 분할로 인해 멸망하고 우크라이나 일대와 벨라루스 일대는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2.3. 19세기
19세기에는 폴란드 분할로 폴란드의 동부는 러시아 제국의 영토 이른바 러시아령 폴란드로 편입되었다. 벨라루스 전 지역과 우크라이나 중부와 동부 대부분 지역 역시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근세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강요로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으로 반강제로 개종당했었던 벨라루스인들은 러시아 제국 지배 하에서 다시 한 차례 정교회로 환원되었다. 이는 에스토니아와 체코의 유사 사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벨라루스인들 사이에서 종교 관련한 회의주의가 만연하게 된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다른 한편으로 로마 가톨릭을 고수하던 벨라루스 일대의 폴란드인 지주들은 11월 봉기와 1월 봉기가 차례로 실패하면서 대거 귀족 특권을 잃어버리고 프랑스/미국 등으로 망명하거나 시베리아로 유배를 당하면서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19세기 당시 우크라이나 지역은 이미 17세기 흐멜니츠키 대봉기의 여파로 폴란드계 지주들의 세력이 크게 약화된 상황이었고, 러시아 제국 지배 하에서 우크라이나 체르노젬의 주 소유주들은 대개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지역에 기반한 러시아 대귀족들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우크라이나 일대는 상대적으로 11월 봉기와 1월 봉기에 영향을 적게 받은 편이었다.
우크라이나의 서부와 폴란드의 남부 영토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으로 편입되었다. 동방 가톨릭 교회가 대대적인 박해를 받았었던 러시아 제국 영토와 다르게 오스트리아 제국 내에서는 정교회 대신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등등 교파가 더 우대를 받았고 이러한 연유로 갈리치아와 자카르파탸[1] 내에는 동방가톨릭 교회가 교세를 유지하게 되었다.
2.4. 20세기 초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 폴란드는 폴란드 제2공화국을, 벨라루스는 벨라루스 인민 공화국을, 우크라이나는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과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을 세워 러시아 제국,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벨라루스는 볼셰비키에게, 서우크라이나는 폴란드에게 멸망했다. 우크라이나측은 볼셰비키 및 폴란드와 모두 적대했지만, 볼셰비키에게 영토 대부분을 점령당함에 따라 전자가 더 큰 위협이라고 판단하여 폴란드와 동맹을 맺고 볼셰비키와 전쟁을 치렀다. 폴란드는 이 전쟁에서 벨라루스 서부를 획득했지만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멸망했다. 전간기 폴란드 내 우크라이나인들과 벨라루스인들은 2등시민으로 차별을 받았으며 전간기에는 이들 중 상당수가 아르헨티나로 이민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우크라이나계 아르헨티나인, 벨라루스계 아르헨티나인 문서 참조.전간기에는 수십만의 폴란드인이 벨로루시 SSR 및 우크라이나 SSR 서부에 거주했다. 1932-1933년 우크라이나 대기근으로 우크라이나인과 재소 폴란드인은 큰 피해를 입었다. 여기에 대숙청이 한창이던 스탈린 정권 하에서 NKVD가 1937-1938년 폴란드인 작전을 벌여 재소 폴란드인 1/6에서 1/3이 학살되었다.[2]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2차대전은 독소전쟁으로 이어졌다. 폴란드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는 이 전쟁으로 각각 수백만의 사망자를 내는 역사적 비극을 공유하게 되었다. 초반에 나치 독일에 무너지는 듯 했던 소련이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우세를 보이고, 결국 소련군은 베를린을 함락시킨 후 동유럽과 중유럽 영토 전반을 대대적으로 재조정하였다. 폴란드의 영토로 편입되었던 우크라이나 서부, 벨라루스 서부가 소련의 영토로 편입되었으며 폴란드에는 그 대가로 독일 동부 영토 상당부분을 떼어주었다.
2.5. 20세기 후반
냉전시절에 폴란드는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란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다. 당시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는 각각 소련의 공화국인 벨라루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2차대전의 참상을 급속히 복구하고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과 상당한 수준으로 연계가 이루어졌던 상황이었다. 80년대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면서 폴란드는 탈냉전 이후에 공산주의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정권이 들어섰다.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는 91년 벨라베자 조약으로 소련 해체 이후에는 독립국이 됐다.90년대 후반에 폴란드는 나토에 가입했다.
2.6. 21세기
2004년에 폴란드는 유럽연합에 가입했다. 그리고 폴란드는 탈냉전 이후에 친서방 정책을 실시하면서 러시아를 견제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도 폴란드와 함께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협력하고 있다. 반면, 벨라루스는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친러정책을 실시하고 러시아와 협력하면서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를 견제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벨라루스는 폴란드, 우크라이나와 갈등이 존재하며 2010년대부터 유로마이단,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돈바스 전쟁이 일어나자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는 협력을 강화했다.벨라루스는 2010년대부터 러시아와 갈등이 생겨났지만, 2020년에 벨라루스에서 시위가 일어나자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벨라루스가 러시아와 통합을 추진하면서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와는 갈등이 생겨나고 있다.
벨라루스측이 우크라이나 외교관들을 추방시켰다. #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초기, 벨라루스 철도 노동자들과 해커들로 이루어진 반체제 세력들이 러시아군의 철도 이용을 막았다. #
안제이 두다 대통령은 연설에서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며 대러 제재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
벨라루스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 저항군 묘지를 파괴하자 양국간 갈등이 일어났다. #
9월 8일, 벨라루스가 폴란드 국경 인근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
3. 문화 교류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를 받으면서 폴란드 문화로부터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근세 폴란드는 르네상스 문화를 동유럽에 전파하는 첨병 역할을 맡았고, 이러한 연유로 중근세 루테니아의 지배층들 역시 폴란드 문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벨라루스어와 우크라이나어는 동슬라브어파 계열임에도 불구 서슬라브어파 폴란드어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한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영향으로 생성된 정교회 전례를 유지하되 교황수위권을 인정하는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파가 오늘날에도 우크라이나 서부를 중심으로 교세가 적지 않은 편이다.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는 같은 동슬라브어파 언어인 러시아어 화자가 많은 반면, 폴란드는 애초에 폴란드어와 러시아어가 차이점이 적지 않기 때문도 있고 반러 감정도 적지 않기 때문에, 소련 해체 이후 학교를 다닌 인구 중에서는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 가능한 인구가 제한된 편이다.
4. 관련 문서
- 폴란드/외교
- 벨라루스/외교 / 유럽연합-벨라루스 관계
- 우크라이나/외교 / 유럽연합-우크라이나 관계
- 유럽 평의회
- 유럽연합 / 나토[3]
- 독립국가연합 / 유라시아 연합[4]
- 루블린 삼각동맹[5]
- 폴란드/역사
- 벨라루스/역사
- 우크라이나/역사
-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 러시아 제국
-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 소련 -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폴란드 인민 공화국, 소련 해체
- 신냉전 / 유로마이단 / 돈바스 전쟁 / 라이언에어 4978편 벨라루스 강제착륙 사건 / 2021년 벨라루스-유럽 연합 국경 위기 /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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