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5 09:30:21

우크라이나-헝가리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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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우크라이나

1. 개요2. 역사적 관계
2.1. 중세2.2. 근세2.3. 19세기2.4. 20세기2.5. 21세기
3. 대사관4. 관련 문서

1. 개요

헝가리 우크라이나의 관계에 대한 문서이다. 양국은 역사적으로 교류가 활발했지만, 역사적으로 헝가리 영토였던 자카르파탸에서 우크라이나인 농민들이 헝가리인, 독일인 지주들에게 탄압을 받았던 역사적인 이유로 인하여 민족감정 갈등이 크다. 헝가리가 폴란드와 혈맹 수준으로 사이가 좋은 것과 대조된다. 2001년 통계 기준 헝가리인은 우크라이나에서 다섯번째로 인구가 많은 소수민족 집단이었으나,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경제 상황이 매우 좋지 않은데다가 우크라이나 내전까지 겹쳐서 많은 우크라이나 거주 헝가리인들이 헝가리로 이주하는 상황이다. 과거 헝가리가 자카르파탸를 점유하던 시절에는 우크라이나인 인구 외에도 우크라이나인과 근연 관계에 해당하는 소수민족인 루신인 인구가 상당수 거주했다.

2. 역사적 관계

2.1. 중세

서기 9세기 마자르족의 서진 과정에서 자카르파탸 헝가리 대공국의 차지가 되었다. 서기 1000년, 헝가리 대공국은 헝가리 왕국을 선포했는데 당시 체르노젬을 중심으로 한 동슬라브족들은 키예프 대공국이 있었다. 키예프 대공국이 쇠퇴하면서 헝가리 국왕 언드라시 2세 갈리치아를 침공하였으나 곧 격퇴당했다. 키예프 대공국이 몽골 제국의 침공을 받아 멸망할 무렵 키예프 대공국 서쪽에서 갈라져 나온 갈리치아-볼히니아의 다닐로(Данило Романович 1201~1264)는 일찍히 헝가리 왕의 보호를 받았던 적이 있으며, 헝가리 왕국과 자카르파탸와 볼히니아 지역을 두고 여러 차례 전쟁을 벌여 볼히니아를 헝가리로부터 탈환하였다. 헝가리 국왕 러요시 1세가 1370년대 갈리치아를 대대적으로 침공하였으나 루테니아 왕국 측의 공격에 막혀 실패하였고 그 결과 1380년대부터 갈리치아와 헝가리 사이에 오랫동안 지속된 국경선이 확정되었다. 이 국경선은 20세기 초반까지 이어졌다.

다닐로 시대 전성기를 누리던 루테니아 왕국은 14세기 분할당하며 멸망했다. 갈리치아 폴란드 왕국으로, 볼히니아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합병당하는 과정에서 자카르파탸는 헝가리의 영토로 확정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루테니아 문서의 카르파티아 루테니아 항목 참조

2.2. 근세

자카르파탸는 비교적 척박하고 빈곤한 산악지대로 해당 지역의 농민 인구의 중추를 구성하던 루신인들은 합스부르크 제국 농노 해방이 완료되기 전까지 헝가리인, 독일인 지주들에게 농노로 귀속되었다. 주로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루테니아 그리스 가톨릭을 믿는 자카르파탸의 우크라이나인들은 가톨릭을 믿는 헝가리 왕국에서 2등 시민으로 차별을 받았으나, 빈곤 문제로 교육 수준이 낮아서 헝가리인, 독일인 지주들이 갑질을 하더라도 제대로 대처하기 힘들었다. 근세 자카르파탸의 농민 계층에는 루신인 외에도 루마니아인, 슬로바키아인 농노 인구도 적지는 않았다. 루신인들과 루마니아인들이 믿는 정교회 동방 가톨릭 교회는 심각한 차별 대우를 받았는데 정교회 성직자들의 경우 농노로 취급받아서 농촌의 정교회 사제들조차 농노와 마찬가지로 지주를 위해 노역을 제공해야 했고, 체형에 처하기도 했다. 유럽 다른 지역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17~18세기 헝가리가 지배하는 자카르파탸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갈리치아는 같은 정교회 전례를 유지하되 교황 수위권을 인정하는 동방 가톨릭 교회 문화를 공유하는 지역으로 묶이게 되었다. 빈곤한 상황과 차별에 시달리던 정교회 성직자들은 1649년 운그바르에서 동방 가톨릭 교회로의 개종을 공식적으로 결정했으며 1652년에는 로마 교황청에 이 결정을 전달하여 승인받고 인준받았다. 루신인 농민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정교회에서 루테니아 그리스 가톨릭 교회로 개종된 셈이었는데, 성직자들이 소요가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자신들의 교파가 변경된 것을 일반인들에게 비밀로 하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성직자들이 공식적으로 개종한 지 100여 년이 지난 1760년대까지도 루테니아 농민들은 실상을 모르고 자신들이 정교회에 소속된 것으로 여기고 살았다. 루테니아 농민들 중에 글을 배우거나 외부에 나가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 중에서 '알고보니 그동안 자신들은 정교회를 믿는 줄 알고 살았으나, 실제로는 동방 가톨릭 교회 성직자와 함께 동방 가톨릭 성당에서 미사를 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고 소동을 일으키는 경우가 종종 일어났다고 한다.

당시 헝가리 왕국을 다스리던 합스부르크 왕가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카르파탸 지역의 루신인 농민들 사이에서 정교회-동방 가톨릭 관련 소요가 빈발하는 사태가 러시아 제국의 개입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였다. 동방 가톨릭 성직자들과 오스트리아 정부조사반은 자카르파탸의 성직자 집단의 심각하게 어려운 경제적 여건과 여기서 비롯된 낮은 교육 수준을 원인으로 지적하였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한편으로 정교회를 탄압하고 동방 가톨릭 교회를 지원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카르파탸 지역 우크라이나인/루신인 성직자들이 교육 및 물질적 여건을 개선하는 사업에 착수하였는데, 이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발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남겼다.

갈리치아와 자카르파탸에서는 똑같은 종류의 종교 서적과 필사본이 사용되었다. 굳이 나누자면 갈리치아 일대의 동방 가톨릭 교회를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라고 칭한다면 자카르파탸와 슬로바키아 등 루신인들 거주지역 일대의 동방 가톨릭 교회는 루테니아 그리스 가톨릭 교회라 칭해졌다.

2.3. 19세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대 헝가리 왕국 인구 중 4.69%에 해당하는 47만여 명이 우크라이나인이나 루신인이었다. 대타협으로 주권을 일부 되찾은 헝가리 왕국은 이들을 포함한 자국 내 이민족[1]을 대상으로 강력한 마자르화 정책을 실시하여, 우크라이나어의 사용을 제한하고 우크라이나 문화를 말살하려 하였다.[2]

2.4. 20세기

20세기 초반에 러시아 제국 혁명으로 몰락한 뒤, 우크라이나 지역은 잠시 독립을 쟁취했지만 이내 소련의 일부가 되었다. 하지만 자카르파탸 지역은 루마니아 왕국이 점령했다가 다시 헝가리가 탈환하는 듯 하더니 제1차 세계 대전이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포함한 동맹국의 패배로 끝나고 민족자결주의 정책이 시행되면서 신생 독립국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로 귀속되었다. 이후 1일간의 독립 국가로 존속하다가 1939년 3월 제1차 빈 중재[3] 헝가리에 다시 귀속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은 영토를 재분배하는 과정에서 체코슬로바키아에 귀속되었던 자카르파탸 지역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영토로 귀속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다시 수많은 헝가리인이 헝가리로 이주했다. 헝가리 역시 소련의 영향으로 헝가리 인민 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이 들어섰다.

1991년에 소련 해체로 우크라이나가 독립국이 되면서 양국은 공식으로 수교관계를 맺었다. 헝가리도 80년대에 민주화 운동의 영향으로 공산정권이 무너졌다.

2.5. 21세기

헝가리와 우크라이나는 역사적인 이유로 민족 감정이 매우 큰 갈등 관계이다. 자카르파탸주에는 2001년 기준 15만 6천여 명의 헝가리계 우크라이나인과 헝가리인이 거주하고 있어서 헝가리어가 쓰이고 있다. 2012년 언어법으로 헝가리어는 우크라이나의 지역어로 지정되기도 했지만, 페트로 포로셴코 정부에서 우크라이나어를 우선하여 2012년 언어법을 폐지하고 이후로도 소수민족어의 사용을 제한하려고 하면서 양국간 심각한 갈등이 생겨나기도 했다.[4] 갈등은 현재진행형 #이다.

다만 우크라이나의 언어법 시행 및 우크라이나어 교육 강화를 두고 무작정 소수민족 탄압이라고만 주장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실제로 그 동안 우크라이나 내 언어사용을 관망함으로 인해 소수민족이 오히려 우크라이나 사회에서 소외되고 고립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2001년 우크라이나 인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헝가리계 우크라이나인의 95.4%가 자기 모어를 헝가리어로 답했다.[5] 이들 대부분은 우크라이나 서부 자카르파탸주에 집중 거주하며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구축하고 있다. 문제는 이들 대부분이 국어인 우크라이나어를 거의 구사하거나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소수민족어만 구사한다는 점이다.[6] 우크라이나 내 소수민족 학교의 우크라이나어 교육시간은 주당 2~3시간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우크라이나 대부분과 유리된 언어 사용과 그로 인한 우크라이나 국가통합 저해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우크라이나어는 물론이고 러시아어조차도 구사하지 못함으로써 우크라이나 내에서 이들 헝가리인을 비롯한 비우크라이나-비러시아계 소수민족은 경제에서 소외되고 있다. 실제로 헝가리인이 집중거주하는 자카르파탸주의 2013년 1인당 GRP(Gross Regional Products)는 2,132달러로 가장 높은 키이우 시(13,687달러)의 1/6에도 못 미치는 실정이다.[7]

우크라이나는 공식적으로 이중국적을 인정하지 않지만, 헝가리계 우크라이나인 인구는 상당수가 헝가리 국적과 우크라이나 국적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일단 민족적으로는 갈등이 있었긴 했지만 둘다 러시아와 악연이 깊었던 사이라 그런지 러시아 관련 문제에 대해서는 협력을 하기도 한다.

2022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일어나면서 헝가리로 피난가는 우크라이나인이 늘어났다. # 오르반 빅토르 총리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의 대러 에너지 제재 동참 요구를 거절했다. # 우크라이나는 대러 에너지 제재에 미온적인 헝가리에 대해 불만을 쏟아내고 있으며, 5월 2일에는 올렉시 다닐로프 국가안보국방위원회 서기가 전쟁 초반 키이우가 서방 주요 정보기관의 예상대로 3일만에 밀렸다면 헝가리가 자카르파탸를 합병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인도 언론을 통해 밝혔다. # 그리고 우크라이나 내무부에서 만든 사이트는 오르반 빅토르를 우크라이나의 공식적인 '적'으로 규정하여 헝가리에 대한 반감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다. #

이에 헝가리는 자카르파탸 침공 계획 같은 것은 없었다고 바로 반박에 나섰으며, # 또한 헝가리는 우크라이나의 유럽연합 나토가입을 막지 않겠다고 밝혔다. # 그러나 대러시아 석유 제재에 있어서는 추가 지원금과 확실한 대체재를 요구하며 계속 참여를 거부하고 있다. #

헝가리 국회의장 라슬로 쾨베르(László Kövér)가 젤렌스키 대통령을 정신이상자라고 공격하면서 양국 사이의 관계는 더욱 험악해지고 있다. #. 다만 자카르파탸 침공은 헝가리의 반박 이후 우크라이나의 반발도 없었고 동유럽 주변 국가들의 항의, 서방 주요 언론의 헝가리의 자카르파탸 침공 준비 보도 그 어떤 것도 없으면서 우크라이나가 친러에 반 우크라이나 기조를 보인 헝가리에게 급발진한 것으로 일단락되는 모양새다, #

6월 들어서 젤렌스키가 오르반을 키이우에 초대하고, 오르반도 우크라이나의 유럽연합 가입에 찬성하면서 # 두 나라 사이가 괜찮아지는듯 했으나 오르반이 계속 대러시아 제제 해제를 주장하고 우크라이나를 돕는 유럽연합 훈련에 혼자 빠지면서 # 여전히 두 나라 사이는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8]

특히 오르반 총리가 헝가리에서도 극우 사상을 가진 정치인이자 러시아의 푸틴과 정치적, 사적으로도 친밀한 관계로 알려져있어 유럽연합의 대 러시아 제재에도 반대 입장을 밝히는 등 우크라이나와는 가까워질 듯 하면서도 먼 관계로 남아있다.

2022년 11월, 우크라이나 정부에서는 무카체보의 팔라노크 성(Замок Паланок)[9]에 있던 헝가리의 국조 투룰(Turul) 동상[10]을 치우고 우크라이나의 국장인 트리주브(тризуб) 동상으로 대체했다. 당연 헝가리에서는 발끈.

우크라이나 전쟁 관련하여 헝가리 측과 EU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헝가리에서 EU의 반발을 무릅쓰고 우크라이나산 곡물 금수 조치를 내렸다. # 자세한 내용은 2023년 우크라이나 곡물 금수 사건 문서 참조.

3. 대사관

헝가리는 키이우에, 우크라이나는 부다페스트에 대사관을 두고 있다. 영사관은 헝가리가 우주호로드, 베레호베에 두고있으며, 우크라이나 측은 니레지하저에 있다.

4. 관련 문서



[1] 슬로바키아인, 루마니아인, 세르비아인 [2] 다른 한편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다른 구성국인 갈리치아 로도메리아 왕국에서는 폴란드 민족주의를 견제할 요량으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관련한 여러가지 제재를 철폐하였다. [3] 트리아농 조약이 아닌 제2차 세계 대전 직전/전시의 빈 중재. [4] 굳이 헝가리와의 문제만은 아니었으며 우크라이나에 소수민족을 두고 있는 루마니아, 폴란드, 불가리아 등 우크라이나어 우선 조치로 대부분 국가와 갈등을 빚었다. 유독 헝가리가 강하게 나와 돋보일 뿐이다. [5] 응답자의 주관이 반영된 답이므로 실제 헝가리어 사용의 양상과는 다를 수도 있음에 유의하라. [6] 예를 들어 2017년 10월 8일 우크라이나 TV 채널 1+1은 우크라이나 서부의 헝가리인들이 가장 기본적인 우크라이나어 문장조차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리포터가 교내 학생에게 "교장선생님은 어디있니?(Де директор?)"라고 물었지만 해당 학생은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이는 우크라이나 거주 헝가리계 우크라이나인만의 문제는 아니다. 국외 거주 헝가리인의 대부분은 해당 국가의 언어를 배우지 않고 헝가리어만 구사하며 똘똘 뭉치는 경향이 있다. 단적으로 슬로바키아 남부에 거주하는 헝가리인 공동체 대부분이 슬로바키아어를 거의 구사하지 않고 헝가리어만 구사할 줄 알아 슬로바키아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 [7] 비슷하게 루마니아계 우크라이나인이 집중거주하는 체르니우치주도 1,896달러에 불과하다. [8] 웃긴건 헝가리는 나토 훈련은 잘만 참여하고 있다. #. 결국 우크라이나를 돕기 싫다는 건데 이런 헝가리의 반 우크라이나 정서는 오르반의 개인적인 신념과 관련이 있다. #. 기사를 요약하자면 헝가리는 친러도, 친우크라이나도 아니지만 현재 우크라이나와 서먹서먹하고 러시아와 가깝게 보이는 이유에는 오르반의 반서구적 수구주의 성향과 반서구주의의 정점에 있는 푸틴에 대한 개인적인 호감, 포로셴코 정부 시절의 헝가리어 사용 제한, 러시아의 싼 에너지 자원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 [9] 헝가리어로는 문카치 성(Munkácsi vár). 라코치 페렌츠 2세와 어머니 즈리니 일로너가 합스부르크 제국군에게 맞서 3년 동안 저항했던 성이다. [10] 2008년 양국 관계 개선을 위해 세워졌다.